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⑦ 요절文人 나도향·최서해·남궁벽 : 월간조선

20세기 초 한국문단에 요절한 문인들이 많았다. 김소월(金素月·1902~1934)·김유정(金裕貞·1908~1937)·이상(李箱·1910~1937)·이장희(李章熙·1900~1929) 등이 문재(文才)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요절문인 중에 나도향(羅稻香·1902~1926)·최서해(崔曙海 ·1901~1932)·남궁벽(南宮璧·1895 ~1922)의 죽음은 ‘문단적 죽음’에 가까웠다. 죽음의 동류의식이랄까, 많은 문인이 사적(私的) 죽음 대신 식민지 시대 문인들의 절망적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서울대 김윤식(金允植) 명예교수는 이를 ‘본격적인 문단적 죽음’이라 부른다.

〈물레방아〉〈뽕〉〈벙어리 삼룡이〉의 작가 도향 나빈(羅彬)은 1926년 8월 26일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902년생이니 불과 25세였다. 1주기인 1927년 《현대평론》 8월호에 도향을 추모하는 글이 특집으로 꾸며졌다. 안석주·정인보·이은상·김영진(시조시인)·염상섭·이태준·김동환 등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글이 실렸다. 그의 죽음을 ‘문단적 죽음’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태준이 쓴 〈도향 생각 몇 가지〉.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은 도향이 숨지던 그해 일본 도쿄에서 함께 하숙했다. 하숙집에는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과 양주동(梁柱東)도 있었다. 당시 도향의 몸은 이미 폐결핵이 퍼진 상태였다. 횡보는 도향과 같은 식기를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도향의 일과는 매일 입욕하고 누웠다가 값싼 포도주 한 잔 마시는 것이었다. (중략) 그는 여러 사람과 식사를 할 때에도 자기 혼자서는 매우 주의했던 모양이다. 다만 나(횡보)하고만은 같은 잔에 술도 마시고 찻종도 한 곳에 쓰고 있었지마는…〉(p39~40, 《현대평론》 8월호)

염상섭은 도향의 죽음을 ‘참혹한 요절’이라 표현했다. 그런 표현은 가까이서 도향의 죽음을 목도한, 그만이 쓸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원래 운명이니 명수니 하는 것을 의심하거니와 도향의 죽음을 보고도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이 없지 않다. 그의 병의 원인이 어디 있었든지 간에 그에게는 약간의 자력만 허락됐더라도 그처럼 참혹한 요절을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수년간 폭음을 할지라도 그의 사생활이 순조로웠더라면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요, 우리의 민족적 처지라든지 사회적 환경이 이렇지 않았더라면 그와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면 비단 고인의 경우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이러한 논법이 적용될 것이지마는 요컨대 사람의 운명이라든지 천정한 명수라든지 하는 숙명론적 견해로 그의 불운과 요절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p1, 8월호)

이태준은 〈도향 생각 몇 가지〉에서 도향의 죽음을 지배했던 폐결핵으로 떠올렸다.

〈…작년(1926년)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동경 일모리(日暮里)역 건너편 동산에 어우러진 춘(椿)나무 꽃이 바람에 휘날리며 길을 붉게 덮었다. 도향은 걸음을 멈추고 앞서가던 나를 불러 세웠다. 그 하얗게 질린 얼굴은 지금도 기억한다. 그는 자기 앞에 떨어진 꽃잎보다 더 붉은 핏덩어리 하나를 굽어보고 섰던 것이다. 기침 한번을 다시 하더니 또 하나를 뱉어 놓았다.

이은상이 쓴 시조 〈추억 도향〉.

“언제부터?”

“이게 침이야.”

우리는 말없이 다시 걸었다.…〉(p24, 8월호)

도향이 폐결핵을 앓기 시작한 것은 1923년부터다. 그가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 도향 문학의 근원은 이른바 ‘결핵문학’일지 모른다. 결핵을 앓으며 삶과 인간의 운명을 감수성 어린 글로 엮은 것이다.

도향과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의 인연도 결핵으로 시작됐다. 1925년 여름 결핵 요양차 마산에 3개월 동안 머무른 도향은 노산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했다. 그리고 요양체험을 담은 단편 〈피 묻은 편지 몇 쪽〉을 썼다. 노산 선생은 〈추억 도향〉이란 시조를 남겼다.

〈…집에서 거리에서 그대얼굴 볼수없네 / 간지벌써 한해로되 어제런듯 애닯아라 / 벗끼리 모여앉으니 그대자리 비었네. (중략)〉(p22, 8월호)

“최서해, 조선문단의 특이한 존재”(김동인)

김동인이 쓴 〈소설가로서의 서해〉.

1927년 《현대평론》 8월호에 도향을 추모하는 특집을 기획한 이는 서해 최학송(崔鶴松)이다. 당시 그는 《현대평론》의 편집인이었다. 도향의 죽음을 문단적 죽음으로 기획했던 최서해 역시 32세 무렵 도향의 뒤를 따랐다.

1932년 《월간동광(月刊東光)》 8월호에 그를 추모하는 두 편의 글이 실렸다. 서해가 죽은 뒤 한 달도 안 된 시점이었다. 김동인(金東仁)이 〈소설가로서의 서해〉, 김안서가 〈서해여, 핀을 읊었노라〉를 남겼다.

함경도 소작농의 아들인 최서해는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했고 고향마저 떠나 중국 간도를 떠돌았으며 배고픔에 어린 딸을 잃은 그야말로 무산자(無産者)의 표본이었다. 그가 쓴 소설 〈탈출기〉〈홍염〉 등을 ‘빈궁(貧窮)문학’으로 분류할 정도. 김동인은 최서해를 ‘조선문단의 특이한 존재’라고 썼다.

〈…서해 이전의 우리 소설단의 작가들은 모두 인텔리 출신이었다. 그 환경이며 출신지며 재산에는 차이가 있었겠지만 모두 고이고이 자란 학생 출신의 작가들이었다. (중략) 서해는 그 생장부터가 재래(在來) 작가와 달랐다. 빈곤한 환경 아래서 어려서부터 무수한 고생과 쓰라림을 겪은 사람이었다. 중으로 방랑객·아편쟁이·인부(人夫)로, 아사 때문에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존재로, 별별 경력을 다 지닌 사람이었다.…〉(p97, 《월간동광》 8월호)

최서해는 《학지광》《청춘》과 같은 잡지를 읽으며 독학으로 문학과 사회를 공부하고 연구했다고 한다. 서해가 소설을 통해 그리려 했던 당대 조선은 어떤 모습일까.

〈…그(최서해)가 그리는 사회는, 여태 조선 소설작가들이 그리는 사회와 온전히 달랐다. 그가 그리는 사회는 암흑(暗黑)한 사회였다. 굶주림과 병과 아픔과 죄악과 잔혹함과 공포가 막 섞인 사회였다. 유산층(有産層)의 생활만 보던 조선 독자계(讀者界)에서 서해에게 경이(驚異)의 눈을 던지고, 손을 들어서 맞이한 것은 이 소설 안 사회의 신기(新奇)에 고혹됐기 때문이었다. 프로(프롤레타리아)연맹에서 서해를 대장(大將)격으로 맞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p98, 8월호)

소위 동경 유학파 문인들이 어설픈 공산주의 이론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기반한 작품을 쓸 때, 서해는 머슴과 인부와 거지의 체험을 소설로 형상화했다.

〈…학생 출신의 소설작가만 있고 그들이 그 뒤 견문한 ‘암담한 사회’라야 ‘학식’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본 사회에 지나지 못하겠으므로, 역시 철저한 최저계급의 생활을 그리기에는 부족한 조선의 소설단에 있어 최저생활자 출신의 유일인(唯一人)이었던 최서해를 잃는다는 것은 무엇에 비기지 못할 큰 손실이다.…〉(p98, 8월호)

김안서가 최서해를 떠올리며 쓴 〈서해여 핀을 읊었노라〉.

《월간동광》 8월호(〈서해여, 핀을 읊었노라〉)에 안서(岸曙) 김억(金億·1896~미상)은 서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1932년 7월 초닷새로 김억은 기억한다. 의전(醫專)병원(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2층 8호실 문을 열었을 때 최서해는 침대 위에 엎드려 장문의 사신(私信)을 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로가 가득하고 혈색은 대단히 좋지 못했으며, 잠옷 사이로 보이는 다리는 홀쭉 빠진 것이 병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했다’.

김억이 “그래 어떻소?”라고 물으니 최서해는 “암만해도 수술을 받아야 할 모양입니다. 가난병…”이라며 ‘말끝을 멋쩍은 고소(苦笑)’로 맺었다.

김억은 서해의 손에 여자의 머리핀이 쥐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서해의 말이다.

“이 핀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나, 병실 방바닥에 데굴데굴 굴러다니길래 주워서 보관하지 않소. 이 핀 임자가 퇴원할 때 잊어버렸거나, 애인의 병구완을 하다가 그대로 떨어진 것일 수도 있고, 여하간 생각하면 재미있는 핀이 아니겠소? 그래서 보관을 합니다.”

서해는 엉뚱하게도 이런 제안을 했다.

“안서는 이 핀을 두고 시를 쓰시오. 나는 병이 나은 뒤에 고기를 톡톡히 붙여 단편을 하나 써볼 터이니… 하하.”

그날 밤, 어느 여관방에서 잔등(殘燈)을 앞에 두고 김억은 ‘핀’을 재료로 한 편의 시를 썼다.

〈…나와 만났던 그날, 서해는 수술을 받고 피를 토하며 생사의 경계를 헤매던 때라고 합니다. 서해가 쾌차되면 웃음거리 삼아서 이 시를 발표해 볼까 했는데 어인 일입니까! 서해는 이미 이 지상에 없고 이 시를 그의 외로운 영에게 드리지 아니할 수 없는 만가(輓歌)가 되고 말았으니 사람의 생명이란 참말 믿을 것이 못 됩니다.…〉(p100, 8월호)

김억이 쓴 시는 이렇다.

〈…이 핀이 어인 핀인고, 알 길이 없네. / 실비도 사운사운 쓸쓸한 이날 / 외로이 굴러도네, 병실(病室) 구석을. / 인생도 이 같으리, 모두 모를 길 // (중략)

그 지아비 병들어 병에 울을 제 / 그 지어미 까만 밤 하늘 외쳤네. / 설운 맘 풀길없이 네가 도느냐//(중략)

曙海여, 暝目하라. 平安히 가라. / 핀을 두고 후일을 약속한 우리, / 이날에 그대 가니 핀도 잃노라. / 내 노래뿐 외로워 그대를 우네.…〉(p100, 8월호)

양복쟁이 시인 남궁벽

염상섭이 남궁벽을 회상하며 《신천지》에 투고한 산문.

시인 초몽(草夢) 남궁벽도 20대에 요절했다. 《폐허(廢墟)》 동인인 남궁벽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병인적(病因的) 퇴폐성이 짙은 감상의 노래 대신, 생명과 자연의 시를 썼다. 염상섭은 초몽이 죽은 그해 《개벽(開闢)》 12월호와 1954년 《신천지(新天地)》 9월호에 추모의 글을 남겼다.

횡보가 일본 도쿄에서 남궁벽을 처음 만났을 무렵, 그는 어느 일본 상류가정에 머무르며 가정교사 일을 하고 있었다. 횡보보다 세 살 많은 초몽은 “일본 풍습을 연구하려 잠깐 기숙하고 있노라”고 했다.

그런 초몽을 횡보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다고 한다. 초몽이 ‘귀족적, 고답파적(高踏派的)’으로 보였다. 그러나 3·1운동이 있은 뒤 도쿄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선배연(先輩然)’하는 모습은 없었다. ‘원래가 과묵한, 말하자면 새침한 성격에 더욱 겸허한 태도’로 횡보를 대했다.

〈…쌀쌀하고 괴벽하고 여간한 것은 안중에 없고 좋게 말하면 청초하고 결벽이 심한 사람이었으나 성격이 맞지 않을 듯한 나를 만나면 벌써 표정만으로도 심허(心許)하고 좋아하는 눈치였었다.…〉(p144, 《신천지》 9월호)

초몽의 ‘움푹 들어간 눈은 명상적(瞑想的)이었고, 입을 꼭 다물고 말수가 없는 것은 내성적이요, 소극적인 표정이어서’ 남겨진 작품도 과작(寡作)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유난히 의관·음식·거처에 결벽이 심했던 것과 같이 정신생활에도 세속적인 모든 것을 천시하고 청고(淸高)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 (중략) 외모가 쌀쌀한 듯하면서도 속에는 따뜻한 마음을 지녔고 친구와 만나면 말보다는 미소가 많은 사람이었다. 술은 마시지 않으면서도 우리 같은 모주패가 선술집에 들어서면 한번도 마다 않고 의례 따라 들어서는 것이었다.…〉(p146, 9월호)

한번은 《폐허》 동인 몇몇이 술에 취해 광화문을 향해 호기롭게 걷고 있었다. 지척에서 뒤따르던 초봉을 염상섭이 보았다.

〈…말쑥한 양복신사인 남궁 군(君)이 두루마기를 벗어 자기 팔에 걸고 따라오는 것이었다. 주정꾼이기에 옷을 수세미로 만들까 봐 그렇다는 것이었다. 마치 술 취한 영감을 끌고 가는 마누라의 형상이다.

남궁 군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 양복쟁이가 흰 두루마기를 곱게 모시듯 팔에 걸고 걷던 그때 그 모양이 인상적으로 머리에 떠오른다. 남궁 군은 그런 사람이었다.…〉(p146)

초몽이 숨지기 며칠 전, 횡보와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그는 웃는 낯이었다. 횡보가 “무얼 그리 웃느냐”고 물을 제, 초몽은 “아니…”하고 말을 흐렸다. “그럼, 또다시 만납시다”며 건넨 인사가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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