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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망가진 문화유산답사기 〈1〉 명옥헌과 공재 고택과 식영정

“검게 ‘뺑끼칠’ 된 공재고택은 속이 꺼멓게 타들어 가고 있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사진 :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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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에 벌레 먹는 걸 막는다며 집 전체에 검은색 도배
⊙ 범죄 막는다는 기계에선 하루 종일 5초마다 삑삑 하는 굉음
⊙ 명옥헌엔 드라마 촬영한다며 장비 설치
⊙ 식영정엔 CCTV 사람 눈높이로 설치해 관람객 감시
공재 윤두서의 고택에는 검은색 페인트가 덕지덕지 칠해져 있다.
건물을 벌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취한 조치 때문이다.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에 있는 명옥헌(鳴玉軒) 원림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멋이 한껏 배어 있는 공간이다. 당호(堂號)도 호사의 극치다. 울 명(鳴) 자에, 구슬 옥(玉) 자를 썼다. 대한민국 명승 제58호인 명옥헌은 7~8월이 제격이다. 배롱나무 가지마다 붉은 꽃이 한껏 피어 아름다움을 다투고 앞 연못에 제 자태를 드리웠다.
 
  명옥헌은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이다.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1619~1655)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명옥헌을 지었고 건물 앞뒤로 네모난 연못을 팠다. 앞의 연못은 넓고 뒤의 연못은 작지만 가운데 석가산(石假山)을 세웠다. 석가산은 한국적 조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치다.
 
전남 담양의 명옥헌에는 지금 배롱나무가 만발해 있다.
  명옥헌 안에는 삼고(三顧)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누군가 세 번을 찾아왔다는 것인데 그 누군가가 바로 인조(仁祖)다. 인조는 광해군에 대한 반정(反政)을 일으키기 전 인근 소쇄원을 찾아 선비들을 규합하려 했다. 소쇄원의 선비들은 “뜻을 함께하고 싶지만 광해군에게서 녹(祿)을 받아먹었으니 그럴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산 너머에 살고 있는 오희도를 찾아가 보십시오.” 인조가 말을 타고 아흔아홉 굽이를 넘어 명옥헌에 도착하니 오이정이 훗날의 인조인 능양군을 맞았다. 마침 오희도는 1614년(광해군 6)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 치하에서 벼슬할 것을 포기하고 이곳에 망재(忘齋)라는 작은 서재를 짓고 은인자중 때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인조는 명옥헌을 세 차례나 찾았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제갈공명을 삼고초려한 것과 같았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오희도는 출사(出仕)할 것을 결심하고 과거에 급제했으나 꿈을 펴 보지도 못하고 천연두에 걸려 41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몇 달째 계속되는 폭양(暴陽)에 앞뒤 연못은 거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나무는 꽃을 피우건만 연못은 하늘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채우지 못한다. 어느 날 명옥헌에 갔더니 방송장비를 설치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못과 망치 등이 들어 있는 함을 들고 철제 사다리를 떡하니 명옥헌에 걸치더니 못질을 하려다 주변을 살폈다.
 
한 방송사가 이곳에서 촬영을 진행한다며 발을 걸어 놓은 모습이다.
  알고 보니 KBS에서 8월 22일부터 방영하는 ‘구르미 그린 달빛’이라는 드라마를 촬영하기에 앞서 소품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박보검이 출연하는 이 드라마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관람객의 출입을 방해하면서까지 왜 독점해야 하는지, 명옥헌을 관리하는 사람은 왜 그들에게 이 공간의 독점권을 줬는지 알 수가 없다.
 
  다행히 세트를 설치하는 사람들은 대못 아닌 작은 못으로 발을 걸었다. 그들이 앞으로도 이렇게 문화재를 아낄지는 알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찍겠다며 다리를 막고 도로를 통제하며 길 가는 사람까지 멈추게 하는 행동을 자주 목격한다. 그게 공익(公益)과 전혀 무관한 자기 돈벌이인데도 말이다.
 
  담양 명옥헌에서 벌어진 광경은 전남 해남의 공재(恭齋) 고가(古家)에서 벌어진 만행에 비하면 귀엽다. 공재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고택은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에 있다. 중요민속자료 232호다. 원래 이 집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장남 윤인미(尹仁美)를 분가시키려 지었다.
 
  집을 짓고 나니 바다 근처로 해풍이 심했다. 고산은 집을 증손 윤두서에게 줬다. 윤두서는 조선후기의 문인화가로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함께 조선의 3재(齋)라 불렸다. 그의 자화상은 국보 240호로 강렬한 눈빛과 섬세한 수염 묘사와 특이한 구도가 감탄을 자아내는 천하의 명품이다.
 
공재 윤두서의 고택을 보고 있노라면 흉가 같은 느낌이 든다.
  원래 48칸이었던 공재 고택은 지금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본채 13칸, 곡간채 3칸 및 사당과 헛간만 남아 있다. 뒤로는 북쪽의 망매산을 주봉으로 하고 앞으로는 남쪽이 바다로 훤히 트이며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뚜렷해 풍수지리상의 명당터라는데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훅~’ 하는 한숨이 터져 나온다.
 
  집 전체에 검은색 ‘뺑끼칠’ 같은 것을 해 놓았는데 알고 보니 문화재 관리 직원이 나무에 벌레가 침범할 것을 우려해 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식한 공무원이 나라를 망친다고 건물 전체가 무슨 귀신이라도 어디선가 튀어나올 것처럼 흉측하기 그지없다. 더 놀라운 것은 5초마다 들리는 ‘삐이익~’ 하는 소음(騷音)이다.
 
  이 집을 돌보고 있는 공재의 후손에게 물어보았더니 공무원들이 집에 도둑이라도 들 것을 우려해 설치해 놓은 기계가 고장나 나는 소리라는 것이다. 건물을 뒤지니 문제의 기계를 교묘히 감춰 놨다. 한 시간 정도 소음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데 후손들은 “하도 들어서 이제는 괜찮다”고 했다. 난청(難聽)이 의심됐다.
 
문제의 소음을 내는 기계가 설치된 공간을 가려 놓았다(왼쪽). 한옥의 아름다움이 검은 칠로 퇴색해 버렸다.
  한국의 3대 풍류가 중 한 명인 고산 윤선도나 시서화 삼절로 이름난 공재 윤두서가 이런 모습을 봤다면 한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무지한 공무원들이 얼토당토않은 방법으로 문화재를 보존한다며 오히려 문화재를 망치는 현장은 이 땅에 무수히 많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공무원들이 봤다면 혀를 찼을 것이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식영정(息影亭)은 한국 고전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식영정은 인근의 환벽당(環碧堂), 송강정(松江亭)과 함께 정송강, 즉 송강 정철(鄭澈·1536~1593) 유적이라고 불린다.
 
  식영정은 원래 16세기 중반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최근 복원됐다.
 
  ‘서하당 유고’라는 행장(行狀)에는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명종 15)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11년 연상인데 정철이 이곳 성산에 머물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식영정 건너편 환벽당은 어린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장소다.
 
식영정 마루에 앉아 있으면 CCTV와 눈이 딱 마주친다.
  환벽당에 기거하던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가 어느날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린 용이 앞 개울에서 놀고 있는 꿈을 꿨다. 그 개울이 지금의 광주천으로 흔히 자미탄이라고 불린다. 놀란 김윤제가 내려가 보니 어린 정철이었다. 김윤제는 그를 데려다 호남의 명사들을 총동원해 지금으로 말하면 초엘리트 교육을 시켰다.
 
  정철의 스승 가운데 한 명이 하서 김인후다. 하서 김인후는 전남 장성이 본거지로, 전북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개울가에 훈몽재(訓蒙齋)를 지었다. 하서는 정철이 환벽당에서 초보적인 교육을 마치자 훈몽재로 데려와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마시켰다. 훈몽재에는 지금도 정철이 글을 읽었다는 바위가 개울가에 남아 있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다. 이들은 지금 식영정이 있는 성산(星山)의 경치 좋은 스무 곳을 택해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었는데 이 식영정이십영이 훗날 정철의 명편 〈성산별곡〉의 바탕이 됐다. 그런 식영정에 묘한 기계가 설치됐다.
 
CCTV가 있는 곳에서 본 식영정이다. 높이를 달리해도 될 것을 일부러 사람 눈높이에 맞춘 듯하다.
  CCTV다. 잡인들의 범죄를 막고 문화재 훼손을 막는 것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하필이면 위치가 사람 눈높이다. 다른 문화재는 전부 높은 곳에 달려 있는데 이곳만 딱 사람 눈과 마주친다. 이곳에 기거하고 있는 《소쇄원 숨은 그림 찾기》의 저자 이동호씨는 기자를 보자마자 냅다 화를 냈다. “저런 게 우리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씨는 수차례 광주시나 담양군의 담당자를 만나 “사람 얼굴을 빤히 쳐다보도록 한 CCTV 설치는 초상권 훼손이자 국민 행복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따졌다. 노력이 통했는지 군청에서는 CCTV의 위치를 바꾸라고 했다. 그런데 소쇄원과 식영정을 돌보는 관리인이 오불관언, 상사의 명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식영정 툇마루에 앉아서 보니 CCTV의 카메라가 기자를 응시하고 있다. 소쇄원 관리사무실에서 CCTV를 지켜보고 있을 관리인이 “저 녀석은 또 말썽쟁이 이동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나? 아차 그러고 보니 소쇄원과 식영정에 자주 출몰하는 녀석일세” 하며 녹화테이프를 되돌려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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