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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5〉 세계의 大畵脈 소치 허련 5대와 진도 운림산방

5대 직계 200년 이어진 세계 유일의 화가 집안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사진 :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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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치는 초의선사 통해 추사 김정희에게 배워
⊙ 김정희 “압록강 동쪽에서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
⊙ 소치의 자손 미산 허형-남농 허건-임인 허림-임전 허문 등 이어져
⊙ 소치가 손수 심은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지금 만발
운림지. 한복판의 작은 섬에 소치가 직접 심은 배롱나무가 보인다. 그 뒤 건물이 화실이다.
  전라남도 진도(珍島)는 왜 ‘보배 진’ 자가 붙었는지를 알 수 있을 만큼 절경(絶景)이 많다. 낙조(落照) 가운데 전국 으뜸이라는 세방낙조부터 매년 음력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바닷길이 열리는 한국판 홍해(紅海) ‘신비의 바닷길’(명승 9호), 선녀가 내려와 방아를 찧었다는 관매도, 대표 견종인 진돗개 등이 그 일부다.
 
  이런 명승 절경도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전라남도 지정기념물 51호인 이곳은 5대 직계 화맥(畵脈) 200여년 동안 이어지는 산실이다. 세계 화단(畵壇)의 이적(異蹟)이요, 한국 화단의 자랑이라고 할 만하다. 오죽하면 “진도 양천 허씨는 빗자루만 들어도 명작이 나온다”는 우스갯소리까지 그럴듯해 보인다.
 
운림산방의 입구다. 뒤로는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찰산이 보인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거봉인 소치(小痴) 허련(許鍊·1808~ 1893)의 화실이었다. 지금은 소치가 손수 심은 배롱나무가 연못 속에서 붉은 꽃을 토해 내는 운림지(雲林池)와 소치의 소박한 화실과 생가와 훗날 만든 기념관이 있다. 뒤로 진도 최고봉 첨찰산(해발 485m)이 운림산방과 거기서 가까운 쌍계사를 품고 있다.
 
  운림산방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각각 교유한 아암 혜장스님, 초의 의순스님(艸衣禪師·1786~1866)부터 알아야 한다. 다산은 전남 강진에 유배되면서 백련사 아암 혜장스님과 교유했는데 혜장스님의 수제자가 바로 초의선사였다. 초의선사는 속세에서 성이 장(張)씨이고 이름은 의순(意恂)이다.
 
  본관이 인동(仁同)인 의순은 법호가 초의(艸衣)이며 당호는 일지암(一枝庵)으로, 1786년에 태어나 1866년 입적했다. 그는 다도를 정립해 다성(茶聖)이라 추앙되는데 어릴 적부터 이상한 일을 많이 겪었다. 그는 다섯 살 때 강에서 놀다가 급류에 휩쓸려 죽을 고비에 맞는데 마침 부근을 지나가던 스님이 구해 줘 목숨을 건졌다.
 
  스님은 그에게 출가할 것을 권했다. 15세에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삼아 출가한 그는 19세에 영암 월출산에 올라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22세 때부터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다녔는데 평생지기가 후배였던 소치 허련(1809〜1892)과 동갑인 추사 김정희(1786〜1856)다.
 
운림지에 수련이 피어 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지난 8월호의 프랑스 화가 모네의 수련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는 추사와 함께 다산초당을 찾아 유배 중인 스물네 살 위의 다산을 스승처럼 섬기며 실학 정신을 배웠다. 둘은 차를 놓고 서로를 돕는데 다산이 ‘각다고’를 쓰면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읊었으니 비로소 한국의 다도는 두 분에 의해 중흥된다. 초의선사의 차에 대한 관점은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에 집약됐다.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뜻이다. 한 잔의 차에 부처의 진리와 명상의 기쁨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초의선사가 다산을 흠모하는 시가 있다. 〈비에 갇혀 다산초당에 가지 못하고〉라는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자하의 계곡을 생각할 때면 / 분분했던 꽃과 나무 뚜렷이 떠오른다. / 장마비가 괴롭게 서로를 막으니 / 밖에 나갈 채비를 갖추고도 스무날을 보냈다. / 어른과의 약속을 제때에 지키지 못하니 / 어디에도 내 진심을 하소연할 곳이 없구나.
 
  초의선사는 다산이 유배생활을 마친 뒤에도 자주 찾아갔으며 이후 다산의 아들 정학연·정학유 형제와도 가까이 지냈다. 다산이 세상을 뜬 후 초의선사는 돌연 속세의 어머니 무덤을 찾는데 훗날 사람들은 이것이 다산을 그리워했던 마음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다음은 그가 남긴 〈고향에 돌아와서〉라는 시다.
 
  고향을 멀리 떠난 지 40여년 만에 / 돌아와 보니 머리에 눈발이 / 날리는지 몰랐었구나! / 새로운 터는 풀이 우거져 있고 / 내가 살았던 집은 어디로 갔느냐 / 조상의 무덤은 이끼에 묻혀 / 시름에 덮여 있네 / 마음이 죽었는데 한은 어디서 일어나며 / 피마저 말라버려 눈물조차 나오지 않네! / 주장자 짚고 또다시 구름 따라 떠나노니 / 말아라! 내 살아서 고향 찾는 것이 / 부끄럽기만 하노라!
 
소치 허련의 초상화다.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1786년 6월 3일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김노경이다. 김노경은 월성위 김한신의 손자(추사의 증조부)인데 월성위는 영조의 부마였다. 김한신의 아내가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였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도세자의 형으로, 어렸을 적 죽은 첫아들 효장세자를 낳은 정빈 이씨의 딸이다.
 
  추사는 어렸을 적부터 천재로 소문났다. 7살 때 당대의 명재상 채제공이 그가 쓴 입춘첩을 보고 “글씨로 이름을 날릴 만큼 명필(名筆)”이라고 했다. 추사는 당대의 학자 박제가에게 사사했으며 스물네 살 때인 1809년 생원시에서 일등으로 합격한 뒤 동지겸사은사부사로 북경에 간 아버지 김노경을 수행한다.
 
  당시 자제군관이란 직책을 얻었는데 중국에서 추사는 거유(巨儒)들을 만난다. 당시 47세인 완원, 78세인 옹방강을 찾아 사제의(師弟義)를 맺고 주학년(朱鶴年)·이정원(李鼎元)·조강(曹江)·서송(徐松)·옹수배(翁樹培)·옹수곤(翁樹崑)·사학숭(謝學崇) 등과 친교를 맺었다. 훗날 옹방강과는 편지를 통해 지도를 받는 사이가 된다.
 
  옹방강은 청나라에서 금석학(金石學)의 대가로 정평이 난 인물인데 김정희를 만난 후 “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어린 추사에게 귀중한 자료도 잔뜩 선물했다. 석묵서루(石墨書樓)라는 곳에 소장된 장서와 고탁본 자료를 추사에게 보내줘 추사의 안목을 한꺼번에 넓힌 것이다.
 
  옹방강은 불교에도 심취했는데 이것이 추사가 불교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한 배경이다. 완원도 중요하다. 옹방강과 함께 청을 대표하는 학자였는데 추사가 찾아오자 태화쌍비관이라는 거처에서 ‘용봉승설’이라는 명차를 대접했다. 추사는 ‘승설도인’이라는 호도 썼는데 이때 맛본 용봉승설의 맛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사가 서른 살 되던 1815년, 그는 동갑 초의선사와 금란지교(金蘭之交)의 관계를 맺는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설(異說)도 있다. 초의선사가 한때 수락산 학림암에서 해붕선사를 모시고 있을 때 추사가 해붕선사를 찾아왔고 이때 초의선사와도 인사를 했다는 것이지만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 길이 없다.
 
소치가 부채에 그린 운림산방의 전경이다. 운림산방은 원래 운림각이라고 불렸다.
  추사와 초의선사의 관계는 추사가 마흔 살 때 제주도로 유배당하면서 더 깊어졌다. 외로운 유배시절, 추사는 초의선사가 보내준 차로 시름을 달랬다. 다음은 둘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의 일부다.
 
  햇차를 몇 편이나 만들었습니까. 잘 보관하였다가 내게도 보내 주시겠지요. 자흔과 향훈스님들이 만든 차도 빠른 인편에 부쳐 주십시오. 혹 스님 한 분을 정해 (그에게 차를) 보내신다 해도 불가한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세신도 편안한가요. 늘 염려됩니다. 단오절 부채(節萐)를 보내니 나누어 곁에 두세요.
 
  갑자기 돌아오는 인편으로부터 편지와 차포를 받았습니다. 차 향기를 맡으니 곧 눈이 떠지는 것만 같습니다. 편지의 유무(有無)는 원래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나는 차를 마시지 못해 병이 났습니다. 지금 다시 차를 보고 나아졌으니 우스운 일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인편으로부터 편지와 차포를 받았다’는 구절이다. 인편(人便)은 차 배달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소치 허련이 초의선사의 분부를 받고 추사에게 차를 심부름하는 역할을 자주 맡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치 허련은 무슨 연유로 초의선사와 인연을 맺었을까.
 
  1809년 태어난 허련은 교산 허균의 집안이었다고 한다. 허균의 후예 중 진도에 정착한 이가 허대(許岱)인데 그는 임해군의 처조카였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임해군이 역모죄로 몰려 진도로 귀양 오자 수행한 허대가 아예 눌러앉은 것이다. 진도라는 외딴섬에서 그림을 그리던 허련의 정열을 맨처음 알아본 이는 숙부였다.
 
  그는 “조카는 그림으로 일가(一家)를 이룰 것”이라며 어렵게 〈오륜행실도〉를 구해 줬고 허련은 그것을 베끼며 실력을 키웠다. 허련이 초의선사를 알게 된 것은 1835년이다. 초의선사는 호남팔고(湖南八高)로 불렸는데 〈다산도(茶山圖)〉 〈백운동도(白雲洞圖)〉를 보면 초의가 시서화에도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치가 그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추경산수도〉다.
  초의선사는 허련에게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그가 남긴 《몽연록(夢緣錄)》이라는 책을 보면 허련이 얼마나 초의선사에게 감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초의선사는 나를 따뜻하게 대접해 주었고 방을 빌려주며 거처하도록 해 주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다.
 
  허련의 재주를 알아본 초의선사는 대흥사 한산전에 머물며 불화를 가르치는 한편 녹우당의 해남 윤씨에게 부탁해 허련이 공재 윤두서 선생의 그림을 열람하도록 했다. 그때의 감회가 얼마나 컸는지 허련은 “공재 선생의 그림을 열람한 뒤 수일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초의선사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다산의 문하에서 해남 윤씨 후손인 윤종민, 윤종영, 윤종심, 윤종삼 등과 동문수학했기 때문이다. 다시 《몽연록》으로 돌아가 소치가 남긴 기록을 살펴본다.
 
  아주 어릴 적에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하였으며 지금까지 이처럼 홀로 담담하고 고요하게 살았겠는가. 선사와 수년을 왕래하다 보니 기질과 취미가 동일하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소치 허련의 생가다. 낮은 담장 사이로 만발해 있는 수국이 보인다.
  초의선사는 이제 허련을 추사에게 소개한다. 1838년 8월 무렵 금강산 유람을 떠난 초의선사는 허련의 그림을 추사에게 보여줬다. 허련의 그림을 본 추사는 대번에 “압록강 이동에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격찬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허군(소치)의 그림 격조는 거듭 볼수록 더욱 묘해 이미 격을 이루었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보고 들은 것이 좁아 그 좋은 솜씨를 마음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으니 빨리 한양으로 올라와 안목을 넓히는 것이 어떨지요?”
 
  자기 문하로 들어오라는 소식을 초의선사는 허련에게 전했고 허련은 이십 일을 걸어 추사를 만났다. 소치는 당시를 “초의선사가 전하는 편지를 올리고 곧 추사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다. 처음 만나는 자리였지만 마치 옛날부터 서로 아는 것처럼 느꼈다. 추사 선생의 위대한 덕화가 사람을 감싸는 듯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추사와 소치의 사제관계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면서 끝나지만 소치는 제주도로 스승을 찾아갈 정도였다. 이후 소치의 그림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성장했는데 다산의 아들 정학연은 다음과 같은 시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마음속에 한 폭의 산수를 채비하여 늘 밝은 정신을 품어 세속을 초월하는 풍취가 있은 다음에야 붓을 들어 삼매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 경지는 소치 한 사람뿐이다(心窩裏準備一副邱壑 神明中常蘊 傲世絶俗之姿然後 落筆便入三昧 此世界小癡一人而已).
 
소치 허련의 스승이었던 초의선사가 머물던 두륜산 대흥사 뒤편의 자우홍련사다. 초의선사가 살림하던 집이다.
  이 소치가 후손에게 남긴 교훈이 있다. 첫째 붓 재주 하나로 성가(成家)할 생각을 말라, 둘째 먹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녀라, 셋째 인연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 넷째 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근면·성실·겸손의 정신이 배어 있다.
 
  소치라는 허련의 호는 ‘작은 어리석음’이라는 뜻으로 추사가 내려줬다. 중국의 대화가 대치(大痴) 황공망과 비교한 것으로, 황공망이 큰대 자를 쓰자 겸양의 뜻으로 작을소 자를 쓴 것이다. 스승의 기대대로 소치는 42살 때인 1842년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당대의 명사 흥선대원군 이하응·민영익·신관호 등과 교유한다.
 
  이런 소치는 마흔아홉 살 때인 1849년 고향인 진도로 귀향해 운림산방을 세우고 85세 때인 1893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소치의 화맥은 넷째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1861~1938)으로 이어진다. 허형은 어려서 천연두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는데 뒤늦게 그림 재주가 부친 소치의 눈에 띄었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에서 허형은 어렵게 전문 직업화가의 길을 걸었다. 제2회 선전(鮮展)에서 63세의 나이로 입선한 그는 묵모란·묵죽·묵매 등 주로 묵화(墨畵)풍의 그림을 그렸는데 묵모란과 묵매는 부친을 능가한다는 평을 받았다.
 
  3대를 이은 것은 미산 허형의 두 아들 남농(南農) 허건(許楗·1908~1987)과 임인(林人) 허림(許林·1917~1942)이다. 남농은 고향의 산야·해촌(海村)·산사(山寺) 등을 가문의 필법인 갈필법으로 그려 냈는데 거친 선으로 빚어낸 소나무의 구성과 생동감 넘치는 필선(筆線)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당대 최고로 평가받았다.
 
진도의 세방낙조는 서해안에서 볼 수 있는 낙조 가운데 으뜸이라고 한다.
낙조 직전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다.
  남농은 운림산방이 있는 운림동에서 태어나 강진 병영을 거쳐 목포에 정착했는데 1944년 〈목포의 일우〉라는 작품으로 지금의 국전 격인 선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1982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해 운림산방을 복원해 국가에 헌납했다. 그는 1985년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남농의 동생 허림은 요절한 비운의 작가다. 18세 때 선전에 처녀출품한 뒤 내리 5회 입선한 그는 부친이 타계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모든 물상(物像)을 점으로 표현하는 ‘토점화’라는 독창적인 화법을 일궜다. 토점화는 두껍게 배접한 화선지에 밑그림을 바탕으로 황토흙으로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린 뒤 채색하는 화법이다.
 
  그는 조선인 화가에게 쉽게 문을 열지 않는 일본 문부성전에 1941년 〈전가〉, 1942년 〈6월 무렵〉이라는 작품으로 내리 입선해 천재성을 일본 화단에 드높였으나 가난하게 이어온 유학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26세에 요절했다. 남농은 일찍 세상을 뜬 동생 임인의 아들 임전(林田) 허문(許文·75)에게 4대 화맥을 맡겼다.
 
  임전은 생후 11개월 때 부친을 잃고 7살 때부터 백부 남농 슬하에서 자랐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임전은 수묵의 농담(農淡)을 이용한 ‘운무산수화’라는 독창적 화풍을 자랑하고 있다. 임전 이후 5대 화맥은 남농의 손자 허재·허전, 남농의 동생들 자식인 허청규·허은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소치 가문의 직계는 아니지만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도 빼놓을 수 없는 양천 허씨 가문의 대화가다. 그는 종고조(從高祖)뻘인 미산 허형에게서 묵화의 기초를 익혔으며 일본 도쿄에 6년간 머물며 일본의 대표적 남종화가(南宗畵家) 고무로(小室翠雲)의 지도를 받아 남종 산수화의 대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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