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⑩ 서정주·박목월·전영택의 문학 自敍傳 : 월간조선

작가는 자전적(自傳的) 기억을 토대로 글을 쓴다. 전기적(傳記的) 사실이 글감이 된다. 글감은 유년과 학창시절 경험과 닿아 있다.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뜨겁고 완강한 추억을 펜으로 길어와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글쓰기다.(《월간조선》 3월호 ‘치아도 없어 합죽한 입술의 호호노인’은 작가와 그 부모의 양육태도와 관련된 체험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쓴 글이다.)

《질마재 신화》의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1915~2000)는 여러 작품에서 유년의 경험을 형상화했다.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눈들 영감의 마른 명태〉〈단골 무당네 머슴 아이〉〈신선 재곤이〉〈석녀 한물댁의 한숨〉〈내가 여름 학질에 여러 직 앓아 영 못 쓰게 되면〉 등의 작품이 개인 추억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미당의 〈염병(染病)〉을 보자.

〈… 마침내는 땀도 못내고 죽을 / 그 지독한 염병쟁이가 되고 말았네 / 마을 밖 외딴 곳에 격리수용이 돼서 / 아버지는 단념하고 내 곁을 뜨고 / 어머니만은 혼자서 내 염병에 다붙어서 / ‘나를 대신 잡아 갑소사’ 기도만 하고 계셨네(이하 생략)〉

1966년 《세대(世代)》 9월호에 실린 서정주의 산문 〈내 문학의 온상(溫床)들〉에는 ‘염병’, 그러니까 장티푸스(한자로 장질부사)에 걸린 사연이 나온다. 미당은 중앙고보에 입학한 이듬해(1930년)의 첫 여름에 이와 빈대가 득실거리는 아현동 빈민굴에 갔다가 염병에 걸렸다.

〈… 장질부사라는 것을 앓고 나면 성질이 변한다는 말도 있고 바보가 되거나 딴 재주가 생겨난다는 말도 있었다. (중략) 나로 말하면 이걸 앓고서 바보나 좀 더 되었을까. (중략) 이 염병 반년의 경험을 전후해서 내 정신에 생겼던 사변(事變)들이 그 뒤의 내 문학정신에 끼친 흔적만은 거부할 수 없다. (중략)

나는 당시 비교적 넉넉한 우리 집 형편이 마련해 준 계동(桂洞)의 깨끗한 하숙을 떠나고, 구두를 벗어 버리고 빈민용 ‘지까다비’라는 것을 사 바꾸어 신고, 그때의 빈민촌 아현동 더러운 집 빈대 우글거리는 하숙방에 옮겨 앉았다. 그래 불결하고 싼 음식들은 염병균을 내 속에 옮겨 나를 거꾸러뜨렸던 것이다. …〉(p.235~236)

미당은 ‘연민’이라는 정신에 사로잡혀 스스로 안락함을 버리고 넝마주이 행세를 했다. 그 연민의 마음이 염병으로 옮겨와 미당의 시에 불을 지폈다.

〈… 이때 나는 학교를 쉬고 시골로 내려가서 산 변두리에 격리된 병원에서 영 희망이 없다 하여 상여까지 준비하려다가 어떻게 겨우 살아남게 되었지만, (중략) 내게 연민의 정이라는 것이 내가 현실을 어느 만큼 나와 밀접하게 만들어 오는 데 있어 그 뒤 내가 가장 큰 힘이 되었으니 말이다.

‘거지 발새의 때’같이 더러웁고도 불쌍한 것에 대한 연정 같은 안쓰러움, 보들레르도 일찍이 가졌었다. 나도 가져야 할 이것을 염병은 한 중모자(仲謨者)가 되어 내게 갖다가 뿌리박아 놓았다. …〉(p.236)

憐憫과 넝마주이, 그리고 石顚과의 만남

일제시대 불교계 최고 지도자이자 당대 대표적 지성이었던 石顚朴漢永 스님.

미당은 장티푸스를 치유하기 위해 절이라는 공간을 배회하는데 당대 고승(高僧)인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대종사(大宗師)와 인연을 맺게 된다.

〈내가 사상 때문에 쓰레기통의 종이줍기를 한다는 소식이 우연히 내 선년배(先年輩)의 친구 미사(眉史)라는 가야금꾼을 통해 그때 불교의 최고 대표자였던 박한영 노사(老師)의 귀에 들어간 것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박한영 스님이 나를 그의 암자로 초청한 뒤에의 일이었다. 가서 만나 보니 박한영 스님은 꼭 어린아이 웃음을 그대로 간직한, 무엇에서든지 안심이 되는 인상을 내게 주었다.〉(p.237)

미당은 나중 〈석전 박한영 대종사의 곁에서Ⅰ〉라는 시를 통해 당시의 첫 만남을 회고했다.

〈… “이제부터 나하고 같이 공부나 해보세! / 낄낄낄낄낄낄낄! 잘 왔어! 잘 왔어! / 딴 데로 가지 말고 공부나 같이 해 보아!” / 하시면서 내 손 잡던 박한영 스님. / 그래 이 하눌 밑에서는 단 하나뿐인 / 새벽 노고지리의 치솟은 웃음소리만 같던 / 그 웃음 따라 나는 그 곁에 머물렀다. …〉

석전은 미당이 스스로 빈민굴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문하로 받아들였다. 미당도 석전의 넓은 도량과 인품에 끌려 곁에 머물게 되었다. 《세대》 9월호에 이런 구절도 나온다.

〈… 그는 마치 먼데 사는 일가집 사람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워라 깔깔대시더니, “그러지 말고 나하고 같이 불경이나 좀 읽어 보자”는 것이었다. 이때 이분 춘추는 회갑을 어느 만큼 넘기신 뒤였던 듯한데, 그 너털웃음만은 나보다도 더 어린애의 것이어서 나도 오랜만에 그를 따라 웬 영문인지 소리를 내어 많이 웃고, 또 쓰레기통 뒤지고 다닌 건 그게 꼭 훈장 단 것 같더라는 고백도 하고, 그러다가 나는 그가 좋아 이 스님의 암자에 남아 불경을 읽기 시작했다. …〉(p.237)

이런 인연으로 미당은 스무 살이 되어 석전이 교장으로 있던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東國大)에 입학할 수 있었고, 석전이 각 사찰에 부치는 전갈을 빌미로 산천을 유람하며 금강산까지 도보 여행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 미당의 문학적 사유가 크게 확장됐음은 물론이다. 또 동국대 교수로 정년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열아홉 무렵 석전과의 만남이 인연이 됐다.

경주와 木月, 東里

1946년 9월 《청록집》 출판 기념회 모습.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상로, 한 사람 건너 조연현, 김동리, 한 사람 건너 이한직,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곽종원씨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朴木月· 1916~1978)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지만 경북 경주에서 유년을 보냈다. 그에게 있어 서라벌의 옛 도읍지 경주는 그가 ‘전통적 서정시’를 쓰게 만든 근원이 된다. 목월은 4살부터 12살까지, 그리고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낙향한 20살에서 22살까지, 또한 26살에서 광복을 맞이한 28살까지 경주에서 살았다.

1958년 《신문예(新文藝)》 9월호에 실린 박목월의 〈문학적 자서전, 어슬픈 소묘(素描)〉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 경주와 같이 유서 깊은 지방에서 생장한 사실이다. 내 작품이 누가 지적한 대로 ‘전통적인 서정시’라면, 그 바탕을 내가 생장한 그 시기와 장소에서 이미 숙명적인 필연으로 내 안에 깃든 것이라 생각한다. (중략) 경주를 떠나와 중학교 1학년 2학기(미션스쿨이었던 대구 계성학교-편집자註)에 나는 그 강렬한 홈시크를 ‘시’로써 표현하려는 의욕을 느꼈다. 학교의 부속 기숙사의 쓸쓸한 불빛 아래서, 연필에 침칠을 하며, 내 감정 한 오리를 노트 구석에 적어 보았다. …〉(p.38~40)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시를 쓰게 했고 목월을 시인으로 이끈 것이다. 그는 그리움에 ‘가슴이 벌름거리는 것을 느꼈다’(p.40)고 표현했다. 중학교 때 이미 목월의 별명은 ‘시인’이었다. 이후 시인은 목월의 이름 위에 붙은 ‘숙명의 관사(冠詞)’가 되었다.

경주라는 공간이 그의 감수성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곳에서 만난 인물 역시 가볍지 않다. 동향이자 동문(대구 계성학교)인 김동리(金東里·1913~1995)는 침식을 같이할 정도로 가까웠다고 한다.

〈… 그 시절 김동리라는 나보다 나이가 위인 청년을 시귀었다. 〈화랑의 후예〉라는 단편소설이 《중외일보(中外日報)》 신춘문예에 당선한 직후였다. 키가 나지막하고 앞니 사이에 또 하나 조그만 덧니가 붙은 이 청년은, 얼마 있지 않아 우리의 시대가 오리라는 자신을 너무나 굳게 믿고 있었다. (중략) 동리는 경주의 서쪽 변두리에 집이 있었다. 우물가에 살구나무가 한 그루 오뚝 선 평범한 초가집. 그 아랫방이 그의 서재다. 말이 서재일 뿐 그는 벼 가마니를 들여놓은 방에서 시험지로 노트를 손수 묶어 연필로 깨끗이 소설을 썼다. 그것이 〈무녀도(巫女圖)〉라는 작품이다. …〉(p.41)

목월은 ‘동리와 경주 남문 밖에서 컵에 소주를 부어 홀짝홀짝 마시며 끝없이 문학론을 얘기했다’(p.41)고 떠올렸다. 두 사람은 근무지(당시 목월은 경주의 동부금융조합에 취직한 상태였다)를 나가는 일이 아니면 거의 침식을 같이했다. 장발(長髮)을 휘날리며 경주 선술집을, 요릿집을, 목로집을 돌아다녔고, “도스토옙스키처럼 장발을 휘날리며 우리는 ‘소냐(〈죄와 벌〉의 여주인공)’의 꿈속에서 살았다”고 했다.

떠나간 東里와 달빛 체험

그러나 동리가 어느날 바람처럼 사라졌다. “다솔사에 한 보름 다녀오마”고 가 버린 후 영영 소식이 없었다. 그랬다가 해방 직전에 만났을 때에는 이미 두 사람 다 결혼한 뒤였다.

목월은 동리가 떠난 이듬해(1939년 9월) 《문장》을 통해 등단했다. 등단작은 〈길처럼〉〈그것은 연륜(年輪)〉. 추천인은 시인 정지용(鄭芝溶)이었다. 시 〈길처럼〉은 무척 쓸쓸한 시다.

〈머언 산(山)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 산 구비마다 구비마다 / 절로 슬픔은 일어… / 뵈일 듯 말 듯한 산길 / 산울림 멀리 울려 나가다 / 산울림 홀로 돌아 나가다 /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 길은 실낱 같다〉(〈길처럼〉 전문)

당시 목월은 ‘생각’이라는 단어를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 ‘생각’이라는 어휘 하나 속에 내가 숨쉰 모든 천지가 이룩되어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누구에게 고백할 심정을 ‘당신을 생각합니다’라고 표현하게 될 경우에, 그 ‘생각’이라는 말이 지닌 오히려 여성적이고, 또한 내성적인 사모감. 그것은 내 성격에서 빚어지는 것이기는 하나, 그만한 범위에서 내 청춘을 고독 안에서, 가슴 안에서 싸안아 길렀던 것이다. …〉 (p.41)

목월은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된다. 하숙집 뜰 가득한 은은한 달빛을 보며 그 ‘달빛의 충만함이 이루어 준 영혼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시가 저절로 나왔다.

〈… 나는 쓸쓸한 대로 충만하며, 늘 내 머리를 떠나지 않던, 과연 앞날에 시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자취를 감추고, 형언할 수 없는 황홀하고 넉넉한 것을 느꼈던 것이다. ‘억만인에게 내 꿈을 전할 수 있는 시’가 태초 때부터 가슴에 싹터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p.42)

그 후 목월은 시를 쓸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사라졌다고 한다. 진짜 시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아름답고 허무한 꿈 같은 달빛체험은 목월에게 ‘생애의 가장 큰 체험이자 운명의 눈짓을 느낀 순간’(p.42)이었다.

《창조》의 맏형 전영택

국내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 창간호의 표지.(1919년 2월호)

소설 〈화수분〉의 작가 ‘늘봄’ 전영택(田榮澤·1894~1968)은 26살 되던 1919년 1월 김동인(金東仁·1900~1951)·주요한(朱耀翰·1900~1979) 등과 함께 동인지 《창조》를 만든 인물이다. 《창조》의 맏형으로 1호부터 8호까지 〈운명〉〈생명의 봄〉〈독약을 마시는 여인〉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1927년 목사가 되어 감리교신학교 교수와 《기독신문》 주간을 지냈고 이후 국립맹아학교 교장, 중앙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목사가 되면서 문학의 길에서 점차 멀어졌다.

1956년 《자유문학》 6월호(창간호)에 실린 전영택의 〈나의 문단 자서전〉은 《창조》지 발간에 대한 후일담이 실려 있다.

〈… 하루는 뜻밖에 주요한과 김동인 두 사람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동인제로 문예잡지를 같이 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나는 곧 그래 보자고 응답(應答)했다. (중략) 육당(六堂)·춘원(春園)이 선구자로서의 작지 아니한 일을 하고 있지만 춘원의 대승(大勝)한 반동적인 신문예작품의 그릇된 영향을 입어서, 문학이라면 의례히 연애소설이나 연애시로 알고 그따위 글이 흔하게 나오는 것을 유감으로 여기며 분개해서 우리나라에 참된 문예세계를 개척해 보자는 데서 두 사람과 의견이 맞고 분에 넘친 야심(野心)이 생긴 것이다. …〉(p.139)

전영택은 고향(평안남도 남포) 친구이자 부잣집 아들인 김환(金煥)까지 끌어들여 4인 동인 체제로 출발했다. 김동인·전영택은 소설을 쓰고 주요한은 시, 김환은 희곡을 쓰기로 의기투합했다.

〈… 2월말에 드디어 약 50여 페이지 되는 《창조》 제1호(신년호)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은 대개 이런 것이었다. 시는 주요한의 〈불놀이〉, 소설은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전영택의 〈혜선의 사(死)〉, 기행문은 김환의 〈동경에서 경성까지〉. (중략) 네 사람이 한자리에서 자축하는 뜻으로 ‘스키야키’로 저녁을 같이 하고 밤이 늦도록 떠들고 이야기하고 놀았다. 나는 하숙에 돌아와 내 글을 읽고 또 읽고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 (p.140)

예비牧師가 만든 최초의 문학동인지

전영택이 쓴 〈혜선의 사〉는,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나 천대를 받고 부모마저 숨져 결혼을 앞두고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유행하던 연애담에서 탈피, 사회 구습(舊習)에 대한 저항을 소설의 골조로 세웠다.

1919년 당시 전영택은 서울관립의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다시 신학부에 재입학한 상태였다. ‘그때에 신학 공부를 하고 장차 목사가 되려는 사람으로 문예잡지를 내는 데 참여한다거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p.141)고 한다.

‘창조’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지어진 것일까.

〈… 우리는 김환의 하숙방에서 모여 밤늦도록 이야기한 결과 제호는 ‘창조’로 하기로 내 제안대로 결정하고 (중략) 월간으로 내기로 했다. 열이 앞서는 때라, 학생 처지에 경비라든지 그밖에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이 많았지만 그런 문제는 과히 중대하게 생각지도 않고 서룰러 해냈다. …〉(p.139)

《창조》는 창간호부터 7호까지 일본 도쿄에서 펴냈고 8~9호는 서울에서 나왔다. 수록 작품으로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배따라기〉 등 단편소설과 한국 최초의 자유시로 꼽히는 주요한의 〈불놀이〉 등 한국 근·현대문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 다수 실렸다. 뒤이어 결성된 《폐허》(1920년 7월) 《백조》(1922년 1월) 등과 함께 《창조》는 한국 현대문학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