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유적 없고, 봉건 영주 없고, 교황의 흔적도 없는 곳이 베네치아
⊙ 베네치아 공화국의 통치체제는 오늘날 공화주의의 전형
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베네치아 공화국의 통치체제는 오늘날 공화주의의 전형
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산조르지오 마조레 섬과 팔라디오가 디자인한 同名의 교회. 뒤로 길게 이어지는 리도 섬이 보인다.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1923-85)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랑하는 작가다. 특히 젊은 지식층의 사랑을 받았고 영미 독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그의 작품 중에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a Invisibili)》이란 소설이 있다. 베네치아 사람 마르코 폴로(1254-1324)가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이 돌아본 도시들 쉰다섯 곳에 대해 들려주며 주고받는 얘기다. 선문답(禪問答) 같은 대화들이다. 여행객은 가 보았고 정복왕은 못 가 본 도시들에 대한 얘기인데 결국 55편이 모두 베네치아 얘기라는 독법(讀法)이 우세하다. 유라시아 대륙을 종횡한 정복왕이 바라볼 수조차 없었던 도시. 바로 베네치아다.
사실 베네치아는 도시 안에 들어가지 않고는 밖에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과 다른 점이다. 도시의 전경(全景)만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도처에 편재(偏在)한 것들 중에 베네치아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우선 고대 로마의 유적들이 하나도 없다. 이탈리아의 도시치고는 상당히 이국적(?)인 모습이다. 시기적으로 서(西)로마가 멸망하고 세워진 도시이니 당연한 얘기다.
또 역사적으로 봉건 영주들이 없다. 물 위에 세워진 도시이니 농토가 없고 농토가 없으니 영지가 없어 봉건제의 여지가 없었다.
베네치아에는 교황의 흔적도 거의 없다. 종교를 중요시했지만 교회와 사제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아 역대 교황들과 늘 긴장 관계였다. 도시 전체가 파문되기도 몇 차례였다. 먼저 베네치아 시민(Venetiano)이고 다음이 기독교도(Cristiano)라는 생각이 깊었다.
또 하나, 베네치아에서는 프랑스나 스페인 왕은 물론 신성로마 황제의 그림자를 느낄 수 없다. 중세 이래 이탈리아 전역을 제 집처럼 휘젓고 다닌 역대 신성로마 황제들이 베네치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베네치아는 천년의 역사 동안 그 어떤 외세로부터도 자유로운 독립 공화국이었다. 나폴리는 물론 피렌체도 밀라노도 범접 못해 본 경지였다.
베네치아 성장의 배경
조금 자세히 보자. 기원 5세기 반달족, 6세기 롬바르드족의 침입을 피해 온 사람들과 토착 어민들은 베네치아 석호(潟湖) 외곽의 리도(Lido)와 토르첼로(Torcello) 등 외곽 섬들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샤를마뉴가 정복을 시도하다 포기한 후 베네치아는 아예 신성로마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경계 밖으로 분류가 된다. 이래저래 육지 길이 막혀 생존의 통로가 바닷길 뿐이었다. 해양제국으로서의 미래가 타의(他意)로 열린 것이다.
베네치아가 리알토(Rialto) 섬을 중심으로 공공건물들을 세우고 정부체제를 정비한 것은 9세기 들어서다. 베네치아의 두 중심 통령궁(Palazzo ducale)과 산마르코 교회(Basilica di San Marco)를 세운 것도 이때다. 내외에 국가로서의 성립을 알린 셈이다.
기원 1000년은 베네치아가 인근 아드리아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달마티아에 첫 식민지를 개척한 해다. 해양국가로서의 첫걸음이다. 이를 기념한 행사가 유명한 ‘바다와의 혼인(Sposalizio del Mar)’ 축제다. 대소 선박들이 한껏 성장하고 총출동한 가운데 통령(統領, Doge)의 배가 카날그란데(Canal Grande)를 미끄러져 내려와 산마르코 앞바다에 반지를 토스해 던진다. 베네치아와 바다가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역사에 뿌리를 둔 각종 축제들이 많지만 자타 공인 축제의 효시는 이 혼인행사다.
이후 400~500년 베네치아의 성장은 눈부셨다. 1082년 비잔틴 황제의 인가장(Golden Bull)으로 보스포러스 이서(以西)의 자유통해권과 면세거래권을 얻어 낸다. 7세기 이래 이슬람에 의해 막혔던 동지중해 해로를 열어제친 것이다.
이내 시작한 1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해프닝은 베네치아가 활동영역을 넓히는 데 다시없는 계기였다. 다마스쿠스에서 예루살렘을 거쳐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는 레반트의 요충지들에 베네치아의 무역기지를 건설했다. 십자군 원정이 시들해지고 이들 근거지를 이슬람 세력이 재점령한 뒤에도 ‘베니스의 상인’들은 그대로 눌러앉아 본토와의 관계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계속하였다.
상인은 상대방의 종교나 문화를 묻지 않는다. 산호초로 피난해 온 사람들에게 바다 너머 낯선 사람들과의 거래와 공존은 생존본능의 결과였다.
베네치아 사람들의 진취적 기상은 이내 ‘동방을 진정 알았던 유일한 유럽인’이란 평판을 얻어 냈다. 마르코 폴로 집안처럼 중국에만 간 것이 아니다. 카보토(Caboto) 형제가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다모스토(Alvise da Mosto)가 아프리카의 카포베르데에 이른 것들이 다 그 맥락이다.
1380년 키오지아(Chioggia) 전투에서 숙적 제노바를 제압한 베네치아는 머지않아 스페인의 아라곤 제국과 함께 지중해를 동·서로 양분하기에 이른다. 이때쯤이면 크레타 섬을 비롯해 코르푸, 키프로스 등 동지중해의 웬만한 섬들은 대개 베네치아의 영토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이 정도의 성장은 생존본능과 진취정신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 뒤에 국가가 있었다. 무역강국 나아가 해양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베네치아가 구축한 국가 시스템은 경이로운 데가 있다. 철저한 공화제로 개인숭배나 파당 형성의 소지를 없애고, 국부의 극대화를 국가가 주도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11세기부터 생겨난 이탈리아 반도의 자치도시들은 예외없이 공화제로 출발했으나 1300년경에 이르면 그 대부분은 군주제에 굴복하고 만다. 1500년을 고비로 이탈리아 전역에 외세의 영향이 일반화될 즈음 진정한 독립세력으로, 또 공화체제로 남아 있은 것은 베네치아가 유일했다.
베네치아 선단의 선원들은 자유시민으로서 유사시 전투요원이 되는 자못 근대적 개념으로 조직되었다. 무역의 효율성과 안전성에 기여한 크게 앞서간 장치였다.
유사 이래 최고의 통치체제라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통령제
요즘은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공간으로도 활용되지만, 아르세날레(Arsenale,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영 조선소)는 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최대 산업단지였다. 20세기 초 미국 포드사의 모델-T 조립생산 공장을 연상시키는 효율적 공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베네치아 공화국 천년의 역사에 수많은 통령이 있었다. 4차 십자군 원정시 콘스탄티노플 약탈(1204)을 ‘기획’했다는 오명이 함께 따라다니는 단돌로(Enrico Dandolo, 1107-1205) 같은 카리스마의 통령들이 많았다. 포스카리(Foscari), 모체니고(Mocenigo), 그리마니(Grimani) 같이 통령을 여럿 배출한 큰 가문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통령의 자리에 명예와 권위는 주어지되 독점적 권력이나 차별적 특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자치도시들의 고질적 통폐이던 분파주의와 사적 폭력은 베네치아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개인숭배가 자라나기 힘든 제도요 문화였다. 귀족은 있되 번잡한 귀족 타이틀이 없고 가문은 있되 가문의 문장(紋章)이 인정되지 않았다.
통령 선출절차를 보아도 담합과 조작을 방지하기 위해 ‘우연’의 요소까지 포함시켜 가며 불필요할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하게 규정해 놓았다. 통령이 된 뒤에도 권력남용이 없도록 상시적 견제절차를 구비하고 가동시켰다. 가히 공화주의 시스템의 이데알티푸스다. 마키아벨리와 친구였던 사가(史家) 귀치아르디니(Guicciardini)가 “유사 이래 최고의 통치체제”라고 치켜세운 시스템이다.
이를 무릅쓰고 군주가 되어 보려 기도한 통령이 천년 역사에 단 한 명 있었다. 마리노 팔리에르(Marino Falier, 1274~1355)다. 그는 추상같은 사법기구의 대명사인 10인회의(Consiglio dei Dieci)의 신속한 체포, 평결, 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놀라운 수준의 법의 지배를 실천한 역사적 선례다. 국체보전이 임무인 10인회의는 그 결정이 즉각적이고 집행이 단호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심의결과는 철저한 비밀이었고 판결은 번복이 불가능했다.
라 세레니시마
베네치아의 별명 중에 유명한 것이 ‘라 세레니시마(La Serenissima)’다. 세레나(serena, 영어로 serene)의 최상급이니 지극히 차분하고 평화롭고 고요한 경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설명이 따라다닌다.
우선 조금 전에 얘기한 공화주의의 모범적 실천이 있다. 베네치아의 정치적 조용함이다. 내부의 정파 간 다툼이 외세와 연결된 일이 없고, 천년 역사 중에 단 한 번도 성공한 정변이 없었다.
현실적인 고요함의 원천으로는 과거에는 마차들, 지금은 자동차들이 못 다닌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실제 시외버스 터미널(Piazzale di Roma)을 빼고 도시 전체에 자동차가 없다. 대단한 차이다. 이 때문에 베네치아에서는 조금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그대로 중세(中世)에 온 느낌이 든다.
하지만 ‘세레니시마’의 제일 원천은 아무래도 베네치아 특유의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베네치아에는 특별한 공기가 있다. 계절이나 시간대에 관계없이 즉자적으로 느껴지는 그 무엇이니 공기랄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지중해의 햇빛과 베네치아의 물이 주는 효과에 주목했다. 영국의 예술비평가 러스킨(John Ruskin) 같은 이는 베네치아의 돌(건물 석재)을 얘기했다. 빛과 물과 돌이 어우러져 연금술처럼 만들어 낸 베네치아만의 공기. 카날레토(Canaletto), 구아르디(Francesco Guardi)의 그림에서 감지되는 그 공기다. 여기에 비잔틴과 오리엔트의 이국적인 요소들까지 더해져 베네치아는 많은 이들에게 뮤즈이고 영감이었다.
괴테는 베네치아를 두고 (너무 달라서) 달리 비교할 데가 없는 곳이라고 했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이탈리아 기행(Italian Hours)》에서 베네치아에 대해 뭔가 얘기를 덧붙이는 것이 민망한 느낌이라고 했다. 눈앞에 현란하지만 어느 순간 스러질 듯 덧없어 보이는 아름다움의 이미지는 토마스 만(Thomas Mann)이 소설로,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가 영화로 형상화했다. 18세기 베네치아 태생으로 고향의 이미지가 유럽의 유흥 수도로 격하(?)되어 가는 데 일정한 기여가 없지 않았던 카사노바(Giacomo Casanova)가 자신의 장기(長技) 여성공략에 십분 활용했음직한 그런 분위기다.
산마르코 광장
‘피렌체 산책’ 때 경험한 인파는 베네치아에도 못지않다. 이제 이 인파를 무릅쓰고 ‘라 세레니시마’의 복판으로 직행하자. 통령궁과 산마르코 교회가 나란히 있는 산마르코 광장(Piazza di San Marco)이다.
산마르코 광장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로 나뉘어 있다. 교회 앞에 비둘기 많은 너른 광장을 통칭 ‘피아차’라 하고 바다에 면한 쪽 통령궁 앞에 갈매기 날아드는 곳은 피아체타(Piazzetta, ‘작은 광장’)라 부른다. 산마르코는 한눈에 보아도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유럽의 교회들과 외관이 다르다. 비잔틴 풍이다. 내부의 공간처리와 조도(照度)가 낮은 것까지 그렇다.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가 비잔틴 교회 건축의 원조라 하지만 500여 년 이슬람 치하에서 방치된 오늘날의 모습 가지고는 산마르코에 비할 수가 없다. 역사 발전의 곡절에 따라 베네치아의 교회가 비잔틴 제국의 본토이던 오늘의 그리스, 터키 지역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전형적인 비잔틴 교회”(베렌슨)가 된 것이다.
넓지 않은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동서안(東西岸)의 문화적 차이가 작지 않다. 역사적으로 고대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의 차이에서 유래한다. 그 뒤에 발칸 반도에 슬라브족의 대유입이 있었고 기독교의 대분열도 있었다. 차이가 더욱 벌어졌고 그 두 문화가 만나는 접점에 베네치아가 있는 셈이다.
산마르코는 문화적으로 두 영향의 풍요로운 조합을 보여준다. 조각, 부조(浮彫), 프레스코 등 각종 조형이 다양하지만 압권은 역시 비잔틴 예술의 백미 모자이크다. 비잔틴 교회에 공통인 어둠침침한 내부에 들어서면 순간의 무명(無明)이 차차 걷히며 벽면과 천장의 모자이크 인물(그리스도와 성인)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중세인들에게 신비와 경외의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산마르코에서 꼭 챙겨 보면 좋을 것이 중앙 제단의 팔라도로(Pala d’Oro)와 (중앙 입구 위에 복제본, 부속 박물관에 원작이 있는) 네 마리 청동마상이다. 두 대표 예술품 뒤의 역사적 곡절이 기박하다. 팔라도로를 장식한 현란한 보석들은 대부분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 약탈’(1204)에서 가져온 것이고, 청동마상은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 정복 후 나폴레옹이 약취해 갔던 것을 1815년 워털루 전쟁으로 나폴레옹 자신이 역사의 뒤안길로 밀린 후 돌려받은 것이다.
하나 더, 산마르코는 베네치아의 중심교회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할 때까지 ‘두오모’나 ‘카테드랄레’가 아니라 통령의 개인 경당 지위에 머물렀다. 베네치아가 교황의 영향을 차단하려 얼마나 애썼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통령宮
곁에 나란히 서 있는 통령궁의 건축 스타일은 산마르코와 많이 다르다. 아라베스크 장식과 기하학적 패턴이 현란하고 삼엽(三葉, trifoglio) 아치와 사엽(四葉, quattrofoglie) 톤도를 한껏 활용한 소위 베네치아식 고딕이다. 지상층과 2층은 새하얀 석재로 장식하고 3, 4층은 붉은 빛 도는 베로나산 대리석으로 마감했다. 이 순백(純白)의 석회석이야말로 많은 이들이 상찬하는 베네치아의 간판 석재다. 아드리아 건너 이스트리아(Istria)가 주산지다. 베네치아의 첫 식민지였던 달마티아 지역은 무역기지일 뿐 아니라 건축재의 최대 공급지였다.
통령궁은 두말할 것 없이 천년 베네치아의 심장이다. 통령의 사무실과 관저, 원로원, 10인회의 등 국가기관 일체가 이곳에 있었다. 예술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다. 베네치아의 역사를 되새기며 이들 사무실, 접견실, 회의실들을 돌아보는 재미는 이내 내부공간 곳곳의 도저한 장식들로 옮아간다. 입구와 천장과 벽면뿐 아니라 바닥과 층계참과 창틀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구석, 어느 한 표면을 꾸미지 않고 놓아 둔 공간이 없다. 그중에 전체회의실(Sala del Maggior Consiglio)은 보기 드문 명품 공간이다.
그렇게 방대하고 화려하고 위압적인 공간을 그처럼 섬세하고 정제되고 차분한 느낌이 들도록 만든 것은 예술의 힘일 것이다. 입구 쪽 벽면 전체를 차지한 틴토레토의 초대형 그림 <천국(Paradiso)>. 단일폭으로 세계 최대라는 설명이 없어도 감탄에 부족함이 없다. 벽면 상단 코르니체(cornice)를 따라 돌아가며 역대 통령들의 초상이 형형으로 당당하다. 딱 한 곳에 초상 대신 검은 천이 덮여 있다. 반역으로 처형된 통령 팔리에르의 자리다. 통령의 지존으로도 ‘세레니시마’는 범할 수 없었다. 검은 천 위의 흰 글씨(‘HIC EST LOGVS MARINI FALETRO DECAPITATI PRO CRIMINIBVS’)가 간단 명료하다. 베네치아식 춘추 서법(書法)이다.
베네치아 역사 보여주는 코레르박물관
다른 그림들도 많다.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와 티치아노(Titiano)도 일부 있지만 틴토레토, 베로네제, 팔마 부자(父子), 바사노 일가 등 후기 르네상스 사람들의 대작이 대부분이다. 1574년의 큰 화재가 원인이란다. 모두 베네치아와 베네토 출신 일색이고 외부 화가의 작품이 별로 없는 것도 눈에 띈다.
건물을 나서면 안뜰로 내려오는 ‘거인층계참’(Scala dei Giganti)이다. 건물 안쪽에서 보는 외관은 바깥 정면(facciata)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원(tondo)과 아치(arco)와 꽃줄(festone) 등 우리 눈에 익숙한 르네상스 장식이다. ‘로마 약탈’(1527)을 피해 베네치아에 와 활동한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작품이다. 산소비노 덕분에 베네치아도 이탈리아임을 새삼 상기한다.
피아차 건너편의 코레르 박물관(Museo di Correr)은 산마르코 교회와 통령궁에서 익힌 베네치아 문화사를 정리해 보는 곳이다. 예술뿐 아니라 정치, 사회, 산업 등 베네치아의 전모를 보기 좋게 전시해 부문별 박물관 여러 곳을 다닐 필요 없이 해 놓았다.
몇 개 걸려 있는 통령들의 초상 중에 포스카리(Francesco Foscari, 1423~1457 재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혜와 의지를 갖춘 위엄 서린 초상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절정기를 주재하며 34년간 통령의 지위에 있었다.
이 시기에 베네치아는 해상국가(Stato di Mar)로서의 지위를 완결하고 밀라노의 비스콘티(Visconti)를 상대로 베네토 일대는 물론 롬바르디아의 브레시아, 베르가모까지 육지 영토를 넓힌다. 육상국가(Stato di Terra)를 겸하게 된 것이다. 카날그란데(Canal Grande)가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e dell’Academia) 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물목에 카포스카리(Ca’Foscari)가 있다. 베네치아 대학 본관 건물이다. 포스카리 가문이 대대로 거주하던 사저(私邸)로 베네치아 대학을 통칭 카포스카리로 부른다.
프라리 교회
베네치아에 교회들이 많지만 최소한 두 곳은 봐야 한다.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Santa Maria Gloriosa dei Frari, 약칭 프라리) 교회와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Santi Giovanni e Paolo, 약칭 자니폴로) 교회다. 각기 베네치아에 있는 프란체스코 교단과 도메니코 교단의 대표 교회 격이다.
프라리는 교회가 갖고 있는 좋은 볼거리들을 집약해 보여준다. 사람 좋은 신부(神父)의 안내 덕에 더욱 즐거운 방문이었다. 우선 피렌체의 산타크로체처럼 큰 인물들의 묘소와 추모조형(funeral monument)이 많다.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의 최고봉 티치아노(Titiano Vecellio, 1488~1576)의 묘소가 초입에 있다. 중앙 제단의 장엄한 제단화 <성모승천(Assunta)>을 그린 이다. 신부의 설명을 들으며 필자가 슬쩍 “카도레(Pieve di Cadore, 티치아노가 태어난 베네토 돌로미티의 산골 마을)의 소년이 프라리에 잠들어 있구나!”
한마디 해 보았다. 과연 신부는 반색을 하며 카도레에 가 봤냐 묻더니 흥이 나서 얽힌 스토리들을 풀어 놓는다. 안내하는 이들한테 더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첩경이 적당한 추임새임을 다시 확인한다.
맞은편에 18세기 후반 신고전주의 선풍의 선두에 있던 다산(多産)의 조각가 카노바(Antonio Canova)의 묘소가 있다. 본인이 생전에 디자인해 두었다는 현대풍 신고전 조형이 중세 고딕의 교회 안에 외로운 느낌이다.
카노바 묘소와 나란히 위치한 호화 묘소는 17세기에 통령을 지낸 페사로(Giovanni Pesaro)의 것이다.
곁에 티치아노 작 <카페사로의 마돈나(Madonna di Ca’Pesaro)>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빈 공간이다. 서양미술사 책들에 단골로 소개되는 그림으로 창의적 구도와 선구적 색깔 사용으로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독자성을 내외에 알린 명작이다. 신부에게 물었더니 그림 뒤 벽면에 습기와 균열이 와 제단 옆 별도 공간에 옮겨 놓았다며 걱정이 많다. 있을 곳에 걸려 있지 않은 좋은 그림은 보기에 딱하다.
오페라를 창안한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도 이 교회에 묻혀 있다. 세례당 옆 조그만 경당 안이다. 바이올린 제작으로 유명한 크레모나 태생으로 베네치아에서 주로 활동한 바로크 사람이다.
스쿠올라
중앙제단의 <성모승천>! 승천하는 성모의 위로는 휘황한 금빛 하늘에 성부(聖父)가 내려다보고 아래로는 이승의 푸른빛 하늘 아래 사도들이 베드로를 가운데 두고 저마다의 제스처로 올려다본다. 믿지 못할 광경에 또다시 의심하던 토마소(도마)는 성모가 승천하며 건네준 ‘물증’ 허리띠를 두르고 있다.
이 그림은 제단 가까이서 올려다보아야 한다며 신부가 권유한다. 역시 그림들은 의도된 곳에 있어야 하는 소이다. 제단 주위 정교한 상감목(象嵌木, intarzio) 장식의 합창석(coro) 양옆으로 18세기 오르간이 높직하다. 코로 공간의 음향효과를 보여주겠다며 신부가 느닷없이 성가 한 소절을 직접 실연한다. 갈데없이 이탈리아 사람이다.
성구실(sagrestia)로 옮기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의 성모자상 삼면화(三面畵, trittico)가 맞아 준다. 지극히 고운 형상과 색조 앞에 가벼운 한숨마저 나온다.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긴 뒤에도 남을 수밖에 없는 잔잔한 슬픔이 성모의 눈매와 입가에 어려 있다. 베네치아의 별명이기도 하지만 벨리니의 성모야말로 ‘라 세레니시마’다.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무성한 여름이라면 벨리니는 파릇한 초봄이었다.
리알토 다리 건너 자니폴로 교회로 가기 전에 한군데 들러 가자.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로코(Scuola Grande di San Rocco). 프라리에서 작은 골목 하나 사이에 두고 있다. 스쿠올라는 학교가 아니라 수호성인을 하나씩 정해 모신 상인들의 친목단체다.
통령궁에서 만났던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가 신·구약의 스토리와 성 로코의 행적을 그림으로 제작해 2층 큰 건물의 구석구석을 뒤덮어 놓았다. 23년이 걸렸다고 한다. 경이로운 창의과 정력의 화가다. 시각과 구도의 독창성과 명암의 극적인 활용은 앞서 티치아노에서도 본 것이지만 그 화폭의 스케일과 역동성은 독보적이랄 수밖에 없다. 어두운 색조에 빛의 효과를 한껏 활용한 특유의 기법이 건물 전 공간에 충만하다. 웅혼, 장려하고 신비스러움을 넘어 자못 초월적인 분위기다. 통령궁과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비롯해 베네치아에 틴토레토의 그림들이 많지만 역시 이곳이 압권이다. 나폴레옹이 갖은 것 다 떼어 가고 훼손하면서도 이곳은 지나쳤다고 한다. 거의 전부가 완벽히 남아 있다.
콜레오니 기마상
자니폴로 앞마당의 콜레오니(Colleoni) 기마상은 언제 보아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베로키오(Verrocchio)의 마지막 작품이다. 피렌체에서 큰 공방을 운영하며 레오나르도, 페루지노 들에게 그림도 지도했지만 역시 그의 특장은 조각이다. 인근 파도바(Padova)의 산토 광장에 가타멜라타(Gattamelata) 기마상을 세운 도나텔로의 ‘모범’을 넘어 소위 ‘동작(movimento)’을 조각에 성공적으로 실현했다. 위엄 서린 얼굴로 상체를 약간 틀어올리며 내려다보는 마상(馬上)의 자태가 영락없는 싸움대장이다.
교회 안은 역대 통령 25명의 묘소들이 가득한 베네치아의 판테온이다. 장의(葬儀) 예술의 박물관 격이다. 특히 모체니고(Mocenigo) 집안 통령들의 묘소가 볼 만하다. 모체니고 가문은 피렌체의 메디치 이상 가는 권세를 누린 집안이다. 일곱 명의 통령을 비롯해 문무의 고관들을 무수히 배출했다. 베네치아만의 정치 전통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군주 노릇을 했을 집안이었다.
이왕 카스텔로 구역(Sestiere di Castello)까지 왔으니 몇 곳 더 보고 가자. 스쿠올라 디 산조르지오 델리 스키아보니(Scuola di San Giorgio degli Schiavoni)는 달마티아 출신 석재(石材) 업자들의 클럽하우스다. 앞서 본 산로코 스쿠올라와는 분위기가 딴판이다. 카르파치오의 단정하고 경쾌한 명작들이 즐비해 기억에 남는 장소다.
하우스 뮤지엄들
카르파치오(Vittore Carpaccio, 1460~1525)도 베네치아 르네상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스토리텔링 솜씨와 재치있는 파격으로 벨리니, 티치아노의 틈새에서 자신만의 예술적 자취를 남겼다.
베네치아에 소위 ‘하우스 뮤지엄’(단독건물에 크지 않은 프라이빗 컬렉션)들이 많지만 쿠에리니 스탐팔리아 박물관(Museo di Querini Stampalia)은 그중에서도 보석이다. 산마르코 광장과 리알토 다리의 중간 지점인데도 한산하기가 바로 산골에 든 듯 조용하면서 널찍한 포르모사 광장(Campo Formosa)의 한쪽에 있다. 베네치아가 자랑하는 현대 건축가 스카르파(Carlo Scarpa)의 정원이 차분해서 좋다.
전시는 코레르 박물관의 흥미로운 축소판이다. 백미는 역시 조반니 벨리니의 <아기예수 봉헌>. 스카르파가 특별 제작한 이젤 위에 놓여 있다. 성모와 아기예수, 예언자 시메온과 등장인물들이 배경묘사 없이 전면(前面)에 당겨져 화폭 가득하다. 전혀 새로운 구도와 인물 표현이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선도한 대표화가답다. 그는 1453년 비잔틴 제국을 없이하고 기세등등하던 오토만 터키의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플에 건너가 술탄 메멧(Memet II)의 초상화를 그려 주기도 했다.
벨리니를 하나만 더 보고 싶으면 바로 근처에 산자카리아(San Zaccaria) 교회가 있다. 그림 많은 예쁜 르네상스 교회에 그의 만년작 <성모자와 성인들>이 걸려 있다. 당시 베네치아의 유행대로 대담한 색조를 사용하고도 변함없이 온화한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 냈다.
괴테의 탄식
산자카리아를 나와 왼쪽으로 난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면 바로 피아체타와 이어지는 부두(埠頭)가다. 교회들과 박물관들도 보아야 하겠지만 베네치아에 오면 역시 그 물과 돌과 빛 그리고 그 공기라지 않던가. 이런 여건이야말로 베네치아의 건물과 그림과 조각과 예술품을 가능하게 해 준 원천이요 탯줄일 터이다.
베네치아를 며칠 돌아본 후 괴테의 탄식조 소감이다. “우리 북쪽 사람들은 흙먼지 날리는 칙칙한 공기 속에 (직사광선은 고사하고) 반사된 빛마저 풀이 죽는 환경이고 그나마 비좁은 공간에 살아가니 (베네치아 사람들과 같이) 세상을 기쁨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흙먼지와 물안개의 차이다.
물안개 너머 바라보이는 산조르지오 마조레(S.Giorgio Maggiore) 교회의 유혹은 외면하기가 쉽지 않다. 굳이 바포레토(vaporetto)를 기다릴 것 없이 곤돌라로 건너가 본다.
교회 건물은 비트루비우스 이래의 건축가로 대접받는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0~1580) 작품이다. 고전주의 요소들을 과감히 도입한 르네상스 건축으로 베네토 일대에 불멸의 족적을 남긴 이다. 엄격한 절조와 균형을 중시하는 그의 스타일이 정작 베네치아에서는 환영을 못 받아 본섬 리알토에는 그의 건물이 없다. 산조르지오 마조레 섬의 이 교회와 주데카 섬의 명물 레덴토레(Il Redentore) 교회가 유이(唯二)하다. 작은 섬에 홀로 선 교회가 오히려 팔라디오 건축의 단아함에 적합해 보인다.
부속 수도원도 필수 팔라디오 코스다. 특히 정원회랑(chiostro)은 대칭과 조화의 미를 완벽하게 구현한 모범이다. 건물 안 수사들 식당(refettorio)을 찾아 한쪽 벽면을 덮은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1588) 작 <카나의 결혼연>을 원위치에서 감상하는 특권을 누려 보자. 다만 품질 좋은 사진판이고 원작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지만 현장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미술은 베로네제로 절정에 이른다.
다니엘리 호텔에서 마시는 프로세코 한 잔
다시 산마르코로 건너와 베네토의 명산 프로세코(prosecco) 한 잔으로 쉬어 가려면 노천 카페들도 나쁘지 않지만 조금 걸어서 다니엘리 호텔(Hotel Danieli)이 제격이다. 단돌로 집안의 문중 저택이었던 14세기 건물이다. 역대 투숙 저명인사의 리스트는 그야말로 끝이 없다. 괴테부터 시작해 찰스 디킨스, 마르셀 프루스트, 레너드 번스타인 등을 거쳐 오늘날 앤젤리나 졸리까지 진행 중이다.
테라스 카페에 앉아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S.Maria della Salute) 교회의 하얀 달덩이 쿠폴라를 바라보노라면 세상 시름은 물론 베네치아를 찾은 즐거움마저 간 곳이 잠시 묘연하다. 19세기 유럽의 낭만객들이 ‘완벽한 죽을 자리(perfect place to die)’로 베네치아를 꼽았던 이유를 알듯 말듯하다. 팔라디오와 그 제자 스카모치(Scamozzi)의 맥을 잇는 롱게나(Baldassare Longhena, 1598~1682)의 디자인이다. 롱게나는 베네치아의 바로크 건축을 선도하며 카페사로(Ca’Pesaro), 카레초니코(Ca’Rezzonico) 등 카날그란데 가의 명품 건물들을 남겼다.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옆에 나지막이 자리 잡은 팔라초 베니에르(Palazzo Venier dei Leoni)가 보인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요즘은 그라시 궁(Palazzo Grassi) 등에 몇 군데 더 생기기는 했지만 베네치아에서 독보적인 현대(contemporary)미술 콜렉션이다.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은 미국 광산재벌 집안의 상속녀로 당대의 전위 미술인들과 광범하게 교유하며 그들의 작품을 판매하고 수집했던 호사가 신세대 여성이었다. 뉴욕의 원조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운 솔로몬 구겐하임이 큰아버지이고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가 한때 남편이었다.
집안의 지인이자 르네상스 미술의 권위인 베렌슨(Bernard Berenson, 1865~1959)이 자신의 추상미술 취미를 못마땅해하며 미술관을 한 번도 찾아 주지 않자 “와 주시면 그림들을 모두 천으로 가려 놓고 모시겠다”고 제안했다는 등의 얘기들이 자서전 《미술 중독자의 고백》에 나온다. 베렌슨은 찾지 않았어도 페기 구겐하임 콜렉션의 인기는 꾸준해 베네치아로서는 아주 고마운 미술관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황혼
다시 산마르코 쪽으로 나오니 초저녁이다. 하나둘 들어오는 피아체타의 가로등 아니 수로등(水路燈) 불빛이 물위에 어리니 예의 ‘세레나(serena)’ 말고 달리 묘사할 말이 없다. 이제 그만 베네치아를 떠날 시간이다. 베네치아의 공항 이름이 다시 마르코 폴로다.
마르코 폴로의 시절이던 13세기, 상인의 나라 베네치아는 유럽 최고의 부자 도시로 꼽혔다. 10만명 정도의 시민이 3300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3만6000명에 달하는 선원 겸 수병을 유지했다는 것은 대단한 기록이다.
공통이익(경제)과 공화주의(정치)에 한번 합의한 후 어느 개인도 어느 가문, 어느 파당도 이를 범하지 못했다. 국가운영의 전일성(專一性)과 효율성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전성시절의 제노바도, 욱일의 기세이던 오토만의 메멧 술탄도, ‘광개토교황’ 율리우스가 주도한 캉브레(Cambrai) 연합군도 어쩌지 못한 베네치아였다. 그 과정에서 ‘영혼과 이윤을 맞바꾸었는지’, ‘이교도와 더 가깝게 지냈는지’는 별도의 얘깃거리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일부로 남았지만 오늘 저녁 여전히 ‘세레니시마’다.
베네토 주경(州境)을 넘어 프리울리(Friuli) 주 우디네로 가는 길. 파사리아노(Passariano)라는 작은 마을에 큰 빌라가 하나 있다. 빌라 마닌(Villa Manin)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마지막 통령 루도비코 마닌(Ludovico Manin, 1725~1802)이 살던 문중(門中) 저택이다.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점령한 후 기거했던 곳이고 베네치아 공화국을 정치지도에서 지워 버린 캄포포르미오 조약(Treaty of Campoformio)이 서명된 곳이다.
베네치아에는 비운의 건물이다. 마닌이 1789년 통령에 선출되었을 때 경합했던 이가 뱉었다는 말이다. “프리울리 출신이 베네치아의 통령이 되다니. 베네치아 공화국도 이제 끝장이로구나!” 말이 씨가 됐는지 한 달 후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났고 1797년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에 아틸라(Attila)가 되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켜 냈다. 빌라 마닌은 오늘도 의구한데 갤리선들 가득하던 베네치아 만(灣)에는 곤돌라들만 한가롭다.⊙
사실 베네치아는 도시 안에 들어가지 않고는 밖에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들과 다른 점이다. 도시의 전경(全景)만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도처에 편재(偏在)한 것들 중에 베네치아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우선 고대 로마의 유적들이 하나도 없다. 이탈리아의 도시치고는 상당히 이국적(?)인 모습이다. 시기적으로 서(西)로마가 멸망하고 세워진 도시이니 당연한 얘기다.
또 역사적으로 봉건 영주들이 없다. 물 위에 세워진 도시이니 농토가 없고 농토가 없으니 영지가 없어 봉건제의 여지가 없었다.
베네치아에는 교황의 흔적도 거의 없다. 종교를 중요시했지만 교회와 사제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아 역대 교황들과 늘 긴장 관계였다. 도시 전체가 파문되기도 몇 차례였다. 먼저 베네치아 시민(Venetiano)이고 다음이 기독교도(Cristiano)라는 생각이 깊었다.
또 하나, 베네치아에서는 프랑스나 스페인 왕은 물론 신성로마 황제의 그림자를 느낄 수 없다. 중세 이래 이탈리아 전역을 제 집처럼 휘젓고 다닌 역대 신성로마 황제들이 베네치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베네치아는 천년의 역사 동안 그 어떤 외세로부터도 자유로운 독립 공화국이었다. 나폴리는 물론 피렌체도 밀라노도 범접 못해 본 경지였다.
베네치아 성장의 배경
조금 자세히 보자. 기원 5세기 반달족, 6세기 롬바르드족의 침입을 피해 온 사람들과 토착 어민들은 베네치아 석호(潟湖) 외곽의 리도(Lido)와 토르첼로(Torcello) 등 외곽 섬들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샤를마뉴가 정복을 시도하다 포기한 후 베네치아는 아예 신성로마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경계 밖으로 분류가 된다. 이래저래 육지 길이 막혀 생존의 통로가 바닷길 뿐이었다. 해양제국으로서의 미래가 타의(他意)로 열린 것이다.
베네치아가 리알토(Rialto) 섬을 중심으로 공공건물들을 세우고 정부체제를 정비한 것은 9세기 들어서다. 베네치아의 두 중심 통령궁(Palazzo ducale)과 산마르코 교회(Basilica di San Marco)를 세운 것도 이때다. 내외에 국가로서의 성립을 알린 셈이다.
기원 1000년은 베네치아가 인근 아드리아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달마티아에 첫 식민지를 개척한 해다. 해양국가로서의 첫걸음이다. 이를 기념한 행사가 유명한 ‘바다와의 혼인(Sposalizio del Mar)’ 축제다. 대소 선박들이 한껏 성장하고 총출동한 가운데 통령(統領, Doge)의 배가 카날그란데(Canal Grande)를 미끄러져 내려와 산마르코 앞바다에 반지를 토스해 던진다. 베네치아와 바다가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역사에 뿌리를 둔 각종 축제들이 많지만 자타 공인 축제의 효시는 이 혼인행사다.
이후 400~500년 베네치아의 성장은 눈부셨다. 1082년 비잔틴 황제의 인가장(Golden Bull)으로 보스포러스 이서(以西)의 자유통해권과 면세거래권을 얻어 낸다. 7세기 이래 이슬람에 의해 막혔던 동지중해 해로를 열어제친 것이다.
이내 시작한 1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해프닝은 베네치아가 활동영역을 넓히는 데 다시없는 계기였다. 다마스쿠스에서 예루살렘을 거쳐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는 레반트의 요충지들에 베네치아의 무역기지를 건설했다. 십자군 원정이 시들해지고 이들 근거지를 이슬람 세력이 재점령한 뒤에도 ‘베니스의 상인’들은 그대로 눌러앉아 본토와의 관계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계속하였다.
상인은 상대방의 종교나 문화를 묻지 않는다. 산호초로 피난해 온 사람들에게 바다 너머 낯선 사람들과의 거래와 공존은 생존본능의 결과였다.
베네치아 사람들의 진취적 기상은 이내 ‘동방을 진정 알았던 유일한 유럽인’이란 평판을 얻어 냈다. 마르코 폴로 집안처럼 중국에만 간 것이 아니다. 카보토(Caboto) 형제가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다모스토(Alvise da Mosto)가 아프리카의 카포베르데에 이른 것들이 다 그 맥락이다.
1380년 키오지아(Chioggia) 전투에서 숙적 제노바를 제압한 베네치아는 머지않아 스페인의 아라곤 제국과 함께 지중해를 동·서로 양분하기에 이른다. 이때쯤이면 크레타 섬을 비롯해 코르푸, 키프로스 등 동지중해의 웬만한 섬들은 대개 베네치아의 영토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이 정도의 성장은 생존본능과 진취정신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 뒤에 국가가 있었다. 무역강국 나아가 해양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베네치아가 구축한 국가 시스템은 경이로운 데가 있다. 철저한 공화제로 개인숭배나 파당 형성의 소지를 없애고, 국부의 극대화를 국가가 주도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11세기부터 생겨난 이탈리아 반도의 자치도시들은 예외없이 공화제로 출발했으나 1300년경에 이르면 그 대부분은 군주제에 굴복하고 만다. 1500년을 고비로 이탈리아 전역에 외세의 영향이 일반화될 즈음 진정한 독립세력으로, 또 공화체제로 남아 있은 것은 베네치아가 유일했다.
베네치아 선단의 선원들은 자유시민으로서 유사시 전투요원이 되는 자못 근대적 개념으로 조직되었다. 무역의 효율성과 안전성에 기여한 크게 앞서간 장치였다.
유사 이래 최고의 통치체제라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통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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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조르지오 마조레 섬에서 건너다본 피아체타. 산마르코 종탑 왼편 구석에 영미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해리스 바가 있다. |
베네치아 공화국 천년의 역사에 수많은 통령이 있었다. 4차 십자군 원정시 콘스탄티노플 약탈(1204)을 ‘기획’했다는 오명이 함께 따라다니는 단돌로(Enrico Dandolo, 1107-1205) 같은 카리스마의 통령들이 많았다. 포스카리(Foscari), 모체니고(Mocenigo), 그리마니(Grimani) 같이 통령을 여럿 배출한 큰 가문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통령의 자리에 명예와 권위는 주어지되 독점적 권력이나 차별적 특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자치도시들의 고질적 통폐이던 분파주의와 사적 폭력은 베네치아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개인숭배가 자라나기 힘든 제도요 문화였다. 귀족은 있되 번잡한 귀족 타이틀이 없고 가문은 있되 가문의 문장(紋章)이 인정되지 않았다.
통령 선출절차를 보아도 담합과 조작을 방지하기 위해 ‘우연’의 요소까지 포함시켜 가며 불필요할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하게 규정해 놓았다. 통령이 된 뒤에도 권력남용이 없도록 상시적 견제절차를 구비하고 가동시켰다. 가히 공화주의 시스템의 이데알티푸스다. 마키아벨리와 친구였던 사가(史家) 귀치아르디니(Guicciardini)가 “유사 이래 최고의 통치체제”라고 치켜세운 시스템이다.
이를 무릅쓰고 군주가 되어 보려 기도한 통령이 천년 역사에 단 한 명 있었다. 마리노 팔리에르(Marino Falier, 1274~1355)다. 그는 추상같은 사법기구의 대명사인 10인회의(Consiglio dei Dieci)의 신속한 체포, 평결, 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놀라운 수준의 법의 지배를 실천한 역사적 선례다. 국체보전이 임무인 10인회의는 그 결정이 즉각적이고 집행이 단호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심의결과는 철저한 비밀이었고 판결은 번복이 불가능했다.
라 세레니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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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가 되려다가 처단된 베네치아 통령 마리노 팔리에르의 죽음을 그린 외젠 드라크로와의 <마리노 팔리에르의 처형>. |
우선 조금 전에 얘기한 공화주의의 모범적 실천이 있다. 베네치아의 정치적 조용함이다. 내부의 정파 간 다툼이 외세와 연결된 일이 없고, 천년 역사 중에 단 한 번도 성공한 정변이 없었다.
현실적인 고요함의 원천으로는 과거에는 마차들, 지금은 자동차들이 못 다닌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실제 시외버스 터미널(Piazzale di Roma)을 빼고 도시 전체에 자동차가 없다. 대단한 차이다. 이 때문에 베네치아에서는 조금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그대로 중세(中世)에 온 느낌이 든다.
하지만 ‘세레니시마’의 제일 원천은 아무래도 베네치아 특유의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베네치아에는 특별한 공기가 있다. 계절이나 시간대에 관계없이 즉자적으로 느껴지는 그 무엇이니 공기랄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지중해의 햇빛과 베네치아의 물이 주는 효과에 주목했다. 영국의 예술비평가 러스킨(John Ruskin) 같은 이는 베네치아의 돌(건물 석재)을 얘기했다. 빛과 물과 돌이 어우러져 연금술처럼 만들어 낸 베네치아만의 공기. 카날레토(Canaletto), 구아르디(Francesco Guardi)의 그림에서 감지되는 그 공기다. 여기에 비잔틴과 오리엔트의 이국적인 요소들까지 더해져 베네치아는 많은 이들에게 뮤즈이고 영감이었다.
괴테는 베네치아를 두고 (너무 달라서) 달리 비교할 데가 없는 곳이라고 했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이탈리아 기행(Italian Hours)》에서 베네치아에 대해 뭔가 얘기를 덧붙이는 것이 민망한 느낌이라고 했다. 눈앞에 현란하지만 어느 순간 스러질 듯 덧없어 보이는 아름다움의 이미지는 토마스 만(Thomas Mann)이 소설로,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가 영화로 형상화했다. 18세기 베네치아 태생으로 고향의 이미지가 유럽의 유흥 수도로 격하(?)되어 가는 데 일정한 기여가 없지 않았던 카사노바(Giacomo Casanova)가 자신의 장기(長技) 여성공략에 십분 활용했음직한 그런 분위기다.
산마르코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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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울의 산마르코 광장. 왼쪽이 산마르코 교회, 오른편이 통령궁이다. |
산마르코 광장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로 나뉘어 있다. 교회 앞에 비둘기 많은 너른 광장을 통칭 ‘피아차’라 하고 바다에 면한 쪽 통령궁 앞에 갈매기 날아드는 곳은 피아체타(Piazzetta, ‘작은 광장’)라 부른다. 산마르코는 한눈에 보아도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유럽의 교회들과 외관이 다르다. 비잔틴 풍이다. 내부의 공간처리와 조도(照度)가 낮은 것까지 그렇다.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가 비잔틴 교회 건축의 원조라 하지만 500여 년 이슬람 치하에서 방치된 오늘날의 모습 가지고는 산마르코에 비할 수가 없다. 역사 발전의 곡절에 따라 베네치아의 교회가 비잔틴 제국의 본토이던 오늘의 그리스, 터키 지역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전형적인 비잔틴 교회”(베렌슨)가 된 것이다.
넓지 않은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동서안(東西岸)의 문화적 차이가 작지 않다. 역사적으로 고대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의 차이에서 유래한다. 그 뒤에 발칸 반도에 슬라브족의 대유입이 있었고 기독교의 대분열도 있었다. 차이가 더욱 벌어졌고 그 두 문화가 만나는 접점에 베네치아가 있는 셈이다.
산마르코는 문화적으로 두 영향의 풍요로운 조합을 보여준다. 조각, 부조(浮彫), 프레스코 등 각종 조형이 다양하지만 압권은 역시 비잔틴 예술의 백미 모자이크다. 비잔틴 교회에 공통인 어둠침침한 내부에 들어서면 순간의 무명(無明)이 차차 걷히며 벽면과 천장의 모자이크 인물(그리스도와 성인)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중세인들에게 신비와 경외의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산마르코에서 꼭 챙겨 보면 좋을 것이 중앙 제단의 팔라도로(Pala d’Oro)와 (중앙 입구 위에 복제본, 부속 박물관에 원작이 있는) 네 마리 청동마상이다. 두 대표 예술품 뒤의 역사적 곡절이 기박하다. 팔라도로를 장식한 현란한 보석들은 대부분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 약탈’(1204)에서 가져온 것이고, 청동마상은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 정복 후 나폴레옹이 약취해 갔던 것을 1815년 워털루 전쟁으로 나폴레옹 자신이 역사의 뒤안길로 밀린 후 돌려받은 것이다.
하나 더, 산마르코는 베네치아의 중심교회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할 때까지 ‘두오모’나 ‘카테드랄레’가 아니라 통령의 개인 경당 지위에 머물렀다. 베네치아가 교황의 영향을 차단하려 얼마나 애썼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통령宮
곁에 나란히 서 있는 통령궁의 건축 스타일은 산마르코와 많이 다르다. 아라베스크 장식과 기하학적 패턴이 현란하고 삼엽(三葉, trifoglio) 아치와 사엽(四葉, quattrofoglie) 톤도를 한껏 활용한 소위 베네치아식 고딕이다. 지상층과 2층은 새하얀 석재로 장식하고 3, 4층은 붉은 빛 도는 베로나산 대리석으로 마감했다. 이 순백(純白)의 석회석이야말로 많은 이들이 상찬하는 베네치아의 간판 석재다. 아드리아 건너 이스트리아(Istria)가 주산지다. 베네치아의 첫 식민지였던 달마티아 지역은 무역기지일 뿐 아니라 건축재의 최대 공급지였다.
통령궁은 두말할 것 없이 천년 베네치아의 심장이다. 통령의 사무실과 관저, 원로원, 10인회의 등 국가기관 일체가 이곳에 있었다. 예술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다. 베네치아의 역사를 되새기며 이들 사무실, 접견실, 회의실들을 돌아보는 재미는 이내 내부공간 곳곳의 도저한 장식들로 옮아간다. 입구와 천장과 벽면뿐 아니라 바닥과 층계참과 창틀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구석, 어느 한 표면을 꾸미지 않고 놓아 둔 공간이 없다. 그중에 전체회의실(Sala del Maggior Consiglio)은 보기 드문 명품 공간이다.
그렇게 방대하고 화려하고 위압적인 공간을 그처럼 섬세하고 정제되고 차분한 느낌이 들도록 만든 것은 예술의 힘일 것이다. 입구 쪽 벽면 전체를 차지한 틴토레토의 초대형 그림 <천국(Paradiso)>. 단일폭으로 세계 최대라는 설명이 없어도 감탄에 부족함이 없다. 벽면 상단 코르니체(cornice)를 따라 돌아가며 역대 통령들의 초상이 형형으로 당당하다. 딱 한 곳에 초상 대신 검은 천이 덮여 있다. 반역으로 처형된 통령 팔리에르의 자리다. 통령의 지존으로도 ‘세레니시마’는 범할 수 없었다. 검은 천 위의 흰 글씨(‘HIC EST LOGVS MARINI FALETRO DECAPITATI PRO CRIMINIBVS’)가 간단 명료하다. 베네치아식 춘추 서법(書法)이다.
베네치아 역사 보여주는 코레르박물관
다른 그림들도 많다.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와 티치아노(Titiano)도 일부 있지만 틴토레토, 베로네제, 팔마 부자(父子), 바사노 일가 등 후기 르네상스 사람들의 대작이 대부분이다. 1574년의 큰 화재가 원인이란다. 모두 베네치아와 베네토 출신 일색이고 외부 화가의 작품이 별로 없는 것도 눈에 띈다.
건물을 나서면 안뜰로 내려오는 ‘거인층계참’(Scala dei Giganti)이다. 건물 안쪽에서 보는 외관은 바깥 정면(facciata)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원(tondo)과 아치(arco)와 꽃줄(festone) 등 우리 눈에 익숙한 르네상스 장식이다. ‘로마 약탈’(1527)을 피해 베네치아에 와 활동한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작품이다. 산소비노 덕분에 베네치아도 이탈리아임을 새삼 상기한다.
피아차 건너편의 코레르 박물관(Museo di Correr)은 산마르코 교회와 통령궁에서 익힌 베네치아 문화사를 정리해 보는 곳이다. 예술뿐 아니라 정치, 사회, 산업 등 베네치아의 전모를 보기 좋게 전시해 부문별 박물관 여러 곳을 다닐 필요 없이 해 놓았다.
몇 개 걸려 있는 통령들의 초상 중에 포스카리(Francesco Foscari, 1423~1457 재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혜와 의지를 갖춘 위엄 서린 초상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절정기를 주재하며 34년간 통령의 지위에 있었다.
이 시기에 베네치아는 해상국가(Stato di Mar)로서의 지위를 완결하고 밀라노의 비스콘티(Visconti)를 상대로 베네토 일대는 물론 롬바르디아의 브레시아, 베르가모까지 육지 영토를 넓힌다. 육상국가(Stato di Terra)를 겸하게 된 것이다. 카날그란데(Canal Grande)가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e dell’Academia) 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물목에 카포스카리(Ca’Foscari)가 있다. 베네치아 대학 본관 건물이다. 포스카리 가문이 대대로 거주하던 사저(私邸)로 베네치아 대학을 통칭 카포스카리로 부른다.
프라리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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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리 교회의 정면. 벨리니와 티치아노가 있고 몬테베르디와 카노바가 있는 볼거리 풍성한 교회다. |
프라리는 교회가 갖고 있는 좋은 볼거리들을 집약해 보여준다. 사람 좋은 신부(神父)의 안내 덕에 더욱 즐거운 방문이었다. 우선 피렌체의 산타크로체처럼 큰 인물들의 묘소와 추모조형(funeral monument)이 많다.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의 최고봉 티치아노(Titiano Vecellio, 1488~1576)의 묘소가 초입에 있다. 중앙 제단의 장엄한 제단화 <성모승천(Assunta)>을 그린 이다. 신부의 설명을 들으며 필자가 슬쩍 “카도레(Pieve di Cadore, 티치아노가 태어난 베네토 돌로미티의 산골 마을)의 소년이 프라리에 잠들어 있구나!”
한마디 해 보았다. 과연 신부는 반색을 하며 카도레에 가 봤냐 묻더니 흥이 나서 얽힌 스토리들을 풀어 놓는다. 안내하는 이들한테 더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첩경이 적당한 추임새임을 다시 확인한다.
맞은편에 18세기 후반 신고전주의 선풍의 선두에 있던 다산(多産)의 조각가 카노바(Antonio Canova)의 묘소가 있다. 본인이 생전에 디자인해 두었다는 현대풍 신고전 조형이 중세 고딕의 교회 안에 외로운 느낌이다.
카노바 묘소와 나란히 위치한 호화 묘소는 17세기에 통령을 지낸 페사로(Giovanni Pesaro)의 것이다.
곁에 티치아노 작 <카페사로의 마돈나(Madonna di Ca’Pesaro)>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빈 공간이다. 서양미술사 책들에 단골로 소개되는 그림으로 창의적 구도와 선구적 색깔 사용으로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독자성을 내외에 알린 명작이다. 신부에게 물었더니 그림 뒤 벽면에 습기와 균열이 와 제단 옆 별도 공간에 옮겨 놓았다며 걱정이 많다. 있을 곳에 걸려 있지 않은 좋은 그림은 보기에 딱하다.
오페라를 창안한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도 이 교회에 묻혀 있다. 세례당 옆 조그만 경당 안이다. 바이올린 제작으로 유명한 크레모나 태생으로 베네치아에서 주로 활동한 바로크 사람이다.
스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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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도레 시청 앞 광장의 티치아노 동상. 화구를 손에 들고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
이 그림은 제단 가까이서 올려다보아야 한다며 신부가 권유한다. 역시 그림들은 의도된 곳에 있어야 하는 소이다. 제단 주위 정교한 상감목(象嵌木, intarzio) 장식의 합창석(coro) 양옆으로 18세기 오르간이 높직하다. 코로 공간의 음향효과를 보여주겠다며 신부가 느닷없이 성가 한 소절을 직접 실연한다. 갈데없이 이탈리아 사람이다.
성구실(sagrestia)로 옮기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의 성모자상 삼면화(三面畵, trittico)가 맞아 준다. 지극히 고운 형상과 색조 앞에 가벼운 한숨마저 나온다.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긴 뒤에도 남을 수밖에 없는 잔잔한 슬픔이 성모의 눈매와 입가에 어려 있다. 베네치아의 별명이기도 하지만 벨리니의 성모야말로 ‘라 세레니시마’다.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무성한 여름이라면 벨리니는 파릇한 초봄이었다.
리알토 다리 건너 자니폴로 교회로 가기 전에 한군데 들러 가자.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로코(Scuola Grande di San Rocco). 프라리에서 작은 골목 하나 사이에 두고 있다. 스쿠올라는 학교가 아니라 수호성인을 하나씩 정해 모신 상인들의 친목단체다.
통령궁에서 만났던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가 신·구약의 스토리와 성 로코의 행적을 그림으로 제작해 2층 큰 건물의 구석구석을 뒤덮어 놓았다. 23년이 걸렸다고 한다. 경이로운 창의과 정력의 화가다. 시각과 구도의 독창성과 명암의 극적인 활용은 앞서 티치아노에서도 본 것이지만 그 화폭의 스케일과 역동성은 독보적이랄 수밖에 없다. 어두운 색조에 빛의 효과를 한껏 활용한 특유의 기법이 건물 전 공간에 충만하다. 웅혼, 장려하고 신비스러움을 넘어 자못 초월적인 분위기다. 통령궁과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비롯해 베네치아에 틴토레토의 그림들이 많지만 역시 이곳이 압권이다. 나폴레옹이 갖은 것 다 떼어 가고 훼손하면서도 이곳은 지나쳤다고 한다. 거의 전부가 완벽히 남아 있다.
콜레오니 기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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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니폴로 교회 앞 광장의 콜레오니 기마상. 실루엣으로 잡힌 기마상에 동감(動感)이 살아 있다. |
교회 안은 역대 통령 25명의 묘소들이 가득한 베네치아의 판테온이다. 장의(葬儀) 예술의 박물관 격이다. 특히 모체니고(Mocenigo) 집안 통령들의 묘소가 볼 만하다. 모체니고 가문은 피렌체의 메디치 이상 가는 권세를 누린 집안이다. 일곱 명의 통령을 비롯해 문무의 고관들을 무수히 배출했다. 베네치아만의 정치 전통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군주 노릇을 했을 집안이었다.
이왕 카스텔로 구역(Sestiere di Castello)까지 왔으니 몇 곳 더 보고 가자. 스쿠올라 디 산조르지오 델리 스키아보니(Scuola di San Giorgio degli Schiavoni)는 달마티아 출신 석재(石材) 업자들의 클럽하우스다. 앞서 본 산로코 스쿠올라와는 분위기가 딴판이다. 카르파치오의 단정하고 경쾌한 명작들이 즐비해 기억에 남는 장소다.
하우스 뮤지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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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데미아 다리에서 바라본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 카날그란데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다. |
베네치아에 소위 ‘하우스 뮤지엄’(단독건물에 크지 않은 프라이빗 컬렉션)들이 많지만 쿠에리니 스탐팔리아 박물관(Museo di Querini Stampalia)은 그중에서도 보석이다. 산마르코 광장과 리알토 다리의 중간 지점인데도 한산하기가 바로 산골에 든 듯 조용하면서 널찍한 포르모사 광장(Campo Formosa)의 한쪽에 있다. 베네치아가 자랑하는 현대 건축가 스카르파(Carlo Scarpa)의 정원이 차분해서 좋다.
전시는 코레르 박물관의 흥미로운 축소판이다. 백미는 역시 조반니 벨리니의 <아기예수 봉헌>. 스카르파가 특별 제작한 이젤 위에 놓여 있다. 성모와 아기예수, 예언자 시메온과 등장인물들이 배경묘사 없이 전면(前面)에 당겨져 화폭 가득하다. 전혀 새로운 구도와 인물 표현이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선도한 대표화가답다. 그는 1453년 비잔틴 제국을 없이하고 기세등등하던 오토만 터키의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플에 건너가 술탄 메멧(Memet II)의 초상화를 그려 주기도 했다.
벨리니를 하나만 더 보고 싶으면 바로 근처에 산자카리아(San Zaccaria) 교회가 있다. 그림 많은 예쁜 르네상스 교회에 그의 만년작 <성모자와 성인들>이 걸려 있다. 당시 베네치아의 유행대로 대담한 색조를 사용하고도 변함없이 온화한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 냈다.
괴테의 탄식
산자카리아를 나와 왼쪽으로 난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면 바로 피아체타와 이어지는 부두(埠頭)가다. 교회들과 박물관들도 보아야 하겠지만 베네치아에 오면 역시 그 물과 돌과 빛 그리고 그 공기라지 않던가. 이런 여건이야말로 베네치아의 건물과 그림과 조각과 예술품을 가능하게 해 준 원천이요 탯줄일 터이다.
베네치아를 며칠 돌아본 후 괴테의 탄식조 소감이다. “우리 북쪽 사람들은 흙먼지 날리는 칙칙한 공기 속에 (직사광선은 고사하고) 반사된 빛마저 풀이 죽는 환경이고 그나마 비좁은 공간에 살아가니 (베네치아 사람들과 같이) 세상을 기쁨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흙먼지와 물안개의 차이다.
물안개 너머 바라보이는 산조르지오 마조레(S.Giorgio Maggiore) 교회의 유혹은 외면하기가 쉽지 않다. 굳이 바포레토(vaporetto)를 기다릴 것 없이 곤돌라로 건너가 본다.
교회 건물은 비트루비우스 이래의 건축가로 대접받는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0~1580) 작품이다. 고전주의 요소들을 과감히 도입한 르네상스 건축으로 베네토 일대에 불멸의 족적을 남긴 이다. 엄격한 절조와 균형을 중시하는 그의 스타일이 정작 베네치아에서는 환영을 못 받아 본섬 리알토에는 그의 건물이 없다. 산조르지오 마조레 섬의 이 교회와 주데카 섬의 명물 레덴토레(Il Redentore) 교회가 유이(唯二)하다. 작은 섬에 홀로 선 교회가 오히려 팔라디오 건축의 단아함에 적합해 보인다.
부속 수도원도 필수 팔라디오 코스다. 특히 정원회랑(chiostro)은 대칭과 조화의 미를 완벽하게 구현한 모범이다. 건물 안 수사들 식당(refettorio)을 찾아 한쪽 벽면을 덮은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1588) 작 <카나의 결혼연>을 원위치에서 감상하는 특권을 누려 보자. 다만 품질 좋은 사진판이고 원작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지만 현장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미술은 베로네제로 절정에 이른다.
다니엘리 호텔에서 마시는 프로세코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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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날그란데의 팔라초들. 맨 왼쪽이 카레초니코(Ca'Rezzonico), 오른쪽 끝이 베네치아 대학 본관인 카포스카리(Ca'Foscari)다. |
테라스 카페에 앉아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S.Maria della Salute) 교회의 하얀 달덩이 쿠폴라를 바라보노라면 세상 시름은 물론 베네치아를 찾은 즐거움마저 간 곳이 잠시 묘연하다. 19세기 유럽의 낭만객들이 ‘완벽한 죽을 자리(perfect place to die)’로 베네치아를 꼽았던 이유를 알듯 말듯하다. 팔라디오와 그 제자 스카모치(Scamozzi)의 맥을 잇는 롱게나(Baldassare Longhena, 1598~1682)의 디자인이다. 롱게나는 베네치아의 바로크 건축을 선도하며 카페사로(Ca’Pesaro), 카레초니코(Ca’Rezzonico) 등 카날그란데 가의 명품 건물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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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카날그란데 변의 다른 건물들과 달리 나지막한 단층이어서 오히려 눈에 띈다. |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은 미국 광산재벌 집안의 상속녀로 당대의 전위 미술인들과 광범하게 교유하며 그들의 작품을 판매하고 수집했던 호사가 신세대 여성이었다. 뉴욕의 원조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운 솔로몬 구겐하임이 큰아버지이고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가 한때 남편이었다.
집안의 지인이자 르네상스 미술의 권위인 베렌슨(Bernard Berenson, 1865~1959)이 자신의 추상미술 취미를 못마땅해하며 미술관을 한 번도 찾아 주지 않자 “와 주시면 그림들을 모두 천으로 가려 놓고 모시겠다”고 제안했다는 등의 얘기들이 자서전 《미술 중독자의 고백》에 나온다. 베렌슨은 찾지 않았어도 페기 구겐하임 콜렉션의 인기는 꾸준해 베네치아로서는 아주 고마운 미술관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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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마르코 부두의 곤돌라들. 雨中에도 산조르지오 마조레에 건너갈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
마르코 폴로의 시절이던 13세기, 상인의 나라 베네치아는 유럽 최고의 부자 도시로 꼽혔다. 10만명 정도의 시민이 3300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3만6000명에 달하는 선원 겸 수병을 유지했다는 것은 대단한 기록이다.
공통이익(경제)과 공화주의(정치)에 한번 합의한 후 어느 개인도 어느 가문, 어느 파당도 이를 범하지 못했다. 국가운영의 전일성(專一性)과 효율성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전성시절의 제노바도, 욱일의 기세이던 오토만의 메멧 술탄도, ‘광개토교황’ 율리우스가 주도한 캉브레(Cambrai) 연합군도 어쩌지 못한 베네치아였다. 그 과정에서 ‘영혼과 이윤을 맞바꾸었는지’, ‘이교도와 더 가깝게 지냈는지’는 별도의 얘깃거리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일부로 남았지만 오늘 저녁 여전히 ‘세레니시마’다.
베네토 주경(州境)을 넘어 프리울리(Friuli) 주 우디네로 가는 길. 파사리아노(Passariano)라는 작은 마을에 큰 빌라가 하나 있다. 빌라 마닌(Villa Manin)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마지막 통령 루도비코 마닌(Ludovico Manin, 1725~1802)이 살던 문중(門中) 저택이다.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점령한 후 기거했던 곳이고 베네치아 공화국을 정치지도에서 지워 버린 캄포포르미오 조약(Treaty of Campoformio)이 서명된 곳이다.
베네치아에는 비운의 건물이다. 마닌이 1789년 통령에 선출되었을 때 경합했던 이가 뱉었다는 말이다. “프리울리 출신이 베네치아의 통령이 되다니. 베네치아 공화국도 이제 끝장이로구나!” 말이 씨가 됐는지 한 달 후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났고 1797년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에 아틸라(Attila)가 되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켜 냈다. 빌라 마닌은 오늘도 의구한데 갤리선들 가득하던 베네치아 만(灣)에는 곤돌라들만 한가롭다.⊙
김명수
(2014-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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