김형국의 미학산책 〈2〉 한일 우의의 다리 후지모토 다쿠미 이야기 : 월간조선

지인이 전해 준 팸플릿을 보았다. 2016년 3월, 도쿄 시부야 소재 ‘갤러리 톰(Tom)’에서 열린 〈일본 속의 백제촌〉이란 사진전이었다. 낱장 팸플릿인데 일본 시가현(滋賀縣) 석탑사 소재 3층석탑과 우리 부여 장하리 소재 3층석탑 두 사진이 장식했다.

꼭 닮았다. 한 석공의 솜씨라 말해도 틀리지 않다고, 아니 틀림없다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백제양식의 일본 전래를 말해 주는 데 이만한 물증도 없지 싶다. 사진작가 후지모토 다쿠미(藤本巧·1949~)가 한일문화의 근친성(近親性)을 보여주려는 전시였다.

석탑사의 것이 백제에서 전래한 내력은 일본의 ‘국민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1923~1996)가 잘 정리해 놓았다. 막부라는 쇄국의 구체제가 개국의 메이지(明治) 시대로 크게 피 흘리지 않고 바뀔 수 있게 다리를 놓았던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의 일대기를 펴내서 크게 유명세를 탔던 그가 1971년, 한국을 다녀간 뒤 적었던 《한(韓)나라 기행》(1998)이 그 출처.

백제 도래인의 탑

부여 장하리 삼층석, 보물 제 184호(사진: 후지모토 다쿠미).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나제(羅濟)싸움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지상건축물은 오직 하나. ‘정림사지(定林寺址) 석탑’이었다. 파괴의 회오리 속에서도 당나라 소정방(蘇定方·592~667)이 그 탑 하나만 남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저 석탑을 없애지 말라! 탑에 비문을 새기겠다”고. 제1층 석면에 ‘내가 백제를 멸했다’란 말을 새겨 그의 전승기념비로 만들었고 그래서 오랫동안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렸다.

삼국통일을 도왔던 당나라 주력 군대가 돌아가자 백제 유민들이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 장수 귀실복신(鬼室福信·?~663)은 백제 30대 무왕의 조카인데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로 도처에서 군사를 일으켜 나당연합군을 괴롭혔다. 그 사이 일본에 피신해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장(豊璋)을 옹립해서 백제를 부활시키려 했는데, 돌아온 풍장이 그만 귀실복신을 죽여 버렸다. 공(功)이 임금을 앞서는 자는 죽기 마련이란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일본 시가현 석가탑(사진: 후지모토 다쿠미).

이 지경에서 백제 유민들이 대거 일본 혼슈(本州)의 중부에 자리한 비와(琵琶)호수를 둘러싼 지금의 시가현 일대로도 몰려들었다. 665년엔 남녀 400인이, 668년엔 700인이 건너왔다. 거기 오미(近江) 땅을 개척하고 ‘석탑사’ 절도 세웠다. 부근에 복신의 아들이거나 조카로 추정되는 귀실집사(鬼室集斯)의 묘가 있다. 백제 씨족들이 ‘귀실왕’이라 불렀던 이다.

후지모토 다쿠미가 찍어 소개한 일본의 석탑사 석탑은 7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니 백제 유민이 그곳에 정착한 바로 그 직후였다. 반면, 부여 장하리 탑(보물 제184호)은 고려시대(918~1392) 조성이라 한다. 이 탑에 대한 우리 쪽 설명인즉 “얇고 평박한 지붕돌과 2단으로 된 지붕 받침돌, 1층 탑신의 네 모서리 기둥을 따로 만들고 내부에 판석을 넣어 결구시킨 방식은 정림사지석탑과 같다”는 것. 그렇다면 통일신라를 지나 고려왕조 치세까지 300~400년이 족히 흘렀음에도 백제의 석탑 조성 코드, 거기에 담긴 옛 백제의 문화 정체성이 끈질기게 이어졌다는 말이었다. 이어진 세월이 어찌 그뿐이겠는가. 우리 돌 조각판에서 지금도 일급 석공은 대부분 전남 등지 서해안 출신이다. 백제쪽 출신이란 말이다.

이름대로 살아왔다

일제시대에 산림기사로 조선에 왔다가 백자 등 조선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된 아사카와 다쿠미.

후지모토 다쿠미의 한국 탐색 연조는 꽤 오래다. 1970년 8월에 한국 땅에 처음 발을 딛고서 시작한 일. 지난날의 지한(知韓) 일본인들이 사랑했던 한국문화의 옛 흔적과 현대 변모를 찾아서였다. 그 사이 80여 차례 한국을 찾았다.

1970~80년대 한국 풍물을 지속적으로 담아 낸 집념의 성과물은 누구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탐낼 만했다. 2011년에 약 5만점을 기꺼이 기증하자 그 기념 전시회(〈7080, 지나간 우리의 일상〉, 2012년 8월22일~10월1일)도 열렸다. 그 사이 책으로 또는 잡지 지면으로 소개해 왔던 사진 성과물이 많았는데, 최근에도 일본(《기억 가운데의 사진일기, 1970: 藤本巧 사진집》, Sodosha, 2014)과 한국(《내 마음속의 한국》, 눈빛, 2016)에서 사진집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일본인이 한국을 포함해서 이웃 나라 문화에 대한 궁구 열의는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 그런 개연성 속에서도 후지모토의 내력은 아주 특별했다. 한국문화의 원형질과 그 변용에 대한 탐구와 현창이 바로 당신 아버지의 바람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出雲)시 한 신사(神社) 제사장 집안에서 난 아버지는 일제 때 이 땅의 민예품에 대한 책을 처음 펴냈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를 읽고 무척이나 흠모했단다. 그래서 아들이 나면 꼭 그를 따라 이름 짓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할아버지가 그랬듯 목공예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친척이 꾸리던 안료(顔料)가게에서 일하면서 오사카에 살고 있다 한다. 열한 살이나 아래인 남동생은 어머니가 대신 이름을 지었다니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꿈은 장남 다쿠미 ‘한정’이었던 셈이다.

누구 말대로 아인슈타인 아들이 머리가 좋으리라는 보장이 없듯, 바란다고 해서 후지모토 다쿠미가 장차 그 기대의 인물로 자랄지는 그 부모도 모를 일. 다행스럽게도 후지모토 부자는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는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되었다.

기실, 자식의 이름에 부모 자리의 꿈을 담고 싶기는 단연 한민족의 정서가 아니었나 싶다. 한국 역사 천년의 인물을 생각할 때마다 맨 먼저 손꼽히는 이는 충무공이겠는데, 그 부모가 당신 아들들이 요임금, 순임금 등에 버금가는 어진 신하들이 되라는 염원을 담아 셋째 아들을 순신(舜臣)이라 지었다. 그리하여 ‘불멸의 이름’이 되었으니 이름에 실었던 부모의 기대 실현이 이 이상 더 극적일 수 없었다.

아사카와 다쿠미

서울 망우리묘지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소.

그렇다면 이 시대 후지모토 다쿠미가 닮으려던 ‘원조(元祖)’ 다쿠미는 누구인가. 1913년 일본 초등학교 교사로 조선에 왔던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타가(淺川伯敎·1884~1964)에 이어 원조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근무 산림기사로 1914년에 조선의 민둥산을 푸르게 하겠다는 각오를 갖고 이 땅에 왔다. 조각가 지망생이기도 했던 형 노리타가가 조선 도자에 심취하자 동생도 함께 그리고 단박에 조선의 기층문화, 특히 민예품에 매료되었다. 이 연장으로 조선말도 배웠고 입성도 조선옷 차림을 고집했다.

다시 일본에 돌아갔던 길에 노리타가가 민예론를 주창하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를 만나 그에게 조선백자 한 점을 선물했다. 그 아름다움에 감동한 야나기는 한반도 여행을 마음먹고는 1916년 처음으로 조선에 왔다. 그때 다쿠미 집에 묵으면서 그의 안목을 존경의 마음으로 배웠다. 나중에 책(《조선의 소반》, 1929; 《조선도자명고》, 1931)도 펴낼 안목이었으니 그 경지는 도저(到底)했을 것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이 빛을 보게 된 계기는, 일본의 전통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繪)의 아름다움이 프랑스 인상주의파 화가들의 안목으로 세계적 사랑이 되었던 것처럼, 바로 선각(先覺) 일본인들의 안목(아사카와 노리타가, 《李朝》, 도쿄 平凡社, 1965)에서 비롯되었다

초행은 부자가 함께

후지모토 다쿠미는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대로 평생 한국의 미(美)를 사진에 담아 왔다(사진: 善雨 Sun-woo).

2세 후지모토 다쿠미가 1970년에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아버지하고 동행한 것은 ‘예정된 조화’였다. 먼저 망우리로 가서 한국의 흙 한 주먹이 되고 만 원조 다쿠미의 묘소를 성묘했다. 그리고 이 땅의 도자를 높이 받들던 야나기, 20세기 일본 도예의 상징 하마다 쇼지(浜田庄司·1894~1978) 등의 일행이 1936년에 찾았던 영주·안동·해인사·부산 등지를 따라가는 사진 순례에 나섰다.

요즘도 한 해에 서너 번 일주일씩 머물며 한국을 찍고 있다. 학생시절에 영화 세계를 동경한 나머지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던 후지모토 다쿠미는 독학으로 사진기술을 공부해서 사진가가 되었다. 한때 영화를 동경했음의 잔향(殘響)인지 자신의 사진작업 스타일은 스토리를 만드는 방식이라 한다. 사진 한 장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장으로 말하는 방식이다.

20세기 초반에 식민·종속의 앙금 탓으로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상호 인식은 걸핏하면 매도와 멸시가 난무한다. 한민족을 “어쩔 수 없는 존재”라며 “조센진 시오(仕樣)가 나이”라 깔보았고, 우리 또한 반일(反日)감정으로 마음의 벽을 쌓아 올렸다. 내가 아는 반일감정의 이론가 한 분은 소설가 박경리였다. 그런 입장의 책도 냈다(《일본산고(散考):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2013). 그런 그이인데도 일본사람 가운데 드물게 인류애의 화신으로 맑은 샘물 같은 ‘청류(淸流)의 인사’가 있다고도 했다.

이 나라 서화 애호가라면 한결같이 기억하고 존경하는 일본인이 있다. 〈세한도(歲寒圖)〉를 이 땅으로 돌려준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1786~1856) 연구의 일인자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隣·1879~1948)이다. 경성제대 교수였던 그가 1943년 10월에 일본으로 돌아가는데 당연히 애장품을 함께 갖고 갔다. 이 사실을 안 손재형(孫在馨·1903~1981) 서예가가 미군 폭격기 공습이 계속되던 도쿄의 그의 집을 찾아 무려 석 달이나 매일처럼 설득의 문안을 드리자 감복한 그는 그림을 그냥 내주며 하는 말이 “잘 보관해 달라!” 단 한마디뿐이었다.

돌아온 극품(極品)을 보곤 기미독립선언문 서명 33인 가운데 한 분이자 당대의 감식안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감격했다. “황천에 갔던 친구를 다시 일으켜 악수하는 심정”이라고. 날로 치열해지던 전쟁 열기 속에서 1945년 3월 10일, B-29 폭격기 300대가 네이팜탄으로 공습을 가하자 목조 건물로 가득 찬 전 시가지가 불바다가 되어 버렸던 저 단말마의 ‘도쿄대공습’ 때 지카시 집도 불탔단다. 그러나 천운(天運)으로 예술 사랑의 지극한 마음이 천하 명품의 회진(灰塵)을 막았다. 맑은 샘물 같은 사람들의 지성(至誠)이 있었기에 있을 법한 기적이 그 아니었던가.

선린의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서울중학을 졸업하고 도쿄대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했다는 지카시의 아들 아키나오(藤塚明直·1912~2006)는 집에 남아 있던 20여 점의 미공개 편지를 포함해서 추사 자료를 몽땅 경기도 과천시에 기증해 주었다. 그걸 갖고 2006년 거기서 김정희 타계 150주년 추모의 〈추사글씨귀향전〉을 열었다.

기증에 즈음, 아들의 말이 바로 감동이었다. “기뻐할 사람이 물건을 가져야 한다”고.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그 마음가짐을 ‘고등(高等)교류’라 일컫는 말솜씨가 고마웠다. 저의(底意)가 난무하는 정치·외교판의 오감이 ‘중속(衆俗)교류’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었다.

사랑이라 할지 믿음이라 할지, 맑고 따뜻한 마음이 사람들을 잇게 하고 세상을 잇게 한다. 〈세한도〉는 그 발문의 글씨와 내용도 천하명품인 것. 말인즉 ‘찬바람 절후를 지나 보아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歲寒然後松柏後凋)’을 알 듯, 풍파를 겪어 보아야 사람 인심을 안다는 뜻의 논어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을 되짚으면 맑고 참된 사람의 마음 씀씀이는 언젠가 야박해진 사람 인심, 세상 인심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을까?⊙

상단주메뉴

김형국의 미학산책 〈2〉 한일 우의의 다리 후지모토 다쿠미 이야기

0건

사이트 이용안내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