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 질환’ 환자가 된 의사의 육성 고백 ② : 월간조선

‘중증 근무력증’이란 확진을 받은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니 나와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가 있었다.

나도 의사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막상 희귀병 환자가 되어 보니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발병 후 걸어온 길이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카페에 회원 가입을 하고,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찬찬히 읽어 봤다. 주로 약 복용과 병원 정보, 병을 앓고 나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에 대한 글들이었다.

한 사연은 이랬다. 30대 아이 엄마로 근무력증 진단을 받은 지 3년 정도 되었는데 남편과 사소한 말다툼이라도 하다 보면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피로가 몰려온다고 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와 같이 자가면역 질환인 중증 근무력증 환자들에게는 ‘싸움’과 같은 일종의 감정 소모와 스트레스가 자가면역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처음 남편에게 급(急) 피로감을 호소했을 때 말다툼이 쉽게 중단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남편이 “일부러 문제가 생기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꾀병을 부리는 것이 아니냐”는 식(式)으로 말하는데 정말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하긴 ‘피로하다’는 본인만이 느끼는 주관적이고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신체적 현상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이해시킬 수 있으랴.

나는 이 사연을 읽으면서 앞으로 내게도 닥칠 일로 받아들였다. 아무리 사이 좋은 부부라 해도 싸우지 않고 살기는 힘들다. 병 진단을 받은 초기에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느라 서로 조심하겠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나 역시 예전처럼 사소한 일들로 집사람과 다투게 될 것이다. 집사람 입장에서는 ‘피로하다’는 나의 말에 몇 번은 넘어가겠지만,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싸움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방패막을 친다고 느낄 것이 뻔하다. 건강할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나를 찾아왔다.

의사의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는 말이 환자 입장에서는…

병 확진 판결을 받은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방 천장을 쳐다봤다. 환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이후 맨 처음 눈을 뜨면 습관처럼 증상의 변화를 체크하는, 일종의 스스로에 대한 확인 사살이다. 여전히 천장의 형광등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개로 보였다.

‘중증 무기력증 환자가 맞구나! 증상은 오늘도 그대로네!!!’

이미 받아들인 사실이지만, 다시 한 번 확인받는 순간이었다.

진단 후 침대에서 일어난 첫날 나는 문득 책이 읽고 싶어졌다. 무언가를 읽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생겼다. 모든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복시(複視) 현상이 심한 시점에서 갑자기 눈을 가장 많이 써야 하는 독서가 하고 싶다니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나의 욕구에 내 스스로가 많이 놀랐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눈으로 하는 수많은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선 나의 직업부터 그러했다. 제모 시술만을 하는 내게 건강한 눈은 정말 필수적이다. 내원하는 환자들의 털과 피부 상태를 눈으로 확인해야 하고, 레이저로 털을 제거하는 제모 시술을 할 때 시술 부위에 초점을 맞추어 눈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서 해야 한다.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 왔던 눈이라는 인체 기관의 소중함이 내게 강하게 다가왔다.

나는 책장에서 《The Seven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라는 원서를 꺼냈다. 읽고 싶어서 사 두고는 몇 년째 책장에 얌전히 꽂아 놓은 책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 전 하루에 딱 다섯 페이지씩만 읽기로 했다. 대략 며칠이 지나면 책을 완독할 수 있을까도 계산해 봤다. 여태까지 독서광도 아니었고, 책을 늘 옆에 끼고 살지 않았던 내가 갑자기 이렇게 목표까지 세우게 되다니 스스로에게 놀랐다.

의사들은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 “그렇게까지 심각한 병은 아니다”는 말을 부담없이 하곤 한다. 물론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환자가 되어 보니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는 말이 다르게 들렸다. 반대로 하면 “지장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의사의 말과 환자의 해석은 많이 달랐다.

사람은 자기가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 그것의 소중함이 강하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만일 중증 근무력증이 팔로 왔다면 아마 나는 팔을 가장 많이 써야 하는 일을 가장 하고 싶었을는지 모른다. 만일 다리로 왔다면, 단 한 번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마라톤을 간절히 하고 싶었을는지 모른다. 문득 사람의 신체 각 부분 부분이 소중하다는 것, 또 사람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 부족한 것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는 말기암 환자 이해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병원에서 직원들과 함께.

‘버킷리스트’라는 말이 한창 유행이던 때가 있었다.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음식’,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휴양지’ 등이 인터넷을 뒤덮었다. 나도 거창하게는 아니지만 몇 가지를 ‘버킷리스트’로 꼽았던 기억이 있다. 중증 근무력증이 당장 죽는 병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버킷리스트’를 생각해 봤다.

나의 ‘버킷리스트’ 1번은 ‘지금까지 해 오던 일들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세요’다. 2번을 쓰라고 하면, 글쎄 아직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이 병이 발병하기 전에 해 왔던 매일매일의 삶을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의 첫 번째이자 모든 바람이다.

종종 말기암 환자들이 자기의 일상을 묵묵히 계속하다가 죽음을 맞는다는 사연이 보도된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환자가 희한하게 보일 수 있다. 말기암 환자라고 하면 자신의 남은 삶을 정리하느라 사회와 인연을 끊거나, 한 번도 가지 못했던 오지로 여행을 떠나는 등 이전과 다르게 남은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어제와 같은 삶을 살아 내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병이 생긴 것을 모르다가 알게 된 차이일 뿐, 그 소용돌이 안에서 나란 존재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어제와 같은 일상을 오늘 살고, 또 내일을 살아갈 뿐이다. 환자의 버킷리스트는 건강한 이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작성했던 ‘무슨 무슨 10가지’가 아니다. 단순하고 짧다.

나는 내가 일하는 병원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는 병이 생기고 진단을 받지 못해 근 한 달 이상을 제대로 병원에 출근하지 못했다. 다행히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어서 예약 환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내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 상태였다.

나는 기업으로 치자면, 오너 경영인에 해당된다. 오너가 휘청거리면 다른 직원들이 동요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병원의 직원들은 내가 부재 중일 때 오히려 똘똘 뭉쳐서 내가 없는 상황을 헤쳐 가고 있었다. 내 병명을 알지 못해 동료 의사들에게 전화하고, 이 병원 저 병원을 기웃거리는 사이에 내 직원들은 자신의 위치를 지켜 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병원을 개원한 지 15년, 나는 정말 병원 직원들에게 한없이 고맙다. 이런 직원들과 환자들이 행복한 직장을 만들어야겠다는 의무감이 든다.

환자를 더 열심히 봐야 하는 이유

복시현상으로 인해 한쪽 눈을 가린채 생활했던 시절에 만든 안경.

자신의 담당의가 갑자기 중증 근무력증에 걸렸다면 어떨까. 나는 확진 얼마 전부터 한쪽 안경에 하얀색 테이프를 두껍게 붙인 채 생활을 했었다. 복시 현상을 줄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이다. 애꾸눈도 아니고, 한쪽 안경에 흰 테이프를 붙인 담당의를 상상해 보라. 나는 환자들 중에 몇 명은 당연히 다른 병원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환자들에게 일일이 내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그리고 환자의 치료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를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내가 병에 걸리기 전에 나를 만났던 환자 중에서 내 병으로 인해 타원으로 가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내 환자들의 눈빛에서 ‘당신도 환자가 되어 보니 이제 병원에 온 내 심정을 이해하겠네’라는 동질감마저 느꼈다고 하면, 나만의 착각일까.

버킷리스트 1번,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살게 해 주세요’를 하기 위해 나는 환자를 더 열심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들의 예약시간을 띄엄띄엄하게 잡았다. 환자들과의 상담시간을 충분히 길게 하고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다. 중증 근무력증의 특성 중 하나가 쉽게 피로해지기에 자주 쉬어야 회복된다. 매일 진료를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4일은 반드시 진료를 보기로 했다.

아파 보니까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서 암에 걸렸거나,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친구를 둔 분이 있다면 꼭 생각해 봤으면 한다. 확진받는 데까지 꽤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여러 동료들에게 내 상태를 알렸기 때문에 주위에서 내가 아프다는 것을 많이 알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병을 찾았느냐”며 이틀이 멀다하고 전화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화를 유독 자주 했던 사람들 중에서 한두 달이 지나면 연락이 없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나를 걱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사치레의 성격이 더 강한 전화가 아니었을까.

환자에게 고마운 친구는?

내게 정말 고마운 친구들은 규칙적으로 안부전화를 해 주는 친구다. 자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두 달에 한 번씩, 별 용건 없이 전화해 주는 친구가 정말 고맙다. 나는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마음을 전달하고 싶을 때 자주 전화하는 것보다는 주기적으로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환자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중증 근무력증 환자의 삶은 내가 살았던 이전의 삶과 180도 다르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고용량의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기 때문에 이에 따른 부작용은 필수적으로 따라온다. 이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서 삼시 세끼 저염식(다음 호에 쓰겠지만 나는 아예 무염식을 택했다)을 먹어야 하고,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야 하며, 두세 시간 집중하면 반드시 잠시 쉬어야 한다. 피트니스에서 러닝머신 위를 뛸 수는 없지만, 운동을 안 하면 안돼 동네 한 바퀴 산책을 매일 해야 한다.

술, 골프는 끊었다. 아무리 친구가 많았던 사람이라도 인간관계가 끊기기 십상인 상황이다. 남자들 중에서 저녁에 술 안 먹고, 야채만 먹는 사람을 앞에 두고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만나서 즐겁지 않은데 굳이 만날 이유는 없다.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섭섭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나의 상황을 알면서 술자리에 불러주는 친구가 정말 고맙다.

독자들 중에는 ‘술 좋아하는 친구가 술도 못 마시는데 괴롭게 술자리에 불러서 뭣하냐’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술을 좋아하면서도 술을 못 마시는 환자가 되어 보니, 그래도 나를 불러주는 친구가 고맙다. 친구들이 1차를 끝내고 가까운 데서 한 잔 더 한다고 할 때 왜 난들 같이 가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술 냄새를 풍기며 또 다른 술집으로 옮기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들을 만나지 않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 하지만 술, 골프 중단은 내가 겪어야 하는 일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치료를 위해 복용하기 시작한 스테로이드와의 싸움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상단주메뉴

‘희귀 질환’ 환자가 된 의사의 육성 고백 ②

“환자의 버킷리스트는 짧다”

0건

사이트 이용안내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