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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사 비록

김재규와 보안사와 10·26

전 보안사령관 김재규, 8년 뒤 서빙고의 피의자 신세로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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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규 보안사령관, 3선 개헌 당시 정구영 설득하러 갔다가 차지철과 다퉈
⊙ 전두환, 보안사령관 취임 후 합동수사본부 규정 등 마련
⊙ “김재규를 정중히 모시라는 얘기만 들었지, 그가 시해사건의 범인이니 수사하라는
    지시는 받지 못했다” (허화평)
⊙ 보안사,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민간정보수집권 박탈당했다가 10·26 후 중정
    감독하는 위치로
10·26사태 현장검증을 하는 김재규. 보안사령관을 지낸 그는 대통령 시해범으로 보안사에서 수사를 받았다.
  1961년 5·16 후 중앙정보부(후에 국가안전기획부 → 국가정보원)가 설립됐다. 이후 중앙정보부와 방첩부대(이후 육군보안사령부 → 국군보안사령부 → 국군기무사령부)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양대 정보기구, 아니 권력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국민들에게는 ‘남산’으로 지칭되던 중앙정보부가 무섭게 각인되었지만 대통령에게는 보안사령부도 중앙정보부 못지않게 중요한 기관이었다. 보안사 출신들은 그러한 힘의 원천을 김창룡 특무부대장 이후 형성된 ‘대통령에 대한 절대 충성’의 전통에서 찾는다.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허화평(許和平) 전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중앙정보부는 정치·사회 등 모든 분야를 다 다루다 보니, 정보 장사를 한다고 할까, 일종의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경찰도 비슷하다. 군복을 입은 보안사는 통수권자만 쳐다본다. 심플하다. 이런 전통을 만든 사람이 김창룡 특무부대장이다.”
 
  보안사와 중앙정보부라는 양대 정보기관장을 다 지낸 사람이 있다. 김재규(金載圭)다. 김재규는 1968~1971년 제16대 육군보안사령관을, 1976~1979년 제8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전두환은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있다가 1980년 4~7월 중앙정보부장 서리(署理)를 겸직했다. 법적으로 현역 군인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편법을 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다 지낸 사람은 김재규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보안사령관 김재규
 
보안사령관 시절의 김재규.
  김재규는 1968년 2월 육군방첩부대장으로 취임했다. 육사 2기인 그는 고향이 경북 선산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보다 9살 어린 동향 출신의 김재규를 아꼈다. 김재규가 부대장으로 취임한 지 7개월 후인 그해 9월, 육군방첩부대는 육군보안사령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공군의 방첩부대도 보안부대로 이름을 변경했다.
 
  김재규는 부임한 후 전용 식당을 따로 만들고 사령관실로 통하는 별도의 통로도 만들었다. 김창룡 특무대장 시절, 부대장이 부대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전통을 기억했던 고참들은 김재규 사령관의 처사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고 후일 10·26사태가 그때 일을 떠올렸다고 한다.
 
  김재규 사령관은 단순한 보안사령관이 아니었다. 3선 개헌 등 정치적 고비에서는 박 대통령의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초대 공화당 총재를 지낸 정구영(鄭求瑛)은 3선 개헌에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1969년 8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충북 옥천 고향집에 머무르고 있던 정구영에게 특사를 보냈다. 차지철(車智澈) 의원이었다. 5·16 주체 중의 하나였던 그는 당시 34세의 나이로 국회 외무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차제에 개헌에 대해 확실한 찬반의 태도를 취해 달라. 개헌에 찬성할 수 없다면 당의 결속과 통솔을 위해 탈당 권고가 불가피하다’는 내용의 박정희 대통령 친서를 정구영에게 전달한 차지철은 그에 대한 답변을 달라고 졸랐다. 밤새 차지철에게 시달린 정구영은 차지철에게 끌려오다시피 서울 북아현동 집으로 올라왔다. 다음 날 오후에도 차지철은 아현동 집을 찾아가 정구영에게 “찬반 태도를 밝혀 달라”고 졸랐다. 개헌 반대파인 예춘호(芮春浩) 의원은 사랑방 문을 열어 놓고 두 사람의 얘기를 들었다.
 
 
  김재규와 차지철의 다툼
 
  차지철이 1시간쯤 그러고 있을 때 김재규 방첩부대장이 찾아왔다. 김재규가 왔다는 말에도 차지철은 “방첩부대장은 다른 방에서 기다리게 하라”고 했다. 그러고 차지철은 한참을 더 정구영에게 답변을 요구하다가 나갔다.
 
  김재규는 정구영과 인연이 깊었다. 정구영의 4남 정만영이 육사 2기 동기로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정만영은 여순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군복을 벗었지만, 이후에도 김재규는 정구영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예춘호 전 의원은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재야(在野)의 거목이던 정구영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추천한 사람이 김재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김재규가 정구영을 찾아온 것도 3선 개헌에 찬성해 달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김재규는 그해 6월에도 정구영을 찾아와 5시간 가까이 개헌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정구영은 “장기 집권을 금하는 헌법정신, 부패 청산, 이것 때문에 3선 개헌은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재규는 “개헌이 안 되면 어떤 비상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면서 정구영에게 개헌에 찬성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얼마 후 김재규가 방에서 나왔다. 예춘호가 김재규를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김재규가 그때까지 가지 않고 있던 차지철에게 뭐라고 야단을 치고 있었다. 아마 차지철이 정구영에게 이틀 동안 계속해서 무례(無禮)를 범한 데 대해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10·26사태가 발생했을 때, 예춘호는 불현듯 10년 전 일이 떠오르면서 ‘김재규와 차지철의 불행한 관계는 그때 싹튼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후 김재규는 3군단장을 끝으로 육군중장으로 예편, 유정회 국회의원을 하다가 1973년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신직수였다.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을 지낸 자기가 군 법무관 출신인 신직수 아래서 차장을 하는 것을 자존심 상해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1974년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보안사, 민간정보수집 금지당해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무렵 육군보안사령관은 진종채(재임 1975~1979년) 중장이었다. 1978년 봄 보안사는 군(軍) 관련 정보를 제외한 민간정보 수집활동을 중단당했다. 이는 김기춘(金琪春·법무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국장의 작품이라고 한다. 보안사에 근무하던 이대인씨는 “1978년 봄 어느날 출근했더니, ‘오늘 아침 9시부터 일반정보(행정부·공공기관 및 민간 관련 정보) 활동을 일체 중단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정보의 질(質)에서 중앙정보부가 번번이 보안사에 밀리자 중앙정보부가 대통령에게 보안사는 군 정보기관이라는 이유로 그런 건의를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한창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허화평 전 의원은 “진종채 사령관이 조용히 일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김재규 부장과 차지철 실장 사이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1979년 3월 제1사단장을 지낸 전두환 소장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를 천거한 것은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그가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드는 차지철 경호실장을 견제해 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전임자들이 중장이었던 것에 비하면 계급이 낮았지만,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장군이었다. 이대인씨는 “전 장군이 사령관으로 오게 되자 모두 ‘실세(實勢)가 온다’면서 잃어버린 일반정보 업무가 곧 부활될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통령 시절, “진종채 전임 사령관이 나가면서 나보고 보고서를 내지 말라고 하더라. 보고서를 내면 죽는다고 하면서 …”라고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보고서가 올라오면 그걸 보고서에서 거론된 사람에게 건네 주곤 했다. 일종의 ‘분할통치’였다. 대통령에게 독대(獨對)해서 보고를 해야 할 보안사령관이 보고서를 내면 죽는다고 몸을 사려야 할 정도로 당시 보안사령부는 위축돼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 정비
 
서울 소격동에 있던 옛 보안사령부 건물. 대통령이 이용하는 국군서울지구병원도 같은 건물에 있었다.
  전두환 사령관은 부대 정비에 나섰다. 비서실장으로는 전방부대에 있던 허화평 대령을 데려왔다. 그는 강창성 사령관 시절 서울지구보안부대 대공(對共)과장을 하다가 윤필용 사건 이후 부산 피복창으로 좌천되기도 했었다.
 
  허화평 전 의원은 “전두환 사령관은 부임 직후 제대할 날만 기다리면서 일을 하지 않던 대령·중령급 장교들을 내보내고 전방에서 중대장을 마친 육사 출신의 빳빳한 인력들을 보안사로 데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전두환 사령관과 김재규 정보부장 사이는 원만했다고 기억했다. 전두환 사령관이 선배들에게 붙임성 있게 구는 성격이었고 김재규도 전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장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딪칠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보안사의 일반정보활동도 부활했다. 허화평 전 의원은 “전두환 사령관이 박 대통령에게 ‘일반정보활동을 해야겠습니다’라고 했고 박 대통령도 바로 오케이 했다”고 했다. 하지만 일선에서 정보수집활동을 했던 준위급 실무자들은 “10·26 이후 합동수사본부가 만들어지면서 일반정보활동이 완전히 회복됐다”고 말했다.
 
  전두환 사령관 부임 후 시국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5월에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됐고, 8월에는 YH사태가 발생했다. 10월 들어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부마사태 등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그 와중에 시국대처 방안을 놓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권부(權府) 내의 갈등 상황에 대해 보고하기로 결심했다. 1987년 4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측근들과의 자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도 얘기했어.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우군(友軍)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했어. 망하려니 그런가 봐. 그래서 내가 10월 27일쯤 박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어.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연습도 하고 보고 준비를 다 했었는데 박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결국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보고서는 허화평 실장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말을 아끼면서도 “차지철과 김재규 문제 등 당시 권부의 문제들에 대해 지적하는 내용들이었다”고 말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의 총격사건이 발생한 후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이 부상당한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소격동 국군서울지구병원에 들이닥친 것은 저녁 7시 55분경이었다. 군의관들이 달려왔다. 김 실장은 “이 사람 꼭 살려야 돼!”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박정희 대통령은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숨을 거둔 뒤였다. 김계원 실장은 “보안을 유지하라. 출입을 금지시켜라”라고 한 후 택시를 잡아타고 청와대로 갔다. 대통령의 시신 곁에는 궁정동 안가 경비원으로 총격사건에 가담했던 유성옥・서영준이 남았다.
 
  와이셔츠 바람에 신발도 짝짝이로 신은 김계원 실장은 청와대로 들어서자 마자 본관 경호책임자인 함수용 경호과장에게 “이재전 경호실 차장을 빨리 찾아 들어오라고 하라”고 지시했다. 자기 방으로 올라온 김 실장은 따라온 경호원들에게 “총리, 국방부 장관,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육군참모총장을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하라”고 했다. 이때 건장한 체구의 경호원이 김 실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전두환 장군의 동생입니다. 전경환입니다.”
 
 
  “코드 원인가?”
 
  자리에서 물러나온 전경환은 보안사로 전화를 걸었다. 저녁 8시 경 전두환 사령관은 차량으로 이동 중에 무전으로 “사령부로 전화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부관이 인근 가게에 가서 사령부로 전화를 걸었더니 “청와대 전경환씨가 사령관님을 찾아서 급히 전화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했다. 전경환에게 전화를 했지만 얼른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사령관 비서실에서도 노재현 국방장관으로부터 빨리 육군본부로 나오라고 했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전 사령관은 부관을 시켜 경호실장, 경호실 상황실장 정동호 준장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지금 바쁘다”는 상황실 관계자로부터 “안의 일이다”라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전 사령관은 9시쯤 육군본부 벙커에 나타났다.
 
  보안사는 국군서울지구병원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다. 무엇인가 변고가 발생했고 서울지구병원에 김계원 실장이 VIP로 보이는 인사의 시신을 모셨다는 소식을 접한 보안사에서는 우국일 참모장, 당직사령, 그리고 전두환 사령관이 잇달아 서울지구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김병수 병원장은 침대 위에 뉘여 있는 시신을 보기는 했지만 그게 박 대통령의 시신이라는 것은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전 사령관이 물었다.
 
  “누구냐? 각하야?”
 
  “아닙니다.”
 
  “실장인가?”
 
  “아닙니다. 아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병수 원장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김 실장은 “정중히 모시라”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김 원장이 시신을 국군수도통합병원 영안실로 모시자고 했으나 김 실장은 “청와대 의무실로 모시라”고 했다. 대통령이 쓰는 청와대 의무실로 시신을 옮기라는 말에 김 원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VIP’가 모셔져 있는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는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 경비원 유성옥·서영준이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권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시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했다. 김 원장은 “흉부의 상처 처리 상황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했다. 중정 경비원들은 와이셔츠를 걷어 시신의 얼굴을 가렸다. 와이셔츠를 걷어 올리자 아랫배에 희끗희끗한 반점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김 원장은 그 시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몇 해 전 박정희 대통령은 저도 별장에서 그 반점을 보여주면서, “김 박사, 이것 좀 치료 안 해 줄래?”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었다.
 
  김 원장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유성옥이 따라붙었다. 김 원장이 담배를 꺼내 무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었다. 우 준장이 말했다.
 
  “여러 가지 어렵고 위협적인 상황에 있는 것 같은데, 답은 길게 하지 말고 듣기만 하되, ‘예스’나 ‘노’로만 답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운명하셨나?”
 
  “예.”
 
  “실장이야?”
 
  “아닙니다.”
 
  “그럼 코드 원(Code 1)인가?”
 
  “예.”
 
 
  김재규 체포
 
  그날 밤 11시 반 경, 김계원 비서실장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고 실토하면서 “권총을 갖고 있으니 조심해서 체포하라”고 말했다. 정 총장은 김진기 육군헌병감을 불러 “김재규를 체포해서 보안사령관에게 인계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그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러 “김재규의 신병(身柄)을 인수해 수사하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 허화평 당시 보안사 비서실장의 증언은 다르다. 그는 “우리 보안사는 정 총장으로부터 김재규를 ‘정중히 모시라’는 지시만 받았지, 시해사건 범인으로 수사하라는 지시는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김진기 헌병감은 보안사 소속 오일랑 중령과 국방부 헌병중대장 이기덕 대위를 데리고 체포작전에 나섰다. 김진기 헌병감은 김재규를 국방부 후정(後庭)으로 유인한 후 무장을 해제하고 체포했다. 차는 보안사 정동분실(지금의 조선일보 본사 자리)로 향했다. 차 안에서 김재규는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세상이 달라졌어. 각하는 돌아가셨어. 지금 수도통합병원에 계셔”라고 말했다.
 
  보안사 정동분실 위치를 몰랐던 운전병은 분실을 지나쳐 그 옆 중앙정보부 분실(현 사랑의열매 자리) 앞에 차를 댔다. 중정 분실에서 경비원이 나오는 걸 본 김재규는 반색을 하며 “아, 여긴 우리 분실인데…”라고 했다.
 
  기겁을 한 오 중령은 서둘러 보안사 분실로 차를 돌리게 했다.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이 김재규의 신병을 넘겨받았다. “정중히 모시라”는 말을 전해 들은 허 대령은 김재규를 2층으로 모셨다. 신동기 수사관이 김재규를 맡았다. 허 대령은 1층에 남았다.
 
 
  서빙고 분실
 
10·26사태 후 김재규를 조사한 보안사 서빙고분실.
  그런데 잠시 후 신 수사관이 1층으로 내려왔다. “실장님, 김재규가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각하가 돌아가셨다, 세상이 달라졌다, 이런 소리를 합니다. 아무래도 김재규가 범인인 것 같습니다.”
 
  허화평 실장은 바로 전두환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김재규가 범인인 것 같습니다. 이건 정동분실이 아니라 서빙고분실에서 다루어야 할 일입니다.”
 
  서빙고분실에 온 후 김재규는 낡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그는 여전히 큰소리를 쳤다.
 
  “내가 각하를 살해했다. 이제 세상은 다 끝났다. 수사관, 자네들도 살 궁리를 해야 해.” “현장에는 정승화 총장도 함께 있었고, 같이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갔었다.”
 
  이런 소리에 수사관들도 위축이 됐다. 이학봉 수사과장은 “우리의 손에 지금 국가의 흥망이 달렸다. 목숨을 걸고 수사를 철저히 하여 김재규의 공모자들을 색출해야 한다”며 수사관들을 독려했다. 김재규를 정동분실에서 데려온 신동기 수사관이 수사를 맡았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신 수사관은 안면몰수하고 거칠게 나갔다.
 
  “어이, 김재규! 솔직히 이야기하자. 어느 군부대를 몰고 올 거야? 우리도 알아야 손 들고 항복할 것 아닌가? 어느 군단과 결탁했어?”
 
  김재규는 “없습니다. 단독으로 시해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재규가 대답할 때마다 주먹이 날아갔다. 김재규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쓰러지면 바로 일어나 의자에 다시 앉았다. 30여 분간 그런 후에 이학봉 중령은 김재규와 결탁한 부대는 없다고 판단했다.
 
  국방부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그동안 들어온 보고를 적은 메모를 보여주면서 “김재규가 압송차 안에서 횡설수설한 것으로 보아 범인이 틀림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합동수사본부 탄생
 
1979년 11월 6일 10·26사태 전모에 대해 발표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계엄법 시행규칙에 따른 ‘충무계획 1200’에는 합동수사본부를 둘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전두환 사령관은 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이 규정을 정비하도록 지시한 바 있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이에 따라 국군보안사령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됐다. 합동수사본부는 군은 물론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등 모든 정보수사기관을 조정·감독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 사령관이 제일 먼저 지시한 것은 “정보부 기능을 중지시키라”는 것이었다. 국·실장급 간부들이 줄줄이 합동수사본부로 잡혀와 김재규와 범행을 모의하지나 않았는지 조사를 받았다.
 
  1979년 10월 28일 오후 4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국방부에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관 직속 기구였다. 하지만 합동수사본부에서는 김계원 비서실장은 물론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까지도 김재규와 공범으로 보고 있었다. 허화평 당시 비서실장은 “10·26사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쿠데타 음모”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건 현장에 김재규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러다 놓고 왔다 갔다 한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배 기자 같으면, 사장이 불러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는데, 그 옆에 친구를 불러다 놓고 왔다 갔다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얘기인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김계원이 청와대, 정승화가 군부를 장악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쿠데타를 한 것이다.”
 
  12·12사태의 씨앗은 이렇게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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