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치도시들 중 제일 먼저 군주국으로 재정비하고 대외 확장을 노린 밀라노
⊙ 밀라노 시내, 걸어서 관광에 나설 수 있을 정도
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밀라노 시내, 걸어서 관광에 나설 수 있을 정도
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밀라노 두오모. 이탈리아의 대표 두오모다. 400여 년에 걸친 작업에도 매우 조화로운 모습이다.
밀라노는 로마 못지않게 오랜 도시다. 2500년 전 알프스를 넘어온 켈트족이 세웠다. 한창때는 이곳을 근거지로 중부 이탈리아에 진출하여 에트루스키(Etruschi)를 몰아내고 로마까지 약탈한 일이 있다. 기원후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지자 서로마제국의 실질적인 수도 노릇도 했다. 기독교 신앙을 공인하는 콘스탄틴의 역사적 칙령을 선포(313년)한 곳도 밀라노였다. 《고백록》의 성 아고스티노(Sant’Agostino·354~430)도 일부러 밀라노를 찾아 성 암브로시오(Sant’Ambrosio·340~396) 대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뒤 서로마가 멸망한 후 수백 년간 이탈리아 반도에선 외족(外族)이 주인공이었다. 유럽의 중원에서 일어선 종족치고 다녀가지 않은 종족이 없을 정도다. 침입해 온 세력이나 구원(?)해 준 세력이 모두 외족이다. 고트족을 비잔틴이 몰아낸 후 비잔틴은 롬바르드족에 밀려났으며 롬바르드는 다시 프랑크 왕국의 페팽(샤를마뉴의 부친)이 와 평정했다.
이러한 춘추전국 상황을 최종적으로 정돈한 이가 독일의 오토 1세(Otto I·912~973)다. 작센 출신으로 독일 왕에 오른 오토는 샤를마뉴의 로마 황제 대관(800, 로마)을 본받아 962년 로마에 행차해 교황 요한 12세의 집전 아래 신성로마황제에 오르는 것이다.
이후 이 신성로마황제라는 주술적 명칭의 마력과 함께 이탈리아 특유의 풍요로운 문화와 물산이 지닌 매력은 역대 독일 왕들의 이탈리아에 대한 ‘관심’의 원천이 되었다. 이탈리아 중세사(中世史)의 설명에 큰 배경을 이루는 황제파-교황파(Ghibellini vs Guelfi) 간 대립이 시작된 것도 이때다.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대소 도시들이 동시다발로 흥기(興起)한다. 밀라노, 파비아, 베르가모, 브레시아, 피아첸차, 크레모나, 파르마, 베로나, 파도바, 볼로냐, 만토바, 모데나 등등 포(Po)강 일대의 자치도시들이 선도하고 머지않아 아펜니노 산맥 너머 피사, 시에나, 피렌체, 아레초 등 토스카나의 도시들도 일어선다. 이탈리아 반도가 모처럼 다시 한 번 유럽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무대가 조성된 것이다.
밀라노 시대를 연 잔갈레아초
그중에도 밀라노의 성장은 빨랐다. 자치도시들이 일어선 배경은 상업의 발전이었고 상업은 본래 밀라노의 강점이었다. 밀라노는 고대 이래 로마와 알프스 이북 지역 간 교역 루트의 연결점이었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하는 전초지였다.
밀라노의 위치를 지도로 한번 확인해 보라. 도시 남쪽의 포강이 서로는 토리노, 동으로는 만토바, 페라라를 거쳐 아드리아에 이른다. 북으로는 마조레 호수와 코모 호수가 물길로 알프스를 지나고, 두 호수에서 각각 발원한 티치노강과 아다강이 밀라노의 좌우를 감싸고 흘러 포강에 합류한다. 밀라노가 항구가 아니면서 항구 이상의 이점이 있고 롬바르디아가 해안선이 없으면서 사통팔달의 물길로 오히려 불편이 없는 것이다. 사실 물길이 아니라도 북에 가로놓인 알프스에는 고대부터 발달한 고갯길들이 여럿 있어 교역은 물론 대형 ‘침입’에도 별다른 지장이 없었음은 한니발 이래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다.
자치도시들 중에 제일 먼저 군주국으로 재정비하고 대외 확장을 노린 것도 밀라노였다. 일찍이 13세기 중반 비스콘티(Visconti) 가문은 숙적 델라토레 가문을 누르고 군주제를 확립해 비스콘티 시대(1277~1447)를 열었다. 특히 잔갈레아초(Gian Galeazzo Visconti·1351~1402) 시절의 밀라노는 해상무역에 치중하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반도 남단의 섬 시칠리아 왕국을 빼면 이탈리아 본토에서 최강이었다.
잔갈레아초는 이 세상에 돈 버는 일 말고도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사람이다. 동으로 베로나를 점령, 파도바를 위협했고 남으로는 아펜니노를 넘어 피렌체에 육박했다. 이 두 공화국은 이때부터 큰돈을 투자해 좋은 용병대장 구하는 일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서구 최고의 화려함이라던 파비아의 비스콘티(Castello Visconteo) 궁에 살며, 호사스럽기로 교회 중 최고라는 밀라노 두오모를 착공하고 아름답기로 수도원 중 최고라는 파비아 수도원(Certosa di Pavia)을 지어 오늘 우리에게 즐거운 볼거리들을 남겨주었다. 1385년 공작(公爵) 자리도 챙겨 밀라노를 일찌감치 공작령(Ducato)으로 유럽 지도에 자리매김한 인물이었다.
밀라노에 가면 콘스탄틴 황궁의 유허(遺墟)와 초기 교회 등 고대를 비롯해 비스콘티, 스포르차(Sforza)들의 중세, 르네상스 유산들도 좋지만, 밀라노의 큰 매력은 그 현대성(modernity)에 있다. 상업이란 것이 본래 국경은 물론 시대도 모르는 것이어서 밀라노의 상업 재간이 여전히 위력적인 소이다.
밀라노의 상업 전통은 오늘에도 패션, IT, 디자인, 미디어, 문화, 레저, 쇼핑으로 이어져 밀라노 여행에 활기를 준다. 라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의 음악, 산 시로(San Siro) 경기장의 축구, 셈피오네 공원(Parco Sempione)의 휴식, 스피가 길(Via della Spiga)의 쇼핑뿐이 아니다. ‘현대성’ 분석으로 유명한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베냐민(Walter Benjamin·1892~1940·독일의 평론가·철학자)이 설파한 ‘궂은 날 오가는 사람 구경’에는 두오모 곁에 있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갈레리아(Galleria di Vittorio Emmanuelle)만 한 곳이 없다. 이제 밀라노 시내부터 시작해 그 주위 롬바르디아의 작고 예쁜 도시들 몇 곳을 돌아보자. 작지만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는 큰 마을들이다.
두오모 광장에서 스포르차 성까지
밀라노는 대도시다. 하지만 볼 만한 곳들이 비교적 서로 멀지 않아 조금 단단한 신발과 시간만 있으면 걸어다녀도 그만이다.
우리는 두오모에서 시작하자. 남녀노소 불문하고 밀라노의 두오모 광장에 섰던 이라면 이 교회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흥을 잊지 못할 것이다. 정면을 잠시 응시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미적 체험이다. 다양한 양식과 장식들이 각기 최적의 조형을 잃지 않으면서도 건축적 하나(architectonic whole)를 문제없이 이루어냈다. 빅토리아 시대를 풍미한 영국의 미술비평가 러스킨(John Ruskin)의 자못 인색한 평가가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잔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시작해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 대관식을 위해 서둘러 마무리할 때까지 400여 년에 걸친 작업이었다. 당대 최고의 거장들이 참여하고 개성 있는 역대 공작과 총독과 주교들이 참견하고도 궁극에 이런 작품이 결과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선 클래식과 고딕의 조화가 성공적이다. 대소 첨탑과 입상들은 물론 뾰족한 아치의 창문과 벽감 등 위로 솟는 모양의 장식 일체는 고딕이지만 이 고딕 요소들을 받치고 감싸고 있는 장식들은 고전(古典)에서 취한 것이다. 늘씬하고 정교하지만 자칫 날카롭고 어지러울 수 있는 고딕이 클래식의 안정과 균형을 얻어 하나의 장대한 보석 세공이 탄생했다. 셸리(Shelley) 같은 감성의 시인도 달리 형용할 말을 잃고 “내가 본 최고 예술품 중 하나”라고만 했고, 해학의 대가 트웨인(Mark Twain)은 “성베드로 교회 다음이라니 이런 건물이 어떻게 2등일 수 있느냐”고 한마디 했다. 결이 고운 재질의 흰 대리석은 최근 열심히 닦고 보수해 더욱 말갛게 빛난다.
정면을 보며 울렁이던 마음은 안에 들면 완벽한 고요함 덕에 즉각 평정을 회복한다. 거대한 대리석주들이 임립(林立)해 측랑(側廊)들을 가르고 천장을 찌르는 사이사이로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한 채광(彩光)이 영롱하다.
양감(量感)에 압도되어 위만 쳐다보면 산재한 볼거리를 놓치기 쉽다. 입구 오른쪽으로 제일 먼저 오토네 비스콘티(Ottone Visconti·1207~1295)의 묘소가 눈에 띈다. 밀라노 대주교이자 비스콘티 시대의 창업자로 오늘날 밀라노 도시 미관의 기초를 놓은 이다. 그 조금 옆에 밀라노 칙령(313년)을 기념한 플라크가 있고 제단 쪽으로 조금 더 가면 성 바르톨로메오(San Bartolomeo)를 묘사한 16세기 조각 입상의 리얼리즘이 처연(悽然)하다. 피부를 벗기는 형벌로 순교한 성인이 벗겨낸 자신의 살껍질을 목에 두르고 모든 혈관과 힘줄을 선연히 드러낸 채 무심히 선 모습이다. 두오모 지하(cripta)도 빼놓을 수 없다. 꽤 널찍한 고대 로마 유적지 한편에 4세기의 팔각 세례당 자리가 뚜렷하다. 기원 387년 성 암브로시오가 성 아고스티노를 세례한 종교사적 자리다.
스포르차 성(Castello Sforzesco)은 두오모 광장 앞 곧은길로 500m쯤 가면 있다. 정사각형의 단정한 모양이 중세 성채들의 복잡한 구조와 달리 자못 현대적 느낌이다. 한가운데 우뚝한 필라레테(Filarete) 탑이 인상적인 원조 ‘밀라노 디자인’이다. 비스콘티 시절 군사용 성채로 쓰던 것을 스포르차(Francesco Sforza·1401~1466)가 거주 겸용으로 개조한 것이다.
스포르차는 누구인가? 용병대장으로 입신해 비스콘티 가문이 후사가 끊기자 곡절 끝에 이어받아 밀라노의 제2 전성기를 연 전설적 무인이요 군주다. 콜레오니(Bartolomeo Colleoni), 곤차가(Ludovico Gonzaga)들을 휘하에 두었었고 피렌체 공화국의 국부 코시모 메디치와 절친한 관계였다. 한때 리구리아(Liguria: 제노바, 사보나 등 리비에라 해안 일대)까지 진출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에 자기 사람을 통령으로 세울 정도의 위세를 떨친 이다.
부르크하르트는 그의 명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1860)》에서 “배신과 파렴치로 점철된 르네상스 용병대장사에 무용과 인망을 겸전하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라고 치켜세웠다.
역시 용병대장이었던 아버지에게 받았다는 세 가지 지침은 너무 간결해 더욱 금석같이 느껴진다. 남의 아내에게 손대지 말고, 아래 병사를 때리지 말고, 고집 센 말을 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 그림을 벽화로 갖고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스포르차 성은 오늘날 밀라노 시유(市有) 미술품들의 전시공간이다. 회화미술관, 조각박물관, 고대박물관들의 방대한 소장이 건물 자체를 장식한 프레스코, 부조, 조각들과 함께 두루 볼 만하다. 롬바르디아 화가들도 나쁘지 않지만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브론치노(Bronzino), 로토(Lorenzo Lotto)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초상화들이 반갑다.
조각박물관 맨 끝 방의 한구석에 홀로 조각상이 하나 서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론다니니(Pieta Rondanini·1564)>.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으로 아흔 살이 다 되어 세상을 뜨기 며칠 전까지 작업하던 것이란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뒤에서 부축하는 성모의 슬픔을 오히려 그리스도가 위로하려는 듯한 형상이다. 건축, 그림, 조각을 넘나들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뿜던 천재 미술가의 쇠약해진 마지막 손길이 느껴져 마음이 슬프다.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미켈란젤로가 젊은 시절 만든 바티칸의 <피에타> 앞에 구름같이 모여선 사람들의 광경이 겹쳐지며 새삼 호사하는 느낌이다. 지난 1950년대 모처럼 시장에 나온 것을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하나도 없는 밀라노로서 시(市)가 직접 나서 어렵사리 장만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교회는 스포르차 성에서 도보로 멀지 않다. 부속 수도원의 식당(cenacolo) 한쪽 벽에 그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의 벽화 <최후의 만찬>으로 더욱 유명한 교회다. 르네상스의 새로운 지평(地平)조차 레오나르도가 가진 무변(無邊)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감당하기에는 오히려 비좁았던 모양이다. 메디치, 스포르차, 보르자, 율리우스 교황 등을 전전하던 레오나르도는 결국 이국의 왕 프랑스와 1세에 의탁해 쓸쓸한 말년을 마감했다. 밀라노는 그중 레오나르도가 제일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67년 생애에 장년기 20여 년을 밀라노에서 살고 일했다. 그중에도 동갑이던 루도비코 일 모로(Ludovico il Moro·1452~1508,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둘째 아들로 1489~99년 밀라노 공작)가 불러주어 함께 일했던 1482년부터 17년간이 레오나르도로서는 아마 가장 보람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최후의 만찬>은 이 시기에 그것도 장장 3년에 걸쳐 완성되었다(1495~97).
워낙에 사연 많고 곡절 많은 그림이다. 수많은 세월과 전화(戰火)와 공해의 영향뿐 아니라 몇 차례의 미숙한 복원은 <최후의 만찬>을 실존의 위기에 몰아넣었다. 미숙한 복원 전에 한 차례 눈물의 복원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수도원 건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잔해더미에서 대소 벽화 조각들을 하나하나 수습해 복원했다는 얘기다. 기가 막힐 일이다. 이탈리아 정부의 획기적 결정으로 지난 1977년부터 1999년까지 수도원 문을 걸어잠그고 20여 년에 걸친 대대적인 복원이 단행됐고 오늘 우리는 이 그림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보통 그림이 아니니 조금 자세히 보고 가자. <최후의 만찬>은 수도사들이 식사하는 장방형 공간의 한쪽 벽면에 그려져 마치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가 멀찍이 헤드테이블에 앉아 우리 쪽을 보며 함께 식사하는 듯한 기발한 구도다. 그리스도 머리 위 그림 속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실제 식당 공간을 비추고 왼쪽 벽면의 실제 창문으로 들어온 빛은 그림 속 테이블을 비춘다. 그림의 상황은 아연 긴장과 동요의 순간이다. 좌중의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폭탄 선언에 대한 사도들의 반응과 현장의 동요가 여실하다. 열두 제자를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나누어 동요가 무질서가 되지 않도록 관리했다. 그리스도로 집중되는 원근법의 구심(求心)과 좌중의 역동성이라는 원심(遠心)을 동시에 살린 것이다. 이차원의 그림을 본다기보다 하나의 연극 공연에 참관한 느낌이다. 구도, 재료, 빛, 색채, 원근법, 도상학 등 측면에서 시간이 걸리고 복잡한, 레오나르도가 아니면 시도할 이가 없는 과거와의 창조적 결별이다. 늘 ‘보편적 해결’에 골몰해 온 레오나르도가 자신의 생각을 알아주는 후원인을 만나 모처럼 시간을 갖고 필생의 작업을 시도한 듯하다.
산탐브로시오 교회
맞은편 벽면에 몬토르파노(Monto rfano)의 프레스코 <예수 십자가형(1495)>도 좋은 그림인데 주연 앞에 조연이라 많은 이가 눈여겨보지 않는다. 식당을 나오면 브라만테(Donato Bramante·1444~1514, 로마 성베드로 교회의 원설계자)의 키오스트로(chiostro·정원회랑)를 잠시 거닐며 역시 그가 만든 쿠폴라(cupola·원형지붕)를 꼭 한번 올려다보자.
이제 근처에 있는 산탐브로시오 교회(Basilica di Sant’Ambrosio) 하나만 더 보고 다시 구도심 쪽으로 가자. 4세기 성 암브로시오 시절 짓고 9~12세기에 증축했다는데 초기 교회 시절의 흔적을 제법 많이 갖고 있어 반가운 교회다. 입구의 아트리움(atrium)을 둘러싼 열주와 아치들(arcade)이 깨끗하고 정면의 양쪽을 지켜선 종탑(campanile)이 시원하다. 9세기 카롤링거 왕조의 솜씨라는 중앙제단의 금박 장식과 산 비토레(San Vittore) 경당을 장식한 5세기 모자이크는 산탐브로시오의 보물들이다. 제단 아래 지하공간(cripta)에 성 암브로시오의 유해가 모셔진 것은 당연하지만, 본당 한편에 스틸리코(Flavius Stilicho·359~408, 서로마 말기 테오도시우스 시절의 명장)의 석관(sarcofago)과 신성로마황제 루이(Louis II·825~875)의 묘소까지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한 역사가 얽힌 교회였을 것이다.
브레라 미술관과 20세기 박물관
밀라노에는 박물관, 미술관들이 교회만큼이나 많다. 그중에도 브레라 미술관(Pinacoteca di Brera)이 1번이다. 브레라는 도심인데도 여유있는 문화적 분위기에 젊은이들이 많은 동네라 밀라노의 몽파르나스라고 불린다. 미술관이 들어 있는 17세기 건물에는 브레라 미술 아카데미를 비롯해 밀라노시와 롬바르디아주의 문화기관, 예술단체들이 같이 입주해 있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르네상스의 그림들이 주력인데, 바티칸 박물관은 빼고, 아마 피렌체의 우피치 다음쯤일 것이다.
근처의 폴디 페촐리 박물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밀라노에서는 대표적인 하우스 뮤지엄(house museum)으로 미술품뿐 아니라 가구, 태피스트리, 도자기, 공예품들이 수집가가 살던 실제 생활공간에 그대로 배치·전시되어 있어 흥미롭다. 롬바르드 화파, 특히 볼트라피오(Boltraffio), 루이니(Bernardino Luini) 등에 레오나르도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다.
암브로시오 미술관(Pinacoteca Ambrosiana)은 두오모 쪽으로 좀 걸어가야 있다. 말이 미술관이지 박물관에 도서관을 합친 것 이상이다. 유명한 성 카를로(San Carlo)를 배출하였고, 밀라노 나아가 롬바르디아 일대에 많은 유·무형의 유산을 남긴 보로메오(Borromeo) 집안의 밀라노에 대한 기여다. 5세기 《일리아드》의 필사본, 14세기 《신곡》의 초기본 등은 일부 예에 불과하고, 스케치, 필사 초본, 세밀 드로잉 등 레오나르도의 기록물(코디체 아틀란티코·codice atlantico) 전시가 인상적이다.
이제 교외로 나가기 전에 한 군데만 더 들르자. 두오모 곁에 개관한 지 불과 몇 년 안 된 20세기 박물관(Museo del Novecento)은 밀라노의 새로운 명소다. 중세 건물을 멋들어지게 재활용했다. 밀라노가 태생인 미래주의(Futurismo) 그림과 조각들이 강점이지만 데키리코(Giorgio de Chirico), 모란디(Giorgio Morandi), 폰타나(Lucio Fontana)도 좋은 것들이 많다.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도 여럿 있다. 좁은 타워(torre)형 건물 가운데 층(層)을 관통해 조성한 나선형 접근로(ramp)를 오르내리며 3개 벽면에서는 20세기 미술을 감상하고 나머지 한쪽 유리 벽면으로는 두오모 광장의 파노라마를 즐기는 재미가 새롭다. 역시 현대성은 밀라노의 강점이다.
일 모로의 마구간
밀라노에서 토리노 쪽으로 반 시간 남짓 달리면 티치노(Ticino)강을 건너자마자 비제바노(Vigevano)다. 레오나르도와 브라만테를 불러들인 루도비코 일 모로의 고향이다.
일 모로의 고향답게 마을의 중심 광장인 피아차 두칼레(Piazza Ducale)는 르네상스 광장 중에도 명품으로 꼽힌다. 장방형 광장의 좁은 면 하나를 두오모의 정면이 차지하고 나머지 3면은 포르티코(portico)와 아케이드로 둘러친 저택들인데 지붕의 굴뚝들마저 마치 밀라노 두오모의 피너클 장식처럼 한껏 멋을 부렸다. 거기에 저택들 벽면을 메운 프레스코 장식과 광장 바닥 채색 석재를 활용한 무늬까지! 후손들마저 ‘조상의 얼’을 살려 가로등과 화단을 어울리게 마무리해 놓았다. 발 디디고 다니기가 황송할 지경이다.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가 와보고 “4각의 교향악(una sinfonia su quattro lati)”이라 감탄했다 한다. 광장 한편의 높직 늘씬한 ‘브라만테 타워(Torre di Bramante)’ 쪽에 있는 통로를 지나면 일 모로가 거처하던 성채다. 응접실 격인 피아차 두칼레에 감탄한 밀라노 공작의 손님들이 기가 죽을 만한 호화 성채다.
대리석 기둥이 즐비한 마구간(scude ria)은 말 1000마리를 수용하는 규모란다. 마구간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신발 박물관(Museo della Calzatura)도 볼 만하다. 고금 남녀의 각종 신을 것들이 흥미롭게 전시되어 있다.
교황 피우스 11세가 신던 슬리퍼를 접했을 때는 문득 일전에 들은 얘기가 생각나 혼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음모와 암투가 교황청의 일상사이던 시절 교황을 모시는 이들 중에 제일 중요한 사람이 ‘슬리퍼 담당 비서관(pantofolaio)’이었다는 얘기다. 왜냐 물었더니 간밤에 교황이 확실히 살아서 잠자리에 들었는지 알 이는 침상에 오르며 벗어놓은 슬리퍼를 간수했던 ‘슬리퍼 비서관’뿐이라는 설명이었다.
파비아(Pavia)는 비제바노에서 지척이다. 크지는 않아도 역사와 문화로 꽉 찬 마을이다. 이탈리아 반도를 200여 년 석권했던 외족 롬바르드 왕국의 도읍지였고, 볼로냐대학과 더불어 유럽 최고(最古)의 대학으로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수학했던 파비아대학이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고향으로 미술사 특히 건축사 공부하는 이들 사이에선 필수 순례지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롬바르디아의 운명을 가른 신성로마황제 카를로 5세와 프랑스 왕 프랑스와 1세 간 회심의 일전의 현장(파비아 전투·1525)이었다. 옛 정취 은은한 파비아의 구도심은 그 단정한 모습이 지난 2000년 역사의 한복판에 섰던 자신의 과거에 시침 떼는 듯하다. 비스콘티 성 역시 엄청난 역사의 격랑을 잊은 채 평화롭기 그지없다.
파비아 수도원
구도심도 좋지만 파비아의 진짜 자랑은 파비아 수도원(Certosa di Pavia)이다. ‘체르토사’는 시토회 소속의 수도원을 이른다. 잔갈레아초 비스콘티가 밀라노 가족묘소 겸용으로 짓기 시작해 루도비코 스포르차(일 모로) 때까지 70여 년이 걸렸다. 정면 장식을 보니 건축 기간 중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유행하던 양식들이 두루 반영되어 정교한 단계를 지나 복잡하고 어지러운 지경이다. 묵직한 로마네스크로 시작해 알프스를 넘어온 고딕 스타일의 화려함이 얹혀지고 명장(名匠) 아마데오(Giovanni Antonio Amadeo)의 정중한 르네상스로 마감되었다는 설명이다. 각 양식의 요소들이 정면 각 층에 뚜렷해 양식사 교재로 좋을 듯하다.
안에 들어서면 수랑(袖廊·transetto)의 양끝에 각각 비스콘티와 스포르차가 잠들어 있다. 잔갈레아초의 준수한 묘소는 적당히 화려하고 상당히 장엄하다. 일 모로의 것은 부부가 나란히 누워 잠든 모습의 대리석 조형으로 영면(永眠)이 아니라 잠시 오수(午睡)에 든 듯 생생한 솜씨의 석관(石棺) 장식인데 주변 마무리가 어째 좀 부실하다. “일 모로의 생전에 이미 제작을 시작한 석관인데 프랑스의 침입의 와중에 젊은 부인의 베개 등이 미완성으로 남고 약탈된 기단 부분은 대체 석재로 대강 받쳐놓은 것이 500년 지난 오늘까지 그대로 왔다”며 훤칠, 박식, 다변의 안내 신부가 마음 아파한다. 게다가 일 모로의 진짜 시신은 이국 땅 프랑스에 잡혀간 뒤 그곳에 묻혀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우리 역사 대원군의 생각이 나며 갑자기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다.
일 모로의 부인 베아트리체 데스테(Beatrice d’Este)는 페라라 공작의 딸로 르네상스기 신여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이사벨라 데스테(Isabella d’Este)와 친자매 사이다. 열일곱 나이에 스무 살도 더 차이 나는 신랑에게 시집와 22세에 죽었다. 이들 자매는 율리우스 교황에 맞서 세 번째 시댁(媤宅) 페라라를 용감히 지켰던 보르자 집안의 여걸 루크레치아(Lucrezia Borgia·1480~1519)와 시누이, 올케 사이다.
독자성을 잃지 않은 베르가모
수랑 양끝 각각의 묘소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같은 솜씨의 두 프레스코가 눈에 띈다. 하나는 잔갈레아초가 수도원의 모형을 성모에게 헌정하는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성모를 경배하는 일 모로의 가족 초상화다. 롬바르드 르네상스의 거장 베르고뇨네(Bergognone·1450~1523) 작이다. 레오나르도가 오기 전에도 롬바르디아에 인물이 없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아니나 다를까 필자가 파비아 수도원에 페루지노(Perugino)의 그림이 하나 있다던데 어디 있느냐고 묻자 애향심 넘치는 신부의 해설이 길어진다. “페루지노가 외지에서 흘러와 그려놓은 것이 저기 어디 있는데 굳이 가서 볼 만한 것은 아니고… 사실 페루지노나 라파엘, 미켈란젤로들이 여기저기 옮겨 살며 유명한 장소에 그린 것들이 많이 알려져 그렇지 그림 솜씨로는 베르고뇨네나 포파(Vincenzo Foppa·1427~1515)에 못 미친다”는 요지다.
중앙에 성가대 열석(列席)의 목상감(木象嵌) 장식에 감탄하며 후진(apside) 옆의 쪽문을 나서니 널찍한 키오스트로의 정원이 아무런 수목 없이 푸른 잔디만으로 검소하다. 나직이 둘러싼 아케이드를 따라 각기 소(小)정원과 굴뚝, 우물을 별도로 갖춘 수사들의 개별 독방 24채가 정연하다. 최대한의 침묵 수행을 돕기 위한 시토회의 규칙에 따른 설계란다. 식사도 공동식당(cenacolo)이 따로 없고 독방마다 배식구가 있어 한쪽에서 식기를 놓고 돌리면 다른 쪽은 막혀 있어 식기만 주고받지 대화는 고사하고 서로 얼굴도 볼 수 없이 되어 있다. 출구 근처 어디에 있다는 페루지노의 그림은 결국 못 보고 나왔지만 눈과 정신의 호사는 이미 과객(過客)의 기대치를 많이 지나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지만 베르가모(Bergamo)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밀라노와 마찬가지로 로마가 오기 훨씬 전에 켈트족이 세운 도시다. 11~13세기 자치도시 시절이 전성기지만 그 뒤 번갈아 밀라노 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하에 든 뒤에도 독자성을 잃지 않았다. 우선 도시 자체가 명품이다. 언덕 위의 구도심과 산기슭의 신시가지를 유기적으로 연결한 모범사례로 꼽힌다. 구도심 광장(Piazza Vecchia)은 스탕달이 특히 좋아했던 곳이다. 두오모는 상대적으로 무명이지만 그 건너편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와 콜레오니 경당(Cappella Colleoni)은 비범하다.
콜레오니는 베르가모 태생으로 용병대장으로 입신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사령관(Capitano Generale)을 지낸 이인데 이곳 가족경당에 묻혀 있다. 베네치아의 자니폴로 교회 앞에서 베로키오가 만든 기마상으로 만났던 일이 있다. 내부도 그렇지만 경당 정면의 대리석 장식이 대단하다. 파비아 수도원의 정면을 마감한 아마데오의 솜씨다. 오페라 작곡가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1797~1848)도 베르가모 태생으로 경당과 연결된 산타 마리아 마조레에 묘소가 있다.
신시가지에 새로 단장해 개관한 15~18세기 이탈리아 미술의 보고 아카데미아 카라라(Accademia Carrara)도 잊지 말자. 인구 10만여 도시에 이 정도 미술관이 있다는 것은 우리로서 상상이 쉽지 않지만, 이탈리아의 지방 도시들에 가면 드물지 않은 일이다. 그곳 출신 인물들이 필생의 컬렉션을 운영 방향의 대강만을 정해, 간혹 전시할 건물까지 함께, 시(市)에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는 그 지방의 중소 컬렉션들을 합쳐서 시립박물관(Musei Civici)을 꾸리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이탈리아의 강점이고 자치도시의 뿌리 중의 하나다. 굳이 ‘균형발전위원회’의 지원이 필요없는 것이다. 보티첼리가 그린 줄리아노 메디치(대 로렌초의 친동생으로 1478년 팟치가의 모반 때 피살)의 초상 등 유명한 르네상스 초상화들이 많고 예의 베르고뇨네를 비롯한 롬바르디아 화파의 그림들이 좋다.
스위스 국경 쪽의 알프스 산록 호수들
롬바르디아 일대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 중의 하나가 스위스와의 국경 쪽에 연해 있는 알프스 산록의 호수들이다. 마조레, 코모 외에도 루가노, 오르타 등 이들 ‘호수 지역(Regione dei Laghi)’은 유럽인들이 마음에 그리는 점잖은 휴양지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눈 덮인 알프스 연봉의 절경이 바로 머리 위인데 기후는 일부 아열대 식물이 자라는 지중해성이다. 소위 ‘온화한 예외기후(mild micro-climate)’다. 밀라노에서 특히 가까운 코모 호수(Lago di Como)는 유럽 대륙에서 올리브가 열리는 북방한계선이다.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오(Plinio) 부자가 살았고 역사적으로 비스콘티, 보로메오 등 밀라노 유력 가문들의 독점 휴양지였던 이 일대가 유럽에 널리 소개된 계기는 역시 나폴레옹 전쟁이다. 제네바-밀라노 간 도로의 핵심구간인 심플론 고갯길(Simplon Pass·이탈리아 말로 Passo del Sempione)도 나폴레옹이 군사 목적으로 닦은 길이다.
전에 없던 규모의 큰 전쟁 후 입소문이 나고 길까지 놓였으니 변화가 없을 리 없다. 벨라조(Bellagio)가 제일 유명해졌지만 푸른 물, 푸른 숲, 푸른 하늘과 일 년 사시 다채로운 꽃들, 예쁜 빌라, 정겨운 마을들은 전 호반(湖畔)에 공통이다. 일찍이 1837년 리스트(Franz Liszt)가 밀월여행을 왔다가 아예 눌러 살며 고명딸 코시마(Cosima)를 얻고 단테 소나타를 남긴 이래 수많은 문학, 음악, 미술, 영화의 무대가 되었고, 수년 전에는 신(新) 007 대니얼 크레이그(<카지노 로얄>)가 이곳 예쁜 빌라의 호반 정원에 불쑥 나타나 한 혐의자를 재판 없이 처단하기도 했다.
벌써 밀라노로 돌아가 떠나야 할 시간이다. 몬차(Monza)는 가는 길에 있지 않아도 한번쯤 들러야 할 곳이다. 바바리아 공작의 딸로 롬바르드 왕비가 된 테오델린다(Theodelinda·570~628)는 몬차의 대모(代母) 같은 존재다. 일찍이 롬바르드 왕에게 시집와 로마의 대(大) 그레고리오 교황(Gregorio Magno·590~604 재임)과 교분을 맺고 로마와 롬바르드 왕국 간의 평화를 주선했을 뿐 아니라 남편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왕의 개종은 온 나라의 개종을 뜻하던 시절, 전 롬바르디아가 기독교도가 된 것은 전 세기 프랑크 왕 클로비스(Clovis)의 개종에 비견할 일이다. 몬차의 근사한 두오모는 테오델린다 왕비의 지원으로 세워졌다. 골목길을 지나와 몬차 두오모의 정면과 마주하는 경험은 오르비에토(Orvieto)의 경우에 방불하다.
이탈리아 王의 鐵冠
내부는 더욱 놀랍다. 온통 프레스코 그림과 부조(bas-relief) 장식의 석조 패널로 뒤덮여 빈 공간이 없을 정도의 호화판이다.
이 두오모에 보물이 많지만 그중의 제일은 ‘철관(鐵冠·Corona di Ferro)’이다. 중앙제단 곁 성보함(reliquario) 안에 있다. 롬바르드 왕의 관(冠)으로 시작한 이 철관은 그 뒤 샤를마뉴도 쓰고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도 쓰고 단테가 이상적 군주로 기려 마지 않던 하인리히 7세도 와서 써 이탈리아 왕의 상징처럼 되었다.
실제는 철관이라기보다 에나멜과 보석으로 장식한 원형 금관인데, 관의 안쪽으로 좁고 납작한 철심이 덧대어져 있다. 전승인즉, 이 철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 쓰였던 못 중의 하나(Holy Nail)로 콘스탄틴 대제의 황모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왕관이자 지귀(至貴)한 성보(聖寶)인 셈이다. 이런 상징성으로 해서 1805년 나폴레옹도 점령지 밀라노의 두오모의 공사를 서둘러 마치고 이 ‘철관’을 대관하고 나서야 자족했던 것이다.
말펜사(Malpensa) 공항에서 바라보는 알프스 연봉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탈리아에 북쪽의 이 연봉은 역사적으로 장벽이기보다 통로였다. 켈트가 됐건 고트가 됐건 프랑크가 됐건 게르만이 됐건 산 너머 드센 세력들의 ‘관심’과 영향하에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밀라노를 포함한 롬바르디아는 신성로마황제의 강한 영향하에 있었고 그 여파는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한 합스부르크의 지배로 이어져 통일까지 지속됐던 것이다.
이제 역사적 부침은 과거지사가 됐고 밀라노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일부로 안착했다. 그 굴곡의 과정에서 밀라노와 롬바르디아가 ‘치살피노(cisalpino·‘알프스 이쪽’의 뜻)’의 훌륭한 전통에 ‘올트랄피(oltralpi·‘알프스 저쪽’의 뜻)’의 앞선 시스템을 겸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뒤 서로마가 멸망한 후 수백 년간 이탈리아 반도에선 외족(外族)이 주인공이었다. 유럽의 중원에서 일어선 종족치고 다녀가지 않은 종족이 없을 정도다. 침입해 온 세력이나 구원(?)해 준 세력이 모두 외족이다. 고트족을 비잔틴이 몰아낸 후 비잔틴은 롬바르드족에 밀려났으며 롬바르드는 다시 프랑크 왕국의 페팽(샤를마뉴의 부친)이 와 평정했다.
이러한 춘추전국 상황을 최종적으로 정돈한 이가 독일의 오토 1세(Otto I·912~973)다. 작센 출신으로 독일 왕에 오른 오토는 샤를마뉴의 로마 황제 대관(800, 로마)을 본받아 962년 로마에 행차해 교황 요한 12세의 집전 아래 신성로마황제에 오르는 것이다.
이후 이 신성로마황제라는 주술적 명칭의 마력과 함께 이탈리아 특유의 풍요로운 문화와 물산이 지닌 매력은 역대 독일 왕들의 이탈리아에 대한 ‘관심’의 원천이 되었다. 이탈리아 중세사(中世史)의 설명에 큰 배경을 이루는 황제파-교황파(Ghibellini vs Guelfi) 간 대립이 시작된 것도 이때다.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대소 도시들이 동시다발로 흥기(興起)한다. 밀라노, 파비아, 베르가모, 브레시아, 피아첸차, 크레모나, 파르마, 베로나, 파도바, 볼로냐, 만토바, 모데나 등등 포(Po)강 일대의 자치도시들이 선도하고 머지않아 아펜니노 산맥 너머 피사, 시에나, 피렌체, 아레초 등 토스카나의 도시들도 일어선다. 이탈리아 반도가 모처럼 다시 한 번 유럽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무대가 조성된 것이다.
밀라노 시대를 연 잔갈레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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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갈레아초 비스콘티. |
밀라노의 위치를 지도로 한번 확인해 보라. 도시 남쪽의 포강이 서로는 토리노, 동으로는 만토바, 페라라를 거쳐 아드리아에 이른다. 북으로는 마조레 호수와 코모 호수가 물길로 알프스를 지나고, 두 호수에서 각각 발원한 티치노강과 아다강이 밀라노의 좌우를 감싸고 흘러 포강에 합류한다. 밀라노가 항구가 아니면서 항구 이상의 이점이 있고 롬바르디아가 해안선이 없으면서 사통팔달의 물길로 오히려 불편이 없는 것이다. 사실 물길이 아니라도 북에 가로놓인 알프스에는 고대부터 발달한 고갯길들이 여럿 있어 교역은 물론 대형 ‘침입’에도 별다른 지장이 없었음은 한니발 이래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다.
자치도시들 중에 제일 먼저 군주국으로 재정비하고 대외 확장을 노린 것도 밀라노였다. 일찍이 13세기 중반 비스콘티(Visconti) 가문은 숙적 델라토레 가문을 누르고 군주제를 확립해 비스콘티 시대(1277~1447)를 열었다. 특히 잔갈레아초(Gian Galeazzo Visconti·1351~1402) 시절의 밀라노는 해상무역에 치중하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반도 남단의 섬 시칠리아 왕국을 빼면 이탈리아 본토에서 최강이었다.
잔갈레아초는 이 세상에 돈 버는 일 말고도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사람이다. 동으로 베로나를 점령, 파도바를 위협했고 남으로는 아펜니노를 넘어 피렌체에 육박했다. 이 두 공화국은 이때부터 큰돈을 투자해 좋은 용병대장 구하는 일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서구 최고의 화려함이라던 파비아의 비스콘티(Castello Visconteo) 궁에 살며, 호사스럽기로 교회 중 최고라는 밀라노 두오모를 착공하고 아름답기로 수도원 중 최고라는 파비아 수도원(Certosa di Pavia)을 지어 오늘 우리에게 즐거운 볼거리들을 남겨주었다. 1385년 공작(公爵) 자리도 챙겨 밀라노를 일찌감치 공작령(Ducato)으로 유럽 지도에 자리매김한 인물이었다.
밀라노에 가면 콘스탄틴 황궁의 유허(遺墟)와 초기 교회 등 고대를 비롯해 비스콘티, 스포르차(Sforza)들의 중세, 르네상스 유산들도 좋지만, 밀라노의 큰 매력은 그 현대성(modernity)에 있다. 상업이란 것이 본래 국경은 물론 시대도 모르는 것이어서 밀라노의 상업 재간이 여전히 위력적인 소이다.
밀라노의 상업 전통은 오늘에도 패션, IT, 디자인, 미디어, 문화, 레저, 쇼핑으로 이어져 밀라노 여행에 활기를 준다. 라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의 음악, 산 시로(San Siro) 경기장의 축구, 셈피오네 공원(Parco Sempione)의 휴식, 스피가 길(Via della Spiga)의 쇼핑뿐이 아니다. ‘현대성’ 분석으로 유명한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베냐민(Walter Benjamin·1892~1940·독일의 평론가·철학자)이 설파한 ‘궂은 날 오가는 사람 구경’에는 두오모 곁에 있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갈레리아(Galleria di Vittorio Emmanuelle)만 한 곳이 없다. 이제 밀라노 시내부터 시작해 그 주위 롬바르디아의 작고 예쁜 도시들 몇 곳을 돌아보자. 작지만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는 큰 마을들이다.
두오모 광장에서 스포르차 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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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르차 성. 밀라노 중세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지켜본 현장이다. |
우리는 두오모에서 시작하자. 남녀노소 불문하고 밀라노의 두오모 광장에 섰던 이라면 이 교회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흥을 잊지 못할 것이다. 정면을 잠시 응시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미적 체험이다. 다양한 양식과 장식들이 각기 최적의 조형을 잃지 않으면서도 건축적 하나(architectonic whole)를 문제없이 이루어냈다. 빅토리아 시대를 풍미한 영국의 미술비평가 러스킨(John Ruskin)의 자못 인색한 평가가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잔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시작해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 대관식을 위해 서둘러 마무리할 때까지 400여 년에 걸친 작업이었다. 당대 최고의 거장들이 참여하고 개성 있는 역대 공작과 총독과 주교들이 참견하고도 궁극에 이런 작품이 결과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선 클래식과 고딕의 조화가 성공적이다. 대소 첨탑과 입상들은 물론 뾰족한 아치의 창문과 벽감 등 위로 솟는 모양의 장식 일체는 고딕이지만 이 고딕 요소들을 받치고 감싸고 있는 장식들은 고전(古典)에서 취한 것이다. 늘씬하고 정교하지만 자칫 날카롭고 어지러울 수 있는 고딕이 클래식의 안정과 균형을 얻어 하나의 장대한 보석 세공이 탄생했다. 셸리(Shelley) 같은 감성의 시인도 달리 형용할 말을 잃고 “내가 본 최고 예술품 중 하나”라고만 했고, 해학의 대가 트웨인(Mark Twain)은 “성베드로 교회 다음이라니 이런 건물이 어떻게 2등일 수 있느냐”고 한마디 했다. 결이 고운 재질의 흰 대리석은 최근 열심히 닦고 보수해 더욱 말갛게 빛난다.
정면을 보며 울렁이던 마음은 안에 들면 완벽한 고요함 덕에 즉각 평정을 회복한다. 거대한 대리석주들이 임립(林立)해 측랑(側廊)들을 가르고 천장을 찌르는 사이사이로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한 채광(彩光)이 영롱하다.
양감(量感)에 압도되어 위만 쳐다보면 산재한 볼거리를 놓치기 쉽다. 입구 오른쪽으로 제일 먼저 오토네 비스콘티(Ottone Visconti·1207~1295)의 묘소가 눈에 띈다. 밀라노 대주교이자 비스콘티 시대의 창업자로 오늘날 밀라노 도시 미관의 기초를 놓은 이다. 그 조금 옆에 밀라노 칙령(313년)을 기념한 플라크가 있고 제단 쪽으로 조금 더 가면 성 바르톨로메오(San Bartolomeo)를 묘사한 16세기 조각 입상의 리얼리즘이 처연(悽然)하다. 피부를 벗기는 형벌로 순교한 성인이 벗겨낸 자신의 살껍질을 목에 두르고 모든 혈관과 힘줄을 선연히 드러낸 채 무심히 선 모습이다. 두오모 지하(cripta)도 빼놓을 수 없다. 꽤 널찍한 고대 로마 유적지 한편에 4세기의 팔각 세례당 자리가 뚜렷하다. 기원 387년 성 암브로시오가 성 아고스티노를 세례한 종교사적 자리다.
스포르차 성(Castello Sforzesco)은 두오모 광장 앞 곧은길로 500m쯤 가면 있다. 정사각형의 단정한 모양이 중세 성채들의 복잡한 구조와 달리 자못 현대적 느낌이다. 한가운데 우뚝한 필라레테(Filarete) 탑이 인상적인 원조 ‘밀라노 디자인’이다. 비스콘티 시절 군사용 성채로 쓰던 것을 스포르차(Francesco Sforza·1401~1466)가 거주 겸용으로 개조한 것이다.
스포르차는 누구인가? 용병대장으로 입신해 비스콘티 가문이 후사가 끊기자 곡절 끝에 이어받아 밀라노의 제2 전성기를 연 전설적 무인이요 군주다. 콜레오니(Bartolomeo Colleoni), 곤차가(Ludovico Gonzaga)들을 휘하에 두었었고 피렌체 공화국의 국부 코시모 메디치와 절친한 관계였다. 한때 리구리아(Liguria: 제노바, 사보나 등 리비에라 해안 일대)까지 진출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에 자기 사람을 통령으로 세울 정도의 위세를 떨친 이다.
부르크하르트는 그의 명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1860)》에서 “배신과 파렴치로 점철된 르네상스 용병대장사에 무용과 인망을 겸전하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라고 치켜세웠다.
역시 용병대장이었던 아버지에게 받았다는 세 가지 지침은 너무 간결해 더욱 금석같이 느껴진다. 남의 아내에게 손대지 말고, 아래 병사를 때리지 말고, 고집 센 말을 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 그림을 벽화로 갖고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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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타 론다니니>. 미켈란젤로 90년 생애의 마지막 작품이다. |
조각박물관 맨 끝 방의 한구석에 홀로 조각상이 하나 서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론다니니(Pieta Rondanini·1564)>.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으로 아흔 살이 다 되어 세상을 뜨기 며칠 전까지 작업하던 것이란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뒤에서 부축하는 성모의 슬픔을 오히려 그리스도가 위로하려는 듯한 형상이다. 건축, 그림, 조각을 넘나들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뿜던 천재 미술가의 쇠약해진 마지막 손길이 느껴져 마음이 슬프다.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미켈란젤로가 젊은 시절 만든 바티칸의 <피에타> 앞에 구름같이 모여선 사람들의 광경이 겹쳐지며 새삼 호사하는 느낌이다. 지난 1950년대 모처럼 시장에 나온 것을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하나도 없는 밀라노로서 시(市)가 직접 나서 어렵사리 장만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교회는 스포르차 성에서 도보로 멀지 않다. 부속 수도원의 식당(cenacolo) 한쪽 벽에 그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의 벽화 <최후의 만찬>으로 더욱 유명한 교회다. 르네상스의 새로운 지평(地平)조차 레오나르도가 가진 무변(無邊)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감당하기에는 오히려 비좁았던 모양이다. 메디치, 스포르차, 보르자, 율리우스 교황 등을 전전하던 레오나르도는 결국 이국의 왕 프랑스와 1세에 의탁해 쓸쓸한 말년을 마감했다. 밀라노는 그중 레오나르도가 제일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67년 생애에 장년기 20여 년을 밀라노에서 살고 일했다. 그중에도 동갑이던 루도비코 일 모로(Ludovico il Moro·1452~1508,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둘째 아들로 1489~99년 밀라노 공작)가 불러주어 함께 일했던 1482년부터 17년간이 레오나르도로서는 아마 가장 보람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최후의 만찬>은 이 시기에 그것도 장장 3년에 걸쳐 완성되었다(149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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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왼쪽으로 조금 보이는 수도원 안에 <최후의 만찬>이 있다. |
보통 그림이 아니니 조금 자세히 보고 가자. <최후의 만찬>은 수도사들이 식사하는 장방형 공간의 한쪽 벽면에 그려져 마치 그리스도와 열두 사도가 멀찍이 헤드테이블에 앉아 우리 쪽을 보며 함께 식사하는 듯한 기발한 구도다. 그리스도 머리 위 그림 속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실제 식당 공간을 비추고 왼쪽 벽면의 실제 창문으로 들어온 빛은 그림 속 테이블을 비춘다. 그림의 상황은 아연 긴장과 동요의 순간이다. 좌중의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폭탄 선언에 대한 사도들의 반응과 현장의 동요가 여실하다. 열두 제자를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나누어 동요가 무질서가 되지 않도록 관리했다. 그리스도로 집중되는 원근법의 구심(求心)과 좌중의 역동성이라는 원심(遠心)을 동시에 살린 것이다. 이차원의 그림을 본다기보다 하나의 연극 공연에 참관한 느낌이다. 구도, 재료, 빛, 색채, 원근법, 도상학 등 측면에서 시간이 걸리고 복잡한, 레오나르도가 아니면 시도할 이가 없는 과거와의 창조적 결별이다. 늘 ‘보편적 해결’에 골몰해 온 레오나르도가 자신의 생각을 알아주는 후원인을 만나 모처럼 시간을 갖고 필생의 작업을 시도한 듯하다.
산탐브로시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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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탐브로시오 교회. 고대와 중세의 많은 유산을 간직한 내공 있는 교회다. |
이제 근처에 있는 산탐브로시오 교회(Basilica di Sant’Ambrosio) 하나만 더 보고 다시 구도심 쪽으로 가자. 4세기 성 암브로시오 시절 짓고 9~12세기에 증축했다는데 초기 교회 시절의 흔적을 제법 많이 갖고 있어 반가운 교회다. 입구의 아트리움(atrium)을 둘러싼 열주와 아치들(arcade)이 깨끗하고 정면의 양쪽을 지켜선 종탑(campanile)이 시원하다. 9세기 카롤링거 왕조의 솜씨라는 중앙제단의 금박 장식과 산 비토레(San Vittore) 경당을 장식한 5세기 모자이크는 산탐브로시오의 보물들이다. 제단 아래 지하공간(cripta)에 성 암브로시오의 유해가 모셔진 것은 당연하지만, 본당 한편에 스틸리코(Flavius Stilicho·359~408, 서로마 말기 테오도시우스 시절의 명장)의 석관(sarcofago)과 신성로마황제 루이(Louis II·825~875)의 묘소까지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한 역사가 얽힌 교회였을 것이다.
브레라 미술관과 20세기 박물관
밀라노에는 박물관, 미술관들이 교회만큼이나 많다. 그중에도 브레라 미술관(Pinacoteca di Brera)이 1번이다. 브레라는 도심인데도 여유있는 문화적 분위기에 젊은이들이 많은 동네라 밀라노의 몽파르나스라고 불린다. 미술관이 들어 있는 17세기 건물에는 브레라 미술 아카데미를 비롯해 밀라노시와 롬바르디아주의 문화기관, 예술단체들이 같이 입주해 있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 르네상스의 그림들이 주력인데, 바티칸 박물관은 빼고, 아마 피렌체의 우피치 다음쯤일 것이다.
근처의 폴디 페촐리 박물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밀라노에서는 대표적인 하우스 뮤지엄(house museum)으로 미술품뿐 아니라 가구, 태피스트리, 도자기, 공예품들이 수집가가 살던 실제 생활공간에 그대로 배치·전시되어 있어 흥미롭다. 롬바르드 화파, 특히 볼트라피오(Boltraffio), 루이니(Bernardino Luini) 등에 레오나르도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다.
암브로시오 미술관(Pinacoteca Ambrosiana)은 두오모 쪽으로 좀 걸어가야 있다. 말이 미술관이지 박물관에 도서관을 합친 것 이상이다. 유명한 성 카를로(San Carlo)를 배출하였고, 밀라노 나아가 롬바르디아 일대에 많은 유·무형의 유산을 남긴 보로메오(Borromeo) 집안의 밀라노에 대한 기여다. 5세기 《일리아드》의 필사본, 14세기 《신곡》의 초기본 등은 일부 예에 불과하고, 스케치, 필사 초본, 세밀 드로잉 등 레오나르도의 기록물(코디체 아틀란티코·codice atlantico) 전시가 인상적이다.
이제 교외로 나가기 전에 한 군데만 더 들르자. 두오모 곁에 개관한 지 불과 몇 년 안 된 20세기 박물관(Museo del Novecento)은 밀라노의 새로운 명소다. 중세 건물을 멋들어지게 재활용했다. 밀라노가 태생인 미래주의(Futurismo) 그림과 조각들이 강점이지만 데키리코(Giorgio de Chirico), 모란디(Giorgio Morandi), 폰타나(Lucio Fontana)도 좋은 것들이 많다.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도 여럿 있다. 좁은 타워(torre)형 건물 가운데 층(層)을 관통해 조성한 나선형 접근로(ramp)를 오르내리며 3개 벽면에서는 20세기 미술을 감상하고 나머지 한쪽 유리 벽면으로는 두오모 광장의 파노라마를 즐기는 재미가 새롭다. 역시 현대성은 밀라노의 강점이다.
일 모로의 마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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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제바노의 피아차 두칼레. 가지런한 포르티코 저편에 브라만테 타워가 보인다. |
일 모로의 고향답게 마을의 중심 광장인 피아차 두칼레(Piazza Ducale)는 르네상스 광장 중에도 명품으로 꼽힌다. 장방형 광장의 좁은 면 하나를 두오모의 정면이 차지하고 나머지 3면은 포르티코(portico)와 아케이드로 둘러친 저택들인데 지붕의 굴뚝들마저 마치 밀라노 두오모의 피너클 장식처럼 한껏 멋을 부렸다. 거기에 저택들 벽면을 메운 프레스코 장식과 광장 바닥 채색 석재를 활용한 무늬까지! 후손들마저 ‘조상의 얼’을 살려 가로등과 화단을 어울리게 마무리해 놓았다. 발 디디고 다니기가 황송할 지경이다.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가 와보고 “4각의 교향악(una sinfonia su quattro lati)”이라 감탄했다 한다. 광장 한편의 높직 늘씬한 ‘브라만테 타워(Torre di Bramante)’ 쪽에 있는 통로를 지나면 일 모로가 거처하던 성채다. 응접실 격인 피아차 두칼레에 감탄한 밀라노 공작의 손님들이 기가 죽을 만한 호화 성채다.
대리석 기둥이 즐비한 마구간(scude ria)은 말 1000마리를 수용하는 규모란다. 마구간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신발 박물관(Museo della Calzatura)도 볼 만하다. 고금 남녀의 각종 신을 것들이 흥미롭게 전시되어 있다.
교황 피우스 11세가 신던 슬리퍼를 접했을 때는 문득 일전에 들은 얘기가 생각나 혼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음모와 암투가 교황청의 일상사이던 시절 교황을 모시는 이들 중에 제일 중요한 사람이 ‘슬리퍼 담당 비서관(pantofolaio)’이었다는 얘기다. 왜냐 물었더니 간밤에 교황이 확실히 살아서 잠자리에 들었는지 알 이는 침상에 오르며 벗어놓은 슬리퍼를 간수했던 ‘슬리퍼 비서관’뿐이라는 설명이었다.
파비아(Pavia)는 비제바노에서 지척이다. 크지는 않아도 역사와 문화로 꽉 찬 마을이다. 이탈리아 반도를 200여 년 석권했던 외족 롬바르드 왕국의 도읍지였고, 볼로냐대학과 더불어 유럽 최고(最古)의 대학으로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수학했던 파비아대학이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고향으로 미술사 특히 건축사 공부하는 이들 사이에선 필수 순례지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롬바르디아의 운명을 가른 신성로마황제 카를로 5세와 프랑스 왕 프랑스와 1세 간 회심의 일전의 현장(파비아 전투·1525)이었다. 옛 정취 은은한 파비아의 구도심은 그 단정한 모습이 지난 2000년 역사의 한복판에 섰던 자신의 과거에 시침 떼는 듯하다. 비스콘티 성 역시 엄청난 역사의 격랑을 잊은 채 평화롭기 그지없다.
파비아 수도원
구도심도 좋지만 파비아의 진짜 자랑은 파비아 수도원(Certosa di Pavia)이다. ‘체르토사’는 시토회 소속의 수도원을 이른다. 잔갈레아초 비스콘티가 밀라노 가족묘소 겸용으로 짓기 시작해 루도비코 스포르차(일 모로) 때까지 70여 년이 걸렸다. 정면 장식을 보니 건축 기간 중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유행하던 양식들이 두루 반영되어 정교한 단계를 지나 복잡하고 어지러운 지경이다. 묵직한 로마네스크로 시작해 알프스를 넘어온 고딕 스타일의 화려함이 얹혀지고 명장(名匠) 아마데오(Giovanni Antonio Amadeo)의 정중한 르네상스로 마감되었다는 설명이다. 각 양식의 요소들이 정면 각 층에 뚜렷해 양식사 교재로 좋을 듯하다.
안에 들어서면 수랑(袖廊·transetto)의 양끝에 각각 비스콘티와 스포르차가 잠들어 있다. 잔갈레아초의 준수한 묘소는 적당히 화려하고 상당히 장엄하다. 일 모로의 것은 부부가 나란히 누워 잠든 모습의 대리석 조형으로 영면(永眠)이 아니라 잠시 오수(午睡)에 든 듯 생생한 솜씨의 석관(石棺) 장식인데 주변 마무리가 어째 좀 부실하다. “일 모로의 생전에 이미 제작을 시작한 석관인데 프랑스의 침입의 와중에 젊은 부인의 베개 등이 미완성으로 남고 약탈된 기단 부분은 대체 석재로 대강 받쳐놓은 것이 500년 지난 오늘까지 그대로 왔다”며 훤칠, 박식, 다변의 안내 신부가 마음 아파한다. 게다가 일 모로의 진짜 시신은 이국 땅 프랑스에 잡혀간 뒤 그곳에 묻혀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우리 역사 대원군의 생각이 나며 갑자기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다.
일 모로의 부인 베아트리체 데스테(Beatrice d’Este)는 페라라 공작의 딸로 르네상스기 신여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이사벨라 데스테(Isabella d’Este)와 친자매 사이다. 열일곱 나이에 스무 살도 더 차이 나는 신랑에게 시집와 22세에 죽었다. 이들 자매는 율리우스 교황에 맞서 세 번째 시댁(媤宅) 페라라를 용감히 지켰던 보르자 집안의 여걸 루크레치아(Lucrezia Borgia·1480~1519)와 시누이, 올케 사이다.
독자성을 잃지 않은 베르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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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레오니 경당. 파비아 수도원의 정면을 치장한 아마데오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
아니나 다를까 필자가 파비아 수도원에 페루지노(Perugino)의 그림이 하나 있다던데 어디 있느냐고 묻자 애향심 넘치는 신부의 해설이 길어진다. “페루지노가 외지에서 흘러와 그려놓은 것이 저기 어디 있는데 굳이 가서 볼 만한 것은 아니고… 사실 페루지노나 라파엘, 미켈란젤로들이 여기저기 옮겨 살며 유명한 장소에 그린 것들이 많이 알려져 그렇지 그림 솜씨로는 베르고뇨네나 포파(Vincenzo Foppa·1427~1515)에 못 미친다”는 요지다.
중앙에 성가대 열석(列席)의 목상감(木象嵌) 장식에 감탄하며 후진(apside) 옆의 쪽문을 나서니 널찍한 키오스트로의 정원이 아무런 수목 없이 푸른 잔디만으로 검소하다. 나직이 둘러싼 아케이드를 따라 각기 소(小)정원과 굴뚝, 우물을 별도로 갖춘 수사들의 개별 독방 24채가 정연하다. 최대한의 침묵 수행을 돕기 위한 시토회의 규칙에 따른 설계란다. 식사도 공동식당(cenacolo)이 따로 없고 독방마다 배식구가 있어 한쪽에서 식기를 놓고 돌리면 다른 쪽은 막혀 있어 식기만 주고받지 대화는 고사하고 서로 얼굴도 볼 수 없이 되어 있다. 출구 근처 어디에 있다는 페루지노의 그림은 결국 못 보고 나왔지만 눈과 정신의 호사는 이미 과객(過客)의 기대치를 많이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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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가모의 피아차 베키아. 구도심 광장의 아치 너머로 콜레오니 경당이 보인다. |
콜레오니는 베르가모 태생으로 용병대장으로 입신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사령관(Capitano Generale)을 지낸 이인데 이곳 가족경당에 묻혀 있다. 베네치아의 자니폴로 교회 앞에서 베로키오가 만든 기마상으로 만났던 일이 있다. 내부도 그렇지만 경당 정면의 대리석 장식이 대단하다. 파비아 수도원의 정면을 마감한 아마데오의 솜씨다. 오페라 작곡가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1797~1848)도 베르가모 태생으로 경당과 연결된 산타 마리아 마조레에 묘소가 있다.
신시가지에 새로 단장해 개관한 15~18세기 이탈리아 미술의 보고 아카데미아 카라라(Accademia Carrara)도 잊지 말자. 인구 10만여 도시에 이 정도 미술관이 있다는 것은 우리로서 상상이 쉽지 않지만, 이탈리아의 지방 도시들에 가면 드물지 않은 일이다. 그곳 출신 인물들이 필생의 컬렉션을 운영 방향의 대강만을 정해, 간혹 전시할 건물까지 함께, 시(市)에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는 그 지방의 중소 컬렉션들을 합쳐서 시립박물관(Musei Civici)을 꾸리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이탈리아의 강점이고 자치도시의 뿌리 중의 하나다. 굳이 ‘균형발전위원회’의 지원이 필요없는 것이다. 보티첼리가 그린 줄리아노 메디치(대 로렌초의 친동생으로 1478년 팟치가의 모반 때 피살)의 초상 등 유명한 르네상스 초상화들이 많고 예의 베르고뇨네를 비롯한 롬바르디아 화파의 그림들이 좋다.
스위스 국경 쪽의 알프스 산록 호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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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모 호수. 푸른 호수와 눈 덮인 알프스 연봉의 조화가 평화롭다. |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오(Plinio) 부자가 살았고 역사적으로 비스콘티, 보로메오 등 밀라노 유력 가문들의 독점 휴양지였던 이 일대가 유럽에 널리 소개된 계기는 역시 나폴레옹 전쟁이다. 제네바-밀라노 간 도로의 핵심구간인 심플론 고갯길(Simplon Pass·이탈리아 말로 Passo del Sempione)도 나폴레옹이 군사 목적으로 닦은 길이다.
전에 없던 규모의 큰 전쟁 후 입소문이 나고 길까지 놓였으니 변화가 없을 리 없다. 벨라조(Bellagio)가 제일 유명해졌지만 푸른 물, 푸른 숲, 푸른 하늘과 일 년 사시 다채로운 꽃들, 예쁜 빌라, 정겨운 마을들은 전 호반(湖畔)에 공통이다. 일찍이 1837년 리스트(Franz Liszt)가 밀월여행을 왔다가 아예 눌러 살며 고명딸 코시마(Cosima)를 얻고 단테 소나타를 남긴 이래 수많은 문학, 음악, 미술, 영화의 무대가 되었고, 수년 전에는 신(新) 007 대니얼 크레이그(<카지노 로얄>)가 이곳 예쁜 빌라의 호반 정원에 불쑥 나타나 한 혐의자를 재판 없이 처단하기도 했다.
벌써 밀라노로 돌아가 떠나야 할 시간이다. 몬차(Monza)는 가는 길에 있지 않아도 한번쯤 들러야 할 곳이다. 바바리아 공작의 딸로 롬바르드 왕비가 된 테오델린다(Theodelinda·570~628)는 몬차의 대모(代母) 같은 존재다. 일찍이 롬바르드 왕에게 시집와 로마의 대(大) 그레고리오 교황(Gregorio Magno·590~604 재임)과 교분을 맺고 로마와 롬바르드 왕국 간의 평화를 주선했을 뿐 아니라 남편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왕의 개종은 온 나라의 개종을 뜻하던 시절, 전 롬바르디아가 기독교도가 된 것은 전 세기 프랑크 왕 클로비스(Clovis)의 개종에 비견할 일이다. 몬차의 근사한 두오모는 테오델린다 왕비의 지원으로 세워졌다. 골목길을 지나와 몬차 두오모의 정면과 마주하는 경험은 오르비에토(Orvieto)의 경우에 방불하다.
이탈리아 王의 鐵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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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차 두오모. 이탈리아 왕의 철관을 비롯해 간직한 보물과 역사가 여간이 아니다. |
이 두오모에 보물이 많지만 그중의 제일은 ‘철관(鐵冠·Corona di Ferro)’이다. 중앙제단 곁 성보함(reliquario) 안에 있다. 롬바르드 왕의 관(冠)으로 시작한 이 철관은 그 뒤 샤를마뉴도 쓰고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도 쓰고 단테가 이상적 군주로 기려 마지 않던 하인리히 7세도 와서 써 이탈리아 왕의 상징처럼 되었다.
실제는 철관이라기보다 에나멜과 보석으로 장식한 원형 금관인데, 관의 안쪽으로 좁고 납작한 철심이 덧대어져 있다. 전승인즉, 이 철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 쓰였던 못 중의 하나(Holy Nail)로 콘스탄틴 대제의 황모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왕관이자 지귀(至貴)한 성보(聖寶)인 셈이다. 이런 상징성으로 해서 1805년 나폴레옹도 점령지 밀라노의 두오모의 공사를 서둘러 마치고 이 ‘철관’을 대관하고 나서야 자족했던 것이다.
말펜사(Malpensa) 공항에서 바라보는 알프스 연봉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탈리아에 북쪽의 이 연봉은 역사적으로 장벽이기보다 통로였다. 켈트가 됐건 고트가 됐건 프랑크가 됐건 게르만이 됐건 산 너머 드센 세력들의 ‘관심’과 영향하에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밀라노를 포함한 롬바르디아는 신성로마황제의 강한 영향하에 있었고 그 여파는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한 합스부르크의 지배로 이어져 통일까지 지속됐던 것이다.
이제 역사적 부침은 과거지사가 됐고 밀라노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일부로 안착했다. 그 굴곡의 과정에서 밀라노와 롬바르디아가 ‘치살피노(cisalpino·‘알프스 이쪽’의 뜻)’의 훌륭한 전통에 ‘올트랄피(oltralpi·‘알프스 저쪽’의 뜻)’의 앞선 시스템을 겸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