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인터뷰]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④ 정지용의 손자 정운영 : 월간조선

1988년 납북(拉北)·월북(越北) 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뤄진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얼굴을 내민 작가가 시인 정지용(鄭芝溶·1902~1950)이다. 해금이 되고 다시 소개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의 〈향수〉는 정지용의 시사적(詩史的) 위치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게 한다. 이 시는 지용이 22세가 되던 1923년 3월 쓰였지만 절창(絶唱)의 울림은 세월을 뛰어넘는다.

1930년대 휘문고보 교사 시절의 정지용.

일제 식민지가 끝나고, 우리말로 마음껏 글을 쓰고 노래 부를 수 있었던 광복 공간에서 ‘운문은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李泰俊)’이란 말은 그저 빈말이 아니다. 훗날 김윤식(金允植)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지용을 ‘당대 제1급의 천재적 시인’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격렬했던 좌우대립과 6·25사변을 거치며 정지용·이태준이란 이름은 오랜 세월 금기어가 됐다. 두 사람 모두에게 ‘월북 작가’란 꼬리표가 붙은 것이다.

1980년대 들어 정지용이 자진 월북이 아닌 납북이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그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됐다. 정지용의 아들 정구관(鄭求寬·2004년 작고)씨가 오랜 세월 아버지에게 씌워진 월북의 멍에를 벗기려 노력한 결과였다.

정구관씨는 1988년 2월 민음사가 두 권짜리 《정지용전집》을 간행하자 권두언(다시 햇빛 보게 된 아버님의 글)에서 이런 심경을 밝혔다.

〈…혹여나 아버님께서 돌아오실까 하여 그 숱한 세월을 가슴 졸이시다 가신 어머님의 눈시울에는 이슬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망연(茫然)히 먼 산을 지키시다가 떠가는 구름을 따라 어머님은 손을 저으며 가셨습니다. 이렇게 애절히 기다리시는 어머님의 마음을 저야 어찌 그 반분인들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단 한순간이라도 이런 어머님을 위로할 수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후회스럽진 않을 것입니다.…〉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

정지용의 장남 구관씨.

바이크캠프 정운영(鄭運永·57) 대표는 정지용의 손자다. 산악·도로용 자전거와 전기 자전거를 판매하거나 분해·정비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제가 문인의 길을 걸었다면 할아버지의 무게감이 컸을 테지만 문학 쪽 일을 안 하다 보니까 그런 무게감은 없다”고 말했다.

또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정확히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며 “학창 시절 때 알았다면 문학에 더 관심을 가졌을 텐데 누구도, 심지어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일절 말씀이 없으셨다”고 했다.

“학창 시절 백일장에 나가 상을 탔는데 뜻밖에도 아버지 말씀이 ‘절대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차라리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죠. 그땐 영문을 몰랐습니다. 돌이켜보면, 혹시라도 제가 불이익을 받을까 하는 심정에서 그렇게 말하셨다고 생각돼요(연좌제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검은색 지프를 탄 검은색 가죽점퍼의 사복경찰들이 찾아오는데 스트레스 안 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월북 문인 120여 명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진 것은 1988년 7월 19일이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정한모(鄭漢模)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이른바 7·19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사상의 굴레에 갇혀 호명되지 않는 작가들에 대해 국문학계는 목말라 했던 터였다. 빈궁(貧窮)문학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앞세운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광복 직후 좌우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 등 빼놓지 말아야 할 한국 현대문학의 큰 이슈들이 가려졌다.

—할아버지가 시인인 사실을 언제 알았나요? 해금 후인가요?

“제가 군에 입대해 참모총장의 근접경호를 맡게 되면서 알게 됐어요. 신원조회를 받게 되자 처음으로 아버지가 할아버지 얘기를 하셨어요. 군 수사대에 정식 의뢰해 월북이 아니라 납북됐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군 수뇌부를 근접 경호하는 이의 가족 중에 월북한 사람이 있다면 군에서 경호를 맡겼을까요? 그때부터 아버지도 (해금에) 자신감을 얻게 됐어요. 숨기지 않고 할아버지의 해금을 위해 3~4년간 많은 노력을 하셨어요.”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할아버지가 시인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을 땐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어요. 진작 알았으면 혹시 제 안에 내재된 문학적 재능이랄까, 그런 것들을 끄집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월북이 아니라 납북”

정지용, 송재숙 부부와 어린 시절 장남 구관.

정지용은 1947년 《경향신문》 주간을 그만둘 당시 서울 불광동 녹번리에 살았다. 어느 날 《이북통신(以北通信)》이라는 주간지에 ‘지용 월북’이라는 기사가 나오자 직접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해명한 일도 있다. 그러나 1950년 7월 어느 날, ‘좌익 계통의 제자가 무슨 일이 있다며 찾아와 함께 잠깐 시내에 나간’ 후 종적이 사라졌다.

“아버지께 들은 얘기론 ‘제자를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선 것이 마지막이었대요. 그다음에 여러 설이 있잖아요. 소요산 기총 소사(掃射)설, 평양 감옥 폭사(爆死)설, 그다음에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감설까지 별별 얘기가 다 나왔습니다. 저는 평양 감옥 폭사설을 가장 신빙성 있게 생각합니다. 군 수사대가 제게 전해준 내용이기도 하고요.”

정구관씨는 ‘아, 내 아버지의 향수’라는 글에서 ‘1950년 7월 어느 날 모시 고의바지 저고리 차림으로 문안(서울) 잠깐 다녀오마는 말씀을 뒤로 남기고 나간 뒤 북으로 끌려갔다’고 표현했다.

‘소요산 기총소사설’은 1950년 가을 정지용이 북으로 가던 중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에서 미군 비행기의 기총소사에 절명했다는 설이다. 2001년 ‘8·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고 돌아온 도종환(都鍾煥·시인) 국회의원이 북한 수필가 석인해로부터 들은 “1950년 가을 경기도 소요산 근처에서 정지용이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그때 함께 있었고 시인의 시신을 묻었다”는 말이 전해지면서 회자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정지용이 북에서 대남 영어방송을 강요당하고 나중 UN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포로수용소로 호송됐다는 것이다. 그는 “전혀 불가능한 얘기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얘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평양감옥 폭사설’은 제4·5대 국회의원을 지낸 계광순(桂光淳·작고)에게서 나왔다. 그의 회고록 《나는 이렇게 살았다》에 실린 내용이다.

〈…우리는 서른세 명이 모두 한방에 있게 되었다. 그중에서 기억에 있는 사람을 꼽아보면 경기도경국장 옥선진, 경북도경국장 장수창, 치안국 수사과장 박명진, 전 보도연맹 간사장 박우천, 시인 정지용, 국회의원 김상덕, 야담가 신정언, 사무국장 차윤홍, 전 서울방송국장 홍양명 제씨였다.…〉

1930년 시문학 동인 창립 당시 정지용(윗줄 오른쪽). 아랫줄 왼쪽부터 김윤식, 정인보, 변영로, 윗줄 왼쪽부터 이하윤, 박용철.

계광순은 문학평론가 백철(白鐵·작고)과 만난 자리에서 그때 일을 자세히 털어놓기도 했다. 대표적인 정지용 연구가인 김학동(金學東) 서강대 명예교수도 “여러 정황으로 보아 9·28 수복 때 평양으로 이감돼 미군의 평양폭격 때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평양에 끌려가기 전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함께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잡혀갔던 사실은 작가 최정희(崔貞熙·작고)에 의해 알려지게 됐다. 그녀가 쓴 〈탄금(彈琴)의 서(書)〉에 나오는 대목이다.

〈…“나는 자수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어요. 오직 글을 썼을 뿐이에요.”

“괴뢰정권 아래서 글을 썼다는 것도 반동입니다. 자수해요.”

강압적으로 나오는 남자의 태도를 어디서 보았던지 정지용 시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강아지 같은 사람이 뭘 잘못했다고 자수하라는 거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백지같이 산 사람일 거요.”

정지용 시인은 나를 감싸주었다.

정지용 시인은 20명 가까운 동료들과 자기는 자수하러 나서면서도 날더러는 그냥 있으라고 당부했다. 그러던 정 시인은 돌아오지 못했다. 정 시인은 자수하러 가면 돌아 못 오는 일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게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했던 모양이다.…〉

정지용의 行路를 둘러싼 여러 억측

—해금 이후 정지용의 시와 산문을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다른 시인이 쓴 작품을 읽을 때와 느낌이 다르다는 점이겠죠.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과 내 옷을 입은 차이랄까요? 구체적인 문학적 평가 같은 것이 아니라 무조건 좋은 느낌이었죠.”

—아버지 정구관씨는 정지용의 복권을 위해 애를 많이 쓴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버지는 해금 이후 ‘지용회’를 통해 복권 활동하셨는데 제가 그 과정 당시 직장생활을 했어요. 대기업 샐러리맨의 삶이 그렇잖아요. 정신적 여유가 없어 신경을 못 썼어요. 저는 행사 때나 따라가는 정도였지요.”

‘지용회’는 정지용의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해금 직후인 1988년 창립된 모임으로 현재 유자효 시인이 회장으로 있다. 매년 정지용 문학상을 발표하는데 작년 제26회 정지용문학상에는 나태주 시인의 시 〈꽃2〉가 선정됐다. 또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은 매년 정지용 생가가 있는 옥천읍 일원에서 ‘지용제’를 개최한다. 정운영씨는 “유족 입장에서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다만 문학적 행사를 자치단체가 실적으로 삼고,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부분이 있어…”라며 부담스러워 했다.

—선친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저는 청주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당시 양계장을 하셨어요. 정확히 말해 병아리를 부화시키는 일이었어요. 그러다 유통 회사에 취직했고 1970년대 초 서울에 올라오면서 비닐 만드는 공장을 경영하셨죠. 할아버지의 해금을 위해 애쓸 때는 다른 일을 못 했어요. 오직 그 일에만 매달렸죠.”

정구관씨가 정지용을 그리며 쓴 ‘아, 내 아버지의 향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생활경제는 0점짜리시지만 자식들의 잘못에 한 번도 용서 않으시고 매로 다스리던 아버지. 6·25 이후 월북으로 오인받아 온 식구가 월북자 가족, 혹은 월북 작가의 아들이란 소리를 들으며 갖은 수모와 온갖 슬픔 속에 숨어 살게 한 아버지. 그래도 한 번도 원망스럽지 않은 아버지. 후세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는 이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그곳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란다.…〉

이산가족 상봉으로 만난 지용의 三男 정구인씨

정지용의 삼남인 정구인(가운데)씨가 2001년 2월 26일 서울 센트럴시티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형 구관(왼쪽)씨, 여동생 구원씨를 만나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정지용은 12세 때 은진(恩津) 송씨인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다. 10명이 넘는 자녀가 태어났지만 3남 1녀만이 장성했다. 장남 구관씨는 2004년 작고했고 차남 구익(求翼)씨는 가톨릭 사제(司祭)를 양성하는 함경도 원산의 ‘덕원신학교’에 진학했으나 6·25 때 병사했다.

6·25 때 행방불명된 삼남 구인(求寅)씨는 지난 2001년 2월 제3차 이산가족 ‘북측상봉단’으로 서울에 와 51년 만에 재회했다. 당시 구관씨는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겠다고 집을 나서는 네 뒷모습을 본 뒤 50년이 지나서야 다시 만나게 됐구나”며 동생 구인씨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딸 구원(求薗)씨는 현재 서울 노원구에 거주하고 있다. 기자는 구원씨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사양했다.

—정지용의 〈향수〉를 보면 ‘사철 발 벗은 아내’라는 표현이 나와요. 부부애를 느끼게 하는 구절입니다. 실제 생활은 어땠습니까.

“글쎄요. 부부생활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원만한 삶을 사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 회고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월급(정지용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광복 전까지 재직했다)을 타시면 세어보는 일도 없거니와 축을 내는 법도 없었고 봉투째 할머니께 전했다고 합니다. 교사 월급으로 생활을 꾸리기가 힘겨웠을 겁니다.”

정구관씨의 ‘아, 내 아버지의 향수’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웬 여자가 대성통곡을 하는 광경을 정지용이 목격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월급날이었다. “왜 우느냐”고 물으니 “아들을 만나러 왔다가 못 만나고 노자마저 몽땅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말했다.

정지용은 월급을 봉투째 건네며 “이 돈은 우리 식구 한 달 먹고살 돈이니 집에 도착하는 즉시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월급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연을 들은 아내는 “정 불쌍하면 기차표나 한 장 사줄 일이지, 월급을 봉투째 주다니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운영씨는 “아버지의 회고에 따르면, ‘기차표나 한 장 사줄 일이지…’라는 할머니의 말씀이 ‘평생 처음 듣는 남편에 대한 불평이요 바가지’였다”고 말했다.

정지용의 아내 송재숙은 이후 재봉틀을 전당포에 잡히고 외상값은 사정사정 미뤄놓고 윗돌 빼내 아랫돌 고이는 생활을 꾸려가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일을 입 밖에 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산가족 상봉 이후 정구인씨 소식은 들었나요?

“그 이후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요. 언젠가 브로커가 접촉을 해왔었어요. ‘북에서 어렵게 살고 있으니 송금해 주면 전하겠다’고요. 거절하니 그 뒤로 연락이 끊겼어요.”

좋은 시구가 떠오르면 혼자 웃기도 해

1946년 창경원에서 이화여전 제자들과 함께. 왼쪽에서 세 번째가 딸 구원, 네 번째가 정지용.

휘문고보 교사 시절, 정지용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자는 월간지 《민성(民聲)》(1946년 9·10월 합본호)에 실린 정지용의 제자 김광현(金光現)이 쓴 글(내가 본 시인)을 입수했다.

〈…시인은 수업시간에 시상이 떠오르면 “자습해!” 하며 소리치곤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 흥겨워 방긋방긋 웃으며 아름다운 시구를 담뿍 입속에 물어 혀(舌)를 굴리었다. (중략) 중학교 3학년쯤 되면 시를 좋아하는 생도들이 생기게 되어 정지용 선생도 이런 제자들의 청을 들어 시에다 음을 붙여 성악가 못지않게 노래를 불렀다. 생도들은 박수는 물론 발을 굴리며 ‘앙코르’ ‘앙코르’를 외치며 교실이 떠나갈 듯 소리쳤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시인은 격분하여 “이놈… 을, 이놈들! 그래 유행가인 줄 알고…”라고 말했다. 이것은 참말 오해였다. 이 박수와 앙코르는 중학생들의 장난이 아니고, 순진한 소년들의 감탄의 솔직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시인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고 휴식 시간에는 교무실에 앉아 습작을 한다든가 운동장에 나가 혼자 시상(詩想)을 다듬고, 좋은 시구가 떠오르면 독소(獨笑)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광복 이후 정지용은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직장을 옮겼다. 《한가람 봄바람에-이화(梨花) 100년 야사(野史)》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1930년대의 한국문단에 모더니즘 시인으로 이름을 드날리던 정 선생은 1945년 10월 개강과 함께 부임해서 3년간 국어와 영어, 라틴어를 담당했다. 애주가 호주가인데다 이름까지 비슷해서 학생들은 그에게 ‘정종’이라는 별명을 붙였지만 그의 시인 기질과 휴머니즘을 좋아하고 따랐다.

눈 오는 겨울밤에 제자들과 마차를 타고 동대문까지 가서 넉넉잖은 월급을 털어 ‘형제주점’의 추어탕을 사주기도 하고 가난한 학생에게는 아낌없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 자신이 가난하므로 모든 가난한 사람을 사랑했다. (중략) 목에는 늘 명주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는데 학생들은 그것이 아마 두루마기 동정을 못 갖춰 그런 것일 것이라고 했다.…〉

정운영씨에게 시인이 아닌 교사(교수)로서 정지용에 대해 물었으나 “이런 식으로 확인하면 한계가 있다. 디테일하게 아버지에게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할아버지 제사는 어떻게 모십니까.

“돌아가신 날짜를 모르지만 아버지가 사망신고를 하셨어요. 사실은, 사망신고를 안 해야 되는데 하고 말았어요. 주위에서 ‘그래야 (과거사) 정리가 된다’고 권했지만, 일부 출판사들의 농간도 있었다고 봐요. 제가 느끼기에 저작권 문제도 있고….

가상의 어느 날을 정해 제사를 모시다 지금은 성당에서 위령미사를 올립니다. 기일(忌日)은 할아버지가 태어나신 음력 5월 15일로 정했어요.”

—할아버지 시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는 무엇인가요?

“〈장수산1〉을 좋아합니다. 제 인터넷 아이디도 장수산으로 쓰고 있어요.”

끝으로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아직도 할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보면 월북이냐, 납북이냐에 매달립니다. 심지어 그분의 외곽에 있는 에피소드와 흥밋거리에만 온통 관심을 가져요. 이제는 그분이 가슴으로 쓴 시와 작품만 봐주세요. 더는 정치적 이념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