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티볼리 빌라 아드리아나. 황제 아드리아노가 원정 다니며 인상 깊게 본 장소들을 이곳에 재현했다. 사진은 이집트 카노페의 세라피스 신전.
그리스도가 최초의 크리스천이 아니고 마르틴 루터가 최초의 루터란(Lutheran)이 아니란 말이 있다. 좀 다르지만 많이 비슷한 맥락에서, 고대 로마인들이 최초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아니었다. 로마가 세워져 소위 로마인(Romani)이란 분류가 생기기 전 이탈리아 반도에는 이미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켈트인은 알프스 이북과 같은 고올(Gaul)족이지만 이탈리아 반도의 중원에는 이탈리아 특유의 다양한 인도·유럽계 종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교적 알려진 에트루스키(Etruschi, 영어로 에트루스칸)나 라티니(Latini) 말고도 사비니(Sabini), 팔리스키(Falisci), 볼스키(Volsci), 에르니치(Ernici), 피체니(Piceni), 산니티(Sanniti) 등등이 그들이다. 기원전 1000년 이전의 얘기다. 이들 다양한 종족의 생활 터전이 대개 오늘의 라치오주(Regione di Lazio, 수도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 일대였다. 라치오(라틴어로 라티움·Latium)라는 명칭 자체가 라틴족(Latini)의 땅이란 의미다. 나중에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세계어로 발전하는 라틴어는 많은 이탈리아어 계통의 부족어 중 하나이던 이들 라티니의 말이 체계화된 것이다. 이들 다양한 종족은 대개 BC 700년에서 500년경까지 그들이 살던 지역에 나름의 자취를 남긴 뒤 그 역사적 존재를 마감한다. 속속 로마에 흡수되어 BC 3세기 중반 팔리스키의 로마 복속을 끝으로 모두 로마인이 되는 것이다.
로마에 영향을 준 에트루스키
이 중에 에트루스키의 경우는 특별하다. 고대 로마보다 500년이나 앞서 공동체를 형성했고 이탈리아 반도의 비교적 넓은 지역에 걸쳐 살았다. 라치오의 해안지역과 토스카나 일대, 그리고 움브리아와 로마냐 일부(볼로냐, 라벤나 등)까지 아우르는 영역이다. 통칭 에트루리아(Etruria)로 불린다.
이들은 나름의 표기수단(알파벳)부터 건축양식, 생활문화, 사회조직, 산업활동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문명이라 부를 만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고 뒤이은 고대 로마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당연히 로마 것으로 알고 있는 것들 중에 에트루스키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축성술, 금속제련술, 하수처리시설 등에서 연락(宴樂)문화, 프레스코 그림, 점복술(占卜術)에 이르기까지 하나 둘이 아니다. 수도교(aqueduct)나 개선문에 필수인 아치(arco)도 에트루스키가 처음 만들었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는 장군을 영접하는 개선행진 자체가 이들의 고안(考案)이다. 고대 로마 초기 왕정시절의 역대 왕 7명 중에 에트루스키가 세 명이었다. 어찌 보면 고대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계승 문명이랄 수 있을 정도다.
로마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그 외항(外港)격인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시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트라야노 황제 때 오픈한 로마의 2천 년 관문인데다 그 이름 자체가 ‘고읍’이란 뜻이어서 숨은 볼거리들에 대한 기대가 없지 않았다. 문화예술 애호가들의 애용구(愛用句) ‘스탕달 신드롬’의 스탕달(Stendhal·1783~1842)이 만년에 프랑스 영사로 주재하며 대표작 《파르마의 수도원》을 구상한 곳이기도 하다.
시장의 설명은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이 반반이었다. 치비타베키아가 본래 기능적 측면(로마의 보급창구) 위주로 발전해 별다른 역사적 유산이 없던데다가, 2차 세계대전 끝 무렵 바로 그 ‘기능’ 때문에 연합국의 집중 폭격 대상이 되어 남아난 것이 없이 되었다는 얘기다. 대신에 에트루스키의 본거지 중 하나인 타르퀴니아(Tarquinia)가 지척이어서 고분 단지와 박물관 방문을 주선해 두었다는 것이다. 스탕달도 에트루스키에 대한 관심으로 타르퀴니아를 수시로 방문해 고고학 취미까지 얻었었다고 귀띔해 준다. 이렇게 시작된 에트루스키와의 만남은 유럽고대사와 지중해문명사의 흥미를 배가시켜 주었다.
유럽 古代史의 시작
에트루스키가 이탈리아 땅에 자리 잡은 배경에는 트로이 전쟁(기원전 1193~1183)이 있다. 트로이 전쟁은 여러 면에서 한 시대를 마감짓고 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유럽사의 큰 매듭이다. 이 전쟁을 끝으로 당시 유럽 문명의 중심이던 지중해의 판도에 큰 재편(再編)이 있게 되고 유럽사는 고대전사(前史)에서 고대사로 넘어오는 것이다. 한데 뒤섞여 있던 전설과 역사가 대개 이 전쟁을 끝으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철기 시대로 접어드는 것도 대략 이즈음이다. 대륙세력의 상징이던 히타이트가 기울고 페니키아와 그리스가 해양세력으로 일어서며 종족들의 대이동을 선도하는 것이 바로 이 어간이다. 에트루스키도 이즈음 소아시아를 떠나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머지않아 그리스 사람들은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광역 식민지(Magna Graecia)를 개척했다. 페니키아 사람들이 모티아(시칠리아섬), 카르타고를 거쳐 이비차, 말라가에까지 해상 교역로를 확대한 것도 같은 무렵이다. 페니키아는 원래 티레와 시돈(Tyre, Sidon·지금의 레바논)이 근거지였다. 그때까지 필로스-미케네-트로이-밀레토스-로도스섬-크레타섬으로 둘러싸인 에게해가 전부이던 세상을 소아시아에서 남부 스페인에 이르는 전 지중해로 확대한 것이다. 지중해의 중심이 크게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이탈리아의 연안지역이 비로소 역사에 편입되는 것이다. 이때 이탈리아의 핵심 세력이 에트루스키였다. 로마와 아테네는 아직 있기 전이고, 트로이 전쟁의 전말을 오늘의 우리에게 소상히 일러준 시인 호머나 사가(史家) 헤로도토스도 태어나기 몇백 년 전의 일들이다.
西지중해 최초로 독자문명을 구축한 에트루스키
이들 에트루스키의 살던 모습과 죽음에 대한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타르퀴니아와 체르베테리(Cerveteri)다. 둘 다 로마에서 가깝다.
타르퀴니아는 당대의 해상세력으로 등장한 에트루리아의 대표도시이자 지중해 교역의 교차로로 떠오른 티레노(Tirreno)해의 중심항구였다. 한때 그리스의 무역업자들과 페니키아의 선원들 그리고 브렌네로(Brennero) 고개를 넘어온 켈트 상인들까지 북적였다고 한다.
중세 시가지도 보기 좋지만 국립박물관이 명물이다. 예사롭지 않은 장소(비텔레스키 궁)에 놀랄 만한 수준의 에트루스키 예술품과 그리스 등 동지중해 유물들이 빽빽이 전시돼 있다. 고대 로마가 물리적 통일을 이루기 전에 이미 지중해는 빠르게 단일 문화권으로 발돋움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에트루스키가 중요한 이유는 로마에 남긴 영향도 크지만 서지중해 최초로 독자문명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반도에 최초의 도시들을 건설했고 이탈리아와 레반트(Levant) 간 교역의 주역이었다. 독자적인 해상세력으로서 지중해의 경제지형과 문화지도를 항구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 통로를 통해 유입된 것은 그리스제(製) 생활용품, 예술작품들만이 아니다. 올림포스산의 제신(諸神)들, 트로이의 전설, 영웅들의 이야기들이 함께 들어와 이탈리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로마 신화의 등장인물들이 그리스의 판박이이고 망국 트로이를 떠난 아이네아스(Aeneas)가 로마를 창건한다는 베르길리우스(Vergilius·BC 70~19)의 서사시 <아이네이드(Aeneid)>들이 다 이런 배경에 연유한다. 율리시스가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이타카로 돌아가기 전에 갖은 고초 속에 항해한 곳도 이 티레노해이다.
너무나 압도적이고 강고한 후속 문명에 묻혀 잃어버린 문명의 주인공으로 끝나버린 에트루스키! 그들의 물적 자취는 이제 라치오 일대의 네크로폴리(necropoli, ‘망자·亡者 마을’)들과 체르베테리의 고분군(古墳群) 그리고 그 안의 경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프레스코들로만 남았다. 에트루리아는 가고 로마가 유럽세계의 고전(古典)으로 등극한 것이다.
하지만 어제의 석양 없이 어찌 오늘 여명이 있겠는가. 에트루스키와 그 유산에 대한 애틋한 감상은 범유럽 낭만인들에게 공통이다. 섬세함을 잃고 견고함만 얻은 셈이라던 로렌스(D.H. Lawrence・1885~1930)의 잔잔하되 찌르는 탄식이 대표적이다. 셸리(Shelly)가 라치오를 ‘사라지고 없는 세상의 수도’라 했을 때 염두에 둔 것도 당연히 에트루스키 문명이었다.
로마의 소요를 피해 교황들이 머물던 비테르보
이제 로마를 가운데 두고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보자. 비테르보(Viterbo)는 로마에서 지척이다. 불과 한 시간 만에 시간여행을 온 듯한 느낌의 중세도시 그대로다. 교황궁(Palazzo dei Papi)과 온천이 유명한 곳이다.
1257년 알렉산드로 4세 교황이 로마의 소요사태를 견디다 못해 이곳으로 쿠리아(Curia, 교황청 지도부)를 옮겨온 뒤 조반니(요한) 21세까지 6명의 교황이 24년간 이곳에서 집무했다.
당시 로마는 전통 귀족가문들(콜론나, 오르시니 등)의 다툼에 신흥 프랑스 세력까지 기웃거려 편안할 날이 없었다. 특히 신성로마 황제와의 해묵은 갈등은 구엘프-귀벨린 간의 전(全) 이탈리아적 갈등으로 이미 뿌리내린 형편이었다. 로마에서 선출된 교황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주로 신성로마 황제의 후원으로 ‘대항교황(Anti-pope)’을 내세우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바닥을 쳤나 싶던 교황의 위상은 후술하는 아나니(Anagni) 사건과 ‘아비뇽 유수’에 이어 종내 대분열(Great Schism·1378~1418)에 이른다. 이런 와중에 큰 건물을 지을 여유도 없었겠지만 크지 않은 단정한 교황궁 건물이 소담한 로지아(loggia)와 함께 오히려 보기에 좋다.
화산지대인 비테르보의 온천은 옛날부터 약효가 알려졌다. 지금도 몇 곳이 성업 중이다. 미켈란젤로가 악성 신장결석을 이곳에서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알프스를 넘어오는 전통적 순례길이 이곳을 지나는데 로마를 목전에 둔 순례객들이 유황의 효험으로 원기를 회복한 곳이기도 하다. 이 길이 바로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sena)로서 지난 1200년간 영국의 캔터베리와 로마를 연결해 온 유서 깊은 순례길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에 비해 인지도와 이용도가 많이 떨어져 이탈리아 정부가 홍보에 고심 중이다. 온천욕과 함께 시립미술관(Museo civico)을 찾아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의 <피에타(Pieta)> 챙겨 보는 일도 잊지 말자. 전혀 다른 피에타가 주는 새로운 비감(悲感)이 어둡지만 신선하다.
메멘토 모리
비아 프란치제나가 지나는 인근 몬테피아스코네(Montefiascone)와 페렌토(Ferento)도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다. 몬테피아스코네의 교황성(Rocca dei Papi)은 경관 좋은 볼세나(Bolsena) 호수를 끼고 있어 역대 교황들이 즐겨 머물렀다. ‘아비뇽 유수’ 시절에는 프랑스 사는 교황들을 대신해 ‘하나님의 대리인의 대리인’들이 일 보던 곳이다.
프란치제나 길에 면해 있는 플라비아노 교회(Basilica di Flaviano)가 흥미롭다. 지나는 순례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내부를 예루살렘의 산 세폴크로(San Sepolcro) 교회와 똑같이 지었다고 한다. 6세기 초기 교회가 지상층에 있고 그 위로 13세기 교회를 덧지었다.
아래층 교회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히는 프레스코 그림이 하나 있다. 제목 하여 <죽음의 승리(Trionfo della Morte)>. 그림 속 유골들의 메시지가 준절하다. “Noi eravamo quello che siete adesso, Voi sarete quello che noi siamo(우리는 한때 지금의 너희 같았고, 너희는 머지않아 지금의 우리 같으리라).” 고(高)단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이탈리아에 다녀가는 많은 이가 이탈리아가 조상 덕택에 먹고사는 나라라고 쉽사리 얘기한다. 가는 곳마다 역사 문화유산들이 지천이고 특히 대형 사적이나 유명 박물관에 들어가려고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지방 소읍들의 인력이나 예산에 한계가 있어 많은 유적지, 박물관, 조형물들에 대한 적절한 관리가 점점 어려워지는 형편인 것이다. 지방만이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문화유산부가 관리하는 국가 소유 유적지와 국립박물관들이 전국에 400여 곳인데 이 중 불과 50곳 정도에 관람객의 85%가 몰린다는 것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수입의 원천이 아니라 관리비용 먹는 하마인 셈이다.
‘국립’의 사정이 이러하니 ‘주립’ ‘도립’ ‘시립’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지방 소읍에 다녀보면 연로한 관리인들이 썰렁한 공간을 지키며 옛날식으로 대형 열쇠꾸러미를 들고 방마다 따라다니며 열어주는 곳들이 적지 않다. 관심 있다고 혼자 구경하는 게 미안할 지경이다.
로마 북부의 페렌토와 치비타 카스텔라나
로마 제정 초창기에 지은 페렌토의 반원극장터(Teatro Romano di Ferento)를 방문했을 때 가슴 아픈 사연을 들었다. 은퇴를 앞두고 있다는 관리인이 평생을 아껴 돌보던 유적을 두고 한 말이다.
“옛(고대)사람들은 이곳에서 그리스 비극을 구경했는데 지금은 이곳 자체가 하나의 비극이에요. 잡초와 마른 나뭇가지들이 관객이고요.” 자신이 그만두면 후임도 없을 것이란다.
교회들의 경우도 비슷해 사제(司祭)는 고사하고 일손 구하기도 쉽지 않아 아예 문을 열지 못하는 교회들이 꽤 된다. 오래고 작은 마을들이 많은 라치오에는 이래저래 닫혀 있는 유적이나 시설들이 특히 많은 편이다. 당분간의 대안으로서는 개별 방문을 주선하거나 매년 이맘때쯤의 ‘문화주간’을 이용하는 길이 있지만 뜻있는 사람들은 걱정이 많다.
북부 라치오에서 한 군데를 더 본다면 단연 치비타 카스텔라나(Civita Castellana)다. 괴테가 꿈에 그리던 로마 방문 전야에 마음 설레며 하룻밤 묵어갔던 곳이다. 비테르보가 도시 분위기로 시간여행의 느낌을 주었다면, 치비타 카스텔라나는 자리 잡은 지형과 경관만으로 이곳이 로마 지척 맞나 싶은 느낌을 준다. 제법 깊은 골짜기 두 개가 더욱 깊은 협곡으로 만나고 그 양편 산마루 위에 각각 신구 시가지가 나뉘어 자리 잡았다. 그 자연적 굴곡만큼이나 역사적 곡절이 많고 거쳐간 인물도 많은 곳이다.
구시가지 한가운데 ‘롯카’(Rocca, 사주경계하기 좋은 위치에 지은 요새형 성채)가 구경거리다. 15세기 말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침입에서 배운 교황 알렉산드로 6세의 지시에 따라 산갈로(Sangallo il Vecchio)가 완벽한 요새로 설계한 곳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아이디어도 많이 참고했다 한다.
천험의 입지에 완만한 곡선의 벽면이 뒤로 약간 기울어지게 지었다. 시석(矢石)의 위력 약화를 위해서다. 해자(垓字)와 외벽을 어찌 넘어 안으로 들어온다 해도 또 해자가 있다. 차단용 격자문(portcullis)을 통과해 직각으로 몇 번이나 꺾어지는 코너를 돌고 돈 다음 무려 5개의 연결다리를 건너야 팔각형 본채에 이른다. 가히 요새의 모범이다. 체사레 보르자가 거처했고 율리우스 2세도 애용했다. 뒤이어 알도브란디니(Aldobrandini), 오데스칼키(Odescalchi) 등 로마의 유력가문들 차지가 되었다가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황성(荒城)에 근접하려 한다.
괴테가 묵어간 마을
마을에 도착해 시청에 들어서니 괴테가 1786년 아무개 날짜에 묵어갔다는 플라크(plaque)가 선명하다.
동석한 이 마을 문화협회장이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다. “치비타는 로마가 세워지기 천 년 전에 이미 팔리스키족의 본거지였으며, 인근 수트리(Sutri), 네피(Nepi)와는 이들이 2500년 전 로마의 치비타 병합에 협조한 이래 아직도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이어 필자의 ‘초청’ 방문을 환영한다며 “500여 년 전 불왕(佛王) 샤를 8세가 ‘비초청’ 케이스로 방문(침입을 뜻함)했던 이래 최고로 높은 외국 손님”이란다. 샤를 왕 뒤로도 괴테와 모차르트,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1796~1875, 한때 치비타에 거주했던 프랑스 화가, 서정적인 풍경화로 인상파에 영향) 등 저명인사들이 다녀갔지만 모두 민간인 신분(!)이란 것이다. 그저 농담인 줄 알면서 내가 짐짓 “괴테는 여행 떠날 때 바이마르 정부의 상서(尙書) 벼슬에 있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한국 대사가 치체로네”라며 신이 나서 얘기를 이어갔다. 치체로네(Cicerone, 라틴어로 키케로·Cicero)는 물론 고대 로마 공화정 때 정치인, 웅변가, 문필가였던 역사적 인물인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는 것이 많은 사람’ 정도의 뜻으로 일용한다.
두오모의 코스마티 장식도 일품이지만(‘코스마테스코’ 즉 ‘코스마티 류’의 솜씨가 아니라 13세기 코스마티 일가가 직접 만들었단다),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S. Maria del Carmine) 교회도 재미있는 곳이다. 고대 로마 묘지 인근의 신전터 위에 세워진 9세기 초 교회의 고색이 창연한데 예의 재활용이 도저(到底)하다. 묘지에서 가져온 석관(sarcofago)을 천 년 이상 그대로 제단(altare)으로 사용 중이다. 열주(列柱) 중 어떤 기둥(colonna)은 다른 기둥의 토막을 기둥머리(capitale)로 이어 얹어 키만 맞춘 것도 있다.
볼거리가 적지 않은 곳인데 괴테는 목전으로 다가온 로마 방문에 대한 설렘(“내일이면 로마에 도착한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이제 이 소원이 이루어지면 다음엔 다시 무엇을 바랄 것인가?”)만으로 지샌 듯하다. 치비타에 관해 《이탈리아 여행》에 적어놓은 것이라고는 성채에서 바라본 소라테산(Mt, Soratte) 이야기뿐이다.
과연 소라테산은 그 점잖은 자태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테베레 강가에 평지돌출한 이 산은 그리 높지 않은데도 홀로 선 우뚝함에 신비스런 분위기가 있다. 고대 로마 시절의 아폴로 신전 자리가 있고 산기슭 도처에 초기 기독교 시절의 암자, 성소, 기도소들이 많은 것은 다 그런 연유일 것이다. 성 실베스트로(314~335간 교황)가 콘스탄틴 황제를 조우해 문둥병을 고쳐주었다는 기독교 공인의 또 다른 배경에 관한 전승의 현장이기도 하다.
티볼리
다음은 티볼리(Tivoli). 아니에네(Aniene)강이 흘러드는 골짜기 위로 우뚝 솟은 산상 도시다. 아니에네는 로마 초입에서 테베레와 합쳐지는데 이탈리아 대부분의 강처럼 가늘고 급하다.
여담으로, 우리나라에 와본 이탈리아 사람들이 인상 깊어 하는 것 중 하나가 강이다. 한국의 강은 이탈리아 강에 비해 크고 유장(悠長)하다는 것이다. 테베레가 짧은 강이 아닌데, 목소리 큰 사람이면 어느 지점에서고 강 건너편과 대화할 수 있을 정도고, 시저(Caesar, 라틴 발음으로 케사르, 이탈리아 말로 체자레·Cesare)가 건넌 로마냐의 루비콘강은 날랜 말(馬)이면 발굽에 물 안 묻히고 뛰어넘을 거의 개천급 강이다.
티볼리는 로마에서 교통도 좋고 이탈리아의 전 역사를 관통하며 시대별로 대표 유산들이 많아 한나절 방문지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빌라 아드리아나(Villa Adriana, 아드리아노 황제가 지은 2세기 별장)는 두 말이 필요없는 고대 로마 빌라건축의 초대형 모범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개명 교황 피우스 2세의 성채(Rocca Pia)도 좋고, 분수정원 보려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빌라 데스테(Villa d’Este) 역시 르네상스 명소다. 근대로 넘어오면 폭포와 동굴까지 갖춘 그야말로 도심 속 심산유곡인 빌라 그레고리아나(Villa Gregoriana,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의 19세기 초 별장)가 있다.
이 빌라 언덕마루에 있는 고대 로마 시절 신전(Tempio della Sibilla)도 필수다. 시빌라 티부르티나(Sibilla Tiburtina, ‘티볼리 예언녀’)를 모셨던 코린트식 기둥이 예쁜 신전이다. 숲과 물에서 기운을 얻는 예언녀를 배려하여 신전건물에 큰 창(窓)을 내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천하를 평정한 후 혹시 하는 마음에 앞으로 자신보다 위대한 이가 나오겠는가 문의한 데 대해 말없이 성모자(聖母子)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는 전설로 유명한 그 시빌라(영어로 시빌·sibyl)다.
덤으로, 신전 바로 옆에 맛, 가격, 경치, 서비스가 두루 좋은 식당이 하나 있다. 리스토란테 시빌라(Ristorante Sibilla). 사람들 좋아하는 미슐랭 별까지 받은 식당인데 붐비지 않아 더욱 좋은 곳이다. 왕족에 연예인 등 다녀간 유명인사들 사진들이 즐비하다.
시간이 괜찮으면 티볼리에서 멀지 않은 팔레스트리나(Palestrina)를 빼놓을 수 없다.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와 만나 낳은 아들 텔레고누스(Telegonus)가 세웠다는 마을이다.
행운의 여신(Fortuna) 신전은 지금 남아 있는 규모만으로도 대단한데 원래는(기원전 2세기) 지금의 팔레스트리나 전체가 신전 자리였다고 한다.
중세 도심도 매력적이다. 로마의 성 베드로 교회 악장을 지내며 다성(多聲), 대위(對位) 등 기법의 도입으로 르네상스 교회음악에 공이 많았던 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1525~94, 성에서 보듯 이 마을 태생이다)의 조그만 박물관도 도심에 있다.
따귀 맞은 보니파키우스 7세
이제 아나니를 초입으로 하는 초치아리아(Ciociaria) 지역으로 넘어가자. 초치아리아는 아펜니노 산맥과 티레노 바다 사이의 에르니치 연봉(Mt. Ernici) 일대를 일컫는다.
이 지역은 기원전 4세기 말 고대 로마에 점령되기 전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원주족(原住族)들이 집중해 살던 곳이다. 아나니는 이들 중 에르니치족의 본거지였고 중세에 와서는 인노켄티우스 3세, 그레고리우스 9세, 보니파키우스 8세(1294~1303) 등 성격파 교황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산상(山上) 고읍이다. 특히 보니파키우스 8세는 1300년도에 대대적인 성년(聖年) 행사를 기획하고 로마 대학 ‘라 사피엔차(La Sapienza)’를 창립하는 등 적극적 업적도 있지만 초유의 사건사고와 추문으로 악명높은 말썽 많던 교황이었다.
이 욕심 많은 보니파키우스는 하기 싫다는 전임 첼레스티노 교황을 억지로 모셔왔다가 재임 5개월여 만에 의심스런 정황으로 ‘사퇴’시킨 후 인근 마을 푸모네(Fumone)에 ‘위리안치’한다. 이어 자신을 교황으로 ‘선출’한 뒤 그간 실추된 교황청의 위상을 만회하려고 무리수를 거듭하였다. 교황의 권위를 우선 외관부터 높이려 교황 전용 삼층관을 창안해 착용하고, 당대의 조각가 아르놀포(Arnolfo di Cambio)를 채용해 도처에 자신의 흉상, 좌상, 입상들을 세운 것까지는 별달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남의 재산 특히 유력 집안의 재산을 편취하고 자기 가족들을 중용한 것은 조금 문제였다.
실질적 화근은 가진 힘을 안 돌보고 당시 유럽에서 일취월장의 기세를 보이던 또 다른 성격파 프랑스 왕 필립 4세(미남왕 필립・1268~1314)와 정면 대립한 일이었다. 프랑스 내 교회재산에 대한 과세권이 큰 이슈였다. 필립은 급기야 교황응징단을 이탈리아에 파견해 현지에서 교황과 대립하던 콜론나 가문과 합세하여 아나니의 보니파키우스 궁에 쇄도한다. 급기야 콜론나 집안 사람 하나가 ‘신(神)의 대리인(교황)’의 따귀를 올려붙이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름하여 ‘아나니의 따귀(Schiaffo di Anagni)’. 때는 1303년, 1300년의 범(汎)유럽적 성년 행사로 교황청의 기세가 최고조에 이른 지 불과 3년 만의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파장은 컸다. 보니파키우스는 화병을 못 이겨 한 달 뒤에 사망하고 지리멸렬한 교황청은 아예 프랑스의 위세 밑에 들어가 70여 년간 아비뇽에 ‘유폐’되는 것이다.
‘유식한 베롤리’
보니파키우스 궁을 뒤로하고 좁은 길을 조금 오르면 마을 정상(옛날 에르니치 시대 아크로폴리스 자리)에 두오모가 있다. 교회 정면과 종탑(campanile)은 로마네스크 특유의 소략한 아름다움의 모범이다.
제단 지하(cripta)로 내려가면 구약과 고대 학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13세기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이다. 복원 없이 800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한눈에 들어오는 명작이다. 교회 밖 난간에 서니 일망무제의 경관과 시원한 바람이 특별하여 옛사람들의 아크로폴리스 입지선정 기준이 상당히 까다로웠음을 느낀다.
인근의 알라트리(Alatri)와 페렌티노(Ferentino)는 공히 중세 시가지가 차분하고 11세기 두오모가 위엄 있는 곳이다.
특히 기원전 6~7세기에 에르니치가 둘러친 성벽이 자랑거리다. 모르타르(mortar) 없이 거대한 돌들을 아귀 맞춰 쌓아올린 소위 사이클롭스 성벽(Cyclopean walls, 사이클롭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인데 2700년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위용이다.
베롤리(Veroli)는 성벽도 좋지만 구시가지의 골목길과 옛 아크로폴리스 올라가는 언덕길을 계단식으로 예쁘게 조성해 놓아 다니기에 쾌적하다. 조그만 마을에 얽힌 전설도 많고 고대 이래 학자들이 많이 태어나 ‘유식한 베롤리(erudita Veroli)’란 별명이 있다.
교황 파울루스 3세의 라틴어 교사로 고대 로마 건축이론의 경전격인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의 《건축론》을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술피치오(Giovanni Sulpicio)가 이 마을 사람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희귀했던 루터파 종교개혁론자 팔레아리오(Aonio Paleario)와 폼페이 연구의 권위자이자 카프리섬의 빌라 요비스(Villa Jovis,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거처)를 발굴한 고고학자 마이우리(Amadeo Maiuri·1886~1963)도 이곳 태생이다.
구시가지 중심의 경치 좋고(belvedere) 바람 시원한 목에 산타 마리아 살로메 교회(Basilica di S. Maria Salome)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연 있는 세 명의 마리아(성모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 마리아 살로메) 중 하나인 마리아 살로메는 사도 야고보(제임스)와 요한(존) 형제의 모친이다. 두 아들을 만나러 로마로 향하던 도중 이곳 베롤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이나 로마(Santa Sanctorum) 것보다는 작지만 예수가 밟았다는 성(聖)계단도 있다. 요즘 순례지로 인기 있는 스페인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가 바로 사도 야고보의 유해를 거둔 곳이다. 참고로, ‘산티아고’를 해자(解字)하면 ‘성(聖) 이아고’이고, 이아고(Iago)는 라틴명 야코부스, 이탈리아명 자코모(Giacomo), 영어로 제임스다.
中世 수도원 운동의 本鄕
라치오는 중세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본향(本鄕)이다.
유럽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요 베네딕트회(Benedictine Order)의 개조(開祖)인 성 베네딕트는 5세기 초에 이미 로마에서 멀지 않은 산골 수비아코(Subiaco)에서 쌍둥이 여동생 성 스콜라스티카(Santa Scolastica)와 함께 수도원을 세웠다. 심산의 절벽이다. 주류 교회들이 위치한 도심의 번잡에서 벗어나 인간살이의 핵심, 즉 ‘기도하고 일하는’(이탈리아 말로 ‘Ora e Lavora’) 생활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나폴리 가는 고속도로에서 멀지 않은 몬테카시노 수도원(Abbazia di Montecassino)은 529년(1529년이 아니다) 창설 이래 베네딕트 교단의 총본산격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수세의 독일군이 이곳에 웅거하자 연합국이 무차별 공격을 감행해 기독교 사상 위대한 유산 하나가 잿더미로 화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전후 이탈리아 정부는 조기 복원을 결정하면서 수도원식의 간단한 한마디 “있던 그곳에 있던 그대로(dove era, come era)”를 공사 원칙으로 정했었다고 한다. 산정에 널찍이 자리 잡은 장엄한 외관은 오늘에도 외경심을 자아내고 남음이 있다. 하지만 1500년을 지냈던 역사의 손때(patina)까지야 무슨 수로 복원하겠는가!
이후 베네딕트회를 모델로 다양한 수도회가 출범한다. 성 브루노(St. Bruno・1030~1101)의 카르투시아회(Carthusian Order)도 있지만, 라치오에는 부르고뉴의 성 베르나르(St. Bernard・1090~1153)가 이끌던 시토회 수도원(Cistercian monastry)들이 많다. 베롤리에서 가까운 카사마리 수도원(Abbazia di Casamari)과 프리베르노 근처의 포사노바 수도원(Abbazia di Fossanova)이 가볼 만하다.
‘아바치아’(영어로 abbey)라면 수도원 중에도 큰 곳을 일컫는 말인데 이 두 곳을 보면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그저 범박한 한옥단지에 온 느낌이다. 건축술의 조화인지 공간배치의 결과인지, 수도원 생활의 본래 목적과 아무런 거리가 느껴지지 않아 부담감이 없다. 두 곳 모두 일찌감치 12세기에 지어졌으며, 교회, 안뜰과 회랑(cloister), 수도승 숙소와 회관(chapter house), 식당, 학당에 순례자 숙소, 병원, 묘역까지 갖춘 전형적인 수도원 구조다. 지난 호에 둘러본 세 분수 수도원도 시토회 소속이다.
율리시스의 전설 깃든 라치오 해안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주류 교회의 세속권력이 커갈수록 그 반작용이랄까,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영적 요구도 깊어갔다. 그 표출이 중세의 다양한 수도원 운동이고, 그 지극한 경지에 성 프란체스코(S. Francesco d’Assisi・1182~1226)가 있다.
이름에 있는 대로 움브리아주의 아시시에서 태어난 성 프란체스코는 수도회의 이상이 단순한 생활이라면 그 실천은 ‘가난’에 있다는 생각이었다. 움브리아에 인접한 리에티(Rieti) 계곡 일대에 그가 머물며 기도하고, 수도회의 규칙을 만들고, 예수의 현현을 보았던 수도원과 성소(santuario)들이 서너 곳 모여 있다. ‘가난’한 호젓함이 마음에 와 닿는 곳들이다.
초치아리아에서 로마-나폴리 간 고속도로(A1)를 가로지르면 다시 티레노 바다다. 오스티아 이남의 라치오 해안은 유럽 최장의 비치를 자랑하며 좋은 해수욕장들로 유명하지만 얽힌 이야기도 많은 전설의 바닷가다. 트로이를 떠나온 아이네아스가 사랑(카르타고)을 버리고 운명(이탈리아)을 좇아 처음 자리 잡은 마을도 이곳에 있다. 라비니오-리도 디 에네아(Lavinio-Lido di Enea)란 긴 이름의 작은 어촌이 그곳이다. 율리시스(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고향 이타카로 직행하지 않고 메시나 해협에 들어섰다가 사이렌, 외눈박이 거인, 마녀 치르체오(Circeo, 그리스명 키르케) 등을 차례로 만나 갖은 고생을 다 겪은 곳도 이 티레노 바다다. 치르체오 곶에서 시작해 테라치나(Terracina)를 거쳐 가에타(Gaeta)에 이르는 해안의 이름이 또 ‘울릿세 리비에아’(Riviera d’Ulisse, 울릿세는 율리시스의 이탈리아식 표기)다.
가에타는 역사적으로 교황령과 독일(호헨슈타우펜), 프랑스(앙주), 스페인(보르보네) 등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세력 간의 경계에 위치한 요새도시이자 전략 군항이다. 이탈리아 통일 전쟁 때 나폴리 왕국이 마지막까지 버텼던 곳이고 현재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오스티아 유적지
다시 티레노 해안을 따라 로마로 되돌아오면 라치오 순례의 대미를 장식할 오스티아 유적지(Ostia Antica)가 기다린다. BC 4세기 로마의 군항으로 건설된 곳이다. 고대 로마의 지중해 제패의 전진기지였고 천하통일 후에는 지중해 교역의 허브항구였다. 서로마의 쇠락과 함께 퇴적물에 덮여 1500년을 지낸 뒤 지난 세기 초에 발굴되었다. 로마 시내에서 가깝고 유적지의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곳이다. 로마에 왔는데 폼페이 유적지까지 내려갈 시간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에게 대체 방문지로 제격이다.
데쿠마누스 막시무스(Decumanus Maximus, 고대 로마 도시계획의 근간인 동서관통 도로)가 확연하고, 원형극장, 목욕탕, 도시관문(Porta Romana), 신전 등이 한눈에 들어와 당시 도시의 전모를 그려보기 어렵잖다. 그중에도 ‘상점광장(Piazzale delle Corporazioni)’이 인상적이다. 아우구스투스 때 지은 아케이드 안 60여 개 상점이 들어섰던 자리인데 각 점포 입구 바닥에 취급상품과 원산지까지 표시한 모자이크 장식이 2000년 지난 오늘에도 선명하다. 사람들이 적고 바닷바람이 시원해 산책과 담소에도 제격인 곳이다.
벌써 마무리 시간이다. 라치오주 여행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우선 시간적으로 아득한 이야기들이 넘치는 곳이다. 신화와 전설이 얽히고 사라진 문명의 흔적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유럽 문명의 원천이 그리스-로마라는 데 이의가 없고 그리스-로마의 것들이 바로 고전(classics)이라면 에트루스키 문명을 포함한 라치오의 많은 것은 원(原)고전(proto-classics)인 셈이다. 공간적으로 아득한 것에 비한다면 지구상의 어디라기보다 달나라 얘기쯤 되는 셈이다. 당연히 르네상스, 바로크나 중세, 고대의 이야기에 비해 관광객을 끄는 일차적 흥미는 덜하다.
이 때문에 라치오주 사람들은 ‘멋없는 라치오(uncool Lazio)’의 고민을 토로한다. 화려한 르네상스 인프라와 패션산업을 자랑하는 인근의 ‘근사한 토스카나(trendy Toscana)’를 부러워한다.
나는 그때마다 종류의 차이와 품질의 차이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 수채화가 반드시 유화보다 낮은 수준의 그림일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내 생각에 라치오는 볼거리를 정해놓고 방문하기보다는 일단 방문해서 새로 발견하는 것들이 더욱 많아 즐거운 곳이라는 점들을 말해주었다.⊙
비교적 알려진 에트루스키(Etruschi, 영어로 에트루스칸)나 라티니(Latini) 말고도 사비니(Sabini), 팔리스키(Falisci), 볼스키(Volsci), 에르니치(Ernici), 피체니(Piceni), 산니티(Sanniti) 등등이 그들이다. 기원전 1000년 이전의 얘기다. 이들 다양한 종족의 생활 터전이 대개 오늘의 라치오주(Regione di Lazio, 수도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 일대였다. 라치오(라틴어로 라티움·Latium)라는 명칭 자체가 라틴족(Latini)의 땅이란 의미다. 나중에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세계어로 발전하는 라틴어는 많은 이탈리아어 계통의 부족어 중 하나이던 이들 라티니의 말이 체계화된 것이다. 이들 다양한 종족은 대개 BC 700년에서 500년경까지 그들이 살던 지역에 나름의 자취를 남긴 뒤 그 역사적 존재를 마감한다. 속속 로마에 흡수되어 BC 3세기 중반 팔리스키의 로마 복속을 끝으로 모두 로마인이 되는 것이다.
로마에 영향을 준 에트루스키
이 중에 에트루스키의 경우는 특별하다. 고대 로마보다 500년이나 앞서 공동체를 형성했고 이탈리아 반도의 비교적 넓은 지역에 걸쳐 살았다. 라치오의 해안지역과 토스카나 일대, 그리고 움브리아와 로마냐 일부(볼로냐, 라벤나 등)까지 아우르는 영역이다. 통칭 에트루리아(Etruria)로 불린다.
이들은 나름의 표기수단(알파벳)부터 건축양식, 생활문화, 사회조직, 산업활동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문명이라 부를 만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고 뒤이은 고대 로마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당연히 로마 것으로 알고 있는 것들 중에 에트루스키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축성술, 금속제련술, 하수처리시설 등에서 연락(宴樂)문화, 프레스코 그림, 점복술(占卜術)에 이르기까지 하나 둘이 아니다. 수도교(aqueduct)나 개선문에 필수인 아치(arco)도 에트루스키가 처음 만들었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는 장군을 영접하는 개선행진 자체가 이들의 고안(考案)이다. 고대 로마 초기 왕정시절의 역대 왕 7명 중에 에트루스키가 세 명이었다. 어찌 보면 고대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계승 문명이랄 수 있을 정도다.
로마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그 외항(外港)격인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시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트라야노 황제 때 오픈한 로마의 2천 년 관문인데다 그 이름 자체가 ‘고읍’이란 뜻이어서 숨은 볼거리들에 대한 기대가 없지 않았다. 문화예술 애호가들의 애용구(愛用句) ‘스탕달 신드롬’의 스탕달(Stendhal·1783~1842)이 만년에 프랑스 영사로 주재하며 대표작 《파르마의 수도원》을 구상한 곳이기도 하다.
시장의 설명은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이 반반이었다. 치비타베키아가 본래 기능적 측면(로마의 보급창구) 위주로 발전해 별다른 역사적 유산이 없던데다가, 2차 세계대전 끝 무렵 바로 그 ‘기능’ 때문에 연합국의 집중 폭격 대상이 되어 남아난 것이 없이 되었다는 얘기다. 대신에 에트루스키의 본거지 중 하나인 타르퀴니아(Tarquinia)가 지척이어서 고분 단지와 박물관 방문을 주선해 두었다는 것이다. 스탕달도 에트루스키에 대한 관심으로 타르퀴니아를 수시로 방문해 고고학 취미까지 얻었었다고 귀띔해 준다. 이렇게 시작된 에트루스키와의 만남은 유럽고대사와 지중해문명사의 흥미를 배가시켜 주었다.
유럽 古代史의 시작
에트루스키가 이탈리아 땅에 자리 잡은 배경에는 트로이 전쟁(기원전 1193~1183)이 있다. 트로이 전쟁은 여러 면에서 한 시대를 마감짓고 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유럽사의 큰 매듭이다. 이 전쟁을 끝으로 당시 유럽 문명의 중심이던 지중해의 판도에 큰 재편(再編)이 있게 되고 유럽사는 고대전사(前史)에서 고대사로 넘어오는 것이다. 한데 뒤섞여 있던 전설과 역사가 대개 이 전쟁을 끝으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철기 시대로 접어드는 것도 대략 이즈음이다. 대륙세력의 상징이던 히타이트가 기울고 페니키아와 그리스가 해양세력으로 일어서며 종족들의 대이동을 선도하는 것이 바로 이 어간이다. 에트루스키도 이즈음 소아시아를 떠나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머지않아 그리스 사람들은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광역 식민지(Magna Graecia)를 개척했다. 페니키아 사람들이 모티아(시칠리아섬), 카르타고를 거쳐 이비차, 말라가에까지 해상 교역로를 확대한 것도 같은 무렵이다. 페니키아는 원래 티레와 시돈(Tyre, Sidon·지금의 레바논)이 근거지였다. 그때까지 필로스-미케네-트로이-밀레토스-로도스섬-크레타섬으로 둘러싸인 에게해가 전부이던 세상을 소아시아에서 남부 스페인에 이르는 전 지중해로 확대한 것이다. 지중해의 중심이 크게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이탈리아의 연안지역이 비로소 역사에 편입되는 것이다. 이때 이탈리아의 핵심 세력이 에트루스키였다. 로마와 아테네는 아직 있기 전이고, 트로이 전쟁의 전말을 오늘의 우리에게 소상히 일러준 시인 호머나 사가(史家) 헤로도토스도 태어나기 몇백 년 전의 일들이다.
西지중해 최초로 독자문명을 구축한 에트루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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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르베테리의 네크로폴리스. 분묘 안을 들락거리며 분묘 위까지 무성한 수목 사이를 거닐다 보면 생사가 서로 친근해지는 느낌이다. |
타르퀴니아는 당대의 해상세력으로 등장한 에트루리아의 대표도시이자 지중해 교역의 교차로로 떠오른 티레노(Tirreno)해의 중심항구였다. 한때 그리스의 무역업자들과 페니키아의 선원들 그리고 브렌네로(Brennero) 고개를 넘어온 켈트 상인들까지 북적였다고 한다.
중세 시가지도 보기 좋지만 국립박물관이 명물이다. 예사롭지 않은 장소(비텔레스키 궁)에 놀랄 만한 수준의 에트루스키 예술품과 그리스 등 동지중해 유물들이 빽빽이 전시돼 있다. 고대 로마가 물리적 통일을 이루기 전에 이미 지중해는 빠르게 단일 문화권으로 발돋움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에트루스키가 중요한 이유는 로마에 남긴 영향도 크지만 서지중해 최초로 독자문명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반도에 최초의 도시들을 건설했고 이탈리아와 레반트(Levant) 간 교역의 주역이었다. 독자적인 해상세력으로서 지중해의 경제지형과 문화지도를 항구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 통로를 통해 유입된 것은 그리스제(製) 생활용품, 예술작품들만이 아니다. 올림포스산의 제신(諸神)들, 트로이의 전설, 영웅들의 이야기들이 함께 들어와 이탈리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로마 신화의 등장인물들이 그리스의 판박이이고 망국 트로이를 떠난 아이네아스(Aeneas)가 로마를 창건한다는 베르길리우스(Vergilius·BC 70~19)의 서사시 <아이네이드(Aeneid)>들이 다 이런 배경에 연유한다. 율리시스가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이타카로 돌아가기 전에 갖은 고초 속에 항해한 곳도 이 티레노해이다.
너무나 압도적이고 강고한 후속 문명에 묻혀 잃어버린 문명의 주인공으로 끝나버린 에트루스키! 그들의 물적 자취는 이제 라치오 일대의 네크로폴리(necropoli, ‘망자·亡者 마을’)들과 체르베테리의 고분군(古墳群) 그리고 그 안의 경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프레스코들로만 남았다. 에트루리아는 가고 로마가 유럽세계의 고전(古典)으로 등극한 것이다.
하지만 어제의 석양 없이 어찌 오늘 여명이 있겠는가. 에트루스키와 그 유산에 대한 애틋한 감상은 범유럽 낭만인들에게 공통이다. 섬세함을 잃고 견고함만 얻은 셈이라던 로렌스(D.H. Lawrence・1885~1930)의 잔잔하되 찌르는 탄식이 대표적이다. 셸리(Shelly)가 라치오를 ‘사라지고 없는 세상의 수도’라 했을 때 염두에 둔 것도 당연히 에트루스키 문명이었다.
로마의 소요를 피해 교황들이 머물던 비테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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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테르보의 교황궁. 콘클라베 홀에서 바라본 노천 로지아(loggia). 1257년 교황청이 ‘이사’ 온 뒤 1266년에 완공됐다. |
1257년 알렉산드로 4세 교황이 로마의 소요사태를 견디다 못해 이곳으로 쿠리아(Curia, 교황청 지도부)를 옮겨온 뒤 조반니(요한) 21세까지 6명의 교황이 24년간 이곳에서 집무했다.
당시 로마는 전통 귀족가문들(콜론나, 오르시니 등)의 다툼에 신흥 프랑스 세력까지 기웃거려 편안할 날이 없었다. 특히 신성로마 황제와의 해묵은 갈등은 구엘프-귀벨린 간의 전(全) 이탈리아적 갈등으로 이미 뿌리내린 형편이었다. 로마에서 선출된 교황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주로 신성로마 황제의 후원으로 ‘대항교황(Anti-pope)’을 내세우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바닥을 쳤나 싶던 교황의 위상은 후술하는 아나니(Anagni) 사건과 ‘아비뇽 유수’에 이어 종내 대분열(Great Schism·1378~1418)에 이른다. 이런 와중에 큰 건물을 지을 여유도 없었겠지만 크지 않은 단정한 교황궁 건물이 소담한 로지아(loggia)와 함께 오히려 보기에 좋다.
화산지대인 비테르보의 온천은 옛날부터 약효가 알려졌다. 지금도 몇 곳이 성업 중이다. 미켈란젤로가 악성 신장결석을 이곳에서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알프스를 넘어오는 전통적 순례길이 이곳을 지나는데 로마를 목전에 둔 순례객들이 유황의 효험으로 원기를 회복한 곳이기도 하다. 이 길이 바로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sena)로서 지난 1200년간 영국의 캔터베리와 로마를 연결해 온 유서 깊은 순례길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에 비해 인지도와 이용도가 많이 떨어져 이탈리아 정부가 홍보에 고심 중이다. 온천욕과 함께 시립미술관(Museo civico)을 찾아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의 <피에타(Pieta)> 챙겨 보는 일도 잊지 말자. 전혀 다른 피에타가 주는 새로운 비감(悲感)이 어둡지만 신선하다.
메멘토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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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테피아스코네 성 플라비아노 교회의 프레스코화. 많이 낡았지만 죽음을 잊지 말도록 당부하는 효과에는 문제가 없는 듯하다. |
프란치제나 길에 면해 있는 플라비아노 교회(Basilica di Flaviano)가 흥미롭다. 지나는 순례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내부를 예루살렘의 산 세폴크로(San Sepolcro) 교회와 똑같이 지었다고 한다. 6세기 초기 교회가 지상층에 있고 그 위로 13세기 교회를 덧지었다.
아래층 교회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히는 프레스코 그림이 하나 있다. 제목 하여 <죽음의 승리(Trionfo della Morte)>. 그림 속 유골들의 메시지가 준절하다. “Noi eravamo quello che siete adesso, Voi sarete quello che noi siamo(우리는 한때 지금의 너희 같았고, 너희는 머지않아 지금의 우리 같으리라).” 고(高)단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이탈리아에 다녀가는 많은 이가 이탈리아가 조상 덕택에 먹고사는 나라라고 쉽사리 얘기한다. 가는 곳마다 역사 문화유산들이 지천이고 특히 대형 사적이나 유명 박물관에 들어가려고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지방 소읍들의 인력이나 예산에 한계가 있어 많은 유적지, 박물관, 조형물들에 대한 적절한 관리가 점점 어려워지는 형편인 것이다. 지방만이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문화유산부가 관리하는 국가 소유 유적지와 국립박물관들이 전국에 400여 곳인데 이 중 불과 50곳 정도에 관람객의 85%가 몰린다는 것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수입의 원천이 아니라 관리비용 먹는 하마인 셈이다.
‘국립’의 사정이 이러하니 ‘주립’ ‘도립’ ‘시립’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지방 소읍에 다녀보면 연로한 관리인들이 썰렁한 공간을 지키며 옛날식으로 대형 열쇠꾸러미를 들고 방마다 따라다니며 열어주는 곳들이 적지 않다. 관심 있다고 혼자 구경하는 게 미안할 지경이다.
로마 북부의 페렌토와 치비타 카스텔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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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비타 카스텔라나의 산갈로 요새. 천험의 입지에 갖은 설계 아이디어를 동원해 침입에 대비했다. |
“옛(고대)사람들은 이곳에서 그리스 비극을 구경했는데 지금은 이곳 자체가 하나의 비극이에요. 잡초와 마른 나뭇가지들이 관객이고요.” 자신이 그만두면 후임도 없을 것이란다.
교회들의 경우도 비슷해 사제(司祭)는 고사하고 일손 구하기도 쉽지 않아 아예 문을 열지 못하는 교회들이 꽤 된다. 오래고 작은 마을들이 많은 라치오에는 이래저래 닫혀 있는 유적이나 시설들이 특히 많은 편이다. 당분간의 대안으로서는 개별 방문을 주선하거나 매년 이맘때쯤의 ‘문화주간’을 이용하는 길이 있지만 뜻있는 사람들은 걱정이 많다.
북부 라치오에서 한 군데를 더 본다면 단연 치비타 카스텔라나(Civita Castellana)다. 괴테가 꿈에 그리던 로마 방문 전야에 마음 설레며 하룻밤 묵어갔던 곳이다. 비테르보가 도시 분위기로 시간여행의 느낌을 주었다면, 치비타 카스텔라나는 자리 잡은 지형과 경관만으로 이곳이 로마 지척 맞나 싶은 느낌을 준다. 제법 깊은 골짜기 두 개가 더욱 깊은 협곡으로 만나고 그 양편 산마루 위에 각각 신구 시가지가 나뉘어 자리 잡았다. 그 자연적 굴곡만큼이나 역사적 곡절이 많고 거쳐간 인물도 많은 곳이다.
구시가지 한가운데 ‘롯카’(Rocca, 사주경계하기 좋은 위치에 지은 요새형 성채)가 구경거리다. 15세기 말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침입에서 배운 교황 알렉산드로 6세의 지시에 따라 산갈로(Sangallo il Vecchio)가 완벽한 요새로 설계한 곳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아이디어도 많이 참고했다 한다.
천험의 입지에 완만한 곡선의 벽면이 뒤로 약간 기울어지게 지었다. 시석(矢石)의 위력 약화를 위해서다. 해자(垓字)와 외벽을 어찌 넘어 안으로 들어온다 해도 또 해자가 있다. 차단용 격자문(portcullis)을 통과해 직각으로 몇 번이나 꺾어지는 코너를 돌고 돈 다음 무려 5개의 연결다리를 건너야 팔각형 본채에 이른다. 가히 요새의 모범이다. 체사레 보르자가 거처했고 율리우스 2세도 애용했다. 뒤이어 알도브란디니(Aldobrandini), 오데스칼키(Odescalchi) 등 로마의 유력가문들 차지가 되었다가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황성(荒城)에 근접하려 한다.
괴테가 묵어간 마을
마을에 도착해 시청에 들어서니 괴테가 1786년 아무개 날짜에 묵어갔다는 플라크(plaque)가 선명하다.
동석한 이 마을 문화협회장이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다. “치비타는 로마가 세워지기 천 년 전에 이미 팔리스키족의 본거지였으며, 인근 수트리(Sutri), 네피(Nepi)와는 이들이 2500년 전 로마의 치비타 병합에 협조한 이래 아직도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이어 필자의 ‘초청’ 방문을 환영한다며 “500여 년 전 불왕(佛王) 샤를 8세가 ‘비초청’ 케이스로 방문(침입을 뜻함)했던 이래 최고로 높은 외국 손님”이란다. 샤를 왕 뒤로도 괴테와 모차르트,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1796~1875, 한때 치비타에 거주했던 프랑스 화가, 서정적인 풍경화로 인상파에 영향) 등 저명인사들이 다녀갔지만 모두 민간인 신분(!)이란 것이다. 그저 농담인 줄 알면서 내가 짐짓 “괴테는 여행 떠날 때 바이마르 정부의 상서(尙書) 벼슬에 있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한국 대사가 치체로네”라며 신이 나서 얘기를 이어갔다. 치체로네(Cicerone, 라틴어로 키케로·Cicero)는 물론 고대 로마 공화정 때 정치인, 웅변가, 문필가였던 역사적 인물인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는 것이 많은 사람’ 정도의 뜻으로 일용한다.
두오모의 코스마티 장식도 일품이지만(‘코스마테스코’ 즉 ‘코스마티 류’의 솜씨가 아니라 13세기 코스마티 일가가 직접 만들었단다),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S. Maria del Carmine) 교회도 재미있는 곳이다. 고대 로마 묘지 인근의 신전터 위에 세워진 9세기 초 교회의 고색이 창연한데 예의 재활용이 도저(到底)하다. 묘지에서 가져온 석관(sarcofago)을 천 년 이상 그대로 제단(altare)으로 사용 중이다. 열주(列柱) 중 어떤 기둥(colonna)은 다른 기둥의 토막을 기둥머리(capitale)로 이어 얹어 키만 맞춘 것도 있다.
볼거리가 적지 않은 곳인데 괴테는 목전으로 다가온 로마 방문에 대한 설렘(“내일이면 로마에 도착한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이제 이 소원이 이루어지면 다음엔 다시 무엇을 바랄 것인가?”)만으로 지샌 듯하다. 치비타에 관해 《이탈리아 여행》에 적어놓은 것이라고는 성채에서 바라본 소라테산(Mt, Soratte) 이야기뿐이다.
과연 소라테산은 그 점잖은 자태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테베레 강가에 평지돌출한 이 산은 그리 높지 않은데도 홀로 선 우뚝함에 신비스런 분위기가 있다. 고대 로마 시절의 아폴로 신전 자리가 있고 산기슭 도처에 초기 기독교 시절의 암자, 성소, 기도소들이 많은 것은 다 그런 연유일 것이다. 성 실베스트로(314~335간 교황)가 콘스탄틴 황제를 조우해 문둥병을 고쳐주었다는 기독교 공인의 또 다른 배경에 관한 전승의 현장이기도 하다.
티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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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볼리 빌라 데스테의 분수정원. 추기경 이폴리토 데스테는 교황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로마 대신 로마 근교에 큰 집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
여담으로, 우리나라에 와본 이탈리아 사람들이 인상 깊어 하는 것 중 하나가 강이다. 한국의 강은 이탈리아 강에 비해 크고 유장(悠長)하다는 것이다. 테베레가 짧은 강이 아닌데, 목소리 큰 사람이면 어느 지점에서고 강 건너편과 대화할 수 있을 정도고, 시저(Caesar, 라틴 발음으로 케사르, 이탈리아 말로 체자레·Cesare)가 건넌 로마냐의 루비콘강은 날랜 말(馬)이면 발굽에 물 안 묻히고 뛰어넘을 거의 개천급 강이다.
티볼리는 로마에서 교통도 좋고 이탈리아의 전 역사를 관통하며 시대별로 대표 유산들이 많아 한나절 방문지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빌라 아드리아나(Villa Adriana, 아드리아노 황제가 지은 2세기 별장)는 두 말이 필요없는 고대 로마 빌라건축의 초대형 모범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개명 교황 피우스 2세의 성채(Rocca Pia)도 좋고, 분수정원 보려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빌라 데스테(Villa d’Este) 역시 르네상스 명소다. 근대로 넘어오면 폭포와 동굴까지 갖춘 그야말로 도심 속 심산유곡인 빌라 그레고리아나(Villa Gregoriana,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의 19세기 초 별장)가 있다.
이 빌라 언덕마루에 있는 고대 로마 시절 신전(Tempio della Sibilla)도 필수다. 시빌라 티부르티나(Sibilla Tiburtina, ‘티볼리 예언녀’)를 모셨던 코린트식 기둥이 예쁜 신전이다. 숲과 물에서 기운을 얻는 예언녀를 배려하여 신전건물에 큰 창(窓)을 내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천하를 평정한 후 혹시 하는 마음에 앞으로 자신보다 위대한 이가 나오겠는가 문의한 데 대해 말없이 성모자(聖母子)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는 전설로 유명한 그 시빌라(영어로 시빌·sibyl)다.
덤으로, 신전 바로 옆에 맛, 가격, 경치, 서비스가 두루 좋은 식당이 하나 있다. 리스토란테 시빌라(Ristorante Sibilla). 사람들 좋아하는 미슐랭 별까지 받은 식당인데 붐비지 않아 더욱 좋은 곳이다. 왕족에 연예인 등 다녀간 유명인사들 사진들이 즐비하다.
시간이 괜찮으면 티볼리에서 멀지 않은 팔레스트리나(Palestrina)를 빼놓을 수 없다.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와 만나 낳은 아들 텔레고누스(Telegonus)가 세웠다는 마을이다.
행운의 여신(Fortuna) 신전은 지금 남아 있는 규모만으로도 대단한데 원래는(기원전 2세기) 지금의 팔레스트리나 전체가 신전 자리였다고 한다.
중세 도심도 매력적이다. 로마의 성 베드로 교회 악장을 지내며 다성(多聲), 대위(對位) 등 기법의 도입으로 르네상스 교회음악에 공이 많았던 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1525~94, 성에서 보듯 이 마을 태생이다)의 조그만 박물관도 도심에 있다.
따귀 맞은 보니파키우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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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롤리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본 구시가지 전경. 흐린 날씨에도 에르니치 연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
이 지역은 기원전 4세기 말 고대 로마에 점령되기 전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원주족(原住族)들이 집중해 살던 곳이다. 아나니는 이들 중 에르니치족의 본거지였고 중세에 와서는 인노켄티우스 3세, 그레고리우스 9세, 보니파키우스 8세(1294~1303) 등 성격파 교황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산상(山上) 고읍이다. 특히 보니파키우스 8세는 1300년도에 대대적인 성년(聖年) 행사를 기획하고 로마 대학 ‘라 사피엔차(La Sapienza)’를 창립하는 등 적극적 업적도 있지만 초유의 사건사고와 추문으로 악명높은 말썽 많던 교황이었다.
이 욕심 많은 보니파키우스는 하기 싫다는 전임 첼레스티노 교황을 억지로 모셔왔다가 재임 5개월여 만에 의심스런 정황으로 ‘사퇴’시킨 후 인근 마을 푸모네(Fumone)에 ‘위리안치’한다. 이어 자신을 교황으로 ‘선출’한 뒤 그간 실추된 교황청의 위상을 만회하려고 무리수를 거듭하였다. 교황의 권위를 우선 외관부터 높이려 교황 전용 삼층관을 창안해 착용하고, 당대의 조각가 아르놀포(Arnolfo di Cambio)를 채용해 도처에 자신의 흉상, 좌상, 입상들을 세운 것까지는 별달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남의 재산 특히 유력 집안의 재산을 편취하고 자기 가족들을 중용한 것은 조금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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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니의 궁에 있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상. 자신이 창안한 삼층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왼편은 보니파키우스 8세의 문장(紋章). |
개인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파장은 컸다. 보니파키우스는 화병을 못 이겨 한 달 뒤에 사망하고 지리멸렬한 교황청은 아예 프랑스의 위세 밑에 들어가 70여 년간 아비뇽에 ‘유폐’되는 것이다.
‘유식한 베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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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롤리의 산타 마리아 살로메 교회. 종탑이 우뚝하지 않아 교회의 소담한 규모와 어울린다. |
제단 지하(cripta)로 내려가면 구약과 고대 학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13세기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이다. 복원 없이 800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한눈에 들어오는 명작이다. 교회 밖 난간에 서니 일망무제의 경관과 시원한 바람이 특별하여 옛사람들의 아크로폴리스 입지선정 기준이 상당히 까다로웠음을 느낀다.
인근의 알라트리(Alatri)와 페렌티노(Ferentino)는 공히 중세 시가지가 차분하고 11세기 두오모가 위엄 있는 곳이다.
특히 기원전 6~7세기에 에르니치가 둘러친 성벽이 자랑거리다. 모르타르(mortar) 없이 거대한 돌들을 아귀 맞춰 쌓아올린 소위 사이클롭스 성벽(Cyclopean walls, 사이클롭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인데 2700년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위용이다.
베롤리(Veroli)는 성벽도 좋지만 구시가지의 골목길과 옛 아크로폴리스 올라가는 언덕길을 계단식으로 예쁘게 조성해 놓아 다니기에 쾌적하다. 조그만 마을에 얽힌 전설도 많고 고대 이래 학자들이 많이 태어나 ‘유식한 베롤리(erudita Veroli)’란 별명이 있다.
교황 파울루스 3세의 라틴어 교사로 고대 로마 건축이론의 경전격인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의 《건축론》을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술피치오(Giovanni Sulpicio)가 이 마을 사람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희귀했던 루터파 종교개혁론자 팔레아리오(Aonio Paleario)와 폼페이 연구의 권위자이자 카프리섬의 빌라 요비스(Villa Jovis,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거처)를 발굴한 고고학자 마이우리(Amadeo Maiuri·1886~1963)도 이곳 태생이다.
구시가지 중심의 경치 좋고(belvedere) 바람 시원한 목에 산타 마리아 살로메 교회(Basilica di S. Maria Salome)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연 있는 세 명의 마리아(성모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 마리아 살로메) 중 하나인 마리아 살로메는 사도 야고보(제임스)와 요한(존) 형제의 모친이다. 두 아들을 만나러 로마로 향하던 도중 이곳 베롤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이나 로마(Santa Sanctorum) 것보다는 작지만 예수가 밟았다는 성(聖)계단도 있다. 요즘 순례지로 인기 있는 스페인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가 바로 사도 야고보의 유해를 거둔 곳이다. 참고로, ‘산티아고’를 해자(解字)하면 ‘성(聖) 이아고’이고, 이아고(Iago)는 라틴명 야코부스, 이탈리아명 자코모(Giacomo), 영어로 제임스다.
中世 수도원 운동의 本鄕
라치오는 중세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본향(本鄕)이다.
유럽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요 베네딕트회(Benedictine Order)의 개조(開祖)인 성 베네딕트는 5세기 초에 이미 로마에서 멀지 않은 산골 수비아코(Subiaco)에서 쌍둥이 여동생 성 스콜라스티카(Santa Scolastica)와 함께 수도원을 세웠다. 심산의 절벽이다. 주류 교회들이 위치한 도심의 번잡에서 벗어나 인간살이의 핵심, 즉 ‘기도하고 일하는’(이탈리아 말로 ‘Ora e Lavora’) 생활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나폴리 가는 고속도로에서 멀지 않은 몬테카시노 수도원(Abbazia di Montecassino)은 529년(1529년이 아니다) 창설 이래 베네딕트 교단의 총본산격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수세의 독일군이 이곳에 웅거하자 연합국이 무차별 공격을 감행해 기독교 사상 위대한 유산 하나가 잿더미로 화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전후 이탈리아 정부는 조기 복원을 결정하면서 수도원식의 간단한 한마디 “있던 그곳에 있던 그대로(dove era, come era)”를 공사 원칙으로 정했었다고 한다. 산정에 널찍이 자리 잡은 장엄한 외관은 오늘에도 외경심을 자아내고 남음이 있다. 하지만 1500년을 지냈던 역사의 손때(patina)까지야 무슨 수로 복원하겠는가!
이후 베네딕트회를 모델로 다양한 수도회가 출범한다. 성 브루노(St. Bruno・1030~1101)의 카르투시아회(Carthusian Order)도 있지만, 라치오에는 부르고뉴의 성 베르나르(St. Bernard・1090~1153)가 이끌던 시토회 수도원(Cistercian monastry)들이 많다. 베롤리에서 가까운 카사마리 수도원(Abbazia di Casamari)과 프리베르노 근처의 포사노바 수도원(Abbazia di Fossanova)이 가볼 만하다.
‘아바치아’(영어로 abbey)라면 수도원 중에도 큰 곳을 일컫는 말인데 이 두 곳을 보면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그저 범박한 한옥단지에 온 느낌이다. 건축술의 조화인지 공간배치의 결과인지, 수도원 생활의 본래 목적과 아무런 거리가 느껴지지 않아 부담감이 없다. 두 곳 모두 일찌감치 12세기에 지어졌으며, 교회, 안뜰과 회랑(cloister), 수도승 숙소와 회관(chapter house), 식당, 학당에 순례자 숙소, 병원, 묘역까지 갖춘 전형적인 수도원 구조다. 지난 호에 둘러본 세 분수 수도원도 시토회 소속이다.
율리시스의 전설 깃든 라치오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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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에티 인근의 폰테 콜롬보 수도원(Convento di Fonte Colombo). 성 프란체스코가 수도회의 규칙을 지은 곳으로 40일간 금식한 동굴이 있다. |
이름에 있는 대로 움브리아주의 아시시에서 태어난 성 프란체스코는 수도회의 이상이 단순한 생활이라면 그 실천은 ‘가난’에 있다는 생각이었다. 움브리아에 인접한 리에티(Rieti) 계곡 일대에 그가 머물며 기도하고, 수도회의 규칙을 만들고, 예수의 현현을 보았던 수도원과 성소(santuario)들이 서너 곳 모여 있다. ‘가난’한 호젓함이 마음에 와 닿는 곳들이다.
초치아리아에서 로마-나폴리 간 고속도로(A1)를 가로지르면 다시 티레노 바다다. 오스티아 이남의 라치오 해안은 유럽 최장의 비치를 자랑하며 좋은 해수욕장들로 유명하지만 얽힌 이야기도 많은 전설의 바닷가다. 트로이를 떠나온 아이네아스가 사랑(카르타고)을 버리고 운명(이탈리아)을 좇아 처음 자리 잡은 마을도 이곳에 있다. 라비니오-리도 디 에네아(Lavinio-Lido di Enea)란 긴 이름의 작은 어촌이 그곳이다. 율리시스(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고향 이타카로 직행하지 않고 메시나 해협에 들어섰다가 사이렌, 외눈박이 거인, 마녀 치르체오(Circeo, 그리스명 키르케) 등을 차례로 만나 갖은 고생을 다 겪은 곳도 이 티레노 바다다. 치르체오 곶에서 시작해 테라치나(Terracina)를 거쳐 가에타(Gaeta)에 이르는 해안의 이름이 또 ‘울릿세 리비에아’(Riviera d’Ulisse, 울릿세는 율리시스의 이탈리아식 표기)다.
가에타는 역사적으로 교황령과 독일(호헨슈타우펜), 프랑스(앙주), 스페인(보르보네) 등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세력 간의 경계에 위치한 요새도시이자 전략 군항이다. 이탈리아 통일 전쟁 때 나폴리 왕국이 마지막까지 버텼던 곳이고 현재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오스티아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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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티아 안티카 유적지. 로마제국 시절 도시의 구조와 생활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다. |
데쿠마누스 막시무스(Decumanus Maximus, 고대 로마 도시계획의 근간인 동서관통 도로)가 확연하고, 원형극장, 목욕탕, 도시관문(Porta Romana), 신전 등이 한눈에 들어와 당시 도시의 전모를 그려보기 어렵잖다. 그중에도 ‘상점광장(Piazzale delle Corporazioni)’이 인상적이다. 아우구스투스 때 지은 아케이드 안 60여 개 상점이 들어섰던 자리인데 각 점포 입구 바닥에 취급상품과 원산지까지 표시한 모자이크 장식이 2000년 지난 오늘에도 선명하다. 사람들이 적고 바닷바람이 시원해 산책과 담소에도 제격인 곳이다.
벌써 마무리 시간이다. 라치오주 여행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우선 시간적으로 아득한 이야기들이 넘치는 곳이다. 신화와 전설이 얽히고 사라진 문명의 흔적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유럽 문명의 원천이 그리스-로마라는 데 이의가 없고 그리스-로마의 것들이 바로 고전(classics)이라면 에트루스키 문명을 포함한 라치오의 많은 것은 원(原)고전(proto-classics)인 셈이다. 공간적으로 아득한 것에 비한다면 지구상의 어디라기보다 달나라 얘기쯤 되는 셈이다. 당연히 르네상스, 바로크나 중세, 고대의 이야기에 비해 관광객을 끄는 일차적 흥미는 덜하다.
이 때문에 라치오주 사람들은 ‘멋없는 라치오(uncool Lazio)’의 고민을 토로한다. 화려한 르네상스 인프라와 패션산업을 자랑하는 인근의 ‘근사한 토스카나(trendy Toscana)’를 부러워한다.
나는 그때마다 종류의 차이와 품질의 차이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 수채화가 반드시 유화보다 낮은 수준의 그림일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내 생각에 라치오는 볼거리를 정해놓고 방문하기보다는 일단 방문해서 새로 발견하는 것들이 더욱 많아 즐거운 곳이라는 점들을 말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