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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4〉 모네와 프랑스 시골마을 지베르니

위대한 예술은 고난을 자양분으로 삼고 태어난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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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모네는 가난에 시달려… 외숙모가 화가의 길 열어줘
⊙ 후원자 부부의 파산으로 그 가족까지 떠안은 모네
⊙ 지베르니로 이사 온 후 유명해지고 생활도 안정
⊙ 백내장에 걸린 모네가 가꾼 정원은 그의 거대한 팔레트
모네의 정원에 있는 연못에 수련이 만발해 있다. 노년의 모네는 백내장을 앓으며 수련 연작을 완성했다.
  1년8개월 만에 프랑스 지베르니(Giverny)를 다시 찾았다. 지난 2014년 11월 1일 클로드 모네(Monet)의 정원 앞에서 당했던 황당한 경험 때문이다. 프랑스에 있는 대부분의 박물관이 10월 31일까지만 문을 연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단 하루 차이로 모네 정원의 굳게 닫힌 철문(鐵門) 앞만 기웃대다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지베르니까지는 자동차로 약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인구가 50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 지베르니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 그중에서도 미술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반드시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파리-지베르니와 함께 이등변 삼각형의 꼭짓점에 위치한 밀레의 바르비종까지 본다면 더욱 제격이다.
 
모네의 다리는 일본의 풍속화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모네 정원의 상징과도 같은 구조물이다.
  1840년 11월 14일 태어난 모네는 1883년부터 1926년 12월 5일 사망할 때까지 생의 마지막을 센강변의 도시 지베르니에서 보냈다. 모네의 정원은 노년의 모네가 스스로 꽃과 나무를 가꾸고 그것을 화폭(畵幅)에 옮긴 장소다. 먼저 성인 1인당 10유로 정도의 입장료를 지불하면 모네가 살던 집과 한창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썩 아름답거나 굉장히 인상적이진 않지만 대 예술가의 손길이 담긴 정원을 살펴본 뒤 지하도 비슷한 통로를 지나면 그 유명한 ‘모네의 다리’가 나온다. 모네가 일본의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畵)〉에 감흥을 받아 이른바 ‘자포니즘(Japonism)’에 빠진 것은 유명한 얘기다. 그 자포니즘의 절정이 바로 연못에 걸쳐진 모네의 다리다.
 
또 다른 모네의 다리에서 관람객들이 수련을 감상하고 있다.
  모네의 다리는 동양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걸작은 아니다. 그렇지만 여행자들은 이 작은 다리에 서서 지금 연못에 한껏 만발해 있는 수련을 보고 모네의 수련 연작(連作)을 떠올리느라 황홀한 표정이다. 이 수련을 보고 파리 오랑주리 박물관 벽에 걸린 대작(大作)으로 눈요기한다면 그만한 예술적 호사가 없을 것이다.
 
  모네의 정원을 한참 감상했다면 다음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국립 인상파 미술관을 볼 차례다. 미술관을 보고도 성에 차지 않는다면 인근에 있는 모네의 무덤으로 간다. 그 지형을 짚는 사이 골목 골목에 숨어 있는 자그마한 아틀리에들을 살피는 것도 좋고 모네 작품을 본뜬 기념품 가게를 기웃대도 좋다.
 
모네의 모습.
  인상파(印象派)는 학생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얼굴에 인상을 팍 쓰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아니라 영어로 ‘Impression’, 즉 빛과 대기의 변화에 따른 색채를 중시한 화가들을 말한다. 인상파라는 이름이 일상화된 것은 1874년 나달의 사진관에서 일군(一群)의 화가들이 여덟 차례 전시회를 연 직후라고 한다.
 
  당시 출품한 화가들의 면면은 지금 살펴봐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모네를 비롯해 드가·르누아르 등인데 이들이 전기(前期) 인상파라면 후기 인상파의 대표주자는 고갱·고흐다. 인상파 화가들의 발자취를 좇고 싶다면 엑상 프로방스의 세잔 아틀리에에 가거나 오베르 쉬르 와즈, 아를에 있는 고흐의 흔적으로 달려갈 일이다.
 
  프로방스의 중심도시인 엑상 프로방스나 로마가 건축한 원형경기장이 남아 있는 아를은 강렬한 햇빛과 노란 해바라기, 파란 하늘이 누렇게 탈색된 대리석 건축물들과 멋진 조화를 이루기에 인상파 화가들의 고장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왜 모네는 프로방스가 아닌 파리 인근의 평범한 농촌 지베르니를 택한 것일까.
 
  모네는 “영원한 인상주의자는 모네 한 명뿐”이라는 말을 듣는 화가다. 인상주의 미술의 시작과 인상주의 최후 생존자로 살다 간 인물이어서 이런 평을 받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생애 자체도 인상적이다. 식료품 가게를 하던 상인(商人)의 아들로 태어난 모네는 어렸을 적부터 화가가 되려고 했다.
 
  이런 꿈에 장애가 된 것은 그의 부모였다. 부모는 모네가 자신들이 운영하던 가게를 물려받길 원했다. 모네는 다섯 살 때 집안 살림이 어려워져 부모와 함께 르아브르(Le Havre)로 이주했다. 파리 서북쪽에 있는 이 항구도시에서 모네는 14년을 보냈다. 그가 본 것은 영국 포츠머스로 떠나는 선박과 파도뿐이었다.
 
모네의 집은 핑크빛으로 칠해져 있다.
  무료한 삶을 살던 모네에게 예술혼을 지펴준 것은 유일하게 그를 격려했던 숙모 르카드르 부인이었다. 모네는 15세 때 노르망디의 거친 파도를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그 바다를 소재로 한, 지금도 남아 있는 스케치가 화가들로부터 “전문가 수준”이라는 격찬을 받은 것이다.
 
  이에 화가이자 숙모인 르카드르 부인은 모네를 지방 화가에게 보내 수업을 받도록 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모네의 생애 행동반경은 르아브르에서 아르장퇴유(Argenteuil)-푸아시(Poissy)-베퇴유(Vetheuil), 그리고 그가 숨을 거둔 지베르니처럼 센강과 멀지 않은 곳에서 맴돌게 된다.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군(軍)복무를 하다 병으로 1년 만에 제대한 모네는 1861년 무렵 파리에서 샤를 자크, 샤를 글레르와 화실에 다녔다. 거기서 르누아르, 시슬리 등 훗날 인상파 일원이 되는 친구를 만난다. 19세기 중후반 지식인들에게 ‘아는 것’은 ‘보는 것’에 불과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쯤이랄까.
 
모네의 정원을 집 2층에서 바라본 모습.
  즉 현실(reality)은 겉모습(appea-rance)이었기에 겉모습을 보여주는 ‘빛’은 예술가들의 공통된 주체가 된 것이다. 화풍 또한 지식인 사회의 유행처럼 빛의 지배를 받았다. 그것은 미술의 혁명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묘사하려면 느릿한 살롱식 화풍보다 짧게 끊어지고 자유분방하면서도 거친 붓놀림이 필요했다.
 
  빛은 또한 고유의 색깔이란 게 실상 인간의 뇌가 ‘기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웠다. 모네의 초기작 〈라 그르누예르〉(1869년), 〈파리의 카푸친 대로〉(1874년)와 몇 년 뒤 나온 〈양산을 든 여인〉(1875년), 〈생 라자르역〉(1877년)을 비교해 보면 모네의 작풍(作風)이 보다 거칠고 과감해졌으며 색과 붓놀림의 변화도 눈치챌 수 있다.
 
모네의 정원에는 지금 온갖 꽃이 만발해 있다.
  모네의 삶도 그림처럼 거칠고 과감하게 바뀐다. 모네는 자기보다 일곱 살 어린 카미유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다. 돈 벌 일 없는 이 화가 부부를 지탱해 준 것은 파리에서 백화점을 경영하던 에르네스트 오슈데-알리스 부부였다. 파리에 백화점을 몇 개나 가졌던 그들은 별장 등 장식을 위해 수시로 모네의 그림을 구입해 줬다.
 
  그런데 어느 날 에르네스트가 파산하고 말았다. 남의 이목이 두려워진 에르네스트는 이후 여섯 아이와 아내를 남긴 채 프랑스를 떠나고 말았다. 이후의 상황은 묘하게 전개된다. 모네-카미유 부부, 두 아이가 자신들을 도와줬던 에르네스트의 아내 알리스 및 그의 여섯 아이와 어정쩡한 동거(同居)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카미유와 알리스는 옷이 한 벌밖에 없어 번갈아 입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가난은 결핵에 걸린 카미유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녀의 나이 서른두 살 때의 일이다. 이제 남은 것은 모네-알리스와 여덟 아이뿐. 하늘나라로 떠난 카미유에겐 미안한 일이었겠지만 남은 모네에겐 아이들을 돌봐주는 알리스의 존재가 더없이 고마웠을 것이다.
 
모네의 집 근처에 있는 기념품점에서 모네의 그림을 넣은 양산을 펼쳐놓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그림 몇 점이 팔리던 때, 모네는 기차를 타고 가다 지베르니 마을을 지나게 된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꿈에 그리던 분홍색 집, 알고 보니 빈집으로 세(貰)들 수 있어 대가족이 머물기에 더없이 흡족한 곳이었다. 당장 그 집으로 이사한 모네 가족은 울타리를 없애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이런 모네 가족을 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그림을 그린다는데 먹고살 수 있을까? 왜 온 가족이 점심때면 양산에 도시락 바구니를 끼고 밖으로 나올까? 결혼도 하지 않은 두 남녀가 많은 아이를 데리고 살다니…. 이상하게도 팔자(八字)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로 이사 온 후 모네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고 프랑스를 떠난 에르네스트의 사망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모네와 알리스는 에르네스트를 지베르니에 묻고 이듬해 재혼한다. 그 후 모네는 요리사와 가정부, 정원사 등 하인을 여섯 명이나 고용하는 풍족한 생활을 맛보게 된다. 가난뱅이 화가가 이제 부자(富者)가 된 것이다.
 
  모네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던 이 가족은 모네가 만족하면 행복하고 모네가 만족하지 못하면 모두가 괴로워하는 이상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재혼한 아내 알리스는 1911년 사망하고 3년 뒤에는 장남 장이 죽었다. 때맞춰 세계 역사상 가장 치열했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었다.
 
모네의 침실.
  1908년부터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한 모네는 아내와 장남의 죽음과 전화(戰禍)로 뒤덮인,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잇단 불행에 우울증을 앓게 된다. 오랜 시간의 가난을 딛고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안정된 생활을 하던 짧은 영광의 정점이 끝나고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 유명한 화가 중에는 눈병을 앓은 이가 많았다. 드가는 실명(失明)했고 모네는 백내장에 걸려 고생하다가 그토록 싫어했던 눈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아야 했다. 이렇게 주저앉은 모네를 일으킨 이가 있었다. 에르네스트와 알리스 사이에서 낳은 의붓딸이자 훗날 며느리가 되는 블랑슈다. 블랑슈는 화구(畵具)를 챙겨 모네를 밖으로 끌어낸다. 버티던 모네는 다시 붓을 잡고 1916년부터 수련(睡蓮)을 그리게 된다.
 
  그가 수련에 집착한 이유가 있다. 시각장애인이 처음 눈을 떠서 본 세상처럼 눈으로 본 세상만 그리고 싶다고 평소 말해온 모네는 쇠해가는 시력에 자기 정원의 연못에 집중하게 됐다. 여기서 한 가지, 모네의 화집(畵集)에 유독 일본인이 등장하고 앞서 말한 모네 정원에 일본풍 다리가 놓인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인상파의 출발이 일본 풍속화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 풍속화 〈우키요에〉는 물 위에 떠도는 것 같은 세상을 그린다는 뜻이다. 〈우키요에〉는 에도(江戶·지금의 도쿄)시대, 즉 도쿠가와 막부 시절 유행했는데 안도 히로시게(1797~1858)가 대표적이다. 흑백 대비와 뚜렷한 윤곽선, 흑색·빨간색처럼 강렬한 색을 사용하는 〈우키요에〉는 목판화로 만들어졌는데 이게 유럽으로 흘러들어가 훗날 인상파를 낳게 된 것이다.
 
모네의 집 근처에 있는 국립인상주의 미술관.
  사가(史家)들에 따르면 모네는 1872년 무렵, 고흐도 그 전후로 〈우키요에〉를 접했다고 한다. 〈우키요에〉는 인상파에 영향을 줬을 뿐 아니라 일본 문화를 유럽에 소개해 오늘날 ‘자포니즘’의 원류가 됐으니 예술의 힘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유럽인이 동양인만 보면 ‘일본인이냐’고 묻는 것을 보고 우리는 일본의 경제력만 생각하지만 평판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역경은 위대한 예술의 밑거름이 된다는 말은 노년의 모네에게 어울린다. 백내장을 앓던 그는 수련에 몰두한 뒤 대작을 선보였다. 주변 늪지까지 사들여 거기 있던 수련과 일본식 다리를 그린 첫 작품은 90cm였다. 이것이 1925년 파리 튈르리 공원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의 벽화 연작으로 커지게 된다.
 
  벽화가 설치된 2×8m에 이르는 타원형 방을 보고 화가 앙드레 마송은 “인상주의의 시스티나 성당”이란 헌사를 바쳤다. 복잡한 상징으로 유명한 샤갈은 모네를 향해 “우리 시대의 미켈란젤로”라는 찬사를 보내기까지 했다. 더 놀라운 것은 1916년부터 1925년까지 그린 그의 그림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모네 부흥(復興·Monet Revival)’으로 재조명됐다는 사실이다.
 
  1935년 오랑주르 미술관에서 열린 플랑드르 양탄자 전시회 때 그의 대(大) 장식화 위를 양탄자로 덮던 몰이해와 푸대접을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다. 그 후 그는 현대회화의 선구자로 주목을 받게 된다. 모네 사후 아들이 관리하던 지베르니의 집과 정원은 아들이 세상을 뜨며 방치되다 1980년 미술관으로 개관됐다. 모네 스스로 가꾼, 세상에서 제일 큰 그의 ‘팔레트’가 재조명되니 그의 운명은 이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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