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김형국의 미학산책 〈1〉 탄생 백년 최순우의 실사구시 미학

글 : 김형국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호주가였던 최순우와 장욱진, 잔을 내려놓지 않는 ‘공정대 술판’ 즐겨
⊙ 최순우, 장욱진에게 일거리 만들어주려 〈까치〉 그리게 해
⊙ 장욱진, 최순우가 선물한 조선시대 무쇠촛대 평생 간직

김형국
1941년생. 서울대 사회학과·행정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 도시계획학 박사. /
서울대 교수, 서울대 환경대학원장, 대통령직속 녹색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역임.
현 가나문화재단 이사장
최순우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에서 예찬했던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서 바라본 전경.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이 한마디는 고도성장 덕분에 현대 한국 사람의 삶에 기름기가 돌면서 퍼져 나간 ‘내 것’ 사랑가의 제창(齊唱)을 이끈 앞소리였다. 이 앞소리가 바야흐로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84)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산문집(1994) 제목으로 꾸며지면서 한류 사랑의 절창(絶唱)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배흘림기둥을 보지 않고선 전통미술의 정수를 말할 수 없게도 되었다.
 
  절창의 구절은 산문의 첫 단락에 나온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묵은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내 것은 내 땅이 먼저일 것이다. 무량수전 바로 앞의 안양루 누각에서 바라본 전경은 절경이다. 추사도 적었던 횡액(橫額) 〈계산무진(溪山無盡)〉 곧 저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높이를 계속 낮추는 산들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계곡이 무궁무진으로 펼쳐진다는 글뜻의 실경을 직접 체험하려면 부석사 안양루 옆에 서 보아야 한다. 누각에는 진작 감격했던 김삿갓의 시고도 걸려 있다. 〈이 좋은 경치를 언제 다시 와 볼꼬!〉
 
  생전에 어울렸던 이들이 지녔던 최 관장의 인상은 한결같았다. “몸에 밴 한국미의 발현”이라고(이경성,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1998). 이 말대로 한평생을 한국미학을 찾아 헤맸던 분의 배움과 감성의 절정이 ‘배흘림기둥’이 아니었나 싶다. 건축에서 배흘림기둥은 우리만의 방식이 아니다. 그리스시대 이래로 엔타시스(entasis)라 해서 신전 건축 등에 많이 쓰였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 미학의 중요 실마리를 심증(心證)한 이가 바로 혜곡이었다. 배흘림기둥의 실체는 미묘하다. 기둥 선의 흐름은 물리적으론, 곧 사실상으론 곡선이다. 그래서 배불뚝이고 배흘림이다. 한데 멀리서 지그시 바라보면 당당한 직선이다. 착시현상으로 말미암아 기둥의 구실인 떠받치는 힘의 강건함을 물증하듯 튼실한 진실성의 직선으로 보인다. ‘사실에서 진실을 찾는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말뜻처럼, 사실의 곡선에서 진실의 직선이 느껴지는 배흘림기둥도 혜곡 미학의 전거(典據) 하나가 되었다.
 
 
  사람이 아름다움을 빚는다
 
덕소화실로 나들이한 최순우와 화실 주인 장욱진. 1960년대 말.
  혜곡의 탐미가 조형물을 넘어 아름다움을 빚어 내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미쳤던 것은 당연했다. 전심전력으로 창작에 매진하는 이들을 직접적으로 격려하는 한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 미덕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제일의 재력가가 미술관을 꾸미려 할 때 당신의 미학 기준에 든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도록 말품과 발품을 아끼지 않았다.
 
  서양화가 장욱진의 대표작 하나인 〈까치〉(1958)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된 데는 혜곡의 미술가 사랑이 빚어낸 오발탄 같은 결실이었다. 박물관 사람 최순우와 화가 장욱진이 서로 사람을 알아본 것은 장인 이병도(李丙燾) 역사학자의 추천으로 장욱진이 호구책으로 중앙박물관 전시과에 임시 일자리를 얻고부터였다.
 
  최순우와 장욱진은 대단한 호주(豪酒)였다. 1946년, 그때 38선 이남 땅이던 개성으로 박물관 직원이 대거 발굴 조사하러 나갔다. 조사 작업 뒤는 밥자리인지 술자리인지가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 가운데 한분이었던 김원룡(金元龍, 1922~93) 전 서울대 교수로부터 회고담을 직접 들었다. 술판은 ‘공정대 술판’이었다는 것. 공정대 술판이라니, 무슨 말인가. 공정대는 낙하산을 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진면목이듯, 남이 권하는 술잔을 내민 손으로 받아들자마자 술상 위에 잠시 내려놓는 법도 없이 그대로 단숨에 마시고는 곧장 상대방에게 되돌려주는 식으로 권주하다 보면 술잔이 술상 위에서 마치 낙하산처럼 계속 붕붕 떠다니는 형국이 되었다는 것.
 
  술꾼들은 술자리에서 서로를 알아본다는 말도 있다. 최순우와 장욱진 두 사람 사이는 자별했다. 천생(天生) 화가인 장욱진에겐 박물관 전시과 일자리가 그리 몸에 익지 않았다. 그렇게 일은 별로인데 술은 잘도 마신다는 뒷소리가 오갔다지만, 혜곡은 늘 따뜻한 눈길이었다.
 
  박물관에서 3년 일하다 그만둔 장욱진은 6·25 동란이 끝난 얼마 뒤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되었다. 교육 체질이 아니라며 1960년에 그마저 사직하자 아내인 진진묘(眞眞妙 李舜卿, 1920~ )가 그때 1963년, 아주 벽촌이던 한강가 덕소에다 작은 화실을 장만해 주었다. 장욱진으로선 혼자 자취하면서 창작에 매달려 보겠다는 용맹정진의 출정이었다.
 
 
  고행의 화가를 도우려고
 
  하지만 가족들의 화가 뒷바라지가 고행의 연속임을 혜곡은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옛정을 좇아 자주 덕소로 나들이 나왔는데,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골의 암자와 다름없던 그곳 생활상이 여간 마음 아프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잡하나마 화실을 양식으로 짓다 보니 변기가 수세식이었다. 수도가 없으니 어쩔 것인가. 그때 대학생이던 큰아들이 주말이면 서울 명륜동에서 거리가 오십 리나 됨직한 덕소읍 삼패리 화실까지 자전거를 몰고 왔다. 변기에 물 채우는 일이 주간 행사였다.
 
  이를 딱하게 여겼던 혜곡은 마침 1965년 삼성문화재단이 미술관을 꾸미려 하자 장차의 수장품으로 장욱진 그림도 추천하는 한편으로, 창작의 몸부림 끝에 겨우 만들어 낸 작품이 과작이었던지라 항상 가장(家長) 그림을 그냥 부둥켜 안고 있던 가족에게도 그림을 미술관에 좀 넘기라고 설득해야 했다. 혜곡의 복안인즉 그 돈으로 서울 외곽 화실로 오가는 교통편 자가용을 장만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혜곡의 간곡한 제안에 따라 화가는 유화 넉 점을 넘겼다. 얼마 뒤 한 점이 되돌아왔다. 수장 기준에 적합지 않았다는 뜻이었을까. 퇴짜 사실을 안 화가의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미술관에 걸린다 해서 당신의 자존심을 걸고 골랐는데 일이 그 지경에 이르자 그날부터 폭음의 연속이었다. 석 달을 마셨다. 병원 입원으로 겨우 장취(長醉)에서 해방되었다. 자가용을 사라던 돈은 이미 병원비로 날아가 버렸다.
 
  정신을 다잡자 화가의 대응은 단호했다. 딱지 맞았다던 〈까치〉 그림의 국립현대미술관 기증이었다. 당신의 마음에서 이미 떠난 작품이라면서 그게 있을 자리는 공공미술관이라 했다. 덕분에 장욱진 그림으론 내가 처음으로 만나 감상할 수 있었던 작품이 되었다.
 
 
  〈까치〉 그림으로 화가와 왕래하기 시작했다
 
장욱진, 〈까치〉, 1958, 48x36, 캔버스에 유화
  1973년 봄, 어렵사리 미국 유학에서 돌아왔지만 학교 일자리가 처음 약속과 달랐다. 좌절의 심사를 다스린다고 도심을 무료하게 오가던 중 덕수궁 미술관에서 한국근대미술전을 구경했다.
 
  한 점 장욱진을 보고 나는 크게 감격했다. 이전만 해도 좋은 미술은 서양에만 있는 줄로 알았다. 미국정부 장학금 덕분에 뉴욕 등지의 유수 미술관을 찾아 세계적인 작품을 원대로 만난 게 큰 공부요 기쁨이었다. 어지간히 세계미술의 수준이 짐작되었다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쌓은 구안(具眼)으로 우리 것을 바라보자, 특히 장욱진의 경우, 비록 국력이 모자란 탓일 뿐 그림의 진실성에선 세계 일류와 당당히 겨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감동 끝에 그림에 대한 감상문을 화가 가족들에게 보냈다. 이 인연으로 화가가 타계할 때까지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접근성이 주어졌다. 세속의 일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화가와 나눈 왕래가 무척이나 귀하고 소중해서 그의 사후에 그 내력과 내역을 책으로 묶었다. 과분하게도 장욱진 알기에 없어서는 안 될 평전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까치〉 그림의 감명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삼성미술관 건립의 주인장도 나중에 전시장에 걸린 그 그림을 보고는 아차! 했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겠는데, 산하 미술관 책임자를 화가에게 보내 그 그림을 다시 한 점 그려 달라 했다. 그 부탁이 그림의 창작성에 대한 무지의 소치가 엄연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놓친 그림에 대한 애착인가 집착이, 비온 뒤 땅 굳어지듯, 그렇게 지극했음이었다.
 
 
  술주정에도 사람 진면목을 바라보았다
 
최순우가 장욱진에게 선물했던 조선시대 무쇠촛대.
  장욱진의 서울 본거지이자 행동반경은 혜화동 로터리 일대였다. 대취하면 맨발로 횡보했다. 그게 예술적 고뇌의 분출이라고 여긴 사람은 아주 손꼽을 정도였다. 심지어 아직 어렸던 자녀들 눈에도 이상하게 비쳤다.
 
  그런데 혜곡에게 비친 장욱진은 다른 사람이었다. “참으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서 한눈 팔 수 없는 외로운 길을 심신을 불사르듯 살아가는 그 자세야말로 정말 귀한 예술의 터전일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 장욱진은 철학자도 시인도 아니지만 화가가 외곬으로 다다를 수 있는 분명한 인생관과 예술관 그리고 마치 그 어느 신심(信心)의 깊이에도 비길 수 있는 간절하고도 맑은 시심(詩心)과 그 예술에 대한 신념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다.” 주정뱅이 행색의 사실에서 창작의 진실 기미를 읽었던 것. 역시 최순우였다.
 
  혜곡의 고미술은 ‘좋아하는 만큼 보인다’는 믿음에 못지않게 ‘배워 알게 된 만큼 보인다’고도 믿었다. 가까운 애호가들과 어울려 고미술 사랑의 ‘미술당’을 만들어 함께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루는 장욱진을 만났더니 직전에 ‘최순우 모임’에 다녀왔다 했다. 그 출입의 분위기를 묻자 그 아내가 대신 말해 주었다. 집 안에서 편하게 입던 예의 검은 터틀넥 차림으로 나갔는데도 장안의 ‘일류 멋쟁이 여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섹시’하다 했다는 것. 생면부지의 사람이 모인 자리에 나가는 법이 없었던 장욱진도 그렇게 혜곡이 부르면 사양하지 않았다. 그게 고마웠던지 혜곡이 간결하기가 장욱진 그림을 닮았던 무쇠 촛대를 선물하자 타계할 때까지 화가는 그걸 끼고 살았다.
 
  모처럼 화실을 찾았던 장욱진 애호가들은 그림만큼이나 그를 닮은 듯한 촛대에 매료되었다. “명륜동 한옥에서 장 화백이 화실로 쓴다는 유치장처럼 좁은 방, 공간조차 생략하고 있는 듯한 그 공간에는 처음부터 나의 눈길을 잡아끈 한 ‘오브제’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철물 촛대이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순한 그 무쇠 촛대는 그 날씬한 키와 크고 작은 받침 원반의 너비의 균형이 그처럼 우람하고 당당할 수가 없다. 나는 보고 보고 또 보고, 나중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까지 그 촛대를 보았다(최정호, 《생략의 예술, 생략의 인생》, 1981).
 
  혜곡 최순우는 특히 6·25전쟁 때 백척간두의 위험에 놓였던 박물관을 지켜 낸 ‘박물관 사람’이었다. 훨씬 그 이상이었다. 공사(公私) 미술관, 박물관에 자리를 차지할 만한 장차의 문화재를 만들 가능성의 창작가들을 예감하고 이끌고 감싸는 노릇에도 지성을 다했다.
 
  그 지성이 문장에도 그대로 비쳤다. 고미술 사랑의 문자로 그만한 경지의 유례(類例)가 있을 것인가. 누구는 그가 서양 외국어를 모른다고 흉보았다지만, 단비처럼 촉촉한 그의 문장은 외국어 통달보다 더욱 다가가기 어려운 높디높은 경지였다. 다하지 못할 고미술 사랑의 내 작은 발걸음일망정 이나마도 혜곡에게서 글로써 교화 받은 바라 두고두고 고마울 뿐이다. 2016년 올해가 그의 탄생 백년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조회 : 17808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1910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