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⑧ 崔鳴吉

事大외교로 조선을 구한 외곬 主和論者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張哲均
⊙ 63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 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주 라오스 대사·주 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인조는 淸軍에 포위되어 50여 일간 농성하다가 결국 항복했다.
  조선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500년을 이어 간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 장구한 조선 역사의 전개 과정에는 세종 때와 같이 찬란한 영광의 시대도 있었지만, 반대로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되어야 했던 암울한 국난(國難)의 시기도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그 비극적인 역사의 하나였다. 조선은 명(明)의 참전으로 국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일본의 흥기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세력관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기존의 대륙세력뿐 아니라 남방의 해양세력으로부터도 생존의 문제로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이번에는 북방 대륙에서 만주의 청(淸)이 일어서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다.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해야 했다. 조선 500년 역사는 이 굴욕을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역사는 임진왜란을 일본이 아닌 왜(倭)가 일으킨 난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병자호란도 병자년에 오랑캐(胡)가 일으킨 난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난은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떠오른 청(淸)이 조선을 침공해서 일어난 전쟁이었고 무기력한 조선은 여기서 왕조의 역사를 마감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이러한 국난을 단순히 호란(胡亂)으로 치부하는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조선의 조정은 옥쇄하느냐, 아니면 항복해서 생존하느냐의 입장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감내하는 ‘사대외교’를 통해 조선은 끈질긴 왕조의 역사를 이어 나갈 수 있었는데 그 선두에는 최명길(崔鳴吉·1586~1647)이 있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으로부터 조선 왕조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조차도 최명길에 대해 ‘항복을 주장하여 선비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형을 가리켜 ‘지천꾸러기’라는 말도 생겨났다. 지천(遲川)은 최명길의 호이다. 지천꾸러기는 애물단지를 일컫는 말로 남에게 까닭 없이 원망이나 힐책을 듣는 사람이어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 어원(語源)이 최명길에서 나온 것이다.
 
 
  최명길은 누구인가?
 
최명길의 스승 이항복.
  <최명길은 선조 38년(1605)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 전적이 되었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고, 정치가 날로 어두워지자 인조를 추대하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당시의 여론에 맞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는 우의정이 되어 왕을 위로하고 흩어진 정사를 잘 정리하여 안정되도록 노력하였고,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최명길의 신도비(神道碑・정3품 이상 고관들의 평생 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 두는 비)에 기록된 비문이다.
 
  이 비문은 최명길의 자손이 썼다. 주화론(主和論)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과 정책은 병자호란 이후 부정되고 소인배로 폄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최명길의 졸기(卒記)는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품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명길은 이항복(李恒福)의 문하에서 실질과 실천을 중시하는 양명학(陽明學)을 공부하였으며, 1605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1614년(광해군 6) 폐모론(廢母論)의 기밀을 누설하였다고 해서 파직당한 후 10여 년 동안 양명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스승 이항복이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귀양살이를 하던 중 죽자, 1623년 서인 강경파인 김유(金踰), 이귀(李貴) 등과 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성공했다.
 
  최명길 시대의 조선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모든 방면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피폐해지고, 양반의 면세(免稅)와 면역(免役)으로 국가 재정은 궁핍해졌다.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이념은 퇴조하고, 성리학(性理學)으로 무장된 보수적인 사림(士林)의 명분론과 예론(禮論)이 정치를 주도했다.
 
  양명학은 현실주의를 근간으로 이상주의 논리가 주류를 이룬 송(宋)의 성리학과 대조를 이루었다. 양명학이 조선에 전해져 최명길도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당시의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서는 양명학 논리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양명학을 추종하는 사대부는 소수에 불과했다.
 
  최명길은 정묘와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국난을 맞게 되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주화론을 이끌었고 척화론(斥和論)의 대표적 인물인 김상헌(金尙憲)과 대립했다. 최명길의 주화론이 결과적으로 조선을 구했지만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적인 사건으로 인해 호란 이후에는 백성과 어린 사대부들까지도 그를 탓했던 것이다. 과연 최명길은 지천꾸러기인가?
 
 
  後金의 흥기와 정묘호란
 
  최명길의 시대에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임진왜란 후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明)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흥기했다. 1616년(광해군 8) 후금(後金)을 세우고 남하하면서 명과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해졌다. 패권국으로 군림하였던 명은 지고 후금이 뜨고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 끼인 조선의 입지는 어려웠다. 국내적으로는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는 대륙의 패권을 놓고 명과 후금이 충돌하는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약소국 조선이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은 임진왜란 때에 파병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워 조선을 격변 속에 끌어들여 후금과 싸움을 붙이려 했고, 후금은 조선이 중립을 지키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의 변경을 점령하자 조선은 명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광해군은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를 정확히 판단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정책을 구사해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조선은 명군과 연계하여 후금을 괴롭히는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정책을 내세웠다. 후금에서는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태종(太宗·홍타이지)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명을 정벌하려는 야심가였고 그래서 자신들의 배후인 조선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조선과 후금의 충돌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었다.
 
  후금은 명과의 교전을 위해 극심한 물자부족 문제를 극복해야 했다. 조선의 물자가 필요했다. 그때 마침 조선에서 이괄(李适)의 난이 실패한 뒤 후금으로 도망간 잔당이 조선의 실상을 고하고 모문룡을 칠 것을 종용했다. 후금의 태종은 뜻을 굳히고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1627년 아민(阿敏)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이때 후금군에 포로로 있던 조선 장수 강홍립(姜弘立) 등도 함께 조선으로 왔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아민의 후금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의주를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안주·평양을 거쳐 황주에 이르렀다. 놀란 인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강화도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란했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斥和論 vs 主和論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조선에 강화(講和) 의사를 표시해 왔다. 명으로부터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고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 전략은 청 태종이 조선 공략을 결정할 때 이미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 조건은 크게 세 가지였다. 아민은 강홍립을 통해 1.압록강 이남의 변경 지역을 떼어 줄 것 2.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3.명을 치는 데 지원군 1만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은 주전론(主戰論)을 앞세운 척화파와 강화를 주장하는 주화파로 나누어졌다. 물론 명분을 중시하는 척화파가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주화론자들은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다.
 
  이때 홀로 강화를 주장하고 나선 이가 바로 최명길이었다. 그가 주화론을 펼치자 척화론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인조반정을 함께 성사시킨 이귀가 주화론을 지지함으로써 일단 강화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몇 안 되는 주화파는 최명길과 함께 명과 절교하고 후금과 관계를 맺는 것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후금군과 화의 교섭을 시도하였다. 이때 최명길은 후금군과 함께 온 조선 장수 강홍립과 함께 화의를 이끌어 나갔다. 결국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했던 조선의 조정은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양국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화약(和約)의 내용은 1.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2.화약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수시킬 것 3.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4.조선은 금과 강화해도 명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이 화약은 전쟁이 계속되고 후금군의 조선 노략이 장기화되는 것보다는 좋은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화약은 비록 양국이 형제관계를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후금의 무력에 굴복한 일방적 양보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군사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후금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화파의 강화협상이 그나마 조선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대립으로 치닫는 조선과 淸의 엇박자 행로
 
淸 太宗. 누르하치가 세운 後金을 이어받은 그는 國號를 淸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세폐(歲幣)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이어서 후금은 내몽고의 차하르(察哈爾) 지방을 공격하고, 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고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북경 부근을 공략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해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세폐도 대폭 늘리고 말과 정병 3만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 측은 세폐를 감액하는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오히려 후금으로부터 명 공격에 필요한 군량 공급을 요구받았다.
 
  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후금과 국교를 단절하고 군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힘을 얻게 되었다. 조선의 조정은 친명배금 정책을 주장하는 척화파가 다시 정국을 주도하면서 정묘화약을 뒤로하고 군사적 대비를 강화해 나갔다. 이제 양측은 대립하는 엇박자 행로를 걷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조문사절로 조선에 오면서 양국의 관계를 형제관계에서 군신(君臣)관계로 격상시킬 것을 강요했다. 척화파가 주도하는 조선 조정의 강경파들은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후금과 절교할 것을 주장하자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이어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고 조선에 국서를 보내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하겠다고 위협했다. 조선 조정은 격분하고 척화론자들은 주화론자인 최명길 등을 탄핵했다. 일이 꼬이자 청 태종은 조선에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조선을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淸의 稱帝建元과 조선 사대부의 동요
 
  청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은 중국의 천자(天子)만이 유일한 황제라는 조선의 기존 인식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관념으로 보자면 만주족 후금은 분명히 오랑캐이자 금수(禽獸)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조정은 격앙되었다. 전쟁도 불사하자는 초강경론을 펼치는 강경론자도 있었다. 김상헌은 그 같은 주장을 펴던 척화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명은 부모의 나라요 청은 부모의 원수입니다. 하물며 임진왜란 때의 은혜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잊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라도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재조지은의 명분을 앞세운 주전론이다.
 
  소수이지만 주화파의 의견은 달랐다. 최명길은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못해 나라가 망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국력은 현재 바닥나 있고 오랑캐의 병력은 강성합니다. 정묘년(1627)의 맹약을 지켜서 몇 년이라도 화를 늦추고, 그동안을 이용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성을 쌓으며, 군비태세를 튼튼하게 한 뒤 적의 허점을 노리는 것이 우리로서는 최상의 계책일 것입니다”고 설파했다. 최명길은 현실을 직시하고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펼친 것이다.
 
  척화론과 주화론은 명분과 현실의 대립이자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이기도 했다. 특히 김상헌은 재조지은의 의리와 척화의 명분으로 주전론을 주장하는 대다수 사대부의 성리학 정서를 대변하고 있었다. 반면에 최명길은 보다 현실적인 양명학의 가치관에 의존했다. 최명길은 오랑캐가 칭제(稱帝)했다는 사실만으로 흥분하여 명을 위해 조선의 종사(宗社)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앞세운 것이다.
 
  최명길은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주장이 정론이자 원칙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당시 현실에서 원칙을 관철하려 할 경우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명분보다는 현실이 중요했고, 기울어 가는 명보다는 떠오르는 후금과 화친함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병자호란의 발발과 최명길의 시간 끌기 전략
 
  인조는 다수인 척화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후금과 맺은 정묘약조를 파기하기로 결정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의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 친정(親征)에 나섰다. 병자호란의 시작이다. 이때 청은 침략의 명분으로 맹약을 위반한 조선을 문죄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사실은 조선을 굴복시켜 후일 명과의 결전에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였다. 청은 명이 해로(海路)로 조선을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요하(遼河) 방면에 병력을 보내 지키게 하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하지만 조선은 청과 단교 이후의 대책이 매우 미흡했다. 청군이 침략할 경우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가 맞선다는 대책뿐이었다. 일전불사의 항전태세를 취했지만 힘이 뒤따르지 못했다. 심양을 출발한 청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에 이르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청군의 선봉인 마부태는 의주를 우회하여 서울로 향했다.
 
  조선 조정은 청군이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고 하자 세자빈과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급히 강화도로 피란 보냈다. 그리고 조선군은 주변의 산성에 들어가 청야작전(淸野作戰・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 등을 소각해 버리는 작전)을 폈다. 그러나 청군의 선봉인 마부태가 서울 인근에 당도하자 허를 찔린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황급히 강화도 피란길에 나섰지만 강화도로 가는 피란길도 이미 끊겨 버렸다.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최명길이 나섰다. “종묘 사직의 존망이 호흡지간에 달렸는데 어찌 500명으로 적을 시험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이 홀로 달려가서 적장을 만나 거병한 까닭을 문의하면서 저들의 입경을 늦추어 보겠습니다. 신은 적장이 죽이면 죽으려니와, 서울 근교에 방어할 만한 땅은 남한산성밖에 없으니 전하께서는 수구문을 통해 속히 입성하셔서 추이를 살피소서.”
 
  최명길은 청군의 진영으로 마부태를 찾아가 침략의 이유를 물었다. 마부태는 보자마자 국왕을 만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최명길은 이미 임금이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당장은 만날 수 없다고 둘러댔다. 이렇게 시간을 버는 사이 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저들의 목적은 오로지 화친하는 데 있습니다. 왕자와 척화 대신을 보내면 즉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마부태를 만나고 온 최명길의 전언이자 의견이었다. 척화파 일색인 조정에서 이 의견이 수렴될 리 없었다. 성 안에는 1만4000여 명의 인원이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밖에 없었다. 인조는 교서를 내려 근왕병을 모집하는 한편 명에 원병을 청했다.
 
  청군의 선봉은 곧바로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많은 군사들이 몰려와 남한산성은 청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남북방의 구원병들이 산성으로 접근했지만 청군에게 궤멸되었다.
 
 
  항복인가 玉碎인가
 
  조선이 기대했던 명의 원병은 적은 수에 불과했는데 그나마도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 곧 이어 청 태종이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 도착해 청군을 결집시켰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성 안의 주전파도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강화론이 고개를 들었다.
 
  인조는 청군에 강화를 희망하는 문서를 보냈다. 청은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내 왔다. 청 측은 처음에는 왕세자를 내보내야 항복을 받아 주겠다고 했으나, 이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고, 나중에는 척화 신료들을 묶어 보내야 한다고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마침내 청 태종은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되 먼저 주전파의 주모자들을 잡아 보내라는 국서를 보냈다. 강화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강화에는 세자 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란해 있었는데, 결국 패전하여 모두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이 지경에서도 남한산성에서는 척화와 주화의 논쟁이 계속되었다. 김상헌, 윤집, 홍익한, 오달제 등 주전론자들은 오랑캐의 신하가 되느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사즉생(死則生)을 주장하고, 최명길 등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해 은인자중해야 한다고 했다.
 
  김상헌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합니다. 어떻게 짐승 같은 오랑캐의 뜰에 무릎을 꿇고 부끄러움을 당한단 말이오.” 최명길은 “이미 대항할 힘이 없는데 화친을 하지 않는 건 멸망을 재촉하는 일입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강화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척화 대신들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최명길은 여진족 추장을 임금처럼 여기니 마땅히 역적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척화를 지지하는 상소도 빗발쳤다. “최명길의 목을 베고 김상헌을 재상으로 삼으면 군사들도 힘을 내어 싸울 것입니다.”
 
  이런 협박 속에서도 최명길은 묵묵히 청군의 진영을 드나들며 강화 회담을 진행시켰다. 마부태가 최명길을 죽이지 못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청의 목적은 조선의 병탄이 아니라 화의를 통해 조선을 우군으로 만들자는 데 있다는 것을 최명길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백성은 죽어 갔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도 슬금슬금 도망쳤다. 정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판세가 여기에 이르자 남한산성의 장병들마저도 주화파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막다른 상황에 몰린 인조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결국 최명길 등 주화파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최명길의 항복 문서와 김상헌의 문서 찢기
 
  이조판서 최명길이 청군 진영에 보낼 문서의 초(草)를 잡았다. 그 문서는 ‘조선 국왕은 절하고 대청국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었다. <소방(小方)은 바다 쪽으로 치우친 궁벽한 산골로 —천하의 형세를 살피지 못하고 캄캄한 두메에서 오직 명(明)을 아비로 섬겨 왔는데. —소방의 몽매함은 그러하옵고, 이제 밝고 우뚝한 황극(皇極)이 있는 곳을 벼락 맞듯이 깨달았으니, 새로운 섬김으로 따를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는 것이옵니다.> 명과의 사대관계를 정리하고 청 황제에게 칭신사대(稱臣事大)하겠다는 조선의 국서이다.
 
  인조는 영의정 김류(金踰)와 김상헌, 최명길과 협의했다. 김류는 최명길이 청 태종을 가리켜 황극(皇極)이라고 일컫는 것은 태종의 신하라 해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니 문서를 청에 보내기 전에 우선 최명길을 문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상헌은 “뜻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길 터인데, 이 문서가 과연 살자는 문서인가. 이 문서가 적에게 가면, 전하는 황제의 신하가 되고 백성들은 황제의 노예가 되는 것—적이 비록 성을 에워싸고 있다 하나, 아직도 백성들이 살아 있고 또 의지할 만한 성벽이 있으니—근본에 기대어 살길을 열어야 한다”고 했다.
 
  드디어 김상헌은 최명길의 항복 문서를 찢는다. 그러자 최명길은 “나라에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이런 글을 찢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찢어진 문서를 다시 붙였다. 인조는 결국 항복 문서에 국새를 찍었다.
 
  “죽을지언정, 굴복은 있을 수 없다”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굴복은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는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두 사람의 신념이 극명하게 갈린 것이다. 문제는 병자호란과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나라는 망해도 의리와 명분을 지킬 것인가, 굴욕을 감내하고 나라를 구할 것인가의 선택인 것이다. 필자는 최명길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대의를 지키고자 분전한 김상헌은 병자호란 이후 충절의 상징으로 부각되어, 당대의 선비들에게 추앙을 받았지만, 끝까지 나라를 구하고자 분전한 최명길은 폄하되었고 결국 변절자로 치부되어 지천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용기 있는 행동과 현실주의에 입각한 사대외교는 후대(後代)에 이르러 재조명을 받게 된다.
 
 
  三田渡의 굴욕
 
청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사실을 기록한 삼전도비.
  청 태종의 항복 조건은 1.조선은 청에 사대(事大)하고, 왕자와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2.청이 명을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 3.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 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4.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5.조선은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하고 일본의 사신을 청에 내조하게 할 것 6.매년 한 번씩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청군은 조선 국왕 인조가 빨리 성 밖으로 나올 것을 재촉했다. 인조는 항복 문서를 들고 남한산성을 내려와 삼전도(三田渡·잠실 석촌호 부근)로 향했다. 인조는 세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후금 군사의 호령에 따라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림)의 항복 의식을 치러야 했다.
 
  야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흥건히 맺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당시의 상황은 비참했다. 이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청에 잡혀 가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끌려가 노예시장에 팔려 가는 등 패전국의 대가를 단단히 치르게 되었으나 조선의 왕조는 유지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청에 포로로 이끌려 갔다가 겨우 돌아온 여성들은 환향녀(還鄕女), 즉 ‘화냥녀’라는 치욕스러운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일부 양반들은 환향녀와의 이혼을 요구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이들을 회절강(回節江・절개를 회복하는 강)에 목욕시키는 촌극도 벌어졌다.
 
  현재 일본과의 군 위안부 문제가 심각한 한일 갈등의 전면에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 침입 때 끌려간 공녀(貢女)가 있었다. 화냥녀의 아픔은 그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병자호란의 결과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남한산성 인근 잠실의 석촌호 주변 언덕에는 청 태종의 요구로 세워진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가 남아 있다. 이 비(碑)에는 조선이 청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을 공덕이라 찬미한 굴욕적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의 역사도 일그러진 우리 역사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이 비는 원래 인조가 항복했던 삼전도 터에 세워졌다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강물에 수장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3년 일제가 다시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이후 1945년 광복이 되자 이곳 주민들이 다시 땅속에 묻어 버렸는데, 1963년에 홍수로 그 모습이 드러나자 다시 세워 사적 제101호로 지정한 바 있다. 그 후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고증을 거쳐 1983년 원래 위치인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對淸 관계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 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이 내왕할 때 일정 한도 내에서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開市)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역시 조선에 막대한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또한 호란 때 청으로 잡혀 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 문제도 심각했다.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됐다. 그리하여 강화 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의 파병 요구(1639년)에 대해서는 거절했다.
 
  이듬해 청이 명을 공격하면서 다시 조선에 원병을 요구했다. 조선은 임경업 등에게 병사와 무기와 식량을 주어 보냈다. 이때 최명길은 암암리에 임경업에게 “사세를 보아 가능하거든 명과 연합하여 청을 치라”고 하였다. 임경업은 청을 따라 명과 접전하다가 명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명의 몰락 직전에 최명길은 명과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생각에서 ‘조선이 청과 강화한 것은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며 사세가 부득이하여 더 이상 명을 후원할 수 없다’는 뜻을 명측에 전하려고 했다. 문서는 요동(遼東)을 지키는 청의 군대를 피해 바닷길로 은밀하게 보내야 했다.
 
  최명길은 독보(獨步)라는 이름의 중에게 명에 문서 전달의 임무를 맡겼는데 이 사실을 한 관리가 청에 밀고하였다. 최명길은 1642년(인조 20)에 명나라와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청나라에 소환되었다.
 
 
  淸의 감옥에서 만난 최명길과 김상헌
 
  최명길은 용골대의 심문을 받았다. 최명길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왕은 모르는 일이고 자기가 전적으로 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최명길은 다른 감옥으로 이관되었는데, 여기에는 김상헌이 수감되어 있었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표가 청의 감옥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시 만난 것이다.
 
  최명길은 김상헌을 명분만을 내세우는 소인으로 생각했으나, 같이 구금된 상황에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그의 절의에 탄복하였다. 김상헌도 최명길을 절개 없는 인물로 보고 있었는데, 그가 목숨을 걸고 뜻을 지키는 것을 보자 주화의 뜻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가 남아 있다.
 
  김상헌의 <이제야 서로의 우정을 되찾으니 / 문득 백년 의심이 풀리는구나(從尋兩世好 頓釋百年疑)>에 최명길이 답했다.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 / 내 마음은 둥근 고리 같아 때로는 돌아서 간다오(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
 
  타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한 것이다. 마침내 최명길은 1645년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나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事大외교로 조선을 구한 현실주의자
 
  최명길의 주화론은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시대 분위기에 밀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이후 부정됐다. 최명길은 소인배로 평가절하되어 조선의 역사에서 지천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김상헌의 척화론은 송시열(宋時烈)의 숭명배청(崇明排淸)으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장문의 김상헌 졸기(卒記) 말미에는 ‘문천상(文天祥)이 송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문천상 뒤로는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최명길은 재조지은을 비판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인물임에도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에는 주화파의 대표주자였다는 점에서 이중적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인조반정 참여는 개인적·정치적 행동이었고, 그의 대외정책 노선은 현실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재조지은의 명분을 내세운 숭명배청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
 
  최명길은 온건적인 주화론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장 못지않은 담력과 용기를 보여준 인물임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에는 위험 속에서 홀로 적진을 찾아가 계책을 세워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유사한 방법과 용단으로 병자호란의 위기 때는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적장과 담판하면서 인조와 백관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었다. 화의를 말로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거는 용기를 보였다.
 
  외교(外交)는 대외교섭(對外交涉)으로 다른 나라와의 협상을 의미한다. 협상의 잣대는 명분이 아니라 실리여야 한다. 실리는 바로 국가이익(國家利益)을 의미한다. 외교의 영역에서 보면 주화론과 척화론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국가와 국민을 볼모로 타국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지키려고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척화의 논리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명길은 외교에서 명분이라는 허상을 버리고 실리라는 실상을 추구한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명길의 주화론에 입각한 사대외교는 비록 삼전도의 국치를 대가로 한 것이지만 외교의 기본인 국가이익을 수호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광해군의 균형외교, 최명길의 실리외교가 재조명받는 이유이다.
 
  남한산성이 곧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문화적 가치가 대외적으로 높게 평가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이번 기회에 산성 앞 멀지 않은 곳에 남아 있는 ‘삼전도 비(碑)’에 대해서도 그 역사적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 비야 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삼전도 굴욕의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안보 불감증에서 깨어나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회 : 11610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19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도서출간 배너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