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
⊙ 55세.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등단.
⊙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 수상.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 수상.
⊙ 주요작품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호텔 캘리포니아》 《가시면류관 초상》 등.
⊙ 55세.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스러지지 않는 빛》이 당선되어 등단.
⊙ 1999년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제23회 이상문학상 수상.
2009년 소설집 《인형의 마을》로 제12회 동리문학상 수상.
⊙ 주요작품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사랑보다 낯선》
《호텔 캘리포니아》 《가시면류관 초상》 등.
수문장의 나팔소리가 가을 하늘에 높게 울린다. 시공의 문이 열리고 조선시대 문지기 행렬이 시작된다. 잿빛 물결 기와지붕 아래서 도심의 빌딩을 바라본다.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구경할 수 있는 곳, 경복궁 옛 궁궐에서 《내 마음의 옥탑방》을 쓴 작가를 만난다. 옥탑방과 궁궐, 어떻게 그 괴리를 가늠할 수 있을까.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주적으로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은 똑같지 않은가! 전통 복식을 차려입은 사병의 앳된 얼굴이 햇살 속에 드러난다. 어쩌면 구중궁궐에서 환생했을지 모를 영혼에게 동일시를 느끼는 걸까! 하지만 내 옷은 현대식 기성복, 그들의 표정은 영락없는 조선의 수문장이다.
중편소설 이상문학상 수상작 《내 마음의 옥탑방》은 화두가 인간의 욕망이다. 시지프의 신화를 골조로 하여 남자와 여자의 러브라인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가난한 연인의 현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 가난이 서로를 사랑하게도 했지만, 서로를 헤어지게도 만들었다.
백화점 스포츠용품 매장에서 일하는 남자는 어느 날 1층 입구의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근무하는 주희를 발견한다. 망토가 덧붙은 빨간 제복과 빨간 모자를 쓰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그녀는 꿈에 굶주린 사람들을 성전(백화점)으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판 가나안에서 단연 상징적인 안내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사는 집은 오르막이 절정을 이루는 언덕배기 3층 집의 작은 옥탑방이다.
지상의 방인가, 천상의 방인가. 보면 볼수록 연민을 자아내는 옥탑방.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가련한 처지마저 수용하지만, 그녀는 끝내 남자의 마음을 거부하고 시지프가 된다. ‘멸시로써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구절을 좋아했다. 옥탑방에서 지상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여자의 꿈이 속물스럽다 해도, 그 꿈을 이해하고 기꺼이 떠나게 해 주었던 남자. 그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꺼지지 않는 작은 옥탑방 하나를 품고 산다.
버스안 생활정보지 보고 옥탑방 아이디어 얻어
—이 소설은 90년대 후반에 나온 소설입니다. 옥탑방과 관련한 인과관계를 쓰게 된 건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제가 옥탑방에 살았던 적은 없어요.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소설 앞부분에도 나오지만 좌석버스 옆에 누가 놓고 간 생활정보지를 보게 됐는데 거기 주택매물 광고란에 ‘옥탑, 옥탑’ 하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 단어를 딱 접하는 순간 사로잡히는 힘이 굉장히 강했어요. 문학적 이미지를 강하게 주면서 옥탑방이란 공간성 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포착한 후 1년 반 정도 제 안에서 부화를 시켰어요.
지금은 노량진 학원가 뒤 상도동 넘어가는 쪽으로 달동네가 많이 있었어요. 거기로 취재도 하러 가고 그 옥탑방에 누구를 살게 할 것인가, 상대는 누구로 할 것인가, 그렇게 100% 구상 속에서 탄생된 소설이었습니다.”
—작가가 옥탑방에 살았다고 해도 믿을 것처럼 이미지가 살아 있지 않나요.
“작가로서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가 기쁘죠. 자기 경험을 소재로 쓴 글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 새빨간 거짓말인데 그걸 독자가 작가의 실제 경험인 것처럼 받아들이니 아주 기쁘죠.”
—백화점에서 일하는 안내여성을 옥탑방에 살게 한 구성은 절묘했다고 봅니다.
“여주인공 주희 이미지는 옥탑방이라는 소설을 구상하기 전부터 이미 잡혀 있었어요. 예전에는 백화점에 가면 인포메이션 걸이 빨간 제복과 모자를 쓰고 입구에서부터 강한 인상을 주었어요. 그런 이미지가 20대 때부터 뇌리에 강하게 각인돼 있었는데 옥탑방을 쓰려고 할 때 되살아났어요. 그녀와 상대를 할 배역은 누구한테 줄 것인가, 고민하다가 제가 겪은 20대의 정서를 투사시켜 상대 배역을 만들었죠. 그렇게 두 인물이 만들어졌어요.”
—옥탑방이라는 단어가 사회문화로 익숙해진 것도 그 무렵부터가 아니었나요.
“그때 당시는 옥탑방이 국어사전에 공식적으로 올라 있지 않았어요. 일상적으로 사용한 것은 제 소설이 처음입니다. 그 뒤에 옥탑방 고양이가 나오고 ‘옥탑방, 옥탑방’ 하더라고요. 어디 가서 옥탑방 쓴 작가라고 하면 드라마인 줄 알고 ‘<옥탑방 고양이> 잘 봤습니다’ 그러더군요.”
—에피소드가 많았겠네요.
“대통령 선거가 있던 무렵인데, 당시 출마했던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가 각축을 벌이고 있을 때였어요. 기자들이 두 대통령 후보에게 옥탑방에 가 본 적 있는가? 옥탑을 아는가? 이런 질문을 했는데 노무현 후보도 이회창 후보도 둘 다 옥탑방을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해요. 기자가 저한테 전화를 해서 두 대통령 후보가 옥탑방을 모른다고 하는데 작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거예요. 저는 정치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어 코멘트를 하지 않겠다고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민생을 두고 정책대결도 만만치 않았을 대선후보의 아이러니한 대답이었네요.
“그렇죠. 둘 다 모른다고 했다고 하니 저도 놀라고 황당했죠.”
—그 후로도 옥탑방 단어는 트렌드가 됐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서 많이 활용하더군요.”
‘주희’는 모든 이의 희망
—옥탑방에 사는 가난한 여자가 가난한 남자를 사랑하지만 거들떠볼 수 없는 냉정한 현실을 그려냈는데, 덧붙일 서사적 설명을 부탁합니다.
“이 소설은 제가 소설 안에다 골조로 심어 놓은 시지프 신화를 빼고 나면 아주 하찮은 통속소설이에요.
그 여자가 근무하는 화려한 백화점, 낮에는 그곳에서 일하지만 퇴근을 하면 산동네를 쓸쓸히 걸어 올라가서 불법 가건물의 옥탑방으로 들어가죠. 그곳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언제나 저 지상 주민으로 편입할 수 있을까, 이런 욕망으로 사는 여자죠.
남자는 형네 아파트 17층에 얹혀살죠. 그러나 현실에서 지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지상의 주민이 아니죠. 날마다 옥탑방과 아파트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내밀한 고뇌를 가지고 살아가죠.
시지프의 신화도 시지프가 날마다 바위를 정상으로 밀어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어김없이 다시 굴러 제자리로 떨어지죠. 그렇게 되풀이되는 일상이 인간의 숙명성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면 수평으로 누워 있다가 잠에서 깨면 수직으로 일어나서 하루 종일 뺑뺑이치고 다시 지친 몸으로 돌아와 수평으로 눕죠.
그처럼 이 두 남녀의 삶의 굴레에 시지프적 형벌을 대입한 겁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는 시지프 신화를 선물하고 읽어 줬는데도 불구하고 주희는 그걸 부정하고 지상으로 내려가 버리죠.”
—주희에게 시지프의 신화를 읽어 준 건, 오히려 주희가 자신의 마음을 굳힌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주희는 그런 관념적 숙명을 받아들이기 싫어 인간적 저항에 눈을 떴을 수도 있어요. 결말에서 주희가 욕망을 선택하는 것이 제가 판단하기에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의지라고 봐요. 시지프 같은 형벌의 시스템을 신들이 만들었다면, 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선택은 욕망을 갖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그 욕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녀를 그렇게 보낸 것이죠.”
—백화점에서 안내를 할 정도면 주희의 외모가 뛰어났을 텐데, 당연히 신분상승을 꿈꾸지 않았을까요.
“물론이죠.”
—책을 읽으며 주인공 남자의 여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심에 놀랐습니다.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녀가 등 뒤에서 사마귀처럼 안아 달라고 했을 때, 등을 돌려서 정상으로 안아 보고 싶었겠죠. 남자로서의 욕망을 다하고 싶었겠죠. 그녀가 지상으로 내려가고 싶어할 때 못 내려가게 잡고도 싶고요.
그러나 그로 하여금 주희가 선택했던 것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든 제어력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적 욕망과 용기를 발산할 수 없는 슬픈 청춘의 초상이죠. 남자가 그녀를 잡을 수 있는 조건은 오직 물질적 조건밖에 없으니까요. 그녀가 선택하려고 하는 것도 물질적 욕망이었기 때문에, 그가 물질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그녀를 안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 청년은 자기 처지를 현실적으로만 인지하고 받아들인 거죠. 그 처지에서는 그 어떤 남자라도 그 이상의 선택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막무가내 철없는 3류 연애소설로 빠지려면 무조건 잡고 어딜 가고 치고받고 울고불고 이런 식으로 풀 수 있지만, 저는 이 소설을 구상하며 연애소설보다는 인간의 숙명성을 일깨우는 철학적 주제를 의식했던 거죠.”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난 작품이었어요. 시간이 흘러도 그 시대에 일어난 것이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은 더 확산되는 추세이죠. 더 아무렇지도 않게요. 그때는 그런 문제가 고뇌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어요. 주희와 같은 인물이 보편적 인물이 된 거죠. 그 시대에는 주희가 대단한 선택을 하는 인물의 초상처럼 그려졌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다 주희가 되고 싶어하고, 이미 주희이거나 주희이고자 하는 거죠.
작가로서 저는 그런 현상들이 좋은 쪽의 인간적 진화라고 생각해요. 제가 주희에게 주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것이었죠. 자기 욕망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죄책감이나 죄의식에 시달리는 건 올바른 인간적 자세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길을 택하게 한 겁니다.”
21세기적 환경에서 인간도 변화해야
—주거문화가 소설가에게 좋은 소재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고시원 문화가 당시의 옥탑방 문화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또한 작가의 상상력으로 앞으로는 어떤 주거문화 시대가 올 것 같습니까.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부터 시작해 공간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연관성은 굉장히 강하죠. 방금 말씀하신 고시원 같은 것은 특별한 경우이자 조건이죠.
하지만 21세기인 지금, 디지털 문명시대에 공간의 개념은 별 의미가 없어요. 디지털 자체가 모든 공간을 실시간 연결해 주고 온라인이 신경세포처럼 온 지구와 연결되어 있으니 문학적 환경도 거기에서 대응력을 찾아야 해요. 그런데 작가들은 아직도 골방에 있는 케이스가 많아요.
21세기는 공간 없는 유목의 시대, 노마드의 시대라고도 하죠. 개인들이 집을 소유하거나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갖는 것 자체를 거추장스러워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이동하고, 사이버상으로 이동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거죠.
자크 아탈리가 쓴 《호모 노마드-유목하는 인간》을 보면 지구인구 중 3분의 1은 계속 이동 중에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비행기, 버스, 전철 등의 이동수단을 이용해 계속 이동 중에 있죠. 이렇게 끝없이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개념도 옛날처럼 강하지 못하고 점점 희박해져 가는 거죠. 국가는 이런 이동자들에게 허브 역할을 하는 기능으로만 남을 것 같아요. 국가의 체제 개념도 점점 약화되어 정거장 내지 항구 같은 역할만 하는 거죠.
저는 그런 변화가 상당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경계를 안 가지는 21세기적 환경 안에서 문학도 적극적으로 변신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옥탑방도 작가가 썼기 때문에 드러났던 거죠. 노마드적인 삶도 작가에게서 새롭게 탄생하면 보편화가 되겠네요.
“문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아직 못 보았거나 늘 보아 오던 것을 그 작가가 써서 아주 낯설게 만들어 주는 거죠. 아,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못 봤구나! 늘 내 눈앞을 지나쳤는데,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구나! 그러면서 낯설게 만들어 주는 거죠. 그게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니까요.”
—작중에서 그녀는 남자와 한방에 자면서도 그쪽으로 돌아눕지 못하고 다만 사마귀처럼 등만 껴안아 달라고 하는데, 이런 표현은 여자의 내면을 잘 알지 못하면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하하. 이 질문을 접하고 혼자 많이 웃었어요. 제게 어떤 여자가 이런 대사를 해 줬으면 글 쓰는 데 도움이 됐을까 싶네요.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캐릭터나 성격, 인상적인 사건이나 그들이 만들어 낸 대사 같은 것으로 각인을 하거든요. 그래서 작품을 만들 때 그 작품을 최대한 압축해서 악센트를 줄 수 있는 대사를 뭘로 칠까 고민을 많이 해요. 문장보다는 대사가 훨씬 중요하고 빨리 전달되기 때문이죠.
제 작품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후반부에 여자가 술에 취해서 하는 대사 한마디를 만들어 내려고 15일 이상을 완성을 못하고 고민했었어요. 그 대사가 ‘아, 춥고 배고파. 그리고 남자와 자고 싶어’였지요.
그 책이 나왔을 때 서울예대에서 문학특강을 해 달라고 해서 갔는데, 지금은 후배 작가가 된 하성란씨가 그 당시 학생이었어요. 뒷날 하성란씨가 술회하기를 그 무렵에 자기네들은 맨날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술만 취하면 ‘아, 춥고 배고파. 그리고 남자와 자고 싶어’ 이렇게 농담을 했다고 해요. 결국 《내 마음의 옥탑방》에서도 ‘사마귀처럼 안아 줘’가 두 사람의 현실을 압축한 대사가 된 거죠.”
—어찌 보면 양심적이잖아요. 남자를 책임질 수 없다면, 남자에게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았던 게.
“주희는 자기 삶에 굉장히 당당한 여자이죠.”
—주인공 중 어느 쪽과 자신이 동일시되는 느낌이었습니까.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둘 다 젊은 날 내 의식의 분신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안에 주희도 있었고, 내 안에 남자친구도 있었고. 아니무스 아니마처럼 둘 다 내 안에 반대성향으로 마주보고 있는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들이죠. 자기와 똑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한쪽은 이쪽을 선택하고 한쪽은 저쪽을 선택하는, 그래서 마주보고 있는 그런 슬픈 존재들.”
—아주 적합한 대답을 해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
—작가는 끝까지 그녀의 태도를 합리적으로 그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자는 시지프를 주희한테 보여주고 일깨워 줬지만, 그녀는 그것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자기 길을 선택해서 갔잖아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거예요. 나의 숙명이 이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며 체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많죠. 어디 가서 사주보고 ‘내 팔자 그렇대’ 하고 그냥 주저앉잖아요.
그런데 그녀는 시지프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과 자기 욕망에 당당하고, 그 남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등을 보이면서 자기 갈 길을 암시하고, 예고하고, 그리고 실제로 자기 갈 길을 갔기 때문에 그런 운명에 휘둘리거나 운명에 갇혀 있을 존재가 아니었던 거죠. 그런 점에서 주희는 운명론자가 아니에요. 그게 주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인간적 매력이기도 하고요.”
—그러면 주인공 남자가 주희에게 책을 선물한 것은 주희가 돌아오기를 바랐던 건가요.
“자기하고 주희가 시지프 신화를 읽으며 같이 위안을 받고 싶었던 것인데, 그 코드가 합일이 안 된 거죠. 그래서 다른 길을 가게 된 거죠.”
—실제도 타인에(또는 여자) 대해 마음이 너그러우십니까.
“글쎄요. 제가 제 자신에 대해 말하기는 좀 그런데, 저는 그냥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살자는 주의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런저런 사람이다’라는 식의 고정관념 자체를 안 가지려고 하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되비춰 주는 상태, 예컨대 딱딱한 사람하고 있으면 나도 딱딱해지고, 유연한 사람하고 있으면 나도 유연해지는 식이죠. 내가 항상 딱딱하기 때문에 어딜 가거나 모든 사람이 내 딱딱함 때문에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거죠.
요컨대, ‘이게 나다’라는 의식이나 정체성의 패턴 자체를 의식하지 않아요. 그게 자연스럽고 자유로우니 내가 내 안에 갇혀 살지 않는 거죠.”
인문학으로 풀지 못한 갈증을 과학으로 풀어
—철학적인 문장이 많은 문체였습니다. 작품을 쓰는 데 영향을 받은 철학가나 사상가는 누구입니까.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저한테 영향을 준 사람은 하늘에 별처럼 많아요. 그중에 누가 더 탁월했었고 뛰어나고 큰 영향을 줬다고 계량을 하는 건 불가능해요. 세상 모든 소설은 단 두 가지를 다루죠. 그것이 인간과 인생입니다. 인간을 다루기 때문에 인생을 다루게 되는 거고, 인생을 다루기 때문에 인간이 등장하는 거죠. 이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란성 쌍생아 같은 숙명을 지녔죠.
그래서 작가가 그 분야에 대해 죽는 날까지 공부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제 평생의 화두는 인간이 도대체 뭔가, 인생이 도대체 뭔가이고, 모든 공부는 그 두 가지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인문학 공부를 많이 하셨겠네요.
“보통 문학을 하는 사람은 인문학에 대한 의존도가 커요. 저도 인문학에 대해 나름대로 소양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작가로 살면서 인문학이 주는 공허함에 많이 시달렸어요. 인간과 인생에 대해 내가 원하는 속 시원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신학으로도 가 보고 역사로도 가 보고 철학으로도 가 봤는데, 그 안에서도 명쾌한 답을 찾지 못했어요.
사마천의 《사기》 같은 풍부한 인간적 사례 안에서도 패턴화한 처세술이나 개발하고 응용할 수 있을 뿐이지 제가 그토록 갈망하는, 인간이 뭔가, 인생은 뭔가, 우리는 왜 지구에 와서 이렇게 뺑뺑이를 치면서 수평 수직을 반복하며 사는가, 그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우연하게 어떤 과학책 하나를 손에 잡게 됐는데, 아, 거기서 갑자기 강렬한 영감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래, 그동안 경원시했던 과학 분야로 들어가서 답을 찾아보자! 그게 15년 전이었는데 그때부터 과학 분야로 들어가서 현대과학이 이루어 낸 모든 과학적 성과를 찾아보고, 그것을 제가 찾고자 하는 문제에 대입시키는 작업을 했어요.”
—흥미롭네요.
“현재 지구의 과학이 당도해 있는 최전선에는 양자론, 평행우주, 뇌과학 같은 게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점에 이르면 과학자들도 가공할 만한 상상력을 발휘해 소설가인 저 같은 사람의 상상력에 엄청난 기름을 부어댑니다.
양자론적으로 말하자면, 왜 양자가 물리적인 법칙에 의존하지 않고 관찰자의 의식에 따라 마법을 일으키는지 물질세계의 근본이 통째로 모호해집니다. 그와 같은 입자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여기 있는 찻잔의 구성성분과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성분은 동일합니다.
뿐만 아니라 원자의 내부가 비어 있으니 찻잔이나 우리 몸은 실상 텅 비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기이한 3차원 렌즈를 착용한 것처럼 우리는 이것을 실제 형상인 것처럼 인지합니다. 우리 뇌가 만들어 내는 조작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죠.
이 지점에서 2600년 전에 석가모니가 설파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과학과 절묘하게 조우합니다.
지구에 와서 살고 있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실제가 아니고, 나라는 존재가 이곳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주 곳곳에 다차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과학적 설정에 당도하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소설보다 허무맹랑하고 마법보다 훨씬 고차원적 실제를 지닐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어떤 과학자도 원자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고, 어떤 경우에도 원자는 붕괴되지 않습니다. 의식이 물질을 만들고, 물질의 질료가 원자이기 때문이죠.
아무튼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의 존재와 인생의 의미는 대자유, 대상상의 영역을 만나 무한 가설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난 2000년 동안 인류가 누적해 온 모든 지식과 인식의 체계가 붕괴되고 새로운 다차원적 패러다임이 절실하게 필요해지게 되는 거죠.”
—과학에 들어가서야 인문학에서 얻지 못한 갈증을 풀었다는 겁니까.
“네. 과학 분야에서 얻은 새로운 인식체계가 나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면서 많은 답답함이 해갈되었죠. 나름대로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이전에 내가 문학과 인생과 인간에 대해 생각해 왔던 전체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했어요. 인식이 바뀌면서 그것에 맞는 작품세계를 새로 설계해야 하니까 일종의 의식 개벽이 일어나는 거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내 마음의 옥탑방》 같은 작품에는 인간적인 소박함이 가득하죠. 인간적인 문제를 들여다보려고 했던 열정은 가득하지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의식의 세계에서는 너무 감상적이고 지엽적으로 되새겨집니다.
내 작품뿐 아니라 이제 세상의 모든 소설은 새로운 인식체계에 적응하고 대응할 준비를 치열하게 해야 합니다. 독자들의 상상은 평행우주로 나아가는데 작가들의 상상력이 아직도 옥탑방이나 고시원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다면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죠.
저는 작품도 중요하지만 작품의 생산 주체인 작가의 의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 복제하듯이 평생 산성화한 상상의 영역을 답습하는 건 고정된 틀로 날마다 똑같은 국화빵을 찍어 내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예술, 진정한 창조란 똑같은 행위를 두 번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인생은 자신이 프로그램화한 것
—옥탑방이라는 현실은 지금도 존재하고, 시간만 흘렀을 뿐이지 인간의 삶은 똑같아요.
“우주는 전체가 현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과거니 미래니 하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개념이고 관념이죠. 그 모든 것이 다 한꺼번에 공존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시차적으로 분리해야 직성이 풀려요. 질서를 만들고 패턴화시켜야 제대로 된 줄 아니까요.”
—작가의 꿈이 어렸을 때부터였다고 했습니다. 등단 때문에 자살도 생각했었다는데, 많이 힘들었나 봐요.
“문학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공통된 삶의 패턴들을 가지고 있어요. 의식도 비슷하고 현실적인 처지도 비슷한 사람이 많아요. 오랫동안 소설을 쓰려는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공통분모적인 현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한편, 그들 중에는 글을 정말 써야 할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글을 쓴다는 행위는 단순하게 문장을 만들어 내는 스킬을 구사하는 게 아니에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문장을 만들어 내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엮어 나가는 행위에는 일종의 주술적인 효과가 있어요. 찢어지고 분산된 의식이 응집되고 붙고 아물면서 자기 구원과 힐링이 이루어지는 거죠. 문학이 지니고 있는 그와 같은 치유의 기능을 저는 오래 전부터 굉장히 중시하고 있습니다.”
—치유적인 글쓰기도 있죠.
“정신과에서 분열증세의 환자들에게 치료의 한 방법으로 글쓰기를 권하기도 합니다. 집중을 강화시키는 한 방법이죠. 그런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구원을 먼저 해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날부터 글을 쓰고 싶으면 자기구원을 위한 자발적 의지가 의식화한 거라고 봐야죠.
글쟁이들은 공통적으로 정신체계가 약해요. 에고가 강하고, 남과 잘 타협하지 않고, 편협하고 집착도 강하죠.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게 만드는 치료제가 글을 짓고 생산하는 일이죠.
힘들지만 작가가 되는 과정까지는 그런 자기 극기의 과정이 누구에게나 요구됩니다. 자신을 구원한 사람의 작품이라야 양분을 지니게 되고, 그것이 세상에 나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죠.”
—자살을 생각하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하자면.
“세상의 누구든, 글을 쓰든 안 쓰든 간에 지금 자신이 힘들어하는 그 인생은 바로 자신이 프로그램한 거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기를 힘들게 하는 부분은 자신을 강화하기 위한 트레이닝 과정일 뿐입니다. 영원히 고착된 고통이나 불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매순간, 시시각각 우주적인 변화 속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상에 항상 똑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죠.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24시간 단위로 날마다 수평과 수직을 되풀이하며 생물학적 생을 이어 가는데, 그와 같은 반복이 평생 되풀이되는 건 반복을 통한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문제에 불행이니 고통이니 하는 부정적 명칭을 부여하지 말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끌어안으면 그 순간부터 정신적 에너지의 흐름이 방향을 달리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미션을 수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진화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되듯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양자론에서 인간의 의식이 물질을 움직이는 걸 확인했듯이 우리 스스로 물질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 창조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하면 절대 자살 따위에 현혹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자체가 훌륭한 예술작품이니까요.”
—수강생들에게도 이렇게 강의를 하나요.
“저는 그 수강생들에게 분명히 잘라 말해요. 나는 당신들에게 소설을 가르친 적도 없고 가르칠 생각도 없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나는 인간과 인생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들이 제출하는 작품 안에 들어 있는 인간과 인생의 문제를 이 사람이 지금 어떻게 왜곡하고 비틀고 있는가를 지적하고 균형과 조화를 일깨우는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왜 합리성과 보편성을 망각하고 있는가, 그 자신을 되비춰 주는 거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투사하고 내 안에 있는 것이 프린트되어 나오기 때문에 단 한 문장도 속이지 못합니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에 실린 작가님 글을 보면, 소설이 나의 종교였고 구원이었다가, 또 작가와 소설과 세상 사이의 함수관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소설은 무엇이고, 나와는 어떤 관계인 겁니까.
“예전에는 문학이 내 인생의 100%였어요 나의 종교였고 신앙이었고 그 이상이었죠. 그걸로 목숨을 걸겠다, 과도한 문학에 대한 맹신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러다가 인생과 인간의 문제, 작가와 소설의 문제를 사유하면서 작가생활 20년이 되었을 때 《작가》라는 책 한 권을 썼어요. 나같이 작가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습작생들을 위해서 썼는데, 그걸 읽고 소설을 쓰겠다고 저에게 배우러 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문학이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0%가 아니라 1%예요. 문학은 단지 내 인생의 도구(tool)일 뿐이죠. 나를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도구. 나에게는 그게 소설이고, 박찬호에게는 야구공이고, 김연아에게는 피겨스케이트이고, 박세리에게는 골프공이고, 박지성에게는 축구공이고, 의사들에게는 청진기가 되는 거죠. 그 1%의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것은 결국 그것의 사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들면서 동시에 우주를 형성하는 존재들인 거죠.”⊙
중편소설 이상문학상 수상작 《내 마음의 옥탑방》은 화두가 인간의 욕망이다. 시지프의 신화를 골조로 하여 남자와 여자의 러브라인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가난한 연인의 현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 가난이 서로를 사랑하게도 했지만, 서로를 헤어지게도 만들었다.
백화점 스포츠용품 매장에서 일하는 남자는 어느 날 1층 입구의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근무하는 주희를 발견한다. 망토가 덧붙은 빨간 제복과 빨간 모자를 쓰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그녀는 꿈에 굶주린 사람들을 성전(백화점)으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판 가나안에서 단연 상징적인 안내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사는 집은 오르막이 절정을 이루는 언덕배기 3층 집의 작은 옥탑방이다.
지상의 방인가, 천상의 방인가. 보면 볼수록 연민을 자아내는 옥탑방.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가련한 처지마저 수용하지만, 그녀는 끝내 남자의 마음을 거부하고 시지프가 된다. ‘멸시로써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구절을 좋아했다. 옥탑방에서 지상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여자의 꿈이 속물스럽다 해도, 그 꿈을 이해하고 기꺼이 떠나게 해 주었던 남자. 그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꺼지지 않는 작은 옥탑방 하나를 품고 산다.
버스안 생활정보지 보고 옥탑방 아이디어 얻어
—이 소설은 90년대 후반에 나온 소설입니다. 옥탑방과 관련한 인과관계를 쓰게 된 건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제가 옥탑방에 살았던 적은 없어요.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소설 앞부분에도 나오지만 좌석버스 옆에 누가 놓고 간 생활정보지를 보게 됐는데 거기 주택매물 광고란에 ‘옥탑, 옥탑’ 하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 단어를 딱 접하는 순간 사로잡히는 힘이 굉장히 강했어요. 문학적 이미지를 강하게 주면서 옥탑방이란 공간성 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포착한 후 1년 반 정도 제 안에서 부화를 시켰어요.
지금은 노량진 학원가 뒤 상도동 넘어가는 쪽으로 달동네가 많이 있었어요. 거기로 취재도 하러 가고 그 옥탑방에 누구를 살게 할 것인가, 상대는 누구로 할 것인가, 그렇게 100% 구상 속에서 탄생된 소설이었습니다.”
—작가가 옥탑방에 살았다고 해도 믿을 것처럼 이미지가 살아 있지 않나요.
“작가로서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가 기쁘죠. 자기 경험을 소재로 쓴 글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 새빨간 거짓말인데 그걸 독자가 작가의 실제 경험인 것처럼 받아들이니 아주 기쁘죠.”
—백화점에서 일하는 안내여성을 옥탑방에 살게 한 구성은 절묘했다고 봅니다.
“여주인공 주희 이미지는 옥탑방이라는 소설을 구상하기 전부터 이미 잡혀 있었어요. 예전에는 백화점에 가면 인포메이션 걸이 빨간 제복과 모자를 쓰고 입구에서부터 강한 인상을 주었어요. 그런 이미지가 20대 때부터 뇌리에 강하게 각인돼 있었는데 옥탑방을 쓰려고 할 때 되살아났어요. 그녀와 상대를 할 배역은 누구한테 줄 것인가, 고민하다가 제가 겪은 20대의 정서를 투사시켜 상대 배역을 만들었죠. 그렇게 두 인물이 만들어졌어요.”
—옥탑방이라는 단어가 사회문화로 익숙해진 것도 그 무렵부터가 아니었나요.
“그때 당시는 옥탑방이 국어사전에 공식적으로 올라 있지 않았어요. 일상적으로 사용한 것은 제 소설이 처음입니다. 그 뒤에 옥탑방 고양이가 나오고 ‘옥탑방, 옥탑방’ 하더라고요. 어디 가서 옥탑방 쓴 작가라고 하면 드라마인 줄 알고 ‘<옥탑방 고양이> 잘 봤습니다’ 그러더군요.”
—에피소드가 많았겠네요.
“대통령 선거가 있던 무렵인데, 당시 출마했던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가 각축을 벌이고 있을 때였어요. 기자들이 두 대통령 후보에게 옥탑방에 가 본 적 있는가? 옥탑을 아는가? 이런 질문을 했는데 노무현 후보도 이회창 후보도 둘 다 옥탑방을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해요. 기자가 저한테 전화를 해서 두 대통령 후보가 옥탑방을 모른다고 하는데 작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거예요. 저는 정치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어 코멘트를 하지 않겠다고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민생을 두고 정책대결도 만만치 않았을 대선후보의 아이러니한 대답이었네요.
“그렇죠. 둘 다 모른다고 했다고 하니 저도 놀라고 황당했죠.”
—그 후로도 옥탑방 단어는 트렌드가 됐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서 많이 활용하더군요.”
‘주희’는 모든 이의 희망
—옥탑방에 사는 가난한 여자가 가난한 남자를 사랑하지만 거들떠볼 수 없는 냉정한 현실을 그려냈는데, 덧붙일 서사적 설명을 부탁합니다.
“이 소설은 제가 소설 안에다 골조로 심어 놓은 시지프 신화를 빼고 나면 아주 하찮은 통속소설이에요.
그 여자가 근무하는 화려한 백화점, 낮에는 그곳에서 일하지만 퇴근을 하면 산동네를 쓸쓸히 걸어 올라가서 불법 가건물의 옥탑방으로 들어가죠. 그곳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언제나 저 지상 주민으로 편입할 수 있을까, 이런 욕망으로 사는 여자죠.
남자는 형네 아파트 17층에 얹혀살죠. 그러나 현실에서 지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지상의 주민이 아니죠. 날마다 옥탑방과 아파트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내밀한 고뇌를 가지고 살아가죠.
시지프의 신화도 시지프가 날마다 바위를 정상으로 밀어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어김없이 다시 굴러 제자리로 떨어지죠. 그렇게 되풀이되는 일상이 인간의 숙명성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면 수평으로 누워 있다가 잠에서 깨면 수직으로 일어나서 하루 종일 뺑뺑이치고 다시 지친 몸으로 돌아와 수평으로 눕죠.
그처럼 이 두 남녀의 삶의 굴레에 시지프적 형벌을 대입한 겁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는 시지프 신화를 선물하고 읽어 줬는데도 불구하고 주희는 그걸 부정하고 지상으로 내려가 버리죠.”
—주희에게 시지프의 신화를 읽어 준 건, 오히려 주희가 자신의 마음을 굳힌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주희는 그런 관념적 숙명을 받아들이기 싫어 인간적 저항에 눈을 떴을 수도 있어요. 결말에서 주희가 욕망을 선택하는 것이 제가 판단하기에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의지라고 봐요. 시지프 같은 형벌의 시스템을 신들이 만들었다면, 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선택은 욕망을 갖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그 욕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녀를 그렇게 보낸 것이죠.”
—백화점에서 안내를 할 정도면 주희의 외모가 뛰어났을 텐데, 당연히 신분상승을 꿈꾸지 않았을까요.
“물론이죠.”
—책을 읽으며 주인공 남자의 여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심에 놀랐습니다.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녀가 등 뒤에서 사마귀처럼 안아 달라고 했을 때, 등을 돌려서 정상으로 안아 보고 싶었겠죠. 남자로서의 욕망을 다하고 싶었겠죠. 그녀가 지상으로 내려가고 싶어할 때 못 내려가게 잡고도 싶고요.
그러나 그로 하여금 주희가 선택했던 것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든 제어력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적 욕망과 용기를 발산할 수 없는 슬픈 청춘의 초상이죠. 남자가 그녀를 잡을 수 있는 조건은 오직 물질적 조건밖에 없으니까요. 그녀가 선택하려고 하는 것도 물질적 욕망이었기 때문에, 그가 물질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그녀를 안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 청년은 자기 처지를 현실적으로만 인지하고 받아들인 거죠. 그 처지에서는 그 어떤 남자라도 그 이상의 선택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막무가내 철없는 3류 연애소설로 빠지려면 무조건 잡고 어딜 가고 치고받고 울고불고 이런 식으로 풀 수 있지만, 저는 이 소설을 구상하며 연애소설보다는 인간의 숙명성을 일깨우는 철학적 주제를 의식했던 거죠.”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난 작품이었어요. 시간이 흘러도 그 시대에 일어난 것이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은 더 확산되는 추세이죠. 더 아무렇지도 않게요. 그때는 그런 문제가 고뇌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어요. 주희와 같은 인물이 보편적 인물이 된 거죠. 그 시대에는 주희가 대단한 선택을 하는 인물의 초상처럼 그려졌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다 주희가 되고 싶어하고, 이미 주희이거나 주희이고자 하는 거죠.
작가로서 저는 그런 현상들이 좋은 쪽의 인간적 진화라고 생각해요. 제가 주희에게 주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것이었죠. 자기 욕망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죄책감이나 죄의식에 시달리는 건 올바른 인간적 자세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길을 택하게 한 겁니다.”
21세기적 환경에서 인간도 변화해야
—주거문화가 소설가에게 좋은 소재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고시원 문화가 당시의 옥탑방 문화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또한 작가의 상상력으로 앞으로는 어떤 주거문화 시대가 올 것 같습니까.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부터 시작해 공간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연관성은 굉장히 강하죠. 방금 말씀하신 고시원 같은 것은 특별한 경우이자 조건이죠.
하지만 21세기인 지금, 디지털 문명시대에 공간의 개념은 별 의미가 없어요. 디지털 자체가 모든 공간을 실시간 연결해 주고 온라인이 신경세포처럼 온 지구와 연결되어 있으니 문학적 환경도 거기에서 대응력을 찾아야 해요. 그런데 작가들은 아직도 골방에 있는 케이스가 많아요.
21세기는 공간 없는 유목의 시대, 노마드의 시대라고도 하죠. 개인들이 집을 소유하거나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갖는 것 자체를 거추장스러워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이동하고, 사이버상으로 이동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거죠.
자크 아탈리가 쓴 《호모 노마드-유목하는 인간》을 보면 지구인구 중 3분의 1은 계속 이동 중에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비행기, 버스, 전철 등의 이동수단을 이용해 계속 이동 중에 있죠. 이렇게 끝없이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개념도 옛날처럼 강하지 못하고 점점 희박해져 가는 거죠. 국가는 이런 이동자들에게 허브 역할을 하는 기능으로만 남을 것 같아요. 국가의 체제 개념도 점점 약화되어 정거장 내지 항구 같은 역할만 하는 거죠.
저는 그런 변화가 상당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경계를 안 가지는 21세기적 환경 안에서 문학도 적극적으로 변신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옥탑방도 작가가 썼기 때문에 드러났던 거죠. 노마드적인 삶도 작가에게서 새롭게 탄생하면 보편화가 되겠네요.
“문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아직 못 보았거나 늘 보아 오던 것을 그 작가가 써서 아주 낯설게 만들어 주는 거죠. 아,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못 봤구나! 늘 내 눈앞을 지나쳤는데,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구나! 그러면서 낯설게 만들어 주는 거죠. 그게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니까요.”
—작중에서 그녀는 남자와 한방에 자면서도 그쪽으로 돌아눕지 못하고 다만 사마귀처럼 등만 껴안아 달라고 하는데, 이런 표현은 여자의 내면을 잘 알지 못하면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하하. 이 질문을 접하고 혼자 많이 웃었어요. 제게 어떤 여자가 이런 대사를 해 줬으면 글 쓰는 데 도움이 됐을까 싶네요.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캐릭터나 성격, 인상적인 사건이나 그들이 만들어 낸 대사 같은 것으로 각인을 하거든요. 그래서 작품을 만들 때 그 작품을 최대한 압축해서 악센트를 줄 수 있는 대사를 뭘로 칠까 고민을 많이 해요. 문장보다는 대사가 훨씬 중요하고 빨리 전달되기 때문이죠.
제 작품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후반부에 여자가 술에 취해서 하는 대사 한마디를 만들어 내려고 15일 이상을 완성을 못하고 고민했었어요. 그 대사가 ‘아, 춥고 배고파. 그리고 남자와 자고 싶어’였지요.
그 책이 나왔을 때 서울예대에서 문학특강을 해 달라고 해서 갔는데, 지금은 후배 작가가 된 하성란씨가 그 당시 학생이었어요. 뒷날 하성란씨가 술회하기를 그 무렵에 자기네들은 맨날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술만 취하면 ‘아, 춥고 배고파. 그리고 남자와 자고 싶어’ 이렇게 농담을 했다고 해요. 결국 《내 마음의 옥탑방》에서도 ‘사마귀처럼 안아 줘’가 두 사람의 현실을 압축한 대사가 된 거죠.”
—어찌 보면 양심적이잖아요. 남자를 책임질 수 없다면, 남자에게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았던 게.
“주희는 자기 삶에 굉장히 당당한 여자이죠.”
—주인공 중 어느 쪽과 자신이 동일시되는 느낌이었습니까.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둘 다 젊은 날 내 의식의 분신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안에 주희도 있었고, 내 안에 남자친구도 있었고. 아니무스 아니마처럼 둘 다 내 안에 반대성향으로 마주보고 있는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들이죠. 자기와 똑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한쪽은 이쪽을 선택하고 한쪽은 저쪽을 선택하는, 그래서 마주보고 있는 그런 슬픈 존재들.”
—아주 적합한 대답을 해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
—작가는 끝까지 그녀의 태도를 합리적으로 그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자는 시지프를 주희한테 보여주고 일깨워 줬지만, 그녀는 그것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자기 길을 선택해서 갔잖아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거예요. 나의 숙명이 이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며 체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많죠. 어디 가서 사주보고 ‘내 팔자 그렇대’ 하고 그냥 주저앉잖아요.
그런데 그녀는 시지프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과 자기 욕망에 당당하고, 그 남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등을 보이면서 자기 갈 길을 암시하고, 예고하고, 그리고 실제로 자기 갈 길을 갔기 때문에 그런 운명에 휘둘리거나 운명에 갇혀 있을 존재가 아니었던 거죠. 그런 점에서 주희는 운명론자가 아니에요. 그게 주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인간적 매력이기도 하고요.”
—그러면 주인공 남자가 주희에게 책을 선물한 것은 주희가 돌아오기를 바랐던 건가요.
“자기하고 주희가 시지프 신화를 읽으며 같이 위안을 받고 싶었던 것인데, 그 코드가 합일이 안 된 거죠. 그래서 다른 길을 가게 된 거죠.”
—실제도 타인에(또는 여자) 대해 마음이 너그러우십니까.
“글쎄요. 제가 제 자신에 대해 말하기는 좀 그런데, 저는 그냥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살자는 주의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런저런 사람이다’라는 식의 고정관념 자체를 안 가지려고 하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되비춰 주는 상태, 예컨대 딱딱한 사람하고 있으면 나도 딱딱해지고, 유연한 사람하고 있으면 나도 유연해지는 식이죠. 내가 항상 딱딱하기 때문에 어딜 가거나 모든 사람이 내 딱딱함 때문에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거죠.
요컨대, ‘이게 나다’라는 의식이나 정체성의 패턴 자체를 의식하지 않아요. 그게 자연스럽고 자유로우니 내가 내 안에 갇혀 살지 않는 거죠.”
인문학으로 풀지 못한 갈증을 과학으로 풀어
—철학적인 문장이 많은 문체였습니다. 작품을 쓰는 데 영향을 받은 철학가나 사상가는 누구입니까.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저한테 영향을 준 사람은 하늘에 별처럼 많아요. 그중에 누가 더 탁월했었고 뛰어나고 큰 영향을 줬다고 계량을 하는 건 불가능해요. 세상 모든 소설은 단 두 가지를 다루죠. 그것이 인간과 인생입니다. 인간을 다루기 때문에 인생을 다루게 되는 거고, 인생을 다루기 때문에 인간이 등장하는 거죠. 이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란성 쌍생아 같은 숙명을 지녔죠.
그래서 작가가 그 분야에 대해 죽는 날까지 공부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제 평생의 화두는 인간이 도대체 뭔가, 인생이 도대체 뭔가이고, 모든 공부는 그 두 가지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인문학 공부를 많이 하셨겠네요.
“보통 문학을 하는 사람은 인문학에 대한 의존도가 커요. 저도 인문학에 대해 나름대로 소양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작가로 살면서 인문학이 주는 공허함에 많이 시달렸어요. 인간과 인생에 대해 내가 원하는 속 시원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신학으로도 가 보고 역사로도 가 보고 철학으로도 가 봤는데, 그 안에서도 명쾌한 답을 찾지 못했어요.
사마천의 《사기》 같은 풍부한 인간적 사례 안에서도 패턴화한 처세술이나 개발하고 응용할 수 있을 뿐이지 제가 그토록 갈망하는, 인간이 뭔가, 인생은 뭔가, 우리는 왜 지구에 와서 이렇게 뺑뺑이를 치면서 수평 수직을 반복하며 사는가, 그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우연하게 어떤 과학책 하나를 손에 잡게 됐는데, 아, 거기서 갑자기 강렬한 영감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래, 그동안 경원시했던 과학 분야로 들어가서 답을 찾아보자! 그게 15년 전이었는데 그때부터 과학 분야로 들어가서 현대과학이 이루어 낸 모든 과학적 성과를 찾아보고, 그것을 제가 찾고자 하는 문제에 대입시키는 작업을 했어요.”
—흥미롭네요.
“현재 지구의 과학이 당도해 있는 최전선에는 양자론, 평행우주, 뇌과학 같은 게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점에 이르면 과학자들도 가공할 만한 상상력을 발휘해 소설가인 저 같은 사람의 상상력에 엄청난 기름을 부어댑니다.
양자론적으로 말하자면, 왜 양자가 물리적인 법칙에 의존하지 않고 관찰자의 의식에 따라 마법을 일으키는지 물질세계의 근본이 통째로 모호해집니다. 그와 같은 입자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여기 있는 찻잔의 구성성분과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성분은 동일합니다.
뿐만 아니라 원자의 내부가 비어 있으니 찻잔이나 우리 몸은 실상 텅 비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기이한 3차원 렌즈를 착용한 것처럼 우리는 이것을 실제 형상인 것처럼 인지합니다. 우리 뇌가 만들어 내는 조작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죠.
이 지점에서 2600년 전에 석가모니가 설파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과학과 절묘하게 조우합니다.
지구에 와서 살고 있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실제가 아니고, 나라는 존재가 이곳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주 곳곳에 다차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과학적 설정에 당도하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소설보다 허무맹랑하고 마법보다 훨씬 고차원적 실제를 지닐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어떤 과학자도 원자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하고, 어떤 경우에도 원자는 붕괴되지 않습니다. 의식이 물질을 만들고, 물질의 질료가 원자이기 때문이죠.
아무튼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의 존재와 인생의 의미는 대자유, 대상상의 영역을 만나 무한 가설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난 2000년 동안 인류가 누적해 온 모든 지식과 인식의 체계가 붕괴되고 새로운 다차원적 패러다임이 절실하게 필요해지게 되는 거죠.”
—과학에 들어가서야 인문학에서 얻지 못한 갈증을 풀었다는 겁니까.
“네. 과학 분야에서 얻은 새로운 인식체계가 나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면서 많은 답답함이 해갈되었죠. 나름대로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이전에 내가 문학과 인생과 인간에 대해 생각해 왔던 전체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했어요. 인식이 바뀌면서 그것에 맞는 작품세계를 새로 설계해야 하니까 일종의 의식 개벽이 일어나는 거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내 마음의 옥탑방》 같은 작품에는 인간적인 소박함이 가득하죠. 인간적인 문제를 들여다보려고 했던 열정은 가득하지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의식의 세계에서는 너무 감상적이고 지엽적으로 되새겨집니다.
내 작품뿐 아니라 이제 세상의 모든 소설은 새로운 인식체계에 적응하고 대응할 준비를 치열하게 해야 합니다. 독자들의 상상은 평행우주로 나아가는데 작가들의 상상력이 아직도 옥탑방이나 고시원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다면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죠.
저는 작품도 중요하지만 작품의 생산 주체인 작가의 의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 복제하듯이 평생 산성화한 상상의 영역을 답습하는 건 고정된 틀로 날마다 똑같은 국화빵을 찍어 내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예술, 진정한 창조란 똑같은 행위를 두 번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인생은 자신이 프로그램화한 것
—옥탑방이라는 현실은 지금도 존재하고, 시간만 흘렀을 뿐이지 인간의 삶은 똑같아요.“우주는 전체가 현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과거니 미래니 하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개념이고 관념이죠. 그 모든 것이 다 한꺼번에 공존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시차적으로 분리해야 직성이 풀려요. 질서를 만들고 패턴화시켜야 제대로 된 줄 아니까요.”
—작가의 꿈이 어렸을 때부터였다고 했습니다. 등단 때문에 자살도 생각했었다는데, 많이 힘들었나 봐요.
“문학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공통된 삶의 패턴들을 가지고 있어요. 의식도 비슷하고 현실적인 처지도 비슷한 사람이 많아요. 오랫동안 소설을 쓰려는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공통분모적인 현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한편, 그들 중에는 글을 정말 써야 할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글을 쓴다는 행위는 단순하게 문장을 만들어 내는 스킬을 구사하는 게 아니에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문장을 만들어 내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엮어 나가는 행위에는 일종의 주술적인 효과가 있어요. 찢어지고 분산된 의식이 응집되고 붙고 아물면서 자기 구원과 힐링이 이루어지는 거죠. 문학이 지니고 있는 그와 같은 치유의 기능을 저는 오래 전부터 굉장히 중시하고 있습니다.”
—치유적인 글쓰기도 있죠.
“정신과에서 분열증세의 환자들에게 치료의 한 방법으로 글쓰기를 권하기도 합니다. 집중을 강화시키는 한 방법이죠. 그런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구원을 먼저 해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날부터 글을 쓰고 싶으면 자기구원을 위한 자발적 의지가 의식화한 거라고 봐야죠.
글쟁이들은 공통적으로 정신체계가 약해요. 에고가 강하고, 남과 잘 타협하지 않고, 편협하고 집착도 강하죠.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게 만드는 치료제가 글을 짓고 생산하는 일이죠.
힘들지만 작가가 되는 과정까지는 그런 자기 극기의 과정이 누구에게나 요구됩니다. 자신을 구원한 사람의 작품이라야 양분을 지니게 되고, 그것이 세상에 나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죠.”
—자살을 생각하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하자면.
“세상의 누구든, 글을 쓰든 안 쓰든 간에 지금 자신이 힘들어하는 그 인생은 바로 자신이 프로그램한 거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기를 힘들게 하는 부분은 자신을 강화하기 위한 트레이닝 과정일 뿐입니다. 영원히 고착된 고통이나 불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매순간, 시시각각 우주적인 변화 속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상에 항상 똑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죠.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24시간 단위로 날마다 수평과 수직을 되풀이하며 생물학적 생을 이어 가는데, 그와 같은 반복이 평생 되풀이되는 건 반복을 통한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문제에 불행이니 고통이니 하는 부정적 명칭을 부여하지 말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끌어안으면 그 순간부터 정신적 에너지의 흐름이 방향을 달리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미션을 수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진화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되듯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양자론에서 인간의 의식이 물질을 움직이는 걸 확인했듯이 우리 스스로 물질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 창조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하면 절대 자살 따위에 현혹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자체가 훌륭한 예술작품이니까요.”
—수강생들에게도 이렇게 강의를 하나요.
“저는 그 수강생들에게 분명히 잘라 말해요. 나는 당신들에게 소설을 가르친 적도 없고 가르칠 생각도 없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나는 인간과 인생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들이 제출하는 작품 안에 들어 있는 인간과 인생의 문제를 이 사람이 지금 어떻게 왜곡하고 비틀고 있는가를 지적하고 균형과 조화를 일깨우는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왜 합리성과 보편성을 망각하고 있는가, 그 자신을 되비춰 주는 거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투사하고 내 안에 있는 것이 프린트되어 나오기 때문에 단 한 문장도 속이지 못합니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에 실린 작가님 글을 보면, 소설이 나의 종교였고 구원이었다가, 또 작가와 소설과 세상 사이의 함수관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소설은 무엇이고, 나와는 어떤 관계인 겁니까.
“예전에는 문학이 내 인생의 100%였어요 나의 종교였고 신앙이었고 그 이상이었죠. 그걸로 목숨을 걸겠다, 과도한 문학에 대한 맹신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러다가 인생과 인간의 문제, 작가와 소설의 문제를 사유하면서 작가생활 20년이 되었을 때 《작가》라는 책 한 권을 썼어요. 나같이 작가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습작생들을 위해서 썼는데, 그걸 읽고 소설을 쓰겠다고 저에게 배우러 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문학이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0%가 아니라 1%예요. 문학은 단지 내 인생의 도구(tool)일 뿐이죠. 나를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도구. 나에게는 그게 소설이고, 박찬호에게는 야구공이고, 김연아에게는 피겨스케이트이고, 박세리에게는 골프공이고, 박지성에게는 축구공이고, 의사들에게는 청진기가 되는 거죠. 그 1%의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것은 결국 그것의 사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들면서 동시에 우주를 형성하는 존재들인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