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주 노르웨이 대사, 주 이탈리아 대사 역임.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주 노르웨이 대사, 주 이탈리아 대사 역임. 現 페레로 한국 고문.
- ‘마그나 그라이키아’ 시절 대표적 유적지의 하나인 ‘신전계곡’(Valle dei Tempi)에 있는 헤라신전. 시칠리아 섬의 아그리젠토에 있다.
이탈리아 얘기를 할 참이니 그럴듯한 이탈리아말 인용구를 하나 골라 시작해 보자.
‘Il mondo e un libro, e chi non viaggia legge solo una pagina.’ 고대 로마제국이 기울던 무렵 《참회록》의 성 오거스틴(St. Augustine, 이탈리아어로 산타고스티노 Sant’Agostino)이 한 말인데 ‘이 세상은 한 권의 책, 여행하지 않는 이는 책을 한 페이지만 읽은 셈’ 정도의 뜻이다.
필자는 이탈리아에서 대사로 3년을 살았다. 대사관이 있는 로마는 물론이고 이러저런 일로 지방을 돌아볼 기회가 적지 않았다. 일부러 계획을 세워 방문한 경우도 많았다. 대개 어디를 가 보아도 크건 작건 감탄이 이어졌다. 과거에 몇 차례 찾았던 곳을 다시 가 보아도 “어, 이랬던가?”, “아! 이런 게 있었네” 소리가 나왔다. 간직한 역사의 층과 문화의 폭이 독보적으로 두껍고 넓은 것이다.
이탈리아 20개주(州·regione)의 하나인 시칠리아 섬의 예를 잠깐 들어 보자. 고대부터 중세까지 이 섬을 거쳐 가며 뚜렷한 문화적 자취를 남긴 사람들(민족)만 보더라도, 페니키아인-그리스인-카르타고인-로마인(이탈리아인)-사라센인(아랍인)-노르만인-게르만인 등 실로 다양하다. 이들이 각기 별도로 혹은 기왕의 것에 포개서 남긴 문화유산들이 섬 하나에 가득하다. 다양한 문화들의 흥미로운 대조를 넘어 복수의 상이한 문명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수준이다. 섬 하나에 말이다. 범상할 수가 없고 어찌 보면 영어 표현대로 ‘독보적인(own category)’ 나라다.
사람들이 흔히 이탈리아가 대단한 나라라고 할 때 그 이유는 갖가지다. 누구는 음식과 와인을 얘기하고, 누구는 패션을, 또 누구는 자동차나 요트를, 디자인을, 나아가 그 문학을, 음악을, 미술을, 건축을 얘기한다. 여기서 조금 철학적으로 얘기하면, 이러한 것들은 이탈리아가 가진 비범성, 그 대단함의 현상(現象)일 뿐이다. 이들 현상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것이지만 못지않은 우리의 관심 대상은 그러한 대단함의 연원(淵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장구하고 이야깃거리 많은 역사와, 그 역사가 남긴 다양하고 다채로운 유산, 그리고 그 속에서 그 나라 사람들이 일구어 낸 전승과 문화 등 보다 항구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별다른 의식 없이 혼용하지만 유럽에서는 관광객(tourists)과 여행객(travellers)을 구분해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관광객이 대개 기분으로 떠나고 남이 짜 준 프로그램에 따라 그룹으로 다니며 소비성 나들이를 한다면, 여행객은 나름의 생각을 갖고 떠나 자신이 짠 계획에 따라 개별적으로 움직이며 생산적 답사를 즐긴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만의 단일 화두를 안고 가볍게 긴 길을 떠난다면 그건 순례길이다.
앞으로 얘기할 소재는 필자가 이탈리아에 살며 돌아본 무궁한 문화유산과 거기에 얽힌 무진한 스토리에서 취한 것들이다. 이들 유산과 문화를 살펴보되 고립된 개별적 대상으로서보다는 역사적 문맥이랄까 시·공간적 연관성 속에서 보려는 노력을 잊지 않았다. 우선 오늘은 총론으로서 ‘이탈리아사(史) 101’ 비슷한 것으로 허두(虛頭)를 삼고, 이어서 이탈리아 역사와 문화의 현장들을 나름의 체계를 갖고 분류해 소개할 계획이다. 이 연재를 통해 관광객에서 여행객으로 전향(?)하는 독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감히 기대하는 마음이다.
역사유산을 그대로 공공기관으로 재활용
이탈리아에는 8000개가 넘는 코무네(comune·수도 로마도 하나의 코무네, 시골의 수백 명 소읍도 하나의 코무네다)가 있다. 어디를 가도 나름의 창건 설화 아니면 공동체 형성의 역사적 연고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이 크고, 공동체 수호성인(patron saint)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지극하다. 마을 중심부에 성과 속을 대표하는 주교회(Duomo)와 시청(Municipio)이 있고 이 두 건물이 마주보는 사이 공간인 광장(Piazza)에는 대개 근사한 분수가 하나씩 있다.
이 광장이 바로 구시가지의 중심(centro vecchio)이다. 차 한 대가 가까스로 지나갈 만한 골목 여러 개가 이 광장을 중심 삼아 모여들고 또 뻗어 나간다. 마치 이탈리아 반도의 중심에 로마가 있으면서 남북으로 또 동으로(로마의 서쪽은 얼마 안 가 바다다) 뻗어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는 형국이다. 고대 로마 시절 조성된 이들 옛길은 현재도 과거의 길이름을 그대로 지닌 채(아피아, 카시아, 살라리아, 아우렐리아 등) 어엿한 전국적 간선국도(superstrada)로 이용되고 있다. 2000년 된 그 길이 지금도 말이다.
이런 점은 다른 나라에 유례가 드물다. 이탈리아의 역사 유산들은 로마제국 시절의 신전, 개선문, 경기장, 원형 혹은 반원형 야외극장, 수도교(水導橋·aqueduct)들과, 중세로부터 르네상스 바로크 시기에 지어진 교회, 세례당, 수도원, 성채(castello), 대저택(palazzo), 별장(villa), 분수대 같은 건축 내지 건조물들이 많다.
이러한 유산들이 대개 바라보고 감탄하는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걷고, 일 보고, 물 마시고, 세례받고, 기도하고, 근무하고, 공부하고, 공연하는 현실 공간인 것이다. 500년 넘은 팔라초(궁 혹은 대저택)나 1000년이 지난 교회도, 심지어 2000년 된 담이나 길들도 오늘 그대로 일상생활의 일부다.
이렇다 보니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가 현대적 공화국으로 재출범했을 때도 과거 귀한 분들이 살았던 팔라초들이 넘쳐나 정부부처나 공공기관들의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메디치가 출신 교황 클레멘테 7세의 질녀로 프랑스 왕 앙리 2세에게 시집가면서 여러모로 유명해진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살던 팔라초 마다마(Palazzo Madama)는 현재 상원 의사당이고, 시에나에서 은행업으로 입신한 키지(Chigi) 가문 출신의 교황 알레산드로 7세가 추기경시절 살던 팔라초 키지(Palazzo Chigi)는 현재 총리실 청사다. 로마 시절 나도 가끔 드나들던 곳들인데, 이러한 재활용의 예는 한이 없다.
수많은 교회들은 당연히 오늘도 신앙공간이고, 많은 중세의 비블리오테카들도 현재 그대로 도서관인 경우가 많다. 볼로냐 대학이나 파도바 대학 같이 개교 천 년을 바라보는 대학들에 가보면, 페트라르카나 갈릴레이 같은 쟁쟁한 호학(好學) 영령들이 그 시절 그 자리의 그 대학에 다니는 수백 년 후배들의 왕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분위기가 있다. 이렇게 수백 년, 나아가 천 년을 일상적 숨결로 느끼는 환경을 경험하다 보면 우리가 젊었을 때 배운 공맹의 말씀대로 상고(尙古), 온고(溫古)하고 법고(法古), 호고(好古)하는 마음이 자연히 일어나는 장점이 있다.
옥타비아누스 逝去 2000주기 참석해 달라는 요청 받기도
한번은 이런 적이 있다. 로마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내려가는 벨레트리(Velletri)란 마을을 방문한 때다. 괴테도 그의 유명한 이탈리아 여행(1786~1788) 때 로마를 떠나 나폴리 가는 길에 하루 묵어 갔던 고읍(古邑)이다. 고대 로마 시절의 화려한 석관(sarcofago) 컬렉션을 자랑하는 소담한 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시청에서 시장 일행과 환담을 하는 중에 2014년(그러고 보니 벌써 올해다) 자기네 마을에 큰 행사가 하나 있는데 로마가 그리 멀지 않으니 필자도 참석해 달라는 얘기였다. 알고 보니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가 그 마을 태생인데, 기원후 14년(the year fourteen)에 돌아가셨으니 2014년이 2000주기(周忌)여서 추모행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14년(The year fourteen)’이라고! 우리도 언필칭 반만년 역사를 얘기하고 우리의 고대 왕국들이 한때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을 종횡했었지만 이 경우는 뭔가 조금 다르지 않나 싶었다. 50주년, 100주년, 아니면 200주년을 기념한단 얘기들은 우리 젊었을 때(1976) 미국이 독립 200주년을 대대적으로 치르는 등 대소간에 제법 듣고 보아 왔지만 2000주기를 기념한다니!
유럽 사람들과 유럽 역사를 얘기할 때, 청년 보스니아당의 열혈 청년이 사라예보 시내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를 암살하던 1914년 여름 얘기도 나오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 가던 무렵 뒷수습을 위해 빈(Wien) 회의가 시작되던 1814년도 나오지만, 1514년이나 1214년도 아니고 홑 14년을, 그것도 고고학, 역사학 연구모임도 아니고 실생활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걸 듣는 나는 속으로 ‘원! 이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2대 교황’의 고향 볼테라
한번은 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에나에서 피사 가는 쪽 시골길로 1시간쯤 들어가는 볼테라(Volterra)라는 마을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에트루리아 유적지와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로마제국 시절의 예쁜 아치 성문과 야외극장에 늘씬한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시원한 전형적인 토스카나 구릉 위의 마을이다. 에트루리아의 ‘잃어버린 문명’에 대해 애틋한 글들을 남긴 영국 소설가 로렌스(D.H. Lawrence)도 좋아하던 곳이다. 또 대리석의 일종으로 알라배스터란 돌이 있는데, 그 재질이 보드랍다 못해 투명한 데다 무늿결이 아름다워, 중세 교회들 중에는 창문을 낼 때 값비싼 유리 대신 이 돌을 얇게 저며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볼테라가 바로 이탈리아 최대의 알라배스터 산지로서 그 공예가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늘 하듯이 시립 미술관(Pinacoteca)을 둘러보니 지방 소읍 미술관에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이 즐비하다.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 ·1449~1494·한때 미켈란젤로를 자신이 운영하는 공방에서 지도),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1445~1523·로마 인근 오르비에토 두오모의 벽화로 유명)를 비롯해 매너리즘의 종결자(?)인 로소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1495~1540)의 제단화까지 그 소장(所藏)이 만만치가 않다. 뒤에 시장을 만나 덕담을 건넸더니 왈, 볼테라의 긴 역사에 자랑거리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베드로 성인에 이어 제2대 교황을 지낸 성 리누스(S.Linus)가 볼테라 출신이란 사실이란다.
가톨릭 2000년에 교황이 기백 분 나왔으리라 짐작하고, 초대 교황으로 베드로 성인이 추앙되는 것도 흐린 밤 달 보는 정도로 알겠는데 ‘제2대 교황’이라니! 이탈리아를 얘기할 때면 르네상스 시절의 줄리오 2세(Giulio·라틴어로 율리우스 Julius·1503~1513)나 레오 10세(1513~1521) 같은 교황들은 흔히 화제에 오른다. 또 중세 한창 때의 그레고리오 7세(Gregorio /Gregorius·1073~1085·‘카노사의 굴욕’ 시 욕주였던 장본인)나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zo/Innocentius· 1198~1216·성 프란체스코 교단을 포용, 승인) 들도 자주 듣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1번 제자 베드로 성인의 후임자 고향 얘기를 마치 우리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 다음 윤보선 대통령이 아산 분이라 얘기하듯, 아주 간단히 지나가는 것을 듣고 이탈리아 식 역사 호흡에 나는 또 한번 아연하였다.
이렇게 몇 군데 다녀 보며 촉발된 호기심은 이내 탐구심으로 변해 갔고,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정도로 둘러보던 자세가 화두(話頭) 들고 정진하는 심경으로 바뀌면서 기회 될 때마다 요소요소를 어지간히 돌아보았다. 어디를 가든 과연 예기치 않은 자극과 불의의 발견들이 이어졌고 볼거리, 생각거리가 넘쳐나고 처처에 도사린 얘깃거리들에 마음이 풍성하였다. 지나온 역사의 두께가 워낙 두꺼운 데다가 이탈리아를 구성하는 각 지방 코무네들이 각기 독자적인 전통과 문화를 키워 온 데 따른 다채로움이 얹힌 결과다.
대제국이 된 로마
이쯤에서 배경지식 삼아 이 두께와 다채로움의 내용을 조금 점검해 보자.
이탈리아의 역사유적 하면 먼저 로마의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혹은 폼페이의 폐허 등 고대 로마 시절의 유적들이 제일 오래인 듯 떠올린다. 하지만 고대 로마왕국의 개창연도로 공인된 기원전 753년보다 여러 백년 이전부터 이탈리아 반도에는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예의 에트루리아인들이 독자적 문명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었고, 그 밖에도 사비니(Sabini), 피체니(Piceni), 불쉬(Vulsci) 등 수많은 중소 부족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오늘날에도 자기가 이들 부족의 후손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다.
같은 때 시칠리아 섬을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남단에는 그리스인들이 이주 내지 식민해 대거 살고 있었다. 그 규모가, 마치 훗날 영국 본토와 미국 식민지 간의 관계 비슷하게, 본토의 그리스 인구를 능가하여 그 일대를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大 그리스’)라 불렀다. 아르키메데스, 피타고라스 같은 고대 그리스의 대학자들이 마그나 그라이키아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했던 이들이다.
이렇게 고대 로마 이전부터 존재해 온 다양한 갈래의 역사·문화적 뿌리들을 안고 출범한 고대 로마는 당초부터 제국의 소지를 잉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후 로마는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르며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석권해 환(環)지중해 연안 전역을 아우르는 초유의 대제국(정체는 아직 공화정)으로 거듭난다. 오늘의 ‘지중해’(Mediterranean)라는 이름은 훗날 유럽에 복수의 대등한 세력들이 속출하면서 중립적으로 붙여진 것이지만, 당시 지중해의 명칭은 ‘우리의 바다’(Mare Nostrum)였고 여기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따질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일어선 로마제국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남긴 뒤 그 1000년 수명을 다한다. 알라리크의 서고트, 겐세리크의 반달, 테오도리크의 동고트 들이 차례로 제국의 위엄을 범한 뒤 476년 종언을 고하는 것이다(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까지 계산하면 다시 1000년을 더해야 하지만 벨라 이탈리아의 관심은 이탈리아 반도가 위주다). 로마에 가면 당시 이들 야만족의 내침을 막아 보려 둘러친 성곽(Aurellian Walls)이 아직 시내 곳곳에 상당 부분 남아 그 두께와 높이의 위용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남아 있는 성문들 중 상당수는 오늘에도 수많은 차량인마가 통행하는 예의 재활용 사례들인데, 지난 1950~60년대 날리던 이탈리아 영화산업의 충무로 비아 베네토(Via Veneto)로 들어가는 핀치아노 문(Porta Pinciana)이나 고대의 간선도로 아피아 안티카(Via Appia Antica)와 이어지는 성 세바스티아노 문(Pta. S. Sebastiano) 들이 그 예다.
서로마가 멸망한 뒤 이탈리아 반도를 단체로 찾아와 정착한 마지막 ‘야만인’들은 게르만계 롬바르드족(Lombards·이탈리아어로 룽고바르디 Lungobardi·야만족으로 왔으나 머지않아 모두 기독교에 흡수)이다. 이들은 샤를마뉴가 서유럽 일대를 평정하고 로마를 방문해 신성로마 황제로 대관한 이후로도 비교적 긴 기간을 지탱하며 특유의 종족문화로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자취를 남겼다.
자동차 경주 포뮬러 원(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포르물라 우노’)의 발상지로 유명한 밀라노 인근 몬차(Monza)나 로마에서 멀지 않은 예쁜 문화도시 스폴레토(Spoleto), 고대 로마 시절 남부지방 교통의 요충지이던 베네벤토(Benevento) 등지가 대표적인 근거지들이다.
이들 도시는 현재도 그 전통을 소재로 각종 문화사업을 벌여 자의건 타의건 한번 수용한 문화는 모두 안고 가는 제국의 습관을 이어 가고 있다. 몬차가 위치하고 밀라노가 수도인 주(州)의 이름은 아예 롬바르디아(Lombardia)로, 오늘날 이탈리아 20개주 중 제일의 경제력을 자랑한다.
기독교가 로마의 유산에 끼친 흔적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시기를 관통하며 문화를 포함한 모든 부면에서 제일 크고 또 항구적인 각인을 남긴 것은 그 어느 종족도, 제국도 아닌 하나의 종교, 기독교였다.
초기 200여 년 모진 박해를 견디던 기독교는 313년 모친 헬레나의 신앙에 감화받은 콘스탄틴 황제의 공인을 받은 후,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뉘기 전 마지막 단독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때 국교로 선포된다. 이내 알프스를 넘어 5세기가 저물기 전에 프랑크족의 맹장 클로비스(Clovis)를 개종시킨 기독교는 6세기가 다 가기 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헌신적 포교 끝에 도버 건너 영국까지 품어 들임으로써 쾌속의 신장을 거듭한다.
이즈음에서 로마 주교는 자신이 이끄는 로마 교회의 정통성, 즉 여타 교회에 대한 차별적 우월성을 내세우고(로만 가톨리시즘) 자신을 여타 지역 주교들과 단호히 구분해 교황(Pope/Papa)이라 부르며 ‘신(神)의 대리인’을 자처한다. 이후 교황은 종교신앙의 구심점을 넘어 유럽의 정치사와 문화사에 있어 최대 권력주체의 하나가 되고, 최소한 프랑스 혁명이 나고 나폴레옹이 전 유럽의 기존 판도를 뒤흔들 때까지,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1870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로마를 내주고 바티칸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역할을 이어 갔던 것이다.
고대 로마의 역사 유산이 주로 건축물인 데 비해 기독교가 남긴 유산은 훨씬 광범위하다. 교회 초기의 카타콤베(Catacombe·지하묘지 구조물)와 수많은 순교 성인들의 유골, 유품들을 위시한 이탈리아 각지의 대소 교회와 수도원들, 그리고 그 안의 기가 막힌 벽화들 성물들 조각들 그림들만이 아니다. 박해를 벗어나 권력의 자리에 오른 교황과 그 가족들, 추기경, 주교 등 성직자들이 짓고 즐긴 대저택(palazzo), 별장(villa)들이 역시 그 안의 무수한 예술품들과 함께 전국에 산재한데, 이들 대부분이 또한 고대 로마 시절의 방대한 건축 유산을 재활용해 지은 것들이다.
재활용 얘기가 거듭 나오는데, 이것은 이미 서 있는 건물을 일부 수리하거나 기왕에 황성옛터로 변한 곳에서 쓸 만한 건자재나 석물들을 가져다 사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아예 기왕의 건물을 기초 삼아 그 위에 덧 짓고 다시 수백 년 뒤에 천연재해나 전란 등으로 무너지면 다시 그 위에 짓고 한 경우들도 못지않게 많다.
‘역사의 두께’
예를 들어 로마의 산 클레멘테(S. Clemente) 교회를 보자. 콜로세움에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교회 쪽으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있는 이 교회는 후진(後陣·apside)을 장식한 모자이크와 초기 르네상스 화가 마솔리노(Masolino da Panicale·1383~1447)의 프레스코가 있는 경당(敬堂·capella)으로 유명하다. 현존 교회건물도 12세기, 그러니까 거의 1000년 전에 세워진 것인데 다시 그 밑으로 두 개 더 상이한 역사층(歷史層)이 발견되어 1857년(1957년이 아님)부터 시작된 발굴의 마무리 작업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 맨 밑이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신앙 미트라교 신전(1세기)이고 그 위는 제4대 교황이었던 성 클레멘테(크리미아로 추방되어 순교)의 생애를 기리는 프레스코가 남아 있는 300년대에 지어진 교회다. 앞서 얘기한 ‘두께’가 비유가 아니라 직설인 경우다.
교황과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14세기는 상대적인 침체기였다. 이 시기는 이탈리아의 주요 자치도시들이 몇몇 유력 가문의 등장과 활약으로 내부적 제도를 정비하고 경제력을 축적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때다. 피렌체(바르디, 메디치 등), 밀라노(비스콘티), 제노바(도리아)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 기간 중 로마는 역대 교황들이 자의반 타의반 프랑스에 머물며 돌아오지 않아(아비뇽의 유수·1309~1377) 중심권력의 부재 상태가 길어지고 콜라(Cola di Rienzo)의 난에 따른 무정부 상태까지 겹쳐 문화유산 생산 측면에서는 다소 허송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로마 토박이 유력가문(콜론나·Colonna) 출신 교황인 마르티노 5세(Martino V·1417~1431)가 귀향을 결심하면서 상황이 일변한다. 교황(그 직계 방계 가족, 추기경 등 성직자들과 이들을 돕는 서기, 사서, 시종, 경비병단에 조각·그림·장식·정원 등 장인, 문화예술인 등 포함)이 돌아오고 세상이 안정되자 사람이 모여들고 물산이 일어나 세수가 늘면서 교황들의 호사취미도 본격화해 15세기의 도약기를 예감하게 한다.
이제 머지않아 로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등장해 유명해진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 알레산드로 6세, 교황령(Papal State/Stato Papale)의 확대로 치면 우리의 광개토대왕에 비견할 줄리오 2세, 피렌체의 부잣집 자제 출신(로렌초 메디치의 둘째아들)으로 그 호사(好奢)가 마르틴 루터의 반감을 샀던 레오 10세 등 성속의 경계를 분방하게 넘나들며 당대 최고의 문화후원자 역할을 했던 신세대 교황들을 보게 되고, 오늘날의 우리는 그들이 주문하고 수집하고 사용하던 방대한 예술작품들을 문화유산으로 보고 즐기게 된 것이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기 교황 중의 한 분이 하셨다는 말이 전해진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교황 자리를 내려 주셨으니 우리 이제 힘써 이 자리를 즐겨 보세나!”
샤를마뉴 이후의 이탈리아
우리가 비교적 익숙한 그 뒤의 역사해설은 생략하고 이쯤에서 ‘다채로움’ 얘기로 넘어가 보자.
샤를마뉴가 서기 800년 로마제국의 적통을 시사하며 신성로마제위에 올랐으나 거창한 대관식에 비해 실제 치세는 자식 대(代)를 넘기지 못했다.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어느 하나 압도적인 세력이 없는 일종의 통치 공백기를 맞는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공백이 전국적으로 수백 개의 공화적 자치도시들이 자생하고 로마 교회도 나름의 세속적 내공을 강화하는 데 호기를 제공해 주었다.
지중해 연안 도시들의 성장이 특히 두드러져 아말피의 경우 이미 10세기에 자체의 선단으로 대외무역을 선도하였다. 군사적으로도 당시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한창 상승세이던 사라센 세력의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머지않아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등이 다투어 막강선단을 구축해 경쟁에 나서고, 이에 따라 내륙에서도 특히 중북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밀라노, 토리노, 피아첸차, 크레모나, 파도바, 만토바, 피렌체 등 수많은 도시들이 상업적으로 일어서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 로마와 인근 라치오 일대는 교황 세력권으로서 자치와는 사뭇 거리가 있는 세상이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지역 역시 이후로도 수백 년을 더 지속할 봉건제의 한복판에 처해 있었다. 당시 시칠리아 섬을 포함한 남부지역은 당대 막강 노르만족의 치하에 들어갔다. 프랑스 서북연안에 식민지(노르망디)를 건설한 이들 바이킹의 후예는 그 일부가 영국을 침공(1066·정복왕 윌리엄)하는 한편 다른 일부는 이베리아 반도를 돌아 시칠리아에 이르러 사라센들을 내쫓고 본토 남부 일대까지 겸병하였다. 메초조르노(Mezzogiorno·‘오후’란 뜻으로 이탈리아 남부지역의 별칭) 지역은 이후로도 독일(호엔슈타우펜), 프랑스(앙주), 스페인(보르보네) 등 왕가의 봉건적 통치가 이어져 공화제 자치도시들이 대세이던 북부와는 현격히 차이나는 제반 여건 속에 1861년의 통일로 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다른 나라처럼 이질적인 이탈리아 南과 北
이렇게 우선은 북부와 남부가 전통이나 문화가 많이 다르고, 자치도시들(일부는 나중에 공국이나 공화국 또는 왕국으로 발전)은 또 그들대로 상호 경쟁 속에 독자적 전통을 가꾸어 갔다. 유럽사에 유명한 12~14세기의 황제파-교황파(기벨린 vs. 겔프)가 대립하던 정치적 갈등까지 고려할 때 이탈리아의 정치·문화적 양상은 그대로 한 폭의 만화경이었다 할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중세 이래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통을 기반으로 근대 민족국가를 형성한 인근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문화적 내공 측면에서는 선도적 위치에 있던 이탈리아가 정치·군사적 위세에서는 그만 못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오늘에 와서도 남·북 이탈리아 간에 사람들의 기질이나 직장문화, 생활습관 등 많은 차이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음식문화 차이도 크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좋은 와인들이 생산되고 와인 애호는 전국이 공통이지만, 독일과 스위스에 인접한 롬바르디아 등 북부 사람들은 와인 못지않게 맥주도 즐겨 마신다. 또 북부 사람들은 대개 빵에 버터를 발라 먹지만 중부지역 토스카나 이남에선 버터는 아예 있지도 않고 빵은 올리브유에 찍어 먹거나 아니면 그냥 먹는다.
이런 고로, 아직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어디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탈리아 사람(Italiano)라고 답하기보다는 ‘로마노’(Romano·로마사람), ‘피오렌티노’(Fiorentino·피렌체사람), ‘밀라네제’(Milanese·밀라노사람), ‘베네치아노’(Veneziano·베네치아사람), ‘나폴리타노’(Napolitano·나폴리사람) 등 자기 고향 마을이나 도시를 중심으로 얘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과거에 사람들의 성(姓)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한미(寒微)한 집안일 경우 대개 태어난 마을 이름 앞에 ‘da’(영어의 from)를 붙여 성으로 사용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도 ‘빈치사람 레오나르도’란 의미다. 빈치라는 소읍은 피렌체에서 루카(Lucca) 방향으로 20여km 떨어진 산골 소읍으로 진짜 한미한 레오나르도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큰 도시의 경우엔 ‘da’를 뺀 채 위에 예시한 ‘○○사람’이란 말들을 그대로 사용한다. 앞서 나온 매너리즘 화가 로소 피오렌티노는 묻지 않아도 피렌체 출신이고, 이탈리아의 현직 대통령 조르지오 나폴리타노는 역시 나폴리 분이다.
찬란한 과거 주류문화의 중층구조 위에 이렇게 각기 독자적인 수많은 하위문화(sub-cultures)의 다양성이 얹히며 1000년 넘게 형성되어 온 특유의 이탈리아 문화는 19세기 중반 유럽대륙을 휩쓴 시대사조 민족주의 측면의 도움을 받아 뒤늦게 이탈리아 국가의 탄생으로 연결된다. 유명 영화감독 베니니(Roberto Benigni·〈Life is beautiful〉로 오스카상 수상)의 말대로 이탈리아는 오랜 문화가 먼저 있은 다음 겨우 국가가 만들어진 희귀한 케이스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유럽의 구질서 복귀를 주재하며 민족주의 운동의 천적(天敵)역할을 하던 오스트리아 제국 수상 메테르니히의 “‘이탈리아’는 단지 지리 개념일 뿐”이라던 단언은 상당 기간 진실인 듯싶다가 1861년 이탈리아의 통일로 한갓 희언(戱言)이 되고 말았다.
초서부터 괴테까지 즐겨 찾았던 그곳, 이탈리아
이제 총론의 결론 비슷한 얘기를 한마디 더하고 마무리해 보자.
유럽의 미술사를 논하려 시대구분을 할 때 가장 단순한 방법이 ‘중세 기독교 미술’을 가운데 놓고 그 전후 미술로 나눈 다음 끝에다 ‘근현대미술’을 덧붙이는 것이다. 즉, 기독교 이전 미술(Pre-Christian Art)-중세 기독교 미술(Medieval Christian Art)-르네상스 미술(Renaissance Art)-근현대미술(Modern Art·대개 낭만주의 이후)의 구분이다.
여기서 ‘기독교 이전 미술’은 기만 년 전 동굴벽화와 이집트 문화를 빼곤 대부분 그리스-로마 미술 얘기다. ‘중세 기독교 미술’도 비잔틴 미술과 프랑스 고딕 얘기가 꼭 들어가야겠지만 역시 대부분 이탈리아 얘기를 위주로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르네상스 미술’에는 르네상스 초기, 하이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은 물론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들이 주소재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이탈리아를 빼놓고 무슨 얘기가 성립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유럽미술사, 나아가 유럽문화에서 이탈리아가 점하는 위치가 스스로 분명해진다.
바로 이 현장을 둘러보고 이 사람들을 만나 보려 중세 이래 유럽 각국의 무수한 명사와 재자들이 이탈리아를 찾았다. 일찍이 《캔터베리 이야기》의 초서(Geoffrey Chaucer, 1340~1400)가 산(알프스) 넘고 물(도버) 건너 파도바로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를 찾았던 이래 이탈리아는 유럽 각국의 명사들에겐 영감의 원천이었고 명문가 자제들에게는 교양필수 방문지였다. 이미 르네상스 시절부터 뒤러, 반 다이크, 루벤스 등 일세의 화가들과 몽테뉴를 필두로 한 무수한 문사, 예인들의 방문 혹은 이주가 이어졌다.
18세기에 이르러 괴테가 바이마르 공국의 바쁜 정무와 《파우스트》 집필을 중단하고 20개월 가까이 이탈리아를 종주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는 아예 방문러시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유의 견학성 방문에 ‘그랜드 투어’라는 공식 별칭까지 붙게 되었다. 이후 스탕달, 하이네, 바이런 등이 문학으로 다듬고 부르크하르트, 뵐플린, 베렌슨 등이 미학으로 정리한 이탈리아의 문화유산은 더욱 풍성한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정도 이론무장을 하고 이제 함께 이탈리아 여행길에 나서 보자. 이왕 떠나는 길인데 “이 교회 진짜 크네!” “이 그림 너무 예쁘다!”로 일관하기보다는, 같은 것을 보더라도 허공 속의 물건이 아니라 역사적 콘텍스트의 산물로서, 당시 사람들의 손길과 숨결 혹은 야망과 좌절을 감지하며 다니는 그런 여행길 말이다. 이런 자세로 여행에 나서면 관광길에 즐비한 착한 가격의 명품이나 좋은 와인, 맛난 음식들은 그냥 덤이다.⊙
‘Il mondo e un libro, e chi non viaggia legge solo una pagina.’ 고대 로마제국이 기울던 무렵 《참회록》의 성 오거스틴(St. Augustine, 이탈리아어로 산타고스티노 Sant’Agostino)이 한 말인데 ‘이 세상은 한 권의 책, 여행하지 않는 이는 책을 한 페이지만 읽은 셈’ 정도의 뜻이다.
필자는 이탈리아에서 대사로 3년을 살았다. 대사관이 있는 로마는 물론이고 이러저런 일로 지방을 돌아볼 기회가 적지 않았다. 일부러 계획을 세워 방문한 경우도 많았다. 대개 어디를 가 보아도 크건 작건 감탄이 이어졌다. 과거에 몇 차례 찾았던 곳을 다시 가 보아도 “어, 이랬던가?”, “아! 이런 게 있었네” 소리가 나왔다. 간직한 역사의 층과 문화의 폭이 독보적으로 두껍고 넓은 것이다.
이탈리아 20개주(州·regione)의 하나인 시칠리아 섬의 예를 잠깐 들어 보자. 고대부터 중세까지 이 섬을 거쳐 가며 뚜렷한 문화적 자취를 남긴 사람들(민족)만 보더라도, 페니키아인-그리스인-카르타고인-로마인(이탈리아인)-사라센인(아랍인)-노르만인-게르만인 등 실로 다양하다. 이들이 각기 별도로 혹은 기왕의 것에 포개서 남긴 문화유산들이 섬 하나에 가득하다. 다양한 문화들의 흥미로운 대조를 넘어 복수의 상이한 문명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수준이다. 섬 하나에 말이다. 범상할 수가 없고 어찌 보면 영어 표현대로 ‘독보적인(own category)’ 나라다.
사람들이 흔히 이탈리아가 대단한 나라라고 할 때 그 이유는 갖가지다. 누구는 음식과 와인을 얘기하고, 누구는 패션을, 또 누구는 자동차나 요트를, 디자인을, 나아가 그 문학을, 음악을, 미술을, 건축을 얘기한다. 여기서 조금 철학적으로 얘기하면, 이러한 것들은 이탈리아가 가진 비범성, 그 대단함의 현상(現象)일 뿐이다. 이들 현상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것이지만 못지않은 우리의 관심 대상은 그러한 대단함의 연원(淵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장구하고 이야깃거리 많은 역사와, 그 역사가 남긴 다양하고 다채로운 유산, 그리고 그 속에서 그 나라 사람들이 일구어 낸 전승과 문화 등 보다 항구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별다른 의식 없이 혼용하지만 유럽에서는 관광객(tourists)과 여행객(travellers)을 구분해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관광객이 대개 기분으로 떠나고 남이 짜 준 프로그램에 따라 그룹으로 다니며 소비성 나들이를 한다면, 여행객은 나름의 생각을 갖고 떠나 자신이 짠 계획에 따라 개별적으로 움직이며 생산적 답사를 즐긴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만의 단일 화두를 안고 가볍게 긴 길을 떠난다면 그건 순례길이다.
앞으로 얘기할 소재는 필자가 이탈리아에 살며 돌아본 무궁한 문화유산과 거기에 얽힌 무진한 스토리에서 취한 것들이다. 이들 유산과 문화를 살펴보되 고립된 개별적 대상으로서보다는 역사적 문맥이랄까 시·공간적 연관성 속에서 보려는 노력을 잊지 않았다. 우선 오늘은 총론으로서 ‘이탈리아사(史) 101’ 비슷한 것으로 허두(虛頭)를 삼고, 이어서 이탈리아 역사와 문화의 현장들을 나름의 체계를 갖고 분류해 소개할 계획이다. 이 연재를 통해 관광객에서 여행객으로 전향(?)하는 독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감히 기대하는 마음이다.
역사유산을 그대로 공공기관으로 재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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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루지아 시 두오모(주교회)에서 바라본 시청사와 그 사이 광장에 있는 대분수. 13세기 니콜라 피사노 작품이다. |
이 광장이 바로 구시가지의 중심(centro vecchio)이다. 차 한 대가 가까스로 지나갈 만한 골목 여러 개가 이 광장을 중심 삼아 모여들고 또 뻗어 나간다. 마치 이탈리아 반도의 중심에 로마가 있으면서 남북으로 또 동으로(로마의 서쪽은 얼마 안 가 바다다) 뻗어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는 형국이다. 고대 로마 시절 조성된 이들 옛길은 현재도 과거의 길이름을 그대로 지닌 채(아피아, 카시아, 살라리아, 아우렐리아 등) 어엿한 전국적 간선국도(superstrada)로 이용되고 있다. 2000년 된 그 길이 지금도 말이다.
이런 점은 다른 나라에 유례가 드물다. 이탈리아의 역사 유산들은 로마제국 시절의 신전, 개선문, 경기장, 원형 혹은 반원형 야외극장, 수도교(水導橋·aqueduct)들과, 중세로부터 르네상스 바로크 시기에 지어진 교회, 세례당, 수도원, 성채(castello), 대저택(palazzo), 별장(villa), 분수대 같은 건축 내지 건조물들이 많다.
이러한 유산들이 대개 바라보고 감탄하는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걷고, 일 보고, 물 마시고, 세례받고, 기도하고, 근무하고, 공부하고, 공연하는 현실 공간인 것이다. 500년 넘은 팔라초(궁 혹은 대저택)나 1000년이 지난 교회도, 심지어 2000년 된 담이나 길들도 오늘 그대로 일상생활의 일부다.
이렇다 보니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가 현대적 공화국으로 재출범했을 때도 과거 귀한 분들이 살았던 팔라초들이 넘쳐나 정부부처나 공공기관들의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메디치가 출신 교황 클레멘테 7세의 질녀로 프랑스 왕 앙리 2세에게 시집가면서 여러모로 유명해진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살던 팔라초 마다마(Palazzo Madama)는 현재 상원 의사당이고, 시에나에서 은행업으로 입신한 키지(Chigi) 가문 출신의 교황 알레산드로 7세가 추기경시절 살던 팔라초 키지(Palazzo Chigi)는 현재 총리실 청사다. 로마 시절 나도 가끔 드나들던 곳들인데, 이러한 재활용의 예는 한이 없다.
수많은 교회들은 당연히 오늘도 신앙공간이고, 많은 중세의 비블리오테카들도 현재 그대로 도서관인 경우가 많다. 볼로냐 대학이나 파도바 대학 같이 개교 천 년을 바라보는 대학들에 가보면, 페트라르카나 갈릴레이 같은 쟁쟁한 호학(好學) 영령들이 그 시절 그 자리의 그 대학에 다니는 수백 년 후배들의 왕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분위기가 있다. 이렇게 수백 년, 나아가 천 년을 일상적 숨결로 느끼는 환경을 경험하다 보면 우리가 젊었을 때 배운 공맹의 말씀대로 상고(尙古), 온고(溫古)하고 법고(法古), 호고(好古)하는 마음이 자연히 일어나는 장점이 있다.
옥타비아누스 逝去 2000주기 참석해 달라는 요청 받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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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통일(1861)을 기념해 로마 중심가 베네치아 광장에 세운 통일기념관(일명: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
‘14년(The year fourteen)’이라고! 우리도 언필칭 반만년 역사를 얘기하고 우리의 고대 왕국들이 한때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을 종횡했었지만 이 경우는 뭔가 조금 다르지 않나 싶었다. 50주년, 100주년, 아니면 200주년을 기념한단 얘기들은 우리 젊었을 때(1976) 미국이 독립 200주년을 대대적으로 치르는 등 대소간에 제법 듣고 보아 왔지만 2000주기를 기념한다니!
유럽 사람들과 유럽 역사를 얘기할 때, 청년 보스니아당의 열혈 청년이 사라예보 시내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를 암살하던 1914년 여름 얘기도 나오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 가던 무렵 뒷수습을 위해 빈(Wien) 회의가 시작되던 1814년도 나오지만, 1514년이나 1214년도 아니고 홑 14년을, 그것도 고고학, 역사학 연구모임도 아니고 실생활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걸 듣는 나는 속으로 ‘원! 이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2대 교황’의 고향 볼테라
한번은 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에나에서 피사 가는 쪽 시골길로 1시간쯤 들어가는 볼테라(Volterra)라는 마을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에트루리아 유적지와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로마제국 시절의 예쁜 아치 성문과 야외극장에 늘씬한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시원한 전형적인 토스카나 구릉 위의 마을이다. 에트루리아의 ‘잃어버린 문명’에 대해 애틋한 글들을 남긴 영국 소설가 로렌스(D.H. Lawrence)도 좋아하던 곳이다. 또 대리석의 일종으로 알라배스터란 돌이 있는데, 그 재질이 보드랍다 못해 투명한 데다 무늿결이 아름다워, 중세 교회들 중에는 창문을 낼 때 값비싼 유리 대신 이 돌을 얇게 저며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볼테라가 바로 이탈리아 최대의 알라배스터 산지로서 그 공예가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늘 하듯이 시립 미술관(Pinacoteca)을 둘러보니 지방 소읍 미술관에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이 즐비하다.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 ·1449~1494·한때 미켈란젤로를 자신이 운영하는 공방에서 지도),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1445~1523·로마 인근 오르비에토 두오모의 벽화로 유명)를 비롯해 매너리즘의 종결자(?)인 로소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1495~1540)의 제단화까지 그 소장(所藏)이 만만치가 않다. 뒤에 시장을 만나 덕담을 건넸더니 왈, 볼테라의 긴 역사에 자랑거리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베드로 성인에 이어 제2대 교황을 지낸 성 리누스(S.Linus)가 볼테라 출신이란 사실이란다.
가톨릭 2000년에 교황이 기백 분 나왔으리라 짐작하고, 초대 교황으로 베드로 성인이 추앙되는 것도 흐린 밤 달 보는 정도로 알겠는데 ‘제2대 교황’이라니! 이탈리아를 얘기할 때면 르네상스 시절의 줄리오 2세(Giulio·라틴어로 율리우스 Julius·1503~1513)나 레오 10세(1513~1521) 같은 교황들은 흔히 화제에 오른다. 또 중세 한창 때의 그레고리오 7세(Gregorio /Gregorius·1073~1085·‘카노사의 굴욕’ 시 욕주였던 장본인)나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zo/Innocentius· 1198~1216·성 프란체스코 교단을 포용, 승인) 들도 자주 듣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1번 제자 베드로 성인의 후임자 고향 얘기를 마치 우리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 다음 윤보선 대통령이 아산 분이라 얘기하듯, 아주 간단히 지나가는 것을 듣고 이탈리아 식 역사 호흡에 나는 또 한번 아연하였다.
이렇게 몇 군데 다녀 보며 촉발된 호기심은 이내 탐구심으로 변해 갔고,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정도로 둘러보던 자세가 화두(話頭) 들고 정진하는 심경으로 바뀌면서 기회 될 때마다 요소요소를 어지간히 돌아보았다. 어디를 가든 과연 예기치 않은 자극과 불의의 발견들이 이어졌고 볼거리, 생각거리가 넘쳐나고 처처에 도사린 얘깃거리들에 마음이 풍성하였다. 지나온 역사의 두께가 워낙 두꺼운 데다가 이탈리아를 구성하는 각 지방 코무네들이 각기 독자적인 전통과 문화를 키워 온 데 따른 다채로움이 얹힌 결과다.
대제국이 된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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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를 아드리아 해 브린디시 항에 연결하던 간선도로. 로마쪽 초입에 대형 카타콤베들과 유명한 쿼바디스 교회가 있다. |
이탈리아의 역사유적 하면 먼저 로마의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혹은 폼페이의 폐허 등 고대 로마 시절의 유적들이 제일 오래인 듯 떠올린다. 하지만 고대 로마왕국의 개창연도로 공인된 기원전 753년보다 여러 백년 이전부터 이탈리아 반도에는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예의 에트루리아인들이 독자적 문명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었고, 그 밖에도 사비니(Sabini), 피체니(Piceni), 불쉬(Vulsci) 등 수많은 중소 부족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오늘날에도 자기가 이들 부족의 후손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다.
같은 때 시칠리아 섬을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남단에는 그리스인들이 이주 내지 식민해 대거 살고 있었다. 그 규모가, 마치 훗날 영국 본토와 미국 식민지 간의 관계 비슷하게, 본토의 그리스 인구를 능가하여 그 일대를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大 그리스’)라 불렀다. 아르키메데스, 피타고라스 같은 고대 그리스의 대학자들이 마그나 그라이키아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했던 이들이다.
이렇게 고대 로마 이전부터 존재해 온 다양한 갈래의 역사·문화적 뿌리들을 안고 출범한 고대 로마는 당초부터 제국의 소지를 잉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후 로마는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르며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석권해 환(環)지중해 연안 전역을 아우르는 초유의 대제국(정체는 아직 공화정)으로 거듭난다. 오늘의 ‘지중해’(Mediterranean)라는 이름은 훗날 유럽에 복수의 대등한 세력들이 속출하면서 중립적으로 붙여진 것이지만, 당시 지중해의 명칭은 ‘우리의 바다’(Mare Nostrum)였고 여기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따질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일어선 로마제국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남긴 뒤 그 1000년 수명을 다한다. 알라리크의 서고트, 겐세리크의 반달, 테오도리크의 동고트 들이 차례로 제국의 위엄을 범한 뒤 476년 종언을 고하는 것이다(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까지 계산하면 다시 1000년을 더해야 하지만 벨라 이탈리아의 관심은 이탈리아 반도가 위주다). 로마에 가면 당시 이들 야만족의 내침을 막아 보려 둘러친 성곽(Aurellian Walls)이 아직 시내 곳곳에 상당 부분 남아 그 두께와 높이의 위용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남아 있는 성문들 중 상당수는 오늘에도 수많은 차량인마가 통행하는 예의 재활용 사례들인데, 지난 1950~60년대 날리던 이탈리아 영화산업의 충무로 비아 베네토(Via Veneto)로 들어가는 핀치아노 문(Porta Pinciana)이나 고대의 간선도로 아피아 안티카(Via Appia Antica)와 이어지는 성 세바스티아노 문(Pta. S. Sebastiano) 들이 그 예다.
서로마가 멸망한 뒤 이탈리아 반도를 단체로 찾아와 정착한 마지막 ‘야만인’들은 게르만계 롬바르드족(Lombards·이탈리아어로 룽고바르디 Lungobardi·야만족으로 왔으나 머지않아 모두 기독교에 흡수)이다. 이들은 샤를마뉴가 서유럽 일대를 평정하고 로마를 방문해 신성로마 황제로 대관한 이후로도 비교적 긴 기간을 지탱하며 특유의 종족문화로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자취를 남겼다.
자동차 경주 포뮬러 원(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포르물라 우노’)의 발상지로 유명한 밀라노 인근 몬차(Monza)나 로마에서 멀지 않은 예쁜 문화도시 스폴레토(Spoleto), 고대 로마 시절 남부지방 교통의 요충지이던 베네벤토(Benevento) 등지가 대표적인 근거지들이다.
이들 도시는 현재도 그 전통을 소재로 각종 문화사업을 벌여 자의건 타의건 한번 수용한 문화는 모두 안고 가는 제국의 습관을 이어 가고 있다. 몬차가 위치하고 밀라노가 수도인 주(州)의 이름은 아예 롬바르디아(Lombardia)로, 오늘날 이탈리아 20개주 중 제일의 경제력을 자랑한다.
기독교가 로마의 유산에 끼친 흔적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시기를 관통하며 문화를 포함한 모든 부면에서 제일 크고 또 항구적인 각인을 남긴 것은 그 어느 종족도, 제국도 아닌 하나의 종교, 기독교였다.
초기 200여 년 모진 박해를 견디던 기독교는 313년 모친 헬레나의 신앙에 감화받은 콘스탄틴 황제의 공인을 받은 후,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뉘기 전 마지막 단독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때 국교로 선포된다. 이내 알프스를 넘어 5세기가 저물기 전에 프랑크족의 맹장 클로비스(Clovis)를 개종시킨 기독교는 6세기가 다 가기 전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헌신적 포교 끝에 도버 건너 영국까지 품어 들임으로써 쾌속의 신장을 거듭한다.
이즈음에서 로마 주교는 자신이 이끄는 로마 교회의 정통성, 즉 여타 교회에 대한 차별적 우월성을 내세우고(로만 가톨리시즘) 자신을 여타 지역 주교들과 단호히 구분해 교황(Pope/Papa)이라 부르며 ‘신(神)의 대리인’을 자처한다. 이후 교황은 종교신앙의 구심점을 넘어 유럽의 정치사와 문화사에 있어 최대 권력주체의 하나가 되고, 최소한 프랑스 혁명이 나고 나폴레옹이 전 유럽의 기존 판도를 뒤흔들 때까지,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1870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로마를 내주고 바티칸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역할을 이어 갔던 것이다.
고대 로마의 역사 유산이 주로 건축물인 데 비해 기독교가 남긴 유산은 훨씬 광범위하다. 교회 초기의 카타콤베(Catacombe·지하묘지 구조물)와 수많은 순교 성인들의 유골, 유품들을 위시한 이탈리아 각지의 대소 교회와 수도원들, 그리고 그 안의 기가 막힌 벽화들 성물들 조각들 그림들만이 아니다. 박해를 벗어나 권력의 자리에 오른 교황과 그 가족들, 추기경, 주교 등 성직자들이 짓고 즐긴 대저택(palazzo), 별장(villa)들이 역시 그 안의 무수한 예술품들과 함께 전국에 산재한데, 이들 대부분이 또한 고대 로마 시절의 방대한 건축 유산을 재활용해 지은 것들이다.
재활용 얘기가 거듭 나오는데, 이것은 이미 서 있는 건물을 일부 수리하거나 기왕에 황성옛터로 변한 곳에서 쓸 만한 건자재나 석물들을 가져다 사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아예 기왕의 건물을 기초 삼아 그 위에 덧 짓고 다시 수백 년 뒤에 천연재해나 전란 등으로 무너지면 다시 그 위에 짓고 한 경우들도 못지않게 많다.
‘역사의 두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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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이 필요 없을 르네상스의 대표적 명품. 조토,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등 초기 르네상스 거장들의 심혈이 서린 곳이다. |
교황과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14세기는 상대적인 침체기였다. 이 시기는 이탈리아의 주요 자치도시들이 몇몇 유력 가문의 등장과 활약으로 내부적 제도를 정비하고 경제력을 축적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때다. 피렌체(바르디, 메디치 등), 밀라노(비스콘티), 제노바(도리아)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 기간 중 로마는 역대 교황들이 자의반 타의반 프랑스에 머물며 돌아오지 않아(아비뇽의 유수·1309~1377) 중심권력의 부재 상태가 길어지고 콜라(Cola di Rienzo)의 난에 따른 무정부 상태까지 겹쳐 문화유산 생산 측면에서는 다소 허송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로마 토박이 유력가문(콜론나·Colonna) 출신 교황인 마르티노 5세(Martino V·1417~1431)가 귀향을 결심하면서 상황이 일변한다. 교황(그 직계 방계 가족, 추기경 등 성직자들과 이들을 돕는 서기, 사서, 시종, 경비병단에 조각·그림·장식·정원 등 장인, 문화예술인 등 포함)이 돌아오고 세상이 안정되자 사람이 모여들고 물산이 일어나 세수가 늘면서 교황들의 호사취미도 본격화해 15세기의 도약기를 예감하게 한다.
이제 머지않아 로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등장해 유명해진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 알레산드로 6세, 교황령(Papal State/Stato Papale)의 확대로 치면 우리의 광개토대왕에 비견할 줄리오 2세, 피렌체의 부잣집 자제 출신(로렌초 메디치의 둘째아들)으로 그 호사(好奢)가 마르틴 루터의 반감을 샀던 레오 10세 등 성속의 경계를 분방하게 넘나들며 당대 최고의 문화후원자 역할을 했던 신세대 교황들을 보게 되고, 오늘날의 우리는 그들이 주문하고 수집하고 사용하던 방대한 예술작품들을 문화유산으로 보고 즐기게 된 것이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기 교황 중의 한 분이 하셨다는 말이 전해진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교황 자리를 내려 주셨으니 우리 이제 힘써 이 자리를 즐겨 보세나!”
샤를마뉴 이후의 이탈리아
우리가 비교적 익숙한 그 뒤의 역사해설은 생략하고 이쯤에서 ‘다채로움’ 얘기로 넘어가 보자.
샤를마뉴가 서기 800년 로마제국의 적통을 시사하며 신성로마제위에 올랐으나 거창한 대관식에 비해 실제 치세는 자식 대(代)를 넘기지 못했다.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어느 하나 압도적인 세력이 없는 일종의 통치 공백기를 맞는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공백이 전국적으로 수백 개의 공화적 자치도시들이 자생하고 로마 교회도 나름의 세속적 내공을 강화하는 데 호기를 제공해 주었다.
지중해 연안 도시들의 성장이 특히 두드러져 아말피의 경우 이미 10세기에 자체의 선단으로 대외무역을 선도하였다. 군사적으로도 당시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한창 상승세이던 사라센 세력의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머지않아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등이 다투어 막강선단을 구축해 경쟁에 나서고, 이에 따라 내륙에서도 특히 중북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밀라노, 토리노, 피아첸차, 크레모나, 파도바, 만토바, 피렌체 등 수많은 도시들이 상업적으로 일어서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 로마와 인근 라치오 일대는 교황 세력권으로서 자치와는 사뭇 거리가 있는 세상이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지역 역시 이후로도 수백 년을 더 지속할 봉건제의 한복판에 처해 있었다. 당시 시칠리아 섬을 포함한 남부지역은 당대 막강 노르만족의 치하에 들어갔다. 프랑스 서북연안에 식민지(노르망디)를 건설한 이들 바이킹의 후예는 그 일부가 영국을 침공(1066·정복왕 윌리엄)하는 한편 다른 일부는 이베리아 반도를 돌아 시칠리아에 이르러 사라센들을 내쫓고 본토 남부 일대까지 겸병하였다. 메초조르노(Mezzogiorno·‘오후’란 뜻으로 이탈리아 남부지역의 별칭) 지역은 이후로도 독일(호엔슈타우펜), 프랑스(앙주), 스페인(보르보네) 등 왕가의 봉건적 통치가 이어져 공화제 자치도시들이 대세이던 북부와는 현격히 차이나는 제반 여건 속에 1861년의 통일로 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다른 나라처럼 이질적인 이탈리아 南과 北
이렇게 우선은 북부와 남부가 전통이나 문화가 많이 다르고, 자치도시들(일부는 나중에 공국이나 공화국 또는 왕국으로 발전)은 또 그들대로 상호 경쟁 속에 독자적 전통을 가꾸어 갔다. 유럽사에 유명한 12~14세기의 황제파-교황파(기벨린 vs. 겔프)가 대립하던 정치적 갈등까지 고려할 때 이탈리아의 정치·문화적 양상은 그대로 한 폭의 만화경이었다 할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중세 이래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통을 기반으로 근대 민족국가를 형성한 인근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문화적 내공 측면에서는 선도적 위치에 있던 이탈리아가 정치·군사적 위세에서는 그만 못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오늘에 와서도 남·북 이탈리아 간에 사람들의 기질이나 직장문화, 생활습관 등 많은 차이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음식문화 차이도 크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좋은 와인들이 생산되고 와인 애호는 전국이 공통이지만, 독일과 스위스에 인접한 롬바르디아 등 북부 사람들은 와인 못지않게 맥주도 즐겨 마신다. 또 북부 사람들은 대개 빵에 버터를 발라 먹지만 중부지역 토스카나 이남에선 버터는 아예 있지도 않고 빵은 올리브유에 찍어 먹거나 아니면 그냥 먹는다.
이런 고로, 아직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어디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탈리아 사람(Italiano)라고 답하기보다는 ‘로마노’(Romano·로마사람), ‘피오렌티노’(Fiorentino·피렌체사람), ‘밀라네제’(Milanese·밀라노사람), ‘베네치아노’(Veneziano·베네치아사람), ‘나폴리타노’(Napolitano·나폴리사람) 등 자기 고향 마을이나 도시를 중심으로 얘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과거에 사람들의 성(姓)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한미(寒微)한 집안일 경우 대개 태어난 마을 이름 앞에 ‘da’(영어의 from)를 붙여 성으로 사용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도 ‘빈치사람 레오나르도’란 의미다. 빈치라는 소읍은 피렌체에서 루카(Lucca) 방향으로 20여km 떨어진 산골 소읍으로 진짜 한미한 레오나르도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큰 도시의 경우엔 ‘da’를 뺀 채 위에 예시한 ‘○○사람’이란 말들을 그대로 사용한다. 앞서 나온 매너리즘 화가 로소 피오렌티노는 묻지 않아도 피렌체 출신이고, 이탈리아의 현직 대통령 조르지오 나폴리타노는 역시 나폴리 분이다.
찬란한 과거 주류문화의 중층구조 위에 이렇게 각기 독자적인 수많은 하위문화(sub-cultures)의 다양성이 얹히며 1000년 넘게 형성되어 온 특유의 이탈리아 문화는 19세기 중반 유럽대륙을 휩쓴 시대사조 민족주의 측면의 도움을 받아 뒤늦게 이탈리아 국가의 탄생으로 연결된다. 유명 영화감독 베니니(Roberto Benigni·〈Life is beautiful〉로 오스카상 수상)의 말대로 이탈리아는 오랜 문화가 먼저 있은 다음 겨우 국가가 만들어진 희귀한 케이스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유럽의 구질서 복귀를 주재하며 민족주의 운동의 천적(天敵)역할을 하던 오스트리아 제국 수상 메테르니히의 “‘이탈리아’는 단지 지리 개념일 뿐”이라던 단언은 상당 기간 진실인 듯싶다가 1861년 이탈리아의 통일로 한갓 희언(戱言)이 되고 말았다.
초서부터 괴테까지 즐겨 찾았던 그곳,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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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가리발디의 기마상이 로마 전경을 굽어보는 마리오 산 기슭의 자니콜로 언덕. |
유럽의 미술사를 논하려 시대구분을 할 때 가장 단순한 방법이 ‘중세 기독교 미술’을 가운데 놓고 그 전후 미술로 나눈 다음 끝에다 ‘근현대미술’을 덧붙이는 것이다. 즉, 기독교 이전 미술(Pre-Christian Art)-중세 기독교 미술(Medieval Christian Art)-르네상스 미술(Renaissance Art)-근현대미술(Modern Art·대개 낭만주의 이후)의 구분이다.
여기서 ‘기독교 이전 미술’은 기만 년 전 동굴벽화와 이집트 문화를 빼곤 대부분 그리스-로마 미술 얘기다. ‘중세 기독교 미술’도 비잔틴 미술과 프랑스 고딕 얘기가 꼭 들어가야겠지만 역시 대부분 이탈리아 얘기를 위주로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르네상스 미술’에는 르네상스 초기, 하이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은 물론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들이 주소재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이탈리아를 빼놓고 무슨 얘기가 성립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유럽미술사, 나아가 유럽문화에서 이탈리아가 점하는 위치가 스스로 분명해진다.
바로 이 현장을 둘러보고 이 사람들을 만나 보려 중세 이래 유럽 각국의 무수한 명사와 재자들이 이탈리아를 찾았다. 일찍이 《캔터베리 이야기》의 초서(Geoffrey Chaucer, 1340~1400)가 산(알프스) 넘고 물(도버) 건너 파도바로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를 찾았던 이래 이탈리아는 유럽 각국의 명사들에겐 영감의 원천이었고 명문가 자제들에게는 교양필수 방문지였다. 이미 르네상스 시절부터 뒤러, 반 다이크, 루벤스 등 일세의 화가들과 몽테뉴를 필두로 한 무수한 문사, 예인들의 방문 혹은 이주가 이어졌다.
18세기에 이르러 괴테가 바이마르 공국의 바쁜 정무와 《파우스트》 집필을 중단하고 20개월 가까이 이탈리아를 종주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는 아예 방문러시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유의 견학성 방문에 ‘그랜드 투어’라는 공식 별칭까지 붙게 되었다. 이후 스탕달, 하이네, 바이런 등이 문학으로 다듬고 부르크하르트, 뵐플린, 베렌슨 등이 미학으로 정리한 이탈리아의 문화유산은 더욱 풍성한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정도 이론무장을 하고 이제 함께 이탈리아 여행길에 나서 보자. 이왕 떠나는 길인데 “이 교회 진짜 크네!” “이 그림 너무 예쁘다!”로 일관하기보다는, 같은 것을 보더라도 허공 속의 물건이 아니라 역사적 콘텍스트의 산물로서, 당시 사람들의 손길과 숨결 혹은 야망과 좌절을 감지하며 다니는 그런 여행길 말이다. 이런 자세로 여행에 나서면 관광길에 즐비한 착한 가격의 명품이나 좋은 와인, 맛난 음식들은 그냥 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