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 군부세력, 경제개발계획에 맞춰 원자력 산업을 民生中心으로 전환
⊙ 방사선의학연구소, 트리가 마크-Ⅱ 생산 동위원소로 16만명 부인암 검진
⊙ 최초의 상업원전 고리1호기 사업권 놓고 원자력청과 한전 주도권 다툼
⊙ 金鍾珠 한전 이사의 PWR 선택… 한국 원자력 산업의 운명 가른 ‘신의 한 수’
감수 : 申載仁 전 국가핵융합연구소장
⊙ 방사선의학연구소, 트리가 마크-Ⅱ 생산 동위원소로 16만명 부인암 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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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鍾珠 한전 이사의 PWR 선택… 한국 원자력 산업의 운명 가른 ‘신의 한 수’
감수 : 申載仁 전 국가핵융합연구소장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막 시작된 1962년 2월 울산 공업센터의 기공식 모습.
1968년까지 석유화학 관련 공장 13개가 이곳에 들어섰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5·16 이듬해인 1962년 3월 30일 트리가 마크-Ⅱ 준공식에 참석,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첫 삽’을 뜬 원자력 사업에 ‘테이프’를 끊는 것으로 원자력과 처음으로 대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부세력은 대한민국의 원자력 산업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미국의 무상원조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 경제는 1950년대 후반부터 원조의 규모가 줄어들고, 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 원조의 형태가 바뀌면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7월 건설부를 폐지하고 경제기획원을 신설해 경제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최고회의는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을 발표했고, 특히 전력·석탄 등의 동력원 확보, 철도·도로·항만 등의 사회간접시설의 건설에 중점을 두었다. 정부는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맞추기 위해 1961년 최대수요 43만kw를 기준으로 하고, 평균 증가율을 12%로 추정한 제1차 전원개발계획을 추진했다. 목표연도인 1966년의 수요는 총 시설용량 84만2000kw(전력공급능력 71만kw)로 추정했다.
당시 원자력계는 불화와 갈등으로 내홍(內訌)을 겪고 있었다. 군사정변 직후 원자력 행정을 책임진 오원선(吳元善) 원자력원장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른 부처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라 세부 실천 일정을 짜고 있었기에, 원자력계도 한시바삐 그 대열에 합류해야만 했다. 게다가 빤한 국가예산에서 화급하지 않은 원자력 연구계획을 한답시고 예산을 타내기도 민망했다.
원자력계, 방사선의학연구소 설립으로 체면 세워
오 원장은 해병대 군의관 출신답게 원자력의 실용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방사선의학연구소 설립을 결심했다. 그는 당시 송요찬(宋堯讚) 내각수반을 비롯해 최고회의 위원들을 찾아 방사선의학연구소의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최고회의 위원들은 모두 냉담했고, 1962년 예산심의에서 이 계획은 없던 일로 되고 말았다. 당시 군인들은 방사성 동위원소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해외의 방사성 동위원소 이용 실적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도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때 원자력 산업은 절호의 기회를 맞는다. 1962년 중앙정보부는 시무식 직후 ‘원자력과 한국’이라는 시국정책 특별상황 보고회를 계획하고 있었다. 실무는 중정의 판단관실이 맡아 보고회 준비를 했다. 당시 김종필(金鍾泌) 중정부장의 정책자문기구인 판단관실은 각계 교수 9명을 판단관으로 꾸려 행정부의 정책을 판단해 시정을 요구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익수(朴益洙) 당시 한양공대 교수(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장 역임)는 오원선 원자력원장의 자문역을 맡고 있었고, 오 원장의 추천으로 판단관실 판단관으로 위촉을 받았다.
보고회에서 박정희 의장 등 최고회의 위원들과 국무총리를 위시한 국무위원, 정부 산하 단체장 등은 원자력에 대해 큰 호기심을 가졌다. 오원선 원장은 보고회에서 돌아와 박익수 교수를 불러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박 교수, 그동안 수고가 많았소. 오늘 원자력 관계 상황보고는 대성공이오. 회의가 끝난 직후 송요찬 내각수반이 내가 앉아 있는 자리로 와 ‘오늘 아주 유익한 이야기를 들었소. 이전에 내게 이야기한 방사선의학연구소 설립계획을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시오. 내년 예산에 적극 협조하리다’라고 말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방사선의학연구소의 설립은 1963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업의 하나로 예산에 포함됐다. 1962년 11월 25일 원자력원은 원자력연구소 내에 방사선의학연구실(실장 李圭煥)을 설치하고, 독립연구기관의 채비를 서둘렀다. 이때 오원선 원장은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해병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원장직을 사퇴했다. 1963년 1월 23일 김명선(金鳴善) 박사가 제4대 원자력원장으로 부임했다.
1963년 12월 17일 방사선의학연구실은 원자력원 산하 방사선의학연구소로 승격해 발족했다. 동시에 신임 원자력원장으로 윤치오(尹致旿)의 장남이자 의학박사인 윤일선(尹日善)이 임명됐고, 12월 19일 안치열(安致烈) 박사가 초대연구소장, 김진용(金振鏞) 박사가 부속 암병원장(후에 원자력병원)에 임명됐다. 서울대의대와 연세대의대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 때문에 초대 소장 인선은 간단치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결국 평양의대 출신 안치열 박사를 임명했다.
1963년 9월 서울시 정동 옛 중앙방송국 자리에 연건평 650평의 청사를 새로 준공했다. 이곳에 원자력원과 방사선의학연구소, 부속 암병원이 함께 입주했다. 암병원은 36개 병상, 13개 임상과를 갖고 1963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첫 암환자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인 김동하(金東河) 해병준장의 부인이었고, 암진단과 치료를 위한 암병원 최초의 입원환자로 기록됐다. 처음 개소 때는 방사성동위원소를 선원(線源)으로 하는 원격 심부치료 장치로 대형 코발트-60 치료기(회전식)를 도입해 사용했다.
초창기 연구소는 코발트-60 치료장치를 보유한 암 전문 진료소로 알려지면서 환자의 수가 매년 30~40%씩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당시 부인암은 발생빈도가 가장 높은 악성종양이었다. 암병원은 1970년 7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전국적으로 16만여 명의 부인암 검진사업을 실시해 1008명(0.63%)의 악성종양을 발견하는 실적을 올렸다. 암병원은 스트론튬-90, 이리듐-192, 금-198, 라듐 등 트리가 마크-Ⅱ 시험용 원자로에서 생산한 방사성동위원소로 치료했고, 요오드-131을 이용해 갑상선 질환을 진료하고, 레늄-59로는 혈액검사를 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은 회고록에서 “1969년 후반기에는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암 조기진단 검진차량 6대를 구입해 1970년 7월부터 부인암 검진사업을 시작했다”며 “그중 검진차 5대를 서울대병원 등 5개 국립의과대학 부속병원에 기증해 사업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고 했다. 그는 “1973년 2월 17일 원자력병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소속도 방사선의학연구소에서 원자력연구소 산하기관으로 개편해 발족했다”면서 “환자들이 폭증하면서 1984년 10월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신축병원을 짓고 이전했다”고 했다.
방사선 농학연구소 설립, 미국에서 ‘원자씨앗’ 기증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서 식량 증산과 농업기술 개선문제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방사성동위원소의 농학적 이용을 위해 관련 전문 연구기관의 설립을 미룰 수 없었다. 방사선농학연구소의 설립은 방사선의학연구소와 더불어 경제개발계획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원자력원은 1959년 발족 당시부터 대학과 연구기관에 연구보조금을 지급했고, 비록 의학 분야처럼 활발하지는 않았으나 농촌진흥청, 서울대 농대, 충남대 농대 등과 방사선과 방사성동위원소를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미국대사관은 연구용으로 ‘원자씨앗’을 제공했다. 이듬해 1960년 농촌진흥청 농업시험장과 원예시험장은 미국 오크리지(Oak Ridge) 연구소로부터 방사선 조사(照射)를 한 13종의 종자를 기증받아 육종실험에 사용했다. 동시에 감마선과 X선 등으로 종자개량 시험도 해나갔다. 1964년 농촌진흥청은 서울대 농대와 함께 ‘원자력 이용 종합연구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방사성동위원소(RI) 종합연구실과 시험농장을 설치했다.
원자력원은 1963년 원자력연구소의 생물학연구실 권신한(權臣漢) 박사의 주도로 ‘방사선을 이용한 콩의 품종개량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이와 함께 방사선농학연구를 위해 1966년까지 20여 명을 해외유학생과 훈련생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가운데 식량문제가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부각됐고, 내병성 및 다수확 품종개량, 시비법(施肥法) 개량 그리고 농산물 장기저장 등이 당면 과제로 거론되고 있었다.
원자력원은 이때를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할 적기로 판단했고, 동시에 정부의 시책에 기여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방사선 농학연구에 가장 관심을 보인 인물은 당시 김학열(金鶴烈) 경제기획원 차관이었다. 박익수 전 위원장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행정직 관료들은 반대하지 않았으나, 원자력연구소 측에서는 방사선농학연구소 설립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료나 농업 관계의 연구 분야에 치중하면, 원자로에 관계한 기초연구가 소홀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의 설명이다.
“원자력원 상임위원 자격으로 서울대 농대 김호직(金浩稙) 학장과 심상철(沈相哲) 교수(후에 방사선농학연구소장)를 찾아가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했죠. 방사선에 의한 종자 개량, 시비법 개량과 농산물 장기저장 방법에 관한 사진 3장을 얻어 김학렬 장관의 자택을 찾았습니다. 김학렬 장관과 나는 막역한 사이였어요. 3장의 사진을 김학렬 장관에게 보여주며 ‘방사선에 의한 농학연구는 정부의 식량 증산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965년 초 김학렬 차관은 내게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정하는 심의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장기영(張基榮) 경제기획원 장관 주재로 열린 심의회의에서 방사선 농학연구에 의한 식량 증산과 농업 여건 개선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박익수 당시 상임위원은 심의회의에서 사진을 치켜들고, “감자에 방사선을 적당량 조사해 감자의 눈에서 싹이 트지 않고 장기간 저장할 수 있는 실증적 사진이 여기 있다”고 하자 참석자들은 눈이 휘둥그레했다. 김학렬 차관이 회의가 끝난 후 “오늘 매우 유익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인사했고, 박 위원은 “내년도 예산에 연구소 설립이 될 수 있도록 반영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차관은 “알았소, 잘해봅시다”라고 화답했다. 원자력위원회에서 설립안을 통과시키자 1965년 4월 생물학연구실에서 농학연구를 겸하던 것을 ‘농학연구실’로 임시 분리 독립시키고, 초대실장에 한창열(韓昶烈) 전북대 농과대학장을 임명했다.
1966년 11월 정부의 특별 지원과 농학계의 협력으로 방사선농학연구소를 1과 4연구실 규모로 비교적 어려움 없이 설립했다. 1968년 2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호평리에 위치한 총 3만7946평의 육종시험장도 마련한 데 이어 1969년까지 원자력연구소 부지 안에 1856평의 연구동을 건립해 방사선 농학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연구소는 유전육종 연구를 위해 코발트-60 심부 X선 조사장치를 갖춘 약 3만8000평의 시험농장을 마련한 데 이어, 1969년 코발트-60 감마선 조사온실을 연구소 내에 설치했다. 물론 이러한 방사선 농학 연구의 발전은 당시 경제개발계획과 관련해 농업 증산과 농산물 가공·저장 등에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방사선농학연구소는 방사선 조사에 의한 쌀, 보리, 콩 등 주곡작물에 대한 돌연변이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대두의 경우, 미국에서 도입한 Cb-27(콩 품종)에 방사선을 조사해 재래 콩나물용 대두보다 30% 이상 더 소출이 나오고, 적응력이 강한 신품종인 ‘방사콩’을 생산해 보급했다. 방사선농학연구소는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농작물의 품질개량과 비료효과 증진, 병충해 방제, 쌀·고구마·포도·딸기 등 식품의 저장기간을 연장시키는 등 1973년 농촌진흥청 등의 견제로 연구소가 문을 닫을 때까지 수많은 실적을 달성했다.
박 대통령이 “통일벼 맛 좋다”고 하자 아무도 이의 제기 못 해
노재식(盧在植) 당시 원자력연구소 연구관(전 한국기상학회장)에 따르면, 허문회(許文會) 서울대 농대 교수와 함께 방사선농학연구소 한창열 유전육종학연구실장이 ‘통일벼’ 탄생에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한 박사는 우장춘(禹長春) 박사의 육종학 직계 제자로 단세포배양법에 성공한 인물이다. 노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은 식량 증산의 방안으로 밥맛은 떨어지더라도 낱알이 많이 달리는 품종을 개발하라고 했다”며 “통일벼 품종이 1990년 이후 사라졌지만, 원자력의 힘으로 보릿고개를 탈출했다”고 했다.
1960년대 우리나라 식량 사정이 어려웠던 시절, 국가적인 숙원사업은 ‘식량의 자급자족’ 달성이었다. 보릿고개를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던 데는 ‘녹색혁명’으로 불린 통일벼 개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벼는 크게 자포니카 품종과 인디카 품종으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먹는 쌀은 모두 자포니카(온대산)이고, 태국이나 인도에서 먹는 쌀이 인디카(열대산)이다. 이 두 가지의 특징을 갖는 잡종 쌀을 개발하기 위해서 일본 학자들이 오랫동안 매달렸으나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포기했을 정도다.
서울대 농대 허문회 교수는 1965~ 1966년에 걸쳐 1개의 자포니카 품종과 2개의 인디카 품종을 교배하는 이른바 3원 교배를 실시했다. 허 교수가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할 때, 일본·대만산 볍씨를 교배한 1대 잡종을 아버지로, 필리핀에서 육종한 볍씨를 어머니로 삼아 일찍 여물고, 쓰러지지 않고, 병충해에도 강한 통일벼의 모종(IR667)을 탄생시켰다. 보통 벼는 이삭당 낱알이 80~90개였지만, 통일벼는 120~130개나 됐다. 허 교수가 귀국했을 때만 해도 정부는 무관심했다. 더욱이 다수확이 가능한 벼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원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희농 1호’의 보급에 주력하고 있었다. 희농(熙農)은 1964년 정부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종자로, 보급종이었다. 희농이라는 이름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글자를 따 만들어진 것만 봐도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농촌진흥청은 희농의 보급 책임을 맡았고, 이 때문에 IR667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지 못했다.
결국 희농은 우리나라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실패했고, 그 실패가 공식화되고 나서야 새로운 대안으로 IR667을 가져다 국가의 지원 속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허 교수는 방사선을 볍씨에 조사해 통일형 벼 품종을 지배하는 유전자 SD-1의 작용과 위치를 규명했다. 외국에서 벼 개체별 유전자 위치를 알아보는 기준인 표지유전자기주(基株)를 연구, 육종된 벼들의 표지형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통일벼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통일벼에 대한 계통선발이 있은 후 1970년부터 시험재배를 시작했다. 이듬해 출하한 쌀을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 관계자들이 시식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시식이 있기 몇 달 전에 이미 통일벼의 보급을 결정했지만, 밥맛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보급에 회의적인 의견들이 나왔던 터였다.
그러나 이날 시식을 한 후 통일벼의 전국적인 대량 보급을 결정했다. 시식을 끝낸 후 무기명 평가에 나섰는데,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검정표(檢定表)를 가장 먼저 제출하면서 ‘밥맛이 좋다’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결국 참석한 시식자 누구도 그 자리에서 밥맛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통일벼는 1972년에 빛을 보았다. ‘통일벼’는 당시 다른 품종들보다 30% 정도 생산성이 높은 다수확 품종이었고, 병해충에도 강한 특성이 있었다. 1976년에 ‘통일벼’의 재배 면적을 전체의 44%로 확대하면서 평년보다 21.8% 증가한 521.5만 톤의 쌀을 생산해 냈고, 역사상 최초로 쌀의 자급자족을 달성했다. 그러나 통일벼는 1992년 정부가 수매를 중단하면서 농촌에서 사라졌다. 밥맛이 떨어지는 통일벼의 단점을 보강하면서 수확량도 많은 품종이 잇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연구관들, 트리가 마크-Ⅱ의 중성자 속도에 불만
1957년 미국 제너럴 아토믹스사에서 도입해 1962년 3월 가동한 트리가 마크-Ⅱ는 열출력의 문제로 연구관들의 불만이 높았다. 방사선의학연구소와 방사선농학연구소의 출범으로 동위원소 수요도 계속 늘고 있고, 기초연구와 응용연구에서 더 빠른 중성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임시변통으로 1969년부터 트리가 마크-Ⅱ는 출력을 250kw로 올려 사용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연구관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렇다고 출력을 500kw 내지 1000kw로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구관들은 메가와트급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원자력계의 한 원로는 “트리가 마크-Ⅱ는 2013년 12월 과학기술 연구시설로는 최초로 등록문화재(제577호)에 올라 현재 한전 연수원 자리로 쓰고 있는 태릉의 원자력연구소에 있다”면서 “원자력계는 김중업(金重業)이 설계한 그 건물을 원자력기념관으로 해달라고 청원 중”이라고 했다. 그는 “트리가 마크-Ⅱ는 95%의 무기급 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했다”면서 “이승만 대통령 시절 우리 과학계 원로들이 이 원자로를 어떠한 목적으로 도입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라고 했다.
이에 따라 1968년 원자력연구소는 도입할 연구용 원자로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을 추진했다. 연구소는 제작사들의 설명을 듣기 위해 10여 개 회사에 초청장을 발송했다.
걸프 제너럴 아토믹사(제너럴 아토믹의 후신)와 록히드가 실험용 원자로 경합에 참여했고, 결국 연구관들이 출력을 10Mw까지 증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구개발에 용이한 록히드의 펄스타(Pulstar, 열출력 5Mw)를 원했다. 그러나 이상수(李相洙) 소장은 핵연료의 안정 공급이나 성능이 뛰어난 걸프 제너럴 아토믹의 트리가 마크-Ⅲ(열출력 2Mw)로 결정했다. 트리가 마크-Ⅲ의 도입은 1968년 12월 11일 제167차 원자력위원회의 의결로 결정했고, 1969년 4월 12일부터 공사를 시작했고 1972년 3월 가동에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 3월 30일 원자력원의 이름을 원자력청으로 바꾸고, 그해 4월 21일 과학기술처로 격상시켜 최형섭(崔亨燮) 박사를 초대 장관에 임명해 원자력 정책을 포함한 국가 과학정책을 총괄하게 했다. 원자력청은 졸지에 장관급 부서에서 차관급 부서로 격하됐다. 그러나 원자력원 시대의 권한이나 직제는 그대로 유지됐다.
루리 크림 씨의 권고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과 관련해 에너지, 특히 석유대체 에너지에 대해 관심이 깊었다고 한다. 트리가 마크-Ⅱ 준공식이 있던 1962년 11월 군부 정권은 원자력발전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연구 차원이 아닌 발전(發電) 차원의 원자력을 준비하게 했다. 원자력원과 상공부의 공무원, 한전 관계자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에너지 자원이 부족한 한국은 새로운 대체 에너지원 개발이 시급하기 때문에 1970년대 초기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원자력발전 추진계획안’을 작성했다.
박정희 정권은 원전의 세계적 추세를 파악하기 위해 해외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한국은 1966년 5월부터 원자력발전기술 조사단을 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 이탈리아, 스페인, 인도, 필리핀 등지로 보내 원전 건설 과정을 파악하도록 했다. 1967년까지 계속된 조사에서 경수로를 제작하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밥콕 앤드 윌콕스, 그리고 비등수로를 만드는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영국의 개량형 가스냉각로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1963년 10월 루리 크림(Ruri Krymm) 씨를 단장으로 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대표단 4명이 방한해 기초조사를 했고, 그들은 “한국은 1970년대 초 15만kw급 원전을 짓는 것이 타당하다”고 권고했다. 원전을 지을 부지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64년 당시 전국의 지리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 대한석탄공사를 중심으로 부지 탐색에 들어갔다.
원자력원과 한전, 원자력연구소, 석탄공사, 석유공사는 공동으로 22개 지점을 평가한 후 9개 후보 지역을 선정했다. 그리고 실지 답사를 통해 경기도 고양군 행주외리(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부근)와 경남 동래군 기장면 공수리, 경남 양산군 장안면 월내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월내리) 등 세 군데로 압축했다.
1965년 5월 IAEA 부지조사단(단장 맥컬린)으로부터 2명의 기술조사단을 파견받아 선정해 놓은 세 군데를 조사했다. 이들은 ‘원자력연구소 후보부지에 대한 추가 보고서’를 통해 경남 양산군 장안면 월내리 일대(현재 고리 원전 부근)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1965년 12월 원자력원은 대통령령에 따라 산하에 원자력발전계획심의위를 설치했다. 관련기관이 참여한 건설부, 석탄공사, 석유공사는 에너지원 조사분석, 한전은 장기전력수급계획, 원자력원은 원자력발전의 기술적, 경제적 분석을 담당했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거쳐 원자력발전이 대단위 용량에서는 화력발전과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에 따라 한전은 한국이 필요로 하는 전력량 추이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한국이 최초의 원전을 준공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 1976년 한국이 필요한 전력량은 470만kw일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추정에 따라 한국이 당초 목표로 한 원전의 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1967년 10월 한전이 작성한 ‘장기 전원 개발계획’은 1976년의 한국의 소비전력이 470만kw로 추정됨에 따라, 원전은 50만kw급 2기로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원전의 단위용량에 대해서는 몇 차례 수정을 거듭했다. 1963년 15만kw급 원전을 지어야 한다고 한 것이 4년이 지난 1967년에는 50만kw급 2기를 지어야 한다고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발전소를 건설할 때는 무작정 설비용량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발전소의 설비용량이 국가 전체 설비량의 10%가 넘지 않아야 한다. 1963년 한국의 전기 생산 설비량은 200만kw였다. 10%대의 예비율을 고려하면, 새로 건설하는 발전소의 설비용량은 20만kw를 넘지 말아야 했다. 따라서 새로 짓는 원전의 설비용량은 15만kw가 적정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당시 한국의 원자력공학자들은 미국과 영국 유학 시절 학습한 것에 충실했다. 실무경험이 적었던 이들은 실수를 피하기 위해 교과서대로 일을 추진했다. 이즈음 1963년 10월 IAEA의 기술조사단으로 방한했던 루리 크림 씨가 이러한 조언을 해주었다.
“한국이 만들고자 하는 원전의 설비용량을 현재 기준으로 결정하지 마라. 한국은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로, 전력 소비량이 급증할 것을 의미한다. 원전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행동에 옮겨 실제로 원전을 가동하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다. 10년 후 한국의 발전 설비량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현재 시점의 국가 전력 설비량을 기준으로 원전 설비용량을 결정하지 말고, 10년 후 한국이 사용할 전력량을 기준으로 원전의 설비용량을 결정하라.”
1960년대 중반, 한반도의 안보환경은 험악하게 돌아갔다.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이 베트남전에 뛰어들었고, 한국은 2개 사단의 파월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부는 5년 단위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세워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소비전력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정부와 한전은 도처에 화력발전소를 지었으며, 크림 씨가 예언한 대로 한국의 전력사정은 돌아가고 있었다. 원자력연구소는 한국이 짓고자 하는 최초 원전의 설비용량을 15만kw에서 20만kw→30만kw→50만kw로 늘렸다. 이러한 확장은 모험에 가까운 도박이었다.
정일권 총리, 원전 주도권 싸움에 개입
1968년 원자력청은 3년 전 IAEA 조사단이 추천해 준 경남 동래군 장안면 월내리(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월내리)를 대상으로 정밀조사를 벌여 이곳을 최초의 원전 부지로 최종 결정했다. 최초의 원전은 월내리와 인접한 고리 지역에 짓기로 했기 때문에 이 원전은 고리원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1966년 제1차 원자력발전기술조사단이 그해 5월부터 7월까지 미국, 영국, 캐나다 등 8개국에 파견돼 건설계획, 기술개발 현황, 경제성 평가, 부지선정기준, 자금조달 등 각종 조사를 실시했다. 박익수, 이영재(李永在), 이창건(李昌健) 3인은 천연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하는 캐나다의 캔두형을 처음으로 접한다. 조사단은 귀국 후 조속히 원자력원에 전담부서인 ‘원자력발전과’의 신설을 건의했고, 이에 따라 1967년 원자력원에 원자력과가 설치됐다.
이어 1967년,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원자력발전조사단이 파견됐다. 1968년 3월 원자력발전계획심의회는 용역회사인 번즈앤로(Burns & Roe)사의 타당성 조사를 참고해 500MWe급 2기를 1970~1974년 사이에 건설하고, 노형은 경수로, 개량가스냉각로, 중수로 중 택일하고, 건설부지는 부산 또는 울산, 건설비는 약 1억4000만 달러 중 9000만 달러는 차관으로 충당한다고 건설추진방침을 밝혔다.
원전 건설을 본격화하자 원자력청과 한전 사이에 원전 발전의 주체를 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원자력청은 “프랑스의 원자력청이나 영국의 원자력공사처럼 원자력청이 원전을 건설,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6년 원자력발전과(초대과장 문희성)를 설치한 한국전력은 “원자력발전도 발전이니만큼 전기를 생산하는 한전이 건설과 운영을 일원화해 맡아야 한다”고 맞섰다.
이 와중에 일간신문을 통해 육종철(陸鐘撤) 한양대 교수는 “상업용 발전소는 당연히 한전 소관”이라고 했고, 박익수 원자력상임위원은 “원전은 단순한 발전설비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지상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박 전 상임위원은 “당시 원전이 단순한 발전설비가 아니라는 의미는 국책적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취지”라고 했다.
이 싸움으로 인해 원전사업은 정치문제로 비화했고,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는 직속자문기관으로 박충훈(朴忠勳) 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원자력발전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1968년 4월 9일 위원회는 원전 건설과 운영은 한전이 담당하고, 원자력발전 기술의 개발과 원자력 안전규제, 핵연료와 방사성 폐기물, 원자력 기술자 양성과 자격검정은 원자력청이 담당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원자력발전추진위가 한전의 손을 들어준 것은 돈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충분한 자금이 없었다. 돈이 없는 나라가 사회간접자본에 투자를 하려면 외국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돈을 빌리려면 담보를 제공해야 했고, 원자력청은 그게 없었다. 한전은 발전소를 담보로 제공할 수 있었고, 원자력발전추진위는 한전에 원전 건설과 운영을 맡기게 됐다.
이로써 원자력발전의 주체가 된 한전은 50만kw급 원전 2기를 짓는다는 계획을 수정해 58만7000kw급 원전 1기부터 짓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원자로 노형을 둘러싼 논의가 시작됐다. 1968년 6월 24일 한국전력은 고리 1호기 건설 소요자금을 344억원(외자 9500만 달러, 내자 83억 원)으로 추정해 놓고,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 웨스팅하우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영국의 원자력수출공사(UKAEA)에 턴키 방식으로 예비견적서를 내라는 안내서를 보냈다.
화신백화점 朴興植 사장의 로비
한국의 최초 원전 도입은 곧바로 미국과 영국의 싸움으로 비화했다. 미국업체끼리의 입찰담합을 우려해 영국까지 포함해 4개사에 입찰사양서를 보낸 것이 원인이었다.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은 트리가 마크-Ⅱ를 제작한 제너럴 아토믹의 모기업이다. GE는 비등수로(BWR)를 제시했다. 반면 웨스팅하우스(WEICO)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은 경수로(PWR)를 내놓았다. 영국의 원자력수출공사(UKAEA)는 당시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던 개량형 가스냉각로(AGR·Advanced Gas cooled Reactor)를 내놓았으나, 이 원자로는 콜더홀 원자로를 개량한 것이었다.
WEICO의 한국대리점은 화신백화점 오너인 박흥식(朴興植)이었다. “PWR을 선정하면 커미션 700만 달러를 준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당시 원전 계약금액이 약 1억5000만 달러였으니 약 5%의 커미션에 해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일권 총리 직속으로 원자력발전추진위가 발족해 원자력원과 한전 간의 업무조정, 원자로 노형에 대한 자문기관으로 자처하고 나섰다. 원자력법상 원자력위를 제쳐놓고 국무총리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규제기관이 사업기관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 연출됐다.
결국 비등수로는 조기에 검토대상에서 탈락해 경수로와 개량형 가스냉각로만 남게 됐다. 미·영 간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자연 원자력연구소의 연구원들도 둘로 갈리게 됐다. 영국 유학파들은 가스냉각로를 선호했고, 미국 유학파들은 경수로를 지지했다. 개량형 가스냉각로냐, 경수로냐의 대립은 예상외로 심각했다.
외견상 우세를 보인 쪽은 영국제인 개량형 가스냉각로였다. 자본주의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발전용 원자로(가스냉각로)를 지었던 영국은 원자로 부품 생산을 유럽 각국에 맡김으로써 개량형 가스냉각로를 유럽형 원자로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벨기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이 원자로에 들어가는 부품을 제작했으므로, 이 나라들도 가스냉각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한국도 가스냉각로를 선택하길 원했다.
한국에 주재하는 유럽 각국의 대사들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자국 원자로의 장점을 설명했다. 개량형 가스냉각로는 세계에서 수출이 가장 잘 되는 원자로란 타이틀도 얻고 있었다. 미국제 경수로는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만 건설됐기에 해외 건설량이 적었다. 1966년 일본 최초로 상업가동한 16만6000kw급 도카이무라(東海村) 1호기도 영국에서 개발한 가스냉각로였다. 그러나 미국 유학파들은 “경수로가 훨씬 더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노형 선정은 해당국이 향후 원자로 발전체계를 어떻게 가져가느냐의 문제여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종주 이사의 ‘신의 한 수’
이때 무기 중개상으로 이름을 날린 독일계 유대인 아이젠버그(Eisenburg)가 개량형 가스냉각로를 한국에 판매하기 위한 에이전트로 뛰었다고 전해진다.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갖고 있던 아이젠버그가 가스냉각로를 제작하는 영국을 위해 뛰어다니자, 한국의 실력자들도 ‘개량형 가스냉각로를 선택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갖게 됐다.
미국 유학파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경수로 지지파들은 “영국의 원전시장은 작지만 미국은 매우 크다. 미국의 전력회사들은 미국 내에 원전을 짓는 데 매진하느라 수출을 등한히 했고, 영국은 영국시장이 작아 수출에 매진했다. 미국이 경수로 수출에 진력하지 않았다고 해서 경수로의 가치를 절하해선 안 된다. 경수로는 가장 안전한 원자로다”라고 주장했다.
갈등이 첨예해지자 태완선(太完善) 부총리가 이끄는 부흥부가 중립적 인물에게 판단을 맡겨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중립적 인물로 지목된 사람은 한전의 기술이사를 맡고 있던 김종주(金鍾珠)씨였다. 그는 해방 전 도쿄제국대학에 다니다 폐병으로 고향인 경남 양산으로 돌아와 휴양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았다.
해방 후 그는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편입해 졸업하고 시슬러의 강연을 듣고 원자력의 가치에 눈을 떴다. 그리고 영국 하웰(Harwell)에 있는 영국 원자력연구소에서 가스냉각로에 대해 공부한 후 콜더홀 원전에서 4개월간 운전교육을 받았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경수로에 대해 공부했다.
태완선 부총리는 한전에 있는 김 이사를 개량형 가스냉각로와 경수로 양쪽을 모두 아는 사람으로 보고 그에게 노형 선택을 맡긴 것이다. 김종주 이사는 문희성(文熙晟) 계장과 함께 미국형과 영국제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미국산 경수로가 낫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김 이사는 “BWR은 구조는 간단하나 터빈이 원자로 내에 있어 터빈까지 방사능에 오염돼 안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며 “한전으로는 PWR에 더 호감이 갔다”고 했다. 그의 결정에 대해 정래혁(丁來赫) 한전 사장도 “김 이사의 판단이 옳다”고 격려했다. 태완선 부총리가 이를 받아들여 미국제 경수로를 선택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아이젠버그가 강하게 반발했다.
화가 단단히 난 아이젠버그를 달래기 위해 김 이사는 “다음에는 영국에서 만드는 개량형 가스냉각로를 구매하겠다”는 말로 간신히 아이젠버그를 달랬다. 운명의 장난인지 얼마 후 가스냉각로에 문제가 있는 것이 발견됐고, 영국 정부는 가스냉각로의 수출을 금지했다. 영국 정부는 문제를 일으킨 부품을 회수해 교체하는 리콜 조치도 취하면서 사이즈웰(Sizewell) B 원전부터 경수로로 건설하겠다고 공표했다. 이 사건으로 잘나가던 가스냉각로는 된서리를 맞았고, 세계 원전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국이 선택한 경수로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한국이 개량형 가스냉각로를 선택했더라면, 원자력 태동기 한국 원자력 산업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가스냉각로를 도입한 나라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일본은 도카이무라 1호기가 덩치에 비해 생산하는 전기는 적고, 경수로에 비해 발전단가는 비싸며, 보수유지비와 연료비가 높다는 사실 때문에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이후 일본은 더 이상 가스냉각로를 짓지 않았다. ‘신의 한 수’로 경수로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김종주 이사는 원자력 기술을 도입한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한국 원전의 줄기를 바로 세운 공로자 반열에 올랐다.
가스냉각로와의 싸움은 아직 끝난게 아니다. 지금 북한의 영변 핵시설은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최대로 생산하기 위해 러시아형 가스냉각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朴正熙, 미국 경수로 선택 지시
경수로를 도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후 한국은 다시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을 놓고 고민했다. 경수로 건설 경험이 많은 웨스팅하우스를 최종 계약사로 선정했다. 1969년 12월 한국은 웨스팅하우스에 차관 이자율은 연 6.75%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때문에 웨스팅하우스는 한동안 혼선을 빚었다. 그로 인해 한전과 웨스팅하우스 간 계약이 늦어졌다. 1970년 12월에야 끝났다. 그 사이 한전은 고리 일대에 살아온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21만 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종주 이사는 미국 원자로로 결정한 배경을 이렇게 술회했다.
“하루는 화신 박흥식 사장의 아들 박병찬(朴炳贊)씨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영국의 로비가 가장 활발할 때였습니다. 그는 그것이 불안했는지 ‘노형 결정을 대통령이 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PWR을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라 호의적으로 ‘주한미국대사 윌리엄 포터(William J. Porter)에게 박 대통령을 찾아가 한국의 첫 발전로로 미국 제품을 사달라고 하라고 해라. 그렇게 하면 그동안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도 개선될 좋은 기회다’라 하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 포터 대사를 움직여 대통령에게 갔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이 상공장관에게 ‘최초의 발전용 원자로는 미국제를 구입하라’고 지시했고, 그 같은 지시를 상공부로부터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대통령의 지시로 국무총리가 움직였고, 그러한 지시를 국무총리 직속 원자력발전추진위에서 경제기획원 장관이 PWR로 결말을 지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형 선정은 성공적이었지만, 결정 과정에서 화신 박흥식의 로비력이 대단했다는 이야기다.
준비기간을 거쳐 1971년 3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고리에서 한국 최초의 원전을 짓는 기공식을 열었다. 한국도 상업용 원전을 짓기 위한 거대한 삽질을 시작한 것이다. 사업비는 1560억원으로, 이 금액은 당시 단군 이래 최대였다. 일본이 1960년 도카이무라 1호기 공사를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한국은 일본보다 11년 늦은 셈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가동한 최초의 원전이 40만kw 규모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의 최초 상업원전이 58만kw라는 것은 상당히 대담한 첫걸음이었다.⊙
미국의 무상원조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 경제는 1950년대 후반부터 원조의 규모가 줄어들고, 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 원조의 형태가 바뀌면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7월 건설부를 폐지하고 경제기획원을 신설해 경제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최고회의는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을 발표했고, 특히 전력·석탄 등의 동력원 확보, 철도·도로·항만 등의 사회간접시설의 건설에 중점을 두었다. 정부는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맞추기 위해 1961년 최대수요 43만kw를 기준으로 하고, 평균 증가율을 12%로 추정한 제1차 전원개발계획을 추진했다. 목표연도인 1966년의 수요는 총 시설용량 84만2000kw(전력공급능력 71만kw)로 추정했다.
당시 원자력계는 불화와 갈등으로 내홍(內訌)을 겪고 있었다. 군사정변 직후 원자력 행정을 책임진 오원선(吳元善) 원자력원장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른 부처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라 세부 실천 일정을 짜고 있었기에, 원자력계도 한시바삐 그 대열에 합류해야만 했다. 게다가 빤한 국가예산에서 화급하지 않은 원자력 연구계획을 한답시고 예산을 타내기도 민망했다.
원자력계, 방사선의학연구소 설립으로 체면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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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일선 원자력원장. 윤치오의 장남으로 서울대 총장을 지낸 그는 집 한 칸 없이 살며 병리학 박사 제자만 80명을 양성했다(사진 왼쪽). 1963년 9월 서울 정동 중앙방송국 자리에 준공한 방사선의학연구소 부속 암병원. 최초 암병원은 36개 병상, 13개 임상과로 1963년 11월부터 진료를 시작했다(사진 오른쪽). |
그때 원자력 산업은 절호의 기회를 맞는다. 1962년 중앙정보부는 시무식 직후 ‘원자력과 한국’이라는 시국정책 특별상황 보고회를 계획하고 있었다. 실무는 중정의 판단관실이 맡아 보고회 준비를 했다. 당시 김종필(金鍾泌) 중정부장의 정책자문기구인 판단관실은 각계 교수 9명을 판단관으로 꾸려 행정부의 정책을 판단해 시정을 요구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익수(朴益洙) 당시 한양공대 교수(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장 역임)는 오원선 원자력원장의 자문역을 맡고 있었고, 오 원장의 추천으로 판단관실 판단관으로 위촉을 받았다.
보고회에서 박정희 의장 등 최고회의 위원들과 국무총리를 위시한 국무위원, 정부 산하 단체장 등은 원자력에 대해 큰 호기심을 가졌다. 오원선 원장은 보고회에서 돌아와 박익수 교수를 불러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박 교수, 그동안 수고가 많았소. 오늘 원자력 관계 상황보고는 대성공이오. 회의가 끝난 직후 송요찬 내각수반이 내가 앉아 있는 자리로 와 ‘오늘 아주 유익한 이야기를 들었소. 이전에 내게 이야기한 방사선의학연구소 설립계획을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시오. 내년 예산에 적극 협조하리다’라고 말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방사선의학연구소의 설립은 1963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업의 하나로 예산에 포함됐다. 1962년 11월 25일 원자력원은 원자력연구소 내에 방사선의학연구실(실장 李圭煥)을 설치하고, 독립연구기관의 채비를 서둘렀다. 이때 오원선 원장은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해병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원장직을 사퇴했다. 1963년 1월 23일 김명선(金鳴善) 박사가 제4대 원자력원장으로 부임했다.
1963년 12월 17일 방사선의학연구실은 원자력원 산하 방사선의학연구소로 승격해 발족했다. 동시에 신임 원자력원장으로 윤치오(尹致旿)의 장남이자 의학박사인 윤일선(尹日善)이 임명됐고, 12월 19일 안치열(安致烈) 박사가 초대연구소장, 김진용(金振鏞) 박사가 부속 암병원장(후에 원자력병원)에 임명됐다. 서울대의대와 연세대의대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 때문에 초대 소장 인선은 간단치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결국 평양의대 출신 안치열 박사를 임명했다.
1963년 9월 서울시 정동 옛 중앙방송국 자리에 연건평 650평의 청사를 새로 준공했다. 이곳에 원자력원과 방사선의학연구소, 부속 암병원이 함께 입주했다. 암병원은 36개 병상, 13개 임상과를 갖고 1963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첫 암환자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인 김동하(金東河) 해병준장의 부인이었고, 암진단과 치료를 위한 암병원 최초의 입원환자로 기록됐다. 처음 개소 때는 방사성동위원소를 선원(線源)으로 하는 원격 심부치료 장치로 대형 코발트-60 치료기(회전식)를 도입해 사용했다.
초창기 연구소는 코발트-60 치료장치를 보유한 암 전문 진료소로 알려지면서 환자의 수가 매년 30~40%씩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당시 부인암은 발생빈도가 가장 높은 악성종양이었다. 암병원은 1970년 7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전국적으로 16만여 명의 부인암 검진사업을 실시해 1008명(0.63%)의 악성종양을 발견하는 실적을 올렸다. 암병원은 스트론튬-90, 이리듐-192, 금-198, 라듐 등 트리가 마크-Ⅱ 시험용 원자로에서 생산한 방사성동위원소로 치료했고, 요오드-131을 이용해 갑상선 질환을 진료하고, 레늄-59로는 혈액검사를 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은 회고록에서 “1969년 후반기에는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암 조기진단 검진차량 6대를 구입해 1970년 7월부터 부인암 검진사업을 시작했다”며 “그중 검진차 5대를 서울대병원 등 5개 국립의과대학 부속병원에 기증해 사업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고 했다. 그는 “1973년 2월 17일 원자력병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소속도 방사선의학연구소에서 원자력연구소 산하기관으로 개편해 발족했다”면서 “환자들이 폭증하면서 1984년 10월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신축병원을 짓고 이전했다”고 했다.
방사선 농학연구소 설립, 미국에서 ‘원자씨앗’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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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3월 30일 과학기술처의 발족과 함께 원자력원이 원자력청으로 개편 출범했다. 1967년 4월 12일, 치사를 하는 윤일선 원장, 뒤쪽 왼쪽이 성좌경 초대 원자력청장, 오른쪽이 조백현 원자력 위원. |
원자력원은 1959년 발족 당시부터 대학과 연구기관에 연구보조금을 지급했고, 비록 의학 분야처럼 활발하지는 않았으나 농촌진흥청, 서울대 농대, 충남대 농대 등과 방사선과 방사성동위원소를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미국대사관은 연구용으로 ‘원자씨앗’을 제공했다. 이듬해 1960년 농촌진흥청 농업시험장과 원예시험장은 미국 오크리지(Oak Ridge) 연구소로부터 방사선 조사(照射)를 한 13종의 종자를 기증받아 육종실험에 사용했다. 동시에 감마선과 X선 등으로 종자개량 시험도 해나갔다. 1964년 농촌진흥청은 서울대 농대와 함께 ‘원자력 이용 종합연구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방사성동위원소(RI) 종합연구실과 시험농장을 설치했다.
원자력원은 1963년 원자력연구소의 생물학연구실 권신한(權臣漢) 박사의 주도로 ‘방사선을 이용한 콩의 품종개량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이와 함께 방사선농학연구를 위해 1966년까지 20여 명을 해외유학생과 훈련생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가운데 식량문제가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부각됐고, 내병성 및 다수확 품종개량, 시비법(施肥法) 개량 그리고 농산물 장기저장 등이 당면 과제로 거론되고 있었다.
원자력원은 이때를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할 적기로 판단했고, 동시에 정부의 시책에 기여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방사선 농학연구에 가장 관심을 보인 인물은 당시 김학열(金鶴烈) 경제기획원 차관이었다. 박익수 전 위원장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행정직 관료들은 반대하지 않았으나, 원자력연구소 측에서는 방사선농학연구소 설립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료나 농업 관계의 연구 분야에 치중하면, 원자로에 관계한 기초연구가 소홀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의 설명이다.
“원자력원 상임위원 자격으로 서울대 농대 김호직(金浩稙) 학장과 심상철(沈相哲) 교수(후에 방사선농학연구소장)를 찾아가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했죠. 방사선에 의한 종자 개량, 시비법 개량과 농산물 장기저장 방법에 관한 사진 3장을 얻어 김학렬 장관의 자택을 찾았습니다. 김학렬 장관과 나는 막역한 사이였어요. 3장의 사진을 김학렬 장관에게 보여주며 ‘방사선에 의한 농학연구는 정부의 식량 증산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965년 초 김학렬 차관은 내게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정하는 심의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장기영(張基榮) 경제기획원 장관 주재로 열린 심의회의에서 방사선 농학연구에 의한 식량 증산과 농업 여건 개선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박익수 당시 상임위원은 심의회의에서 사진을 치켜들고, “감자에 방사선을 적당량 조사해 감자의 눈에서 싹이 트지 않고 장기간 저장할 수 있는 실증적 사진이 여기 있다”고 하자 참석자들은 눈이 휘둥그레했다. 김학렬 차관이 회의가 끝난 후 “오늘 매우 유익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인사했고, 박 위원은 “내년도 예산에 연구소 설립이 될 수 있도록 반영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차관은 “알았소, 잘해봅시다”라고 화답했다. 원자력위원회에서 설립안을 통과시키자 1965년 4월 생물학연구실에서 농학연구를 겸하던 것을 ‘농학연구실’로 임시 분리 독립시키고, 초대실장에 한창열(韓昶烈) 전북대 농과대학장을 임명했다.
1966년 11월 정부의 특별 지원과 농학계의 협력으로 방사선농학연구소를 1과 4연구실 규모로 비교적 어려움 없이 설립했다. 1968년 2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호평리에 위치한 총 3만7946평의 육종시험장도 마련한 데 이어 1969년까지 원자력연구소 부지 안에 1856평의 연구동을 건립해 방사선 농학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연구소는 유전육종 연구를 위해 코발트-60 심부 X선 조사장치를 갖춘 약 3만8000평의 시험농장을 마련한 데 이어, 1969년 코발트-60 감마선 조사온실을 연구소 내에 설치했다. 물론 이러한 방사선 농학 연구의 발전은 당시 경제개발계획과 관련해 농업 증산과 농산물 가공·저장 등에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방사선농학연구소는 방사선 조사에 의한 쌀, 보리, 콩 등 주곡작물에 대한 돌연변이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대두의 경우, 미국에서 도입한 Cb-27(콩 품종)에 방사선을 조사해 재래 콩나물용 대두보다 30% 이상 더 소출이 나오고, 적응력이 강한 신품종인 ‘방사콩’을 생산해 보급했다. 방사선농학연구소는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농작물의 품질개량과 비료효과 증진, 병충해 방제, 쌀·고구마·포도·딸기 등 식품의 저장기간을 연장시키는 등 1973년 농촌진흥청 등의 견제로 연구소가 문을 닫을 때까지 수많은 실적을 달성했다.
박 대통령이 “통일벼 맛 좋다”고 하자 아무도 이의 제기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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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벼 모종(IR667)을 개발해 쌀의 자급을 이끈 허문회(1927~2010) 서울대 농대 교수(사진 왼쪽).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가을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벼 베기 대회에 참석해 일손을 도왔다. 작은 사진은 무기명 투표로 진행된 ‘통일쌀밥 시식회’에서 박 대통령이 서명한 밥맛 조사표. 통일벼 ‘맛’에 대한 시비를 단숨에 잠재웠다(사진 오른쪽). |
1960년대 우리나라 식량 사정이 어려웠던 시절, 국가적인 숙원사업은 ‘식량의 자급자족’ 달성이었다. 보릿고개를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던 데는 ‘녹색혁명’으로 불린 통일벼 개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벼는 크게 자포니카 품종과 인디카 품종으로 나뉜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먹는 쌀은 모두 자포니카(온대산)이고, 태국이나 인도에서 먹는 쌀이 인디카(열대산)이다. 이 두 가지의 특징을 갖는 잡종 쌀을 개발하기 위해서 일본 학자들이 오랫동안 매달렸으나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포기했을 정도다.
서울대 농대 허문회 교수는 1965~ 1966년에 걸쳐 1개의 자포니카 품종과 2개의 인디카 품종을 교배하는 이른바 3원 교배를 실시했다. 허 교수가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할 때, 일본·대만산 볍씨를 교배한 1대 잡종을 아버지로, 필리핀에서 육종한 볍씨를 어머니로 삼아 일찍 여물고, 쓰러지지 않고, 병충해에도 강한 통일벼의 모종(IR667)을 탄생시켰다. 보통 벼는 이삭당 낱알이 80~90개였지만, 통일벼는 120~130개나 됐다. 허 교수가 귀국했을 때만 해도 정부는 무관심했다. 더욱이 다수확이 가능한 벼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원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희농 1호’의 보급에 주력하고 있었다. 희농(熙農)은 1964년 정부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종자로, 보급종이었다. 희농이라는 이름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글자를 따 만들어진 것만 봐도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농촌진흥청은 희농의 보급 책임을 맡았고, 이 때문에 IR667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지 못했다.
결국 희농은 우리나라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실패했고, 그 실패가 공식화되고 나서야 새로운 대안으로 IR667을 가져다 국가의 지원 속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허 교수는 방사선을 볍씨에 조사해 통일형 벼 품종을 지배하는 유전자 SD-1의 작용과 위치를 규명했다. 외국에서 벼 개체별 유전자 위치를 알아보는 기준인 표지유전자기주(基株)를 연구, 육종된 벼들의 표지형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통일벼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통일벼에 대한 계통선발이 있은 후 1970년부터 시험재배를 시작했다. 이듬해 출하한 쌀을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 관계자들이 시식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시식이 있기 몇 달 전에 이미 통일벼의 보급을 결정했지만, 밥맛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보급에 회의적인 의견들이 나왔던 터였다.
그러나 이날 시식을 한 후 통일벼의 전국적인 대량 보급을 결정했다. 시식을 끝낸 후 무기명 평가에 나섰는데,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검정표(檢定表)를 가장 먼저 제출하면서 ‘밥맛이 좋다’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결국 참석한 시식자 누구도 그 자리에서 밥맛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통일벼는 1972년에 빛을 보았다. ‘통일벼’는 당시 다른 품종들보다 30% 정도 생산성이 높은 다수확 품종이었고, 병해충에도 강한 특성이 있었다. 1976년에 ‘통일벼’의 재배 면적을 전체의 44%로 확대하면서 평년보다 21.8% 증가한 521.5만 톤의 쌀을 생산해 냈고, 역사상 최초로 쌀의 자급자족을 달성했다. 그러나 통일벼는 1992년 정부가 수매를 중단하면서 농촌에서 사라졌다. 밥맛이 떨어지는 통일벼의 단점을 보강하면서 수확량도 많은 품종이 잇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연구관들, 트리가 마크-Ⅱ의 중성자 속도에 불만
1957년 미국 제너럴 아토믹스사에서 도입해 1962년 3월 가동한 트리가 마크-Ⅱ는 열출력의 문제로 연구관들의 불만이 높았다. 방사선의학연구소와 방사선농학연구소의 출범으로 동위원소 수요도 계속 늘고 있고, 기초연구와 응용연구에서 더 빠른 중성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임시변통으로 1969년부터 트리가 마크-Ⅱ는 출력을 250kw로 올려 사용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연구관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렇다고 출력을 500kw 내지 1000kw로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구관들은 메가와트급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원자력계의 한 원로는 “트리가 마크-Ⅱ는 2013년 12월 과학기술 연구시설로는 최초로 등록문화재(제577호)에 올라 현재 한전 연수원 자리로 쓰고 있는 태릉의 원자력연구소에 있다”면서 “원자력계는 김중업(金重業)이 설계한 그 건물을 원자력기념관으로 해달라고 청원 중”이라고 했다. 그는 “트리가 마크-Ⅱ는 95%의 무기급 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했다”면서 “이승만 대통령 시절 우리 과학계 원로들이 이 원자로를 어떠한 목적으로 도입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라고 했다.
이에 따라 1968년 원자력연구소는 도입할 연구용 원자로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을 추진했다. 연구소는 제작사들의 설명을 듣기 위해 10여 개 회사에 초청장을 발송했다.
걸프 제너럴 아토믹사(제너럴 아토믹의 후신)와 록히드가 실험용 원자로 경합에 참여했고, 결국 연구관들이 출력을 10Mw까지 증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구개발에 용이한 록히드의 펄스타(Pulstar, 열출력 5Mw)를 원했다. 그러나 이상수(李相洙) 소장은 핵연료의 안정 공급이나 성능이 뛰어난 걸프 제너럴 아토믹의 트리가 마크-Ⅲ(열출력 2Mw)로 결정했다. 트리가 마크-Ⅲ의 도입은 1968년 12월 11일 제167차 원자력위원회의 의결로 결정했고, 1969년 4월 12일부터 공사를 시작했고 1972년 3월 가동에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 3월 30일 원자력원의 이름을 원자력청으로 바꾸고, 그해 4월 21일 과학기술처로 격상시켜 최형섭(崔亨燮) 박사를 초대 장관에 임명해 원자력 정책을 포함한 국가 과학정책을 총괄하게 했다. 원자력청은 졸지에 장관급 부서에서 차관급 부서로 격하됐다. 그러나 원자력원 시대의 권한이나 직제는 그대로 유지됐다.
루리 크림 씨의 권고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과 관련해 에너지, 특히 석유대체 에너지에 대해 관심이 깊었다고 한다. 트리가 마크-Ⅱ 준공식이 있던 1962년 11월 군부 정권은 원자력발전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연구 차원이 아닌 발전(發電) 차원의 원자력을 준비하게 했다. 원자력원과 상공부의 공무원, 한전 관계자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에너지 자원이 부족한 한국은 새로운 대체 에너지원 개발이 시급하기 때문에 1970년대 초기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원자력발전 추진계획안’을 작성했다.
박정희 정권은 원전의 세계적 추세를 파악하기 위해 해외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한국은 1966년 5월부터 원자력발전기술 조사단을 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 이탈리아, 스페인, 인도, 필리핀 등지로 보내 원전 건설 과정을 파악하도록 했다. 1967년까지 계속된 조사에서 경수로를 제작하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밥콕 앤드 윌콕스, 그리고 비등수로를 만드는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영국의 개량형 가스냉각로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1963년 10월 루리 크림(Ruri Krymm) 씨를 단장으로 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대표단 4명이 방한해 기초조사를 했고, 그들은 “한국은 1970년대 초 15만kw급 원전을 짓는 것이 타당하다”고 권고했다. 원전을 지을 부지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64년 당시 전국의 지리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 대한석탄공사를 중심으로 부지 탐색에 들어갔다.
원자력원과 한전, 원자력연구소, 석탄공사, 석유공사는 공동으로 22개 지점을 평가한 후 9개 후보 지역을 선정했다. 그리고 실지 답사를 통해 경기도 고양군 행주외리(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부근)와 경남 동래군 기장면 공수리, 경남 양산군 장안면 월내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월내리) 등 세 군데로 압축했다.
1965년 5월 IAEA 부지조사단(단장 맥컬린)으로부터 2명의 기술조사단을 파견받아 선정해 놓은 세 군데를 조사했다. 이들은 ‘원자력연구소 후보부지에 대한 추가 보고서’를 통해 경남 양산군 장안면 월내리 일대(현재 고리 원전 부근)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1965년 12월 원자력원은 대통령령에 따라 산하에 원자력발전계획심의위를 설치했다. 관련기관이 참여한 건설부, 석탄공사, 석유공사는 에너지원 조사분석, 한전은 장기전력수급계획, 원자력원은 원자력발전의 기술적, 경제적 분석을 담당했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거쳐 원자력발전이 대단위 용량에서는 화력발전과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에 따라 한전은 한국이 필요로 하는 전력량 추이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한국이 최초의 원전을 준공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 1976년 한국이 필요한 전력량은 470만kw일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추정에 따라 한국이 당초 목표로 한 원전의 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1967년 10월 한전이 작성한 ‘장기 전원 개발계획’은 1976년의 한국의 소비전력이 470만kw로 추정됨에 따라, 원전은 50만kw급 2기로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원전의 단위용량에 대해서는 몇 차례 수정을 거듭했다. 1963년 15만kw급 원전을 지어야 한다고 한 것이 4년이 지난 1967년에는 50만kw급 2기를 지어야 한다고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발전소를 건설할 때는 무작정 설비용량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발전소의 설비용량이 국가 전체 설비량의 10%가 넘지 않아야 한다. 1963년 한국의 전기 생산 설비량은 200만kw였다. 10%대의 예비율을 고려하면, 새로 건설하는 발전소의 설비용량은 20만kw를 넘지 말아야 했다. 따라서 새로 짓는 원전의 설비용량은 15만kw가 적정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당시 한국의 원자력공학자들은 미국과 영국 유학 시절 학습한 것에 충실했다. 실무경험이 적었던 이들은 실수를 피하기 위해 교과서대로 일을 추진했다. 이즈음 1963년 10월 IAEA의 기술조사단으로 방한했던 루리 크림 씨가 이러한 조언을 해주었다.
“한국이 만들고자 하는 원전의 설비용량을 현재 기준으로 결정하지 마라. 한국은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로, 전력 소비량이 급증할 것을 의미한다. 원전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행동에 옮겨 실제로 원전을 가동하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다. 10년 후 한국의 발전 설비량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현재 시점의 국가 전력 설비량을 기준으로 원전 설비용량을 결정하지 말고, 10년 후 한국이 사용할 전력량을 기준으로 원전의 설비용량을 결정하라.”
1960년대 중반, 한반도의 안보환경은 험악하게 돌아갔다.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이 베트남전에 뛰어들었고, 한국은 2개 사단의 파월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부는 5년 단위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세워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소비전력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정부와 한전은 도처에 화력발전소를 지었으며, 크림 씨가 예언한 대로 한국의 전력사정은 돌아가고 있었다. 원자력연구소는 한국이 짓고자 하는 최초 원전의 설비용량을 15만kw에서 20만kw→30만kw→50만kw로 늘렸다. 이러한 확장은 모험에 가까운 도박이었다.
정일권 총리, 원전 주도권 싸움에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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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5월 10일 두 번째 실험로인 트리가 마크-Ⅲ 준공식 모습. 왼쪽으로부터 김종필 국무총리,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 윤동석 원자력청장. 사진=한국원자력연구원 |
1966년 제1차 원자력발전기술조사단이 그해 5월부터 7월까지 미국, 영국, 캐나다 등 8개국에 파견돼 건설계획, 기술개발 현황, 경제성 평가, 부지선정기준, 자금조달 등 각종 조사를 실시했다. 박익수, 이영재(李永在), 이창건(李昌健) 3인은 천연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하는 캐나다의 캔두형을 처음으로 접한다. 조사단은 귀국 후 조속히 원자력원에 전담부서인 ‘원자력발전과’의 신설을 건의했고, 이에 따라 1967년 원자력원에 원자력과가 설치됐다.
이어 1967년,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원자력발전조사단이 파견됐다. 1968년 3월 원자력발전계획심의회는 용역회사인 번즈앤로(Burns & Roe)사의 타당성 조사를 참고해 500MWe급 2기를 1970~1974년 사이에 건설하고, 노형은 경수로, 개량가스냉각로, 중수로 중 택일하고, 건설부지는 부산 또는 울산, 건설비는 약 1억4000만 달러 중 9000만 달러는 차관으로 충당한다고 건설추진방침을 밝혔다.
원전 건설을 본격화하자 원자력청과 한전 사이에 원전 발전의 주체를 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원자력청은 “프랑스의 원자력청이나 영국의 원자력공사처럼 원자력청이 원전을 건설,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6년 원자력발전과(초대과장 문희성)를 설치한 한국전력은 “원자력발전도 발전이니만큼 전기를 생산하는 한전이 건설과 운영을 일원화해 맡아야 한다”고 맞섰다.
이 와중에 일간신문을 통해 육종철(陸鐘撤) 한양대 교수는 “상업용 발전소는 당연히 한전 소관”이라고 했고, 박익수 원자력상임위원은 “원전은 단순한 발전설비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지상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박 전 상임위원은 “당시 원전이 단순한 발전설비가 아니라는 의미는 국책적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취지”라고 했다.
이 싸움으로 인해 원전사업은 정치문제로 비화했고,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는 직속자문기관으로 박충훈(朴忠勳) 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원자력발전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1968년 4월 9일 위원회는 원전 건설과 운영은 한전이 담당하고, 원자력발전 기술의 개발과 원자력 안전규제, 핵연료와 방사성 폐기물, 원자력 기술자 양성과 자격검정은 원자력청이 담당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원자력발전추진위가 한전의 손을 들어준 것은 돈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충분한 자금이 없었다. 돈이 없는 나라가 사회간접자본에 투자를 하려면 외국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돈을 빌리려면 담보를 제공해야 했고, 원자력청은 그게 없었다. 한전은 발전소를 담보로 제공할 수 있었고, 원자력발전추진위는 한전에 원전 건설과 운영을 맡기게 됐다.
이로써 원자력발전의 주체가 된 한전은 50만kw급 원전 2기를 짓는다는 계획을 수정해 58만7000kw급 원전 1기부터 짓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원자로 노형을 둘러싼 논의가 시작됐다. 1968년 6월 24일 한국전력은 고리 1호기 건설 소요자금을 344억원(외자 9500만 달러, 내자 83억 원)으로 추정해 놓고,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 웨스팅하우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영국의 원자력수출공사(UKAEA)에 턴키 방식으로 예비견적서를 내라는 안내서를 보냈다.
화신백화점 朴興植 사장의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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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식 화신산업 사장(좌)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사업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웨스팅하우스의 한국대리점을 했던 박 사장은 강력한 로비력으로 경수로(PWR)를 관철시켰다. |
WEICO의 한국대리점은 화신백화점 오너인 박흥식(朴興植)이었다. “PWR을 선정하면 커미션 700만 달러를 준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당시 원전 계약금액이 약 1억5000만 달러였으니 약 5%의 커미션에 해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일권 총리 직속으로 원자력발전추진위가 발족해 원자력원과 한전 간의 업무조정, 원자로 노형에 대한 자문기관으로 자처하고 나섰다. 원자력법상 원자력위를 제쳐놓고 국무총리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규제기관이 사업기관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 연출됐다.
결국 비등수로는 조기에 검토대상에서 탈락해 경수로와 개량형 가스냉각로만 남게 됐다. 미·영 간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자연 원자력연구소의 연구원들도 둘로 갈리게 됐다. 영국 유학파들은 가스냉각로를 선호했고, 미국 유학파들은 경수로를 지지했다. 개량형 가스냉각로냐, 경수로냐의 대립은 예상외로 심각했다.
외견상 우세를 보인 쪽은 영국제인 개량형 가스냉각로였다. 자본주의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발전용 원자로(가스냉각로)를 지었던 영국은 원자로 부품 생산을 유럽 각국에 맡김으로써 개량형 가스냉각로를 유럽형 원자로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벨기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이 원자로에 들어가는 부품을 제작했으므로, 이 나라들도 가스냉각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한국도 가스냉각로를 선택하길 원했다.
한국에 주재하는 유럽 각국의 대사들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자국 원자로의 장점을 설명했다. 개량형 가스냉각로는 세계에서 수출이 가장 잘 되는 원자로란 타이틀도 얻고 있었다. 미국제 경수로는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만 건설됐기에 해외 건설량이 적었다. 1966년 일본 최초로 상업가동한 16만6000kw급 도카이무라(東海村) 1호기도 영국에서 개발한 가스냉각로였다. 그러나 미국 유학파들은 “경수로가 훨씬 더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노형 선정은 해당국이 향후 원자로 발전체계를 어떻게 가져가느냐의 문제여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종주 이사의 ‘신의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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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7월 20일 한국의 최초 원자력발전소 고리 1호기 준공식이 열렸다. 경남 양산군 장안면 고리(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고리)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3부 요인과 함께 원전 내부시설을 돌아보고 있다. 사진=원자력연구원 |
미국 유학파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경수로 지지파들은 “영국의 원전시장은 작지만 미국은 매우 크다. 미국의 전력회사들은 미국 내에 원전을 짓는 데 매진하느라 수출을 등한히 했고, 영국은 영국시장이 작아 수출에 매진했다. 미국이 경수로 수출에 진력하지 않았다고 해서 경수로의 가치를 절하해선 안 된다. 경수로는 가장 안전한 원자로다”라고 주장했다.
갈등이 첨예해지자 태완선(太完善) 부총리가 이끄는 부흥부가 중립적 인물에게 판단을 맡겨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중립적 인물로 지목된 사람은 한전의 기술이사를 맡고 있던 김종주(金鍾珠)씨였다. 그는 해방 전 도쿄제국대학에 다니다 폐병으로 고향인 경남 양산으로 돌아와 휴양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았다.
해방 후 그는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편입해 졸업하고 시슬러의 강연을 듣고 원자력의 가치에 눈을 떴다. 그리고 영국 하웰(Harwell)에 있는 영국 원자력연구소에서 가스냉각로에 대해 공부한 후 콜더홀 원전에서 4개월간 운전교육을 받았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경수로에 대해 공부했다.
태완선 부총리는 한전에 있는 김 이사를 개량형 가스냉각로와 경수로 양쪽을 모두 아는 사람으로 보고 그에게 노형 선택을 맡긴 것이다. 김종주 이사는 문희성(文熙晟) 계장과 함께 미국형과 영국제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미국산 경수로가 낫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김 이사는 “BWR은 구조는 간단하나 터빈이 원자로 내에 있어 터빈까지 방사능에 오염돼 안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며 “한전으로는 PWR에 더 호감이 갔다”고 했다. 그의 결정에 대해 정래혁(丁來赫) 한전 사장도 “김 이사의 판단이 옳다”고 격려했다. 태완선 부총리가 이를 받아들여 미국제 경수로를 선택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아이젠버그가 강하게 반발했다.
화가 단단히 난 아이젠버그를 달래기 위해 김 이사는 “다음에는 영국에서 만드는 개량형 가스냉각로를 구매하겠다”는 말로 간신히 아이젠버그를 달랬다. 운명의 장난인지 얼마 후 가스냉각로에 문제가 있는 것이 발견됐고, 영국 정부는 가스냉각로의 수출을 금지했다. 영국 정부는 문제를 일으킨 부품을 회수해 교체하는 리콜 조치도 취하면서 사이즈웰(Sizewell) B 원전부터 경수로로 건설하겠다고 공표했다. 이 사건으로 잘나가던 가스냉각로는 된서리를 맞았고, 세계 원전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국이 선택한 경수로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한국이 개량형 가스냉각로를 선택했더라면, 원자력 태동기 한국 원자력 산업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가스냉각로를 도입한 나라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일본은 도카이무라 1호기가 덩치에 비해 생산하는 전기는 적고, 경수로에 비해 발전단가는 비싸며, 보수유지비와 연료비가 높다는 사실 때문에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이후 일본은 더 이상 가스냉각로를 짓지 않았다. ‘신의 한 수’로 경수로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김종주 이사는 원자력 기술을 도입한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한국 원전의 줄기를 바로 세운 공로자 반열에 올랐다.
가스냉각로와의 싸움은 아직 끝난게 아니다. 지금 북한의 영변 핵시설은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최대로 생산하기 위해 러시아형 가스냉각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朴正熙, 미국 경수로 선택 지시
경수로를 도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후 한국은 다시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을 놓고 고민했다. 경수로 건설 경험이 많은 웨스팅하우스를 최종 계약사로 선정했다. 1969년 12월 한국은 웨스팅하우스에 차관 이자율은 연 6.75%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때문에 웨스팅하우스는 한동안 혼선을 빚었다. 그로 인해 한전과 웨스팅하우스 간 계약이 늦어졌다. 1970년 12월에야 끝났다. 그 사이 한전은 고리 일대에 살아온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21만 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박익수 전 위원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종주 이사는 미국 원자로로 결정한 배경을 이렇게 술회했다.
“하루는 화신 박흥식 사장의 아들 박병찬(朴炳贊)씨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영국의 로비가 가장 활발할 때였습니다. 그는 그것이 불안했는지 ‘노형 결정을 대통령이 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PWR을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라 호의적으로 ‘주한미국대사 윌리엄 포터(William J. Porter)에게 박 대통령을 찾아가 한국의 첫 발전로로 미국 제품을 사달라고 하라고 해라. 그렇게 하면 그동안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도 개선될 좋은 기회다’라 하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 포터 대사를 움직여 대통령에게 갔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이 상공장관에게 ‘최초의 발전용 원자로는 미국제를 구입하라’고 지시했고, 그 같은 지시를 상공부로부터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대통령의 지시로 국무총리가 움직였고, 그러한 지시를 국무총리 직속 원자력발전추진위에서 경제기획원 장관이 PWR로 결말을 지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형 선정은 성공적이었지만, 결정 과정에서 화신 박흥식의 로비력이 대단했다는 이야기다.
준비기간을 거쳐 1971년 3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고리에서 한국 최초의 원전을 짓는 기공식을 열었다. 한국도 상업용 원전을 짓기 위한 거대한 삽질을 시작한 것이다. 사업비는 1560억원으로, 이 금액은 당시 단군 이래 최대였다. 일본이 1960년 도카이무라 1호기 공사를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한국은 일본보다 11년 늦은 셈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가동한 최초의 원전이 40만kw 규모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의 최초 상업원전이 58만kw라는 것은 상당히 대담한 첫걸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