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12〉 : 월간조선

‘구이린의 산수는 천하제일이다(桂林山水甲天下).’ 이것은 중국 최고의 자연풍광을 자랑한다는 구이린을 소개할 때마다 등장하는 문장이다. 이 글귀는 13세기 남송의 저명한 문장가 이증백(李曾伯)이 〈상남루(湘南樓) 중건기〉에 쓴 ‘구이린의 산천은 천하제일이라, 3년간 변고의 조짐이 없었다(桂林山川甲天下三年間無兵革之警)’에서 비롯됐다. 상남루는 7세기 처음 지어진 구이린의 누각이다. 여러 차례 불타고 중축되길 반복하다가 청대에 완전히 소실됐다. 하지만 이증백이 남긴 글귀는 그 뒤에 수많은 시인과 문객이 변용하여 구이린을 묘사할 때 애송했다.

이 문장처럼 구이린의 산과 물은 천하절색이다. 무엇보다 다른 지방에서 보기 힘든 특별난 자연조건을 세 가지나 갖추고 있다. 첫째, 쾌적한 날씨를 들 수 있다. 구이린의 연평균 기온은 19.8℃로 사계절 내내 따뜻하다. 전형적인 아열대 기후대에 속해 7~8월 여름철에 간혹 35℃까지 치솟긴 하지만, 평균 28~32℃를 유지한다. 연간 강수량은 1926mm로 많지도 적지도 않게 딱 알맞다. 이 때문에 서리가 끼지 않는 날이 한해 309일에 달한다.

한데 매년 한두 차례씩 눈이 내린다. 이는 같은 위도대의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 때문인지 현지인들은 구이린을 ‘겨울에 소설을 볼 수 있고 사계절 내내 꽃피는(三冬少雪四季常花) 고장’이라 소개한다. 실제 겨울철에도 구이린의 산은 녹음으로 우거져 있다. 같은 산에서 낙엽이 지고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여기에 눈발까지 날리는 풍경까지 볼 수 있으니, 붓을 들어 수묵화 한 폭을 그리고픈 욕망이 저절로 치솟는다.

天下絶景의 구이린

아홉 개의 말을 절벽에 그린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九馬畵山’.

둘째, 기묘한 카스트지형이다. 구이린의 산은 중국 내 다른 지방처럼 거대하거나 웅장하지 않다. 평균 해발이 150m에 불과할 정도로 아담하고 소박하다. 그러나 3억년 전 바다였던 이곳이 지각운동으로 바닥에 쌓여 있던 석회암을 수면 위로 상승시키면서 수많은 산봉우리를 만들어 냈다. 그 뒤로 오랜 세월 동안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이 뾰족하게 솟아올라 있는 기묘한 형상을 갖추게 됐다. 이러한 지형을 갖춘 곳은 중국에서 구이린과 구이저우(貴州)의 완펑린(萬峰林)이 유일하다.

셋째, 맑고 깨끗한 물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구이린을 끼고 흐르는 강은 리장(漓江)이다. 리장은 싱안(興安)에서 발원해서 구이린, 양숴(陽朔)를 거쳐 핑러(平樂)로 흘러가 총길이가 437km에 달한다. 이 중 구이린부터 양숴에 이르는 83km 구간이 천하절경으로 손꼽힌다. 강 양옆으로 카스트지형이 연출해 낸 산봉우리들을 끼고 굽이굽이 돌고 있노라면,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이미 수백년 전부터 중국인들은 이 ‘현세 속의 선경(地上仙境)’을 배를 타고 감상해 왔다. 오늘날 여행객은 구이린 도심에서 선착장까지 버스로 이동한 뒤, 유람선을 갈아타고 본격적인 리장 구경에 나선다. 갑판 위에 서서 맑은 물과 아름다운 봉우리가 연출하는 절경에 푹 빠져 있다 보면, 뺨을 세차게 가르는 강바람조차 잊게 된다. 리장 변의 산봉우리는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각기 다른 모습과 형태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다 형형색색의 기암괴석이 많아서 마치 산수화를 그려 놓은 듯하다.

보통 유람선 관광은 3~4시간이 소요된다. 유람선 안에는 식당이 있어 밥을 먹으며 즐길 수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만, 리장의 수려한 풍광에 빠지다 보면 식사하는 것을 잊게 된다. 강변에는 산봉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녹음으로 우거진 들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통 민가도 수시로 눈에 띈다. 사시사철 푸름이 덧칠된 산과 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그럽고 맑은 공기에 심호흡을 하고 나면, 대도시 속에서 일과 생활에 찌든 스트레스를 덜어내는 듯한 느낌이다.

겨울철에는 강변의 모래톱이나 갯바위에서 덩치가 큰 새를 볼 수 있다. 이 새는 주둥이가 길지만, 날개는 작은 검은 빛깔의 형상을 갖췄다. 바로 ‘검은 오리’를 뜻하는 가마우지다. 가마우지는 까맣다는 가마와 오디에서 우지로 변한 말이 합쳐졌다. 다른 새와 달리 물에 잘 젖는 깃이 있어 물질을 아주 잘한다. 구이린에서는 이 가마우지를 이용한 독특한 낚시법이 있다. 가마우지의 목 아래를 끈으로 묶은 뒤 리장에 풀어서 물고기를 사냥케 하는 것이다. 작은 물고기는 가마우지가 삼키지만, 큰 물고기는 목에 걸려 어부의 몫이 된다.

구이린에서 꼭 찾아야 할 샹비산

양숴에서는 전통 민가를 가게와 식당으로 개조해 여행객을 맞고 있다.

이런 풍광에 취하다 보면 유람선은 어느덧 종착점인 양숴에 도착한다. ‘양숴의 산수는 구이린 제일이다(陽朔山水甲桂林)’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양숴의 자연풍광은 아주 빼어나다. 특히 시제(西街)에는 고풍스런 전통가옥이 줄지어 서 있다. 지금은 건물을 개조해 다양한 상품과 각기 다른 먹거리를 파는 가게로 바뀌었다. 양숴에는 저렴한 가격대의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는 서양인 여행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구이린의 역사는 기원전 2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지금의 구이핑(桂平)시 서남부에 구이린군(郡)을 설치했다. 본래 구이린은 ‘계수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계수나무에 피는 계화(桂花)는 봄과 가을에 안개꽃처럼 만개한다. 꽃향기는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하다.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도시가 형성된 것은 265년 삼국시대의 오나라 때였다. 5세기에는 이름이 구이저우(桂州)로 바뀌었다. 그 이름을 800여년 동안 쓰다가 명대 들어서 원래 명칭을 되찾았다.

오랫동안 구이린은 광시(廣西)의 행정중심지였다. 역대왕조는 1000년 가까이 구이린에 부(府)를 두어 광시를 관할했다. 이런 연유 때문에 지금도 광시의 약자는 ‘구이(桂)’다. 1913년 중화민국정부는 행정부를 난닝(南寧)으로 옮겼고, 1936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구이린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러나 1950년 사회주의정권이 광시좡(壯)족자치구를 설치하면서 구도(區都)를 난닝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현재 구이린은 난닝 다음가는 광시의 2대 도시로 격하됐다.

구이린은 6개 구, 9개 현, 2개 소수민족 자치현이 있는 광역시다. 2014년 말 상주인구는 491만명을 넘어섰고, 지역내총생산(GRDP)은 1827억 위안(약 32조5206억원)에 달했다. 구이린의 주요산업은 기계전기, 의약품, 천연고무, 식품음료, 관광 등이다. 구이린의 아름다움은 오래 전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2014년 무려 3871만명의 외지관광객이 구이린을 찾았고, 이 중 외국인만 203만명에 달했다. 이들이 뿌린 돈은 전년보다 20%가 늘어나 420억 위안(약 7조4813억원)을 기록했다. 외국인관광객이 구이린에 머무는 날은 2.15일로 다른 지방보다 하루 가까이 더 길다.

샹비산은 코끼리가 코를 내밀어 강물을 들이마시는 형상처럼 되어 있다.

구이린 주민의 절대다수는 한족이지만, 2010년 현재 소수민족도 73만4000명에 달한다. 본래 광시에는 좡족이 1444만명(31.4%)이나 있을 만큼 소수민족이 많다. 좡족은 중국 전역에서 1700만명을 넘어 한족 다음으로 많은 민족이다. 본래 이들은 광둥(廣東)과 광시의 원주민이었던 백월(白越)의 후손이다. 첫 통일왕조 진나라가 들어선 이래 서서히 유입된 한족에게 주도권을 내줬다. 이로 인해 백월의 일부는 베트남으로 넘어갔다. 베트남의 소수민족으로 변해 따이족(Tay), 눙족(Nung), 자이족(Giay) 등 갈래가 다양하다. 2013년 말 따이족만 270만명에 달할 정도로 인구도 많다.

좡족은 체구가 작고 코가 납작하지만, 습도가 높은 기후 덕에 피부는 좋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아서인지 품성이 낙천적이고 순박하다. 실제 좡족의 농촌거주 비율은 77%에 달해 소수민족 평균(76%)보다 높다. 중국에선 좡족의 거주지를 ‘8할이 산이고 1할이 물이며 1할이 농경지다(八山一水一分田)’라고 표현할 정도다. 이 때문에 좡족 내에는 계층과 빈부의 격차가 크다. 도시민은 토지 임대나 관광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생겨났지만, 농촌 주민은 여전히 가난하다.

구이린 도심에도 볼거리가 많은데, 그중 꼭 찾아보아야 할 곳은 샹비산(象鼻山)이다. 샹비산은 리장과 타오화(桃花)강이 회류하는 지점에 있다. 코끼리가 코를 길게 내밀어 강물을 들이마시고 있는 형상을 갖추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석회암으로 이뤄진 산의 앞부분은 강바닥에 절묘하게 박혀 있다. 산의 크기는 아담한 편이라 해발 200m, 면적 11만8000m²에 달한다. 코와 몸통 부분만 바윗덩어리고 뒤에는 수풀이 우거졌다.

이 샹비산에 구이린을 대표하는 보물창고가 하나 있다. 바로 미향형(米香型) 소곡주(小曲酒)를 대표하는 싼화주(三花酒)의 저장고다. 미향형은 바이주(白酒)의 4대 향형 중 하나로, 맛이 부드럽고 향이 단아하다. 구이린에서 수수가 아닌 쌀로 바이주를 생산하게 된 것은 좡족이 도작(稻作)문화의 선수였기 때문이다. 좡족은 산꼭대기에서까지 벼농사를 지을 정도로 기술이 뛰어나다. 경사가 심한 산지에 다랑논을 일구고 물길을 대어 벼를 경작했다.

광시의 마오타이 싼화주

샹비산에 있는 싼화주 저장고. 수백 년간 싼화주를 숙성시킨 장소다.

이런 토대 위에 싼화주는 송대에 ‘상서로운 이슬(瑞露)’이라 불릴 만큼 역사가 오래됐다. 청대부터 원료를 찌고 끓이길 3번 하고, 그 과정에서 요동치는 주액 거품이 마치 계화 모양 같은 술(三熬堆花酒)이라 해서 싼화주라고 이름 지어졌다. 싼화주의 부드럽고 깨끗한 맛은 샹비산 앞 지하에서 치솟는 샘물을 쓰기 때문이다. 이 샘물은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순하고 단맛이 난다. 게다가 좡족이 생산한 쌀은 입자가 크고 전분 함량이 72%에 달할 만큼 질이 좋다. 여기에 구이린 교외에서 나는 약초 여뀌를 누룩을 만들 때 넣어 짙은 향이 배게 한다.

샹비산의 저장고는 싼화주를 만드는 데 있어 화룡점정(畵龍點睛) 역할을 한다. 저장고는 전체 면적이 3000m²에 달하는 천연동굴이다. 1년 내내 19도를 유지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다. 동굴 안은 습도가 90%에 달할 만큼 아주 높다. 증류된 술은 항아리에 담겨 저장고에서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0년 이상 숙성된다. 송대부터 사용되어 수백년 동안 동굴 곳곳에 축적된 미생물은 항아리 속에 담겨진 술을 깊고 진하게 한다.

고유의 원료에다 긴 숙성과정을 거친 술답게 싼화주는 시원하면서 짙은 꿀맛이 배어 있다. 현지인들은 싼화주가 정신을 맑게 하고 혈액순환을 좋게 해서 건강에 이롭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광시자치구에선 싼화주를 약용(藥用)으로 쓰고 요리를 할 때 사용한다. 또한 두부장아찌(腐乳), 고추장(辣椒醬)과 더불어 ‘구이린의 세 보물(三寶)’이라고 부르며 자랑한다. 싼화주는 과거 전통 있는 여러 양조장에서 우후죽순처럼 생산됐는데, 1952년 모든 양조장을 국영 구이린술공장(酒廠)으로 통합시켰다. 그 후 이름을 구이린음료공장으로 바꿨다가 지금은 싼화주식회사로 해서 증시에 상장했다.

가마우지를 태우고 리장으로 나가려는 한 늙은 어부.

1979년 전국 술품평회(評酒會)에서 싼화주가 우수 품질주로 선정되어 중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면서 미향형 바이주를 대표하게 됐다. 1999년 구이린에선 유일하게 중국정부로부터 ‘중화라오쯔하오(中華老字號)’를 수여받았다. 중화라오쯔하오는 100년 이상 된 상점이나 상표에 주어지는 칭호다. 비록 중국 10대 명주에는 들지 못했지만, ‘광시의 마오타이(茅臺)’라 불리며 해외에서 각광받고 있다. 구이린을 찾는 우리 관광객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구이린에는 이 싼화주와 가마우지를 엮은 전설이 있다. 수백년 전 한 어부가 이른 새벽 가마우지를 배에 태우고 리장에 나갔다. 가마우지는 능숙한 솜씨로 물고기를 낚아채 금세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이에 흥겨운 어부는 노래를 부르며 배를 저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세월이 흘러 늙어버린 가마우지는 더 이상 사냥하기에 힘이 부쳤다. 어부는 가마우지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어느 날 소반(小盤)을 준비해 강변 언덕바지에 올랐다.

리장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돗자리를 펴고 싼화주 한 병을 올려놓은 뒤 가마우지와 마주앉았다. 어부는 정성스레 싼화주를 따라 가마우지 주둥이에 부어 줬다. 늙고 힘없는 가마우지는 술맛에 깊이 취해 긴 목을 돗자리에 누이고 깊은 잠에 빠졌다.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가마우지의 몸을 쓰다듬으며 어부는 하염없는 눈물을 쏟았다. 지금도 구이린의 어부들은 가마우지를 자신의 가족처럼 아끼고 챙긴다. 이런 애틋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싼화주를 들이켜다 보면 눈앞에 펼쳐진 구이린의 절경은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광저우와 황비홍

광둥성에선 유일한 술문화 박물관인 주장솽정박물관의 술항아리.

미향향 바이주로 광시에 싼화주가 있다면, 광둥(廣東)에는 주장솽정(九江雙蒸)이 있다. 광둥의 바이주는 유독 미향형이 많다. 링난(嶺南)미주, 산허바(三河壩)주, 창러샤오(長樂燒)주 등 각지의 술이 광둥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중 주장솽정이 역사와 전통에 있어 으뜸이다. 주장솽정은 1827년에 문을 연 술도가 영덕흥(永德興)에서 제조한 술을 기원으로 한다. 영덕흥은 포산(佛山)시 난하이(南海)구 주장진에 소재했다. 주장진은 중국 동남부 최대 하류인 주장(珠江)삼각주의 한복판에 있다. 이 때문에 예부터 ‘어미지향(漁米之鄕)’이라 불릴 만큼 쌀이 넉넉한 고장이었다.

주장솽정은 주장진 출신의 유학자 주차기(朱次琦)로 인해 유명해졌다. 주차기는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과거(科擧)와는 인연이 없었다. 30살이 넘어서 향시를 통과했고 40살에야 진사가 됐다. 다행히 관운은 좋아 5년 만에 산시(山西)성 샹링(襄陵)현감으로 임명됐다. 지방관으로 뛰어난 행정능력을 펼치고 선정을 베풀어 탄탄대로를 밟는 듯했다. 그러나 현감 임기를 끝낸 뒤 돌연 사직하고 귀향했다. 그 뒤 은거하면서 초당을 열어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가 배출한 대표적인 제자가 강유위(康有爲)다. 강유위의 사상 대부분은 주차기로부터 비롯됐다.

주차기는 평소 술을 좋아했다. 특히 고향 술인 영덕흥의 진가양(陳佳酿)을 즐겨 마셨다. 포산 주민들은 주차기를 ‘주장선생(九江先生)’이라 부르며 존경했는데, 진가양이 주장선생이 사랑하는 술이라고 소문나면서 따라 마셨다. 이 덕분에 수요가 늘어나면서 주장진에는 술도가가 점점 늘어났다. 1949년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설 무렵에는 그 수가 12개나 됐다. 1952년 술도가들을 통합해 주장주업연영사(酒業聯營社)라는 국영업체가 문을 열었다. 그 뒤 주장술공장(酒廠)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국인들은 주장솽정을 보통 광저우(廣州)의 술로 알고 있다. 주장솽정의 최대 판매처가 광저우인 데다, 광저우를 거쳐 중국 전역으로 운송되기 때문이다. 포산과 광저우는 거리상으로 30km에 불과할 정도로 아주 가깝다. 두 곳은 중국 4대 요리 중 최고로 손꼽히는 광둥요리(粵菜)의 발상지다. 오늘날 중국 어디를 가든 맛볼 수 있는 요리가 광둥요리와 쓰촨요리(川菜)다. 중국인들이 포산 하면 떠올리는 상징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1991년 홍콩의 쉬커(徐克) 감독이 제작하고 대륙 출신 리롄제(李連杰)가 주연한 영화의 주인공 황비홍(黃飛鴻)이다.

황비홍은 1856년 당시 행정구역상 난하이현 포산진에서 태어났다. 황비홍의 아버지 황기영(黄麒英)은 19세기 광둥을 무대로 활약하던 고수(廣東十虎)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다. 황기영은 유소년기에 무술을 익혔고 청소년기에 수련여행을 다니다가, 한 장군의 눈에 들어 포산 주둔군의 교관이 됐다. 틈틈이 익힌 약초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약방을 열어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황비홍은 3살 때부터 무예를 익혔다. 천성적으로 기골이 장대한 데다 총명해서, 13살 때 아버지와 함께 군졸을 가르칠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황기영은 빠른 발차기를 구사하는 ‘그림자가 없는 다리(無影脚)’ 기술의 달인이었다. 황비홍은 이 가전무술뿐만 아니라 광둥십호 중 양곤(梁坤)으로부터 철선권(鐵線拳)을, 소걸아(蘇乞兒)로부터는 취팔선권(醉八仙拳)을 전수받았다. 또한 고수 송휘당(宋輝鏜)에게서 또 다른 무영각을 배워 홍가권(洪家拳)을 집대성했다. 17살 때 광저우에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광부나 과일·채소·수산물 가게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선별해 제자로 받았다. 황비홍이 주로 하층민에게 무예를 가르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아주 특별난 사례였다.

관더싱과 황비홍

황비홍기념관은 황비홍이 운영하던 무관과 보지림을 고증해 복원했다.

광저우에서 황비홍은 차츰 지명도를 쌓아 가며 정착했다. 한 영국인이 유럽에서 훈련시켜 데려온 셰퍼드로 중국인들을 괴롭혔는데, 황은 단 한 번의 발차기로 개를 즉사시켜 크게 유명세를 탔다. 지금의 해군사관학교인 수사(水師)가 당시 명성을 떨치던 황을 무술교관으로 초빙했다. 1885년에는 해군제독이 직접 요청해 광둥해군의 교관이 되었기에 운영하던 무관은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듬해 아버지와 해군제독이 잇달아 죽자, 곧 관직을 사직했다. 그 뒤 개업한 병원이 바로 보지림(寶芝林)이다. 이 보지림이 영화 〈황비홍〉에 줄곧 등장하는 무대다.

1888년 황비홍은 유영복(劉永福) 장군을 고쳐준 인연으로 흑기군(黑旗軍)의 교관 겸 의관이 됐다. 유영복은 황의 무예와 의술에 감탄해 ‘의예정통(醫藝精通)’이라고 쓴 편액을 선물로 줬다. 황도 유 장군의 인품에 반해 1894년 흑기군과 함께 대만(臺灣)에 가서 일본군과 싸웠다. 대만에서 돌아온 뒤에는 주로 보지림에 머물면서 가난한 병자들의 치료에 매달렸다. 1911년 유 장군이 다시 요청하자 한동안 민간인 자위부대의 교관으로 일했다. 단신으로 부둣가의 조직폭력배들을 굴복시킨 일화도 남아 있지만, 말년에는 의술에만 전념하다 1925년에 죽었다.

황비홍에 관한 영화를 독자들은 아마 쉬커 감독의 시리즈로만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중화권에서 제작된 황비홍 영화와 드라마는 지금까지 100편이 넘는다. 1948년 홍콩에서 후펑(胡鵬) 감독이 만든 영화 〈황비홍: 편풍멸촉(鞭風滅燭)〉이 그 시초였다. 주연은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관더싱(關德興)이 맡았다. 관더싱은 광둥의 전통극인 유에쥐(粵劇)의 배우였다. 정식으로 무예에 입문하지 않았지만, 무술에 심취해 홍가권을 연마했다. 첫 황비홍 영화를 촬영할 때 관의 나이는 40대 초반이었다. 하나 무예가 일정한 수준에 올라 무극강유권(無極剛柔拳)을 창시할 정도였다.

관더싱은 1950~70년대 홍콩에서 제작한 80편에 가까운 황비홍 영화와 드라마의 주연 대부분을 꿰찼다. 이 때문에 홍콩 주민들은 관을 ‘황사부(黃師傅)’라 부르며 존경했다. 관이 고희(古稀)를 넘어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기 어려워지자, 홍콩 영화계에서는 새로운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1978년 황비홍을 새롭게 해석하고 코믹성을 강화한 영화 〈취권(醉拳)〉을 제작했다. 〈취권〉은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떠오르던 배우 청룽(成龍)을 아시아의 스타로 등극시켰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무술영웅인 황비홍을 너무 가볍게 묘사하고 왜곡시켰다며 맹렬히 비판했다.

이런 영향으로 1980년대에는 황비홍 영화를 가뭄에 콩 나듯 제작했다. 관더싱이 컴백해 주연을 맡은 영화마저 만들었다. 한동안 침체에 빠졌던 황비홍 영화 붐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이 리롄제(李连杰)가 주연한 작품이었다. 쉬커 감독은 리롄제와 콤비를 이루며 영화 4편을 찍었고, 다른 배우와도 여러 편의 황비홍 영화를 촬영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홍콩과 중국에서는 쉴 새 없이 많은 황비홍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한 인물에 관한 영화나 드라마를 이렇게 많이 제작한 것은 전 세계 영화사에서 유례가 없다. 실제 이 방면에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을 정도다.

황비홍 관련 작품이 많은 이유

기념관 안 演武廳 마당에서 수련 중인 황비홍의 후예들.

그렇다면 중화권에서는 왜 황비홍에 관한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 제작하는 것일까? 한때 중국에선 이 문제로 논란이 일었다. 황비홍이 한 시대를 풍미한 일대종사(一代宗師·무술에서 위대한 업적을 세운 스승)였고,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의사였다는 점에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5000년의 중국 역사에서 황비홍보다 뛰어난 무예가는 즐비하다. 또한 황비홍과는 비교가 안 될 큰 업적을 남긴 의사들도 수없이 많다. 이 때문에 일부 중국 언론은 홍콩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같은 광둥문화권 출신인 황비홍을 과대 포장했다고 비판했다.

무술영화는 대중적으로 아주 매력적인 장르다. 무협(武俠)은 서구에서도 ‘동양의 판타지’라고 부를 만큼 소재가 풍부하고 스토리가 흥미롭다. 한 범인(凡人)이 각고의 수련을 거쳐 심신을 단련해 극강(極强)의 고수가 되는 영화는 보는 관객을 쉽게 몰입시킨다. 다양한 병장기와 무술을 사용해 강호(江湖)의 절대자들을 하나둘씩 물리친 뒤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모든 이를 즐겁게 한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 연약한 여인네를 보살피며, 탐관오리를 혼내주는 협객(俠客)의 삶은 사나이라면 누구나 꿈꾸어 봤을 로망이다.

황비홍은 싸움을 잘하는 무술고수이자, 인술을 펼쳐 만인을 돌본 협객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는 고금을 뛰어넘어 중국인들에게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는 인물상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허점이 있다. 본래 황비홍에 대한 고사나 일화는 아주 단편적이었다. 그의 수제자인 린스룽(林世榮)이 쓴 책과 넷째부인인 모구이란(莫桂蘭)이 남긴 구술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황비홍이 여러 관직을 거치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처럼 숱한 영웅적인 일화를 남긴 것인지는 공식문헌으로 증명되질 않고 있다.

2001년 포산시 주먀오(祖廟)공원 뒤편에 문을 연 황비홍기념관도 영화 속 세트를 재현해 놓은 무대나 다름없다. 황비홍이 포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도 설왕설래 중이다. 최근 들어 황비홍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면서, 포산시정부는 황비홍의 옛집이 시차오산(西樵山) 자락에 있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현지에 황비홍 사자춤 무술관을 세웠으나 공식적으로 인정되진 못했다. 현재의 황비홍기념관은 광저우에 있던 무관과 보지림을 복원한 형식이다. 이곳에서 주목할 것은 날마다 두 차례 열리는 사자춤 공연이다.

사자춤은 후한 말기에 서역(西域)에서 유입됐다. 한때 오랑캐 포로들이 추는 춤이라 천대받기도 했으나, 조조(曹操)가 여흥시간마다 즐기면서 점차 정착됐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전역에서 사자춤사위를 벌일 정도로 전파속도가 빨랐다. 중국인들이 사자춤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자가 용맹스럽고 위엄이 넘치는 동물로, 악귀를 막아 주는 백수(百獸)의 왕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매년 춘절(春節)마다 중국 곳곳에서는 징과 북의 반주에 맞추어 사자춤판을 열고, 사악한 귀신을 내쫓아 한 해의 평안을 비는 의식을 쉽게 볼 수 있다.

북파무술과 남파무술

우리가 보기엔 다 같은 사자춤이지만, 중국에선 북방식인 북사(北獅)와 남방식인 남사(南獅)로 구분한다. 1993년 제작된 영화 〈황비홍3: 사왕쟁패(獅王爭覇)〉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북사는 바지까지 사자차림으로 꾸미지만, 남사는 평상복을 그대로 입는다. 북사의 사자탈은 권위와 위엄을 강조해 장식하지만, 남사는 눈, 입 등을 움직여 사자의 희로애락을 섬세히 표현한다. 포산은 이 남사의 발상지다. 춤사위와 권법을 결합해 오늘날처럼 호쾌하고 역동적인 사자춤을 추기 시작한 곳도 포산이다.

사자춤의 정수는 ‘차이칭(采靑)’이다. 차이칭은 여러 사람이 사자춤을 추면서 높이 매달려 있는 물건을 따내는 의식이다. 여기서 물건을 빨리 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자춤의 기본동작과 응용기술을 모두 선보여야 한다. 사자가 푸른 구슬을 발견하는 동작, 놀라워하는 동작, 심취하는 동작, 물을 마시는 동작, 구슬을 토해 내는 동작 등을 펼쳐야 한다. 독자들은 영화 〈황비홍1〉 도입부에서 황비홍이 차이칭을 완수해 대련(對聯)을 손에 넣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대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큰 뜻은 구름을 뚫고, 의로운 기상은 하늘을 찌른다(壯志凌雲, 俠氣仲天).’ 황비홍은 사자춤을 잘 춰서 ‘광둥 제일의 사자왕’이라 불렸다고 한다.

20세기 포산에서는 또 다른 일대종사가 출현했다. 2008년 제작되어 홍콩 배우인 전쯔단(甄子丹)을 리롄제 버금가는 스타로 만든 영화의 실제인물 엽문(葉問)이다. 엽문은 중국 남파(南派)무술의 하나인 영춘권(詠春拳)을 대중화시킨 고수다. 중국 무술은 지역적으로 북파(北派)무술과 남파무술로 나뉜다. 북파무술은 소림권·태극권·당랑권(螳螂拳)·팔괘권(八卦拳) 등이 있는데, 손과 발을 골고루 사용해 동작이 힘차고 크다. 사실 리롄제는 소림권의 고수다. 〈황비홍1〉에서 소림권을 위주로 구사했다. 그는 중국무술대회에서 5회 연속 종합우승을 한 기록보유자이기도 하다.

남파무술은 광둥, 푸젠(福建) 등지에서 발전했다. 손기술을 많이 사용하고 동작이 빠르면서 섬세하다. 영춘권은 청대 여성고수 엄영춘이 창시했다고 알려진다. 엄영춘은 소림권을 기초로 여성에게 알맞은 권법을 창안해, 동작이 간략하고 빠른 스피드와 연속타격을 선보였다. 이와 달리 홍가권은 홍희관(洪熙官)이 창시해 황비홍이 보급했다. 넓고 낮은 다리 자세를 바탕으로 강력한 손기술로 상대방의 급소를 일격필살한다. 영춘권은 19세기 포산의 고수 양찬(梁贊)이 발전시켰고, 그의 아들 양벽(梁壁)과 수제자 진화순(陳華順)에게 전수됐다. 엽문은 진화순의 마지막 제자였다. 훗날 양벽을 찾아 진화순이 배우지 못한 가전비술(家傳秘術)까지 전수받았다.

엽문기념관 역시 주먀오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엽문은 포산에서 태어나 자랐고, 1949년 홍콩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성격은 영화 속 묘사처럼 내성적이었다. 1950년 아내가 자녀를 데리고 포산에 갔었는데, 얼마 후 중국과 홍콩 사이 국경철책이 생기면서 생이별했다. 그 뒤 본인의 과거사를 주변인들에게 꺼내질 않았다. 이 때문에 엽문이 포산에서 무엇을 했는지 여러 말들이 오고 간다. 현재는 국민당 소속 경찰로 일했다는 게 정설이다. 포산에선 제자를 받지 않다가, 홍콩 이주 후 강습회를 개최하고 무관을 열면서 제자를 양성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브루스 리(李小龍)다.

영화 〈엽문〉도 쉬커가 연출한 〈황비홍〉처럼 무술고수에 불과했던 엽문을 중국인의 영웅으로 격상시켰다. 엽문의 항일 행적은 포산에서 남아 있는 기록이 전무하다. 감독 예웨이신(葉偉信)도 기자회견 석상에서 엽문이 일본군에 맞선 이야기는 꾸며 낸 허구라고 밝혔다. 또 다른 홍콩 감독 왕자웨이(王家衛)는 2013년 엽문을 주인공으로 한 〈일대종사〉를 연출했다. 〈일대종사〉 내용도 몇몇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판타지일 뿐이다. 홍콩 영화감독들이 황비홍과 엽문을 영웅으로 탈바꿈시킨 데는 시대적인 상황과 상업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광둥성 유일의 술문화 박물관

발효된 누룩을 이용해 바이주를 증류하는 과정을 묘사한 주장솽정박물관의 전시실.

황비홍이 살던 시절은 중국이 서구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로 전락하던 시대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은 패배했고 이듬해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일본군은 할양받은 대만에 진군했는데, 흑기군은 대만 민중들과 함께 격렬히 저항했다. 그 현장에 황비홍도 있었다. 즉, 황비홍은 광둥을 벗어나 항일 최전선에서 활약한 투사였다. 이런 황비홍은 1997년 홍콩을, 1999년 마카오를 반환해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려는 중국인들에게 있어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쉬커는 홍콩이 아닌 대륙 출신 리롄제를 앞세워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켰고 흥행에 대성공했다.

엽문도 그 동일 선상에 있다. 뛰어난 무술과 의협심으로 충만한 엽문이 일본군 장군을 물리치는 스토리는 중국인들에게 자부심을 안겨 주었다. 황비홍과 엽문이 주장솽정을 즐겨 마셨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어딜 가서나 포산 출신으로서 긍지를 안고 살아갔다고 한다. 2009년에 문을 연 주장솽정박물관은 광둥성 유일의 술문화박물관이다. 이곳은 19세기 말 포산의 술도가를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다. 황비홍과 엽문이 살았던 시대를 체험하고픈 독자라면 그들의 기념관과 함께 꼭 찾아야 할 명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