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 정신의 심층탐험 ④ 한국인 인문학자와 사업가, 정치가 : 월간조선

한국인이 사람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가장 큰 바람은 사람다움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바람을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고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 될 수 있다.

한국인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은 두 개의 차원, 곧 개인의 차원과 집단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의 차원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은 낱낱의 사람이 사람다운 살맛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집단의 차원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은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살판을 사람다운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한국인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을 잘 이루려면 개인의 살맛과 집단의 살판이 모두 사람다움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한국인의 집단의 살판을 만드는 일은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인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일은 국가를 끌어가는 세력이 국민의 살판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져 왔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인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국가의 성격이 크게 바뀌면서 국민의 살판 또한 크게 바뀌어왔다. 한국인은 수십 년 동안에 국가체제가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대한제국에서 일제식민지로, 일제식민지에서 남쪽의 대한민국과 북쪽의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바뀌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고, 이에 따라서 살아가는 모습 또한 크게 달라졌다.

조선왕조는 국왕이 지배층을 대표해 모든 주권을 오로지하는 전제국가였다. 국왕과 지배층은 중국에서 가져온 성리학의 논리를 빌려서 저들이 바라는 세상을 이룰 수 있도록 백성의 살판을 차렸다. 그들은 성종대에 백성의 살판을 법전으로 체계화해 《경국대전》으로 완성했다. 그들은 경국대전 체제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중화를 본보기로 내세우며 따라가는 선진화를 주장하는 동시에 이를 규범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소학》《가례》《정속》《향약》《삼강행실》《오륜행실》과 같은 책을 찍어내어 백성을 가르치고 일깨웠다.

성리학 vs. 천주학·동학

마카오에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김대건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조선왕조가 18세기로 접어들면서 백성의 살판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대동법이 실시되는 가운데 경제에서 화폐의 유통과 시장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학문에서 실학의 발생과 문예의 발달과 서학의 유입이 이루어지고, 신분에서 서얼의 허통과 공노비의 해방이 이루어짐으로써 사회적 개방성과 유동성이 크게 늘어났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걸맞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됐다.

18세기 말엽에 중국에서 가져온 서양서적을 공부한 학자들 가운데 천주학(天主學)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생겨나서 지배층을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나가 되어 사람답게 어울려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이들은 왕과 지배층이 강요하는 신분다움을 넘어 모두가 함께하는 사람다움을 이루어보고자 했다. 지배층은 이것을 보고 넘길 수가 없었기에 끊임없이 잡아 가두고, 때리고, 죽였다.

19세기 중반에 경주 사람인 최제우가 모두가 함께하는 사람다움에 대한 꿈을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뜨렸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고 가르치면서 왕과 지배층이 백성에게 강요하는 신분다움을 넘어서 누구나 함께하는 사람다움을 일깨웠다. 사람들은 사람이라는 자격만으로 모두가 함께 하나의 우리를 이루는 일에 크게 이끌렸다. 왕과 지배층은 1864년에 최제우를 잡아서 ‘도리를 잘못되게 하고 올바른 것을 어지럽히는(邪道亂正)’ 죄를 물어 죽였다. 그러나 최제우가 일깨운 사람다움에 대한 불씨는 더욱 크게 살아났다.

19세기 말에 조선왕조가 외세의 침략 앞에서 위기를 맞게 되자, 백성의 살판이 뒤죽박죽이 됐다. 왕과 지배층이 외세에 눌려 일본이 요구하는 개항을 들어주고, 서양 세력이 요구하는 서학과 서교를 묵인하게 되자, 공맹정주(孔孟程朱)의 도통(道統)과 정학(正學)이 뿌리째 흔들리게 됐다. 그럼에도 지배층은 이 땅에서 생겨난 동학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동학교도들은 교조 최제우에 대한 신원(伸寃)을 세차게 요구하게 됐다. 조정에서 계속 미적거리는 태도를 보이자, 그들은 서너 차례 신도들을 모아서 세력을 과시한 뒤에,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20세기 한국과 한국인

동학농민운동은 누구나 함께하는 사람다움을 일깨웠다.

조선왕조가 위기로 치달으면서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수구세력과 문명개화를 주장하는 개화세력이 소리를 높여가며 다투고 싸웠다. 그들은 정학과 서학과 동학, 그리고 구학문과 신학문을 놓고서 나름대로 새롭게 살판을 짜보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왕조를 지키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지 백성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한국인은 일제가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 펼치는 식민지판에서 살아가게 됐다. 일제는 스스로 동아시아를 근대문명으로 이끄는 선도자임을 내세우면서 한국인에게 일본을 본보기로 삼아서 따라하는 선진화를 강요했다.

일제가 한국인을 선진화로 이끈 것은 한국인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일이었다. 일제는 일선동조(日鮮同祖), 내선일체(內鮮一體)와 같은 논리를 내세우며 한국인의 살판을 없애기 위해서 한국말과 한국사와 한국문화를 부수고 허무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일제는 한국인이 일본말과 일본글을 국어로서 배우고 쓰도록 하기 위해서 공공업무, 학교수업, 문서작성, 교과서 발행 따위를 모두 일본말과 일본글로 하도록 만들었다.

한국인은 1945년 8월에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광복을 맞았으나, 미국과 소련이 남쪽과 북쪽을 나누어서 점령하게 되자, 남쪽과 북쪽이 갈라지게 됐다.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서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것을 가로막자 분단이 굳어져서 되돌릴 수 없게 됐다. 이로부터 남쪽과 북쪽은 이념과 체제와 국가를 달리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서로 겨루고, 다투고, 싸우게 됐다.

1948년 8월 15일에 남쪽에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이, 9월 9일에 북쪽에서는 사회주의 통제경제에 바탕을 둔 조선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남쪽과 북쪽은 모두 헌법과 법률을 통해서 국민의 살판을 민주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규정과 관습의 측면에서 왕조시대와 식민지시대에 볼 수 있는 기존의 살판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 많았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국민주권시대를 맞아서도 새판과 옛판이 서로 엇박자를 이루면서 국민다운 국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한국인은 수십 년에 걸쳐서 국민주권시대에 맞는 근대적 살판을 만들기 위해서 갖가지로 힘을 쏟고 애를 태웠다.

이론형 한국인의 自畵像

19세기 말에 외세의 침략으로 조선왕조가 위기를 맞자, 지식인들은 기존의 학문을 지키고자 애쓰는 수구세력과 새로운 학문으로 나아가려는 개화세력으로 나뉘게 됐다. 그런데 지식인들이 서구의 근대문화가 갖고 있는 강력한 힘을 보고 듣고, 알고 느끼는 일이 많아지면서 수구세력은 점점 줄어들고 개화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20세기로 들어서서 문명개화가 시대의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자, 한국인은 애국애족과 부국강병의 깃발을 앞세우고 서양의 근대문화를 따라서 배우는 선진화에 힘을 쏟게 됐다. 이때부터 한국인은 오로지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근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살길을 찾아보려고 갖은 힘을 다했다.

20세기에 한국인이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학문으로서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산업으로서 서구의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두 가지 일은 배우는 사람, 배우는 바탕, 배우는 방법, 써먹는 형태에서 크게 달랐다. 이것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다.

한국인 가운데 학문을 목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사람은 기존에 선비들이 지식과 기술에 대해서 갖고 있던 생각과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서구의 지식과 기술을 서책으로 배워서 머리를 굴리는 사람으로 출세를 꾀하고자 했다. 그들은 유식을 무기로 높은 자리에 올라서 무식한 사람을 이리저리 누르고, 부릴 수 있는 권력을 갖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인 가운데 산업을 목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사람은 기존에 선비들이 지식과 기술에 대해서 갖고 있던 생각과 태도에서 크게 벗어났다. 그들은 서구의 지식과 기술을 배워서 산업을 일으켜 사람들이 먹고살아 가는 바탕을 일구려고 했다. 그들은 손과 몸을 움직여서 기르고, 고치고, 다듬고, 만드는 일을 통해서 살림살이에 쓰는 재화나 재산을 늘리고자 했다.

둘째,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바탕이다.

한국인이 학문을 목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일은 서구의 학문체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만 제대로 할 수 있다. 학문은 전체가 하나의 판으로 엮여 있는 까닭으로 어느 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배우고 쓰기 어렵다. 어떤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배우고 쓰는 사람은 얼치기로 끝난다. 이 때문에 한국인이 서구의 근대적 지식을 배워서 학자가 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아주 야무지고 옹골차지 않으면 수십 년을 배우더라도 겉핥기로 끝나고 만다.

실무형 한국인의 얼굴

그러나 한국인이 산업을 목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일은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한 특정한 지식이나 기술만을 따로 떼어서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 산업에서 다루는 지식과 기술은 구체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어서 반드시 모두를 꿰어서 배울 필요는 없다. 이 때문에 한국인이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배워서 사업을 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어떤 부분만 배워도 뛰어난 일꾼이 될 수 있다. 부지런히 애를 쓴다면 짧은 시간에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셋째,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방법을 살펴보자.

한국인이 학문을 목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일은 구체적 현장보다는 추상적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경우에는 서구로부터 따라서 배운 추상적 개념이 한국이라는 구체적 현장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어렵다. 이런 사람들은 추상적 개념에 중심을 두고서 구체적 현장을 다루는 태도를 갖는다. 이들은 개념과 현장이 맞지 않는 경우에, 개념을 현장에 맞추어 고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장을 개념에 억지로 꿰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이 산업을 목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일은 추상적 개념보다는 구체적 현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경우에는 서구로부터 따라서 배운 추상적 개념이 한국이라는 구체적 현장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구체적 현장에 중심을 두고서 추상적 개념을 다루려는 태도를 갖는다. 이들은 개념과 현장이 맞지 않는 경우에, 현장을 개념에 억지로 꿰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맞추어 개념을 고쳐나가려고 한다.

넷째,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써먹는 형태를 들여다보자.

한국인이 학문을 목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경우에는 학문의 전체적인 판을 알아야 제대로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배움이 대부분 어설프게 끝을 맺는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서구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을 국내에서만 써먹게 된다. 특히 인문학을 공부하는 경우에는 오로지 국내에서만 써먹는다. 이런 까닭으로 그들은 서구에서 배운 지식이나 기술을 새롭게 고치거나 만드는 일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뿐더러 개념을 다듬어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 일을 남의 일로 여긴다. 이들은 국내에서 벌어지는 얼치기판을 놓고서 끼리끼리 뭉쳐서 겨루고 다투고 싸우는 일을 거듭한다.

그러나 한국인이 산업을 목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따라서 배우는 경우에는 필요한 것만을 따로 떼어서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다. 그들은 배움의 과정에 서구에서 배운 것을 넘어서 새로운 것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그들은 이런 지식과 기술을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까지 써먹으려고 한다. 특히 제품의 개발과 생산에 관련한 기술의 경우에는 국외에서 써먹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따라서 배운 것을 새롭게 고치거나 만들어서 더욱 좋게 만들어야 국제적인 시장 경쟁에서 이길 수가 있는 까닭으로 서구에서 배운 것보다 더 나은 지식과 기술을 개발해 서구로 내보내는 일조차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론형 한국인과 실무형 한국인의 엇박자

한국인이 19세기 말에 애국계몽과 부국강병을 소리 높이 외치면서 서구문화를 본보기로 삼아서 따라가는 문명개화를 시작할 때에는 모두 비슷한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한국인은 크게 두 무리의 사람, 곧 학문의 영역에서 지식으로써 먹고사는 이론형 한국인과 산업의 영역에서 실무로써 먹고사는 실무형 한국인으로 갈라져서 모습을 크게 달리하게 됐다.

학문에 바탕을 둔 이론형 한국인은 이론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살판에 대해서 이런저런 가르침을 펴면서 밥벌이를 한다. 그들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이론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가 돌아가는 살판의 바탕을 마련하는 구실을 한다. 이론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이론으로 먹고사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론형 한국인이 미치는 영향력이 아주 크다. 한국인이 살판을 짜는 일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달려 있다.

산업에 바탕을 둔 실무형 한국인은 이미 짜여 있는 살판에서 저마다 나름의 사업을 꾸리고 소득을 올려서 밥벌이를 한다. 그들은 대다수를 이루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자와 용역과 자금을 만들고, 팔고, 돌게 하는 일을 한다. 이들은 재벌그룹의 회장에서 구멍가게나 세탁소의 사장에 이르기까지 갖가지로 사업을 벌여나가는 사업자들이다. 이들은 일터와 일감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의 사람들과도 힘겹게 겨루고, 다투고, 싸워야 한다.

한국인은 서양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배우면 배울수록 이론형 한국인과 실무형 한국인이 서로 엇박자를 내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광복 이후에 한국인이 스스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면서 이런 일이 더욱 심해졌다. 이론과 실무가 따로 놀게 되자, 이론가는 실무에 더욱 어둡게 되고, 실무자는 이론에 더욱 어둡게 됐다. 이 때문에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이론가와 실무자가 서로 상대의 모자람에 탓을 돌리면서 꾸짖고, 다투고, 싸우는 일을 거듭하게 됐다.

한국의 인문학과 인문학자

한국 사회의 인문학 전당은 대학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서구의 근대적 지식을 배워 학자가 되기는 어렵다. 사진은 대학 축제 모습.

오늘날 한국에서 이론형 한국인을 대표하는 것은 학자이고, 실무형 한국인을 대표하는 것은 사업가이다. 학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살판의 바탕을 일구고 가꾸는 한국인이고, 사업가는 살판 위에서 갖가지로 일을 벌여서 먹고사는 일을 풀어가는 한국인이다. 그리고 학자와 사업가 사이에서 모두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살판을 짜고 다스리는 일을 맡아 하는 이들이 정치가이다.

먼저 학자는 이론으로써 먹고사는 사람이다. 학자는 이론을 가지고 낱낱의 것들을 하나로 싸잡아서 전체가 한눈에 보이도록 판을 드러내는 일을 한다. 이를 위해서 학자는 전체가 함께 어울려서 돌아가는 판을 보고, 듣고,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학자는 온갖 것들이 함께하는 판도와 판국과 판세를 또렷이 살필 수 있어야 한다.

학자들 가운데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살판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이들이 인문학자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함께 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따지고, 풀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타이르고, 달래고, 꾸짖는 일을 한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사람들이 좀 더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더욱 나은 살판을 찾아내고 일구어야 한다. 그들은 기존의 것을 따라서 배우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알아내고 찾아내는 일을 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자는 한국인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살판을 묻고 따지고 풀어서 살판의 바탕을 마련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그들이 살판의 바탕을 마련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정치가가 국민의 살판을 짜고 다스리는 일과 사업가가 사업을 벌이고 펼치는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한층 괴롭고 힘들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첫째, 한국의 인문학자는 스스로 판을 볼 수 있는 힘이 매우 부족하다.

인문학자는 학문과 역사의 판이 어떻게 흘러오고 흘러가는지 전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판의 바탕을 일구고 가꾸는 힘을 갖는다. 이를 위해서 인문학자는 겨레의 학문과 역사가 굴러온 판에 대한 공부를 바탕으로 세계의 학문과 역사가 굴러온 판에 대한 공부로 나아가게 된다. 이로써 그들은 전체적인 판세, 판도, 판국을 훑어보고 살펴볼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쓸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인문학자는 겨레의 학문과 역사가 굴러온 판에 대한 공부조차 거의 하지 않는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이들조차 사실이나 사건을 공부하는 일에 빠져서 판세나 판도에 대한 공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서양학문을 공부하는 이들은 전공으로 선택한 낱낱의 것을 공부하다가 전체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이르면 감당할 힘이 없어서 그만두어 버린다. 이러니 전체적인 판세, 판도, 판국을 훑어보고 살펴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은 기대도 할 수 없다.

둘째, 한국의 인문학자는 남이 만들어놓은 판에 기대어 공부하려고 한다.

한국의 인문학자는 스스로 판을 볼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판을 만드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이러니 그들은 남이 만들어놓은 판에 기대어서 공부하는 일을 아주 마땅하게 여긴다. 그들은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남이 만들어놓은 판에 기대어서 강의와 연구를 하고 논문과 책을 쓴다. 이런 것이 버릇이 되어 있어서 누군가 스스로 판을 만드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말하면 비웃거나 말리는 것을 넘어서 꾸짖거나 가로막는다. 이런 처지이다 보니 아주 드물게 스스로 판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있지만, 해놓은 것을 보면 대부분이 얼치기이다.

셋째, 한국의 인문학자는 스스로 판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밖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오늘날 학문은 세계를 무대로 하나의 거대한 판으로 엮여서 돌아가고 있다. 홀로 떨어져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앞서지 못한 사람은 뒤따라가야 한다. 사물을 다루는 자연학문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문화를 다루는 인문학문도 그러하다. 이러니 뜻이 있는 학자라면 누구나 앞서서 나아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한국의 인문학자는 판을 만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판을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해보지도 않고서 판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왜 판을 만들 수 없느냐고 다그치면, 그들은 ‘아직은 더 배워야 한다’ ‘아직은 준비가 부족하다’ ‘아직은 시기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국의 인문학자는 판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학문 무대로 나아갈 수 없다. 남이 만들어놓은 판을 따라서 배운 지식은 국내에서는 쓸모가 있어도 국외에서는 쓸모가 없다. 그들이 국외에 가져가는 것은 기껏 빌려온 이론에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이나 현상을 담아서 풀어낸 것이 고작이다. 그들은 우물 안에 갇혀 있는 개구리처럼 국내 무대에서만 끼리끼리 뭉쳐서 놀아나고 있다.

사업가는 실무로써 먹고사는 사람을 말한다. 사업가는 이미 짜여 있는 살판 위에서 갖가지로 사업을 펼쳐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동시에 살림살이에 필요한 온갖 것들을 만들고, 사고, 팔고, 갖고, 쓰고, 버릴 수 있도록 한다.

기술 강국, 무역 강국으로 만든 한국의 사업가들

울산 현대중공업 모습.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다.

사업가는 사업을 벌이면 반드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 사업가는 사업이 실패로 끝나게 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어떻게 하더라도 성공하려고 한다. 그들은 성공을 위해서 죽기 살기로 안간힘을 쓰고, 발버둥을 친다.

사업가가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첫째로 세상이 돌아가는 판도, 판세, 판국을 잘 읽어야 하고, 둘째로 성공의 가능성이 있는 사업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고, 셋째로 남이 하지 않는 일까지 새롭게 벌여나갈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 하고, 넷째로 실무에 밝아서 일이 그릇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줄 수 있어야 하고, 다섯째로 일에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이리저리 헤쳐갈 수 있는 뚝심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은 대외 무역을 통해서 국가의 경제를 키우고 국민의 살길을 찾는 나라이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인의 중심에는 사업가가 자리하고 있다. 그들이 세계를 무대로 뛰어난 상품을 만들고 팔아서 생산성과 경쟁력을 크게 키울 수 있어야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 한국인이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려면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는 뛰어난 사업가들이 줄줄이 나와야 한다.

오늘날 한국을 기술 강국, 무역 강국으로 만드는 일에서 가장 열심히 뛴 이들은 사업가들이다. 이들은 유행가의 가사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앉으면 임자지’라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손발을 놀려왔다. 이들은 서구를 따라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서구인의 입맛에 맞는 물건을 만들고 팔아서 돈을 버는 일까지 해낸 당찬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구인조차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기술까지 개발하는 일까지 경험하게 됐다. 그들은 한국인 가운데서 경쟁력과 생산성에서 가장 앞서가고 있다.

한국의 사업가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초라한 자본과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어야 했다. 이런 과정을 밟아온 사업가들에게선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볼 수 있다.

첫째, 한국의 사업가는 사업에 대한 속내가 매우 굳다. 그들은 사업가를 크게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사업으로 일가를 이루어서 당당해지고자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슨 사업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그런데 개같이 버는 일이 버릇으로 굳어버리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정승처럼 쓰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둘째, 한국의 사업가는 성공에 대한 열정이 매우 강하다. 그들은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하면 된다’는 믿음을 붙잡고 성공을 향해서 달렸다. 그들은 오로지 성공하는 일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규정을 어겨가며 사업을 벌이는 일이 많다. 그들은 뇌물, 담합, 탈세와 같은 일을 거침없이 저지른다. 이 때문에 거대한 기업을 거느리는 재벌의 총수까지 걸핏하면 검찰로 불려가고 교도소로 끌려간다.

셋째, 한국의 사업가는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돌아가게 만드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뛰어난 사업가를 아주 대단한 본보기로서 우러르고 따른다. 뛰어난 사업가가 되는 일은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사업가들은 아직 이러한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그들은 사업을 벌이는 일을 그냥 돈을 벌기 위한 일로 생각해 사업가로서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을 갖기 어렵다.

정치가

한국인 정치가들은 국가권력을 국민보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 쓰는 일이 많았다.

정치가는 다스리는 일로써 먹고사는 사람이다. 정치가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우리로서 함께 잘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도록 국민의 살판을 다스리는 일을 한다.

정치가가 국민의 살판을 다스리는 일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국민이 살아가는 살판을 짜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이 살판에서 살맛을 느끼게 북돋우는 일이다. 정치가가 국민의 살판을 어떻게 짜고, 국민이 살맛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또는 저렇게 달라진다.

한국의 정치가들은 망국, 식민지, 광복, 건국, 전쟁, 혁명, 쿠데타와 같은 일을 겪으면서 국가의 자주독립과 국민의 자유평등을 바탕으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야 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맛보며 국민의 살판과 살림살이를 더욱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줄기차게 민생안정과 국가발전과 선진조국을 외쳤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국가 권력을 국민의 살판을 다스리는 일에 쓰는 것을 넘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일에 쓰는 일이 많았다. 정치가들이 권력을 이용해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것이 드러날 때마다 국민들은 낱낱의 정치가를 비난하는 것을 넘어서 정치 자체를 불신하고 혐오하게 된다.

한국의 정치가들이 국민의 살판을 제대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에 생각이 미쳐야 한다.

첫째, 정치가는 정치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 한국인에게 정치는 ‘바르게 다스리는 일’로서, 그 위에 자리한 사람이 모든 것을 고루 하고 두루 하여 모두를 하나의 우리가 되도록 다스리는 일을 말한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인은 다스림의 잣대인 공(公)을 ‘그 위 공(公)’으로, 다스림의 방법인 조(調)와 화(和)와 균(均)을 ‘고를 조(調)’ ‘고를 화(和)’ ‘고를 균(均)’으로, 주(周)와 보(普)와 편(遍)을 ‘두루 주(周)’와 ‘두루 보(普)’ ‘두루 편(遍)’으로 새겨왔다. 정치가는 모두가 하나의 우리로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고루 하고 두루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가는 눈앞의 권력을 손에 쥐는 일에 매달려서 이러한 것에 마음을 두기 어렵다.

둘째, 정치가는 국가의 앞날을 멀리 내다보면서 국민의 살판을 짜고 다스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치가는 모든 것이 함께 엮여서 돌아가는 판도를 알고, 판국을 보고, 판세를 읽을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는 먼저 할 일과 뒤에 할 일, 지금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 힘을 더 쏟을 일과 덜 쏟을 일 따위를 가려서 국가의 백년대계를 꾀할 수 있다.

셋째, 정치가는 규정을 만들고 지키는 일에서 다른 사람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 정치는 위에서 만든 규정을 아랫사람이 지킴으로써 모두가 하나의 우리로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다스리는 일을 말한다. 이런 까닭으로 위에서 일하는 정치가는 규정을 만들거나 지키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한다. 이것을 두고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말한다. 정치가가 스스로 본보기로 나서야 다른 사람들이 따르게 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인은 국민의 살판을 사람다운 것으로 만들어야 모두가 함께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한국인은 사람다움에 대한 바람을 일깨우고 북돋울 수 있도록 살판을 짜야 한다.

사람은 사람이라는 보편성에 눈을 뜸으로써 사람다움에 대한 바람을 갖는다. 이런 사람은 저만 생각하거나 저들끼리만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남까지 아우를 때에 모든 사람을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은 저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나 저들끼리만 생각하는 집단주의를 넘어서 모두를 생각하는 사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한국인은 함께 살아가는 겨레의 줏대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살판을 짜야 한다.

사람은 같은 말을 쓰면서 함께 살아가는 겨레를 바탕으로 나라를 세우고 어울려 살아간다. 겨레는 나라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겨레말이 살아 있으면 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울 수 있다. 겨레말은 겨레의 줏대와 같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은 겨레말을 갈고 닦아서 겨레의 줏대를 튼튼하게 세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져 있는 나라를 다시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셋째, 한국인은 누구나 살맛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살판을 짜야 한다.

사람은 바라는 일을 하면서 보람을 얻을 때에 살맛을 느낀다. 살맛은 사람이 살아가는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사람은 살맛을 느끼면 신이 나고 흥이 나기 때문에 시키지 않은 일도 알아서 하고, 못하게 말리는 일도 구태여 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에 대해 살맛을 크게 느낄 수 있도록 살판을 짜서 누구나 신이 나고 흥이 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넷째, 한국인은 누구나 맡은 일에 충실할 수 있도록 고루 하고, 두루 하는 살판을 짜야 한다.

사람이 누구나 맡은 일에 충실하려면 일의 과정과 결과를 고루 하고 두루 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의 과정과 결과에서 누구는 무를 먹고, 누구는 인삼을 먹는 일이 거듭되면 사람들은 인삼을 먹는 일만을 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그러한 일에만 몰려서 지나치게 겨루고, 다투고, 싸우는 일에 빠지게 되어서 다른 여러 가지 일을 가볍게 여기게 되어 기회와 시간과 노력과 물자를 버리게 된다.

한국인은 오랫동안 힘센 사람이 일의 과정과 결과를 오로지 하려는 사회에 살아왔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인은 아직도 고루 하고 두루 하는 일에 매우 서툴다. 너나없이 힘센 사람이 되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제는 이러한 것이 쉽게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한국인은 고루 하고 두루 해서 누구나 맡은 일을 충실히 하면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살판을 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