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友錫
⊙ 52세. 서울대 의대 졸업. 서울대 의대 석·박사. 美 하버드 의대 교환교수, 인제대 의대 교수 역임.
現 JMO 피부과 원장.
⊙ 52세. 서울대 의대 졸업. 서울대 의대 석·박사. 美 하버드 의대 교환교수, 인제대 의대 교수 역임.
現 JMO 피부과 원장.
나는 의사다. 그리고 나는 환자다. 나는 지난해 6월, 중증(重症) 근무력증이라는 확진을 받고 치료 중이다.
중증 근무력증은 파킨슨병, 루게릭병, 알츠하이머와 함께 희귀 질환으로 분류된다. 10만명당 14.5명이 이 병에 걸리는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다.
중증 근무력증은 자가 면역 질환의 하나다. 내 몸 안에 생긴 항체가 몸 기능을 스스로 공격하는 것이다. 이 항체는 신경에서 근육으로 명령을 전달해야 하는 기능을 억제시켜 근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 항체가 왜 생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나의 인생은 1막을 강제 종료당하고 2막을 열어야 했다. 스무 살에 의대에 입학해 의료인으로 살아온 지난 30여 년의 삶이 1막이라면, 환자로서의 삶은 2막이다. 아직 2막의 초기지만, 내 삶의 질은 어찌할 수 없이 다르다. 이 두 인생은 요즘 유행하는 말 그대로 갑(甲)과 을(乙)만큼 처지가 확연히 다르다.
의사이자 환자가 되면서 과거에 몰랐던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의사의 의료행위, 의료기관의 문제를 환자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됐고, 아프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세상을 체험하고 있다. 나와 비슷한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또 의사의 입장에서 30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이 이제야 비로소 환자를 이해하는 솔직한 심정으로 글을 쓴다.
첫 번째 진단, 중풍
지난 2014년 5월 19일, 나는 늘 그랬듯이 모 전문대학에서 6시간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해온 강의인데, 운전하며 돌아오는 길에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아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틀 뒤, 나는 자동차 사고가 났다. 좌회전하는 차량이 내 차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냥 직진을 하다 그 차량이 내 차 운전석 뒷부분을 받았다. 나는 평소 운전할 때 속도를 내는 편이 아니고, 방어 운전을 하는 편이다. 평생 가벼운 접촉사고조차 내지 않았던 나로서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내가 바로 앞에 다가오는 자동차를 보지 못했다니….
그주 일요일에 동료들과 골프를 쳤다. 안과의사 부부, 내과의사 친구와 함께였다. 공을 치는데 계속 사물이 둘로 보였다. 골프를 제대로 치기 어려웠다. 함께 라운딩을 한 안과의사 부부가 내 눈을 진단했다. 그들은 내 증상이 ‘INO(Internuclear opthalmoplegia)’로 추정된다고 감별 진단했다. ‘INO’는 경미한 중풍이다. 쉽게 말해 뇌혈관에 경미한 문제가 생겨서 눈을 움직이는 근육이 일부 마비되고, 이로 인해 사물이 둘로 보이는 증상이 생긴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 첫 번째 진단이었다.
다음날, 진단방사선과 전문의인 친구가 운영하는 개인병원에서 MRI를 찍었다. 결과는 정상이었다. 나는 MRI 결과를 가지고 A대학병원에서 외래 진료를 받았다. 그곳에서 내린 결론 역시 ‘경미한 중풍’으로 혈액순환제, 혈중지질 농도를 낮추는 약을 처방받아 먹기 시작했다. 경미한 중풍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이렇게 나는 경미한 중풍 환자가 됐다.
내 상태가 심해진 것은 처음에 눈이 불편했던 때로부터 2주가 지난 작년 6월 초였다. 나는 연휴를 이용해 몇몇 친구와 함께 호주 골프 여행을 떠났다. 여행 첫날부터 내 증상은 시작됐다. 처음에는 눈을 옆으로 돌렸을 때 보이는 모든 사물이 두 개였다. 이튿날이 되자, 눈을 45도 정도만 돌려도 모든 사물이 두 개로 보였다. 4박5일의 일정 마지막 날에는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사물이 두 개로 보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약 1m 간격으로 벌어져 두 개로 보인다고 상상을 해보라. 복시(複視) 증상의 진행 속도는 빨랐다.
서울 도착 다음날 같이 여행을 갔던, 대학병원에 재직 중인 이비인후과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는 “너의 상황을 지켜보니 중풍이 아닐 것 같다”며 당장 B대학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B대학병원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심장 등 내과 질환부터 여러 가지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과적 모든 기능은 정상이었다. 그 사이 나는 ‘의사 환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똑같은 MRI를 병원마다 찍어
해부학 교과서를 펼쳐서 내 왼쪽 눈의 몇 번 시신경이 몇 도의 각도로 움직였을 때 복시 증상이 나타나는지 온종일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나름 체크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서 먼저 찾았던 A대학병원의 신경과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는 다시 MRI를 찍자고 했다. 나는 앞서 내 동기인 진단방사선과 전문의의 개인병원에서 MRI를 찍고 정상 판정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A대학병원의 친구는 “MRI가 여러 종류가 있다. 혹시 모르니 해상도가 더 좋은 것으로 다시 찍어보자”고 했다. 내가 피부과 전문의로 30여 년간 살아왔지만, MRI도 TV 해상도가 HD, Full HD 등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여러 등급으로 발전됐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의사들은 MRI를 찍자는 말을 쉽게 한다. 하지만 환자의 입장에서 MRI 검사는 달갑지 않다. 환자가 되기 전에는 MRI를 찍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줄 몰랐다. MRI를 찍기 위해 40여 분간 통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 불규칙적으로 반복해 들리는 윙 소리의 거슬림은 신경을 건드렸다. 내 몸 상태에 대한 불안감까지 더해져 사람을 극도로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불안감을 다른 방법으로 떨쳐버리기로 했다. 윙 소리를 세는 것이다. 단층 하나를 촬영하고, 다른 단층으로 단계적으로 넘어가는 MRI의 원리를 생각하며 90~100번 정도의 윙 소리가 반복되다 일시 중단되고, 다시 반복하는 것을 따라 세기 시작했다. 의사가 쉽게 내뱉는 “MRI를 찍어보자”는 말이 환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환자가 되어보니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의사와 다르게, 환자는 작은 일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어찌됐든 나는 ‘3 테스라 MRI’라는 것을 다시 찍기로 했다. 대학병원에서 MRI 스케줄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의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청탁을 하고 다른 환자들보다 MRI를 빨리 찍게 일정을 조정했다. 좋지 않은 얘기지만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고백한다.
외래를 받은 지 이틀 뒤 MRI를 찍기로 스케줄을 잡았다. 오후 5시로 예정돼 있었다. 시각에 맞춰 A대학병원을 다시 찾았는데 뭔가 오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 오후 5시(17시)를 누군가가 오후 7시로 잘못 기재한 것 같다. 잘못된 스케줄상 2시간 일찍 도착한 나는 대기실 복도에서 오로지 두 번째 MRI를 찍기 위해 우두커니 앉아 기다렸다. 기분이 참 묘했다. 예약을 잘못 적은 직원은 전혀 나에게 미안해하는 내색이 없었다. 하지만 나 역시 제대로 항의를 할 수 없었다. 쉽게 말해 ‘새치기’를 통해 MRI 촬영 일정을 잡은 입장에서, 오후 5시를 오후 7시로 잘못 기재했다고 직원에게 따질 수 없었다. 그렇게 MRI를 찍었고, 판독 결과는 정상이었다.
의사들은 내 증상으로 볼 때, 뇌혈관 손상이 아주 미세해서 MRI상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중풍이라고 설명했다. 중풍은 약 복용으로 진행을 막을 수 있다. 나는 ‘중풍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했지만, 사물이 둘로 보이는 복시 증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결국 한쪽 눈에 안대를 쓰고, 한쪽으로만 사물을 봐야 일상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빠졌다. 내 병은 오리무중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신이 아니다. 검사를 해도 금세 병명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가령 고열 환자인 경우, 고열은 확실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두고 헤맬 수도 있다. 하지만 환자의 입장이 되어보니 무언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병(Unknown Disease)’이라는 말은 환자 입장에서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내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답답함 그 이상이었다. 이즈음이 되니, 차라리 심각한 질환이라도 ‘확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차라리 치료에 매진할 수 있어 속이 편할 테니 말이다. 내 병이 오리무중의 병이 되어가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의사 환자’가 아니었다. 그저 속앓이를 하는 환자일 뿐이었다. 그렇게 잔인한 6월이 지나고 있었다.
실력 좋은 의사 vs. 친절한 의사
그러던 중에 나의 병 증상은 눈이지만, 문제는 신경이나 눈 근육 쪽에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신경안과’적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나는 세부전공이 신경안과 분야인 C종합병원(A대학병원의 자매 병원)의 신경과 전문의를 소개받았다.
이 전문의는 나를 진료하고는, 자기가 A대학병원에서 찍은 MRI를 한 번 보고, 자기네 병원 방사선과 교수에게도 보내서 살펴보겠다고 했다. C종합병원의 본원인 A대학병원에서 정상으로 판독한(그것도 현재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전직 A대학병원 교수도 앞서 정상으로 판독한) 것을 또다시 보겠다는 것이어서 내심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병원에서 판독한 것을 더블 체크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절차지만, 번거롭게 생각하는 의사도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내 MRI를 총 5명의 다른 의사가 보게 됐다.
나중에 C종합병원의 진료비를 내려고 확인해 보니, C병원은 ‘판독비’로 12만원을 내게 부과했다. 물론 다른 병원에서 촬영한 MRI를 다른 병원에서 판독하고 비용을 청구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자매병원에서 촬영되고 판독을 마친 동일한 MRI 사진을 보고, 이에 대해서 비용을 청구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의료행위인지, 독자분들이 판단하기를 바란다. 적어도 내가 환자가 되어보니, 이런 행위가 썩 달갑지는 않았다는 정도로 표현해 두겠다.
C종합병원에서 처음으로 ‘중증 근무력증’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중증 근무력증일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병원 문을 닫아야 하나’란 생각이 스쳤다. 나는 레이저를 이용해 털을 제거하는 시술만을 하는 특이한 피부과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담당의에게 ‘앞으로 병이 진행돼도 내가 의사로서 레이저 치료를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담당의는 ‘노코멘트’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의사의 표정은 “왜 나한테 이런 걸 묻지?”였다. 나는 문득 나에게는 절실한 이 문제를 환자로서 의사에게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나 생각해 보게 됐다. 피부과 전문의로서 내 병이 ‘중증 근무력증’으로 확진될 경우,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인 의사로서의 직업에 어떤 영향을 받겠느냐는 것에 대해 병의 예후를 잘 알고 있는 담당의와 상의하는 것이 안 되는 일이었을까.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실력 좋은 의사와 친절한 의사 중에서 누가 좋으냐고 묻는다면, 실력 좋은 의사라고 말하고 싶다. 실력도 좋고, 친절한 의사를 찾기는 쉽지 않다. 실력 좋은 의사는 환자 진료와 연구에 지쳐 친절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자가 되어보니, 의사의 친절성이 외면해도 좋을 정도로 별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검진 목적으로 필요없는 입원
중증 근무력증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임상 검사를 해야 했다. 외래를 통해 임상 검사를 진행하려면 여러 날을 기다려야 했다. 담당의는 ‘입원 검사’를 추천했다. 검사를 하기 위해 입원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입원이 필요없는 환자가 다른 목적으로 입원을 하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가 아닌가. 나도 급한 마음에 입원을 결정하기는 했지만, 문득 외래에서 빨리 검사를 해주면 되는 문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검진을 목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오전에 C종합병원에 왔지만 바로 입원하지 못했다. 입퇴원은 통상 점심시간 전후로 이뤄진다. 내가 들어가는 병실의 환자가 중환자실로 옮겨야하는데, 그 중환자실이 비지 않아서 내 병실이 비지 않았단다. 병실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한 병실이 비면 다른 환자들이 순차적으로 이동하는, 이런 식의 유기적 움직임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입원 환자들이 흔히 겪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저 병원 측은 ‘병실이 아직 비지 않았다’고 얘기하며 기다리라는데, 무작정 기다리는 환자 입장이 되어보니 참으로 답답했다.
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한쪽 눈은 안대로 가린 채, 오가는 환자들의 소음이 가득한 병원 복도를 서성였다. 의사인 나도 이렇게 복잡한 생각이 드는데, 의료 시스템을 모르는 일반 환자들이 이런 일을 겪으면 어떨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6시간의 기다림 끝에 오후 4시가 넘어서야 겨우 병실에 들어갔다. 곧장 임상 검사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내 머릿속은 다시 복잡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병실을 잡았는데, “검사를 받으러 내려오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진짜 입원이 필요한 환자가 아니라, 검사를 빨리 받기 위해 입원한, 어찌 보면 가짜 입원 환자다. 그런데 내 진짜 목적인 검사를 받으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 황당했다. 담당자들은 “오늘 못 받으면 내일 검사를 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입장이었다.
의사인 나는 종합병원의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다. 종합병원은 오후 6시 이후에 모든 업무가 중단된다. 어떤 문제든 이 시간 이전에 해결을 해야 한다. 결국 집사람이 5시20분 즈음 상황 설명을 하고, 병원에 사정하다시피 해서 6시 전에 간신히 검사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6시반에 검사가 끝났다. 진단 검사를 받는 순간에 확진 판결이 난다. 왜냐하면 검사 약물을 투약하고 5~10분 정도 지나면 두 개로 보이던 사물이 갑자기 하나로 보인다. 의사가 아닌 일반인 환자도 그 변화를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다. 오진은 없다.
C종합병원에서 ‘확진’을 받았지만, 나는 C병원이 별로 고맙지 않았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르다고 했던가. 비록 확진을 받았지만, 진료에서 진단할 때까지 C병원이 내게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 친절함, 편의라는 콘텐츠가 자꾸 떠올랐다. 나는 입원한 지 2시간 만에 ‘외출증’을 끊어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제 나는 ‘중증 근무력증 환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가족들은 모두 당황해 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건 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걱정, 염려가 힘이 되어주겠지만 본질적으로 내가 짊어져야 할 내 문제다.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라도 매일 아픈 사람만 생각하고 살 수는 없다. 조금 걱정하다가 잊어버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다. 나도 그랬으니 남들인들 안 그러겠는가. 이렇게 ‘희귀병 질환자 고우석’의 삶을 시작했다.⊙
중증 근무력증은 파킨슨병, 루게릭병, 알츠하이머와 함께 희귀 질환으로 분류된다. 10만명당 14.5명이 이 병에 걸리는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다.
중증 근무력증은 자가 면역 질환의 하나다. 내 몸 안에 생긴 항체가 몸 기능을 스스로 공격하는 것이다. 이 항체는 신경에서 근육으로 명령을 전달해야 하는 기능을 억제시켜 근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 항체가 왜 생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나의 인생은 1막을 강제 종료당하고 2막을 열어야 했다. 스무 살에 의대에 입학해 의료인으로 살아온 지난 30여 년의 삶이 1막이라면, 환자로서의 삶은 2막이다. 아직 2막의 초기지만, 내 삶의 질은 어찌할 수 없이 다르다. 이 두 인생은 요즘 유행하는 말 그대로 갑(甲)과 을(乙)만큼 처지가 확연히 다르다.
의사이자 환자가 되면서 과거에 몰랐던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의사의 의료행위, 의료기관의 문제를 환자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됐고, 아프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세상을 체험하고 있다. 나와 비슷한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또 의사의 입장에서 30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이 이제야 비로소 환자를 이해하는 솔직한 심정으로 글을 쓴다.
첫 번째 진단, 중풍
지난 2014년 5월 19일, 나는 늘 그랬듯이 모 전문대학에서 6시간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해온 강의인데, 운전하며 돌아오는 길에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아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틀 뒤, 나는 자동차 사고가 났다. 좌회전하는 차량이 내 차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냥 직진을 하다 그 차량이 내 차 운전석 뒷부분을 받았다. 나는 평소 운전할 때 속도를 내는 편이 아니고, 방어 운전을 하는 편이다. 평생 가벼운 접촉사고조차 내지 않았던 나로서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내가 바로 앞에 다가오는 자동차를 보지 못했다니….
그주 일요일에 동료들과 골프를 쳤다. 안과의사 부부, 내과의사 친구와 함께였다. 공을 치는데 계속 사물이 둘로 보였다. 골프를 제대로 치기 어려웠다. 함께 라운딩을 한 안과의사 부부가 내 눈을 진단했다. 그들은 내 증상이 ‘INO(Internuclear opthalmoplegia)’로 추정된다고 감별 진단했다. ‘INO’는 경미한 중풍이다. 쉽게 말해 뇌혈관에 경미한 문제가 생겨서 눈을 움직이는 근육이 일부 마비되고, 이로 인해 사물이 둘로 보이는 증상이 생긴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 첫 번째 진단이었다.
다음날, 진단방사선과 전문의인 친구가 운영하는 개인병원에서 MRI를 찍었다. 결과는 정상이었다. 나는 MRI 결과를 가지고 A대학병원에서 외래 진료를 받았다. 그곳에서 내린 결론 역시 ‘경미한 중풍’으로 혈액순환제, 혈중지질 농도를 낮추는 약을 처방받아 먹기 시작했다. 경미한 중풍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이렇게 나는 경미한 중풍 환자가 됐다.
내 상태가 심해진 것은 처음에 눈이 불편했던 때로부터 2주가 지난 작년 6월 초였다. 나는 연휴를 이용해 몇몇 친구와 함께 호주 골프 여행을 떠났다. 여행 첫날부터 내 증상은 시작됐다. 처음에는 눈을 옆으로 돌렸을 때 보이는 모든 사물이 두 개였다. 이튿날이 되자, 눈을 45도 정도만 돌려도 모든 사물이 두 개로 보였다. 4박5일의 일정 마지막 날에는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사물이 두 개로 보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약 1m 간격으로 벌어져 두 개로 보인다고 상상을 해보라. 복시(複視) 증상의 진행 속도는 빨랐다.
서울 도착 다음날 같이 여행을 갔던, 대학병원에 재직 중인 이비인후과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는 “너의 상황을 지켜보니 중풍이 아닐 것 같다”며 당장 B대학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B대학병원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심장 등 내과 질환부터 여러 가지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과적 모든 기능은 정상이었다. 그 사이 나는 ‘의사 환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똑같은 MRI를 병원마다 찍어
해부학 교과서를 펼쳐서 내 왼쪽 눈의 몇 번 시신경이 몇 도의 각도로 움직였을 때 복시 증상이 나타나는지 온종일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나름 체크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어서 먼저 찾았던 A대학병원의 신경과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는 다시 MRI를 찍자고 했다. 나는 앞서 내 동기인 진단방사선과 전문의의 개인병원에서 MRI를 찍고 정상 판정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A대학병원의 친구는 “MRI가 여러 종류가 있다. 혹시 모르니 해상도가 더 좋은 것으로 다시 찍어보자”고 했다. 내가 피부과 전문의로 30여 년간 살아왔지만, MRI도 TV 해상도가 HD, Full HD 등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여러 등급으로 발전됐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의사들은 MRI를 찍자는 말을 쉽게 한다. 하지만 환자의 입장에서 MRI 검사는 달갑지 않다. 환자가 되기 전에는 MRI를 찍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줄 몰랐다. MRI를 찍기 위해 40여 분간 통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 불규칙적으로 반복해 들리는 윙 소리의 거슬림은 신경을 건드렸다. 내 몸 상태에 대한 불안감까지 더해져 사람을 극도로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불안감을 다른 방법으로 떨쳐버리기로 했다. 윙 소리를 세는 것이다. 단층 하나를 촬영하고, 다른 단층으로 단계적으로 넘어가는 MRI의 원리를 생각하며 90~100번 정도의 윙 소리가 반복되다 일시 중단되고, 다시 반복하는 것을 따라 세기 시작했다. 의사가 쉽게 내뱉는 “MRI를 찍어보자”는 말이 환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환자가 되어보니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의사와 다르게, 환자는 작은 일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어찌됐든 나는 ‘3 테스라 MRI’라는 것을 다시 찍기로 했다. 대학병원에서 MRI 스케줄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의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청탁을 하고 다른 환자들보다 MRI를 빨리 찍게 일정을 조정했다. 좋지 않은 얘기지만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고백한다.
외래를 받은 지 이틀 뒤 MRI를 찍기로 스케줄을 잡았다. 오후 5시로 예정돼 있었다. 시각에 맞춰 A대학병원을 다시 찾았는데 뭔가 오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 오후 5시(17시)를 누군가가 오후 7시로 잘못 기재한 것 같다. 잘못된 스케줄상 2시간 일찍 도착한 나는 대기실 복도에서 오로지 두 번째 MRI를 찍기 위해 우두커니 앉아 기다렸다. 기분이 참 묘했다. 예약을 잘못 적은 직원은 전혀 나에게 미안해하는 내색이 없었다. 하지만 나 역시 제대로 항의를 할 수 없었다. 쉽게 말해 ‘새치기’를 통해 MRI 촬영 일정을 잡은 입장에서, 오후 5시를 오후 7시로 잘못 기재했다고 직원에게 따질 수 없었다. 그렇게 MRI를 찍었고, 판독 결과는 정상이었다.
의사들은 내 증상으로 볼 때, 뇌혈관 손상이 아주 미세해서 MRI상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중풍이라고 설명했다. 중풍은 약 복용으로 진행을 막을 수 있다. 나는 ‘중풍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했지만, 사물이 둘로 보이는 복시 증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결국 한쪽 눈에 안대를 쓰고, 한쪽으로만 사물을 봐야 일상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빠졌다. 내 병은 오리무중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신이 아니다. 검사를 해도 금세 병명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가령 고열 환자인 경우, 고열은 확실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두고 헤맬 수도 있다. 하지만 환자의 입장이 되어보니 무언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병(Unknown Disease)’이라는 말은 환자 입장에서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내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답답함 그 이상이었다. 이즈음이 되니, 차라리 심각한 질환이라도 ‘확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차라리 치료에 매진할 수 있어 속이 편할 테니 말이다. 내 병이 오리무중의 병이 되어가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의사 환자’가 아니었다. 그저 속앓이를 하는 환자일 뿐이었다. 그렇게 잔인한 6월이 지나고 있었다.
실력 좋은 의사 vs. 친절한 의사
그러던 중에 나의 병 증상은 눈이지만, 문제는 신경이나 눈 근육 쪽에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신경안과’적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나는 세부전공이 신경안과 분야인 C종합병원(A대학병원의 자매 병원)의 신경과 전문의를 소개받았다.
이 전문의는 나를 진료하고는, 자기가 A대학병원에서 찍은 MRI를 한 번 보고, 자기네 병원 방사선과 교수에게도 보내서 살펴보겠다고 했다. C종합병원의 본원인 A대학병원에서 정상으로 판독한(그것도 현재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전직 A대학병원 교수도 앞서 정상으로 판독한) 것을 또다시 보겠다는 것이어서 내심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병원에서 판독한 것을 더블 체크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절차지만, 번거롭게 생각하는 의사도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내 MRI를 총 5명의 다른 의사가 보게 됐다.
나중에 C종합병원의 진료비를 내려고 확인해 보니, C병원은 ‘판독비’로 12만원을 내게 부과했다. 물론 다른 병원에서 촬영한 MRI를 다른 병원에서 판독하고 비용을 청구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자매병원에서 촬영되고 판독을 마친 동일한 MRI 사진을 보고, 이에 대해서 비용을 청구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의료행위인지, 독자분들이 판단하기를 바란다. 적어도 내가 환자가 되어보니, 이런 행위가 썩 달갑지는 않았다는 정도로 표현해 두겠다.
C종합병원에서 처음으로 ‘중증 근무력증’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중증 근무력증일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병원 문을 닫아야 하나’란 생각이 스쳤다. 나는 레이저를 이용해 털을 제거하는 시술만을 하는 특이한 피부과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담당의에게 ‘앞으로 병이 진행돼도 내가 의사로서 레이저 치료를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담당의는 ‘노코멘트’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의사의 표정은 “왜 나한테 이런 걸 묻지?”였다. 나는 문득 나에게는 절실한 이 문제를 환자로서 의사에게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나 생각해 보게 됐다. 피부과 전문의로서 내 병이 ‘중증 근무력증’으로 확진될 경우,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인 의사로서의 직업에 어떤 영향을 받겠느냐는 것에 대해 병의 예후를 잘 알고 있는 담당의와 상의하는 것이 안 되는 일이었을까.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실력 좋은 의사와 친절한 의사 중에서 누가 좋으냐고 묻는다면, 실력 좋은 의사라고 말하고 싶다. 실력도 좋고, 친절한 의사를 찾기는 쉽지 않다. 실력 좋은 의사는 환자 진료와 연구에 지쳐 친절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자가 되어보니, 의사의 친절성이 외면해도 좋을 정도로 별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검진 목적으로 필요없는 입원
중증 근무력증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임상 검사를 해야 했다. 외래를 통해 임상 검사를 진행하려면 여러 날을 기다려야 했다. 담당의는 ‘입원 검사’를 추천했다. 검사를 하기 위해 입원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입원이 필요없는 환자가 다른 목적으로 입원을 하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가 아닌가. 나도 급한 마음에 입원을 결정하기는 했지만, 문득 외래에서 빨리 검사를 해주면 되는 문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검진을 목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오전에 C종합병원에 왔지만 바로 입원하지 못했다. 입퇴원은 통상 점심시간 전후로 이뤄진다. 내가 들어가는 병실의 환자가 중환자실로 옮겨야하는데, 그 중환자실이 비지 않아서 내 병실이 비지 않았단다. 병실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한 병실이 비면 다른 환자들이 순차적으로 이동하는, 이런 식의 유기적 움직임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입원 환자들이 흔히 겪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저 병원 측은 ‘병실이 아직 비지 않았다’고 얘기하며 기다리라는데, 무작정 기다리는 환자 입장이 되어보니 참으로 답답했다.
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한쪽 눈은 안대로 가린 채, 오가는 환자들의 소음이 가득한 병원 복도를 서성였다. 의사인 나도 이렇게 복잡한 생각이 드는데, 의료 시스템을 모르는 일반 환자들이 이런 일을 겪으면 어떨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6시간의 기다림 끝에 오후 4시가 넘어서야 겨우 병실에 들어갔다. 곧장 임상 검사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내 머릿속은 다시 복잡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병실을 잡았는데, “검사를 받으러 내려오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진짜 입원이 필요한 환자가 아니라, 검사를 빨리 받기 위해 입원한, 어찌 보면 가짜 입원 환자다. 그런데 내 진짜 목적인 검사를 받으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 황당했다. 담당자들은 “오늘 못 받으면 내일 검사를 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입장이었다.
의사인 나는 종합병원의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다. 종합병원은 오후 6시 이후에 모든 업무가 중단된다. 어떤 문제든 이 시간 이전에 해결을 해야 한다. 결국 집사람이 5시20분 즈음 상황 설명을 하고, 병원에 사정하다시피 해서 6시 전에 간신히 검사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6시반에 검사가 끝났다. 진단 검사를 받는 순간에 확진 판결이 난다. 왜냐하면 검사 약물을 투약하고 5~10분 정도 지나면 두 개로 보이던 사물이 갑자기 하나로 보인다. 의사가 아닌 일반인 환자도 그 변화를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다. 오진은 없다.
C종합병원에서 ‘확진’을 받았지만, 나는 C병원이 별로 고맙지 않았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르다고 했던가. 비록 확진을 받았지만, 진료에서 진단할 때까지 C병원이 내게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 친절함, 편의라는 콘텐츠가 자꾸 떠올랐다. 나는 입원한 지 2시간 만에 ‘외출증’을 끊어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제 나는 ‘중증 근무력증 환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가족들은 모두 당황해 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건 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걱정, 염려가 힘이 되어주겠지만 본질적으로 내가 짊어져야 할 내 문제다.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라도 매일 아픈 사람만 생각하고 살 수는 없다. 조금 걱정하다가 잊어버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다. 나도 그랬으니 남들인들 안 그러겠는가. 이렇게 ‘희귀병 질환자 고우석’의 삶을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