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수 교수의 우리 고전 비틀기 〈3〉 태초에 線이 있었다! : 월간조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집이라고 하면 꼭 담이 있어야 한다. 일반 주택에 사는 매력 중 하나인 마당 있는 집도 마찬가지다. 그 마당도 담이 있으니 마당이지 담이 없다면 그냥 한길가로 툭 터진 공터일 뿐이다. 공동주택인 아파트도 따지고 보면 아파트 동을 크게 둘러싼 담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개인의 공간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행정적 구획일 뿐이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 안에 아무나 쉽게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이웃과의 소통을 위해 담장을 낮추자거나, 아예 담장을 없애자는 논의도 있고 또 실제로 그런 일을 하는 동네도 있다. 하지만 실상을 잘 보면 거기도 낮을지언정 담장이 있다. 하다못해 화초라도 심어 어느 정도의 구분을 한다. ‘여기까지는 우리 집이야’ 하고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담은 태초부터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담이 있어야 바로 구분이 되고 구분이 되는 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이니 말이다.

엘리베이터 안이 불편한 공간이라는 것은 모두들 잘 안다. 그 앞에서 잘도 떠들던 친구 사이도 땡! 하고 문이 열려 그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가면 금방 어색한 사이가 된다. 갑자기 입을 닫든지 아니면 애써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무슨 엄청난 비밀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건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공간이 우리를 다닥다닥 붙게 해서 ‘나만의 사적 공간’을 상호 침범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색한 무대가 되고 마는 것은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구분 없이 뭉뚱그려 엉켜 버린 것이 못내 갑갑하고 불편한 것이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바벨탑을 쌓은 이유

사람이 살아가려면 일정한 공간이 필요한데, 거기에 꼭 ‘자기만의’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한다. 사춘기 애들마냥 혼자 있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런 최소한의 범위가 ‘인간다움’을 말들어 낸다. 그 안에서 사람은 평안함을 느낀다. 터무니없이 널따란 거실에 홀로 들어서면 공연히 불안한 것은 정상이다. 그래서 그 공간에 구획을 주기 위해 카펫을 깔기도 하고 소파를 놓기도 한다. 그렇게 공간을 규정하고 정리·구획함으로써 평안함을 느낀다.

담을 쌓는 이유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도 있지만 사실 그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그깟 낮은 담이 무엇이겠는가. 맘만 먹으면 쉽게 넘을 수 있는데 말이다. 옛날 집들을 떠올려도 마찬가지다. 나무로 듬성듬성 엮어 만든 사립문이야 발로 뻥 차면 그만이다. 담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담장 안에 있는 자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담이다. 조선시대 담장을 높이 세울 능력이 없어서 나지막하게 한 것이 아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화평한 기운을 주기에 만족했던 것이다.

언제부터 이런 담장이 생겼을까? 물리적 담장의 유래야 문헌을 찾아 고증하고 고고학적 유물을 추적하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물리적 담장 이전에 있던 심미적 담장은 어땠을까? 그리고 그 모습은 어땠을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담장을 세우는 것보다 더 먼 옛날엔 그냥 땅에다 금을 그었다. 땅에 선을 긋고 여기와 저기를 나눴다.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보자. 지금 같은 도로와 건물은 물론 인공적인 것이 하나 없는 먼 옛날에 사람들은 어디에 모여 살았을까? 흩어지면 맹수들에게 공격을 당하기 쉽고 혼자서는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만만치 않으니 분명 여럿이 모여 함께 생활했을 것이다. 자,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모여 살았을까? 엉뚱한 질문이 아니다. 도로명도 이정표도 지도도 없던 그 옛날, 허허벌판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다시 어떻게 돌아왔을까? 모든 사람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 위해서는 뭔가 ‘기준’이 필요했을 거다. 어디 어디에 모이자, 라는 약속을 했을 테고 그 약속한 곳은 분명 어디로 가든지 알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에 있든지 보이는 곳’이 적합했을 거고, 그리고 그런 곳은 바로 높은 곳이 제격이었을 거다.

《구약성경》에서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이 했던 엉뚱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당장 자기 먹고살기도 척박했을 것이 분명한 그 시대에 사람들이 모여 뭔가를 열심히 쌓았다고 한다. 그 유명한 바벨탑을 쌓았던 것이다. 그들이 탑을 높게 쌓은 이유를 그들 목소리로 《구약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온 땅 여기저기로 흩어지지 말자.”

이들의 목표는 절실했다. 흩어지면 죽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힘든 노동을 견뎌 내며 어디서든 보이는 높은 탑을 쌓은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벨탑이 실제이든 아니든 그 이야기가 전해진 곳은 분명히 넓고 광활한 곳일 게다. 높은 산이 있으면 굳이 그렇게 탑을 쌓을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저기로 와. 저기서 모이자.”

이 말로 충분하니 말이다. 이제 우리 선조 단군을 낳으신 환웅천왕이 다른 곳도 아닌 굳이 높은 태백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온 이유를 알겠는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온 세상 모든 신화를 들추기만 하면 어디든 나오는 말이다. 높은 곳으로 신이 강림하는 것은 높은 곳이 여럿일 때 꼭 필요한 조치이다. 멀리서 보이는 여러 봉우리가 있지만, 다른 곳이 아닌 여기, 이 장소로 모이게 하기 위해선 반드시 다른 의미 부여가 필요한 법이다.

“여기가 환웅천왕께서 강림하신 곳이다.”

이 말 한마디로 다른 어느 곳보다 ‘더 높은’ 곳이 된다. 실제 더 높은지의 물리적 문제는 상관없다. 높다면 높은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에 그곳이 자리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로 모여든다. 그리스에서 사람들이 모여 고대 민주주의를 했다는 장소가 아크로폴리스인데, 그 ‘아크로(akros)’가 바로 ‘높다’는 의미의 형용사이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바로 높은 곳이고,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보이게 되는 곳이 핵심, 중심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배꼽과 〈부시맨〉

그리스 델포이의 유적 톨로스. 고대 그리스인들은 평평한 지구에서 델포이를 세계의 중심지, 즉 옴팔로스(배꼽)라 부르고 그 자리에 원추형 돌을 세웠다.

이렇게 사람들은 세상의 중심에 있는 높은 곳으로 모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곳곳마다 높은 곳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세상 곳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신들만의 중심’이 있었다. 그러던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다. 사귀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하면서 새롭게 인식의 재편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와 저기 중 더 ‘높은 곳’을 가려야 했다. 물론 더 높은 곳은 이긴 자들이 중심이라고 우기던 곳으로 낙찰된다. 그리고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거기가 진정한 세상의 중심인 이유는 신이 바로 거기에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에 오래된 명산(名山)들이 허다하지만 진정한 세상의 중심은 곤륜산(崑崙山)이다. 그 산을 통해 신들이 내려왔고 아주 옛날에는 사람들이 그 산을 통해 천상에 올라가기도 했단다. 즉, 진정한 세상의 중심으로 곤륜산이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고대의 곤륜산은 지금 중국 여기저기서 말하는 실제 곤륜산이 아니다.

서양에서도 교통정리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세상의 중심이 델포이(Delphoe)에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델포이는 모든 신전의 중심이 되는데, 사람들은 모두 다 그곳에 가서 그 유명한 ‘델포이 신탁’을 받았다. 바로 그 세상의 중심을 라틴어로 옴팔로스(Omphalos)라고 하는데, 그 의미를 풀면 ‘세상의 배꼽’이란 뜻이다. 이 말은 세상의 중심이 어떤 곳인지를 분명하게 말해 준다.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던 탯줄이 잘려서 만들어진 것이 배꼽이다. 그러니 세상의 배꼽은 신에게 연결되었던 곳이다. 거기가 바로 세상 모든 것이 생겨나고 발생된 최초의 중심지라는 의미이다. 바로 그곳 델포이에서만 그 유명한 신탁(神託)이 내린다. 어머니와 탯줄로 소통했듯이 바로 거기에 가야만 우리가 신과 교통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배꼽이든 중심이든, 아무튼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살게 되었는데 실제 심각한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어디까지를 중심이라고 볼 것이냐는 문제였다. 모든 것이 분명하게 구획·정리되어 있는 요즘 사람들은 느끼기 힘든 문제다. 누구든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국적이 취득되고 이러저러한 혜택과 함께 때론 간섭을 받는 현대인들은 분명한 소속감이 있다. 하지만 옛날은 아니었다. 어디까지, 정확하게는 중심으로부터 얼마나 가깝게 있어야 ‘나는 저 중심의 부족이다’라고 느낄 수 있을까? 이는 단순히 부족, 민족,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더 본질적인 생존의 문제였다. 이를테면 내가 아무리 이쪽 사람이라고 해도 대다수가 ‘너는 아니야!’라고 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즉, 중심에 모이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어디까지, 어느 정도 가까워야 내가 저 중심의 사람인지, 하는 것 말이다.

1980년에 보츠와나, 남아프리카공화국 합작으로 제임스 유이스 감독이 만든 코미디 영화. 원제는 〈신이 미쳤음에 틀림없어〉였으나 국내에서는 〈부시맨〉이라 이름 붙여 상영했다.

좀 오래된 영화지만 〈부시맨〉이란 영화를 보면 이런 문제가 극명하게 나타난다. 어느 날 경비행기를 타고 부시맨 마을을 지나치던 파일럿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마시던 코카콜라 병을 땅에 던져 버린다. 그렇게 부시맨 마을에 떨어진 콜라 병이 모든 사달의 근원이 되어 버린다. 결국 주인공 부시맨 아저씨가 그 병을 하늘로 돌려보내려 하나, 아무리 공중에 던져 봐도 하늘로 올라갈 리 없었다. 결국 부시맨 아저씨는 자신이 그 병을 ‘세상의 끝’에 가져다 버리겠다며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결국 세상의 끝에 도착해서 그 병을 던져 버린다. 그러니까, 세상 밖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모두 다 알다시피 지구는 둥글기에 아무리 걸어도 끝은 나오지 않는다. 끝이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고대인들과 같은 우주관을 지니고 있는 부시맨에게는 세상의 끝이 당연히 있고, 그 끝을 향해 계속 걷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대체 이 부시맨은 어디를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떠나질 않는다.

그가 찾은 세상의 끝은 깎아지른 절벽의 꼭대기였다. 계속해서 걷던 그는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는 험한 계곡 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는 거기가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고는 미련 없이 콜라병을 던지고 돌아온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부시맨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모여 사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부시맨 일족은 많아도 30~40명에 불과하니 세상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흩어져 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그리고 부시맨의 아프리카 지역처럼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한계의 절벽이 반드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러니 조금 문제가 복잡해진다.

누구든 끝에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뭔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무시무시한 것이 저쪽에서 달려들 수도 있다. 역사시대만 봐도 그렇다. 세종대왕이 한반도 북쪽에 4군과 6진을 개척한 후 그 땅에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는데, 그것은 아무도 그런 ‘변방’에, 즉 위험하고 살기 괴로운 곳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실질적으로 그 땅이 척박하냐와 같은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역사 기록을 보나 현재의 만주 지역을 통해 가늠해 보나, 그들이 강제로 이주해 간 곳은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 ‘끝’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변방이기 때문이다. 굳이 예를 들면, 동일한 군대의 이등병이라 해도 사단 보급과에서 이등병 노릇 하고 싶지, 말단 소총부대에서 이등병 노릇 하고 싶지는 않은 것과 같다. 같은 이등병이라도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구든 조금이라도 중심에 가깝고 싶지, 멀리 떨어지고 싶지는 않다. 하물며 그 끄트머리에 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그 끝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안심하고 살게 할 수 있을까? “걱정 마, 너도 여기 안쪽 사람이야. 중심 부족이라니까”라고 말해 줄 방법이 무엇일까? 그때 등장한 것이 담이었다. 정확하게는 한 줄기 선(線)을 죽 긋는 거였다. 그렇게 금을 그어 놓고, “이쪽은 안이고 저쪽은 밖이다”라고 선언하는 거였다. 그렇게 금 안쪽은 모두 ‘중심’이 되는 거고 그렇게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라고 외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처럼 ‘우리’, ‘나’라고 여기는 거였다. 같은 핏줄, 단일민족은 이렇게 탄생했다.

神正論

어린 딸이 황금으로 변한 것을 보고 놀라는 미다스 왕. 1893년 영국 화가 월터 크레인(Walter Crane) 작품.

옛 속담에 ‘문지방에 앉지 마라’는 말이 있다. 방문을 열면 그 아래 문턱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것이 문지방이다. 어렸을 적에 이 말이 너무 이상했던 것은 그 앉기 편한 곳에 왜 앉지 말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 앉았다가 호되게 혼난 이후 방문을 건널 때마다 찔끔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땐 문지방에 앉았다가 미끄러지거나 뒤로 발랑 넘어지면 다칠까 봐 어른들이 앉지 말라고 한 거라고 내 맘대로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다.

문지방은 방 안과 방 밖을 구분하는 선이다. 그것이 없으면 어디가 안인지 밖인지 구분이 안 선다. 그 선이 사라지면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혼돈(Chaos)이 일어나 뒤죽박죽되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만다. 중심이고 끝이고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혼란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미다스(Midas) 왕 이야기다.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하는 사람이나 그런 재주를 일컬어 ‘미다스의 손’, 또는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하는 것이 이 이야기에서 나왔는데, 원래는 그렇게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세상에 온갖 혼란을 일으키는 거였다.

욕심꾸러기 미다스 왕은 디오니소스 신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자,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빈다. 신이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약속이니만치 들어주었다. 쾌재를 부르며 돌아온 미다스 왕은 길가의 나뭇가지를 꺾자 그대로 황금가지가 되고, 들판의 보리를 만지자 황금 이삭이 되어 버렸다.

한껏 흥분한 미다스 왕은 궁궐의 기둥도 황금으로 만들고, 벽도 황금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온통 만지고 다닌 거다. 그러다가 문득 목이 타서 포도주를 집어 들었는데, 세상에 이를 어쩌나, 포도주도 황금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배가 고파 고기를 집어 들어도 딱딱한 황금이 되고, 심지어 사랑하는 외동딸을 저도 모르게 끌어안아 황금 동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미다스 왕은 다시 디오니소스 신을 찾아가서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진심으로 후회하는 왕을 측은히 여긴 디오니소스가 방법을 가르쳐 준다. 미다스 왕은 신이 시킨 대로 팍톨로스(Pactolus) 강에 가서 손을 씻고 나서야 비로소 원래대로 돌아온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상했던 것은, 미다스 왕이 공주를 손으로 안지 않으면 그만인데 왜 그랬을까 하는 것과 먹는 것을 굳이 제 손으로 집어 먹지만 않으면 될 것을 왜 그런 고민에 빠졌느냐 하는 거였다. 신하 중에서 한 명을 뽑든지 아니면 아리따운 시녀를 선발해서 밥을 먹여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그야말로 어린 생각을 했었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그렇게 속된 생각으로 풀면 안 된다. 여기에는 바로 질서(Cosmos)와 무질서인 혼돈의 심오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황금색은 인간의 색이 아니라 신의 색이었다. 사람들이 하늘의 눈부신 태양을 황금으로 이해했다.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가 ‘신의 아들’이고 그의 시신을 덮는 마스크(Mask)를 황금으로 만든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중국에서도 중앙을 의미하는 색은 황금의 색인 노랑이다. 반짝거리는 황금은 반짝거려서도 그렇지만 태양과 유사한 색이기에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고, 그래서 그 자체로 신적인 것이었다. 미다스 왕이 황금을 좋아한 것이나, 자신이 만지는 것을 모두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는 소원은 한마디로, “내가 신이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즉, 미다스 왕은 지상에 사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있는 신의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그것이 문제적인 것은 ‘인간 주제에 감히 신이 되려 하다니’와 같은 진노를 부르는 행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상에는 신이 존재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 미다스 왕은 본래 구분되어 있던 것을 혼재시키려 했기에 문제적이었다. 그 혼란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자신이 먹을 떡까지 금덩이로 만들어 버리고 사랑하는 딸까지 황금 동상으로 변하게 하여 버린 상황이다. 세상 모든 것이 금이라면 그게 대체 인간이 살 수 있는 세상이겠는가? 금이 아무리 좋아도 금을 먹고 살 수는 없다. 다른 건 하나도 없이 오직 금 천지인 세상은 신들의 세상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인간 세상은 아니다. 그런 곳에 살고 싶지도 않지만 살 수도 없다.

왜 세상에 악이 있을까? 신은 선한데 왜 세상엔 악이 창궐할까? 선한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면서 대체 왜 이런 걸까? 악이란 놈은 어디서 틈입했을까? 대충 이런 고민을 진지하게 하는 것을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한다.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해 여러 고등종교들은 “이 세상은 심판의 장이 아니니 참아라”든지 “최후의 심판 때에 결판이 날 것이다” 또는 “속된 인연을 끊고 벗어나라” 등과 같은 다양한 대답을 하는데, 그 대답을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또 그렇게 맘에 잘 와 닿지도 않는다. 그런데 신화는 이 질문에 대해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 신화는 종교가 아니기에 확적히 꼬집어서 강조하지는 않지만, 굳이 따져 보면 이렇게 말한다는 거다.

“신에겐 신의 영역이 있고 인간에겐 인간의 영역이 있다.”

듣고 나면 눈이 끔뻑거려진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그렇지만, 신은 신의 일을 할 테니 인간들은 알아서 제 삶을 살라는 말로 들리니 문득 화가 난다. 아니 대체 왜 우리를 만들어 놓고 이렇게 피곤하게 살라고 한단 말인가. 누가 태어나고 싶어 이 세상에 태어났나?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신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신은 인간의 일에 전면적으로 참견하지 않는다.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인간을 불쌍히 여겨 ‘신의 불’을 훔쳐서 인간들에게 건네준 프로메테우스 신이 벌을 받은 것만 봐도 그렇다.

신은 전지전능하지만 아니 그렇게 전지전능하기에 인간 일에 끼어들면 안 된다. 모든 것을 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신을 찾으며 죽어라 노력하고 기도하는 자에게 아주 가끔, 그것도 찔끔, ‘한정적인 복’을 줄 뿐이다. 앞일을 알려준다는 델포이 신탁도 빙빙 복잡하게 뒤틀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로 들려준다. 들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피할 수 없는 묘한 말을 던질 뿐이다. 선문답(禪問答)이 따로 없다.

신은 절대로 ‘전면적’이고 ‘절대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개입하는 순간, 이 세상은 인간 세상이 아니라 신들의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유치원 아이와 헤비급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의 권투시합보다 더 황당한 대결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화시켜 버리고 싶은가? 아니면 이대로 살고 싶은가? 조금 불편하고 짜증스러워도 어느 것이 나을지는 분명하지 않은가.

그래서 신은 신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 세상에서 인간들의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알려주는 진실이다. 그러므로 신이 아무리 급하고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직접’ 세상에 내려와 다스리지 않는다.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못한다. 그런 짓을 하면, 그 순간 이 세상은 신의 세계도 인간 세계도 아닌 엉망인 세계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군신화의 환웅은 이 세상에 내려와 그 복잡한 방식으로 곰을 여자로 만들어서 단군을 낳게 한 것이고, 제우스는 굳이 사통을 해서 헤라클레스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이다. 신들의 그 복잡하고 피곤한 행위는 모두 이 세상의 질서, 코스모스(Cosmos)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제 미다스 왕이 소원했던 것이 왜 문제인지를 알겠는가? 황금 손으로 이 세상을 온통 황금으로 만들어 대는 일은 단순한 탐욕을 넘어, 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세계를 온통 휘저어 난장판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구분되어 있던 것을 합해 버린 것이다. 있어야만 하는 경계, 분명한 담, 명확한 선을 제멋대로 뛰어넘고 없애고 지워 버렸던 것이다. 그가 황금 손으로 한 일은 행복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들이 살 수 없는 이상한 황금 세상을 초래했다. 혼돈을 불러온 것이다.

갇힌 미다스 왕과 禁忌

《성경》에 등장하는 소돔은 죄악으로 인해 하느님의 유황불 심판을 받았다. 심판을 피해 도시를 빠져나오던 롯의 가족 중 뒤를 돌아다본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으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사해 해안에는 롯의 아내라는 이름의 소금기둥 바위가 존재해 관광객을 끌고 있다.

나쁜 생각이지만 이런 끔찍한 생각이 떠오른다. 황금으로 만드는 미다스 왕을 땅속 깊은 동굴이나 높은 첨탑 감옥에 가두고서, 필요할 때마다 이런저런 기물들을 던져 주며 황금으로 만들라고 협박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런다면 정말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다스는 갇혀 있으니 이 세상에 혼란이 일어날 것도 없다. 이래저래 그가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가 갇혀 있는 곳 정도일 테니 말이다.

어떤가? 좋은 생각 아닌가? 맞다. 미다스 왕 입장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겠지만,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지도 않으면서 때때로 요긴히 써먹을 수도 있으니. 비밀을 말하자면, 사실 세상은 그렇게 ‘미다스 왕을 가둬 놓은 것’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갇힌 미다스 왕에게 황금을 만들어 내라고 윽박지르면서 발전했고 찬란한 문명을 일궈 냈다. 아닐 것 같다고? 아니, 내 말이 맞다. 우리는 미다스 왕을 가둬 놓고 단물은 쏙쏙 빼먹으면서 그 존재를 잊어버렸다. 아니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 했다. 지금도 화들짝거리며 피하려고만 한다.

우리는 그렇게 ‘갇힌 미다스 왕’을 ‘금기(禁忌)’라는 말로 부른다. 흔히 ‘터부(Taboo)’라고 하는 것 말이다. 금기란 ‘꺼리고 금지하는 것’이란 의미로, 왜인지 모르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나 행위를 뭉뚱그려 지칭하는 용어다. 옛날이야기에 수시로 나오는 것이 금기이다.

“뒤를 돌아보지 마라.”

“말에서 내리면 안 된다.”

“아들 셋을 낳을 때까지 날개옷을 주면 안 된다.”

“이 쑥과 마늘을 먹으며 삼칠일을 참으며 동굴을 나가지 마라.”

주로 이런 식이다. 느껴지다시피 금기는 ‘~하지 마라’는 식의 엄포로 구성된다. 즉, 금기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인 것이다. “문지방에 앉지 말라”는 것이 바로 금기이고 터부였다.

왜 금기, 터부가 생길까?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대체 왜 이리도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을까? 대체 누가 이런 금기를 만들어서 우리를 유혹하나? 질문은 끝이 없겠지만, 답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다. 간단하지만 더 없이 중대하다. 금기는 이 세상에 질서를 주기 위해 생긴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담을 만들어서 집 안과 집 밖을 구분했다. 그래서 안쪽이라는 안정적인 공간이 형성되었다. 중심에서 가깝고 편안한, 마음 푹 놓을 수 있는 곳이 만들어졌다. 사실 그가 앉은 그 자리는 조금의 물리적 변화도 없이 여전히 그 자리이지만, 담 안이냐 밖이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선을 그어서 이쪽과 저쪽을 나눈 담의 기능이다. ‘선을 그음’으로써 무질서했던 이 세상에 질서가 찾아온 것이다. 담장이, 죽 그어 놓은 선이 이 세상에 규칙과 질서를 가져온 것이다.

자, 그럼 이제 한 가지만 물어보자. 그렇게 이 세상에 금을 그음으로써 질서가 왔는데, 그렇게 질서를 부여한 그 선은 과연 뭘까? 선이 안과 바깥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질서를 부여했는데, 그렇게 질서를 구현한 그 선 자체는 안쪽인가 아니면 바깥쪽인가? 이 질문은 자못 중요하다. 그리고 그 답에 문명의 정수(精髓)가 담겨 있다.

선은 안쪽도 아니도 바깥쪽도 아니다. 선은 그냥 선일 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상한 존재이다. 이 선은 세상에 금을 그어 질서를 부여하면서도 정작 제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요상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금을 그었기에 그 스스로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이런 기묘한 존재를 우리 인간의 의식은 견뎌 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은 바로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 혼돈, 카오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선을 계속 바라보지 못한다. 머릿속에 계속 두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선을 터부시 한다. 즉, 금기로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말하지 않고 논하지 않고 따지지 않는다. 더 이상 묻지도, 보지도, 알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멀리 꺼리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본질을 물고 늘어지면 그 선이 사라지고 그 금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즉, 정작 질서를 주기 위해 제 스스로 무질서가 되어 버리는 금 긋기를 아예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세상이 순식간에 황금 천지로 뒤덮이는 혼돈이 되어 버린다. 왜 근친상간(近親相姦)이 금기인가? 그것은 근친상간을 하는 순간, 그 존재는 아버지이면서 남편이고 자식이면서 아내가 되는 무지막지한 혼돈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동물과 다른 인간의 인간다움이 세워진 것은 모두 금기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금기를 지우는 순간 세상은….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이제, 문지방에 앉으면 왜 안 되는 것인지 아시겠는가? 문지방은 바로 여기와 저기, 안과 밖, 천상과 지상을 나누는 담이고 선이기 때문이다. 그 선에 앉는다는 것은 곧 금기를 범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그 자신이 금기가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면서 신이 되고 싶었던 미다스 왕이 만져서 금으로 변해 버린 사과, 배, 나뭇가지, 공주처럼 그 자신도 오염된 금기가 되는 것이다.

황주목사 윤수현의 아들 방임

우리나라 고소설 중에 세 편의 짧은 이야기를 수록한, 《삼설기(三說記)》라는 단편소설집이 있다. 그중 하나가 〈황주목사계자기(黃州牧使戒子記)〉라는 것인데, 풀이하자면 ‘황주의 목사가 아들을 가르친 이야기’ 정도가 될 거다.

윤수현(尹壽賢)이란 사람에게 아들 셋이 있었다. 첫째 용필이는 재주가 뛰어나고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양반이라고 거들먹거리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둘째 봉필이는 헤헤거리며 약삭빨라서 친구들에게도 나쁜 소리를 듣지 않았다. 셋째 귀필이는 성격이 뒤숭숭하고 술렁술렁거리는 것이 요령 없이 만사가 쾌활했다.

어느 날, 아버지 윤공이 황주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아들들을 공부시킬 요량으로 모두 데리고 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과 달리 황주에 내려간 아들 셋은 대뜸 각기 기생 첩을 하나씩 두고서는 난리를 피웠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기생들과 놀아나는 것은 물론 고을 아전들을 제 맘대로 부리며 온갖 방탕으로 온 고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가 아무리 타일러도 그 앞에서만 듣는 척할 뿐 돌아서서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아버지 윤공이 포기하고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세월이 꽤 흐른 후, 어느 날 아버지 윤공이 아들들을 불러 놓고 황주목사를 사직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 거라고 말한다. 이제까지 맘대로 전횡을 부리며 기생들과 붙어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끝내려니 이만저만 난리가 아니었다. 세 놈 모두 제 처소로 돌아가 사귀던 기생들에게 말한다.

첫째 아들은 이별을 서러워하며 울고 있는 기생에게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꾸짖는다.

“이년, 썩 그치지 못하겠느냐!” 그러고는 종을 불러 그동안 사귀던 기생을 쫓아 버리라 하고는, 자리에 벌렁 누워 코를 드르렁거리며 잠을 자 버린다.

둘째 아들은 기생을 끌어안고서는 슬퍼하는 기생을 이렇게 어른다.

“걱정 마. 내가 서울에 올라가 과거에 급제한 후 이 고을 암행어사가 되어 내려올 테니 그때까지 정절을 지키고 있어. 알았지?” 그러고는 기생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 주며 연신 달랜다.

셋째 아들은 기생과 서로 부둥켜안고 같이 서러워한다. 차라리 같이 죽어서 같은 무덤에 묻히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며 꼬박 밤을 새우고는, 새벽닭이 울 때 이렇게 말한다.

“울지 마. 이렇게 된 판에 어쩔 수 없다. 너는 장터에 가서 빈대떡 장사, 술장사 하고, 나는 서울로 올라가는 척하다가 도망쳐서 아전들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면서 지내면 밥은 먹고 살지 않겠어? 우리 그렇게 살자.”

이렇게 세 아들이 기생과 이별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본 아버지 윤공은 돌아와서 부인에게 세 아들들의 미래를 예상해서 말한다.

“첫째 놈은 성품이 괴팍하고 악해서 제 몸은 물론 남의 몸도 해롭게 할 놈이오. 오랫동안 같이 지내던 기생에게 저리도 고약하고 매몰차게 하는 것을 보니, 평생이 각박하고 편안치 못할 것이오.”

둘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놈은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사귀던 기생에게 거짓으로 어르지 않겠소? 내가 그놈이 그러는 것을 보니 사람을 후려내어 속이고 재물을 불리고 그럭저럭 벼슬이나 하면서 지내겠지만 크게 될 놈은 아니오. 간사하고 못난 놈이오.”

이러던 아버지 윤공이 셋째에 대해서만은 칭찬을 했다.

“셋째는 천성이 어질어서 남을 편안하게 하고 진실하게 말하더군. 얼마 만나지 않은 기생이지만 진정으로 대하는 것이나, 자신이 양반이면서도 아전들 밑에서 심부름하면서라도 같이 살자고 하는 것을 보니 잘 알겠소. 셋째는 누구든 진정으로 대하니 후일 분명 큰 벼슬에 오를 것이오.”

아버지 윤공이 이렇게 세 아들의 미래를 예측한 이후 정말로 그 예상대로 되었다. 이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찜찜함이 남는다. 권세가의 난봉꾼 자식 놈들이 아버지 위세를 등에 업고 ‘갑질’을 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중 셋째 놈이 결국은 잘되었다는 것도 신경에 거슬린다. 결국 잘난 집에 잘난 놈이 그렇게 망나니짓을 해도 뭔가 되는구나 하는 씁쓸한 뒷맛보다 더 찜찜한 것은 아버지 윤공 때문이다.

아버지 윤공은 아들들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판단할 정도로 날카로운 지성과 심미안을 지닌 자였다. 바보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제대로 가르친 것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아들들을 불러 타이르고 훈계했다.

아버지 윤공이 말했다.

“너희 놈들이 서울에서 무어라 했느냐? 아비 말대로 이곳에 내려와서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대체 이 무슨 짓들이냐?”

하지만 이 아들들을 뻔뻔스럽게 이렇게 대꾸한다.

“이왕 잘못된 걸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 말씀 하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알아서 잘할 게요.” 그러고는 모두 코웃음을 치고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애초부터 이 세 아들은 천하의 잡놈(?)이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잘못을 보고 아버지 윤공은 몇 번이고 타이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엄히 말하지 못했다.

‘저희들은 한사코 하고자 하는데 내가 굳이 말리다가 귀한 자식들 병나면 어떡하지. 차라리 약간 타이르고 내버려 두는 것이 낫겠다.’

윤공은 이런 마음이었다. 그래서 망나니짓을 보고도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며 ‘아이고 우리 귀한 아들들을 어쩌나.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하며 곱게 곱게 키웠는데, 저렇게 하겠다니 믿어야지. 그래도 이 정도로 사달을 일으키다니, 허허’라며 탄식할 뿐이다. 그리고 제가 마땅히 제대로 다스려야 할 황주 고을이 결딴이 나는데도 그대로 방임한다. 이야기 제목이 말이 좋아, ‘황주목사가 아들을 훈계하고 가르친 이야기’이지, 실제로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한 거라곤 하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저 방관하고 탄식했을 뿐이다. 그게 다이다. 그것이 과연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일까? 그 정도가 아버지의 소임을 다한 것일까?

아버지 윤공의 한심함은 정작 따로 있다. 아들들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의 예측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아들들을 막지 않은 것이다. 셋째는 그만두고라도 첫째와 둘째는 더 엄하게 훈계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그걸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방임이 사랑이라면 세상에는 정말 사랑이 넘치는 것 같다. 물론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아무리 타일러도 본인이 깨닫지 못하면 안 되는 법이다. 아마 아들들을 붙잡아다 볼기를 쳐도, 감옥에 잡아넣어도, 이놈들은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찜찜함이 영 가시지 않는다. 말해서 바뀌지 않고, 훈계해서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르침을 버려야 하는가? 그 누구도 기준을 세워 주지 않고 선을 그어 주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것이 혹시 포기의 다른 말은 아닐까? 세상이 두 쪽 나도 부모가 자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안 들어도 들을 때까지 말해야 한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하나를 보고 열을 아는 현명한 황주목사 아버지 윤공은 자식에 대한 새가슴 같은 작은 사랑 때문에 자식을 포기했다. 그것 때문에 찜찜했던 것이다.

선이 없는 세상, 누가 금을 그을 것인가

태초에 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선 때문에 세상에 구분이 생기며 질서가 생겼다. 그리고 그런 안정이 이루어졌다. 선 바깥의 사람들은 차별당하고 소외되고 거부되었다. 땅에 그은 금 때문이었다. 선 안쪽 사람들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끄트머리에 사는 사람들은 잦은 외침과 불안으로 피곤했다. 다들 중심을 향해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게 피곤하게 만들었다.

“왜 네가 중심인데? 네가 뭔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3류란 말이냐?”

“바깥에 있는 우리들도 애처롭게 생각해 주세요, 제발요!”

모두 맞는 말이다. 어느 하나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갈등과 괴로움 때문에 땅에 그은 선을 없애야 할까? 갈등의 본원이자 시초이고, 모든 분란과 사달의 원흉인 선을 지워 버려야 할까? 그러면 행복해질까? 모두 다 웃는 행복한 세상이 될까?

이런 고민을 우리만 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했다. 더 행복하고 더 나은 세상이 되라고 만든 구분이 외려 우리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강철로 만든 새장(iron cage)’이 되어 버린다고 논평한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도 또 우리도 쉽게 놓치는 것이 있다. 그 만든 새장은, 그렇게 구분을 지은 그 선은 정작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이도 저도 아니기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 선은 우리에게 지침을 주고 질서를 주고 안정을 주지만, 정작 자신은 터부가 되어 잊히고 외면당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 세상에 아무도 ‘바른 소리’를 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대체 무슨 ‘바른’이란 것을 누가 정한단 말이냐는 힐문에 하려던 말이 쑥 들어간다. 그런 힐문과 눈총이 따가운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하려던 말이 정말 ‘바른 소리’인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곳에 중심은 없다고 해체해 버린 포스트모던한 사회에 무슨 ‘절대’니 ‘기준’이니 한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라는 스스로의 반문에 할 말이 쑥 삼켜지는 것이다.

젊은 세대를 두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다. 가지지 못해서 항상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을 파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린다고 매도하는 것도, 역시 온당치 않다. 그들도 노력한다. 힘겹게 애쓰고 살아가려 한다. 다만 향방 없는 노력이기에 더 괴롭고 허무하다. 그 누구도 젊은 세대에게 방향을 주지도 않고 선을 주지도 않는다. ‘이러이러하게 해라’ 하지도 않지만 ‘이러이러하게 하지 마라’는 더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기준 없이 홀로 허허벌판에 떠밀려 서 있다. 널따란 대지를 보여주며 용기를 가지란 대책 없는 말만 들려준다. 그리고 나가라고 한다. 때론 이런저런 것을 손에 들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땅에 금을 그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거기까지 가고, 그렇게 힘을 내서 가고, 그 선을 툭툭 건드리며 더 넓어져야 한다고 자각하고, 그리고 결국 그 선을 넘어 우리의 삶을 더 확장시킨다. 그것이 신이 아닌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황주목사는 잘못했다. 그는 아들들에게 선을 그었어야 했다. 자식이 귀할수록 더 분명한 금을 그었어야 했다. 기준을 마련해 주었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니 아들들에게 혼돈이 찾아왔다. 어디도 중심이 아니니 어디나 다 변방이 되었다. 그러자 모든 곳이 불안하고 모든 일에 내일이 없어졌다. 아들들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작은 사랑이 오히려 아들들을 더 괴롭게 했다.

황주목사는 그러면 안 되었다. 기준을 주고 그 기준 때문에 자식들이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것을 못 보겠어서 그런 거였다. 자식들이 괴로워할 때, 자신이 만든 기준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후회와 반성의 자책에 스스로 빠지기 싫어 방임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거룩하게 멀찍이 앉아 자식들의 미래를 논평할 뿐이다. 그리고 그걸로 제 소임을 다했다고 발뺌하며 모든 잘못은 ‘그렇게 행동한 자식 놈들에게 있다’고 할 셈이다.

아들들이 나쁜 것이 아니다. 젊은 세대가 글러먹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어떤 노력, 어디를 향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를 뿐이다. 아버지가 제시한 기준이 있어야 누군가는 그 기준에 부딪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기준을 깨부술 노력을 기울일 텐데, 아무 것도 없으니 그저 허공을 향해 헛힘을 쓸 뿐이다. 세상의 그 많은 황주목사들 중 그 누구도 땅에 금을 그어 주지 않으니 말이다. 하긴 그 누가 스스로 터부가 되어 과감히 산화(散華)하고 싶겠는가. 씁쓸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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