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 질환’ 환자가 된 의사의 육성 고백 ⑤ : 월간조선

지난 4월 21일, 나는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미국 올랜도 근처의 키시미에서 열리는 레이저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중증근무력증으로 확진받은 이후 첫 번째 해외행(行)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수많은 인파를 보고 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있다 보면 아무래도 각종 균이나 바이러스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만일 감염되면 내 몸의 면역기능을 억지로 떨어뜨려놨기 때문에 혹독하게 앓아야 한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며 공포심과 비슷한 두려움을 느끼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하긴, 해외 학회를 준비하면서 건강할 때는 하지 않아도 될 준비들을 했었다. 우선 스테로이드 약을 분실할까 싶어 여행가방, 옷 주머니, 사방팔방에 넣었다. 항공사에 전화해 미리 ‘채식 기내식’을 요청했다. 처음에 소금기를 뺀 야채식을 요청하려고 했는데 항공사에서 그런 메뉴는 없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채식은 가능하지만, 저염식은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은 하루종일 호텔에서 쉬었다. 기내에서 야채를 물에 씻어서 먹으며 나름 저염식을 유지했고, 중간에 틈틈이 스트레칭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17시간의 장거리 비행의 피로는 상당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4박5일간의 학회 일정을 소화하고, 다시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문제는 서울로 돌아온 날 생겼다. 돌이켜 보면 이날, 나는 충분히 쉬었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만든 대한피부미용치료연구회라는 단체의 세미나가 귀국 당일에 잡혀 있었다. 날짜 조정이 힘들어서 바로 학회에 참석했는데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세미나 이후에 나의 컨디션은 일주일 이상 바닥을 쳤다. 오전 11시가 되어도 비몽사몽이었고, 매사에 의욕이 뚝 떨어졌다. 덩달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사실 미국 학회에서 시차로 인해 몸의 균형이 깨지지 않게 하려고 약도 서울시간으로 먹고, 강의와 주요 외국 의사와의 미팅 이외에는 가능한 호텔방에서 쉬었지만, 예전엔 거뜬히 소화할 수 있는 스케줄조차 이제 힘겨운 것이다. 무리한 스케줄이 나에게 독(毒)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 아닌가. 투병 1년이 다가오면서 점점 나는 초심(初心)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스테로이드 복용량 줄이니 의욕 확 줄어

투병중 끊지 못했던 유일한 음료, 커피.

내가 초심을 잃어 가는 데에는 스테로이드 복용량을 줄인 것이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때 하루 60mg의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던 나는 요즘 하루 10mg을 먹는다. 스테로이드의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 상태를 2~3주 지속한 뒤에 다시 복시 현상이 나타나면 복용량을 늘려야 한다.

앞서 말했듯 스테로이드는 생기를 돋게 하는 약이다. 새벽 3시에 일어나도 멀쩡하고, 정신이 맑다. 때문에 스테로이드 복용 환자들 중에는 중독자들이 종종 있다. 질환이 치료됐는데도 펄펄 날았던 그 기분을 잊지 못해 계속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겠다고 우기는 환자들이다. 하지만 호르몬제는 길게 복용하면 나쁜 약이다. 비만, 고혈압, 당뇨, 골다공증에 간기능 약화까지, 한마디로 건강한 삶을 방해하는 약이다.

나 역시 고용량 스테로이드로 인해 ‘피크’였던 내 건강 상태를 아는지라, 복용량을 줄이고 난 뒤 오는 ‘다운’ 상태의 저질 체력이 더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일상이 귀찮다 보니, 어찌 보면 초심을 지키려는 내 의지마저 줄어든 것이 아닌가 싶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몸을 위해서 약을 줄이는데, 약을 줄이니까 의지가 줄어들고, 그래서 몸에서 나쁜 행위를 스스로 하려니 말이다.

투병 후 열 달 동안은 성공이었다. 내가 정한 규칙, 내 의지대로 생활을 해 왔다. 그런데 복시 현상이 줄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자꾸 삶이 흐트러진다. 처음에는 야채만 먹었는데 ‘에이, 오늘 하루만 고기를 먹자’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밀려 왔다. ‘오늘 하루만 고기’, ‘오늘 하루만 피자’라는 식(式)이다. 크레페 케이크라고 하는 달달한 디저트가 나를 끊임없이 유혹한다.

한때 9kg을 감량했던 나는 그때보다 1.5kg이 찐 상태다. 스스로 위안을 해 보기도 한다. 정말 사랑하는 연인과 연애를 하더라도 1년 정도 하면 지치지 않나. 나도 인간인지라 초심을 무한대로 끌고 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자위해 본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스스로를 다잡으려고 노력 중이다.

건강한 사람이 아픈 가족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해야 할까?

나를 지켜보는 집사람도 지쳐 간다는 생각이 든다. 어떨 때는 싱싱한 야채로 꽉 차 있던 우리집 냉장고가 비어 있은 적이 있다. 집사람이 장을 보지 않았거나, 인터넷 주문을 늦게 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나는 가족 중에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건강한 가족의 입장을 생각해 보고 있다.

이런 가정을 한 번 해 보자.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열심히 일해서 저축을 하고, 동생은 매일 놀기만 했다고 치자. 그런데 동생이 덜컥 병에 걸려 버렸고, 형은 그 뒷바라지를 하면서 동생을 살려 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형이 병에 걸렸는데 치료를 할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진 상태다. 물론 누가 언제 아플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경우에 어쩔 것인가.

우선 1차적으로는 각자 자기가 아플 때를 대비해 저축을 하고, 그 돈을 자기를 위해 쓰는 것이 맞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교육해 오지 않았는가. 비록 자기가 힘들여 모았지만, 동생이 아프면 일단 살리고 봐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투병을 하면서, 또 집사람을 지켜보면서 투병도 자기 수준에 맞게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해서 어디까지 희생을 해야 할까?

나는 그 건강한 사람이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 즐겁게 환자를 돌볼 수 있을 때까지가 의무 기한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내 식대로 다 뜯어고치고 싶을 때가 있다. 왜냐하면 나는 환자니까. 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가족을 돌보면서도, 또 나름으로 자신의 인생을 즐기며 살아야 하는 것이 맞다.

과거에 스테로이드 복용량을 줄였다가 다시 복시 현상이 시작돼서 양을 늘린 적이 있다. 지금 복용량을 확 낮춘 상태에서 슬그머니 걱정도 든다. 어쩌다가 눈에 둘로 보이는 듯, 초점이 맞춰지지 않으면 화들짝 놀란다. 한 번은 안과 전문의 친구에게 “초점이 안 맞는데 또 다시 복시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노안(老眼)이야. 나도 종종 그런다”며 별일 없다는 투였다. 나 역시 뒤돌아서면서 혼자 “괜찮은 거 맞다잖아”라고 되뇌었다. 그런데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친구에게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친구가 “그런 증상이 있어? 체크해 볼까?”라고 물었더라면 내 입장에서는 훨씬 좋았을 것 같다. 물론 어떤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또 매사에 조금 진지한 사람이 있겠다.

나의 경우는 후자인 것 같다. 친구들이 정상인 취급을 해 주는 것이 좋으면서도, 또 너무 정상인 취급을 해서 그들과 템포를 맞추면 금세 몸에 무리가 온다. 힘이 쭉 빠지고, 근육이 떨리기 때문이다.

하루 5000보 이상 걸으면 확실히 좋아

과격하지 않은 산책이 꼭 필요하다.

환자들에게는 누구나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숨어 있는것 같다. 그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알린다. 암에 걸린 의대 교수가 투병을 하면서 환자를 진료한다. 나는 희귀병에 걸렸는데도 예전보다 더 환자 진료에 목을 맨다. 이건 그 사람들이,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그냥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의 하나가 아닐까. 그냥 집에 멍하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그래도 가족에게, 사회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떠나야 후회를 덜 할 것 같다는 것 말이다.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전직 대기업 사장님께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 왔다. 이 글을 봤다고 한다. 그 사장님은 ‘고생하고 있는 줄 몰라서 미안하다. 투병 생활을 잘 이겨내기를 바란다’는 문자였다. 그 문자를 받으면서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그분이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들이 힘들어 할 때 건네는 말 한마디, 문자 하나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다. 만약에 빚 진 사이가 아니라면, 천냥을 저축하는 셈이다. 나 역시 의사로 살아오면서 숱하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밥먹고 차 마시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내가 힘들 때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 준 사람이다.

자동차를 살까 고민하고 있다. 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발병 이후에 운전은 일절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제 살 만해지니까, 스트레스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는 운전을 잠깐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잠시 운전은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어떤 자동차를 사는 게 좋을까 고려하다가 그만두기를 여러 번이다. 뭔가 집중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스트레스로 다가와 내 병을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보통 스트레스가 심할 때, 눈을 감고 15분 정도 아무 생각을 하지 말아 보라는 조언들을 한다. 내가 환자가 되어 경험해 보니 이것은 사실이다. 극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멍하게 앉아 있거나, 음악을 듣거나, 다른 생각을 해 보는 것을 적극 권유한다.

손목에 찬 보행밴드가 1074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있다. 내가 1074보를 걸었다는 뜻이다. 질환이 생기자마자 보행밴드를 사서 차고 다닌다. 경험상 하루에 5000보를 걸으면 정말 몸이 가뿐해진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횟수를 채우기 위해서 나는 걷고, 또 걸어야 한다.

발병 후 열달 동안 한 달에 한 번 정도를 빼고는 매일 산책을 했던 내가 요즘 게을러졌다.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가 늘다 보니 이틀에 한 번 할까 말까다. 몸무게가 늘었고, 먹고 싶은 음식을 조금씩 입에 대고, 이제 술 생각까지 더해지는 것을 보니 초심을 잃기는 분명 잃은 거다. 반대로 얘기하면, 이제 그만큼 살 만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건강한 삶을 위하여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기다. 스테로이드와 절제된 삶으로 유지한 지난 1년간의 투병기는 여기까지다. 나는 새로운 전략을 세우려 한다. 이 새로운 전략이 성공해 색다른 후기를 쓸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실패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두려움과 희망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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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 질환’ 환자가 된 의사의 육성 고백 ⑤

살 만해지니 초심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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