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테,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 화산폭발로 매몰되었다가 발굴된 폼페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유적지 건물 무너지기도
⊙ 테너 카루소가 마지막 봄을 보낸 소렌토의 비토리아 호텔
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화산폭발로 매몰되었다가 발굴된 폼페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유적지 건물 무너지기도
⊙ 테너 카루소가 마지막 봄을 보낸 소렌토의 비토리아 호텔
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폼페이 유적지의 포로(Foro). 공공건물과 신전들이 위치한 광장으로 배경에 베수비오 산이 보인다.
예부터 ‘복받은 캄파니아(Campania Felix)’라고 했다. 온화한 기후와 빼어난 풍광 그리고 비옥한 토양이 이유였다. 나폴리는 오랫동안 캄파니아의 중심이었고 그 일대는 고대 이래로 인기가 높던 땅이었다. 그중에도 나폴리에서 살레르노에 이르는 해안은 특별하다. 포추올리(Pozzuoli)에서 시작해 나폴리 만(Golfo di Napoli)의 반원(半圓)을 돌고 소렌토 반도와 아말피 해안(Costiera Amalfitana)을 따라 살레르노까지 가는 길이다. 별명하여 나폴리 리비에라(Riviera Napolitana)다.
우선 연안 마을들의 면면이 다르다. 이스키아와 프로치다 두 섬이 코앞에 보이는 쿠마(Cuma) 유적지에서 시작해 나폴리를 지나면 바로 베수비오 산이다. 그 아래가 베수비오의 화산재에 묻혀 2000년 가까이를 지낸 폼페이, 에르콜라노, 토레 아눈치아타 등 고대 마을들이다. 나폴리 만의 끝자락에 카스텔라마레, 비코 에쿠엔세를 지나 소렌토에 이르면 카프리 섬이 닿을 듯하다. 이어지는 아말피 해안의 절경! 전체로서도 절경이지만 아말피 해안의 마을들은 개성미가 장점이다.
포시타노, 푸로레, 아말피, 라벨로 등 마을들이 서로 붙어 있다 싶게 가까우면서 각자가 다르고 그 분위기와 특색이 각기 출중하다. 길지 않은 해안을 따라 이렇게 다양한 소읍과 섬들이 서로의 내력과 매력을 뽐내는 유례는 다시 없을 것이다.
단지 자연경관과 휴양지로서의 장점 이야기가 아니다. 고대(古代)와 중세(中世)의 역사가 도처에 남아 숨 쉬고 고대 이전의 신화와 전설이 곳곳에 서려 있다. 호메로스가 들려주던 옛이야기의 흥미로운 무대였고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로마 건국 전승의 현장이다.
베르길리우스 자신이 묻혀 잠든 곳도 나폴리 시내의 한 언덕 위다. 풍광은 물론이고 기후까지 일 년 사시 보장되다시피 하니 이 변덕 없는 천연의 뮤즈를 찾아 수많은 세계의 예인(藝人)과 문사(文士)들이 다녀갔다.
아예 한때를 거주하며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긴 이들도 많다. 포시타노의 클레(Paul Klee)와 디아길레프, 아말피의 입센(Henrik Ibsen), 라벨로의 바그너, 소렌토의 니체, 이스키아 섬의 오덴(WH Auden)과 커포티(Truman Capote), 프로치다 섬의 르 코르뷔지에 등은 다만 19세기 이후의 몇몇 예일 뿐이다. 카프리 섬에 이르면 일일이 거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명단이 길다.
시빌라 암굴
이번 여정은 여러모로 쿠마에서 시작하는 것이 제격이다. 역사적으로도 쿠마는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한 그리스 사람들의 첫 마을이다. 지금은 그야말로 황성마저 희미한 옛터뿐이지만 해안 높직이 위치한 아크로폴리스 자리에 서면 목전의 이스키아(Ischia) 섬은 물론 멀찍이 카프리 섬과 길쭉하게 뻗어나온 소렌토 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찾아갈 절경들의 훌륭한 예고편이다.
아크로폴리스 양옆으로 제우스 신전과 아폴로 신전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원형극장과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음택마을)가 있다. 로마 사람들의 폼페이 유적지에 비해 남아 있는 건물이 많지 않아 그렇지 시기적으로는 근 800년이 앞선다.
쿠마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빌라 암굴(Antro della Sibilla)이 볼 만하다. 세심한 독자들은 지난 5월호에서 티볼리에 들렀을 때 빌라 그레고리아나 언덕 위로 티볼리 시빌라(Sibilla Tiburtina)의 거소를 찾았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이 암굴은 못지않게 유명한 쿠마 시빌라(Sibilla Cumana)가 살던 곳이다.
엄청난 바위산을 뚫어 널찍한 터널을 내고 그 맨 끝에 조그만 방을 조성해 놓았다. 베르길리우스의 에네아스가 쿠마 시빌라로부터 자신이 로마 문명을 세우리라는 예언을 들었다는 그곳이다. 전승의 진위는 따질 일이 아니나 세팅이나 분위기가 그럴 법하다.
일찍이 1343년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이곳을 다녀가며 했다는 말이다. “이곳이 시빌라가 살던 곳이구나! 바보들은 들어간 다음 다시 돌아나오지 못했고 현자들은 처음부터 들어갈 생각을 안 했다는 그 무시무시한 암굴이로구나!”
쿠마에서 나폴리는 지척이다. 나폴리 쪽으로 넘어오는 초입이 포실리포 언덕이다. 이곳에 잠시 멈춰 나폴리 만을 한번 굽어본다. 나폴리 시내가 왼편 해안을 따라 펼쳐지는 저편에 베수비오의 두 봉우리가 신비롭고, 멀리 소렌토 반도가 길게 뻗어 끝나는 곳에 카프리 섬이 아련하다. 한 번 보면 그 경관의 수려함에 탄성이 절로 나오고 학창시절 굳게 입력된 후 좀체 잊히지 않는 노래가 떠오른다.
Sul mare luccica l’astro d’argento, Placida `e l’onda prospero `e il vento~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고,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포실리포 언덕을 올라가면 꼭대기가 베르길리우스 공원이고 내려가면 메르젤리나(Mergellina) 부두다. 한 곳에는 고대 로마 최고의 시인이 잠들어 있고 또 한 곳은 아말피 해안 바위섬에 살던 비운의 사이렌 파르테노페(Partenope)의 시신이 밀려왔다는 곳이니 두루 심상치 않은 곳이다. 여기서 시작하는 해안도로(비아 카라치올로)가 바로 이 노래의 고향인 산타 루치아 부두까지 이어진다. 노래 5절은 이렇게 나간다.
O dolce Napoli o suol beato, Ove sorridere volle il creato~
(오 예쁜 나폴리 복받은 땅이여, 신께서 바라던 미소가 있는 곳~)
자고이래 땅으로 바다로 물산이 풍부하고 기후와 풍광이 수려하니 사는 이들의 마음이 여유로웠을 것이다. 나폴리 민요(Canzone napolitana)가 발달한 장소이다. 성 아고스티노(Sant’Agostino·354~430)의 어록에 “Chi canta pregha due volte”란 말이 있다. 노래하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이다. 중국말로 심광신이(心曠神怡)의 경지다.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도시 하나만을 놓고 보면 사실 나폴리는 도시 자체로 아름답다 하기엔 조금 모자라다. 피렌체나 시에나의 전경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마디로 나폴리는 인공(人工)에 풍수(風水)를 함께 보아야 하는 곳이다.
괴테가 일찍이 “나폴리를 보고 정신을 빼앗긴 모든 이를 용서하시라”고 신(神)께 빌었다 하고 “어떤 말이나 글 혹은 그림으로도 나폴리를 온전히 묘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을 때 이런 경지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괴테의 나폴리 칭송은 유별날 정도다. 베수비오를 옆에 끼고 티레노 너른 바다를 내다보며 기다란 소렌토 반도가 천연의 방파제로 감싸주는 햇볕 가득한 나폴리의 시원한 경관은 힐끗 보아도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사행천(蛇行川) 변에 옹기종기 엎드린 듯 자리 잡은 로마를 여기에 비할 수 없다고 한 이도 괴테다.
그의 20개월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1786.9~1788.4)의 주목적이 고전 탐사인 만큼 로마에서 1년 넘어 체류한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나폴리에서만 한 달 반을 보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나폴리 사람들이 하는 말대로, ‘Vedi Napoli e poi muori!’, (죽더라도)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였다.
이런데다가, 아니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나폴리는 남부 이탈리아의 오랜 중심지였다. 세계의 경이(Stupor Mundi)란 별명을 얻으며 메초조르노의 전설이 된 페데리코 2세(1194~1250)가 죽자 프랑스 앙주 가(家)의 샤를이 교황의 후원으로 남부 이탈리아의 맹주(盟主)가 된다.
이 샤를 1세가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를 나폴리로 옮기고 오늘 우리가 보는 나폴리의 모습을 일구는 역사(役事)를 개시하는 것이다.
이후 나폴리는 통일 시까지 남부 이탈리아의 600년 도읍이 된다. 나폴리 왕국의 전성기랄 수 있는 17세기에는 파리 다음 유럽 제2의 도시였고, 19세기 통일 당시에도 단연 (로마에 앞서) 이탈리아에서 제일 큰 도시였다.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Teatro di San Carlo)은 일찍이 1737년 개관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오페라 극장이다. 19세기 중반까지도 많은 이는 라 스칼라(La Scala, 밀라노)나 라 페니체(La Fenice, 베네치아) 극장에 앞서 산 카를로에서의 초연(初演)을 최대 영광으로 알았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이탈리아의 통일 운동) 당시의 세력관계로 볼 때 나폴리 왕국이 이탈리아의 다른 어떤 세력에 의해 병합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역사에서 드물지 않게 보듯 그런 일이 벌어졌고 여러 측면에서 많이 다른 남·북 이탈리아는 한 나라가 되었다.
풍광 수려하고 지내온 역사가 이러하니 나폴리에는 볼 것이 많다. 무엇을 볼까보다 어떻게 돌아볼까가 걱정이다. 게다가 시역(市域)이 넓어 걸어다닌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많이 알려진 이 지역의 다른 문제들도 만만치 않다. 거리에 자동차와 사람이 너무 많아 혼잡, 무질서에 시끄럽고, 다소 지저분하다. 대중교통이나 행정 관리(개관시간 운영 등) 수준이 기대만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로 해서 ‘역사, 문화’는 생략한 채 ‘경치’만 보고 간다면 실수다. 문제점들이란 것도 보기에 따라선 이 도시 나름의 활기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을 50~60년대 한국의 대도시에서 보낸 필자 같은 경우에는 옛 고향을 보는 듯 크게 낯설지 않았다.
산타 루치아에서 ‘노래’ 얘기하다 사설이 길어졌다. 보메로(Vomero)는 포실리포 곁에 좀 더 높은 언덕이다.
나폴리의 두 박물관
언덕 정상에 있는 산 마르티노 수도원(Certosa di San Martino)은 앙주 시절에 지은 것을 1600년대 나폴리의 전성 시절에 대대적으로 증축한 것이다. 조용한 생활이 기본인 수도원조차 안팎을 바로크로 성장했다. 수도원 교회를 보아도 보통은 실무공간으로 남겨두는 성구실과 사제관까지 정성으로 장식했다. 그 덕에 볼거리가 많다.
귀도 레니, 리베라(Ribera)에서 루카 조르다노, 카라치올로, 시몽 부에(Simon Vouet) 등 당대 바로크 거물들의 대작을 현장에서 보는 울림이 크다. 안뜰 회랑(chiostro)이 수도원 부속임을 잊을 정도로 작은 공원만 하고 경내에 함께 있는 나폴리 특유의 자랑거리인 프레세페(presepe, 본래 ‘아기예수 구유’의 뜻인데 아기예수 탄생 장면을 재현한 설치조형에 대한 통칭) 전시관도 볼 만하다.
나폴리에 오면 산 마르티노와 함께 꼭 보아야 할 박물관이 두 개 있다. 국립 고고학 박물관과 카포디몬테 국립 미술관(Galleria Nazionale di Capodimonte)이다.
하나는 고대 고전시기 조각, 부조, 프레스코, 모자이크 등 세계 최대의 고고학 박물관이고, 카포디몬테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그림들을 주력으로 한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이다.
이 두 곳의 방대한 소장(所藏)이 이룩된 배경이 의외로 간단하다. 18세기 초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3국 간 스페인 계승전쟁의 곡절 끝에 스페인 보르보네 왕가의 카를로 3세가 나폴리 왕으로 부임한다. 그가 나폴리에 와 제일 먼저 일으킨 공공사업 중 하나가 폼페이 유적지 발굴이다. 이와 거의 동시에 그는 파르네세 가의 마지막 상속녀 엘리사베타 파르네세를 모친으로 둔 덕에 가문의 200년 콜렉션을 통째로 상속한다.
폼페이를 발굴해 얻은 예술품들도 엄청나지만 교황 파올로 3세(1534~49간 재위)가 일으킨 가문이 200년을 지속하며 모은 미술품들이 그에 못지않게 대단하다.
동시대 그림들이야 화가들한테 주문 제작한 것도 많지만, 고대 조각들은 대개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이나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노 등지에서 그냥 줍다시피 가져다가 로마의 파르네세 궁(Palazzo Farnese, 현재 프랑스 대사관 청사)을 비롯해 파르마, 카프라롤라 등 전국에 산재한 가문의 부동산들을 장식했던 물건들이다. 이렇게 모인 물건들이 두 박물관에 가득하다. 조각들은 대개 고고학 박물관에, 그림들은 카포디몬테에 모아놓았다.
어디서 가져왔든 상관없이 <파르네세 황소> <파르네세 헤라클레스> 등 고고학 박물관의 초대형 건물 네 개 층에 빼곡한 조각상, 부조물, 프레스코, 모자이크들은 경탄을 금치 못할 대작이요 명품들이다.
이미 2000년 전 이만한 완성도를 이루었으니 ‘고전’이라 부르기로 한 것이리라. 그 뒤의 것들은 다 공자 말씀대로 ‘술이부작(述而不作)’임을 알겠다.
카포디몬테는 문자 그대로 나폴리의 안산(案山) 꼭대기에 자리한 카를로 왕의 이궁(離宮)이었다. 미술관의 입구에 티치아노 작 <파올로 3세와 조카들> 초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티치아노의 거침없는 붓길 속에 교황의 눈매와 입매만이 500년 지난 이제도 움직일 듯 섬세하다. 지력과 염력이 느껴지는 얼굴이요 자태다. 이 정도 되어야 권모술수와 백가쟁명의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200년 가업을 일굴 수 있지 싶은 모습이며 이제 인물화의 과제가 더 이상 모사(模寫)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르네상스의 한복판을 종횡한 교황과 그 집안에 손색없게 콜렉션은 지역 상관없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들을 망라한다. 마솔리노, 만테냐, 필리피노 리피,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파르미자니노, 코레조 등등. 이 총중(叢中)에 마사치오의 단정한 <예수십자가형>이 르네상스의 시원(始原)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꼭 보아야 할 교회 두 곳
별도 층의 나폴리 회화관도 꼭 들러야 한다. 중세 말 멀리 시에나의 거장들부터 나폴리 왕국 전성기의 바로크 화가들을 거쳐 19세기 포실리포 스쿨에 이르는 600년 콜렉션이다. 앙주 가는 당시 교황들과 친분이 있어 카발리니(로마), 조토(피렌체), 시모네 마르티니(시에나) 등 중세 말의 거장들을 나폴리에 초빙했었다.
주력은 산 마르티노에서 보았던 나폴리 바로크 거장들의 작품이다. 나폴리 미술의 황금기를 이끈 이들은 유럽 전역에서 이름을 떨치던 대가들이었다. 맨 끝 방에 홀로 걸린 지나칠 수 없는 그림이 있다. <예수책형(磔刑)>. 이탈리아 전역과 몰타, 시칠리아를 떠돌며 짧고 험한 생을 보낸 카라바조가 만년에 나폴리에 남겨준 걸작이다.
이제 교회 몇 곳을 둘러볼 차례다. 언덕을 내려오면 환경이 일변하며 다시 어수선한 나폴리 시내다. 옛적 한문시간에 배웠던 훤소(喧騷)란 말 그대로다. 시내에서도 스파카나폴리(Spaccanapoli)와 비아 트리부날리(Via Tribunali) 일대에 좋은 교회와 볼거리들이 집중되어 있다.
그 한편에 서 있는 두오모. 고대 로마의 아폴로 신전터 위에 샤를 1세가 프랑스 고딕 양식의 성당을 세우고 그 뒤 나폴리 바로크로 현란하게 꾸민 성당이다.
나폴리의 수호성인 성 제나로(San Gennaro)를 모신 경당에는 성인의 피를 보관한 유리 용기를 모셔놓았다. 일 년에 두 차례 정해진 날에 무사한 일 년을 바라는 신심 깊은 나폴리 사람들을 어김없이 안심시키는 고대의 신탁(神託) 같은 보물이다. 언젠가 한번 성인의 피가 녹지 않아 온 시민이 걱정하던 해에 나폴리 축구팀이 ‘세리에 비(Serie B)’로 강등되는 ‘재앙’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두오모에서 코너를 돌아 조금 가면 피오 몬테 델라 미세리코르디아(Pio Monte della Misericordia) 교회가 흥미롭다. 1602년 나폴리의 귀족 젊은이들이 일곱 가지 자선활동 분야를 정해 결사(結社)를 만들고 세운 교회다.
카라바조 작 제단화 <일곱 가지 자선활동>이 인상적이다. 부속 박물관에 자선 분야별 대표가 모여 앉아 회의하던 7각 탁자가 재미있다. 참고로, 이들이 정한 일곱 가지 자선활동은 주린 사람 먹여주기, 벗은 사람 입혀주기, 목마른 사람 물 주기, 아픈 사람 구완하기, 갇힌 사람 면회 가기, 죽은 사람 묻어주기, 순례객들 재워주기 등이었다.
이탈리아의 큰 도시들을 구경 다닐 때 활용도 높은 장소가 교회의 키오스트로(회랑)다. 특히 나폴리같이 덥고 길 다니는 게 고단할 가능성이 높은 도시에서 요긴하다.
소음과 인적의 차단 효과가 경이로울 정도다. 덤으로 그 장식이나 조경들이 미감을 더해주는 곳도 많다. 인근 산 그레고리오 아르메노(San Gregorio Armeno) 교회의 키오스트로는 남부의 풍성한 과실수를 활용한 조경이 거의 과수원 수준이고, 조금 떨어진 산타 키아라(Santa Chiara) 교회 키오스트로의 채색도기(majolica) 장식도 압권이다. 휴식 목적이 아니라도 일부러 찾아보아야 할 곳들이다.
이쯤에서 나폴리를 떠나야겠다. 왕궁(Palazzo Reale), 누오보 성(Castel Nuovo), 계란성(Castel dell’Ovo)들 얘기를 못해 아쉽지만 살레르노까지 가야 하고, 들를 곳에 비해 시간이 많지 않다.
폼페이~소렌토 거리의 음식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것은 기원후 79년 8월 24일 오후 1시였다. 기록적인 대폭발로 폼페이가 6~7m의 화산재에 묻히고 인근 에르콜라노가 해일 토사에 매몰됐다. 마침 나폴리 만에 와 있던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오(Plinio·23~79)가 처음 보는 장관에 끌려 접근했다가 희생자가 되었다.
1748년 발굴이 개시되어 고대 로마 도시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고 수준 있는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새삼 그리스와 로마 등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소위 그랜드 투어가 유행하고 건축에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바람이 분 데는 폼페이가 큰 계기였다. 2000년 전 도시의 데쿠마노 마시모(Decumano Massimo·고대로마 도시의 동서대로), 신전, 바실리카, 포럼터, 극장, 욕장, 상가, 일반주택들이 그대로 남아 사람들이 실제 드나들며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은 폼페이의 큰 매력이다.
주거의 규모, 구조와 장식들이 이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수준이다.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인데도 건물들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물론 에네아스와 로물루스의 상(像)들을 모셨던 벽 공간이 곳곳에 남아 있다. 로마 시민들의 자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걱정은 넘쳐나는 관광객이다. 유적지, 특히 사람들이 출입하는 노천 유적의 경우 관리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그것도 고대 도시 하나 전체가 실제 사람이 살지 않는 가운데 비바람과 각종 공해에 노출되어 무수한 관광객의 ‘방문’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유적지 내의 건물 하나가 그대로 무너져 내려 온갖 진단과 처방이 난무한 일이 있었다. “애초에 감당 못할 규모로 발굴해 놓은 것이 문제이며 일부를 다시 (땅속에) 묻어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있었다.
소렌토로 가는 길은 상쾌하다. 해안과 거리를 둔 구절양장 산길이지만 길가 마을들의 경치와 음식이 예외 없이 일품이다. 카스텔라마레 디 스타비아, 비코 에쿠엔세, 마리나 데쿠아 등 마을들이 모두 유럽에서 알아주는 식당들을 자랑한다. 비결은 “식재료와 식당 간의 지근거리”, 모토는 “브로콜리와 감자만으로도 기막힌 요리를!”이란다. 오일, 치즈가 좋고 바질, 오레가노, 타임, 로즈마리 등 향신료가 다양하고 신선한 곳이다.
소렌토와 카프리 섬 그리고 반도의 끝을 돌아 절벽 사면(斜面)에 위치한 포시타노(Positano) 등지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즐거운 인생(La dolce vita)의 원천이다. 태양과 바다와 경치 등 자연의 혜택에 이 지역 특유의 의식주 라이프스타일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막강 브랜드의 현장이다.
소렌토 반도를 돌아 아말피 가는 길은 그 굴곡 많은 해안선과 깎아지른 절벽들, 크고 작은 바위섬들로 해서 벌써 경관에 취하고 드라이브가 쉽지 않은 곳이다. 와중에 사이렌의 노랫소리까지 들려왔다니 옛사람들의 항해는 어떠했을까! 포시타노 앞바다의 리 갈리(Li Galli) 바위섬들이 사이렌들의 거처로 ‘공인’된 것에 수긍이 간다.
휴양지로 유명한 카프리 섬
카프리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섬 중의 하나일 것이다. 소렌토에서 페리로 반 시간 거리의 카프리는 인류가 휴가를 즐기기 시작한 이래의 휴양지다.
예수를 처형한 궁극적 결재권자인 제2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기원후 27년 은퇴해 이곳으로 온 것도 빼어난 경치가 이유였으리라. 경치가 자연의 작품이라면 색깔은 태양의 조화(造化)다. 이탈리아의 태양이 만들어낸 다양한 색깔을 여기에 오면 다 만난다. 축구 때문에 많이 알려진 아추로(azzuro)부터 투르케세(turchese), 코발토(cobalto) 등이 다 ‘파랑’이지만 맑은 날 카프리의 아니 이탈리아의 진짜 파란 하늘색은 체룰레오(ceruleo)라고 한다.
영어의 시에나(sienna)라는 색 이름은 토스카나의 중세도시 시에나(Siena)에서 나온 말이다. 이탈리아 중부 지방에 흙빛 벽을 한 집들이 많은데 그 색 이름이 테라코타(terracotta·구운 흙)고 시에나의 흙빛은 조금 더 갈색 톤이 강하다.
카프리의 마리나 그란데(Marina Grande)에 배가 닿으면 절벽을 따라 늘어선 집들의 다채로움이 그대로 한 벌의 팔레트다. 시내를 걷다 보면 불현듯 부겐빌레아(Bougainvillea) 붉은 덩굴이 덮어 싼 하얀 담장들 사이로 온통 파란색인데 자세히 보면 조금 더 파란 쪽은 바다고 나머지는 하늘이다. 이렇게 키워진 색감이 이 사람들의 손재간과 함께 이탈리아 패션 산업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온갖 사람이 온갖 목적으로 이곳을 다녀갔다. 소설을 쓰려, 시상(詩想)을 얻으려, 그림을 그리려, 휴양을 하려, 심지어 나라 뒤집을 구상까지…. 이렇게 무수히 다녀가며 별보다 많은 이야기를 남긴 곳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본국에서의 범법이 드러나) 묵다가 쫓겨난 호텔이 있고, 고리키가 레닌을 맞아 장기 두던 빌라가 있고,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호텔이 있고, 처칠과 아이젠하워가 회담한 팔라초가 있는 곳이다. 고리키(Maxim Gorky·1868~1936)는 1차 세계대전 전야에 6년이나 머물며 혁명학교를 운영했다. 나머지 이름들도 도저히 ‘기타’로 분류할 수 없는 면면이다.
괴테, 존 러스킨, EM 포스터, DH 로렌스, 앙드레 지드, 릴케, 폴 발레리, 버지니아 울프를 거쳐 파블로 네루다, 그레이엄 그린, 고어 비달에 이르면 우리와도 동시대를 살던 사람들이다. 이렇다 보니 소위 셀렙 컬처(celeb culture)와 ‘그 사람이 갔던 곳에 가보기’ 효과까지 겹쳐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더구나 요즘은 자연이 빚어놓은 걸작과 함께 사람들의 작품인 소위 ‘명품’가게까지 들어차 ‘라 돌체 비타’의 인프라를 완결해 놓았다.
카프리를 떠나기 전에 한 군데 꼭 가볼 곳이 있다. 아나카프리(Anacapri)의 빌라 산 미켈레(Villa San Michele). 이곳 정원의 석조 정자에서 바라보는 절경은 형언하기 쉽지 않다. 마리나 그란데 넘어 몬테 티베리우스의 빌라 요비스(Villa Jovis)까지 인간의 피조물들이 온통 파란 일색 속에 떠 있는데 그 파란색이 하늘인지 바다인지 다시 한 번 경계가 아련하다.
소렌토의 비토리아 호텔
소렌토도 고대 로마 이래의 도시로서 역사가 없을 리 없지만 역시 유명인사들 휴양지로서의 명성이 앞선다. 해안 절벽의 공원 속 엑셀소 비토리아(Excelsior Vittoria) 호텔에 묵은 적이 있다. 오뉴월이면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노랫말에도 나오는 “은은한 오렌지 꽃 향기”가 진동하는 곳이다. 그간 다녀간 영화배우, 문인, 성악가들의 사진이 라운지에 즐비한데 호텔 사장이 자랑삼아 보여주는 두툼한 방명록에는 19세기 중반 프러시아의 재상 비스마르크와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의 서명도 있다.
이들도 다녀갔겠지만 이 호텔이 추억하는 1번 투숙객은 나폴리 태생 불세출의 테너 카루소(Enrico Caruso·1873~1921)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이 호텔에서 생애 마지막 해의 봄을 지내고 그해 여름 영면했다고 한다. 그가 쓰던 방에는 “Caruso Suite” 팻말과 함께 그가 사용하던 피아노와 책상이 그대로 놓여 있다.
이 얘기는 이미 고전이고 그 속편마저 이제 고전 반열에 들었다며 사장이 1980년대 중반의 인기곡 ‘카루소’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바로티도 가끔 불러 더욱 유명해진 노래다.
당시 이탈리아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던 중견 가수 루치오 달라가 소렌토에 놀러 왔다가 카루소 스위트에 머물며 며칠 새에 작곡했다는 것이다. 이 동네 분위기와는 많이 다른 비련조(悲戀調)지만 참 마음에 남는 노래다. 루치오 달라는 40여 년 전 가요계 데뷔 때부터 한국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다고 필자가 한마디 거드니 좌중(座中)이 모두 의외라는 표정이다.
1970년대 초 산레모 가요제가 한국에서 큰 인기였고 당시 대학시절을 보낸 많은 이가 루치오 달라의 입상곡 ‘1943년 3월 4일생’을 기억한다고 했더니 놀라움이 감동으로 바뀐다. 색슨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해 모르는 것을 의외로 여기는 데 비해 라틴 사람들은 자신들을 알아주는 경우 매우 감격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곳에서도 꼭 봐야 할 장면이 하나 있다. 호텔 테라스 카페에서 나폴리 만 저편으로 바라보이는 베수비오의 완벽한 이등변 삼각형. 배경색은 역시 카프리에서 본 그 ‘체룰레오’다. 루치오 달라는 필자가 소렌토 방문에서 돌아온 얼마 후 많은 이의 애도 속에 타계(他界)했다.
인근 포시타노는 ‘라 돌체 비타’의 중요한 요소인 ‘라 벨라 피구라(La bella figura·고운 모습)’ 브랜드 개발에 기여가 큰 마을이다. 휴양지의 가벼운 옷차림을 맵시 있게 디자인한 ‘포시타노 패션’의 발상지로 소위 나폴리 스타일(Neapolitan style)을 선도한 공이 있다.
나폴리 스타일은 특히 남성 패션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당시까지 부동이던 런던 새빌 로(Savile Row)의 정통 양복에 도전하며 이탈리아 양복을 남성 정장 패션의 주류에 편입시킨 것이다.
더운 기후와 젊은 취향을 반영한 가벼운 옷감, 가는 소매통과 부드러운 어깨선, 거북하지 않은 착용감 등이 핵심 아이디어다. 역대 제임스 본드들이 자국제(自國製) 아닌 이탈리아 양복을 선호하면서 대세가 정해졌다.
포시타노가 옷을 만든다면 푸로레(Furore)는 와인을 만든다. 역시 절벽에 위치한 마을이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은 절벽에서 포도를 키운다.
그레코 디 투포(Greco di Tufo), 팔랑기나(Falanghina) 등 고대 이래 이 지방 특유의 품종으로 만드는 화이트가 일품이다. 한낮의 햇볕에 밤이면 절벽 전면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닷바람이 어우러진 덕이다.
라벨로 마을
라벨로(Ravello)는 특별한 마을이다. 아말피 해안의 다른 곳들과 달리 해변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한참을 올라간 산정(山頂) 마을이다. 이 일대의 맹주 아말피의 영향에서 진작에 벗어나 1086년 독립한 후 19세기 초까지 자치(自治)했던 역사가 있다. 지리적 위치 덕이 컸을 터이다. 그 덕에 경관 또한 독보적이다.
일찍이 1349년 아말피 일대를 돌아보았던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라벨로의 아름다움을 첫손에 꼽았다.
두오모 광장에 서니 사람이 이런 곳에 이렇게 해놓고 살 수가 있구나 생각에 잔잔한 감동이 온다. 광장 곁의 루폴로 빌라(Villa Rufolo)가 유명한 곳이다. 13세기 라벨로의 번성을 이끈 갑부 루폴로(Landolfo Rufolo)의 저택이다. 외관은 중세 성채 같은데 일단 들어서니 아말피 해안의 절경이 시야를 채우는 동시에 한 폭의 정원이 마법의 카펫인 양 발 아래 펼쳐진다.
노르만-사라센 혼합 양식의 이국적 건물 장식을 자세히 올려다볼 겨를이 없다. 해안에 면한 정자(pergola)에 앉으니 하늘과 바다 사이에 이 정원뿐이다. 흐드러진 올레안드로(oleandro) 꽃의 원색에 삼나무, 종려나무, 우산 소나무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천상의 정원을 완성한다.
이탈리아 정원이 세계의 정원 조경에 교본 역할을 했다는 안내원의 자랑이 허언(虛言) 같지 않다. 실제 바그너(Richard Wagner)가 그의 마지막 오페라곡 ‘파르시팔(Parsifal)’의 무대로 삼았던 정원이다. 그 영향인지 그리그, 로스트로포비치, 브루노 발터, 레너드 번스타인 등 라벨로에서 휴가를 지낸 음악인들의 명단이 길다.
매년 여름 이 정원에서 열리는 콘서트의 인기가 좋아 근처 비슷한 입지에 니에마이어(Oscar Niemeyer, 몇 년 전 타계한 브라질 건축가) 디자인의 신식 공연장까지 새로 지었다. 이곳에서 골목을 조금 걸으면 침브로네 빌라(Villa Cimbrone)다. 이곳 또한 화려한 역대 과객(過客)명단을 자랑하는 빠트릴 수 없는 휴식공간이다.
라벨로의 바로 아래 해변에 아말피가 있다. 아말피 해안길 따라 마을이 많다지만 역시 아말피가 이 지역의 장형(長兄)이다. 역사적으로 이 해안을 오늘의 모습으로 일으킨 중심도시다. 한때(10~11세기) 이탈리아의 어느 해상세력보다 앞서 막강 선단을 갖추고 연안 무역은 물론 멀리 소아시아, 북아프리카와도 왕래하였다. 북으로부터 롬바르드, 남으로부터 사라센의 침입을 막아낸 강자였다. 밀라노, 피렌체는 물론 시에나, 피사도 자치도시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한참 전 이야기다.
아말피는 오늘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해 시세(市勢)를 기울여 4년에 한 번씩이나마 중세 4대 해상세력 대항 보트경주(regatta) 대회를 개최한다. 아말피 외에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가 참가한다. 이탈리아의 해군기는 현재도 이들 4개 도시의 문장(紋章)으로 되어 있다.
역사가 있는 만큼 두오모도 일품이다. 단순히 예쁜 마을의 성당 차원을 넘어 한때 티레노 바다를 호령했던 도시의 두오모다운 웅자(雄姿)가 있다. 중세의 상인들 대신 각국의 관광객들로 주역이 바뀌었지만 도시의 활기만큼은 오늘도 여전하다.
살레르노
다음은 이번 여행의 종착지 살레르노(Salerno). 13세기 나폴리가 수도로 자리 잡기 이전에는 줄곧 남부 이탈리아의 중심이었고 롬바르드족과 노르만인들 그리고 호엔슈타우펜의 신성로마 황제 페데리코 2세도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었다. 1944년 연합군이 이곳에 상륙한 후 임시수도의 역할도 했다.
그러던 이곳이 1980년 혹심한 지진으로 복구불능의 지경에 갔다가 EU의 도움으로 본격적인 도시 재건에 나선 것은 지난 90년대다.
재작년에 만난 살레르노 시장은 바다에 면한 중세 팔라초의 널찍한 사무실에서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가 설계한 마리나 시설,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디자인한 연안부두 등을 가리키며 변모하는 도시 홍보에 열심이었다.
살레르노의 두오모에 가면 이 도시의 부침에 못지않은 영욕의 세월을 보내고 제단 밑에 영면한 중세의 교황이 있다. 그레고리우스 7세(1073~85 재위). 역사에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욕보인’ 그는 이내 황제의 되갚음으로 로마에 감금되는 처지가 되었다가 노르만의 맹장 귀스카르도(Roberto Guiscardo)에 구출되어 살레르노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그에게 큰 위로가 있었다면 아마 곁에 함께 있던 복음서 저자 마테오 성인이었을 것이다. 성 마테오의 유해는 954년 롬바르드 왕이 살레르노에 정도(定都)할 때 옮겨와 두오모 지하실(cripta)에 모셨던 것이다. 부침과 영욕은 인간사의 숙명이다. 소렌토 반도와 아말피 해안을 다닐 때 구름 위를 걷는 듯하던 기분이 살레르노에 오면서 다시 땅 위에 내려온 느낌으로 바뀌는 것도 일종의 부침 현상이지 싶다.⊙
우선 연안 마을들의 면면이 다르다. 이스키아와 프로치다 두 섬이 코앞에 보이는 쿠마(Cuma) 유적지에서 시작해 나폴리를 지나면 바로 베수비오 산이다. 그 아래가 베수비오의 화산재에 묻혀 2000년 가까이를 지낸 폼페이, 에르콜라노, 토레 아눈치아타 등 고대 마을들이다. 나폴리 만의 끝자락에 카스텔라마레, 비코 에쿠엔세를 지나 소렌토에 이르면 카프리 섬이 닿을 듯하다. 이어지는 아말피 해안의 절경! 전체로서도 절경이지만 아말피 해안의 마을들은 개성미가 장점이다.
포시타노, 푸로레, 아말피, 라벨로 등 마을들이 서로 붙어 있다 싶게 가까우면서 각자가 다르고 그 분위기와 특색이 각기 출중하다. 길지 않은 해안을 따라 이렇게 다양한 소읍과 섬들이 서로의 내력과 매력을 뽐내는 유례는 다시 없을 것이다.
단지 자연경관과 휴양지로서의 장점 이야기가 아니다. 고대(古代)와 중세(中世)의 역사가 도처에 남아 숨 쉬고 고대 이전의 신화와 전설이 곳곳에 서려 있다. 호메로스가 들려주던 옛이야기의 흥미로운 무대였고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로마 건국 전승의 현장이다.
베르길리우스 자신이 묻혀 잠든 곳도 나폴리 시내의 한 언덕 위다. 풍광은 물론이고 기후까지 일 년 사시 보장되다시피 하니 이 변덕 없는 천연의 뮤즈를 찾아 수많은 세계의 예인(藝人)과 문사(文士)들이 다녀갔다.
아예 한때를 거주하며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긴 이들도 많다. 포시타노의 클레(Paul Klee)와 디아길레프, 아말피의 입센(Henrik Ibsen), 라벨로의 바그너, 소렌토의 니체, 이스키아 섬의 오덴(WH Auden)과 커포티(Truman Capote), 프로치다 섬의 르 코르뷔지에 등은 다만 19세기 이후의 몇몇 예일 뿐이다. 카프리 섬에 이르면 일일이 거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명단이 길다.
시빌라 암굴
 |
| 시빌라 암굴. 으슥한 분위기가 페트라르카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
아크로폴리스 양옆으로 제우스 신전과 아폴로 신전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원형극장과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음택마을)가 있다. 로마 사람들의 폼페이 유적지에 비해 남아 있는 건물이 많지 않아 그렇지 시기적으로는 근 800년이 앞선다.
쿠마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빌라 암굴(Antro della Sibilla)이 볼 만하다. 세심한 독자들은 지난 5월호에서 티볼리에 들렀을 때 빌라 그레고리아나 언덕 위로 티볼리 시빌라(Sibilla Tiburtina)의 거소를 찾았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이 암굴은 못지않게 유명한 쿠마 시빌라(Sibilla Cumana)가 살던 곳이다.
엄청난 바위산을 뚫어 널찍한 터널을 내고 그 맨 끝에 조그만 방을 조성해 놓았다. 베르길리우스의 에네아스가 쿠마 시빌라로부터 자신이 로마 문명을 세우리라는 예언을 들었다는 그곳이다. 전승의 진위는 따질 일이 아니나 세팅이나 분위기가 그럴 법하다.
일찍이 1343년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이곳을 다녀가며 했다는 말이다. “이곳이 시빌라가 살던 곳이구나! 바보들은 들어간 다음 다시 돌아나오지 못했고 현자들은 처음부터 들어갈 생각을 안 했다는 그 무시무시한 암굴이로구나!”
쿠마에서 나폴리는 지척이다. 나폴리 쪽으로 넘어오는 초입이 포실리포 언덕이다. 이곳에 잠시 멈춰 나폴리 만을 한번 굽어본다. 나폴리 시내가 왼편 해안을 따라 펼쳐지는 저편에 베수비오의 두 봉우리가 신비롭고, 멀리 소렌토 반도가 길게 뻗어 끝나는 곳에 카프리 섬이 아련하다. 한 번 보면 그 경관의 수려함에 탄성이 절로 나오고 학창시절 굳게 입력된 후 좀체 잊히지 않는 노래가 떠오른다.
Sul mare luccica l’astro d’argento, Placida `e l’onda prospero `e il vento~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고,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포실리포 언덕을 올라가면 꼭대기가 베르길리우스 공원이고 내려가면 메르젤리나(Mergellina) 부두다. 한 곳에는 고대 로마 최고의 시인이 잠들어 있고 또 한 곳은 아말피 해안 바위섬에 살던 비운의 사이렌 파르테노페(Partenope)의 시신이 밀려왔다는 곳이니 두루 심상치 않은 곳이다. 여기서 시작하는 해안도로(비아 카라치올로)가 바로 이 노래의 고향인 산타 루치아 부두까지 이어진다. 노래 5절은 이렇게 나간다.
O dolce Napoli o suol beato, Ove sorridere volle il creato~
(오 예쁜 나폴리 복받은 땅이여, 신께서 바라던 미소가 있는 곳~)
자고이래 땅으로 바다로 물산이 풍부하고 기후와 풍광이 수려하니 사는 이들의 마음이 여유로웠을 것이다. 나폴리 민요(Canzone napolitana)가 발달한 장소이다. 성 아고스티노(Sant’Agostino·354~430)의 어록에 “Chi canta pregha due volte”란 말이 있다. 노래하는 사람은 두 번 기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이다. 중국말로 심광신이(心曠神怡)의 경지다.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
| 카프리의 빌라 산 미켈레 정원에서 바라본 빌라 요비스. 화강암 스핑크스 상 너머로 멀리 소렌토가 보인다. |
괴테가 일찍이 “나폴리를 보고 정신을 빼앗긴 모든 이를 용서하시라”고 신(神)께 빌었다 하고 “어떤 말이나 글 혹은 그림으로도 나폴리를 온전히 묘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을 때 이런 경지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괴테의 나폴리 칭송은 유별날 정도다. 베수비오를 옆에 끼고 티레노 너른 바다를 내다보며 기다란 소렌토 반도가 천연의 방파제로 감싸주는 햇볕 가득한 나폴리의 시원한 경관은 힐끗 보아도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사행천(蛇行川) 변에 옹기종기 엎드린 듯 자리 잡은 로마를 여기에 비할 수 없다고 한 이도 괴테다.
그의 20개월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1786.9~1788.4)의 주목적이 고전 탐사인 만큼 로마에서 1년 넘어 체류한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나폴리에서만 한 달 반을 보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나폴리 사람들이 하는 말대로, ‘Vedi Napoli e poi muori!’, (죽더라도)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였다.
이런데다가, 아니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나폴리는 남부 이탈리아의 오랜 중심지였다. 세계의 경이(Stupor Mundi)란 별명을 얻으며 메초조르노의 전설이 된 페데리코 2세(1194~1250)가 죽자 프랑스 앙주 가(家)의 샤를이 교황의 후원으로 남부 이탈리아의 맹주(盟主)가 된다.
이 샤를 1세가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를 나폴리로 옮기고 오늘 우리가 보는 나폴리의 모습을 일구는 역사(役事)를 개시하는 것이다.
이후 나폴리는 통일 시까지 남부 이탈리아의 600년 도읍이 된다. 나폴리 왕국의 전성기랄 수 있는 17세기에는 파리 다음 유럽 제2의 도시였고, 19세기 통일 당시에도 단연 (로마에 앞서) 이탈리아에서 제일 큰 도시였다.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Teatro di San Carlo)은 일찍이 1737년 개관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오페라 극장이다. 19세기 중반까지도 많은 이는 라 스칼라(La Scala, 밀라노)나 라 페니체(La Fenice, 베네치아) 극장에 앞서 산 카를로에서의 초연(初演)을 최대 영광으로 알았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이탈리아의 통일 운동) 당시의 세력관계로 볼 때 나폴리 왕국이 이탈리아의 다른 어떤 세력에 의해 병합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역사에서 드물지 않게 보듯 그런 일이 벌어졌고 여러 측면에서 많이 다른 남·북 이탈리아는 한 나라가 되었다.
풍광 수려하고 지내온 역사가 이러하니 나폴리에는 볼 것이 많다. 무엇을 볼까보다 어떻게 돌아볼까가 걱정이다. 게다가 시역(市域)이 넓어 걸어다닌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많이 알려진 이 지역의 다른 문제들도 만만치 않다. 거리에 자동차와 사람이 너무 많아 혼잡, 무질서에 시끄럽고, 다소 지저분하다. 대중교통이나 행정 관리(개관시간 운영 등) 수준이 기대만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로 해서 ‘역사, 문화’는 생략한 채 ‘경치’만 보고 간다면 실수다. 문제점들이란 것도 보기에 따라선 이 도시 나름의 활기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을 50~60년대 한국의 대도시에서 보낸 필자 같은 경우에는 옛 고향을 보는 듯 크게 낯설지 않았다.
산타 루치아에서 ‘노래’ 얘기하다 사설이 길어졌다. 보메로(Vomero)는 포실리포 곁에 좀 더 높은 언덕이다.
나폴리의 두 박물관
 |
| <파르네세 헤라클레스>.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에서 발굴한 초대형 조각상.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 |
귀도 레니, 리베라(Ribera)에서 루카 조르다노, 카라치올로, 시몽 부에(Simon Vouet) 등 당대 바로크 거물들의 대작을 현장에서 보는 울림이 크다. 안뜰 회랑(chiostro)이 수도원 부속임을 잊을 정도로 작은 공원만 하고 경내에 함께 있는 나폴리 특유의 자랑거리인 프레세페(presepe, 본래 ‘아기예수 구유’의 뜻인데 아기예수 탄생 장면을 재현한 설치조형에 대한 통칭) 전시관도 볼 만하다.
나폴리에 오면 산 마르티노와 함께 꼭 보아야 할 박물관이 두 개 있다. 국립 고고학 박물관과 카포디몬테 국립 미술관(Galleria Nazionale di Capodimonte)이다.
하나는 고대 고전시기 조각, 부조, 프레스코, 모자이크 등 세계 최대의 고고학 박물관이고, 카포디몬테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그림들을 주력으로 한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이다.
이 두 곳의 방대한 소장(所藏)이 이룩된 배경이 의외로 간단하다. 18세기 초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3국 간 스페인 계승전쟁의 곡절 끝에 스페인 보르보네 왕가의 카를로 3세가 나폴리 왕으로 부임한다. 그가 나폴리에 와 제일 먼저 일으킨 공공사업 중 하나가 폼페이 유적지 발굴이다. 이와 거의 동시에 그는 파르네세 가의 마지막 상속녀 엘리사베타 파르네세를 모친으로 둔 덕에 가문의 200년 콜렉션을 통째로 상속한다.
폼페이를 발굴해 얻은 예술품들도 엄청나지만 교황 파올로 3세(1534~49간 재위)가 일으킨 가문이 200년을 지속하며 모은 미술품들이 그에 못지않게 대단하다.
동시대 그림들이야 화가들한테 주문 제작한 것도 많지만, 고대 조각들은 대개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이나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노 등지에서 그냥 줍다시피 가져다가 로마의 파르네세 궁(Palazzo Farnese, 현재 프랑스 대사관 청사)을 비롯해 파르마, 카프라롤라 등 전국에 산재한 가문의 부동산들을 장식했던 물건들이다. 이렇게 모인 물건들이 두 박물관에 가득하다. 조각들은 대개 고고학 박물관에, 그림들은 카포디몬테에 모아놓았다.
어디서 가져왔든 상관없이 <파르네세 황소> <파르네세 헤라클레스> 등 고고학 박물관의 초대형 건물 네 개 층에 빼곡한 조각상, 부조물, 프레스코, 모자이크들은 경탄을 금치 못할 대작이요 명품들이다.
이미 2000년 전 이만한 완성도를 이루었으니 ‘고전’이라 부르기로 한 것이리라. 그 뒤의 것들은 다 공자 말씀대로 ‘술이부작(述而不作)’임을 알겠다.
카포디몬테는 문자 그대로 나폴리의 안산(案山) 꼭대기에 자리한 카를로 왕의 이궁(離宮)이었다. 미술관의 입구에 티치아노 작 <파올로 3세와 조카들> 초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티치아노의 거침없는 붓길 속에 교황의 눈매와 입매만이 500년 지난 이제도 움직일 듯 섬세하다. 지력과 염력이 느껴지는 얼굴이요 자태다. 이 정도 되어야 권모술수와 백가쟁명의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200년 가업을 일굴 수 있지 싶은 모습이며 이제 인물화의 과제가 더 이상 모사(模寫)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르네상스의 한복판을 종횡한 교황과 그 집안에 손색없게 콜렉션은 지역 상관없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들을 망라한다. 마솔리노, 만테냐, 필리피노 리피,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파르미자니노, 코레조 등등. 이 총중(叢中)에 마사치오의 단정한 <예수십자가형>이 르네상스의 시원(始原)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꼭 보아야 할 교회 두 곳
별도 층의 나폴리 회화관도 꼭 들러야 한다. 중세 말 멀리 시에나의 거장들부터 나폴리 왕국 전성기의 바로크 화가들을 거쳐 19세기 포실리포 스쿨에 이르는 600년 콜렉션이다. 앙주 가는 당시 교황들과 친분이 있어 카발리니(로마), 조토(피렌체), 시모네 마르티니(시에나) 등 중세 말의 거장들을 나폴리에 초빙했었다.
주력은 산 마르티노에서 보았던 나폴리 바로크 거장들의 작품이다. 나폴리 미술의 황금기를 이끈 이들은 유럽 전역에서 이름을 떨치던 대가들이었다. 맨 끝 방에 홀로 걸린 지나칠 수 없는 그림이 있다. <예수책형(磔刑)>. 이탈리아 전역과 몰타, 시칠리아를 떠돌며 짧고 험한 생을 보낸 카라바조가 만년에 나폴리에 남겨준 걸작이다.
이제 교회 몇 곳을 둘러볼 차례다. 언덕을 내려오면 환경이 일변하며 다시 어수선한 나폴리 시내다. 옛적 한문시간에 배웠던 훤소(喧騷)란 말 그대로다. 시내에서도 스파카나폴리(Spaccanapoli)와 비아 트리부날리(Via Tribunali) 일대에 좋은 교회와 볼거리들이 집중되어 있다.
그 한편에 서 있는 두오모. 고대 로마의 아폴로 신전터 위에 샤를 1세가 프랑스 고딕 양식의 성당을 세우고 그 뒤 나폴리 바로크로 현란하게 꾸민 성당이다.
나폴리의 수호성인 성 제나로(San Gennaro)를 모신 경당에는 성인의 피를 보관한 유리 용기를 모셔놓았다. 일 년에 두 차례 정해진 날에 무사한 일 년을 바라는 신심 깊은 나폴리 사람들을 어김없이 안심시키는 고대의 신탁(神託) 같은 보물이다. 언젠가 한번 성인의 피가 녹지 않아 온 시민이 걱정하던 해에 나폴리 축구팀이 ‘세리에 비(Serie B)’로 강등되는 ‘재앙’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두오모에서 코너를 돌아 조금 가면 피오 몬테 델라 미세리코르디아(Pio Monte della Misericordia) 교회가 흥미롭다. 1602년 나폴리의 귀족 젊은이들이 일곱 가지 자선활동 분야를 정해 결사(結社)를 만들고 세운 교회다.
카라바조 작 제단화 <일곱 가지 자선활동>이 인상적이다. 부속 박물관에 자선 분야별 대표가 모여 앉아 회의하던 7각 탁자가 재미있다. 참고로, 이들이 정한 일곱 가지 자선활동은 주린 사람 먹여주기, 벗은 사람 입혀주기, 목마른 사람 물 주기, 아픈 사람 구완하기, 갇힌 사람 면회 가기, 죽은 사람 묻어주기, 순례객들 재워주기 등이었다.
이탈리아의 큰 도시들을 구경 다닐 때 활용도 높은 장소가 교회의 키오스트로(회랑)다. 특히 나폴리같이 덥고 길 다니는 게 고단할 가능성이 높은 도시에서 요긴하다.
소음과 인적의 차단 효과가 경이로울 정도다. 덤으로 그 장식이나 조경들이 미감을 더해주는 곳도 많다. 인근 산 그레고리오 아르메노(San Gregorio Armeno) 교회의 키오스트로는 남부의 풍성한 과실수를 활용한 조경이 거의 과수원 수준이고, 조금 떨어진 산타 키아라(Santa Chiara) 교회 키오스트로의 채색도기(majolica) 장식도 압권이다. 휴식 목적이 아니라도 일부러 찾아보아야 할 곳들이다.
이쯤에서 나폴리를 떠나야겠다. 왕궁(Palazzo Reale), 누오보 성(Castel Nuovo), 계란성(Castel dell’Ovo)들 얘기를 못해 아쉽지만 살레르노까지 가야 하고, 들를 곳에 비해 시간이 많지 않다.
폼페이~소렌토 거리의 음식
 |
| 포실리포에서 바라본 나폴리 만. 전면 해변도로의 끝이 산타 루치아 부두이고 원경이 나폴리 시가지다. 오른쪽에 베수비오 산이 보인다. |
1748년 발굴이 개시되어 고대 로마 도시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고 수준 있는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새삼 그리스와 로마 등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소위 그랜드 투어가 유행하고 건축에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바람이 분 데는 폼페이가 큰 계기였다. 2000년 전 도시의 데쿠마노 마시모(Decumano Massimo·고대로마 도시의 동서대로), 신전, 바실리카, 포럼터, 극장, 욕장, 상가, 일반주택들이 그대로 남아 사람들이 실제 드나들며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은 폼페이의 큰 매력이다.
주거의 규모, 구조와 장식들이 이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수준이다.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인데도 건물들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물론 에네아스와 로물루스의 상(像)들을 모셨던 벽 공간이 곳곳에 남아 있다. 로마 시민들의 자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걱정은 넘쳐나는 관광객이다. 유적지, 특히 사람들이 출입하는 노천 유적의 경우 관리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그것도 고대 도시 하나 전체가 실제 사람이 살지 않는 가운데 비바람과 각종 공해에 노출되어 무수한 관광객의 ‘방문’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유적지 내의 건물 하나가 그대로 무너져 내려 온갖 진단과 처방이 난무한 일이 있었다. “애초에 감당 못할 규모로 발굴해 놓은 것이 문제이며 일부를 다시 (땅속에) 묻어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있었다.
소렌토로 가는 길은 상쾌하다. 해안과 거리를 둔 구절양장 산길이지만 길가 마을들의 경치와 음식이 예외 없이 일품이다. 카스텔라마레 디 스타비아, 비코 에쿠엔세, 마리나 데쿠아 등 마을들이 모두 유럽에서 알아주는 식당들을 자랑한다. 비결은 “식재료와 식당 간의 지근거리”, 모토는 “브로콜리와 감자만으로도 기막힌 요리를!”이란다. 오일, 치즈가 좋고 바질, 오레가노, 타임, 로즈마리 등 향신료가 다양하고 신선한 곳이다.
소렌토와 카프리 섬 그리고 반도의 끝을 돌아 절벽 사면(斜面)에 위치한 포시타노(Positano) 등지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즐거운 인생(La dolce vita)의 원천이다. 태양과 바다와 경치 등 자연의 혜택에 이 지역 특유의 의식주 라이프스타일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막강 브랜드의 현장이다.
소렌토 반도를 돌아 아말피 가는 길은 그 굴곡 많은 해안선과 깎아지른 절벽들, 크고 작은 바위섬들로 해서 벌써 경관에 취하고 드라이브가 쉽지 않은 곳이다. 와중에 사이렌의 노랫소리까지 들려왔다니 옛사람들의 항해는 어떠했을까! 포시타노 앞바다의 리 갈리(Li Galli) 바위섬들이 사이렌들의 거처로 ‘공인’된 것에 수긍이 간다.
휴양지로 유명한 카프리 섬
카프리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섬 중의 하나일 것이다. 소렌토에서 페리로 반 시간 거리의 카프리는 인류가 휴가를 즐기기 시작한 이래의 휴양지다.
예수를 처형한 궁극적 결재권자인 제2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기원후 27년 은퇴해 이곳으로 온 것도 빼어난 경치가 이유였으리라. 경치가 자연의 작품이라면 색깔은 태양의 조화(造化)다. 이탈리아의 태양이 만들어낸 다양한 색깔을 여기에 오면 다 만난다. 축구 때문에 많이 알려진 아추로(azzuro)부터 투르케세(turchese), 코발토(cobalto) 등이 다 ‘파랑’이지만 맑은 날 카프리의 아니 이탈리아의 진짜 파란 하늘색은 체룰레오(ceruleo)라고 한다.
영어의 시에나(sienna)라는 색 이름은 토스카나의 중세도시 시에나(Siena)에서 나온 말이다. 이탈리아 중부 지방에 흙빛 벽을 한 집들이 많은데 그 색 이름이 테라코타(terracotta·구운 흙)고 시에나의 흙빛은 조금 더 갈색 톤이 강하다.
카프리의 마리나 그란데(Marina Grande)에 배가 닿으면 절벽을 따라 늘어선 집들의 다채로움이 그대로 한 벌의 팔레트다. 시내를 걷다 보면 불현듯 부겐빌레아(Bougainvillea) 붉은 덩굴이 덮어 싼 하얀 담장들 사이로 온통 파란색인데 자세히 보면 조금 더 파란 쪽은 바다고 나머지는 하늘이다. 이렇게 키워진 색감이 이 사람들의 손재간과 함께 이탈리아 패션 산업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온갖 사람이 온갖 목적으로 이곳을 다녀갔다. 소설을 쓰려, 시상(詩想)을 얻으려, 그림을 그리려, 휴양을 하려, 심지어 나라 뒤집을 구상까지…. 이렇게 무수히 다녀가며 별보다 많은 이야기를 남긴 곳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본국에서의 범법이 드러나) 묵다가 쫓겨난 호텔이 있고, 고리키가 레닌을 맞아 장기 두던 빌라가 있고,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호텔이 있고, 처칠과 아이젠하워가 회담한 팔라초가 있는 곳이다. 고리키(Maxim Gorky·1868~1936)는 1차 세계대전 전야에 6년이나 머물며 혁명학교를 운영했다. 나머지 이름들도 도저히 ‘기타’로 분류할 수 없는 면면이다.
괴테, 존 러스킨, EM 포스터, DH 로렌스, 앙드레 지드, 릴케, 폴 발레리, 버지니아 울프를 거쳐 파블로 네루다, 그레이엄 그린, 고어 비달에 이르면 우리와도 동시대를 살던 사람들이다. 이렇다 보니 소위 셀렙 컬처(celeb culture)와 ‘그 사람이 갔던 곳에 가보기’ 효과까지 겹쳐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더구나 요즘은 자연이 빚어놓은 걸작과 함께 사람들의 작품인 소위 ‘명품’가게까지 들어차 ‘라 돌체 비타’의 인프라를 완결해 놓았다.
카프리를 떠나기 전에 한 군데 꼭 가볼 곳이 있다. 아나카프리(Anacapri)의 빌라 산 미켈레(Villa San Michele). 이곳 정원의 석조 정자에서 바라보는 절경은 형언하기 쉽지 않다. 마리나 그란데 넘어 몬테 티베리우스의 빌라 요비스(Villa Jovis)까지 인간의 피조물들이 온통 파란 일색 속에 떠 있는데 그 파란색이 하늘인지 바다인지 다시 한 번 경계가 아련하다.
소렌토의 비토리아 호텔
 |
| 소렌토에서 바라본 나폴리 만과 베수비오 산. 바다와 하늘이 두루 파란 가운데 멀리 나폴리 시가지가 아련하다. |
이들도 다녀갔겠지만 이 호텔이 추억하는 1번 투숙객은 나폴리 태생 불세출의 테너 카루소(Enrico Caruso·1873~1921)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이 호텔에서 생애 마지막 해의 봄을 지내고 그해 여름 영면했다고 한다. 그가 쓰던 방에는 “Caruso Suite” 팻말과 함께 그가 사용하던 피아노와 책상이 그대로 놓여 있다.
이 얘기는 이미 고전이고 그 속편마저 이제 고전 반열에 들었다며 사장이 1980년대 중반의 인기곡 ‘카루소’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바로티도 가끔 불러 더욱 유명해진 노래다.
당시 이탈리아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던 중견 가수 루치오 달라가 소렌토에 놀러 왔다가 카루소 스위트에 머물며 며칠 새에 작곡했다는 것이다. 이 동네 분위기와는 많이 다른 비련조(悲戀調)지만 참 마음에 남는 노래다. 루치오 달라는 40여 년 전 가요계 데뷔 때부터 한국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다고 필자가 한마디 거드니 좌중(座中)이 모두 의외라는 표정이다.
1970년대 초 산레모 가요제가 한국에서 큰 인기였고 당시 대학시절을 보낸 많은 이가 루치오 달라의 입상곡 ‘1943년 3월 4일생’을 기억한다고 했더니 놀라움이 감동으로 바뀐다. 색슨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해 모르는 것을 의외로 여기는 데 비해 라틴 사람들은 자신들을 알아주는 경우 매우 감격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곳에서도 꼭 봐야 할 장면이 하나 있다. 호텔 테라스 카페에서 나폴리 만 저편으로 바라보이는 베수비오의 완벽한 이등변 삼각형. 배경색은 역시 카프리에서 본 그 ‘체룰레오’다. 루치오 달라는 필자가 소렌토 방문에서 돌아온 얼마 후 많은 이의 애도 속에 타계(他界)했다.
인근 포시타노는 ‘라 돌체 비타’의 중요한 요소인 ‘라 벨라 피구라(La bella figura·고운 모습)’ 브랜드 개발에 기여가 큰 마을이다. 휴양지의 가벼운 옷차림을 맵시 있게 디자인한 ‘포시타노 패션’의 발상지로 소위 나폴리 스타일(Neapolitan style)을 선도한 공이 있다.
나폴리 스타일은 특히 남성 패션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당시까지 부동이던 런던 새빌 로(Savile Row)의 정통 양복에 도전하며 이탈리아 양복을 남성 정장 패션의 주류에 편입시킨 것이다.
더운 기후와 젊은 취향을 반영한 가벼운 옷감, 가는 소매통과 부드러운 어깨선, 거북하지 않은 착용감 등이 핵심 아이디어다. 역대 제임스 본드들이 자국제(自國製) 아닌 이탈리아 양복을 선호하면서 대세가 정해졌다.
포시타노가 옷을 만든다면 푸로레(Furore)는 와인을 만든다. 역시 절벽에 위치한 마을이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은 절벽에서 포도를 키운다.
그레코 디 투포(Greco di Tufo), 팔랑기나(Falanghina) 등 고대 이래 이 지방 특유의 품종으로 만드는 화이트가 일품이다. 한낮의 햇볕에 밤이면 절벽 전면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닷바람이 어우러진 덕이다.
라벨로 마을
 |
| 라벨로의 루폴로 정원에서 내려다보는 원색의 향연. 쌍둥이 교회와 우산 소나무의 조화는 한번 입력되면 잊기 힘든 절경이다. |
일찍이 1349년 아말피 일대를 돌아보았던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라벨로의 아름다움을 첫손에 꼽았다.
두오모 광장에 서니 사람이 이런 곳에 이렇게 해놓고 살 수가 있구나 생각에 잔잔한 감동이 온다. 광장 곁의 루폴로 빌라(Villa Rufolo)가 유명한 곳이다. 13세기 라벨로의 번성을 이끈 갑부 루폴로(Landolfo Rufolo)의 저택이다. 외관은 중세 성채 같은데 일단 들어서니 아말피 해안의 절경이 시야를 채우는 동시에 한 폭의 정원이 마법의 카펫인 양 발 아래 펼쳐진다.
노르만-사라센 혼합 양식의 이국적 건물 장식을 자세히 올려다볼 겨를이 없다. 해안에 면한 정자(pergola)에 앉으니 하늘과 바다 사이에 이 정원뿐이다. 흐드러진 올레안드로(oleandro) 꽃의 원색에 삼나무, 종려나무, 우산 소나무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천상의 정원을 완성한다.
이탈리아 정원이 세계의 정원 조경에 교본 역할을 했다는 안내원의 자랑이 허언(虛言) 같지 않다. 실제 바그너(Richard Wagner)가 그의 마지막 오페라곡 ‘파르시팔(Parsifal)’의 무대로 삼았던 정원이다. 그 영향인지 그리그, 로스트로포비치, 브루노 발터, 레너드 번스타인 등 라벨로에서 휴가를 지낸 음악인들의 명단이 길다.
매년 여름 이 정원에서 열리는 콘서트의 인기가 좋아 근처 비슷한 입지에 니에마이어(Oscar Niemeyer, 몇 년 전 타계한 브라질 건축가) 디자인의 신식 공연장까지 새로 지었다. 이곳에서 골목을 조금 걸으면 침브로네 빌라(Villa Cimbrone)다. 이곳 또한 화려한 역대 과객(過客)명단을 자랑하는 빠트릴 수 없는 휴식공간이다.
라벨로의 바로 아래 해변에 아말피가 있다. 아말피 해안길 따라 마을이 많다지만 역시 아말피가 이 지역의 장형(長兄)이다. 역사적으로 이 해안을 오늘의 모습으로 일으킨 중심도시다. 한때(10~11세기) 이탈리아의 어느 해상세력보다 앞서 막강 선단을 갖추고 연안 무역은 물론 멀리 소아시아, 북아프리카와도 왕래하였다. 북으로부터 롬바르드, 남으로부터 사라센의 침입을 막아낸 강자였다. 밀라노, 피렌체는 물론 시에나, 피사도 자치도시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한참 전 이야기다.
아말피는 오늘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해 시세(市勢)를 기울여 4년에 한 번씩이나마 중세 4대 해상세력 대항 보트경주(regatta) 대회를 개최한다. 아말피 외에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가 참가한다. 이탈리아의 해군기는 현재도 이들 4개 도시의 문장(紋章)으로 되어 있다.
역사가 있는 만큼 두오모도 일품이다. 단순히 예쁜 마을의 성당 차원을 넘어 한때 티레노 바다를 호령했던 도시의 두오모다운 웅자(雄姿)가 있다. 중세의 상인들 대신 각국의 관광객들로 주역이 바뀌었지만 도시의 활기만큼은 오늘도 여전하다.
살레르노
 |
| 아말피의 두오모와 종탑. 당대 해상세력의 두오모답게 양식의 화려함과 규모의 의젓함을 함께 갖추었다. |
그러던 이곳이 1980년 혹심한 지진으로 복구불능의 지경에 갔다가 EU의 도움으로 본격적인 도시 재건에 나선 것은 지난 90년대다.
재작년에 만난 살레르노 시장은 바다에 면한 중세 팔라초의 널찍한 사무실에서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가 설계한 마리나 시설,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디자인한 연안부두 등을 가리키며 변모하는 도시 홍보에 열심이었다.
살레르노의 두오모에 가면 이 도시의 부침에 못지않은 영욕의 세월을 보내고 제단 밑에 영면한 중세의 교황이 있다. 그레고리우스 7세(1073~85 재위). 역사에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욕보인’ 그는 이내 황제의 되갚음으로 로마에 감금되는 처지가 되었다가 노르만의 맹장 귀스카르도(Roberto Guiscardo)에 구출되어 살레르노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그에게 큰 위로가 있었다면 아마 곁에 함께 있던 복음서 저자 마테오 성인이었을 것이다. 성 마테오의 유해는 954년 롬바르드 왕이 살레르노에 정도(定都)할 때 옮겨와 두오모 지하실(cripta)에 모셨던 것이다. 부침과 영욕은 인간사의 숙명이다. 소렌토 반도와 아말피 해안을 다닐 때 구름 위를 걷는 듯하던 기분이 살레르노에 오면서 다시 땅 위에 내려온 느낌으로 바뀌는 것도 일종의 부침 현상이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