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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知人之鑑 〈5〉 사람 보는 핵심은 사이비(似而非)를 가려내는 데 있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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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언영색(巧言令色)은, 교언영색 하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과 어질지 못한 사람이
    섞여 있으니 이를 잘 가려내야 한다는 말
⊙ 한(漢)의 제위를 찬탈해 신(新)을 세운 왕망은 교언영색 한 사이비의 대표적인 예
⊙ 정조, 사람 보는 눈 어두워 홍국영 중용했다가 실패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교언영색으로 출세하다가 한나라의 제위를 찬탈한 왕망.
  교언영색(巧言令色)이란 말은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에게 “교언영색이라 하면 뭐부터 떠오릅니까?”라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아첨이요”라고 답한다. 딱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공자 자신도 “나는 임금을 모시는 데 있어 예를 다했는데[盡禮] 사람들은 내가 아첨한다고 여기는구나!”라고 했다.
 
  그러나 교언영색이란 말이 들어 있는 구절을 잘 살펴보면 교언영색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공자는 말했다. “교언영색 하는 사람 중에 (정말로) 어진 사람은 드물다.” 즉 교언영색이 어질지 못한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러면 “교언영색 하는 사람 중에 (정말로) 어진 사람은 드물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대한 오해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자신의 유명한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 교언영색이란 말을 뜻 그대로 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말을 잘 가려서 하고 얼굴빛을 좋게 한다는 뜻이다. 교언영색 하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과 어질지 못한 사람이 섞여 있으니 이를 잘 가려내야 한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교언도 못하고 영색도 못하는 사람은 아예 어질다고 할 수 없고 교언영색 하는 사람 중에 극소수가 진실로 어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맥으로 보면 다산의 이 풀이가 정곡(正鵠)을 찌른 것이다. 《논어》에는 “교언영색 하는 사람 중에 (정말로) 어진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 양화(陽貨)편에 다시 한 번 나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맥이 명확하다. 그 바로 다음에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색[紫]이 붉은색[朱]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고 정(鄭)나라 음악이 아악(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며 말만 잘하는 입이 나라를 뒤집는 것을 미워한다.”
 
  다시 한 번 정약용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붉은색은 정색(正色)으로서 담백하고 자색은 간색(間色)으로서 요염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색을 취하면 이는 붉은색이 자색에 의해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정나라 음악은 간사하고 음란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공자는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용은 하나다. 진짜와, 진짜와 거의 비슷하되 진짜가 아닌 것, 즉 사이비(似而非)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언영색이 안 되는 사람은 아예 아니기[非] 때문에 굳이 살펴볼 필요도 없고 사람을 알아보는 데[知人] 있어 어렵기는 하지만 핵심적인 관건은 교언영색 하는 사람 가운데 정말로 어진 사람과 겉은 비슷한데 실은 아닌 사이비를 가려내는 것이다.
 
 
  향원(鄕原)은 오늘날의 포퓰리스트
 
공자.
  《논어》에 직접 사이비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맹자(孟子)에 따르면 공자는 다른 자리에서 이 말을 사용했다. 《맹자》 진심장구(盡心章句)에 나오는 맹자와 그의 제자 만장(萬章)의 대화를 보자.
 
  맹자가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집 문 앞을 지나가면서 내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내가 전혀 서운해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향원(鄕原)뿐일 것이다. 향원은 다움[德]을 해치는 자이다’고 하셨다.”
 
  “향원은 다움을 해치는 자이다”라는 말은 《논어》 양화편에 교언영색을 말하기 직전에 나온다. 우선 이 말의 뜻을 풀고 다시 맹자와 만장의 대화로 돌아가자. 주희(朱熹)에 따르면 향원이란 “고을에서 신망이 있고 후덕하다 평을 듣는 자이니, 시류와 동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한다. 이 때문에 고을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독 후덕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이런 사람의 행태는) (군자)다움[德]과 비슷하나 (실은) 군자가 아니어서 도리어 다움을 어지럽힌다고 여기셨다. 그러므로 다움을 해치는 자라고 말씀하여 매우 미워하신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포퓰리스트가 바로 향원이다.
 
  다시 두 사람의 대화다.
 
  만장이 묻는다.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다움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건 다움이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을 텐데 공자께서는 이를 ‘다움을 해치는 자’라고 하셨으니 어째서 그러신 것입니까?”
 
  “그를 비난하려 해도 (딱 꼬집어) 드러낼 비난거리가 없고, 찔러보려고 해도 (막상 딱 꼬집어) 찔러볼 것이 없다. 시류에 동조하고 더러운 세상과 영합하여, (집안에서) 거처할 때는 열렬하고 신의가 있는 듯하며 (밖에서) 행동할 때는 청렴하고 결백한 듯해서, 많은 사람이 모두 그를 좋아하고 자신도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지만, 그러한 자와는 결코 더불어 함께 요순(堯舜)의 도(道)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다움의 적이라고 한 것이다.
 
  공자는 ‘비슷하면서 아닌 것[似而非]을 미워한다. 가라지를 미워함은 그것이 벼의 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말재주 부리는 자를 미워함은 의(義)를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구변(口辯)만 좋은 자를 미워함은 신의를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정나라 소리를 미워함은 정악(正樂)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간색인) 자주색을 미워함은 (정색인) 붉은색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을 미워함은 다움을 해칠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하셨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되새기며 역사의 사례로 들어가 보자. “어진 사람만이 제대로 미워할 줄 안다.” “나는 어짊을 (진실로) 좋아할 줄 아는 자와 어질지 못한 것을 (진실로) 미워할 줄 아는 자를 보지 못했다.” 그만큼 현실 속에서 진심을 다하는 교언영색과 겉모습만의 교언영색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리라.
 
 
  교언영색으로 한(漢)나라를 망하게 한 왕망(王莽)·기원전 45~기원후 23
 
  한나라 말기 외척 왕씨 가운데 왕봉(王鳳), 왕음(王音), 왕상(王商), 왕근(王根) 형제가 차례로 정권을 잡았다. 처음에 왕봉이 조정 권한을 장악하자 그의 형제와 조카들은 모두 교만해져 위세를 부렸다. 오직 왕망(王莽)만 달랐다. 그는 훌륭한 선비처럼 매사 조심했고 청렴한 생활을 했다. 아랫사람들에게도 겸손했다. 왕근은 죽음에 임박해 조카인 왕망을 추천하여 왕씨 외척 세력을 대신하게 했다.
 
  평제(平帝)가 즉위하자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 또 왕망은 인재들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이에 따라 많은 선비가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평제를 독살하고 어린 아들 영(嬰)을 즉위시킨 다음 스스로 정사를 대행했다. 그러며 가황제(仮皇帝) 또는 섭황제(攝皇帝)라고 불렀다. 임시황제, 대행황제라는 뜻인데 결국 서기 8년에 왕망은 가황제에서 진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신(新)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한나라는 멸망했다.
 
  왕망이 이처럼 일개 외척에서 황위를 찬탈하고 한나라를 망하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은 겸양(謙讓), 곧 그 특유의 교언영색 덕분이었다. 그의 본심은 그가 황위를 찬탈하기 직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왕망의 사례를 곱씹고 곱씹는다. 북송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묘사한 이 무렵 왕망의 모습을 보자.
 
  “왕망의 모습은 엄숙했고 말은 바르고 곧았지만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아주 살짝만 그 의향을 드러내어 주변에서 이를 눈치로 알도록 했고, 그의 무리[黨與]가 그의 뜻을 이어받아서 받들려 하면 왕망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굳게 미루고 사양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위로는 태후를 혹하게 만들었고 아래로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 인상을 심었다.”
 
 
  “말만 잘하는 입이 나라를 뒤집는다”
 
  이 구절에 대해 남송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진덕수(眞德秀·1178~1235)는 제왕학의 교범인 《대학연의(大學衍義)》(이한우 옮김, 해냄)에서 공자의 말을 끌어들여 이렇게 음미한다. 딱 우리의 문맥이다.
 
  “이는 사마광이 왕망의 속마음[情態]을 묘사한 것이다. 공자는 (《논어》 양화편에서) 말하기를 ‘얼굴빛은 위엄을 보이면서 내면이 유약한 것[色厲內荏]은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둑놈과 같다’고 했다. 대체로 겉모습은 강한[强勁] 색을 띠면서 마음속은 실제로 음흉하며 약한[陰柔] 것은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하기 위함이다. 왕망이 나라를 도적질한 것도 대개 이런 술책을 사용해서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아주 살짝만 그 의향을 드러내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굳게 미루고 사양하는 식의 간사함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밝은 군주라 하더라도 이런 것들은 단번에 모두 살피기[察]는 불가능한데 하물며 모후야 얼마나 쉽게 속이고 일반 백성들이야 얼마나 쉽게 현혹시켰겠는가? 이런 식으로 한나라의 정권은 야금야금[漸] (왕망에게로) 옮겨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에서 보았던 공자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말만 잘하는 입이 나라를 뒤집는 것을 미워한다.”
 
  양웅(揚雄)은 한나라 말기 왕망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한때 왕망에게 아부하는 시를 지어 올려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가 《논어》를 모방해서 쓴 흥미로운 책 《법언(法言)》에 사람 보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용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법에 대해 묻자 양웅은 이렇게 답했다.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찌하여 어려운 것입니까?”
 
  “천하의 명산인 태산(泰山)과 개미집을 비교하거나 또는 천하의 큰 물인 장강이나 황하를 길에 팬 웅덩이에 괸 물과 비교하면 그 서로 다른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크게 빼어난 이[大聖]와 크게 간사한 이[大佞]는 언뜻 보아 분별이 잘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렵다는 말이다. 아! 너무도 닮은 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분별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교언영색과 사이비를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 여기서 크게 간사한이란 당연히 왕망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조선 임금 정조(正祖)는 정작 지인지감(知人之鑑)에 약했다
 
사람 보는 눈이 부족했던 정조.
  정조는 세종과 더불어 호학(好學)한 군주였다. 그러나 강명(剛明)한 군주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람 보는 데 어두웠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한나라 때의 명재상 곽광(霍光·?~기원전 68)을 노래한 시가 실려 있다.
 
  신중하고 성실한 마음을 가진 박륙후(博陸侯)
  명당(明堂·조정)의 조회도 주나라 제도를 본받았도다
  한나라 중흥시킨 계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척리(戚里·외척)의 권력 독점 그로부터 비롯되었다네
 
  특정 신하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심어줄 경우 훗날 외척의 화란(禍亂)이 빚어질 수 있음을 경계한 시라 하겠다. 그러면 지켜야 하는 것이 참된 군주다. 박륙후란 한나라 대장군 곽광의 봉호다. 곽광은 그의 이복 이모인 위자부(衛子夫)가 무제(武帝)의 황후가 되면서 황실 외척이 됐고 무제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소제(昭帝)를 보필했으며 뒤에 음란한 창읍왕(昌邑王)을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우기도 했다. 20년간 황제를 보필하며 큰 공을 세웠으나 그의 자손이 끝내 반란을 도모해 멸족됐다.
 
  정조에게는 집권 초 홍국영(洪國榮·1748~1781)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閑中錄)》에 따르면 홍국영은 젊은 시절 호방하면서도 해괴한 인물이었다. 이를 홍씨는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홍국영은 주색잡기로 청년기를 보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작심을 하고 과거공부를 시작해 25세 때인 1772년(영조 48년) 문과에 급제한다. 머리가 좋았다는 뜻이다.
 
  이듬해인 영조 48년 4월 5일 영조가 직접 숭정전 동월대에 나와 행한 소시(召試)에서 예문관원 홍국영은 훗날 동지이자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정민시와 함께 우수자로 선발됐다. 이를 계기로 영조의 눈에 든 홍국영은 사관과 함께 왕세손을 보좌하는 춘방 사서를 겸직하게 되면서 정조와 인연을 맺게 된다. 혜경궁 홍씨에 따르면 아버지 홍봉한은 당시 홍국영을 좋게 보았고, 작은아버지 홍인한은 “영안위 할아버지 자손 중에 저런 요망한 인간이 날 줄 어이 알았으랴”며 “집안을 망칠 위인”이라고까지 극언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홍인한의 진단이 정확했던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어쨌거나 당시 권력에서 물러나 있던 홍봉한은 이복동생인 홍인한에게 홍국영의 보직을 도와줄 것을 권유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홍국영을 후원하려 했다.
 
 
  홍국영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평
 
  젊은 야심가 홍국영은 그럼에도 같은 집안인 홍씨 쪽에 줄을 서지 않았다. 자신의 본분인 세손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의기투합(意氣投合), 정조 즉위 초 정조와 홍국영의 관계는 이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내외척을 멀리하려 한 정조와 노론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라 특정 정파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홍국영의 기질이 딱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패기에 찬 홍국영은 적어도 이때만은 진심으로 정조를 보필했다. 홍국영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동궁께서는 나이도 서로 비슷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눈치 빠르고 민첩하니, 세상이 어지러웠던 때를 당하여 한 번 보고 크게 좋아하셔서 총애가 깊으셨다. 처음에는 요 어린 놈이 간사한 꾀를 내어 동궁께 곧은 충고를 하는 척했지만 실은 다 듣기 좋은 말이라… 한 번 국영이 들어오면 외간의 일들을 여쭙지 않는 일이 없고, 전하지 않는 말이 없으니 동궁께서 신기하고 귀하게 여기셨다.”
 
 
  홍국영의 부침
 
  왕망에 대한 사마광의 묘사를 떠올린다. 정조는 즉위 나흘째인 3월 13일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한다. 정3품 당상관으로의 승진이라는 의미보다는 왕명을 공식적으로 출납하는 자리에 올랐다는 의미가 더 컸다. 게다가 홍국영은 단순한 왕명출납 이상의 직무를 수행했다. 왕명생산, 즉 정조의 1인 싱크탱크이자 책사로서 정국의 밑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7월 6일 홍국영은 도승지에 오른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 29세였다. 영조 말기 주요 대신들이 정후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면 정조 초에는 홍국영의 눈치를 살폈다. 정승 부럽지 않은 권세였다. 이듬해 5월 27일 홍국영은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금위대장까지 겸한다.
 
  즉위에 공이 있다고 해서 이처럼 특진에 특진을 거듭하게 한 것은 정조의 인사처리가 그만큼 미숙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것은 홍국영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었다. 인재를 키우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을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정조 자신이었다.
 
  정조 2년 홍국영은 정조에게 소생이 아직 없다는 점에 착안해 13세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정조와 처남·매부 사이가 된다. 정조 3년 5월 7일 원빈 홍씨는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다. 홍국영은 왕비의 상례에 준하여 동생의 상을 치렀다. 참람한 행위였다.
 
  결국 역모 논란에 홍국영의 이름이 등장했고 정조는 홍국영의 목숨만은 살려주는 선에서 결별한다. 강원도 강릉 해안가에 거처를 마련한 홍국영은 술로 날을 지새우다가 1781년(정조 5년) 4월 사망했다. 33세였다.
 
  윗사람을 섬김에 교언영색 해야 한다. 다만 교언영색 한 자가 모두 진실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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