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 2·12총선 앞두고 “민한당에 들어가 黨을 접수하라”고 권유
⊙ YS, 대통령 취임 전 국무총리와 전국구 의원 5명 추천권 제안
⊙ 盧武鉉, 당선 직후 “1년만 자유를 주십시오”
鄭大哲
⊙ 69세. 서울대 법대 졸업. 美미주리대 정치학 박사.
⊙ 제9·10·13·14·16대 국회의원, 평화민주당 대변인·同정책위 의장, 국회 문공위원장, 민주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同대표최고위원 역임.
現 민주당 상임고문.
⊙ YS, 대통령 취임 전 국무총리와 전국구 의원 5명 추천권 제안
⊙ 盧武鉉, 당선 직후 “1년만 자유를 주십시오”
鄭大哲
⊙ 69세. 서울대 법대 졸업. 美미주리대 정치학 박사.
⊙ 제9·10·13·14·16대 국회의원, 평화민주당 대변인·同정책위 의장, 국회 문공위원장, 민주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同대표최고위원 역임.
現 민주당 상임고문.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당권을 놓고 이철승(李哲承) 대표최고위원과 김영삼(YS) 의원이 격돌했다. 과거 민주당 계보를 따지면 이철승 대표는 신파(新派), YS는 구파(舊派)였다. 아버지(정일형)의 계보나 인연대로라면 나는 이철승 대표를 밀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세운 YS 편에 섰다. 때문에 이 전 대표는 요즘도 나를 만나면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자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유신(維新) 말기의 상황 속에서 민주화를 내건 YS를 지지하는 것은 ‘시대정신’이었다.
그해 8월 YH사태가 발생했다.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이 폐업(閉業)하자 이 회사 노조원들이 신민당사에 쳐들어와 농성을 하면서 회사 정상화를 요구한 것이다. 노조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흘 만인 8월 11일, 경찰이 당사에 난입해 노조원들을 강제 연행했다. 경찰은 합판으로 된 벽을 뜯어내고 총재실로도 들이닥쳤다. 당시 총재실 안에 국회의원은 나와 이상민 의원 두 사람밖에 없었다. 나와 이 의원은 YS를 감싸고 웅크렸다. 경찰은 우리 두 사람을 군홧발로 걷어차고 곤봉세례를 퍼부었다. 한참 후에 경찰간부 하나가 나타나 짐짓 “총재님하고 의원님들께 이러면 되느냐?”고 야단을 친 후, 우리를 풀어주었다.
이어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YS의 국회의원직 박탈을 감행했다. 정말 살벌하던 시절이었다. 이영덕 《조선일보》 기자는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내게 “조심하라”고 말했다. 야당의원 혼자 돌아다니다가는 꼭 테러라도 당할 것 같아서 몇 사람씩 모여서 식사를 같이했다. 그런 상황은 10·26사태가 나고서야 끝났다.
5·18, YS 집에서 담 넘어 피신
12·12사태 이후 군부(軍部)의 동향이 수상쩍기는 했지만, 그래도 세상의 흐름은 민주화를 향해 한 발자국씩 전진하는 듯했다. 유신 시절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구속·투옥됐던 사람들이 석방됐고, 김대중(DJ)씨도 정치활동을 재개(再開)했다. DJ는 신민당 입당(入黨) 문제를 놓고 YS와 줄다리기를 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됐다.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라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광주(光州)에서는 민주화와 DJ 석방을 요구하는 항쟁이 벌어졌다.
계엄확대 조치가 발표된 직후인 5월 18일, 나는 향후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상도동 YS댁으로 갔다. 최형우(崔炯佑, 전 내무부 장관·제8~10·13~15대 국회의원)·김동영(金東英, 전 정무제1장관·제9·10·12·13대 국회의원)·황낙주(黃珞周, 전 국회의장·제8~10·12~15대 국회의원) 의원, 김덕룡(金德龍, 전 정무장관·제13~17대 국회의원) 비서 등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렇다 할 대안 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최형우 의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동생, 자네 집에 헌병이 자네를 잡으러 갔대!”
YS가 “빨리 피신시켜라. 다들 가진 돈 다 내놔라. 옷 벗어줘라”고 말했다. YS도 안으로 들어가 사모님에게서 돈을 받아가지고 나왔다. 허름한 점퍼를 얻어 입고 밀짚모자를 썼다. 담장을 넘는데 아래를 보니 YS가 내 발을 받쳐주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잠실에 있는 외사촌형 집으로 피신했다. 가끔 조홍규(趙洪奎, 제 13~15대 국회의원), 김덕규(金德圭, 전 국회부의장·제11·13·14·16·17대 국회의원) 신민당 전문위원을 불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달을 그렇게 숨어 있었다. 답답했다.
수배자를 놓아준 경찰서장
참다못한 나와 조홍규 전문위원은 어느 날 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거리로 나왔다. 길거리 벽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현상수배자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내란음모집단’의 ‘대변인’이라고 되어 있었다.
우리는 잠실 새마을시장 근처 포장마차 구석에서 소주를 마셨다. 알코올이 뱃속으로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짜릿한 소주맛에 취하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술을 마시는데, 반대편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놀랐지만, 상대방도 나 못지않게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은 바로 내 지역구인 서울 중구를 관할하는 중부경찰서 서장과 정보과장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이렇게 잡혀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 곁을 스쳐가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안 본 걸로 하겠습니다.”
후일, 당시의 경찰서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관할 지역의 현역 의원을 내 손으로 잡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함께 있는 정보과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슬쩍 정보과장의 속을 떠보니,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의원님을 못 본 척한 거였습니다.”
얼마 후부터는 도피 중이던 조윤형(趙尹衡, 전 국회부의장·제5~8·13·14대 국회의원), 박종률(朴鍾律, 제8·11~13대 국회의원) 전 의원이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내 피신처로 놀러 오기도 했다. 이를 수상하게 생각한 아파트 주민이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이 달려왔지만, 아파트 경비원이 미리 귀띔을 해준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도피생활을 하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바깥소식이었다. 계엄당국의 검열을 받는 국내 언론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나는 운전기사에게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아사히신문》 같은 외신들을 구해 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그만 불심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딱 봐도 그런 외국 신문을 읽을 만한 사람이 아닌지라, 운전기사는 경찰에 연행됐다. 나는 몸을 피했지만, 그의 안전이 걱정이 됐다. 도피 중이었지만, 나는 유흥수(柳興洙, 제12·14·15대 국회의원) 치안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선처를 부탁했다. 그는 고등학교 4년 선배였다. 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곧 내보내지요. 정 의원께서도 몸조심하세요.”
그 살벌했던 시절에 인정을 보여준 유흥수 전 치안본부장, 중부경찰서장과 정보과장, 아파트 경비원, 그들의 고마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玄鴻柱, “(全斗煥 정권) 아마 20년 이상은 가게 될 것”
내가 도피생활을 하고 있을 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렸다. 그해 8월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내가 붙잡힌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미 정권을 확고하게 장악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나를 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나는 서린호텔에서 보안사의 한용원(韓鎔源) 대령으로부터 형식적인 조사만 받고 풀려났다. 5·17 직후였다면, 나도 고초를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전두환 정권은 5·17 직후 설치되어 초헌법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대신해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었다. 입법회의 출범을 앞둔 어느 날 현홍주(玄鴻柱, 전 법제처장·주미대사) 안기부 차장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그는 내 고등학교 친구의 자형(姊兄)이었다. 현 차장은 나와 함께 오세응(吳世應, 전 국회부의장·제8~12·14·15대 국회의원) 신민당 의원도 불렀다. 오 의원은 나의 고교 10년 선배이기도 했다. 현 차장이 말했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어요.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런 시대가 과거 18년처럼 길게 가지 말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20년 이상은 가게 될 것입니다. 두 분은 일단 우리의 기준으로 선발된 것을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입법의원이 되어주십시오. 거절하면 정치활동을 못 하게 될 것입니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즉각 거절했다.
“첫째, 나는 기본적으로 5·17군사쿠데타를 반대합니다. 둘째, 나나 조윤형 씨같이 부친의 유업(遺業)을 물려받은 의원들을 가볍게 바람막이로 활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군사정권이지만, 정권을 오래 유지하려면 건전한 야당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야당에 남겠습니다. 셋째, 지금 내가 여당으로 가면 국가적 손실이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는 조종사 한 사람을 키우는 데 600만 달러가 든다고 합니다. 내가 군사정권의 입법의원이 되면 두 번 정도는 의원생활을 하겠지만, 이후에는 유권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신군부의 얼굴 마담이 되기에는 이 정대철이가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현홍주 차장은 나를 더 붙잡지 않았다. 오세응 의원은 이후 민주정의당에 들어가 여당의원의 길을 걸었다.
아내의 ‘햇볕정책’
이후 나는 전두환 정권이 제정한 ‘정치풍토쇄신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묶였다. 거기에 더해 가택연금(軟禁)까지 당했다. 우리 집에는 나를 감시하기 위해 형사들이 상주(常駐)했다. 내가 태권도 유단자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인지, 태권도와 유도 유단자 세 명을 보내 감시하게 했다. 그들은 아예 응접실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들을 볼 때마다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이오? 이렇게 남의 집 거실까지 들어와도 되는 거요? 해도 너무하지 않소? 염치도 없이…”
이렇게 내가 언성을 높이면, 아내는 나를 얼른 서재로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줬다. 그리고 나를 감시하러 나온 형사들에게는 냉장고를 털어서 식사대접을 해주었다. 마실 것도 내 오고, 간식도 내 주었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구해다가 찌개를 끓여주기도 했다. 거기에 소주대접까지….
그들도 미안했는지, 아내가 자기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눈치가 보이면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그러면 아내는 밖으로 나가 그들의 소매를 끌고 들어왔다. 나중에 형사들은 아예 골목 밖 먼발치로 물러났다. 아내 덕분에 한때 우리 집 응접실까지 차고 앉았던 형사들을 자연스럽게 쫓아낸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옛 야당의원들이 우리 집을 드나드는 것도 좀 더 수월해졌다. 아내의 ‘햇볕정책’이 성공한 것이다. 위기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1982년 12월, 전두환 정권은 복역 중이던 DJ의 도미(渡美)를 허락했다. 명분은 신병(身病)치료였지만, 사실상의 망명(亡命)이었다. DJ가 출국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국회의원 출마 때문에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신영(盧信永) 안기부장에게 미국행 여권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노 부장은 아버지가 외무부 장관 시절 제네바총영사를 지내 교분이 있었다. 얼마 후 노 부장은 전화를 걸어와 미국에 가도 좋다고 알려왔다. 1984년 나는 미국 미주리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DJ, “鄭大哲은 30년 담배친구”
미국에는 DJ가 있었다. 부모님과 DJ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내가 DJ를 처음 본 것은 1961년 5·16 직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그가 당선인사차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였다. 그때 그는 훤칠하고 잘 생긴 청년정치가였다.
이후에도 그는 우리 집을 곧잘 찾아왔다. 우리 집에 올 때면 그는 정계 대선배인 아버지 앞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면서, 대학생이던 내 방에 와서 담배를 피우곤 했다. 훗날 야당 총재 시절에 DJ가신(家臣)이나 다른 정치인들은 감히 DJ 앞에서 담배를 꺼내들 생각을 못했지만, 나는 예외였다. DJ는 “정 의원은 나와 30년 담배친구”라면서 내게 담배를 주곤 했다.
DJ와 YWCA 총무이던 이희호(李姬鎬) 여사를 연결시켜 준 사람은 어머니(이태영)였다. 어머니는 “DJ가 내게 ‘이희호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소개해 줬지. 나중에 알고 보니 뒤에서 자기들끼리 다 연애해 놓고서 나보고 정식으로 소개해 달라고 한 거였어. 내가 그것들에게 속았던 것 같아”라며 웃었다.
내가 본 젊은 시절의 DJ는 부지런하고 명석한 사람이었다. DJ는 야당의원으로서는 드물게 월남파병이나 한일회담 등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신민당 내 ‘강경파’로 꼽히던 아버지는 그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렇게 온건한 정치인이던 DJ를 ‘강경파’로 만든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다. 아버지는 DJ를 두고 “참 똑똑한 사람”이라면서 “좀 더 다듬어지면 큰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DJ를 마뜩지 않게 여기던 아버지였지만, 1971년 DJ가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후 아버지는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아버지는 “내가 DJ와 보따리를 바꾸어 멨다”고 말했다. 민주화투쟁에서 DJ가 앞장을 서고, 당신은 뒤에서 최선을 다해 뒷받침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정계의 원로(元老)였지만 ‘장강(長江)의 뒷물결’이 밀려올 때 당신의 자리를 비켜줄 줄 아는 분이었다.
어머니도 DJ의 부탁으로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을 그만두고 DJ를 위해 선거유세를 했다. 대선을 앞두고 DJ집에서 의문의 폭발사건이 있었다. 그러자 우리 집에도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후 우리 집에서도 화재가 발생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모아놓은 1만2000권이 넘는 장서(藏書)와 유엔 관련 자료, 어머니가 모아둔 여성운동사 자료들이 불에 타버렸다. 소방서에서는 “고양이 몸에 불이 붙어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한동안 어머니는 밖에서 자기소개를 할 일이 있을 때면 “고양이가 불낸 집 안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1971년 대선 후 DJ는 어머니에게 신민당 전국구 의원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데 당신까지 국회의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사양했다.
이후 1970년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부모님은 늘 DJ와 함께했다. 아버지는 1973년 DJ납치사건 후에는 국회에서 “DJ 납치는 중앙정보부가 한 일 아닌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지 말라”며 중앙정보부를 규탄했다. 1976년 명동사건 때에도 부모님은 DJ와 함께 고초를 겪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 때, 그 서슬 퍼런 상황 속에서 어머니는 법정에 나가서 “김대중이는 빨갱이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DJ가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1977~78년, 국회의원이 된 나는 이희호 여사, 권노갑·김옥두 비서와 함께 면회를 다녔다. 면회가 허락되지 않으면, 우리는 교도소 담장 밖에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소리쳤다. 나중에 DJ는 그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DJ, 민한당行 권유
그런 사이였기에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나는 틈틈이 DJ를 만났다. DJ가 찾으면 가서 자문(諮問)에 응하는 식이었다.
미국에서의 첫 만남에서 DJ는 “미국으로 올 때, 전두환 정권에 ‘미국에 가서 일체의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약속을 어떻게 지키느냐? 구애받지 마시고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DJ는 일본에서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1989년에 한국민주통일연합으로 개칭) 등과 민주화운동을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나는 “일본에는 조총련 등 좌익세력들이 있으니 민주화운동을 할 때에는 그런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DJ는 나의 그런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은 게 아닌가 싶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민한당(민주한국당) 입당 문제를 의논했다. DJ는 내게 “민한당이 시작은 ‘사쿠라정당’이었지만, 결국 다음 총선(總選)에서 제1야당이 될 것”이라면서 “귀국하거든 조윤형 전 의원과 함께 민한당에 입당해서 당을 접수하라”고 했다.
그때는 정치규제에서 풀린 인사들이 신한민주당(신민당)을 만들기 전이었다. DJ의 말이기는 했지만 관제(官製)야당인 민한당에 입당하라는 것이 영 찜찜했다. 그런 뜻을 얘기하자 DJ는 “민한당에 들어가 헌 조직을 새롭게 만들면 된다”면서 “비록 민한당에 몸담고 있기는 하지만 김원기(金元基, 전 국회의장·제10·11·13·14·16·17대 국회의원) 의원 등은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DJ, “내 판단착오였다”
귀국해서 조윤형 전 의원 등과 민한당 입당 문제를 의논했다. 조 전 의원도 “오야붕이 하라니까 하기는 하겠지만…”이라면서도 선뜻 내켜 하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내게 민한당행(行)이 DJ의 뜻이 맞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DJ가 ‘접수’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민한당행을 지시했다고 확인해 주었다. 결국 우리는 민한당행을 택했다.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1985년 2·12총선에서 나는 옛 지역구인 종로-중구 지역구에 출마했다. 신민당의 이민우(李敏雨) 총재가 신민당 바람을 일으키겠다면서 종로-중구에서 출마했다. 유신 시절 두 번이나 나를 뽑아주었던 종로-중구였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차가웠다. 전두환 정권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정치규제에 묶였던 나지만, ‘민한당’ 후보라는 이유만으로 외면당했다. 초조해진 나는 유세에서 이민우 총재가 일제(日帝)시대에 친일(親日)행위를 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청중의 야유뿐이었다. 아무리 다급했어도 정치선배를 그런 식으로 공격하는 게 아니었다. 결국 나는 낙선(落選)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나와 조윤형 전 의원에게 민한당행을 강권했던 DJ는 막상 신민당이 만들어지자, 신민당 지지를 택했다는 점이었다. 그게 DJ 스타일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 반드시 도덕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권이나 당권을 잡기 위해서는, 깡패의 가랑이 밑을 기었던 한신(韓信)과 같은 마음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DJ는 “내가 신민당 돌풍을 보지 못했다. 그건 정말이지 나의 판단착오였다”면서 그때의 일에 대해 미안해했다. 그때 판단을 잘못해서 ‘사쿠라정당’에 들어갔던 것은 아직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DJ, “盧泰愚 당선시키는 일 없을 것”
1985년 2·12총선으로 분출된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는 결국 대통령직선제(直選制) 개헌 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89년 6월 민주화항쟁 끝에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자 YS와 DJ는 1980년에 이어 다시 갈라섰다. 후보단일화를 위한 줄다리기 끝에 DJ는 YS가 총재로 있는 통일민주당을 깨고 나와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DJ는 내게 평민당 대변인을 맡으라고 했다. 나는 후보단일화를 요구하면서 거절했다. DJ가 말했다.
“후보단일화는 꼭 할 거요. 늦어도 투표 전날까지는 반드시 단일화하겠소. 절대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겠소.”
하지만 후보단일화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나는 “DJ의 큰 양보를 이끌어내지 못해, 저지할 수 있었던 노태우 5년의 통치를 맞게 된 것을 크게 반성한다”는 성명을 내고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나는 평민당 후보로 출마해 서울 중구에서 당선됐다. 얼마 후 나는 평민당 정책위의장을 맡았다. 이어 5공(共) 청산 정국(政局)이 시작됐다. 나는 DJ에게 신군부에 의한 언론인 해직, 5공 시절의 언론통제 등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DJ는 내 말을 받아들여 국회 문교문화공보위원장을 맡으라고 했다.
나는 언론청문회에 언론사 사주(社主)들을 불러내려 했다. 많은 의원이 반대했다. 나는 “언론사 사주들을 불러내면 우리는 중상(重傷)이다. 하지만 불러내지 않으면 우리는 정치적으로 사망한다. 중상이 사망보다는 낫지 않나”라고 설득했다. 그때의 언론청문회는 과거 왜곡됐던 언론풍토를 되돌아보고, 바로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5공 청산 정국 물밑으로 3당 합당(合黨)이 추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당을 견제하라고 뽑아주었더니 여당과 야합을 한 것이다. ‘총성(銃聲) 없는 쿠데타’였다. 3당 합당에 합류하기를 거절한 이기택(李基澤, 전 민주당 총재·제7~10·12~14대 국회의원), 이부영(李富榮, 제14~16대 국회의원), 이철(李哲, 제12~14대 국회의원), 장기욱(張基旭, 제12·14대 국회의원), 장석화(張石和, 제13·14대 국회의원), 노무현(盧武鉉) 의원 등은 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른바 ‘꼬마민주당’이었다.
DJ와의 목동 담판
1992년의 총선과 대선이 다가오면서 ‘호남정당’이라는 색깔이 진한 평민당으로는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평생 야당생활을 하면서 민주화투쟁을 해온 수많은 동지를 생각했다. 정작 민주화가 되었는데도 정권교체를 하지 못해 그들의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권교체를 하려면 ‘꼬마민주당’과 통합해야만 했다. 노승환(盧承煥, 전 국회부의장·제8~10·12·13대 국회의원), 조윤형, 한영수(韓英洙, 제11·14·15대 국회의원), 오홍석(吳洪錫, 제10·11대 국회의원), 이형배(李炯培, 제11·13·15대 국회의원), 김덕규, 박실(朴實, 제12~14대 국회의원), 김종완(金鍾完, 제13~14대 국회의원) 의원 등과 함께 정치발전연구회(정발연)를 만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하나, ‘야권통합을 통한 정권교체’였다. 이를 위해 정발연은 ‘꼬마민주당’에 과감하게 양보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동교동 가신들을 비롯해 DJ충성파들은 우리를 곱게 보지 않았다. 깡패처럼 보이는 사내들이 당사 주변에 어슬렁거렸다. 이상수 의원은 당사에 들어가려다가 DJ충성파에 의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당사에 들어갈 때면 방송국 기자들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카메라를 든 기자가 옆에 따라붙으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야권통합 논의가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했다.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당의 명칭에서부터 1992년 총선에서 공천(公薦) 문제 등 걸림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1991년 8월 나는 조홍규 의원을 통해 DJ에게 독대(獨對)를 신청했다. 서울 목동에 있는 DJ의 친척집에서 DJ와 마주앉았다. 나는 간곡하게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모든 힘을 모아 야권통합부터 성사시켜야 합니다. 정기국회가 시작되는 9월 10일 이후로 통합을 미루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우리가 너무 불리해집니다. 야권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저는 내년 총선에서 유권자 앞에 설 면목이 없게 됩니다. 9월 10일까지 야권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저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내년 총선에 불출마하겠습니다.”
DJ는 앞에 놓인 양주병을 들어 내 앞에 놓인 큰 잔에 술을 가득 따른 후에, 자기도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는 DJ여서 깜짝 놀랐다. 술잔을 비운 DJ가 말했다. “정 의원,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정기국회가 시작되는 9월 10일까지는 야권통합을 하지.”
약속대로 DJ는 기득권을 내려놓다시피 하면서 ‘꼬마민주당’과의 통합을 이루어냈다. 그해 9월 10일 ‘꼬마민주당’과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대의를 위해서 한 일이기는 했지만, 나를 아껴준 정치 대선배를 그런 식으로 강박(强迫)한 것은 미안했다.
이듬해 제14대 공천을 앞두고 내홍이 있었다. DJ 가신들 사이에서 나와 조윤형 의원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희생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의정(議政)활동 불성실’이 명분이었지만, 실은 DJ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조윤형 의원은 공천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YS, “니, DJ하고 놀지 마라”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DJ는 YS에게 패배했다.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YS는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 김덕룡 의원을 통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한 식당에서 YS와 만났다. YS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이, 정 의원! 니 선거 빚 있제?”
잠자코 있는데 YS가 말을 이었다. “니, DJ하고 놀지 마라. 나하고 같이하면 총리도 할 수 있다.”
YS는 거기에 다음 총선에서 내게 전국구 5석을 추천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덧붙였다. 과거 두 번(신민당, 통일민주당) 총재로 모신 적이 있는 대선배가 그렇게 말하는데, 앉은 자리에서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중에 나는 김덕룡 의원 편에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신 것은 고맙지만, 민주당을 떠날 수는 없다”는 뜻을 전했다. 김덕룡 의원에 의하면, YS는 “정대철이가 진짜 좋은 놈인데, DJ한테 맨날 혼만 난데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확실히 DJ보다는 YS가 인간적이었다.
후일의 일이지만,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후보 측에서도 총리 자리를 제안해 온 적이 있다. 이 후보 측에서도 총리직과 함께 ‘전국구 5석에 대한 추천권’을 약속했다. 물론 거절했지만, ‘총리직+전국구 5석 추천권이 총리 영입 제안을 할 때 정해진 가격이라도 되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내게 그 제안을 하러 온 사람은 내가 웃은 이유를 몰랐을 것이다.
DJ의 대선 4修 정말 생각도 못 해
DJ가 떠난 후인 1993년 3월, 나는 김상현 의원 등과 함께 민주당 당권에 도전했다. 당장 당권을 쥐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다음의 정치적 도약을 생각해서 출마한 것이었다. 동교동계가 똘똘 뭉쳐서 이기택 대표를 지원하는 바람에 고배를 마셨다.
DJ가 영국으로 떠난 후 당시 민주당 의원들 가운데 십중팔구는 그의 정계은퇴를 진심으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양심이 있지, 3번이나 떨어졌던 사람이 어떻게 또 나오나”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해 7월 귀국한 DJ는 아태평화재단을 만드는 한편,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DJ는 내게 서울시장 출마를 권했다. 내심 1997년 대선 출마를 생각하고 있던 나는 서울시장 출마를 사양하고, 고건(高建)씨를 추천했다. DJ는 나중에 시장 후보로 조순(趙淳) 전 부총리를 선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DJ가 대선 4수에 도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DJ의 대선 출마 의지를 알았다면, 서울시장 출마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국민들은 DJ에 대해 식상해 하고 있었다. DJ가 정계에 복귀하면서 만든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여론조사를 하면 DJ는 이회창 신한국당(나중에 민주당과 통합하면서 한나라당으로 개칭) 후보에게 40%대 35%로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내가 나서면 이회창 후보를 40대 35로 앞서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사실 제15대 대선에서 이인제(李仁濟) 후보가 492만여 표를 가져가지 않았으면 DJ는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7년 5월, 나는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김상현 의원과 손을 잡고, 김 의원은 당권, 나는 대권에 도전한 것이다. 출마에 앞서 DJ를 찾아가서 양해를 구했다.
“사실 이번에 제가 경선에 나서는 것은 다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총재님께서도 단독 출마하시는 것보다는 경선을 통해 후보로 선출되시는 것이 더 모양이 좋지 않겠습니까?”
DJ는 기분 좋게 내 뜻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동교동 가신들은 달랐다. 그들은 몹시 불쾌해했다. 나를 보는 그들의 눈에서 증오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대선후보 경선에서 나는 21.8%를 득표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어 DJ는 JP와의 연대(連帶)를 통해 결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DJ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그의 당을 떠나지 않았던 나는 그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러나 DJ 측근들에게 나는 단단히 미움을 사고 있었다. DJ가 취임하기 전 나는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 강연에서 나는 “DJ는 호남 출신, 신체적 장애, 대권 4수, 고령(高齡)이라는 네 가지 약점을 극복하고 대통령이 됐다. 이는 정말 값진 성취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귀국해서 만난 한화갑(韓和甲) 원내총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내게 “어떻게 강연에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닐 수가 있느냐”고 힐난했다. 내가 “DJ는 호남 출신, 신체적 장애, 대권 4수, 고령이라는 약점이 있는데도 대통령이 됐다. 이건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DJ가 그런 약점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된 것을 찬양하는 얘기를 했는데, 정반대로 둔갑해 있었다. 누군가가 내가 한 말을 왜곡해서 퍼뜨린 것이 분명했다. 내가 사정을 설명하자 한 원내총무는 “아, 그런 거였느냐?”면서 수긍했다. 하지만 ‘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성사건은 청와대 실세의 작품
1998년 5월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를 맡은 것도 그런 상황 속에서 잠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보복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경성그룹 브로커로 활동하던 보원건설 이재학 사장으로부터 경성 측이 추진 중인 부동산신탁 개발사업과 관련, 각계 요로에 청탁을 넣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4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이재학 사장과는 친분이 있었다. 자유당 정권 시절 국회부의장을 지낸 이재학씨의 아들이 내 친구였다. 그가 “내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라면서 이재학 사장을 소개해 줬다. 검찰의 1차 조사에서는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검찰은 조사를 계속했고, 나는 결국 기소됐다. 검찰은 1년 동안 270여 번이나 이재학 사장을 불렀다. 나는 검찰의 그런 행위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내 주장을 받아들였다.
후일 노무현 정권 시절, 나는 굿모닝시티 사건으로 복역하면서 교도소에서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이던 박주선(朴柱宣, 현 국회의원)씨를 만나 그때의 상황을 듣게 됐다. 그는 “당시 청와대 실세(實勢)였던 모(某)씨가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와 임창렬(林昌烈) 경기도지사를 제거하기 위해 검찰을 압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학 사장은 나중에 “검찰에서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조사를 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만사가 귀찮아서 검찰이 요구하는 대로 진술한 것”이라고 실토했다.
경성사건으로 구속되어 수감되어 있을 때였다. DJ의 장남 김홍일 의원이 면회를 왔다. 나는 전에 그에게 공천을 주는 데 반대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나를 잡아넣는 데 일조한 것으로 오해할까 봐 찾아왔다고 했다. 나는 그런 오해는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징표로 시계를 바꾸어 차자”고 말했다.
원래 재소자는 시계를 찰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나는 법대 동기인 김경한(金慶漢, 전 법무부 장관) 법무부 교정국장에게 재소자도 시계를 찰 수 있게 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김 국장은 “재소자가 시계알을 삼키고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어서 시계착용을 금지하고 있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정대철이가 자살할 사람으로 보이냐? 시계가 있으면 재소자들이 좀 더 계획성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편지를 다시 보냈다. 결국 교정당국에서는 알이 큰 1만원짜리 전자시계를 교도소 내에서 구매해 착용할 수 있게 제도를 바꾸었다. 이런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교도소에서 파는 시계를 ‘정대철시계’라고 불렀다.
김홍일 의원의 제안으로 우리는 시계를 바꾸어 찼다. 그러자 교도관이 제지하고 나섰다. 그러면 허락 없이 외부 물품을 반입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로 각자 차고 있던 시계로 바꾸어 찼다. 내가 출감한 후, 우리는 교도소에서 약속했던 대로 다시 시계를 바꾸었다. 그 시계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李憲宰와 김한길
DJ에게 내가 추천해 준 사람이 두 명 있다. 이헌재(李憲宰) 전 경제부총리와 김한길 현 민주당 대표가 그 사람이다. 이헌재 전 부총리는 고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나는 IMF사태 극복을 위해 고심하고 있던 그를 만났다.
“훌륭한 경제전문가가 있습니다. 진의종(陳懿鍾) 전 국무총리의 사위로 저와는 친한 친구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요?”
“이회창 캠프에 있었습니다.”
DJ는 “한번 데려와 보라”고 했다. 며칠 후 이헌재를 데리고 DJ의 일산자택으로 찾아갔다. 아침 7시 반쯤이었을 것이다. 김중권 당선자 비서실장, 김한길 당선자 공보팀장 등이 동석했다. DJ는 경제현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한참 이야기한 후 “그렇죠?”라면서 이헌재의 동의를 구했다. 그런데 이헌재는 “아닙니다”라면서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DJ와 이헌재 사이에 경제토론이 시작됐다. 나는 10시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두 사람이 그날 오후 2시까지 토론을 했다고 한다. 당시 자민련 부총재이던 김용환(金龍煥) 전 재무부 장관도 이헌재를 DJ에게 추천했다고 들었다. 이후 이헌재는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 초대(初代)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노무현 정권에서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다.
김한길 대표는 가수 조영남과 함께 나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따랐었다. 국회 문공위원장 시절 취직을 부탁하기에 강원룡(姜元龍) 당시 방송위원장에게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의 아들인데, 써보라”며 추천했다.
김한길씨는 방송위원회에서 국장, 사무총장 직무대리 등을 하다가 “정치를 하겠다”면서 방송위에서 나왔다. DJ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는데, 그때는 DJ의 눈에 들지 못했다. 이후 그는 MBC TV <김한길과 사람들>을 맡으면서 방송진행자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 DJ가 “요즘 방송에서 날리는 김한길이 그때 정 의원이 소개했던 그 사람이냐? 데리고 오라”고 했다. 이후 김한길씨는 1997년에는 대선 방송대책팀장으로 활약했고, DJ정권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盧武鉉 選對위원장
경성사건은 내내 나의 발목을 잡았다. 이 사건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서 2002년 대선 때에는 출마조차 할 수 없었다. 노무현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결정된 며칠 후, 아침 6~7시경인데 벨이 울렸다. 나가 보니 노무현 후보였다. 집 안으로 들어온 그는 “아직 밥을 안 먹었다”면서 아침식사를 청했다. 아침상을 내오자 그는 맥주까지 달라고 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타워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김원기 의원이 합석했다. 노무현 후보는 내게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당시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큰 차이로 뒤지고 있을 때였다. 당내에서도 내심 자기가 노 후보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내가 선대위원장 제안을 거절하면, “정대철마저 노무현을 버렸다”는 얘기가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같은 당을 하는 입장에서 도와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선대위원장을 맡은 나는 동요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정대철이를 봐서라도 당에 남아달라”며 붙들었다. 나 이외에도 조순형(趙舜衡) 의원, 추미애(秋美愛) 의원 등에게도 선대위원장 직함을 줘서 복수(複數)선대위원장 체제를 만들었다.
내가 선대위원장으로 특히 신경을 쓴 일 가운데 하나는 노무현 후보의 심기관리였다. 노 후보는 상당히 예민한 사람이었다. 어떤 문제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잉반응을 보이는 일이 있었다.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종교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나는 경기고 동기인 이재정(李在禎) 성공회 신부를 불렀다. 그는 정몽준(鄭夢準)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 등 고비마다 노무현 후보의 곁에서 기도를 하면서, 노 후보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대선 전날, 정몽준 의원이 노무현 후보의 이념적 정체성(正體性)을 이유로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撤回)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모두 그걸로 대선은 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노 후보에게 “정몽준 의원 집으로 가자”고 했다. 노 후보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나는 정 의원 집으로 가서 생중계하는 TV카메라 앞에 서서 국민들에게 동정표라도 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노 후보를 잡아끌었다. 정몽준 의원 집 앞에 선 노 후보 뒤에서 이재정 신부가 기도를 했다. 눈물이 났다. 아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재정 신부를 통일부 장관으로 중용한 것은 어려웠을 때 자신의 곁에서 위안이 되어준 데 대한 고마움의 뜻도 있었을 것이다.
盧武鉉, 당선되자 책상에 머리를 꽝 박으며…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날, 나와 김원기 의원을 불렀다. 삼청동에 있는 안가(安家)에서였다. 노 당선자는 우리가 자리에 앉자, 벌떡 일어나더니 장난치듯이 테이블을 머리로 “꽝” 소리가 나게 내리받았다. 그가 말했다.
“형님들, 감사합니다. 땅에 엎드려 절해야겠지만, 우선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그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님들, 1년만 제게 자유를 주십시오.”
한마디로 한 1년 동안은 자기 마음대로 정치를 하겠으니, 잔소리하지 말아달라는 얘기였다. 노 당선자는 “두 분을 임기 중에 한번씩 모시겠다”는 얘기도 했다. 국무총리 자리를 맡기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훗날 굿모닝시티 사건으로 교도소에 가 있으면서 나는 속으로 ‘여기가 총리실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자유를 달라’던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서툴고 경륜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노무현 정권 시절 국회의장을 지낸 김원기 의원에게 “노무현 대통령과 제대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얘기를 하기는 했는데…”라고 했다. 그도 노무현 대통령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는 얘기였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나는 대미(對美)특사단장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후보 시절 그는 정제되지 않은 반미(反美) 감정을 표출하곤 했다. 1994년 제1차 북핵(北核)위기 당시 미국이 한국에 알리지도 않고 북한을 공격하려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그는 “형, 이게 나라입니까?”라며 분개하기도 했다. 그런 그를 나는 “정권을 유지하려면 미국의 힘이 필요하고,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달랬다.
미국에서 나는 딕 체니 부통령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만났다. 파월 장관은 뒷방에서 단둘이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는 “나는 당신을 잘 안다”고 하더니 “그는 괜찮나?(Is he all right?)”라고 물었다.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파월은 이 질문을 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나도 웃으면서 “나를 믿어라(Believe me)”라고 답했다. 파월은 “당신이 있는 한, 당신이 연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겠다”고 말했다.
그해 4월 리언 라포트 장군이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오산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타워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체니 부통령과 파월 국무장관이 한국에 부임하면 귀하를 만나라고 했다”면서 정중히 부임인사를 했다. 우리는 캔맥주를 마시면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미국 측은 나를 한미우호관계를 유지해 줄 수 있는 중요인물(key man)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 나는 다시 정치적 풍파에 말려드는 바람에 그러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느닷없는 굿모닝시티 사건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자 한화갑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은 “노무현 후보에게 반대했던 내가 당 대표를 계속 맡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면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2002년 4월 대표 경선에서 차점으로 최고위원이 된 내가 당 대표가 됐다.
내가 대표가 된 후에도 당은 동교동계 등 구(舊)주류와 노무현 직계 세력 간의 갈등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 직계 세력에게 일정한 발언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양측의 의견을 조정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구주류인 박상천 의원 등의 태도는 완강했다. 결국 노무현 직계 세력은 열린우리당 창당 수순으로 들어갔다. 허탈했다.
나는 측근 참모들과 거취를 의논했다. 대부분 눈물을 흘리면서 민주당에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열린우리당으로 가면, 반드시 정치자금 위반 같은 걸로 엮어서 소리 없이 제거당할 것입니다. 가면 안 됩니다.”
가깝게 지내던 이철(李哲) 전 의원도 열린우리당행을 말렸다. 하지만 나는 ‘내가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다. 대통령이 자기 정치를 하기 위해 새로운 당을 만들어야겠다는데, 함께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김원기·이해찬(李海瓚) 의원 등은 “신당(新黨)을 만들더라도 당 대표는 정 대표가 계속 맡게 될 것”이라고 언질을 주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굿모닝시티 사건이 터진 것이다.
내가 굿모닝시티 윤창렬 대표로부터 받았다는 돈은 노무현 후보를 위해 모은 정치자금으로 이상수 당시 사무총장이 수령해 영수증까지 발부한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은 형(刑)을 감경(減輕)해 주겠다고 윤 대표를 회유해서 내게 대가성 자금을 주었다고 허위진술하게 만들었다. 기대와는 달리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윤창렬 대표는 2심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1심에서의 진술을 번복했다. 우리 측은 윤창렬 대표에게 법정에서 다시 한 번 양심선언을 해줄 것을 요구했고, 윤 대표는 이에 응해 주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재판장은 “피고 정대철의 회유에 의해 진술을 번복했다”고 보았다. 결국 나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나로서는 천추(千秋)의 한(恨)이었다. 당시 서울지검 특수2부장으로 이 사건을 수사한 사람이 채동욱(蔡東旭) 전 검찰총장이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아들 호준이가 면회를 왔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와서 일을 하라고 한다”면서 내 의사(意思)를 물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내가 고단한 처지에 빠지자 집안을 수습하겠다고 귀국했었다. 꼭 27년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호준이가 후일 정치를 하더라도, 삼성전자에서 IT 관련 일을 하고 있던 그가 우선 자기 분야에서 좀 더 인정을 받고, 학위를 마친 후 하게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미 정치에 뜻을 둔 아들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아들은 3년간 청와대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끼인 世代’의 悲哀
그렇게 나의 정치인생은 끝나고 말았다. 1977년 제9대 국회부터 시작해서 10, 13, 14, 16대에 이르기까지 5선을 기록했고, 한때는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운(時運)이 따라주지 않았다. 1987년 제13대 대선 이후 YS, DJ시대가 지나치게 길어지면서 나를 비롯해 김상현 전 의원,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등은 대권 도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중간에 낀 세대(世代)로서 뛸 기회가 없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요즘도 이기택 전 총재를 만나면 나는 “형은 뭐 했수?”라고 묻는다. 그러면 이 전 총재는 “그럼 너는 뭐 했냐?”고 되받는다. 그러고는 “우리는 제대로 된 경선 한 번 해보지 못했어”라거나, 화투판 용어를 빌려 “너나 나는 한 번 쫘 보지도 못했다”며 허허롭게 웃는다.
혹자는 나를 두고 “권력의지가 약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DJ와 호남이 일체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DJ를 강하게 들이받기도 어려웠다. DJ를 밀어내는 것은 곧 우리 정치에서 오랫동안 당하고 소외당해 온 호남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우리 정치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호남 출신이 정권을 한 번은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 때문에 DJ와 부딪히면서도 그의 당을 한 번도 떠나지 못했다. 내 못다 한 꿈은 아들 호준이가 이어가고 있다.⊙
그해 8월 YH사태가 발생했다.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이 폐업(閉業)하자 이 회사 노조원들이 신민당사에 쳐들어와 농성을 하면서 회사 정상화를 요구한 것이다. 노조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흘 만인 8월 11일, 경찰이 당사에 난입해 노조원들을 강제 연행했다. 경찰은 합판으로 된 벽을 뜯어내고 총재실로도 들이닥쳤다. 당시 총재실 안에 국회의원은 나와 이상민 의원 두 사람밖에 없었다. 나와 이 의원은 YS를 감싸고 웅크렸다. 경찰은 우리 두 사람을 군홧발로 걷어차고 곤봉세례를 퍼부었다. 한참 후에 경찰간부 하나가 나타나 짐짓 “총재님하고 의원님들께 이러면 되느냐?”고 야단을 친 후, 우리를 풀어주었다.
이어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YS의 국회의원직 박탈을 감행했다. 정말 살벌하던 시절이었다. 이영덕 《조선일보》 기자는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내게 “조심하라”고 말했다. 야당의원 혼자 돌아다니다가는 꼭 테러라도 당할 것 같아서 몇 사람씩 모여서 식사를 같이했다. 그런 상황은 10·26사태가 나고서야 끝났다.
5·18, YS 집에서 담 넘어 피신
12·12사태 이후 군부(軍部)의 동향이 수상쩍기는 했지만, 그래도 세상의 흐름은 민주화를 향해 한 발자국씩 전진하는 듯했다. 유신 시절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구속·투옥됐던 사람들이 석방됐고, 김대중(DJ)씨도 정치활동을 재개(再開)했다. DJ는 신민당 입당(入黨) 문제를 놓고 YS와 줄다리기를 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됐다.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라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광주(光州)에서는 민주화와 DJ 석방을 요구하는 항쟁이 벌어졌다.
계엄확대 조치가 발표된 직후인 5월 18일, 나는 향후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상도동 YS댁으로 갔다. 최형우(崔炯佑, 전 내무부 장관·제8~10·13~15대 국회의원)·김동영(金東英, 전 정무제1장관·제9·10·12·13대 국회의원)·황낙주(黃珞周, 전 국회의장·제8~10·12~15대 국회의원) 의원, 김덕룡(金德龍, 전 정무장관·제13~17대 국회의원) 비서 등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렇다 할 대안 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최형우 의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동생, 자네 집에 헌병이 자네를 잡으러 갔대!”
YS가 “빨리 피신시켜라. 다들 가진 돈 다 내놔라. 옷 벗어줘라”고 말했다. YS도 안으로 들어가 사모님에게서 돈을 받아가지고 나왔다. 허름한 점퍼를 얻어 입고 밀짚모자를 썼다. 담장을 넘는데 아래를 보니 YS가 내 발을 받쳐주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잠실에 있는 외사촌형 집으로 피신했다. 가끔 조홍규(趙洪奎, 제 13~15대 국회의원), 김덕규(金德圭, 전 국회부의장·제11·13·14·16·17대 국회의원) 신민당 전문위원을 불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달을 그렇게 숨어 있었다. 답답했다.
수배자를 놓아준 경찰서장
참다못한 나와 조홍규 전문위원은 어느 날 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거리로 나왔다. 길거리 벽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현상수배자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내란음모집단’의 ‘대변인’이라고 되어 있었다.
우리는 잠실 새마을시장 근처 포장마차 구석에서 소주를 마셨다. 알코올이 뱃속으로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짜릿한 소주맛에 취하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술을 마시는데, 반대편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놀랐지만, 상대방도 나 못지않게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은 바로 내 지역구인 서울 중구를 관할하는 중부경찰서 서장과 정보과장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이렇게 잡혀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 곁을 스쳐가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안 본 걸로 하겠습니다.”
후일, 당시의 경찰서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관할 지역의 현역 의원을 내 손으로 잡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함께 있는 정보과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슬쩍 정보과장의 속을 떠보니,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의원님을 못 본 척한 거였습니다.”
얼마 후부터는 도피 중이던 조윤형(趙尹衡, 전 국회부의장·제5~8·13·14대 국회의원), 박종률(朴鍾律, 제8·11~13대 국회의원) 전 의원이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내 피신처로 놀러 오기도 했다. 이를 수상하게 생각한 아파트 주민이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이 달려왔지만, 아파트 경비원이 미리 귀띔을 해준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도피생활을 하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바깥소식이었다. 계엄당국의 검열을 받는 국내 언론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나는 운전기사에게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아사히신문》 같은 외신들을 구해 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그만 불심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딱 봐도 그런 외국 신문을 읽을 만한 사람이 아닌지라, 운전기사는 경찰에 연행됐다. 나는 몸을 피했지만, 그의 안전이 걱정이 됐다. 도피 중이었지만, 나는 유흥수(柳興洙, 제12·14·15대 국회의원) 치안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선처를 부탁했다. 그는 고등학교 4년 선배였다. 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곧 내보내지요. 정 의원께서도 몸조심하세요.”
그 살벌했던 시절에 인정을 보여준 유흥수 전 치안본부장, 중부경찰서장과 정보과장, 아파트 경비원, 그들의 고마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玄鴻柱, “(全斗煥 정권) 아마 20년 이상은 가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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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홍주 전 안기부 차장. |
전두환 정권은 5·17 직후 설치되어 초헌법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대신해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었다. 입법회의 출범을 앞둔 어느 날 현홍주(玄鴻柱, 전 법제처장·주미대사) 안기부 차장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그는 내 고등학교 친구의 자형(姊兄)이었다. 현 차장은 나와 함께 오세응(吳世應, 전 국회부의장·제8~12·14·15대 국회의원) 신민당 의원도 불렀다. 오 의원은 나의 고교 10년 선배이기도 했다. 현 차장이 말했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어요.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런 시대가 과거 18년처럼 길게 가지 말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20년 이상은 가게 될 것입니다. 두 분은 일단 우리의 기준으로 선발된 것을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입법의원이 되어주십시오. 거절하면 정치활동을 못 하게 될 것입니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즉각 거절했다.
“첫째, 나는 기본적으로 5·17군사쿠데타를 반대합니다. 둘째, 나나 조윤형 씨같이 부친의 유업(遺業)을 물려받은 의원들을 가볍게 바람막이로 활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군사정권이지만, 정권을 오래 유지하려면 건전한 야당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야당에 남겠습니다. 셋째, 지금 내가 여당으로 가면 국가적 손실이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는 조종사 한 사람을 키우는 데 600만 달러가 든다고 합니다. 내가 군사정권의 입법의원이 되면 두 번 정도는 의원생활을 하겠지만, 이후에는 유권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신군부의 얼굴 마담이 되기에는 이 정대철이가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현홍주 차장은 나를 더 붙잡지 않았다. 오세응 의원은 이후 민주정의당에 들어가 여당의원의 길을 걸었다.
아내의 ‘햇볕정책’
이후 나는 전두환 정권이 제정한 ‘정치풍토쇄신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묶였다. 거기에 더해 가택연금(軟禁)까지 당했다. 우리 집에는 나를 감시하기 위해 형사들이 상주(常駐)했다. 내가 태권도 유단자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인지, 태권도와 유도 유단자 세 명을 보내 감시하게 했다. 그들은 아예 응접실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들을 볼 때마다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이오? 이렇게 남의 집 거실까지 들어와도 되는 거요? 해도 너무하지 않소? 염치도 없이…”
이렇게 내가 언성을 높이면, 아내는 나를 얼른 서재로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줬다. 그리고 나를 감시하러 나온 형사들에게는 냉장고를 털어서 식사대접을 해주었다. 마실 것도 내 오고, 간식도 내 주었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구해다가 찌개를 끓여주기도 했다. 거기에 소주대접까지….
그들도 미안했는지, 아내가 자기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눈치가 보이면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그러면 아내는 밖으로 나가 그들의 소매를 끌고 들어왔다. 나중에 형사들은 아예 골목 밖 먼발치로 물러났다. 아내 덕분에 한때 우리 집 응접실까지 차고 앉았던 형사들을 자연스럽게 쫓아낸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옛 야당의원들이 우리 집을 드나드는 것도 좀 더 수월해졌다. 아내의 ‘햇볕정책’이 성공한 것이다. 위기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1982년 12월, 전두환 정권은 복역 중이던 DJ의 도미(渡美)를 허락했다. 명분은 신병(身病)치료였지만, 사실상의 망명(亡命)이었다. DJ가 출국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국회의원 출마 때문에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신영(盧信永) 안기부장에게 미국행 여권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노 부장은 아버지가 외무부 장관 시절 제네바총영사를 지내 교분이 있었다. 얼마 후 노 부장은 전화를 걸어와 미국에 가도 좋다고 알려왔다. 1984년 나는 미국 미주리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DJ, “鄭大哲은 30년 담배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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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정일형·원안)는 1971년 대선 당시 DJ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
이후에도 그는 우리 집을 곧잘 찾아왔다. 우리 집에 올 때면 그는 정계 대선배인 아버지 앞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면서, 대학생이던 내 방에 와서 담배를 피우곤 했다. 훗날 야당 총재 시절에 DJ가신(家臣)이나 다른 정치인들은 감히 DJ 앞에서 담배를 꺼내들 생각을 못했지만, 나는 예외였다. DJ는 “정 의원은 나와 30년 담배친구”라면서 내게 담배를 주곤 했다.
DJ와 YWCA 총무이던 이희호(李姬鎬) 여사를 연결시켜 준 사람은 어머니(이태영)였다. 어머니는 “DJ가 내게 ‘이희호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소개해 줬지. 나중에 알고 보니 뒤에서 자기들끼리 다 연애해 놓고서 나보고 정식으로 소개해 달라고 한 거였어. 내가 그것들에게 속았던 것 같아”라며 웃었다.
내가 본 젊은 시절의 DJ는 부지런하고 명석한 사람이었다. DJ는 야당의원으로서는 드물게 월남파병이나 한일회담 등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신민당 내 ‘강경파’로 꼽히던 아버지는 그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렇게 온건한 정치인이던 DJ를 ‘강경파’로 만든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다. 아버지는 DJ를 두고 “참 똑똑한 사람”이라면서 “좀 더 다듬어지면 큰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DJ를 마뜩지 않게 여기던 아버지였지만, 1971년 DJ가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후 아버지는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아버지는 “내가 DJ와 보따리를 바꾸어 멨다”고 말했다. 민주화투쟁에서 DJ가 앞장을 서고, 당신은 뒤에서 최선을 다해 뒷받침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정계의 원로(元老)였지만 ‘장강(長江)의 뒷물결’이 밀려올 때 당신의 자리를 비켜줄 줄 아는 분이었다.
어머니도 DJ의 부탁으로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을 그만두고 DJ를 위해 선거유세를 했다. 대선을 앞두고 DJ집에서 의문의 폭발사건이 있었다. 그러자 우리 집에도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후 우리 집에서도 화재가 발생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모아놓은 1만2000권이 넘는 장서(藏書)와 유엔 관련 자료, 어머니가 모아둔 여성운동사 자료들이 불에 타버렸다. 소방서에서는 “고양이 몸에 불이 붙어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한동안 어머니는 밖에서 자기소개를 할 일이 있을 때면 “고양이가 불낸 집 안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1971년 대선 후 DJ는 어머니에게 신민당 전국구 의원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데 당신까지 국회의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사양했다.
이후 1970년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부모님은 늘 DJ와 함께했다. 아버지는 1973년 DJ납치사건 후에는 국회에서 “DJ 납치는 중앙정보부가 한 일 아닌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지 말라”며 중앙정보부를 규탄했다. 1976년 명동사건 때에도 부모님은 DJ와 함께 고초를 겪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 때, 그 서슬 퍼런 상황 속에서 어머니는 법정에 나가서 “김대중이는 빨갱이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DJ가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1977~78년, 국회의원이 된 나는 이희호 여사, 권노갑·김옥두 비서와 함께 면회를 다녔다. 면회가 허락되지 않으면, 우리는 교도소 담장 밖에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소리쳤다. 나중에 DJ는 그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DJ, 민한당行 권유
그런 사이였기에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나는 틈틈이 DJ를 만났다. DJ가 찾으면 가서 자문(諮問)에 응하는 식이었다.
미국에서의 첫 만남에서 DJ는 “미국으로 올 때, 전두환 정권에 ‘미국에 가서 일체의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약속을 어떻게 지키느냐? 구애받지 마시고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DJ는 일본에서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1989년에 한국민주통일연합으로 개칭) 등과 민주화운동을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나는 “일본에는 조총련 등 좌익세력들이 있으니 민주화운동을 할 때에는 그런 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DJ는 나의 그런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은 게 아닌가 싶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민한당(민주한국당) 입당 문제를 의논했다. DJ는 내게 “민한당이 시작은 ‘사쿠라정당’이었지만, 결국 다음 총선(總選)에서 제1야당이 될 것”이라면서 “귀국하거든 조윤형 전 의원과 함께 민한당에 입당해서 당을 접수하라”고 했다.
그때는 정치규제에서 풀린 인사들이 신한민주당(신민당)을 만들기 전이었다. DJ의 말이기는 했지만 관제(官製)야당인 민한당에 입당하라는 것이 영 찜찜했다. 그런 뜻을 얘기하자 DJ는 “민한당에 들어가 헌 조직을 새롭게 만들면 된다”면서 “비록 민한당에 몸담고 있기는 하지만 김원기(金元基, 전 국회의장·제10·11·13·14·16·17대 국회의원) 의원 등은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DJ, “내 판단착오였다”
귀국해서 조윤형 전 의원 등과 민한당 입당 문제를 의논했다. 조 전 의원도 “오야붕이 하라니까 하기는 하겠지만…”이라면서도 선뜻 내켜 하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내게 민한당행(行)이 DJ의 뜻이 맞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DJ가 ‘접수’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민한당행을 지시했다고 확인해 주었다. 결국 우리는 민한당행을 택했다.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1985년 2·12총선에서 나는 옛 지역구인 종로-중구 지역구에 출마했다. 신민당의 이민우(李敏雨) 총재가 신민당 바람을 일으키겠다면서 종로-중구에서 출마했다. 유신 시절 두 번이나 나를 뽑아주었던 종로-중구였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차가웠다. 전두환 정권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정치규제에 묶였던 나지만, ‘민한당’ 후보라는 이유만으로 외면당했다. 초조해진 나는 유세에서 이민우 총재가 일제(日帝)시대에 친일(親日)행위를 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청중의 야유뿐이었다. 아무리 다급했어도 정치선배를 그런 식으로 공격하는 게 아니었다. 결국 나는 낙선(落選)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나와 조윤형 전 의원에게 민한당행을 강권했던 DJ는 막상 신민당이 만들어지자, 신민당 지지를 택했다는 점이었다. 그게 DJ 스타일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 반드시 도덕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권이나 당권을 잡기 위해서는, 깡패의 가랑이 밑을 기었던 한신(韓信)과 같은 마음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DJ는 “내가 신민당 돌풍을 보지 못했다. 그건 정말이지 나의 판단착오였다”면서 그때의 일에 대해 미안해했다. 그때 판단을 잘못해서 ‘사쿠라정당’에 들어갔던 것은 아직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DJ, “盧泰愚 당선시키는 일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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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나는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
“후보단일화는 꼭 할 거요. 늦어도 투표 전날까지는 반드시 단일화하겠소. 절대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겠소.”
하지만 후보단일화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나는 “DJ의 큰 양보를 이끌어내지 못해, 저지할 수 있었던 노태우 5년의 통치를 맞게 된 것을 크게 반성한다”는 성명을 내고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나는 평민당 후보로 출마해 서울 중구에서 당선됐다. 얼마 후 나는 평민당 정책위의장을 맡았다. 이어 5공(共) 청산 정국(政局)이 시작됐다. 나는 DJ에게 신군부에 의한 언론인 해직, 5공 시절의 언론통제 등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DJ는 내 말을 받아들여 국회 문교문화공보위원장을 맡으라고 했다.
나는 언론청문회에 언론사 사주(社主)들을 불러내려 했다. 많은 의원이 반대했다. 나는 “언론사 사주들을 불러내면 우리는 중상(重傷)이다. 하지만 불러내지 않으면 우리는 정치적으로 사망한다. 중상이 사망보다는 낫지 않나”라고 설득했다. 그때의 언론청문회는 과거 왜곡됐던 언론풍토를 되돌아보고, 바로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5공 청산 정국 물밑으로 3당 합당(合黨)이 추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당을 견제하라고 뽑아주었더니 여당과 야합을 한 것이다. ‘총성(銃聲) 없는 쿠데타’였다. 3당 합당에 합류하기를 거절한 이기택(李基澤, 전 민주당 총재·제7~10·12~14대 국회의원), 이부영(李富榮, 제14~16대 국회의원), 이철(李哲, 제12~14대 국회의원), 장기욱(張基旭, 제12·14대 국회의원), 장석화(張石和, 제13·14대 국회의원), 노무현(盧武鉉) 의원 등은 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른바 ‘꼬마민주당’이었다.
DJ와의 목동 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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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나는 노승환 의원(오른쪽 끝) 등과 정발연을 만들어 야권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
하지만 동교동 가신들을 비롯해 DJ충성파들은 우리를 곱게 보지 않았다. 깡패처럼 보이는 사내들이 당사 주변에 어슬렁거렸다. 이상수 의원은 당사에 들어가려다가 DJ충성파에 의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당사에 들어갈 때면 방송국 기자들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카메라를 든 기자가 옆에 따라붙으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야권통합 논의가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했다.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당의 명칭에서부터 1992년 총선에서 공천(公薦) 문제 등 걸림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1991년 8월 나는 조홍규 의원을 통해 DJ에게 독대(獨對)를 신청했다. 서울 목동에 있는 DJ의 친척집에서 DJ와 마주앉았다. 나는 간곡하게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모든 힘을 모아 야권통합부터 성사시켜야 합니다. 정기국회가 시작되는 9월 10일 이후로 통합을 미루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우리가 너무 불리해집니다. 야권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저는 내년 총선에서 유권자 앞에 설 면목이 없게 됩니다. 9월 10일까지 야권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저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내년 총선에 불출마하겠습니다.”
DJ는 앞에 놓인 양주병을 들어 내 앞에 놓인 큰 잔에 술을 가득 따른 후에, 자기도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는 DJ여서 깜짝 놀랐다. 술잔을 비운 DJ가 말했다. “정 의원,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정기국회가 시작되는 9월 10일까지는 야권통합을 하지.”
약속대로 DJ는 기득권을 내려놓다시피 하면서 ‘꼬마민주당’과의 통합을 이루어냈다. 그해 9월 10일 ‘꼬마민주당’과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대의를 위해서 한 일이기는 했지만, 나를 아껴준 정치 대선배를 그런 식으로 강박(强迫)한 것은 미안했다.
이듬해 제14대 공천을 앞두고 내홍이 있었다. DJ 가신들 사이에서 나와 조윤형 의원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희생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의정(議政)활동 불성실’이 명분이었지만, 실은 DJ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조윤형 의원은 공천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YS, “니, DJ하고 놀지 마라”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DJ는 YS에게 패배했다.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YS는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 김덕룡 의원을 통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한 식당에서 YS와 만났다. YS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이, 정 의원! 니 선거 빚 있제?”
잠자코 있는데 YS가 말을 이었다. “니, DJ하고 놀지 마라. 나하고 같이하면 총리도 할 수 있다.”
YS는 거기에 다음 총선에서 내게 전국구 5석을 추천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덧붙였다. 과거 두 번(신민당, 통일민주당) 총재로 모신 적이 있는 대선배가 그렇게 말하는데, 앉은 자리에서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중에 나는 김덕룡 의원 편에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신 것은 고맙지만, 민주당을 떠날 수는 없다”는 뜻을 전했다. 김덕룡 의원에 의하면, YS는 “정대철이가 진짜 좋은 놈인데, DJ한테 맨날 혼만 난데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확실히 DJ보다는 YS가 인간적이었다.
후일의 일이지만,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후보 측에서도 총리 자리를 제안해 온 적이 있다. 이 후보 측에서도 총리직과 함께 ‘전국구 5석에 대한 추천권’을 약속했다. 물론 거절했지만, ‘총리직+전국구 5석 추천권이 총리 영입 제안을 할 때 정해진 가격이라도 되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내게 그 제안을 하러 온 사람은 내가 웃은 이유를 몰랐을 것이다.
DJ의 대선 4修 정말 생각도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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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5월 19일 새국민회의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DJ가 나와 김상현 후보의 손을 들어올리며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
DJ가 영국으로 떠난 후 당시 민주당 의원들 가운데 십중팔구는 그의 정계은퇴를 진심으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양심이 있지, 3번이나 떨어졌던 사람이 어떻게 또 나오나”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해 7월 귀국한 DJ는 아태평화재단을 만드는 한편,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DJ는 내게 서울시장 출마를 권했다. 내심 1997년 대선 출마를 생각하고 있던 나는 서울시장 출마를 사양하고, 고건(高建)씨를 추천했다. DJ는 나중에 시장 후보로 조순(趙淳) 전 부총리를 선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DJ가 대선 4수에 도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DJ의 대선 출마 의지를 알았다면, 서울시장 출마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국민들은 DJ에 대해 식상해 하고 있었다. DJ가 정계에 복귀하면서 만든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여론조사를 하면 DJ는 이회창 신한국당(나중에 민주당과 통합하면서 한나라당으로 개칭) 후보에게 40%대 35%로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내가 나서면 이회창 후보를 40대 35로 앞서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사실 제15대 대선에서 이인제(李仁濟) 후보가 492만여 표를 가져가지 않았으면 DJ는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7년 5월, 나는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김상현 의원과 손을 잡고, 김 의원은 당권, 나는 대권에 도전한 것이다. 출마에 앞서 DJ를 찾아가서 양해를 구했다.
“사실 이번에 제가 경선에 나서는 것은 다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총재님께서도 단독 출마하시는 것보다는 경선을 통해 후보로 선출되시는 것이 더 모양이 좋지 않겠습니까?”
DJ는 기분 좋게 내 뜻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동교동 가신들은 달랐다. 그들은 몹시 불쾌해했다. 나를 보는 그들의 눈에서 증오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대선후보 경선에서 나는 21.8%를 득표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어 DJ는 JP와의 연대(連帶)를 통해 결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DJ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그의 당을 떠나지 않았던 나는 그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러나 DJ 측근들에게 나는 단단히 미움을 사고 있었다. DJ가 취임하기 전 나는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 강연에서 나는 “DJ는 호남 출신, 신체적 장애, 대권 4수, 고령(高齡)이라는 네 가지 약점을 극복하고 대통령이 됐다. 이는 정말 값진 성취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귀국해서 만난 한화갑(韓和甲) 원내총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내게 “어떻게 강연에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닐 수가 있느냐”고 힐난했다. 내가 “DJ는 호남 출신, 신체적 장애, 대권 4수, 고령이라는 약점이 있는데도 대통령이 됐다. 이건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DJ가 그런 약점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된 것을 찬양하는 얘기를 했는데, 정반대로 둔갑해 있었다. 누군가가 내가 한 말을 왜곡해서 퍼뜨린 것이 분명했다. 내가 사정을 설명하자 한 원내총무는 “아, 그런 거였느냐?”면서 수긍했다. 하지만 ‘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성사건은 청와대 실세의 작품
1998년 5월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를 맡은 것도 그런 상황 속에서 잠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보복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경성그룹 브로커로 활동하던 보원건설 이재학 사장으로부터 경성 측이 추진 중인 부동산신탁 개발사업과 관련, 각계 요로에 청탁을 넣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4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이재학 사장과는 친분이 있었다. 자유당 정권 시절 국회부의장을 지낸 이재학씨의 아들이 내 친구였다. 그가 “내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라면서 이재학 사장을 소개해 줬다. 검찰의 1차 조사에서는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검찰은 조사를 계속했고, 나는 결국 기소됐다. 검찰은 1년 동안 270여 번이나 이재학 사장을 불렀다. 나는 검찰의 그런 행위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내 주장을 받아들였다.
후일 노무현 정권 시절, 나는 굿모닝시티 사건으로 복역하면서 교도소에서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이던 박주선(朴柱宣, 현 국회의원)씨를 만나 그때의 상황을 듣게 됐다. 그는 “당시 청와대 실세(實勢)였던 모(某)씨가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와 임창렬(林昌烈) 경기도지사를 제거하기 위해 검찰을 압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학 사장은 나중에 “검찰에서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조사를 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만사가 귀찮아서 검찰이 요구하는 대로 진술한 것”이라고 실토했다.
경성사건으로 구속되어 수감되어 있을 때였다. DJ의 장남 김홍일 의원이 면회를 왔다. 나는 전에 그에게 공천을 주는 데 반대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나를 잡아넣는 데 일조한 것으로 오해할까 봐 찾아왔다고 했다. 나는 그런 오해는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징표로 시계를 바꾸어 차자”고 말했다.
원래 재소자는 시계를 찰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나는 법대 동기인 김경한(金慶漢, 전 법무부 장관) 법무부 교정국장에게 재소자도 시계를 찰 수 있게 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김 국장은 “재소자가 시계알을 삼키고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어서 시계착용을 금지하고 있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정대철이가 자살할 사람으로 보이냐? 시계가 있으면 재소자들이 좀 더 계획성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편지를 다시 보냈다. 결국 교정당국에서는 알이 큰 1만원짜리 전자시계를 교도소 내에서 구매해 착용할 수 있게 제도를 바꾸었다. 이런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교도소에서 파는 시계를 ‘정대철시계’라고 불렀다.
김홍일 의원의 제안으로 우리는 시계를 바꾸어 찼다. 그러자 교도관이 제지하고 나섰다. 그러면 허락 없이 외부 물품을 반입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로 각자 차고 있던 시계로 바꾸어 찼다. 내가 출감한 후, 우리는 교도소에서 약속했던 대로 다시 시계를 바꾸었다. 그 시계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李憲宰와 김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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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감독위원장 시절의 이헌재 전 부총리. |
“훌륭한 경제전문가가 있습니다. 진의종(陳懿鍾) 전 국무총리의 사위로 저와는 친한 친구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요?”
“이회창 캠프에 있었습니다.”
DJ는 “한번 데려와 보라”고 했다. 며칠 후 이헌재를 데리고 DJ의 일산자택으로 찾아갔다. 아침 7시 반쯤이었을 것이다. 김중권 당선자 비서실장, 김한길 당선자 공보팀장 등이 동석했다. DJ는 경제현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한참 이야기한 후 “그렇죠?”라면서 이헌재의 동의를 구했다. 그런데 이헌재는 “아닙니다”라면서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DJ와 이헌재 사이에 경제토론이 시작됐다. 나는 10시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두 사람이 그날 오후 2시까지 토론을 했다고 한다. 당시 자민련 부총재이던 김용환(金龍煥) 전 재무부 장관도 이헌재를 DJ에게 추천했다고 들었다. 이후 이헌재는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 초대(初代)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노무현 정권에서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다.
김한길 대표는 가수 조영남과 함께 나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따랐었다. 국회 문공위원장 시절 취직을 부탁하기에 강원룡(姜元龍) 당시 방송위원장에게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의 아들인데, 써보라”며 추천했다.
김한길씨는 방송위원회에서 국장, 사무총장 직무대리 등을 하다가 “정치를 하겠다”면서 방송위에서 나왔다. DJ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는데, 그때는 DJ의 눈에 들지 못했다. 이후 그는 MBC TV <김한길과 사람들>을 맡으면서 방송진행자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 DJ가 “요즘 방송에서 날리는 김한길이 그때 정 의원이 소개했던 그 사람이냐? 데리고 오라”고 했다. 이후 김한길씨는 1997년에는 대선 방송대책팀장으로 활약했고, DJ정권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盧武鉉 選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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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 의원의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 선언이 있은 후 나는 노무현 후보(가운데), 이재정 신부(왼쪽)와 함께 정몽준 후보 집 앞으로 달려갔다. |
당시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큰 차이로 뒤지고 있을 때였다. 당내에서도 내심 자기가 노 후보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내가 선대위원장 제안을 거절하면, “정대철마저 노무현을 버렸다”는 얘기가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같은 당을 하는 입장에서 도와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선대위원장을 맡은 나는 동요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정대철이를 봐서라도 당에 남아달라”며 붙들었다. 나 이외에도 조순형(趙舜衡) 의원, 추미애(秋美愛) 의원 등에게도 선대위원장 직함을 줘서 복수(複數)선대위원장 체제를 만들었다.
내가 선대위원장으로 특히 신경을 쓴 일 가운데 하나는 노무현 후보의 심기관리였다. 노 후보는 상당히 예민한 사람이었다. 어떤 문제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잉반응을 보이는 일이 있었다.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종교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나는 경기고 동기인 이재정(李在禎) 성공회 신부를 불렀다. 그는 정몽준(鄭夢準)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 등 고비마다 노무현 후보의 곁에서 기도를 하면서, 노 후보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대선 전날, 정몽준 의원이 노무현 후보의 이념적 정체성(正體性)을 이유로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撤回)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모두 그걸로 대선은 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노 후보에게 “정몽준 의원 집으로 가자”고 했다. 노 후보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나는 정 의원 집으로 가서 생중계하는 TV카메라 앞에 서서 국민들에게 동정표라도 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노 후보를 잡아끌었다. 정몽준 의원 집 앞에 선 노 후보 뒤에서 이재정 신부가 기도를 했다. 눈물이 났다. 아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재정 신부를 통일부 장관으로 중용한 것은 어려웠을 때 자신의 곁에서 위안이 되어준 데 대한 고마움의 뜻도 있었을 것이다.
盧武鉉, 당선되자 책상에 머리를 꽝 박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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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후 나는 미국으로 가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오른쪽) 등과 만나, 노 당선자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키려 노력했다. |
“형님들, 감사합니다. 땅에 엎드려 절해야겠지만, 우선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그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님들, 1년만 제게 자유를 주십시오.”
한마디로 한 1년 동안은 자기 마음대로 정치를 하겠으니, 잔소리하지 말아달라는 얘기였다. 노 당선자는 “두 분을 임기 중에 한번씩 모시겠다”는 얘기도 했다. 국무총리 자리를 맡기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훗날 굿모닝시티 사건으로 교도소에 가 있으면서 나는 속으로 ‘여기가 총리실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자유를 달라’던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서툴고 경륜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노무현 정권 시절 국회의장을 지낸 김원기 의원에게 “노무현 대통령과 제대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얘기를 하기는 했는데…”라고 했다. 그도 노무현 대통령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는 얘기였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나는 대미(對美)특사단장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후보 시절 그는 정제되지 않은 반미(反美) 감정을 표출하곤 했다. 1994년 제1차 북핵(北核)위기 당시 미국이 한국에 알리지도 않고 북한을 공격하려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그는 “형, 이게 나라입니까?”라며 분개하기도 했다. 그런 그를 나는 “정권을 유지하려면 미국의 힘이 필요하고,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달랬다.
미국에서 나는 딕 체니 부통령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만났다. 파월 장관은 뒷방에서 단둘이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는 “나는 당신을 잘 안다”고 하더니 “그는 괜찮나?(Is he all right?)”라고 물었다.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파월은 이 질문을 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나도 웃으면서 “나를 믿어라(Believe me)”라고 답했다. 파월은 “당신이 있는 한, 당신이 연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겠다”고 말했다.
그해 4월 리언 라포트 장군이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오산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타워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체니 부통령과 파월 국무장관이 한국에 부임하면 귀하를 만나라고 했다”면서 정중히 부임인사를 했다. 우리는 캔맥주를 마시면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미국 측은 나를 한미우호관계를 유지해 줄 수 있는 중요인물(key man)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 나는 다시 정치적 풍파에 말려드는 바람에 그러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느닷없는 굿모닝시티 사건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자 한화갑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은 “노무현 후보에게 반대했던 내가 당 대표를 계속 맡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면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2002년 4월 대표 경선에서 차점으로 최고위원이 된 내가 당 대표가 됐다.
내가 대표가 된 후에도 당은 동교동계 등 구(舊)주류와 노무현 직계 세력 간의 갈등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 직계 세력에게 일정한 발언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양측의 의견을 조정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구주류인 박상천 의원 등의 태도는 완강했다. 결국 노무현 직계 세력은 열린우리당 창당 수순으로 들어갔다. 허탈했다.
나는 측근 참모들과 거취를 의논했다. 대부분 눈물을 흘리면서 민주당에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열린우리당으로 가면, 반드시 정치자금 위반 같은 걸로 엮어서 소리 없이 제거당할 것입니다. 가면 안 됩니다.”
가깝게 지내던 이철(李哲) 전 의원도 열린우리당행을 말렸다. 하지만 나는 ‘내가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다. 대통령이 자기 정치를 하기 위해 새로운 당을 만들어야겠다는데, 함께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김원기·이해찬(李海瓚) 의원 등은 “신당(新黨)을 만들더라도 당 대표는 정 대표가 계속 맡게 될 것”이라고 언질을 주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굿모닝시티 사건이 터진 것이다.
내가 굿모닝시티 윤창렬 대표로부터 받았다는 돈은 노무현 후보를 위해 모은 정치자금으로 이상수 당시 사무총장이 수령해 영수증까지 발부한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은 형(刑)을 감경(減輕)해 주겠다고 윤 대표를 회유해서 내게 대가성 자금을 주었다고 허위진술하게 만들었다. 기대와는 달리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윤창렬 대표는 2심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1심에서의 진술을 번복했다. 우리 측은 윤창렬 대표에게 법정에서 다시 한 번 양심선언을 해줄 것을 요구했고, 윤 대표는 이에 응해 주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재판장은 “피고 정대철의 회유에 의해 진술을 번복했다”고 보았다. 결국 나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나로서는 천추(千秋)의 한(恨)이었다. 당시 서울지검 특수2부장으로 이 사건을 수사한 사람이 채동욱(蔡東旭) 전 검찰총장이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아들 호준이가 면회를 왔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와서 일을 하라고 한다”면서 내 의사(意思)를 물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내가 고단한 처지에 빠지자 집안을 수습하겠다고 귀국했었다. 꼭 27년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호준이가 후일 정치를 하더라도, 삼성전자에서 IT 관련 일을 하고 있던 그가 우선 자기 분야에서 좀 더 인정을 받고, 학위를 마친 후 하게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미 정치에 뜻을 둔 아들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아들은 3년간 청와대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끼인 世代’의 悲哀
그렇게 나의 정치인생은 끝나고 말았다. 1977년 제9대 국회부터 시작해서 10, 13, 14, 16대에 이르기까지 5선을 기록했고, 한때는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운(時運)이 따라주지 않았다. 1987년 제13대 대선 이후 YS, DJ시대가 지나치게 길어지면서 나를 비롯해 김상현 전 의원,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등은 대권 도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중간에 낀 세대(世代)로서 뛸 기회가 없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요즘도 이기택 전 총재를 만나면 나는 “형은 뭐 했수?”라고 묻는다. 그러면 이 전 총재는 “그럼 너는 뭐 했냐?”고 되받는다. 그러고는 “우리는 제대로 된 경선 한 번 해보지 못했어”라거나, 화투판 용어를 빌려 “너나 나는 한 번 쫘 보지도 못했다”며 허허롭게 웃는다.
혹자는 나를 두고 “권력의지가 약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DJ와 호남이 일체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DJ를 강하게 들이받기도 어려웠다. DJ를 밀어내는 것은 곧 우리 정치에서 오랫동안 당하고 소외당해 온 호남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우리 정치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호남 출신이 정권을 한 번은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 때문에 DJ와 부딪히면서도 그의 당을 한 번도 떠나지 못했다. 내 못다 한 꿈은 아들 호준이가 이어가고 있다.⊙
| 취재 후기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을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에서 다루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지난 7월 다른 취재 건으로 여의도 삼정빌딩에 있는 박계동(朴啓東) 전 의원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같은 건물에 정 고문의 사무실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 고문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자 그는 흔쾌히 응해 주었다. 정 고문은 ‘준비된 인터뷰이(interviewee)’였다. 기자가 보낸 질문지에 답변하기 위해 작성한 메모를 복사해 두었다가 참고하라고 주기도 했다. 일찍부터 ‘야권의 차세대 주자’로 꼽혔으면서도 대권 도전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그는 “DJ와 YS의 시대가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 두 사람 모두에 대해 애정을 표시했다. YS에 대해서는 그의 인간적 매력을 강조하면서, IMF사태나 김현철 비리 등으로 인해 그의 업적이 지나치게 폄하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DJ에 대해서는 이따금 “그가 한 일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다”고 비판하기는 했지만, 그리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놀기를 좋아하는 등 자기관리를 좀 못 했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자, “그건 나를 피상적으로 본 사람들이 하는 얘기”라면서 “그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다”고 했다. “보수층 가운데는 ‘해공(海公·신익희)이나 유석(維石·조병옥)의 민주당이라면 우리가 지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면서, 민주당이 지나치게 좌(左)클릭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하자, 정 고문은 공감을 표시했다. 그는 “민주당은 종북(從北)좌파와는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면서 “민주당이 좀 더 중도 내지 중도우파로 이동하고, 이념적 스펙트럼이 더 넓어져야 국민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도 운동권 출신인 셈이지만, 지금의 민주당은 운동권 출신이 과잉대표(過剩代表) 되고 있다”는 비판도 했다. 손학규(孫鶴圭) 대표 시절, 전직 당 대표나 국회의장, 국무총리급으로 구성된 민주당 상임고문회의에 김상현・권노갑 전 의원을 끌어들여 고문회의를 우(右)클릭하게 했다는 자랑도 했다. 본래 타고난 성정(性情) 때문일까, 2세 정치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기 때문일까? 인터뷰 내내 정 고문에게서는 옛 야당 투사라는 느낌보다는 ‘명문가의 귀한 집 자식’이라는 느낌과 함께 일종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 때문에 그가 정치인으로 더 크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에게 좀 더 큰 역할을 할 기회가 있었다면 우리 정치판이 지금보다는 덜 팍팍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