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③ 윤관 : 월간조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나라의 북방 국경은 언제 정해진 것일까? 신라는 당(唐)과 연합해 삼국을 통일하였으나, 고구려의 영토를 통합하지 못하고 평양-원산 선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후 옛 고구려 땅에는 발해가 들어서고 지금의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는 여진족이 거주하게 되었다. 고려 건국(918년) 후 국경은 대동강에서 청천강으로 북상했고 993년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평안도 땅을 되찾아 고려의 서북계를 청천강에서 압록강으로 북상시켰다. 그러나 동북방면의 함경도와 두만강 주변에는 여전히 여진이 거주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두만강 경계는 압록강보다 450년 늦은 1449년 조선 세종 때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해 영토화했다. 그러나 이보다 340년 앞서 고려 예종 때 함경도를 영토화한 적이 있었다.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은 고려에 조공(朝貢)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훗날 금(金)을 세우는 동만주 일대의 완안부(完顔部) 여진이 흥기하면서 함경도의 여진을 통합하려 하자 고려는 윤관을 내세워 1108년 함경도 일대를 정벌하고 9성을 세워 영토화했다.

여진은 무력으로 함경도를 되찾기 어려워지자 생각을 바꿔 외교공세로 나섰다. 고려를 부모의 나라(父母之國)로 섬기고 조공하겠다고 조아렸다. 여진의 저자세 외교가 계속되자 고려 예종은 9성을 여진에 돌려주고 윤관은 문책까지 당하게 된다. 함경도의 동북방면은 서희의 외교와는 반대로 여진의 ‘세치혀’가 작용했다. 여진으로부터 조공과 부모지국의 명분을 얻고 함경도의 실리를 내준 것이다.

고려를 안심시키고 함경도까지 얻은 여진은 세력을 키워 거란을 공격했다. 그리고 고려와는 교린(交隣)관계인 형제국가(兄弟之國)를 강요했다. 거란에 승리한 후에는 고려가 거란에 했던 것처럼 신하의 예(稱臣事大)를 갖추라고 했다. 고려는 거란에 이어 패권국가가 된 여진(金)에 다시 종속된 것이다. 서희의 외교담판이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외교’라면 윤관의 9성은 ‘역사상 가장 실패한 외교’로 평가될 수 있다. 왜 그렇게 된 것인가?

거란-송, 고려-거란 등 동북아정세

11세기 동북아 정세를 살펴보자. 거란은 고려와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송과의 일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거란에 대한 정치적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송에 사절을 파견해 경제・문화교류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송도 고려와의 관계에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거란은 송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 가고 있었다. 1004년 거란의 성종은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송을 침공했다. 거란은 송 진공에 앞서 고려에도 이 뜻을 알렸다. 거란의 통고는 국교를 맺고 있는 고려 측에 거란의 군사동원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조치로 볼 수 있다. 거란군은 파죽지세로 송의 수도인 개봉 인근의 보주, 덕청까지 진격했다. 양측은 결전을 피하고 협정을 체결했다. ①송은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거란의 군사비로 보조한다. ②거란의 성종은 나이가 어리므로 문서상에 송의 진종을 형으로 부르기로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이 협약을 ‘전연(澶淵)의 맹(盟)’(1004년)으로 부른다. 이 협약으로 송은 기미책(羈靡策·말에 재갈을 물린다는 의미로 오늘날의 유화책과 유사하다)을 통해 안보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사실상 거란의 우위를 인정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의 초강대국 역할을 포기하게 되었다.

고려는 성종과 서희가 타계한 후 거란과의 사대관계는 유지하면서도 정경(政經)을 분리하여 정치·안보는 거란과, 경제·문화는 송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것은 고려가 자주정신에 입각해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자주적 행보였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은 고려의 이러한 ‘진보적’ 정책을 용납하지 않았다. 고려의 정경 분리로 거란과 고려 관계는 다시 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거란은 고려 공략을 본격화하고 고려는 이에 대응해 송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거란은 연이은 공세에도 뚜렷한 성과가 없자 1017년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10만 대군을 동원해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의 강감찬은 ‘귀주대첩(龜州大捷)’을 통해 거란군에 대승을 거두고 고려의 위상을 높였다.

고려와의 싸움에서 패한 거란은 다시 대군을 동원하거나 고려와 화평하든지 선택을 해야 했다. 거란측은 이번에는 신중히 접근해 양국 간 강화를 맺었다. 양측 모두 장기전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양측 내부에서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고려측은 전비 충당으로 정부 관리의 봉급이 부족할 지경이 돼 문관과 무관이 다투는 상황이 됐다. 거란도 계속되는 군사동원에 못 견딘 요동지방의 거란 주민들이 고려에 내투하는 등 여러 모순이 발생했다. 려-란 전쟁은 양측 모두에 국내적 어려움을 안겨 주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양측은 모두 패자였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성종과 서희가 타계한 후 고려 조정은 다시 모화배번의 명분론이 고개를 들고 이들이 외교를 주도함으로써 서희-소배압 협정을 우회해 송과의 관계를 증대하고 여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란의 압력에 대해서는 자주적 입장으로 대처했다. 결과적으로, 거란의 친정을 물리치고 귀주대첩의 승리는 가져왔으나 국내적 문제는 산적하게 되었다. 고려의 승리는 차선 내지 삼선의 결과인 것이다. 10여 년에 걸친 려-란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국관계를 다시 서희-소배압 협정의 틀로 돌아오도록 만든 것이다.

완안부 여진의 남하와 고려의 대응

고려 문종은 거란과의 사대를 유지하면서도 송과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문종은 송의 요청에 의해 단절한 지 77년 만에 송과의 국교를 재개했다.

한편으로, 거란의 구속에서 벗어나 있던 동만주의 여진족 중에서는 고려에 복속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진족 내의 변화도 일어났다. 동만주의 여진족 중에서 완안부(完顔部)가 두각을 나타내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런 실정을 잘 모르고 있었다. 완안부 통치자인 영가(靈歌)가 4회에 걸쳐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는 두 번까지는 예사로 받아들였다. 고려는 세 번째 사신이 온 1103년에 들어서서야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영가의 뒤를 이은 오아속(烏雅束·후에 강종)에 이르러서는 동여진 정벌이 본격화함에 따라 드디어 고려와 직접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고려 조정의 의견은 분분했다. “여진은 허약하여 두려울 것이 없으니 지금 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다”는 강경론과 “병장은 흉기이며 싸움은 위태로운 일이니 망령되게 움직이면 안된다. 지금 무사한데 군사를 쓰는 것은 불가하다”는 신중론이 맞섰다. 임언과 이일숙 등은 즉시 징벌하자는 강경론을, 이영은 병기는 흉기이고 싸움은 위태로운 일이라고 하여 전쟁 자체를 부정하면서 여진의 침략성도 없는 시점에서 전쟁을 하려 하니 심히 불가한 일이라고 하여 반대하였다.(《고려사》)

숙종은 강경론을 받아들여 평장사 임간(荏幹)으로 하여금 여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임간은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공을 서둘러 싸우다 대패했다. 임간은 파직당하고 숙종은 구밀원사 윤관(尹瓘)을 여진과 대적케 했으나 윤관도 여진과 접전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출정군 반수를 잃는 참패를 당하고 전세가 불리하자 일단 화(和)를 맺고 돌아오고 말았다. 완안부의 남하는 고려와의 충돌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있어 대변혁의 시작이기도 했다. 동아시아는 다시 가장 변두리에서 비문명 사회로 남아 있던 유목민족에 의해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고 있었다.

윤관의 여진 토벌과 9성의 구축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

고려는 이제 여진에 대한 근원적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고려는 아직 완안부 여진이 천지를 진동시킬 세력으로 성장할 것으로는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고려군의 잇단 패배에 대해 숙의했다. 윤관은 여진과의 전투에서 싸워 본 경험을 분석해 여진군에 패한 원인은 적의 기병을 고려의 보병으로는 가히 감당치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숙종에게 건의해 기병 중심의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게 되었다. 별무반은 신기군(神騎軍)과 신보군(神步軍) 그리고 특별부대로 구성되었다. 숙종은 이 별무반의 거병을 보지 못한 채 서거하고 1105년 예종이 즉위했다.

윤관은 예종 2년에 이르러 여진 정벌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 병력 수는 17만에 이르렀다. 고려군은 속전속결로 승전을 거듭했는데 “그 지방이 삼백리로서 동은 바다에 이르고 서북은 개마산(盖馬山·백두산)에 닿았으며 남은 장주(長州), 정주(定州) 2주에 접했다.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기름져 가히 백성이 살 만한데, 본래 고구려가 소유했던 고비(古碑)와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다.(《고려사》 윤관전) 윤관은 점령지역에 경계를 획정하고 요충지를 택해 성을 쌓은 후 남쪽 민가를 옮겨 채웠다.

윤관은 싸움에 이겼음을 보고하는 한편, 옹주, 영주, 복주, 길주 등 4성을 쌓았다. 그리고 1108년에 이 지역에 행정 관서를 두어 영토화하였다. 함주를 통치의 중심지로 삼아 대도독부사를 두고, 영·복·옹·길주 및 공험령에 방어사를 설치하였다. 윤관은 예종에게 보고하기를, 여진을 정복하여 모두 6성을 쌓았다고 하였고, 또한 공험령에 비를 세워 경계로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후 윤관은 의주, 통태, 평융에도 3성을 쌓았다. 이 6주와 3주의 성을 ‘윤관의 9성’이라고 한다.

9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갈라전이 오늘날의 함경도 일대임은 분명하나 그 범위가 두만강 이남이라는 설, 길주 이남 함흥 일대라는 설, 마천령 이남 전평 이북이라고 보는 설 등이다. 첫째, 함흥평야설은 실지를 답사하여 고증하였다는 일본 학자 이케우치(池內宏)의 주장인데, 관련 사료를 무시하고 실제 지명을 다른 곳에 적용시켜 그 범위를 축소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둘째, 마운령 이남과 정평 이북설이다. 정약용의 주장이다. 이 설은 사료를 비판적으로 다루었으나 고증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셋째, 두만강 이남 정평 이북의 함경도 일대설이다. 이 설은 《고려사》 편찬자들의 주장이며 오늘날 여러 학자들이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두만강 너머 간도 일대에 9성 중 3성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여진 측 기록(금사, 고려전)에는 “전에 약속한 바에 따라 고려에 망명한 백성을 되찾고자 한바, 고려 측이 허락해 사람을 보냈는데 고려에서 이들을 죽이고 갈라전에 출병해 9성을 쌓았다”고 했다. 이에 강종이 추장들을 모아 대책을 의논하였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이에 맞서 군대를 동원한다면 거란이 자기들을 칠 것이므로 고려에 대항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 반면, 오로지 태조(아골타)만이 군대를 동원하여 항전하지 않으면 갈라전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그 나머지 지역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함에 따라 강종도 이 의견에 따라 군대를 동원했다.

父母之國과 9성의 반환

여진은 9성의 탈환을 위해 1년 이상 고려군을 공격했으나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면서 장기전의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여진 측이 ‘대대로 배반하지 않고 조공하겠으니 9성을 반환해 달라’고 하면서 먼저 강화를 요청해 왔다. 고려 조정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입장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갈라전 현지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던 중 여진 측이 다시 화를 제의해 오자 윤관은 병마사가 전담하기 어려우니 고려 조정에 가서 협의해 보라고 해 갈라전 현지에서도 강화 기운이 일어나고 양측은 일단 휴전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예종 주재하에 중신회의를 열어 9성 문제를 논의했다. 최홍사(崔弘嗣) 등 28명은 반환에 찬성하고 박승중(朴昇中)과 한상(韓相) 등은 반대했다. 예종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에 김연(金緣)이 “땅을 다툼으로써 백성을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 그리고 “9성을 쌓을 때 거란에 대해서는 그것이 우리의 옛 땅이며 우리의 백성이라 했으니 궁한리의 존장 가운데는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가 많으므로 거란과의 사이가 벌어져 동으로 여진과 대치하고 북으로 거란과 대치하게 되면 9성이 삼한의 복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이라고 하자 예종은 이 말을 옳게 여겼다.(《고려사》)

고려에 화를 청하러 온 여진의 사절 요불 등 6인은 예종 앞에 나아가 “태랑 영가는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정이 대방(帶方·고려)으로부터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귀부해야 한다 하였으며, 지금 태사 오아속도 또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만일 9성을 돌려주어 생업을 편안케 해 주시면 우리는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건대 대대자손에 이르기까지 공손히 세공(世貢)을 닦고 또한 감히 돌조각 하나라도 고려의 경상(境上)에 던지지 아니 하리다”고 했다.(《고려사》)

예종은 문무 3품 이상의 중신을 소집해 9성 환복문제를 다시 논의했는데 모두 찬성했다. 그리고 윤관 등의 패전 책임을 추궁했다. 첫째, 여진의 신흥세력인 완안부의 군사력 평가가 미흡했던 점, 둘째, 장기전으로 고려 백성의 피해가 가중되었다는 점, 셋째, 갈라전과 완안부로 통하는 소로 장악만으로 갈라전의 군사 지배가 가능하다고 오판하는 등 지역 상황에 대한 정보와 판단이 잘못된 점, 넷째, 넓은 점령 지역에 9성의 설치는 처음부터 그 지속적 확보에 어려움을 예상할 수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반환의 논지는 매우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었으나 9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반을 잃었고 그 논지도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예종은 9성 반환을 허락했다. 고려군의 철수는 불과 수일 만에 완료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제법 주전론자의 발언권도 강했으나 점차 주화론자의 입장이 강화되었고 정벌 시작 후 1년이 경과한 후에는 강화와 9성 반환으로 기울고 윤관에 대한 문책론까지 대두한 것이다. 철수가 시작되면서 고려가 여진에게 전의 약속을 하늘에 맹서하라고 하니 여진의 추장들은 함주 성문 밖에 단을 만들고 “7대에 이르기까지 나쁜 마음을 가짐이 없이 고려에 조공하겠으며 이 맹서가 변하는 일이 있으면 여진의 땅이 멸망하리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잠시 서희 외교를 생각해 보자. 서희는 거란이 침공한 상황에서 사대의 명분을 주고 영토의 실리를 얻는 협상을 통해 강동6주를 고려 영토에 편입시킨 바 있다. 그러나 이번 9성 협상은 서희의 협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진에게 ‘부모지국’이라는 명분을 얻고 함경도라는 영토의 실리를 내준 것이다. 서희 협상과는 달리 고려가 옛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고 있고 여진이 강화를 희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결과는 반대로 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

첫째, 예종의 우유부단함이다. 예종은 윤관의 거병을 지원했고 이 모든 정책을 결정했던 최고 지휘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내 관철하지 못하고 화(和)를 구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둘째, 고려는 문종 이후 태평성대를 구가해 왔는데 이러한 분위기하에서 전시 상황의 장기화는 조정의 중신들로서나 백성들로서나 모두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고려의 분위기는 윤관의 9성 구축과 앞으로 예상되는 장기전이 소수 강경론자에 의한 불필요한 긴장 조성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셋째, 국가 비전의 상실이다. 고려는 고구려 계승이라는 확고한 비전으로 출발해 북방 진출을 거듭한 결과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이러한 영토의 실리는 그 후 거란의 침공을 격퇴하는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나 문종 이후 고려는 차츰 평화와 성세에 길들여져 북방정책은 국정의 뒷순위로 밀려난 것이다.

또 한 가지 검토되어야 할 문제는 고려가 갈라전을 점령할 경우 거란의 입장이다. 고려는 1109년 사신을 거란에 보내 동계에 9성 신축을 알린 바 있는데 거란은 “여진을 소탕하고 강토를 넓혀 축성한 것은 응당한 조치이며 고려가 이를 알려준 데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고려사》) 당시 거란은 국력이 쇠잔해져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만큼 국내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 변수는 없었던 것이며 고려는 옛 고구려 땅 함경도를 영토화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함경도는 이때로부터 330여 년이 지난 조선 세종에 이르러 조선의 영토에 포함되기에 이른다. 서희의 강동 6주와 윤관의 9성 문제의 비교를 통해 100여 년의 태평성대 이후 변화된 고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고려의 조정에서도 ‘외교는 국내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사례이다.

아골타와 금(金) 건국

金太祖 아골타.

갈라전의 9성을 여진에 반환한 지 4년여 후인 1113년 완안부에서는 존장 우야노가 사망하고 동생 아골타(阿骨打)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여진 부족을 통합한 후 거란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아골타가 거란에 반기를 든 것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반복되는 양태였다. 거란의 국세가 기울고 여진은 이제 유목세계의 새로운 맹주가 되기 위해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요사》에 의하면, 아골타는 대를 잇기 전인 1112년 거란 황제가 관례에 따라 여진의 존장들을 초청해 베푼 연회석상에서 정면으로 황제의 명을 거부한 적이 있다. 아골타는 이 연회에서 거란의 퇴조와 거란 황제의 지도력 부재를 목격한 것이다. 자신이 존장에 오른 후에는 국상을 거란에 통보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거란으로부터 문책이 있자 반기를 들었다. 아골타는 1114년 송화강 일대를 점거한 후 요동으로 진격해 거란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거란은 고려에 여진 협공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거병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이르러 아골타는 거란의 동북면 요충지인 황룡부를 함락시키고 이어 거란 황제의 친정군을 격파한 후 황제를 칭하면서 1114년 회령(하얼빈 동남)에 도읍해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거란은 다시 고려에 원병해 줄 것을 요청했다. 고려 조정은 거란과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해 원군을 보내자는 출병론자와 김부식 등 타국 싸움에 끼어들어 분쟁에 휘말리는 것은 장래의 이해를 측량하기 어려운 위험한 일이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출병불가론자의 의견이 대립했으나 출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금의 아골타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금이 곧 거란을 평정할 것임을 알려 왔다. 이제 고려와 금의 관계정립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고려 조정은 거란이 멸망의 위기에 있으므로 더 이상 거란의 연호를 쓰지 않고 60갑자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고려가 성종 13년 거란의 연호를 사용한 지 120여 년 만에 국교를 단절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후에도 거란에 대해 형식적 관계는 유지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송에 기울어지고 송과의 사절, 문물교환을 증대시켜 나갔다. 이즈음 금군의 공세는 더욱 강화되고 내원성은 함락되고 거란군은 선박을 이용해 도주했다.

父母之國에서 兄弟之國으로

1117년 금은 사절을 고려에 보내 국서를 전하면서 양국 간에 형제관계로 통교하자고 제의했다. “대여진 금국 황제는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거란을 대국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겨 왔던바, 거란이 무도하게 우리의 강역을 침략하고 우리의 백성을 노예로 해 명분없는 무력을 가해 왔다. 우리는 부득이 이에 항거해 하늘의 도움을 입어 그를 진멸했다. 고려 왕은 우리와의 화친을 허락하고 형제의 의(고려를 아우로)를 맺어 대대로 무궁한 화호(和好)를 이루자”(금사, 고려전)고 했다. 8년 전(예종4년) 여진은 고려를 부모지국이라고 했으나 이제 ‘결위형제’를 제의한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고려사》에 의하면, 모두가 금과의 형제관계는 있을 수 없다고 크게 반대했고, 심지어는 금의 사신을 처형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때 홀로 김부의(金富儀·김부식의 동생)가 상소하기를 “제가 보기에는 한이 흉노에 대해서나 당이 돌궐에 대해 혹은 공주를 시집 보내는 등 그들과 화친할 만한 길이라면 무슨 수단이나 다 적용하였습니다. 지금 송과 같은 대국도 거란과 서로 백숙이니 형제니 하면서 대대로 화친하고 지내 왔습니다. 천자의 존엄이란 천하에 비할 바 없는데도 이처럼 오랑캐 나라에 대해 굴복하고 섬긴 것은 이것이 이른바 성인은 잠시 원칙을 버리고 권도로서 처사하여 국가를 보전하는 양책입니다”라고 했더니 대신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고 예종도 묵묵부답이었다. 김부의의 현실론이 절대다수의 명분론에 압도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었다. 거란은 점차 국내외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금의 세력은 날로 확대되고 있었다. 1119년 금은 국서를 통해 북으로는 상경으로부터 남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정벌했다고 고려에 알려 왔다. 이제 금이 요동 전역을 확보하고 천하를 평정했다는 과시였다. 이 국서는 지난번 서한보다 더 격을 높여 자신을 짐(朕)으로 시작하면서 고려를 종속국으로 비하시키고 있다. 고려는 답신을 통해 요동이 모두 고구려의 땅이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내용과 함께 “하물며 그들의 (완안부) 선조가 우리 땅에서 나왔음이랴”고 했는데 금측은 이 국서의 접수를 거부했다.(《고려사》)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여진이 고구려의 신민(臣民)이었다는 것을 지적했기 때문에 금이 이 문서를 접수할 경우 곤욕스런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과 송은 叔姪之國의 관계로

金의 포로가 된 宋 휘종.

금과 고려의 관계를 잠시 뒤로 미루고 여진의 부상에 송이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관해 살펴보자. 송의 휘종은 떠오르는 금을 활용해 거란에 빼앗긴 연운16주의 회수를 계획했다. 휘종은 1116년 고려에서 송에 사신으로 온 이자량(李資諒)을 특별히 대우한 후 비밀리에 “다음 번 올 때는 금나라 사람 몇을 데리고 와 달라”고 청했는데, 휘종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자량이 “금인은 인면수심이라 제휴할 것이 못된다”고 했다.

송 대신들은 고려가 송과 금의 통교를 방해하고자 한다고 오해하고 금과 직접 접촉할 것을 건의했다. 송 휘종은 해로를 이용해 금측에 거란 협공을 제의하면서 다음 조건을 제시했다. ①송이 거란에 제공하고 있는 세폐를 금에 제공한다. ②거란 협공에 있어 금은 만리장성을 넘어 하북에 들어오지 않는다. (연운의 반환을 의미) ③금은 거란과 화평협약을 맺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금도 이에 동의했다. 양군은 1121년 거란을 협공했다. 금군이 거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서경으로 쇄도하자 거란 황제는 서하의 음산으로 도주했다.〔거란의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성으로 도주해 중앙아시아의 이리간(발하쉬 호) 부근에 카라키타이(西遼)를 세워 1227년까지 약100여 년간 거란의 명맥을 유지했다. 카라키타이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한편 송군은 연운의 남경을 공략했으나 실패하자 금에 세폐를 지불할 것을 약속하고 요청해, 금군이 들어와 남경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송은 금에 약속한 세폐를 제공하지 않고 남경에서 일하던 거란 관리를 재등용하는 등 금과의 제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금 태종은 1125년 송을 공격했다. 금군이 수도 개봉에까지 육박하자 송은 ①금 500만 냥, 은 5000만 냥, 우마 1만 필 등을 제공하고 ②하북, 태원의 요충지 3진 33주를 금에 할양하고 ③양국관계를 숙부(叔父; 金)와 숙질(叔姪; 宋)로 한다는 굴욕적 조건을 제시해 일단 화전했다. 송은 이 굴욕적인 관계와 감당할 수 없는 세폐 제공을 반전시키기 위해 다시 금 치하에 있는 거란 장수들을 부추기는 한편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군사동맹을 제의했다. 고려는 송의 요청을 거부했다.

송이 약속이행을 늦추자 금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개봉을 함락시켰다. 송은 황하 이북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금에 화의를 청했으나 이번에는 금이 듣지 않았다. 금은 1127년 휘종을 비롯한 황족을 사로잡고 재물을 모두 약탈해 만주로 회군했다. 이로써 송은 9대 168년 만에 멸망했다. 송 황실 중에서 유일하게 금에 잡혀가지 않은 휘종의 아들 강왕은 남경에서 즉위해 고종이 되었다. 그 후 금군의 추격을 받자 양쯔강 이남의 항주로 옮겨 도읍한 후 남송(南宋)을 건국했다.

兄弟之國에서 稱臣事大로

1122년 고려에서는 예종이 타계하고 인종이 즉위했으며, 금에서는 태조 아골타가 1123년 사망하고 태종이 즉위했다. 금 태종은 고려 인종에게 사신을 보내 “거란 천조가 서하로 도주한 사실을 알리려고 사신을 보냈는데 국경에서 접대를 불손히 해 고려에 이르지 못했다. 고려가 거란을 섬기는 예로써 앞으로 금을 섬겨야 할 것이다. 태조의 서거로 거란 천조를 잡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거란 황제도 도주했으니 고려가 금에 사대하라는 것과 자신의 즉위를 통보하는 내용이다. 금 태종은 1125년 무주에서 거란 황제를 사로잡아 거란은 야율아보기의 건국 후 9대 219년 만에 멸망했다.

인종3년(1125년) 고려에서 금에 보낸 국서는 접수가 거부되었는데 국서의 서식이 ‘표(表)’가 아니고 또 ‘신(臣)’을 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은 고려에 대해 거란을 섬기던 것처럼 금을 섬기라고 해 ‘칭신사대(稱臣事大)’의 관계를 요구했는데, 이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다. 고려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1126년) 조정회의에서 금과의 관계 설정문제를 협의했다.

대다수는 금이 야만인으로 상대할 수 없다고 했으나 이자겸(李資謙)과 석준경(佦俊京)이 “금이 예전에는 소국으로 거란과 고려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거란과 송을 멸망시켜 정치적·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해 인종은 이 주장을 채택했다. 이어 4월 인종은 정응문(鄭應文) 등을 금에 보내 자신을 신(臣)이라 해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이 시기에 고려는 이자겸이 변란을 일으켜 궁궐을 불사르고 인종을 자기 집으로 모시던 때였다. 소위 ‘이자겸의 난’이다. 따라서 고려 측의 대금정책은 이자겸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금은 고려에 다시 사신을 보내와 “표를 올리고 신이라 칭하며 금과의 관계에 있어 모든 절차와 격식을 거란에 대해 했던 예에 따르라”고 했다. 신표(臣表·속국을 맹세하는 글)를 올리라는 것이다. 고려는 금에 사대의 관계를 갖기로 결정한 후에도 서표의 내용을 미진하게 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중대한 전환기에 고려가 ‘이자겸의 난’을 맞았고 명분론과 현실론 간에 당파적 대립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종의 리더십은 약화되고 외교문제를 둘러싸고 정파 간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E. H. Carr) 《고려사》가 전하는 윤관의 9성 사례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국가안보에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함경도를 내주고 윤관을 문책한 고려 조정의 정파가 내세운 ‘백성의 고통’은 정치적 명분이었을 뿐이다. 몇 년 후에 경험하게 되는 고려의 운명은 국방과 안보라는 장기적·사활적 국가이익을 희생으로 일시적·지엽적 평화를 선택한 고려의 외교정책 결정에 대한 혹독한 대가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서희가 영토화한 서북계 평안도의 강동6주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서희가 죽은 후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재개하자 거란은 10여 년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지만 고려군은 그때마다 평안도의 강동6주에서 거란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전사에 길이 남는 강감찬의 귀주대첩도 바로 평안도 귀주에서의 대승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대라는 정치적 명분의 무상함과 영토라는 안보적 실리의 영원함을 일깨워 준다. 윤관의 9성은 사대의 명분을 얻고 영토를 내주어 서희 외교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 우리는 냉전질서가 와해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하는 전환기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한반도 주변의 동북아 정세도 요동치고 있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아시아 회귀,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 그리고 일본의 재무장과 미국의 지지 등 중대한 정세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100년 전에는 일본이 흥기하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한반도를 점령했다. 한반도는 역사 이래로 이러한 주변세력의 부침에 따라 이해가 교차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전쟁터가 되어야 했던 비극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폴 케네디 교수의 언급처럼 한국은 ‘네 마리의 코끼리에 둘러싸인 작은 동물’의 모습이다. 네 마리의 코끼리 중에서 한 마리가 움직이면 다른 세 마리도 영향을 받게 되어 한반도는 희생이 될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핸디캡’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미국·일본의 해양세력과 중국·러시아의 대륙세력은 과거와 같이, 지금도 앞으로도 갈등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오늘날 경제와 군사력 모두 10위권의 중위권 국가로 발전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북한은 핵을 개발하고 있다. 한반도 주변의 네 나라는 세계의 4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안보여건과 독립 안정성은 앞으로도 계속 취약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구한말의 역사가 반복되는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과거에 겪었던 비극적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변화하는 정세를 잘 읽고 대비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 변화에 대응하는 데 있어서 외교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국내정치가 해야 할 역할도 막중하다. 외교는 국내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 주요 외교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국내정치에서 당파적 분열이 재현되면 비극적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 외교에 관한 한 당파적 입장에서 벗어나 국익에 기반을 둔 초당적 외교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영원한 것은 국가이익뿐이다.” 19세기 영국 총리 팔머스톤(Palmerston) 경의 말이다. 윤관의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는 ‘대중영합(포퓰리즘)적 외교’의 망령이 되살아나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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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③ 윤관

9城까지 쌓아 놓고 지키지 못한 역사상 가장 실패한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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