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수
1969년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수상: 2007년 조선일보 주최 ‘제1회 뉴웨이브 문학상’ / 저서: 장편소설 《진시황 프로젝트》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인문서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번역 《홍계월전》, 연구서 《19세기 소설 옥루몽 연구》 《고전서사의 대중성》 /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1969년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수상: 2007년 조선일보 주최 ‘제1회 뉴웨이브 문학상’ / 저서: 장편소설 《진시황 프로젝트》
《왕의 군대》 《윤동주 프로젝트》, 인문서 《가족기담》 《고전, 사랑을 그리다》,
번역 《홍계월전》, 연구서 《19세기 소설 옥루몽 연구》 《고전서사의 대중성》 /
연세대 학부대학 부교수
- G20 정상회의 본회의가 끝난 2010년 11월 12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폐막 기자회견을 가졌다. 오바마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몇 년 전 서울에서 열린 G20 폐막 기자회견 때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느닷없이 “개최국으로서 준비를 잘 해준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겠다”고 말했다. 질문을 하라고 했는데 아무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 기자가 일어서서 “아시아를 대표해서 질문하겠다”고 나섰다. 오바마는 안 된다며 한국 기자들을 바라봤고 여전히 누구도 손을 들지 않자 민망해진 오바마는 할 수 없이 중국 기자에게 질문을 하게 했다.
왜 깔아놓은 멍석에서 춤을 추지 못했을까? 혹시 영어를 못해서였을까? 자신의 발음이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니다. 원래 집단으로 모여 있으면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공동체 문화가 강한 유교 영향이라고 하면 속 편하겠지만 그도 아니다. 유교문화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기자가 제멋대로 ‘아시아 대표’ 운운하며 들이댄 것만 봐도 아니다. 그의 무례함은 내버려두고라도 아무튼 유교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오바마의 잘못
정답은 돌 맞고 싶지 않아서였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지 않고 무난하고 안정적인 중간 길을 가고 싶어서였다. 혹시 나서서 잘되면 시기와 비아냥을 두고두고 받을 것이고, 안 되면 그야말로 망신이 아니라 “뭘 저런 걸 질문해, 기자란 놈이 수준은…”이라며 사망 수준의 집중포화를 받을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정말 우리 말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말이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한다.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서술어가 문장 끝에 나오니 말이다. 그런데 영어를 비롯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말들은 서술어가 앞에 나온다. 주어 다음에 서술어를 듣고 뒤는 대강 흘려도 대세에 지장은 없다.
온 세상 모든 언어의 구조가 제각각이어도 공통적인 것은 문장에서 ‘서술어’가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그래서 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서술어의 위치에 따른 심리적 편향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뒤쪽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기고, 반대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앞쪽에 집중하는 인지가 발달된다.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옮기기 위해 고생깨나 해본 분들은 무슨 말인지 금방 알 것이다. ‘문장 구조’가 완전히 달라 ‘사고’를 완전히 다르게 해야 하는 거였다.
영어 사용자들은 자신으로부터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인지 방식을 사용하고, 우리는 주변의 배경부터 시작해서 차츰 자신에게로 모이는 방식으로 말한다. 언어의 심리적 편향성이 사고방식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이러니 우리가 자신보다 남, 자기보다 주변을 더 먼저 신경 쓰는 식으로 발전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영어를 쓰는 미국 사람들보다 주변의 눈과 시선에 더 민감한지도 모른다.
“남들이 모두 ‘예스’할 때, ‘노’라고 말하겠습니다”는 광고 카피에서나 멋지게 볼 수 있는 말이다. 그렇게 했다가는 당장 찍히고 만다. 우리 속담에 괜히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한 것이 아니다. 한두 해 된 일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자꾸 “내 생각은 그 사람과 달라”라고 말하지 않고 “그 사람과 틀려”라고 틀리게 말하는 것은 실수가 아니라 언어습관을 넘어선 우리 본성에 새겨진 유전자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도 전적으로 내 억견(臆見)이다.
도올 김용옥, JYP 박진영, 야구감독 김성근. 이분들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는 한마디로 튀기 때문이다. 취향과 입장에 따른 ‘다름’이 ‘틀림’으로 보이기에 그런 것이다. 피겨 선수 김연아의 안티 카페를 만들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 이유가 “아직까지 안티 카페가 없으니까”였다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아무리 사회 지도층이나 선생들이 “눈치 보지 말고 소신대로 말하라” “자신의 길을 가라”고 목소리 높여도 소용없다. 좋은 말인 건 알지만 그건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공염불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편한 소리들 하시네.” 대충 이런 중얼거림이 돌아온다. 세상 누가 욕을 먹고 싶겠는가 말이다.
이러니 오바마는 정말 잘못했다. 평소 그토록 한국의 교육열이 훌륭하다고 치켜세우면서 정작 우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감히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하라고 다그치다니. 그것도 두 번씩이나.
노동지가 배은망덕하다고?
특이한 자들 중에 대단한 일을 한 사람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면 우리 고전에도 허다한 영웅들이 있다. 홍길동(洪吉同)도 그렇고 전우치(田禹治)도 그렇다. 임경업(林慶業)도 있고 유충렬(劉忠烈)도 있다. 이런 영웅들은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결국엔 성공하고 만다. 영웅들의 신나는 성공담을 그려내는 것이 목적인 그런 이야기 속에는 영웅들이 ‘튄다’고 해서 그들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
물론 적대적 무리는 있다. 하지만 적들도 비아냥거리지는 않는다. 원래 그런 비아냥 쑥덕공론은 같은 편끼리 뒤에서 하는 것이다. 원래 그렇게 ‘튀라고’ 그렇게 ‘튀는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만든 것이 영웅서사니 영웅의 돌출 행동은 오히려 박수를 받는다. 그런 영웅 이야기말고 지극히 현실적인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이런 내용이 전한다.
활도 잘 쏘고 무술도 대단한 노동지(盧同知)란 자가 있었다. 그런데 무과(武科)에 응시하면 초시(初試)는 매번 붙는데 번번이 회시(會試)에 낙방하기를 서른 번이나 하였다. 어느 날 밤중에 술에 취해 육조 앞 큰길에 떡 버티고 서서 순라군들과 시비를 벌였다. 임금 계신 한양은 통행금지가 있었으니 그런 행위는 큰 죄였다. 그런데 노동지는 나졸 네댓 명을 때려눕혀 버리고는 도망도 치지 않고 그대로 섰다가 우르르 몰려든 어영청(御營廳) 나졸들에게 잡혀 어영대장 홍봉한(洪鳳漢) 앞에 끌려갔다. 홍봉한의 질책에 노동지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소인의 운수가 나빠 번번이 무과에 낙방했습니다. 그래서 대감 문하에 들어갈까 했는데, 청지기가 대감님을 만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냥 통행금지를 어기면 관청에 끌려가 곤장이나 맞고 풀려날 것이어서 일부러 순라군들을 두들겨 팼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대감님 앞에 설 줄 알았습니다. 혼자서 한두 명을 상대해도 용력(勇力)이 있다고 할 텐데, 저는 다섯 명을 상대했으니 다섯 명의 용력이 있다고 할 겁니다. 저를 대감님 문하에 거둬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홍봉한은 역시 작은 인물이 아니었다. 빙긋 웃고는 노동지를 장교로 삼았다. 노동지는 매사에 영리하고 민첩하게 일을 처리했다. 무슨 일이든 그에게 맡기면 다시 돌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홍봉한은 그를 수족처럼 여기며 애지중지했다. 시간이 흘렀다. 홍봉한의 주선으로 노동지가 평안북도 서해안의 첨사(僉使)로 부임하게 되었다. 홍봉한은 평안도 감영과 병영에 편지를 하여 그가 일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매사에 두둔해 주었다.
그런데 노동지는 첨사직을 수행하는 3년 동안 단 한 번도 홍봉한에게 인사도 않고 편지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혀를 차며 그를 배은망덕하다며 손가락질했다.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 노동지가 홍봉한을 찾아갔다. 홍봉한은 크게 반기며 대접했다.
“그동안 별일 없었느냐? 녹봉으로 소득은 있었고?”
“소인이 대감의 은택으로 좋은 자리를 만나 잘 지냈습니다. 3년 동안 모은 녹봉을 착실히 모아 전답을 사서 이젠 지낼 만하게 되었습니다.”
홍봉한은 다행이라며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노동지는 금세 작별을 고하며 일어섰다.
“아니 벌써 가려고? 내 집에 머물며 지내지 그러느냐?”
노동지가 걸작 같은 대답을 했다.
“제가 전에 대감을 뵙고 힘을 다했던 것은 이렇게 살 만하게 되기를 바라서였습니다. 이제 먹고사는 것이 바라는바 이상이 되었는데 다시 무얼 구하겠습니까. 이젠 떠날까 합니다.” 그러고는 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어떤 사람이 노동지를 배은망덕하다고 책망하자, 노동지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느냐. 내가 대감 문하에 있은 지 10년이다. 여기저기에서 올라오는 선물들을 대감께서 모두 다 직접 살펴보시겠느냐? 어지간한 물건이 아니면 다 중간 것들이 대강 처리하고 만다. 그런데 내가 첨사라고는 하나 보잘것없는 지역인데, 그곳에서 힘을 써서 봉물을 올려도 그건 결국 너희 같은 놈들의 소유물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이 아니겠느냐.”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홍봉한은 실각하여 선영(先塋)으로 내려가 은거한다. 낙척(落拓)하고 나자 그를 모시던 그 누구도 홍봉한을 찾아오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종들도 모시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비로소 노동지가 지팡이를 짚고 홍봉한을 찾아갔다. 그러고 아침저녁으로 모시며 시중을 들었다. 홍봉한이 병환이 위중해지자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하며 약을 달여 먹였다. 그러다가 홍봉한이 죽자 직접 염습(斂襲)을 하고 입관(入棺)을 했다. 그렇게 장사를 마친 후 크게 슬피 통곡하며 돌아갔다.
뭇 사람의 입은 무쇠를 녹인다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했다. 길을 가던 서너 명이 함께 멈춰서서 하늘을 쳐다보면 지나던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쳐다본다는 거다. 혼자서 멀뚱히 하늘을 쳐다보면 그 사람이 바보가 되지만, 여러 명이 함께 쳐다보면 주변의 사람들 모두 아무것도 없는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심지어 뭔가를 봤다고까지 한단다.
있지도 않고 보지도 못한 호랑이를 봤다고 단 세 명만 입을 모으면 사람들이 믿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호랑이가 어린아이를 물고 가는 것을 봤다며 게거품을 무는 사람까지 생긴다. ‘삼인성호(三人成虎)’란 말이 공연한 게 아니다. “뭇 사람의 입은 무쇠라도 녹인다”고 했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말이 진실인 것 같다.
진실이든 아니든 일단 여러 명이 그렇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정말 믿는다. 있지도 않은 호랑이가 어린애를 물고 갔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불쌍한 어린애 때문에 눈물까지 흘린다. 물론 자신이 아무 근거 없이 우겨댔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모른다. 악의는 없었지만 이런 식의 대중의 손가락질, 대중의 조롱을 받으며 끝까지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힘들다 못해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손가락질이 인륜(人倫)에 기초한 거라면 더욱 그렇다.
남들 몰래 한 뒷일을 모르면, 한마디로 노동지는 인간도 아니다. 배은망덕에 기회주의자, 뻔뻔한 철면피인 셈이다. 자신을 믿어주고 후원해 준 홍봉한에게 입을 싹 닦은 것이다. 선물까지는 아니어도 인사조차 하지 않고, 한몫 챙겼다고 이젠 밑에서 굽실거리지 않겠다는 당돌한 말을 하며, 대뜸 돌아서 떠나서는 다시는 내왕도 않다니, 정말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싼 인간이다.
선물해 봤자 대감에게는 가지 않고 중간에 사라질 거라는 말은 억지 핑계처럼 들린다. 아니 그의 말대로라면 남들은 뭐가 된단 말인가? 때마다 약소하지만 선물과 인사를 한 사람들은 모두 얼간이란 말인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노동지 같은 자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수한 적이 불쑥불쑥 일어선다. 가만히 있는 자들까지 들쑤셔 등신(?)을 만드는 것이다. 만약, 홍봉한이 실각하지 않았다면, 아니 실각하기 전 호의호식할 때 죽었다면, 노동지는 어떻게 기억될까? 말할 필요도 없다. 천하의 파렴치한 놈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니 첨사밖에 못했지.”
“뻔뻔스럽기는 얼마나 뻔뻔했다고.”
“내가 보니 완전히 망나니던데.”
“쯧쯧, 홍봉한 대감은 어쩌자고 그런 소인배에게 속으셨어.”
한도 끝도 없을 거다. 만약 이렇게 자신에 대해 비난이 지속되고 그렇게 기억된다면 노동지는 어땠을까? 잘은 모르지만 그의 심지를 보니, 그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길을 갔다. 남들이 치켜준다고 해서 자신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비난한다고 해서 자신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당나귀 父子와 조변석개
물론 노동지는 자신의 본심을 알릴 기회가 있었다. 홍봉한이 낙척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 선택하라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보다는 홍봉한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기 바랐을 것이다. 노동지처럼 일매지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더욱 한국말을 사용하는 우리 세상이라면, 주변의 무수한 질타를 받으며 우직하게 살기란 너무나 힘겨운 일이다.
종종 떠올리는 《이솝우화》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시장에 내다 팔려고 끌고 가는 이야기다. 마을을 지날 때 사람들이 부자(父子)가 당나귀를 번갈아 타고 가는 것을 비웃자 결국 당나귀를 긴 장대에 묶어 아들과 함께 메고 가다 다리 아래 강물에 빠뜨리고 만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했다. 팔 당나귀도 없어졌으니 그동안의 고생도 헛일이었다. 문제는 손가락질하고 비아냥거리는 자들이 아니라 소신 없이 조변석개(朝變夕改)했던 것이 문제다. 그건 불안했기 때문이다. 뭔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 그리고 그 선택을 지켜나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한번 선택한 것을 바꾸지 않는 것이 또 다른 선택’이라는 말을 들려주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소신이 없는 것은 사실 비겁한 것이다. 자기 말만 계속하는 사람도 피곤하지만 만나서 아무 말도 않고 그저 웃기만 하는 사람도 남을 괴롭히는 것이다. 외려 제 의견은 하나도 내놓지 않고 싱글거리거나 입에 단내나게 다물고 있는 것이 더 나쁘다. 책임은 하나도 지지 않겠다는 이기적 심보다.
소신 없는 이유는 제 판단에 자신이 없기보다는 남들 속에 묻어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고 싶은 것이 먼저다. 스스로의 불안을 남들에게 투사하는 거다. 조기유학을 보내야 할지 말지, 스마트폰에 중독이 된다는데 애들에게 사줘야 할지 말지, 그 불안이 찾아낸 근거가 주로 이런 거다.
“다들 그런대.” “옆집 애들도 그 학원 보낸대.” “다 세상이 그런 거, 아냐?”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수강신청을 대신 해주는 부모가 있다는 한심스런 상황보다 제가 배울 커리큘럼을 부모에게 미루는 학생이 있다는 사실이 더 경악스럽다. 그렇게 부모에게 미루면 편하다. 피해갈 구멍이 생기니 말이다. 학점이 잘 안 나온 것은 수강신청을 잘못했기 때문이고, 물론 그건 엄마 잘못이다. 내 잘못은 없다.
선택하지 않았으니 책임도 없다는 심리적 도피처를 파놓고 그 안에 웅크리는 것이다. 이런 선택의 회피는 직장을 구하는 것, 결혼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첫날밤 체위로 적당한 것이 뭔지 전화로 물어보는 것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농담 같은가?
노동지는 제 삶을 살았다. 오해는 오해대로 진실은 진실대로 그대로 품고 자기 길을 걸어갔다. 제 진정을 몰라준다고 분노하지도 않고 알아달라고 떠들지도 않은 하나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리고 그건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물론 그 길을 따르느냐 아니냐는 우리 몫이다. 온전히 말이다.⊙
왜 깔아놓은 멍석에서 춤을 추지 못했을까? 혹시 영어를 못해서였을까? 자신의 발음이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니다. 원래 집단으로 모여 있으면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공동체 문화가 강한 유교 영향이라고 하면 속 편하겠지만 그도 아니다. 유교문화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기자가 제멋대로 ‘아시아 대표’ 운운하며 들이댄 것만 봐도 아니다. 그의 무례함은 내버려두고라도 아무튼 유교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오바마의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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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일 대구 수성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2016 프로야구 개막전 삼성과 두산의 경기에서 경기 시작 전 밴쿠버동계올림픽 피겨 금메달리스트 김연아가 시구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
어쩌면 정말 우리 말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말이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한다.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서술어가 문장 끝에 나오니 말이다. 그런데 영어를 비롯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말들은 서술어가 앞에 나온다. 주어 다음에 서술어를 듣고 뒤는 대강 흘려도 대세에 지장은 없다.
온 세상 모든 언어의 구조가 제각각이어도 공통적인 것은 문장에서 ‘서술어’가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그래서 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서술어의 위치에 따른 심리적 편향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뒤쪽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기고, 반대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앞쪽에 집중하는 인지가 발달된다.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옮기기 위해 고생깨나 해본 분들은 무슨 말인지 금방 알 것이다. ‘문장 구조’가 완전히 달라 ‘사고’를 완전히 다르게 해야 하는 거였다.
영어 사용자들은 자신으로부터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인지 방식을 사용하고, 우리는 주변의 배경부터 시작해서 차츰 자신에게로 모이는 방식으로 말한다. 언어의 심리적 편향성이 사고방식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이러니 우리가 자신보다 남, 자기보다 주변을 더 먼저 신경 쓰는 식으로 발전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영어를 쓰는 미국 사람들보다 주변의 눈과 시선에 더 민감한지도 모른다.
“남들이 모두 ‘예스’할 때, ‘노’라고 말하겠습니다”는 광고 카피에서나 멋지게 볼 수 있는 말이다. 그렇게 했다가는 당장 찍히고 만다. 우리 속담에 괜히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한 것이 아니다. 한두 해 된 일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자꾸 “내 생각은 그 사람과 달라”라고 말하지 않고 “그 사람과 틀려”라고 틀리게 말하는 것은 실수가 아니라 언어습관을 넘어선 우리 본성에 새겨진 유전자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도 전적으로 내 억견(臆見)이다.
도올 김용옥, JYP 박진영, 야구감독 김성근. 이분들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는 한마디로 튀기 때문이다. 취향과 입장에 따른 ‘다름’이 ‘틀림’으로 보이기에 그런 것이다. 피겨 선수 김연아의 안티 카페를 만들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 이유가 “아직까지 안티 카페가 없으니까”였다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아무리 사회 지도층이나 선생들이 “눈치 보지 말고 소신대로 말하라” “자신의 길을 가라”고 목소리 높여도 소용없다. 좋은 말인 건 알지만 그건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공염불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편한 소리들 하시네.” 대충 이런 중얼거림이 돌아온다. 세상 누가 욕을 먹고 싶겠는가 말이다.
이러니 오바마는 정말 잘못했다. 평소 그토록 한국의 교육열이 훌륭하다고 치켜세우면서 정작 우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감히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하라고 다그치다니. 그것도 두 번씩이나.
노동지가 배은망덕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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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견문록》 표지. 1862년 중인 출신 문인 유재건이 무인 노동지의 일생을 기록한 책이다. 사진=KBS 화면 캡처 |
물론 적대적 무리는 있다. 하지만 적들도 비아냥거리지는 않는다. 원래 그런 비아냥 쑥덕공론은 같은 편끼리 뒤에서 하는 것이다. 원래 그렇게 ‘튀라고’ 그렇게 ‘튀는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만든 것이 영웅서사니 영웅의 돌출 행동은 오히려 박수를 받는다. 그런 영웅 이야기말고 지극히 현실적인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이런 내용이 전한다.
활도 잘 쏘고 무술도 대단한 노동지(盧同知)란 자가 있었다. 그런데 무과(武科)에 응시하면 초시(初試)는 매번 붙는데 번번이 회시(會試)에 낙방하기를 서른 번이나 하였다. 어느 날 밤중에 술에 취해 육조 앞 큰길에 떡 버티고 서서 순라군들과 시비를 벌였다. 임금 계신 한양은 통행금지가 있었으니 그런 행위는 큰 죄였다. 그런데 노동지는 나졸 네댓 명을 때려눕혀 버리고는 도망도 치지 않고 그대로 섰다가 우르르 몰려든 어영청(御營廳) 나졸들에게 잡혀 어영대장 홍봉한(洪鳳漢) 앞에 끌려갔다. 홍봉한의 질책에 노동지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소인의 운수가 나빠 번번이 무과에 낙방했습니다. 그래서 대감 문하에 들어갈까 했는데, 청지기가 대감님을 만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냥 통행금지를 어기면 관청에 끌려가 곤장이나 맞고 풀려날 것이어서 일부러 순라군들을 두들겨 팼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대감님 앞에 설 줄 알았습니다. 혼자서 한두 명을 상대해도 용력(勇力)이 있다고 할 텐데, 저는 다섯 명을 상대했으니 다섯 명의 용력이 있다고 할 겁니다. 저를 대감님 문하에 거둬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홍봉한은 역시 작은 인물이 아니었다. 빙긋 웃고는 노동지를 장교로 삼았다. 노동지는 매사에 영리하고 민첩하게 일을 처리했다. 무슨 일이든 그에게 맡기면 다시 돌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홍봉한은 그를 수족처럼 여기며 애지중지했다. 시간이 흘렀다. 홍봉한의 주선으로 노동지가 평안북도 서해안의 첨사(僉使)로 부임하게 되었다. 홍봉한은 평안도 감영과 병영에 편지를 하여 그가 일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매사에 두둔해 주었다.
그런데 노동지는 첨사직을 수행하는 3년 동안 단 한 번도 홍봉한에게 인사도 않고 편지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혀를 차며 그를 배은망덕하다며 손가락질했다.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 노동지가 홍봉한을 찾아갔다. 홍봉한은 크게 반기며 대접했다.
“그동안 별일 없었느냐? 녹봉으로 소득은 있었고?”
“소인이 대감의 은택으로 좋은 자리를 만나 잘 지냈습니다. 3년 동안 모은 녹봉을 착실히 모아 전답을 사서 이젠 지낼 만하게 되었습니다.”
홍봉한은 다행이라며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노동지는 금세 작별을 고하며 일어섰다.
“아니 벌써 가려고? 내 집에 머물며 지내지 그러느냐?”
노동지가 걸작 같은 대답을 했다.
“제가 전에 대감을 뵙고 힘을 다했던 것은 이렇게 살 만하게 되기를 바라서였습니다. 이제 먹고사는 것이 바라는바 이상이 되었는데 다시 무얼 구하겠습니까. 이젠 떠날까 합니다.” 그러고는 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어떤 사람이 노동지를 배은망덕하다고 책망하자, 노동지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느냐. 내가 대감 문하에 있은 지 10년이다. 여기저기에서 올라오는 선물들을 대감께서 모두 다 직접 살펴보시겠느냐? 어지간한 물건이 아니면 다 중간 것들이 대강 처리하고 만다. 그런데 내가 첨사라고는 하나 보잘것없는 지역인데, 그곳에서 힘을 써서 봉물을 올려도 그건 결국 너희 같은 놈들의 소유물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이 아니겠느냐.”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홍봉한은 실각하여 선영(先塋)으로 내려가 은거한다. 낙척(落拓)하고 나자 그를 모시던 그 누구도 홍봉한을 찾아오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종들도 모시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비로소 노동지가 지팡이를 짚고 홍봉한을 찾아갔다. 그러고 아침저녁으로 모시며 시중을 들었다. 홍봉한이 병환이 위중해지자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하며 약을 달여 먹였다. 그러다가 홍봉한이 죽자 직접 염습(斂襲)을 하고 입관(入棺)을 했다. 그렇게 장사를 마친 후 크게 슬피 통곡하며 돌아갔다.
뭇 사람의 입은 무쇠를 녹인다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했다. 길을 가던 서너 명이 함께 멈춰서서 하늘을 쳐다보면 지나던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쳐다본다는 거다. 혼자서 멀뚱히 하늘을 쳐다보면 그 사람이 바보가 되지만, 여러 명이 함께 쳐다보면 주변의 사람들 모두 아무것도 없는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심지어 뭔가를 봤다고까지 한단다.
있지도 않고 보지도 못한 호랑이를 봤다고 단 세 명만 입을 모으면 사람들이 믿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호랑이가 어린아이를 물고 가는 것을 봤다며 게거품을 무는 사람까지 생긴다. ‘삼인성호(三人成虎)’란 말이 공연한 게 아니다. “뭇 사람의 입은 무쇠라도 녹인다”고 했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말이 진실인 것 같다.
진실이든 아니든 일단 여러 명이 그렇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정말 믿는다. 있지도 않은 호랑이가 어린애를 물고 갔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불쌍한 어린애 때문에 눈물까지 흘린다. 물론 자신이 아무 근거 없이 우겨댔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모른다. 악의는 없었지만 이런 식의 대중의 손가락질, 대중의 조롱을 받으며 끝까지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힘들다 못해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손가락질이 인륜(人倫)에 기초한 거라면 더욱 그렇다.
남들 몰래 한 뒷일을 모르면, 한마디로 노동지는 인간도 아니다. 배은망덕에 기회주의자, 뻔뻔한 철면피인 셈이다. 자신을 믿어주고 후원해 준 홍봉한에게 입을 싹 닦은 것이다. 선물까지는 아니어도 인사조차 하지 않고, 한몫 챙겼다고 이젠 밑에서 굽실거리지 않겠다는 당돌한 말을 하며, 대뜸 돌아서 떠나서는 다시는 내왕도 않다니, 정말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싼 인간이다.
선물해 봤자 대감에게는 가지 않고 중간에 사라질 거라는 말은 억지 핑계처럼 들린다. 아니 그의 말대로라면 남들은 뭐가 된단 말인가? 때마다 약소하지만 선물과 인사를 한 사람들은 모두 얼간이란 말인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노동지 같은 자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수한 적이 불쑥불쑥 일어선다. 가만히 있는 자들까지 들쑤셔 등신(?)을 만드는 것이다. 만약, 홍봉한이 실각하지 않았다면, 아니 실각하기 전 호의호식할 때 죽었다면, 노동지는 어떻게 기억될까? 말할 필요도 없다. 천하의 파렴치한 놈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니 첨사밖에 못했지.”
“뻔뻔스럽기는 얼마나 뻔뻔했다고.”
“내가 보니 완전히 망나니던데.”
“쯧쯧, 홍봉한 대감은 어쩌자고 그런 소인배에게 속으셨어.”
한도 끝도 없을 거다. 만약 이렇게 자신에 대해 비난이 지속되고 그렇게 기억된다면 노동지는 어땠을까? 잘은 모르지만 그의 심지를 보니, 그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길을 갔다. 남들이 치켜준다고 해서 자신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비난한다고 해서 자신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당나귀 父子와 조변석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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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숙 작품 〈당나귀와 부자〉. 종이에 먹, 79.5×100cm. 《이솝우화》의 〈당나귀와 부자〉에 기초한 연작 중 하나로, 줏대없는 인간의 모습을 풍자했다. 사진=디마모아갤러리 |
종종 떠올리는 《이솝우화》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시장에 내다 팔려고 끌고 가는 이야기다. 마을을 지날 때 사람들이 부자(父子)가 당나귀를 번갈아 타고 가는 것을 비웃자 결국 당나귀를 긴 장대에 묶어 아들과 함께 메고 가다 다리 아래 강물에 빠뜨리고 만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했다. 팔 당나귀도 없어졌으니 그동안의 고생도 헛일이었다. 문제는 손가락질하고 비아냥거리는 자들이 아니라 소신 없이 조변석개(朝變夕改)했던 것이 문제다. 그건 불안했기 때문이다. 뭔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 그리고 그 선택을 지켜나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한번 선택한 것을 바꾸지 않는 것이 또 다른 선택’이라는 말을 들려주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소신이 없는 것은 사실 비겁한 것이다. 자기 말만 계속하는 사람도 피곤하지만 만나서 아무 말도 않고 그저 웃기만 하는 사람도 남을 괴롭히는 것이다. 외려 제 의견은 하나도 내놓지 않고 싱글거리거나 입에 단내나게 다물고 있는 것이 더 나쁘다. 책임은 하나도 지지 않겠다는 이기적 심보다.
소신 없는 이유는 제 판단에 자신이 없기보다는 남들 속에 묻어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고 싶은 것이 먼저다. 스스로의 불안을 남들에게 투사하는 거다. 조기유학을 보내야 할지 말지, 스마트폰에 중독이 된다는데 애들에게 사줘야 할지 말지, 그 불안이 찾아낸 근거가 주로 이런 거다.
“다들 그런대.” “옆집 애들도 그 학원 보낸대.” “다 세상이 그런 거, 아냐?”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수강신청을 대신 해주는 부모가 있다는 한심스런 상황보다 제가 배울 커리큘럼을 부모에게 미루는 학생이 있다는 사실이 더 경악스럽다. 그렇게 부모에게 미루면 편하다. 피해갈 구멍이 생기니 말이다. 학점이 잘 안 나온 것은 수강신청을 잘못했기 때문이고, 물론 그건 엄마 잘못이다. 내 잘못은 없다.
선택하지 않았으니 책임도 없다는 심리적 도피처를 파놓고 그 안에 웅크리는 것이다. 이런 선택의 회피는 직장을 구하는 것, 결혼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첫날밤 체위로 적당한 것이 뭔지 전화로 물어보는 것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농담 같은가?
노동지는 제 삶을 살았다. 오해는 오해대로 진실은 진실대로 그대로 품고 자기 길을 걸어갔다. 제 진정을 몰라준다고 분노하지도 않고 알아달라고 떠들지도 않은 하나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리고 그건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물론 그 길을 따르느냐 아니냐는 우리 몫이다. 온전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