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천야록》의 현장 광양 - 구례를 가다
⊙ 선비의 뜻을 아는지 섬진강 주변은 꽃의 열병
⊙ 선비의 뜻을 아는지 섬진강 주변은 꽃의 열병
- 광양 매화마을에 매화가 만발해 있다. 마치 흰 눈이 내린 것처럼 온 천지가 하얗다.
한국의 봄은 남도(南道)에서 시작된다. 단언컨대, 그 시발점은 지리산과 섬진강이다. 넉넉한 흙과 물을 자양분 삼아 산수유, 매화, 벚꽃이 구례(求禮), 광양(光陽), 하동(河東) 줄기를 타고 대열을 맞추듯 피어난다. 이 시절, 이 동네는 봄의 열병을 앓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6년 전 엄동(嚴冬)을 뚫고 핀 매화처럼 고결한 선비가 구례에서 숨을 거뒀다. 지리산 노고단이 보이는 월곡마을에서 그는 네 수(首)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긴 뒤 아편을 입에 털어넣었다. 모름지기 그 땅을 밟는 자, 감상해 볼 일이다.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亂離滾到白頭年)
몇 번이나 목숨 버리려 했지만 그리하지 못했구나(幾合捐生却未然)
오늘은 정말로 어쩔 수 없게 되어(今日眞成無可奈)
가물대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輝輝風燭照蒼天)’
이 시를 쓴 황현(黃玹·1855~1910)은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호는 매천(梅泉)이라 썼다. 그가 사망한 구례에는 매천을 기리는 매천사와 그가 세웠던 호양(壺陽)학교 터가 남아 있다. 구례에서 남원 가는 길 초입에 안내판이 서 있다.
매천은 어릴 때부터 스승 왕석보로부터 “앞날이 촉망된다”는 평을 들었다. 스물네 살 때 서울로 올라와선 이건창과 교유하며 ‘한말 삼재(三才)’로 불릴 정도였다. 스물아홉 때 과거에 급제했으니 시골 출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장원에서 2등으로 밀렸다.
환멸을 느낀 매천은 칩거에 들어갔지만 과거에 재응시하라는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서른네 살 때 다시 과거에 합격했지만 이미 그의 조선은 민씨(閔氏)들이 활개치는, 무너져 가는 나라였다. 그때 그가 낙향하며 남긴 말이 있다. “도깨비 나라의 미치광이들!”
광양과 구례를 오가며 학문에만 정진했던 매천은 6권7책의 《매천야록》을 남겼다. 《매천야록》은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전 고종의 탄생과 즉위에 대한 신기로운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종로 운현궁(雲峴宮)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것이다.
〈… 철종 초에 장안에는 ‘관상감 터에서 성인이 나온다’는 동요가 떠돌았고 ‘운현궁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금상이 태어났다.〉 여기서 관상감은 일명 서운관(書雲觀)으로 천문지리를 맡아 보는 관청을 가리키고 있다.
이 서운관 자리에 운현궁이 들어섰는데 ‘금상’, 즉 고종(高宗)이 거기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매천야록》은 이후 장동김씨 일족의 횡포와 그에 저항하는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전한다.
대원군과 김병기의 氣싸움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개혁정치를 펴지만 장동김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매천야록》엔 다음과 같이 둘의 대화가 적혀 있다. “나는 천리를 끌어 지척을 삼을 것이며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 것이며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 싶은데 여러분은 어떠시오?”
이런 대원군의 물음에 김병기가 다음과 같이 답하고 물러났다. “천리도 지척이라면 지척이 되는 것이고 남대문도 3층으로 만들면 3층이 되는 것입니다. 대감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소이까. 다만 태산은 스스로 태산이니 어찌 평지로 바꾸겠습니까?”
대원군은 픽 웃고 말았다. 천지를 지척으로 삼겠다는 것은 종친(宗親)을 대접하며, 남대문을 높이는 것은 남인(南人)을 중용하겠다는 것이며, 태산을 평지로 깎는 것은 김씨의 노론을 억누르겠다는 것인데, 김병기가 이를 알고 ‘한 방’ 먹인 것이었다.
저무는 왕조(王朝)에는 우울한 징조들이 잇따른다. 첫 번째가 위계질서가 뒤집히는 것으로, 일찍부터 대원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매천은 기록했다. “조선에는 세 가지 커다란 폐단이 있으니 충청도 사대부와 평안도 기생과 전주 아전(衙前)이 그것이다!”
여기서 충청도 사대부는 우암 송시열을 태두로 한 노론 세력을 말하는 것 같고, 평안도 기생은 관리들의 넋을 앗아가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을 경계하는 것인데, 전주 아전에 대해선 전라감사 정봉조 시절, 한 아전이 선비를 매질한 사건이 나온다.
감사는 그 아전을 죽이라고 했는데 아전이 오히려 정봉조의 아버지 정기세에게 뇌물을 줘 무마하려 했다는 것이다. “삼 대에 걸쳐 이 감영에서 벼슬을 했으니 어찌 소자가 직책도 다하지 않고 녹봉만 먹겠느냐”며 정봉조가 버텨 결국 아전은 처형되고 말았다.
아랫물이 흐린데 윗물이 맑을 리 없다. 고종 역시 뇌물을 극히 좋아했는데 고종의 생일인 1887년 만수절(萬壽節) 때의 일이다. 경상감사 김명진이 상감에게 왜국 비단 오십 필과 황저포 오십 필을 바치자 고종은 얼굴색이 변하면서 용상 아래로 내던져 버렸다.
뇌물 좋아한 고종
뒤이어 전라감사 김규홍이 춘주(春紬)와 갑초 각 오백 필, 백동 오 합, 바리 오십 개 등을 바치자 고종이 말했다. “감사들이 이렇게 예를 차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자 김명진의 사위였던 충정공 민영환이 자기 돈 이만 냥을 장인의 선물에 더해 고종께 바쳤다.
어디 그뿐이랴 좌초한 배처럼 표류하는 조선의 황혼기에는 첩과 무당의 횡포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첫째는 김좌근의 첩 나합(羅閤)이다. 나주 기생 출신인 나합은 지략과 술수에 능해 김좌근은 곧 나합이라는 ‘독’에 빠져 국정을 더불어 논했다.
많은 벼슬이 나합을 통해 나왔는데 그중 나합과 간통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번은 관상을 잘 보는 참판 조연창이 나합과 정을 통하려다 갑자기 김좌근이 등장하자 놀라고 말았다. 당황하는 조연창을 대신해 나합은 “저도 관상을 보고 있었다”고 둘러댔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군인들을 피해 충주로 피난갔을 때였다. 한 무당이 나타나 환궁(還宮) 날짜를 점쳐 줬는데 신기하게도 적중했다. 황후가 무당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왔는데 몸이 좋지 않을 때면 무당이 묘하게도 아픈 곳만 골라 만져 줬다. 황후의 총애가 깊어지자 무당은 자신을 관성제군(關聖帝君) 딸이라 칭했다.
관성제군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관우다. 중전은 방약무인한 무당의 말에 현혹돼 그를 진령군(眞靈君)으로 봉했다. 진령군은 이제 아무 때고 대궐로 가 임금과 중전을 만났다. 임금과 중전은 그를 가리키며 이런 말도 했다. “군이 되니 믿음직하도다.”
임금과 중전의 총애가 쏟아지니 벼슬 노리는 자들이 들개처럼 진령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혹은 자매를 칭하고, 혹은 수양아들이 되겠다고 자청한 이들도 있었다. 《매천야록》에는 조병식, 윤영신, 정태호가 가장 심했다는데 그중엔 잠자리를 같이한 자도 있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알려진 것처럼 행정도 엉망이었는데 《매천야록》에는 개(犬)에게 벼슬을 준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등장한다. 충청도의 한 과부가 아이 없이 복구(福狗)라는 개 한 마리와 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녀가 복구 부르는 소릴 지나던 객이 들었다.
그는 잽싸게 복구에게 토목공사를 관리하는 감역이라는 벼슬을 준 뒤 대가를 챙기러 왔다. 과부는 이 소릴 듣고 탄식하며 “손님께서 복구를 보시겠소?”라고 했다. 큰 소리로 부르니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오는 것이었다. 망하기 직전 조선의 상황은 이랬다.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한 1905년의 을사늑약 이후의 기록은 조선의 권력자들의 민낯을 보여준다. 박제순·이근택·이완용·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으로 꼽히는 당시 내부대신 이지용은 나라를 팔아먹는 문서에 도장을 찍고 이런 궤변을 늘어놓았다.
“나는 오늘 최지천(崔遲川)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아니면 나랏일을 누가 하겠는가.” 여기서 ‘지천’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한 지천 최명길(崔鳴吉)을 말한다. 그런데 다음 사항을 보면 이지용이 최명길과 비교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강화(講和)문서를 찢자 “조정에는 이런 문서를 찢는 자도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 같은 자도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화전(和戰)을 함께 구사해야 한다는 뜻인데 과연 이지용은 그럴 자격이 있었는가.
나라가 망한 후 을사오적을 비롯한 간신들의 행태는 오늘날에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낯 뜨거웠다. 이지용의 처 이홍경은 일본 고관 아키하라를 비롯해 하세가와, 고쿠분 쇼타로 등과 간통했다. 아키하라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의 광경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배웅 나온 이홍경이 아키하라의 입속으로 혀를 내밀자 아키하라가 혀를 깨문 것이다. 장안에선 이를 빗대 만든 ‘작설가(嚼舌歌)’가 유행했다. 그런가 하면 이완용은 아들 이명구가 일본으로 유학 간 사이 며느리와 간통하다 갑자기 나타난 아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명구는 “집과 나라가 모두 망했으니 죽지 않고 어찌 버티랴!” 하고 비명을 지른 뒤 자살했다. 민긍식은 자기 첩이 낳은 딸과의 사이에서 네 번째 아들을 낳은 뒤 “점쟁이가 내게 아들 넷을 보겠다고 했는데 이놈이 수를 채웠다”고 자랑했다.
판서를 지낸 홍종헌의 조카는 과부 사촌누이와 간통해 첩으로 삼았는데 매헌은 “이것은 두드러지게 소문난 일이고 그 밖의 소소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나라가 망하자 법치와 질서는 물론 윤리마저 깡그리 붕괴된 것이다.
이 와중에 최익현·허위·이강년 같은 의병장들과 안중근·이재명 같은 의사(義士)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니 참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는 있는 자들의 몫이 아니라 생명을 초개처럼 나라 위해 바친 민초(民草)들의 것임을 《매천야록》은 냉철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매천야록》을 읽으며 가장 가슴 저렸던 부분은 1884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임명된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覺五郞)가 우리 관리들과 나눴다는 대화다. 이노우에는 얼굴이 못생겼지만 문학에 밝았고 우리말에도 능해 여러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이노우에의 일갈
어느 눈 오는 날 밤 이노우에는 박문국의 여러 주사들과 운을 내놓고 시를 짓는 등 화기애애한 잔치를 벌였다. 술에 취하자 이노우에가 말했다. “오늘 밤은 즐거우니 거리낌없이 말해도 되겠습니까? 공들은 평소 우리를 꼭 ‘왜놈 왜놈’이라고 하지요?”
이노우에는 이러는 것이었다. “공들은 사대부를 자처하고 사실 우리가 왜놈은 맞지요. 그러나 왜놈을 꺾어 굴복시킨 다음에라야 왜놈도 스스로 왜놈임을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공들이 입으로 사대부라고 떠든다고 해서 오늘날 왜놈을 물리칠 수 있겠소?”
그 말을 한 뒤 이노우에는 담뱃대를 들어 검술(劍術) 묘기를 보인 뒤 놀란 표정을 짓는 사대부들에게 또 한마디를 했다. “서양과 통상하던 초기에 우리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칼로 찌르려 했소. 나 같은 자도 검술을 배워 외국인 하나라도 더 베려 했소. 그런데 내가 검술을 이루자마자 외국과 강화가 성립돼 모든 게 쓸모없어졌소. 지금 여러분들이 보신 게 바로 그 검술 재주요. 공들이 검술도 모르면서 왜놈이라고만 한다면 우리 왜놈이 수긍하겠습니까?” 사대부들은 이에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이 일화는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에게도 뭔가 통찰을 줄 것이다. 총천연색으로 변하는 세상에 《매천야록》을 들춘다면 흥(興)이 반감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호국영령이 있었기에 과거 이렇게 초라했던 우리가 살아난 것은 아닐까.
남도기행을 계획하는 독자들이 계시다면 기자 나름의 추천 코스를 밝히고 싶다. 먼저 지리산 산수유 마을에 들러 꽃구경을 하고 온천에 몸을 담그시라. 이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구례-하동 간 도로를 쉬엄쉬엄 걷거나 차로 느릿느릿 달리는 것이다.
지리산의 웅장함 속에 한국 최고의 명당이라는 운조루(雲鳥樓)에 들러 어려운 이웃을 보살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교훈을 얻고 다시 은빛 물결 찰랑이는 섬진강을 따라 화개장터를 구경한 뒤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악양의 너른 벌판을 구경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섬진강을 두고 지리산과 마주하는 백운산 자락의, 지금은 아마 사라졌을 매화마을을 보고 내친 김에 광양으로 가 매천 황현의 유적을 찾아보는 것이다. 광양에는 이런 지사(志士)들의 꿈이 ‘산업의 쌀’로 변한 웅장한 제철소도 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사이에 둔 구례·하동·광양에는 도시에선 못 볼 진미가 천지로 널려 있다. 깨끗한 물에서만 자란다는 올갱이나 재첩국, 혹은 섬진강 민물 참게탕 한 그릇이면 이런 성찬(盛饌)이 없다는 탄성이 절로 터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더 부지런을 떤다면 하동쪽 지리산 깊숙이 틀어앉은 유서 깊은 쌍계사에 들러 우리 차의 시배지(始培地)를 구경해 보시라. 고원 층층이 지금 막 싹을 틔우고 있을 푸른 녹차의 융단이 끝없이 펼쳐지는 그 길에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들이 점점이 산재해 있다.
아마 그 모습을 본다면 몇백만 원씩 들여야 갈 수 있는 프랑스 와이너리의 장관(壯觀)보다 우리 산하의 멋과 맛과 역사가 내뿜는 향훈(香薰)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영국 유학시절 처음 본 프랑스 보르도의 포도밭보다 우리 하동·보성·월출산 주변의 차밭에 더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6년 전 엄동(嚴冬)을 뚫고 핀 매화처럼 고결한 선비가 구례에서 숨을 거뒀다. 지리산 노고단이 보이는 월곡마을에서 그는 네 수(首)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긴 뒤 아편을 입에 털어넣었다. 모름지기 그 땅을 밟는 자, 감상해 볼 일이다.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亂離滾到白頭年)
몇 번이나 목숨 버리려 했지만 그리하지 못했구나(幾合捐生却未然)
오늘은 정말로 어쩔 수 없게 되어(今日眞成無可奈)
가물대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輝輝風燭照蒼天)’
 |
| 매천 황현의 모습이다. 황현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매천은 어릴 때부터 스승 왕석보로부터 “앞날이 촉망된다”는 평을 들었다. 스물네 살 때 서울로 올라와선 이건창과 교유하며 ‘한말 삼재(三才)’로 불릴 정도였다. 스물아홉 때 과거에 급제했으니 시골 출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장원에서 2등으로 밀렸다.
환멸을 느낀 매천은 칩거에 들어갔지만 과거에 재응시하라는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서른네 살 때 다시 과거에 합격했지만 이미 그의 조선은 민씨(閔氏)들이 활개치는, 무너져 가는 나라였다. 그때 그가 낙향하며 남긴 말이 있다. “도깨비 나라의 미치광이들!”
광양과 구례를 오가며 학문에만 정진했던 매천은 6권7책의 《매천야록》을 남겼다. 《매천야록》은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전 고종의 탄생과 즉위에 대한 신기로운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종로 운현궁(雲峴宮)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것이다.
〈… 철종 초에 장안에는 ‘관상감 터에서 성인이 나온다’는 동요가 떠돌았고 ‘운현궁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금상이 태어났다.〉 여기서 관상감은 일명 서운관(書雲觀)으로 천문지리를 맡아 보는 관청을 가리키고 있다.
이 서운관 자리에 운현궁이 들어섰는데 ‘금상’, 즉 고종(高宗)이 거기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매천야록》은 이후 장동김씨 일족의 횡포와 그에 저항하는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전한다.
대원군과 김병기의 氣싸움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개혁정치를 펴지만 장동김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매천야록》엔 다음과 같이 둘의 대화가 적혀 있다. “나는 천리를 끌어 지척을 삼을 것이며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 것이며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 싶은데 여러분은 어떠시오?”
이런 대원군의 물음에 김병기가 다음과 같이 답하고 물러났다. “천리도 지척이라면 지척이 되는 것이고 남대문도 3층으로 만들면 3층이 되는 것입니다. 대감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소이까. 다만 태산은 스스로 태산이니 어찌 평지로 바꾸겠습니까?”
대원군은 픽 웃고 말았다. 천지를 지척으로 삼겠다는 것은 종친(宗親)을 대접하며, 남대문을 높이는 것은 남인(南人)을 중용하겠다는 것이며, 태산을 평지로 깎는 것은 김씨의 노론을 억누르겠다는 것인데, 김병기가 이를 알고 ‘한 방’ 먹인 것이었다.
저무는 왕조(王朝)에는 우울한 징조들이 잇따른다. 첫 번째가 위계질서가 뒤집히는 것으로, 일찍부터 대원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매천은 기록했다. “조선에는 세 가지 커다란 폐단이 있으니 충청도 사대부와 평안도 기생과 전주 아전(衙前)이 그것이다!”
여기서 충청도 사대부는 우암 송시열을 태두로 한 노론 세력을 말하는 것 같고, 평안도 기생은 관리들의 넋을 앗아가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을 경계하는 것인데, 전주 아전에 대해선 전라감사 정봉조 시절, 한 아전이 선비를 매질한 사건이 나온다.
감사는 그 아전을 죽이라고 했는데 아전이 오히려 정봉조의 아버지 정기세에게 뇌물을 줘 무마하려 했다는 것이다. “삼 대에 걸쳐 이 감영에서 벼슬을 했으니 어찌 소자가 직책도 다하지 않고 녹봉만 먹겠느냐”며 정봉조가 버텨 결국 아전은 처형되고 말았다.
아랫물이 흐린데 윗물이 맑을 리 없다. 고종 역시 뇌물을 극히 좋아했는데 고종의 생일인 1887년 만수절(萬壽節) 때의 일이다. 경상감사 김명진이 상감에게 왜국 비단 오십 필과 황저포 오십 필을 바치자 고종은 얼굴색이 변하면서 용상 아래로 내던져 버렸다.
뇌물 좋아한 고종
 |
| 광양에 있는 매천 선생의 생가다. 생가 뒤편에도 매화가 만발해 있다. |
어디 그뿐이랴 좌초한 배처럼 표류하는 조선의 황혼기에는 첩과 무당의 횡포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첫째는 김좌근의 첩 나합(羅閤)이다. 나주 기생 출신인 나합은 지략과 술수에 능해 김좌근은 곧 나합이라는 ‘독’에 빠져 국정을 더불어 논했다.
많은 벼슬이 나합을 통해 나왔는데 그중 나합과 간통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번은 관상을 잘 보는 참판 조연창이 나합과 정을 통하려다 갑자기 김좌근이 등장하자 놀라고 말았다. 당황하는 조연창을 대신해 나합은 “저도 관상을 보고 있었다”고 둘러댔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군인들을 피해 충주로 피난갔을 때였다. 한 무당이 나타나 환궁(還宮) 날짜를 점쳐 줬는데 신기하게도 적중했다. 황후가 무당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왔는데 몸이 좋지 않을 때면 무당이 묘하게도 아픈 곳만 골라 만져 줬다. 황후의 총애가 깊어지자 무당은 자신을 관성제군(關聖帝君) 딸이라 칭했다.
관성제군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관우다. 중전은 방약무인한 무당의 말에 현혹돼 그를 진령군(眞靈君)으로 봉했다. 진령군은 이제 아무 때고 대궐로 가 임금과 중전을 만났다. 임금과 중전은 그를 가리키며 이런 말도 했다. “군이 되니 믿음직하도다.”
 |
| 매천 선생의 생가 내부 모습이다. 시에서 복원을 한다고 잔뜩 페인트칠을 해 놔 옛 모습을 잃었다. |
‘삼정의 문란’으로 알려진 것처럼 행정도 엉망이었는데 《매천야록》에는 개(犬)에게 벼슬을 준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등장한다. 충청도의 한 과부가 아이 없이 복구(福狗)라는 개 한 마리와 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녀가 복구 부르는 소릴 지나던 객이 들었다.
그는 잽싸게 복구에게 토목공사를 관리하는 감역이라는 벼슬을 준 뒤 대가를 챙기러 왔다. 과부는 이 소릴 듣고 탄식하며 “손님께서 복구를 보시겠소?”라고 했다. 큰 소리로 부르니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오는 것이었다. 망하기 직전 조선의 상황은 이랬다.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한 1905년의 을사늑약 이후의 기록은 조선의 권력자들의 민낯을 보여준다. 박제순·이근택·이완용·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으로 꼽히는 당시 내부대신 이지용은 나라를 팔아먹는 문서에 도장을 찍고 이런 궤변을 늘어놓았다.
 |
| 매천 선생 생가 근처에 있는 사당이다. 매천은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주로 활동했다. |
최명길은 김상헌이 강화(講和)문서를 찢자 “조정에는 이런 문서를 찢는 자도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 같은 자도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화전(和戰)을 함께 구사해야 한다는 뜻인데 과연 이지용은 그럴 자격이 있었는가.
나라가 망한 후 을사오적을 비롯한 간신들의 행태는 오늘날에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낯 뜨거웠다. 이지용의 처 이홍경은 일본 고관 아키하라를 비롯해 하세가와, 고쿠분 쇼타로 등과 간통했다. 아키하라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의 광경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배웅 나온 이홍경이 아키하라의 입속으로 혀를 내밀자 아키하라가 혀를 깨문 것이다. 장안에선 이를 빗대 만든 ‘작설가(嚼舌歌)’가 유행했다. 그런가 하면 이완용은 아들 이명구가 일본으로 유학 간 사이 며느리와 간통하다 갑자기 나타난 아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
| 구례에 있는 매천사다. 지리산 천은사 가는 길목에 있다. 대문에는 창의문이라고 적혀 있다. |
판서를 지낸 홍종헌의 조카는 과부 사촌누이와 간통해 첩으로 삼았는데 매헌은 “이것은 두드러지게 소문난 일이고 그 밖의 소소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나라가 망하자 법치와 질서는 물론 윤리마저 깡그리 붕괴된 것이다.
이 와중에 최익현·허위·이강년 같은 의병장들과 안중근·이재명 같은 의사(義士)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니 참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는 있는 자들의 몫이 아니라 생명을 초개처럼 나라 위해 바친 민초(民草)들의 것임을 《매천야록》은 냉철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매천야록》을 읽으며 가장 가슴 저렸던 부분은 1884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임명된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覺五郞)가 우리 관리들과 나눴다는 대화다. 이노우에는 얼굴이 못생겼지만 문학에 밝았고 우리말에도 능해 여러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이노우에의 일갈
 |
| 구례 매천사는 황현이 목숨을 끊은 곳이다. 대문은 굳게 잠겨 있고 내부로 비석이 보인다. |
이노우에는 이러는 것이었다. “공들은 사대부를 자처하고 사실 우리가 왜놈은 맞지요. 그러나 왜놈을 꺾어 굴복시킨 다음에라야 왜놈도 스스로 왜놈임을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공들이 입으로 사대부라고 떠든다고 해서 오늘날 왜놈을 물리칠 수 있겠소?”
그 말을 한 뒤 이노우에는 담뱃대를 들어 검술(劍術) 묘기를 보인 뒤 놀란 표정을 짓는 사대부들에게 또 한마디를 했다. “서양과 통상하던 초기에 우리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칼로 찌르려 했소. 나 같은 자도 검술을 배워 외국인 하나라도 더 베려 했소. 그런데 내가 검술을 이루자마자 외국과 강화가 성립돼 모든 게 쓸모없어졌소. 지금 여러분들이 보신 게 바로 그 검술 재주요. 공들이 검술도 모르면서 왜놈이라고만 한다면 우리 왜놈이 수긍하겠습니까?” 사대부들은 이에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이 일화는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에게도 뭔가 통찰을 줄 것이다. 총천연색으로 변하는 세상에 《매천야록》을 들춘다면 흥(興)이 반감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호국영령이 있었기에 과거 이렇게 초라했던 우리가 살아난 것은 아닐까.
 |
| 구례 호양학교 터다. 황현은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하려면 인재를 양성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
지리산의 웅장함 속에 한국 최고의 명당이라는 운조루(雲鳥樓)에 들러 어려운 이웃을 보살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교훈을 얻고 다시 은빛 물결 찰랑이는 섬진강을 따라 화개장터를 구경한 뒤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악양의 너른 벌판을 구경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섬진강을 두고 지리산과 마주하는 백운산 자락의, 지금은 아마 사라졌을 매화마을을 보고 내친 김에 광양으로 가 매천 황현의 유적을 찾아보는 것이다. 광양에는 이런 지사(志士)들의 꿈이 ‘산업의 쌀’로 변한 웅장한 제철소도 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사이에 둔 구례·하동·광양에는 도시에선 못 볼 진미가 천지로 널려 있다. 깨끗한 물에서만 자란다는 올갱이나 재첩국, 혹은 섬진강 민물 참게탕 한 그릇이면 이런 성찬(盛饌)이 없다는 탄성이 절로 터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더 부지런을 떤다면 하동쪽 지리산 깊숙이 틀어앉은 유서 깊은 쌍계사에 들러 우리 차의 시배지(始培地)를 구경해 보시라. 고원 층층이 지금 막 싹을 틔우고 있을 푸른 녹차의 융단이 끝없이 펼쳐지는 그 길에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들이 점점이 산재해 있다.
아마 그 모습을 본다면 몇백만 원씩 들여야 갈 수 있는 프랑스 와이너리의 장관(壯觀)보다 우리 산하의 멋과 맛과 역사가 내뿜는 향훈(香薰)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영국 유학시절 처음 본 프랑스 보르도의 포도밭보다 우리 하동·보성·월출산 주변의 차밭에 더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