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 질환’ 환자가 된 의사의 육성 고백 ④ : 월간조선

나는 피부과 전문의로서 환자들에게 스테로이드를 종종 처방해 왔다. 물집 질환, 홍반성 낭창 등에 스테로이드를 처방한다. 지금까지 무심코 써내려갔던 스테로이드 처방전이 내게 필요한 약이 되자,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나는 스테로이드 관련 논문을 다시 찾아보기 시작했다. 논문 내용 중에서 스테로이드의 효능보다는 ‘스테로이드 부작용’에 관한 부분이 내 눈에 쏙 들어왔다. 그 부작용은 앞으로 내가 직면해야 할 현실이기 때문이다. 내분비내과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을 받기도 했다. 스테로이드를 처방하는 의사와 직접 스테로이드를 복용해야 하는 환자는 이렇게 달랐다.

스테로이드를 장기적으로 복용할 때의 부작용 첫 번째는 비만, 또 이로부터 이어지는 고혈압이나 당뇨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다. 또 다른 부작용 중 하나는 골다공증(骨多孔症)이다. 중증 근무력증(筋無力症)으로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이후 나는 매일 한 시간씩 가벼운 산책을 하려 노력한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일반인들이 하듯이 운동을 하면 쉽게 피로해져서 오히려 내 몸에는 좋지 않을 수 있다. 칼슘과 비타민D도 챙겨 먹는다.

야채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다행

식사는 생야채를 주식으로 하고 있고, 철저하게 무염식(無鹽食)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멸치처럼 원재료에 간이 되어 있는 것은 아내가 염분의 농도를 희석시켜 다시 볶는다. 생선은 구입 시 아예 소금을 뿌리지 않고 사는 등 원재료에 들어 있는 간도 가능한 한 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루 이틀에 한번은 한식을 먹는데 현미밥을 먹는다. 국은 아예 먹지 않는다. 단백질 섭취를 위해 생선구이와 고기도 곁들인다. 생선과 닭가슴살은 소금간을 하지 않고 구워 먹고, 소고기와 돼지고기류는 그냥 물에 삶아 먹는다.

그나마 나는 생야채를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신장질환자의 경우에는 야채도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생야채에 들어 있는 칼륨은 신장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야채를 물에 담가 칼륨을 제거한 후 조리를 하거나 끓여 먹어야 한다. 현미밥도 신장질환자들에게는 좋지 않다. 결국 이것저것 가리고 나면 배고픈 상태로 참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나는 최소한 야채를 배불리 먹으며 배고픔을 이길 수 있는데 그럴 수조차 없는 환자들이 있다니 안타깝다.

의학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지만, 미국의 한 인터넷사이트에 보면 인스턴트 음식, 탄산음료 역시 중증근무력증에 좋지 않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콜라, 사이다, 맥주는 물론 샴페인도 마시지 않는다.

사실 나의 경우 술을 끊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는 한번 술을 마시면 폭음(暴飮)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건강에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잖아도 ‘끊어볼까’를 생각하던 차였다. 실제로 몸 상태를 개선해 보려고 1년 정도 술을 완전히 끊었던 적도 있었다. 사실 술을 마시는 데 있어 제일 좋은 것은 와인 3분의 1병, 소주 2~3잔이라고들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 그런 차에 병에 걸렸으니 금주(禁酒)를 그저 강요당한 운명의 한 파트로 받아들이고 있다.

‘神의 藥’

요즘 읽고 있는 책.

인스턴트 식품 중에 라면은 간혹 먹고 싶다. 아프기 전에는 무심코 봐왔는데 우리나라 TV를 보면 라면 먹는 장면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그런 장면을 보면 입맛이 다셔진다.

스테로이드는 정말 신기한 약이다. 직접 복용해 보니 잠을 3~4시간만 자도 충분하다. 그런데 희한하게 몸이 가뿐하고, 기분이 좋고, 활력이 생긴다. 새벽 4시에 일어나도 날아다닐 것 같다. ‘신(神)의 약(藥)’이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솔직히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이 다가온다면, 일부러 잠시 스테로이드를 먹을는지 모를 정도다. 물론 나는 약으로서 복용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스테로이드 기운이 떨어지면 고통이 시작된다. 눈물이 흐르고, 눈 주변 근육이 파르르 떨린다. 사람이 웃을 때 얼마나 많은 근육을 사용하는지 약 기운이 떨어지면 느낀다. 웃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약을 복용하면 다시 몸 상태가 좋아진다.

스테로이드는 곧장 효과를 보는 약물이 아니다. 나의 경우에는 복용 후 두 달 정도 후부터 두 개로 보이던 사물이 하나로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이 되는 것이다. 약을 끊으면 다시 복시(複視) 현상은 시작된다.

나는 확진 이후 초기에 매일 60mg(고용량이다)의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다. 그러다 증상이 호전된다 싶어서 서서히 복용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1일 복용량을 15mg까지 줄였을 때 다시 복시 현상이 시작됐다. 결국 나는 1일 복용량을 40mg으로 올렸다. 스테로이드 복용량을 늘리고 줄이기를 반복해, 복용 10개월째인 지금은 하루에 15mg을 복용하고 있다. 스테로이드 약 값은 한 달분이 1만원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싸다.

내가 중증근무력증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환자를 보고 의료 행위를 하는 것은 신의 축복이라 생각한다. 만일 내가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면 확진 이후 직장을 그만뒀을 것이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경제성, 즉 일의 효율성을 따지기 마련인데, 만성질환자를 고용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고용주인 나 역시 그런 환자를 내 직원으로 두고 싶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스테로이드를 복용해 복시 현상이 사라지고, 나의 일상을 어느 정도 컨트롤하다 보니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것이 영 힘들지는 않다. 야근도 가능하다. 단지 일을 하면서 중간중간에 자주 쉬면 된다. 야근 후에는 하루 휴가를 주면 된다.

환자가 되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나의 딜레마다. 만성질환자를 고용하기란 어렵지만, 만약 그런 사람을 고용하는 회사에 세제(稅制) 혜택을 준다든지 하면 어떨까. 고도로 성숙된 사회여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환자가 되어 보니 약자(弱者)의 입장에서 무심코 흘려보낸 많은 문제에 관심이 간다. 물론 환자도 직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일할 의무가 있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인간의 몸은 참 특이하다. ‘장미색 비강진(粃糠疹)’이라는 피부과 질환이 있다. 피부가 일시적으로 빨개지는 병인데, 아무 치료를 하지 않아도 한 달 정도면 다 낫는다. 내 병도 그렇다.

중증근무력증 환자의 80~90%는 평생 환자로 살아가야 하지만, 10~20%에서는 몇 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질환이 싹 사라진다는 통계가 있다. 암도 마찬가지다. 자연 치유된 암 환자가 분명히 있다. 외할아버지는 위암 환자로 암을 몸에 가진 채 별 탈 없이 15년을 살았다.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

중증근무력증 환자는 중간중간에 쉬는 것이 필수다.

나는 중증근무력증 확진을 받고 난 뒤에 “‘지독하게 운이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운이 있다, 없다’ 역시 너무 주관적이다. 예를 들어 삶이 너무 괴로워서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던 사람이 말기암 환자로 판명됐다고 치자. 막상 죽을 용기가 없어서 하루하루 살던 이가 몇 달 뒤에는 자연스럽게 죽게 되는 것은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운이 나쁜 걸까.

환자들의 마음 상태는 약하다. 원래 종교가 없었던 나는 발병 이후에 교회나 성당을 기웃거리고 있다. 요즘은 기도를 많이 하는데, 누구에게 하는 기도인지 모르겠다. 그저 누군가에게 자주 기도를 한다.

나는 지난 10개월간 꽤 성공적인 중증근무력증 환자로 살고 있다. 발병 후에 몸무게를 오히려 9kg 줄였고, 혈압약을 복용해야 할 정도로 다소 높았던 혈압이 정상치로 돌아왔다. 콜레스테롤 수치, 골다공증 수치 역시 전부 정상이다.

하지만 내가 환자로서 살아가야 할 날이 42.195km의 마라톤 코스라면, 나는 겨우 100~200m 정도를 잘 뛴 셈이다. 남은 거리를 제대로 완주(完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주위에서의 ‘잘하고 있다’는 응원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스스로 독립심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니 종교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易地思之

발병 후 1년이 가까워지면서 만성질환 환자들이 왜 ‘완치(完治)’에 목을 매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당뇨병에 걸린 분들이 ‘완치’라는 미명하에 자꾸 이런 음식도 먹어보고, 저런 행동도 해보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사인 내 입장에서는 ‘아니, 당뇨 치료 제대로 하면서 약간만 불편한 생활을 하면 90세까지 무리 없이 살 텐데 왜 저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환자인 지금은 만성질환자들이 끊임없이 ‘완치’를 갈구하는 심정을 100% 이해한다. 나도 서서히 어느 날부터인가 완치를 해서 술도 마시고 친구들도 여유있게 만나고 밤을 새워 공부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지 않으면 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의사 환자 관계에서도 통하는 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스테로이드 복용으로 인해 하루의 잠이 3, 4시간 줄었는데 눈을 오래 쓰면 피로해져서 안 된다. 하지만 나는 틈틈이 책을 읽는다. 복시 현상으로 인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의 중요성을 더 느껴서일지 모른다.

나는 요즘 《지중해 삼국지》라는 책을 읽고 있다. 역사책은 인간의 나약함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준다.

또 나는 음악을 듣는다. 과거에도 클래식 음악을 듣기는 했지만, 아픈 다음에는 좀 더 많이 듣게 됐다. 어떤 날은 하루에 5시간을 들은 적도 있다. 같은 음악을 연주자별로 듣기도 한다. 새로운 취미가 생긴다는 것, 그것은 이 병이 내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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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 질환’ 환자가 된 의사의 육성 고백 ④

의사로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며 배우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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