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년 신한민주당 총재 李敏雨는 YS 아이디어
⊙ ‘이민우 구상’ 때는 YS가 공격에 앞장
⊙ 2·12총선 앞두고 李哲承이 추진하던 新黨 무산시키고, 민추협-非민추 함께하는 신한민주당 창당
⊙ YS의 민추협 참여 요청 거절, 통일민주당 창당 후에는 무소속 생활
李基澤
⊙ 76세. 고려대 商大 졸업.
⊙ 제7~10대, 12~14대 국회의원, 신민당 사무총장·부총재, 신한민주당·통일민주당 부총재,
5共비리조사특위 위원장, 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공동대표)·대표·총재,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역임.
⊙ ‘이민우 구상’ 때는 YS가 공격에 앞장
⊙ 2·12총선 앞두고 李哲承이 추진하던 新黨 무산시키고, 민추협-非민추 함께하는 신한민주당 창당
⊙ YS의 민추협 참여 요청 거절, 통일민주당 창당 후에는 무소속 생활
李基澤
⊙ 76세. 고려대 商大 졸업.
⊙ 제7~10대, 12~14대 국회의원, 신민당 사무총장·부총재, 신한민주당·통일민주당 부총재,
5共비리조사특위 위원장, 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공동대표)·대표·총재,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역임.
유신(維新)헌법하에서도 국회는 열렸다. 유신선포와 함께 보안사에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감옥으로 간 김상현(金相賢), 조윤형(趙尹衡), 조연하(趙淵夏) 의원 등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야당(野黨) 의원들은 유신하에서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말은 ‘참여하의 개혁’이었다. “제도권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국회에 들어가 싸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군색한 변명이었다.
유신하에서도 통상적인 의정(議政)활동은 계속했다. 야당 의원들은 전처럼 정부의 잘못을 비판했다. 학생이나 재야(在野)인사들이 시위 등으로 구속되면,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공화당과 유정회(維政會)가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야당은 제 구실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이런 고민은 결국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기택의 반란’으로 나타나게 된다.
1973년 유진산(柳珍山) 총재가 타계(他界)했다. 김영삼(金泳三·YS), 이철승(李哲承), 정해영(鄭海永)씨 등이 당권(黨權)경쟁에 나섰다. 진산의 적통(嫡統)으로 여겨졌던 YS가 압도적 지지를 받아 신민당 총재가 됐다. YS는 독선적으로 당을 운영했다. 당직 인선에서도 비주류(非主流)를 거의 배려하지 않았다.
나는 YS 총재 시절, 최연소 정무위원이 됐다. 이것도 YS가 내가 이철승·신도환(辛道煥) 의원과 가깝다는 이유로 배제하려는 것을 고흥문(高興門) 의원이 “이기택 같은 사람을 배제해서 어쩌자는 것이냐?”고 강하게 밀어붙여 된 것이라고 들었다.
이런 식이다 보니 당내 화합이 되지 않았다. 당이 화합하지 않으니 대여(對與)투쟁에 힘이 빠졌다. YS는 자기 이름을 내는 일에는 요란했지만, 대여투쟁에서는 의미 있게 당을 제대로 끌고 가지 못했다.
李哲承의 中道統合論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비주류세력은 김영삼 총재를 축출하고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었다. 소석(素石) 이철승 의원이 대표최고위원, 김재광(金在光)·이충환(李忠煥)·신도환·유치송(柳致松) 의원 등이 최고위원이 됐다. 나는 당 3역(役) 가운데 서열이 가장 앞서는 사무총장이 됐다. 송원영(宋元英) 원내총무, 박일 정책위원회 의장은 나보다 열 살이나 많았다.
소석은 원래 YS나 DJ(김대중)보다 정치이력이 앞섰다. 광복 직후 반탁(反託)투쟁을 통해 정계(政界)에 입문한 그는 민주당 시절에는 소장파(少壯派)의 리더로 활약했다. 그를 경계한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그를 7년간이나 정계에서 추방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공부에 힘썼다. 그러는 사이 그는 미국식 의회민주주의에 젖어들었다.
소석이 오랜 정치방학 끝에 돌아와 정계에 복귀했을 때는 이미 YS와 DJ가 야당의 차세대 주자로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그는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競選), 1974년 신민당 총재 경선 등에서 잇달아 패배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강경노선을 걷는 양 김씨와 차별화를 위해 소석이 내놓은 것이 ‘중도통합론(中道統合論)’이었다. 하지만 대화와 타협을 내세우는 ‘중도통합론’은 민주주의가 정착된 구미(歐美)에서라면 몰라도, ‘민주화’라는 당시의 시대적 요구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소석의 아낌을 받고 있던 나부터도 ‘중도통합론’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최고위원 중에서도 김재광·이충환 의원 등은 나름 대여 강경노선을 주장했다. 하지만 최고위원들은 리더십이나 이론 무장 측면에서 이철승 대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소석의 ‘중도통합론’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李哲承, 내가 쓴 경고문 집어던져
그러자 YS, DJ계 당원들을 중심으로 이철승 대표에 대한 규탄 움직임이 일었다. 이 대표는 나를 불러서 “사무총장 명의로 경고문을 내라”고 했다. ‘중도통합론’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나는 “당원들의 뜻은 이해하지만” 운운하는 경고문 초안(草案)을 만들어 이 대표에게 올렸다. 글을 읽어본 이 대표는 “이게 경고문이냐, 아니면 부채질을 하는 거냐”면서 집어던졌다. 경고문 발송은 없었던 일이 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철승 대표는 리더십, 능력, 인품, 애국심 등에서 YS나 DJ를 훨씬 앞서는 분이었다. 술이나 담배, 잡기(雜技)는 일절 하지 않았다. 정치인들의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던 시절이었지만, ‘여자’ 문제로 구설에 오른 적도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내게 무척 잘해 주었다. 그의 유일한 문제는 ‘민주화’라는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중도통합론’을 고집했다는 점이었다.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여러 사람이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 YS는 물론, 이택희(李宅熙)·최형우(崔炯佑)·조윤형 의원 등 소장파 의원들이 당권 도전에 나섰다. 나도 당권에 도전하기로 했다. 신민당이 집단지도체제를 계속 유지할 것으로 판단하고, 최고위원이 되어 당 지도부에 진입, 당의 노선을 바꾸어보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당시 서울대 병원에서 풀려나 동교동 자택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DJ는 최고위원에 도전한 소장파 의원들을 불러들여 “소석 체제로는 안 된다. YS를 지지하라”고 설득했다. DJ의 설득에 당권 도전을 선언했던 의원들은 하나 둘 주저앉았다.
“少壯派가 뭐 이래?”
5·30 전당대회를 일주일인가, 열흘인가 앞두고 김상현 전 의원이 이른 아침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던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이 의원, DJ가 꼭 좀 보자고 합니다. 동교동에 같이 갑시다.”
“DJ가 무슨 얘길 할지 다 알고 있어요. 나는 DJ의 말을 듣고 움직였다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신문기자들도 나에게 경선에서 완주(完走)하라고 부추겼다. “소장파가 뭐 이래?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할 거 아니오?”
이협(李協, 13~16대 국회의원) 《중앙일보》 기자는 “당신도 사퇴할 거요? 4·19를 한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소?”라고 했다.
그런데 전당대회를 4~5일 앞두고 상황이 달라졌다. YS와 소석이 신민당 지도체제를 집단지도체제(최고위원 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총재 체제)로 변경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최고위원이라면 몰라도 단일지도체제하의 총재에 도전하는 것은 당초 내 생각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기가 막혔다. YS와 소석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해야 했다.
사무총장이었던 나는 대의원들의 지지성향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YS와 소석 모두 1차 투표에서 과반수(過半數)를 차지하기는 어려웠다. 2차 투표에서는 단순 다수 득표자가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다. 나는 일찌감치 ‘선명야당(鮮明野黨)’의 기치를 내건 YS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4·19세대의 대표정치인인 내가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은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국세청·중앙정보부의 압력
전당대회 이틀 전,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소석과 만났다. 소석이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요구했다.
“중도통합론을 수정하겠다고 기자들 앞에서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지지하겠습니다.”
소석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했다. 전당대회 당일 새벽, 소석은 기자들을 대동하고 서울 내자호텔에 있는 내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그는 다시 한 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대답했다.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더 이상 얘기하지 마십시오.”
소석은 오래 시간을 끌지 않고 새벽 1시쯤 돌아갔다. 그는 내심 ‘네 마음이 어디 있든지 간에, 결국 너는 내게로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내게는 엄청난 압력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국세청은 그해 정초부터 자형(姊兄・이임용)이 운영하는 태광그룹의 회계자료를 모두 압수해 갔다. 그때 압수해 간 자료들은 그해 11월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國葬)이 끝난 후에야 돌아왔다. 중앙정보부에서는 노골적으로 태광그룹 세무조사를 빌미로 이철승 대표 지지를 요구했다. 나는 “나는 국가를 생각해서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태광과는 인연을 끊었으니, 태광과는 연결시키지 마라”고 말했다. 자형은 죽기 전에, 나에 대해 가장 섭섭했던 것으로 그때의 일을 꼽았다. 공화당에 몸담고 있는 선배나 집안 어른뻘 되는 의원들도 내게 “잘 부탁한다”고 했다.
5월 30일 아침, 나는 정해영 전 국회 부의장 댁을 찾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 전 부의장이 전날 “당신을 지지할 대의원들이 우리 집에 모일 테니 다녀가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YS가 찾아왔다. 그도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는 “정 부의장 댁에 가봐야 한다”며 그를 외면했다. 아마 YS는 내가 그를 냉대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정해영 전 부의장 댁에는 10여 명의 대의원이 모여 있었다. 정 전 부의장이 말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 의원을 밀어주기로 했소, 잘 해 보시오.”
1차 투표. 재석 751표 가운데 소석이 292표, YS가 267표, 내가 92표를 얻었다. 그 밖에 신도환 최고위원이 87표, 김옥선 전 의원이 11표, 무효 2표가 나왔다. 2차 투표 준비를 위해 정회(停會)한 사이에 나는 사무총장실로 지지자 40~50명을 모았다. 내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소석에게 표를 몰아주자”, “YS에게 표를 몰아주자”, 의견이 분분했다. 사실 내 지지자들 중에서 골수 지지자들은 20~30%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원래 소석이나 YS를 지지했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말했다.
“지금 우리 표가 갈라지면 안 됩니다. 원래 소석을 지지하다가 내게 온 분들은 이제 와서 소석에게 돌아간다고 해도 손가락질을 받을 것입니다. YS를 지지하다 내게 온 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한 사람을 지지해서 총재로 만들어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과실(果實)이 있을 것입니다.”
내 말을 들은 지지자들은 “총장님께 맡기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다.
“내가 어떤 결심을 하든 여러분은 따라올 수 있겠습니까?”
“죽으나 사나 총장님을 따르겠습니다.”
DJ의 密書
밖에서는 2차 투표를 시작한다며 대의원들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가장 가까운 측근인 박관용(朴寬用)에게도 내 생각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애가 타서 내게 “어떻게 할 거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YS를 지지하자는 얘기였다. 나는 그에게 “가만히 있어 봐, 가만히 있어 봐”라며 달랬다.
당원 하나가 작은 주전자를 가지고 왔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속에 DJ의 편지가 있다”고 했다. 메모지에는 “YS를 지지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주전자는 아내가 들여보낸 것이었다. 전당대회장은 대의원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아내는 “총장님이 꼭 이 시각에 약(한약)을 드셔야 한다”면서 당원 편에 밀서(密書)가 들어 있는 주전자를 들여보냈다고 한다. 그때는 이미 내가 YS 지지를 마음먹은 후였기 때문에, DJ의 편지가 내 결심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YS는 대회장 입구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는 “도와줄 거냐, 안 도와줄 거냐?”고 물었다. YS가 내게 “이 총장, 이리와 봐요. 밖을 좀 보시오”라고 말했다. YS와 내가 창가에 모습을 나타내자, 당사 앞마당에 모인 당원, 시민, 학생들이 “김영삼! 이기택!”을 연호(連呼)했다.
대회장에서 나는 YS 지지를 선언했다. 결과는 YS 378표, 소석 367표. 11표 차이의 역전승(逆轉勝)이었다. 대회장 안팎에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대회장 밖으로 나오는데 누군가가 나를 무동 태웠다.
5·30 전당대회는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이었다. 5·30 전당대회를 통해 다시 총재가 된 YS는 ‘선명야당’의 기치를 높이 들고 박정희 정권에 맞섰다. 이어 YH사건이 터졌다. YS의 강공에 초조해진 박정희 정권은 YS 의원직 제명이라는 악수(惡手)를 두었고, 이는 부마(釜馬)항쟁으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의 수습책을 놓고 온건론을 주장하던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은 강경론자인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과 그를 비호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쏘았다. 10·26사태의 원인(遠因)은 5·30 전당대회였던 셈이다. 나는 4·18 고대생 데모를 통해 이승만 정권을, 5·30 전당대회를 통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YS의 독선
혹자는 전당대회가 열렸던 마포당사 앞에 모여든 당원, 시민, 학생들이 YS 지지와 민주화를 외치는 소리가 장내(場內)로 전달된 것이 대의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얘기다. 사실 그 마포당사를 마련한 것은 이철승 대표최고위원과 나였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YS는 시민회관(구 국회의사당, 현 서울시 의회)을 빌려서 하자고 주장했다. 반면에 소석과 나는 마포당사에서 하자고 주장했다. 소석으로서는 자신의 업적인 마포당사에서 전당대회를 여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소석의 발등을 찍는 결과가 됐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YS는 자신의 당선에 1등 공신 역할을 한 내게 “부총재와 원내총무 중 원하는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나는 부총재 쪽을 택했다. 단순히 부총재가 원내총무보다 높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초 당권에 도전할 때부터 내 뜻은 당의 노선을 결정하는 당 지도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YS가 1976년에 총재직을 잃었던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독선적인 당 운영 때문이었다. 3년 만에 총재로 복귀한 후에도 그의 독선적인 면모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당직 인선에서 다른 계파를 전혀 배려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박영록(朴永祿)·조윤형 부총재 등과 함께 총재실로 YS를 찾아갔다. 박영록 부총재가 우물우물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직에서 다른 계파도 좀 배려를 해주셔야…”
YS는 확 짜증을 냈다.
“부총재가 됐으면 됐지, 이 판에 무슨 당직까지 챙기려 듭니까?”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8각 성냥통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면서 소리쳤다.
“총재님,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야당 하는 게 돈이 됩니까, 뭐가 됩니까? 고생하면서 야당 해온 사람들에게 당직이라도 배려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도동만으로 야당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보세요!”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오자 비서실에 모여서 총재실의 추이를 살피고 있던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런 소동이 있은 후에 YS는 각 계파들에 4~5명씩 당직을 배분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밤 11시경이었다. 보험회사 총무국장으로 있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말했다.
“이상한 소식 못 들었나?”
“무슨 소식?”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청와대 쪽에서 총성이 들렸다고 한다.”
나는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4시경, 그 친구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래도 무슨 변고(變故)가 생긴 것 같다. 박 대통령이 총에 맞았다는 얘기가 있다.”
‘설마, 대통령이 총에 맞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나?’ 싶었다. 세수를 하고 난 후 몇 군데에 전화를 걸었다.
“어젯밤에 청와대 쪽에서 총성이 있었고, 박 대통령이 총에 맞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혹시 그런 얘기 들어보았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침 7시가 넘어 김성진(金聖鎭) 문화공보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 서거(逝去)’ 사실을 발표했다.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후 박정희 대통령이 매일 밤 술을 마시는 바람에 건강이 많이 나빠져서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거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 대통령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암투(暗鬪)를 벌이고 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박정희 시대가 그런 식으로 막을 내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순간 ‘유신독재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만사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분명히 있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12·12사태 직후 訪美
10·26사태 이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군부(軍部)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때 미국 버클리대학의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초청장을 보내왔다. 그는 “미국에 와서 한국의 정정(政情)에 대해 설명해 달라”면서 “대선(大選) 유세차 샌프란시스코에 오는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나 한국정세에 대해 설명할 기회도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12월 13일자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전날 12·12사태가 터졌다. 나는 스칼라피노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당분간 출국하기 어렵겠다”고 했다. 그는 “이해한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미국에 와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전두환(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이 총질까지 하면서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것은 분명 쿠데타였다. 하지만 이를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군부 쿠데타로 규정할 경우에는 정말로 군부를 자극하는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때문에 신민당이나 재야(在野)민주화세력은 속으로 걱정만 할 뿐, 내놓고 전두환 일파를 규탄하지는 못했다.
1980년 1월 4일, 나는 미국행(行)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장차 군부가 정치에 개입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 미국의 힘을 빌려서 군부를 주저앉히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버클리대에서 이렇게 강연했다.
“한국의 야당과 재야민주화세력, 학생들은 새로운 군부정권이 출현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만으로 부족할 경우, 미국이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교민들은 5·30 전당대회에서 YS를 지지해 민주화의 물꼬를 튼 나를 영웅 대접 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내게 “빨리 워싱턴으로 가서 각계 인사들에게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바로 위싱턴에 가서 내가 만나야 할 기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면서 스케줄을 직접 짜주었다. 덕분에 나는 워싱턴의 브루킹스연구소, 우드로윌슨연구소 등 싱크탱크들과 친한파(親韓派) 미국인들의 모임 등에 나가 한국정세를 설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전두환 장군 등 신군부의 성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이어 필라델피아와 뉴욕을 방문했다.
라이샤워의 경고
뉴욕에서 LA로 가려는 참에 하버드대에서 전화가 왔다. 하버드대 측에서는 “꼭 좀 다녀가 달라”고 했다. “LA의 대규모 집회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어 어렵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나는 LA 앰배서더호텔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석해 연설을 마치자마자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랐다.
새벽 3시에 공항에 도착하니 한국학을 전공하는 젊은 조교수 한 사람이 나와 있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세력과도 가까운 그는 자기 연구실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역사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라이샤워 교수는 주일(駐日)미국대사를 지낸 거물(巨物)이었다.
라이샤워 교수의 집은 하버드대에서 20분쯤 되는 거리에 있는 숲 속에 있었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한국의 군부 문제 등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미국이 군부를 억제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론(持論)을 다시 펼쳤다.
“한국의 민간정치인들이나 국민들은 민주발전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18년간에 걸친 박정희 독재 때문에 군부만은 민간정치세력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부분만큼은 미국이 힘을 보태주어야 합니다.”
나는 일부 학생운동권에서 나오고 있는 반미(反美)정서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반미사상이 움트고 있습니다. 그들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미국이 도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군사정권이 등장하면, 한국의 민간정치인들은 반미세력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이 그동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 노력해 온 것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라이샤워 교수는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는 말은 100% 이해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참으로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미국은 지금 대통령 선거 와중에 있습니다. 외국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관심을 갖기 어려운 때입니다. 카터와 레이건 중 누가 되더라도, 당분간은 한국 문제에 신경을 쓸 분위기가 아닙니다.
결국 문제는 당신들 스스로 극복해 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군부의 등장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의 야당과 재야민주화세력, 학생들이 똘똘 뭉치는 것입니다. 특히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의 단결이 중요합니다. 지금 두 사람이 균열(龜裂)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그러면 군부가 반드시 등장할 것입니다.”
라이샤워 교수는 종이를 꺼내더니 두 김씨 앞으로 보내는 메모를 작성했다.
“두 분이 정치적으로 분열하면, 군부가 반드시 정치일선에 등장하게 됩니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두 분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라이샤워 교수는 메모를 내게 주면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이것을 두 김씨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안개政局’
14일간의 방미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YS와 DJ를 만나 라이샤워 교수의 경고를 전하면서, 두 사람의 단결을 역설했다. 나는 DJ가 신민당에 들어오고 재야와 학생들이 바깥에서 신민당을 둘러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YS는 재야에 머무르고 있는 DJ에게 신민당에 입당(入黨)해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정하자고 주장했다. DJ는 YS가 기득권(旣得權)을 갖고 있는 신민당에 입당하기를 거부하면서 재야에서 세력을 넓혀갔다. 결국 두 사람의 분열은 군부에 빌미를 주고 말았다.
YS와 DJ는 1987년에도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했다. 두 사람의 분열은 전두환 정권 8년, 노태우 정권 5년, 도합 13년 동안 군사정권이 연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두 사람이 역사에 큰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 서리(署理)를 겸임하면서, 권력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됐다. 하지만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개헌(改憲)에 1년이 소요된다고 주장하는 등 민주화 일정을 미루기만 했다. ‘안개정국(政局)’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정치일정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것이 신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정치권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이를 위해 5월 20일 임시국회를 열기로 했다.
의원직 총사퇴 결의
임시국회를 앞두고 신민당 의원들은 5월 17일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갖기로 했다. 5월 17일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제주도를 포함하는 전국계엄령으로 확대됐다. 국회는 무장한 계엄군과 탱크가 포위했다. 국회에 들어가려 하자 착검(着劍)한 군인들이 막아섰다. 한참을 옥신각신했지만,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국회 건너편에 있는 건물 다방에서 임시의원총회를 열었다. 나와 황낙주(黃珞周, 전 국회의장) 원내총무, 김동영(金東英, 전 정무장관) 의원 등이 회의를 주도했다. 모두 “이럴 수가 있느냐?”며 분개했다. 우리는 정부가 비상계엄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국회의원직을 총사퇴하기로 결의했다. 우리는 사퇴서를 작성한 후 상도동으로 YS를 찾아갔다. 의원직을 사퇴하자는 우리의 말에 YS는 아무 말도 않고 침묵을 지켰다. 5분여 만에 입을 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원직 사퇴는 당분간 보류하기로 합시다.”
YS는 그때까지만 해도 가느다란 미련을 가지고, 우리의 극단적 행동이 군부를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DJ는 사회혼란을 조장했다는 혐의로 계엄군에게 잡혀갔다가, 광주민주화항쟁이 발생한 후 내란죄(內亂罪)를 덮어쓰고 투옥(投獄)됐다. JP(김종필)는 부패혐의로 연행되어 재산을 강제헌납당했다. YS는 연금(軟禁)됐다.
李庭植 교수의 초청
전두환은 동생 전경환(全敬煥)을 내게 보내 관제(官製)야당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월간조선》 6월호). 이를 거절하자 정치활동규제대상자로 묶었다. 한동안 나도 반(半)연금 상태에 놓였다. 보안사인지 정보부인지에서 나온 3~4명의 사복 요원들이 나를 감시했다. 나는 독서와 서예, 수석(壽石) 수집으로 소일했다.
198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유펜)의 이정식(李庭植) 교수가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서울에 와서 들으니, 이 부총재께서 앞으로 한국 정치의 중심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서예와 수석 수집으로 소일하고 있지요.”
이정식 교수는 정색을 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정치인은 이럴 때일수록 공부를 해야 합니다. 유펜에 얘기해서 연구실을 하나 내드릴 테니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시야를 넓히십시오. 지금 이 기간을 값있게 활용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니 옳은 얘기였다. 나도 대학 시절 이래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차분하게 공부할 시간을 갖지 못한 게 늘 아쉬웠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당신이 집구석에 있으니 귀찮던 참인데 잘 됐네. 빨리 가시구려.”
상도동으로 YS를 찾아갔다.
“미국에 가서 공부 좀 하고 오겠습니다.”
YS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공부는 무슨 공부…. 가기는 어딜 간다는 말이오. 이럴 때일수록 서울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지금 우리가 서울에서 하는 일이 뭐 있습니까? 언젠가는 정치활동을 재개(再開)하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총재님께서도 상도동 사람들 중에서 공부할 사람은 공부를, 운동할 사람은 운동을, 돈 벌 사람은 돈을 벌게 하면서 그날에 대비해야 합니다.”
YS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총재,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오.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모든 걸 접고 들어와야 합니다. 약속하시겠소?”
“물론입니다. 약속하겠습니다.”
YS 단식 소식에 귀국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감시하던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요원을 불렀다.
“내가 미국으로 가겠다고 하면, 정부에서 여권은 내주겠지?”
“안기부의 허가를 받아야 할 겁니다.”
며칠 후 그는 “부장님이 부장실에 한번 다녀가시라고 한다”고 전했다. 유학성(兪學聖) 안기부장과는 안면이 있었다. 국회의원 시절 전방(前方) 국군장병위문행사 때 소장(少將)이던 그가 안내를 했었다. 하지만 유학성 부장을 만나러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부장실에는 안 간다. 여권 해주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며칠 후 여권이 나왔다. 유펜에는 1년 정도 머물렀다.
1983년 5월, YS가 광주민주화항쟁 3주년을 맞아 단식(斷食)투쟁을 하다가 다 죽게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모든 걸 접고 들어와야 한다”던 YS의 말이 떠올랐다. 바로 보따리를 쌌다.
YS의 단식은 1년 후 민주화운동추진협의회(민추협) 결성으로 이어졌다. 민추협이 출범하기 전 어느 날, YS가 “얘기 좀 할 게 있다”면서 다녀가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상도동 YS의 집을 찾아갔더니, YS가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여기에 사인 좀 해주시오.”
뭔가 하고 보니 민추협 가입 신청서였다. 순간 기분이 나빴다. 사전(事前)논의도 없이 종이 한 장 내밀면서 다짜고짜 사인을 하라니….
“나는 민추협에 가입하지 않겠습니다.”
YS는 깜짝 놀랐다.
“아니, 왜 가입하지 않겠다는 거요? 상도동, 동교동을 막론하고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은 모두 참여하기로 했소.”
“상도동, 동교동이 아니면 민주화운동을 안 한 겁니까? 이런 걸 하려면 미리 의논이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민추협 안 한다고 해서 이기택이가 민주화투쟁 안 했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3차 解禁
1984년 11월 30일 전두환 정권은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구(舊) 여야(與野) 정치인에 대한 3차 해금(解禁)을 단행했다. 이때 해금된 사람은 모두 84명이었다. 야권에서는 나를 비롯해 이철승·이민우·신도환·조윤형·정해영·이충환·김재광·박영록·송원영 전 의원 등이 해금됐다. 하지만 YS와 DJ 등 15명은 여전히 정치활동규제에 묶여 있었다.
아마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양 김씨는 묶어 놓고 옛 신민당 중진(重鎭)들을 해금하면 소석(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이 중심이 되어 신당(新黨)을 만들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당은 민한당(민주한국당)과 마찬가지로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두환 정권의 이러한 계산이 무너진 것은 나 때문이었다. 소석은 신당 창당 과정에서 YS와 DJ를 따르는 민추협 계열을 배제하려 했다. 나는 여기에 맞서 “신당에는 민추협 계열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3차 해금이 있기 2~3주 전쯤, 소석이 나와 김수한·송원영·박용만 전 의원을 불러 식사를 같이했다. 소석이 말했다.
“곧 3차 해금이 있을 모양이오. 새벽이 곧 옵니다. 우리도 신당 창당을 준비해야겠소.”
소석은 김수한 전 의원에게는 창당선언문과 정책을, 내게는 전국조직을 준비하라고 했다. 얼마 후 3차 해금이 곧 단행될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YS와 DJ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고민이 됐다. 나는 김수한 전 의원과 함께 서울 세검정 부근 올림피아호텔에서 소석을 만났다. 내가 물었다.
“선배님, 지금도 중도통합론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오.”
소석은 내게 중도통합론의 정당성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나를 설득시키지는 못했다.
“선배님, 아무리 저를 설득하려 해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전두환 정권과 타협이나 이론적 논쟁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반드시 투쟁력과 겸비해야 합니다.”
“누가 싸우지 말자고 했소? 이 부총재는 중도통합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지 않는 거 아니오?”
李哲承, 독자 新黨 추진
소석과 헤어지고 난 후, 나는 고흥문 전 신민당 최고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며칠 전 소석과 점심을 같이했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였다. 내가 말했다.
“선배님, 며칠 전에 소석과 만났을 때, 소석이 무슨 얘길 했습니까? 혹시 중도통합론 얘기를 했나요?”
“그렇지. 말도 마시오. 소석이야 중도통합론 아니면 사그라지는 사람 아니오?”
“야당을 하려면 중도통합론으로 되겠습니까?”
고흥문 전 최고위원의 대답은 단호했다.
“안 되지, 안 돼! 그걸로는 야당이 안 돼! 중도통합론은 이미 민한당이 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걸 할 수야 있나?”
마포 가든호텔에서 YS계의 김동영 전 의원과 만나 신당 창당을 논의했다. 내가 말했다.
“이제 신당을 만들어야 하는데, 소석밖에는 대표로 세울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소석은 여전히 ‘중도통합론’만 주장하니 어쩌면 좋겠나?”
김동영은 경상도 사나이답게 시원시원했다.
“소석이라도 모시고 당을 만들어 국회에 들어가야 싸울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1984년 12월 중순, 소석이 구 신민당 노장파(老壯派) 정치인들과 마포 성산회관이라는 불고깃집에서 신당 발기인대회를 갖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나는 YS와 DJ계가 중심이 된 민추협을 배제하는 신당 창당은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이택돈·이택희·김형광·김현수·김옥선 등 소장파 정치인 9명과 만났다. 내가 말했다.
“내일 아침 10시에 소석이 성산회관에서 신당 발기인 대회를 갖는다고 합니다. 거기에 절대로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면 바로 신당이 창당됩니다. 하지만 그 당으로 출마하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내년 총선에서 당선될 수 없을 것입니다. 국민이 그 당에는 표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소석이 추진하는 신당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산회관 발기인대회에 가지 않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그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다음 날 아침 10시에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날 밤 늦게 이택돈 전 의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 부총재, 소석이 자꾸 전화를 걸어오는데…. 내일 발기인대회에 참석만 하면 안 될까?”
“에이, 사람이 좀 야물어야지 그게 뭐요? 그래서 어떻게 정치를 하겠소? 다른 소리 말고 내일 아침 10시에 플라자호텔에서 봅시다.”
YS, 李敏雨 추천
다음 날 아침 약속시각에 플라자호텔로 나갔더니, 아홉 명 모두 모여 있었다. 옛 신민당 원로인 정해영 전 국회 부의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소석한테 안 갔다. 나는 너희 편이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내 이름을 써라.”
잠시 후 박한상(朴漢相) 전 의원도 전화를 걸어와 정 전 부의장과 같은 뜻을 전했다. 결국 소석이 추진하던 신당은 무산되고 말았다.
신당 창당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어느 날, YS가 김동영 전 의원을 통해 나를 보자고 했다. 상도동으로 찾아갔더니, YS가 물었다.
“당 대표는 누구로 할 생각이오?”
“그야 대의원들이 결정하겠지요.”
“그러지 말고…”
“안 그래도 적당한 분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던 참입니다. 소석이 하고 싶어하지만…”
YS는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내가 한 사람 추천해 볼까요?”
“좋은 사람이 있으면 추천해 주십시오.”
“이민우(李敏雨)씨는 어때요?”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었다. 이민우씨는 그때까지 5선(選) 의원으로 국회 부의장, 신민당 부총재 등을 지냈다. 정치인으로 흠이 없는 분이었지만, 그렇다고 두드러진 분도 아니었다. 나도 ‘시골 노인’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YS가 말했다.
“이민우씨는 관록이 있고 중후(重厚)한 분으로, 우리와 의논해서 당을 잘 이끌어갈 만한 분이오. DJ와도 이미 의논이 됐어요. 이 부총재가 결심해 주면 좋겠소.”
“두 분이 그렇게 합의하셨다면, 그렇게 하지요.”
YS는 내 두 손을 잡고 “고맙다”고 했다. 그래서 이민우 전 국회 부의장이 신한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이 됐다.
부산에서 촉발된 直選制 改憲 투쟁
신한민주당은 민추협계와 비(非)민추협계가 거의 절반씩 지분을 가지고 참여했다. 7명의 부총재단도 YS계의 김동영·최형우, DJ계의 조연하·박녹영, 소석계의 김수한·박용만, 무계보(無系譜)인 나로 균형을 맞추었다. 이렇게 신한민주당이 민추협계와 비민추협계가 하나가 되는 데에는 내가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신한민주당은 1985년 2·12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신한민주당은 29.26%의 득표율로 67석을 차지했다. 5공(共) 정권의 관제야당이었던 민한당은 19.68%를 얻어 35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의원들이 다투어 신한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민한당은 얼마 후 사라지고 말았다.
신한민주당은 직선제(直選制) 개헌을 전면에 내걸고 전두환 정권과 투쟁하기 시작했다. 신한민주당은 헌법개정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서울은 이민우 총재, 부산은 나, 경남은 최형우, 대구-경북은 김수한, 광주-전남은 이중재(李重載), 강원은 김동영 의원이 맡았다.
서울을 시작으로 개헌추진위 현판식을 갖기로 했다. 1985년 3월 11일 서울에서의 현판식은 경찰의 저지로 무산됐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부총재단 중에서 가장 젊었던 내가 “다음 현판식은 부산에서 하자”고 나섰다. 300만원을 만들어 손태인(孫泰仁, 제16대 국회의원) 비서관 편에 내려보냈다.
전두환 정권이 언론을 틀어쥐고 있던 시절이어서 언론은 개헌추진위 현판식에 대해 전혀 보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손 비서관에게 현판식 행사를 알리는 전단을 만들어 뿌리도록 했다. 손 의원은 행사장으로 부산 대한극장을 잡았다. 극장에서 행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니 어마어마한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13만명이 모였다고 주장했는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7만~8만명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자 경찰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를 시작으로 개헌추진위 현판식 행사가 이어졌고, 직선제 개헌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無所屬 의원이 되다
신한민주당이 제기한 직선제 개헌에 맞서 민정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들고 나왔다. 여야는 양보 없이 팽팽하게 대치했다. 그러던 1986년 12월,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가 폭탄선언을 했다. 언론의 자유, 정치범 석방 및 사면·복권 등 7개항의 민주화 요구를 내걸면서 전두환 정권이 이를 수용할 경우 내각책임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을 표한 것이다.
사실 이민우 구상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YS와 DJ에 대한 반발이었다. 특히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린 YS는 당시 이민우 총재에게 총재직을 자기에게 넘기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민우 구상’이 파문을 일으키자 YS와 DJ는 1987년 5월 자기 계보 의원들을 이끌고 나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비민추계 의원 약간 명만 남은 신한민주당은 순식간에 무력화(無力化)됐다. 나는 그런 식으로 신한민주당을 망가뜨린 YS와 DJ가 미웠다. 통일민주당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신한민주당에 남을 수도 없었다. 나는 무소속(無所屬)을 택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논의 중단과 5공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을 선언했다. 이른바 4·13조치다. 나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15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致死)사건과 4·13조치에 격앙된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6월 민주항쟁이다.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5공 정권이 항복한 것이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YS와 DJ는 다시 갈라섰다. 1989년 11월, DJ는 평화민주당(평민당) 창당을 선언했다. YS와 DJ 모두 나를 영입하려 했다. 11월 5일 나는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 그해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승리했다. 양 김은 다시 한 번 역사에 죄를 지은 것이다. YS가 2위, DJ가 3위를 했다.
원내총무를 겸임한 부총재
이듬해 4월 26일의 제13대 총선에서 YS와 DJ의 관계는 역전됐다. DJ의 평민당이 70석을 차지, 125석을 차지한 민정당에 이어 제2당이 된 것이다. YS의 통일민주당은 59석에 그쳤다.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잠시 총재직에서 물러났던 YS는 그해 5월 12일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복귀했다. YS는 내게 부총재 자리를 제안하면서 “그동안 서운했던 것은 잊으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입당 후에도 한동안 찬밥신세였다. 하지만 나는 4년 정도 당직을 맡지 않으면서 국회의원으로서의 의정 활동에만 전념하고 싶었다. 전당대회 당일 나는 대회장에 가지 않고 태평로 세실다방으로 갔다. 내가 부총재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아도 YS 측에서 대리(代理)등록을 할 것 같아서 박관용 의원에게 부탁을 했다.
“전당대회장에 가서, YS 측이 나를 부총재 후보로 등록하려 하면 박 의원이 막아주시오.”
박 의원은 전당대회장에 갔다가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벌써 등록을 해버렸던데요.”
그렇게 해서 나는 통일민주당 부총재가 됐다.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었지만, 4당 체제 아래서 원내 제3당은 입지가 좁았다. 이듬해 8월 25일 YS는 나를 원내총무로 임명했다. 부총재가 원내총무를 겸임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내 앞에는 5공 청산 정국이라는 격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하에서도 통상적인 의정(議政)활동은 계속했다. 야당 의원들은 전처럼 정부의 잘못을 비판했다. 학생이나 재야(在野)인사들이 시위 등으로 구속되면,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공화당과 유정회(維政會)가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야당은 제 구실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이런 고민은 결국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기택의 반란’으로 나타나게 된다.
1973년 유진산(柳珍山) 총재가 타계(他界)했다. 김영삼(金泳三·YS), 이철승(李哲承), 정해영(鄭海永)씨 등이 당권(黨權)경쟁에 나섰다. 진산의 적통(嫡統)으로 여겨졌던 YS가 압도적 지지를 받아 신민당 총재가 됐다. YS는 독선적으로 당을 운영했다. 당직 인선에서도 비주류(非主流)를 거의 배려하지 않았다.
나는 YS 총재 시절, 최연소 정무위원이 됐다. 이것도 YS가 내가 이철승·신도환(辛道煥) 의원과 가깝다는 이유로 배제하려는 것을 고흥문(高興門) 의원이 “이기택 같은 사람을 배제해서 어쩌자는 것이냐?”고 강하게 밀어붙여 된 것이라고 들었다.
이런 식이다 보니 당내 화합이 되지 않았다. 당이 화합하지 않으니 대여(對與)투쟁에 힘이 빠졌다. YS는 자기 이름을 내는 일에는 요란했지만, 대여투쟁에서는 의미 있게 당을 제대로 끌고 가지 못했다.
李哲承의 中道統合論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비주류세력은 김영삼 총재를 축출하고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었다. 소석(素石) 이철승 의원이 대표최고위원, 김재광(金在光)·이충환(李忠煥)·신도환·유치송(柳致松) 의원 등이 최고위원이 됐다. 나는 당 3역(役) 가운데 서열이 가장 앞서는 사무총장이 됐다. 송원영(宋元英) 원내총무, 박일 정책위원회 의장은 나보다 열 살이나 많았다.
소석은 원래 YS나 DJ(김대중)보다 정치이력이 앞섰다. 광복 직후 반탁(反託)투쟁을 통해 정계(政界)에 입문한 그는 민주당 시절에는 소장파(少壯派)의 리더로 활약했다. 그를 경계한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그를 7년간이나 정계에서 추방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공부에 힘썼다. 그러는 사이 그는 미국식 의회민주주의에 젖어들었다.
소석이 오랜 정치방학 끝에 돌아와 정계에 복귀했을 때는 이미 YS와 DJ가 야당의 차세대 주자로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그는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競選), 1974년 신민당 총재 경선 등에서 잇달아 패배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강경노선을 걷는 양 김씨와 차별화를 위해 소석이 내놓은 것이 ‘중도통합론(中道統合論)’이었다. 하지만 대화와 타협을 내세우는 ‘중도통합론’은 민주주의가 정착된 구미(歐美)에서라면 몰라도, ‘민주화’라는 당시의 시대적 요구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소석의 아낌을 받고 있던 나부터도 ‘중도통합론’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최고위원 중에서도 김재광·이충환 의원 등은 나름 대여 강경노선을 주장했다. 하지만 최고위원들은 리더십이나 이론 무장 측면에서 이철승 대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소석의 ‘중도통합론’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李哲承, 내가 쓴 경고문 집어던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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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총장 시절 전방시찰을 하는 나(왼쪽에서 세 번째)와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오른쪽에서 세 번째). |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철승 대표는 리더십, 능력, 인품, 애국심 등에서 YS나 DJ를 훨씬 앞서는 분이었다. 술이나 담배, 잡기(雜技)는 일절 하지 않았다. 정치인들의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던 시절이었지만, ‘여자’ 문제로 구설에 오른 적도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내게 무척 잘해 주었다. 그의 유일한 문제는 ‘민주화’라는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중도통합론’을 고집했다는 점이었다.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여러 사람이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 YS는 물론, 이택희(李宅熙)·최형우(崔炯佑)·조윤형 의원 등 소장파 의원들이 당권 도전에 나섰다. 나도 당권에 도전하기로 했다. 신민당이 집단지도체제를 계속 유지할 것으로 판단하고, 최고위원이 되어 당 지도부에 진입, 당의 노선을 바꾸어보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당시 서울대 병원에서 풀려나 동교동 자택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DJ는 최고위원에 도전한 소장파 의원들을 불러들여 “소석 체제로는 안 된다. YS를 지지하라”고 설득했다. DJ의 설득에 당권 도전을 선언했던 의원들은 하나 둘 주저앉았다.
“少壯派가 뭐 이래?”
5·30 전당대회를 일주일인가, 열흘인가 앞두고 김상현 전 의원이 이른 아침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던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이 의원, DJ가 꼭 좀 보자고 합니다. 동교동에 같이 갑시다.”
“DJ가 무슨 얘길 할지 다 알고 있어요. 나는 DJ의 말을 듣고 움직였다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신문기자들도 나에게 경선에서 완주(完走)하라고 부추겼다. “소장파가 뭐 이래?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할 거 아니오?”
이협(李協, 13~16대 국회의원) 《중앙일보》 기자는 “당신도 사퇴할 거요? 4·19를 한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소?”라고 했다.
그런데 전당대회를 4~5일 앞두고 상황이 달라졌다. YS와 소석이 신민당 지도체제를 집단지도체제(최고위원 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총재 체제)로 변경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최고위원이라면 몰라도 단일지도체제하의 총재에 도전하는 것은 당초 내 생각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기가 막혔다. YS와 소석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해야 했다.
사무총장이었던 나는 대의원들의 지지성향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YS와 소석 모두 1차 투표에서 과반수(過半數)를 차지하기는 어려웠다. 2차 투표에서는 단순 다수 득표자가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다. 나는 일찌감치 ‘선명야당(鮮明野黨)’의 기치를 내건 YS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4·19세대의 대표정치인인 내가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은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국세청·중앙정보부의 압력
전당대회 이틀 전,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소석과 만났다. 소석이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요구했다.
“중도통합론을 수정하겠다고 기자들 앞에서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지지하겠습니다.”
소석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했다. 전당대회 당일 새벽, 소석은 기자들을 대동하고 서울 내자호텔에 있는 내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그는 다시 한 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대답했다.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더 이상 얘기하지 마십시오.”
소석은 오래 시간을 끌지 않고 새벽 1시쯤 돌아갔다. 그는 내심 ‘네 마음이 어디 있든지 간에, 결국 너는 내게로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내게는 엄청난 압력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국세청은 그해 정초부터 자형(姊兄・이임용)이 운영하는 태광그룹의 회계자료를 모두 압수해 갔다. 그때 압수해 간 자료들은 그해 11월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國葬)이 끝난 후에야 돌아왔다. 중앙정보부에서는 노골적으로 태광그룹 세무조사를 빌미로 이철승 대표 지지를 요구했다. 나는 “나는 국가를 생각해서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태광과는 인연을 끊었으니, 태광과는 연결시키지 마라”고 말했다. 자형은 죽기 전에, 나에 대해 가장 섭섭했던 것으로 그때의 일을 꼽았다. 공화당에 몸담고 있는 선배나 집안 어른뻘 되는 의원들도 내게 “잘 부탁한다”고 했다.
5월 30일 아침, 나는 정해영 전 국회 부의장 댁을 찾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 전 부의장이 전날 “당신을 지지할 대의원들이 우리 집에 모일 테니 다녀가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YS가 찾아왔다. 그도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는 “정 부의장 댁에 가봐야 한다”며 그를 외면했다. 아마 YS는 내가 그를 냉대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정해영 전 부의장 댁에는 10여 명의 대의원이 모여 있었다. 정 전 부의장이 말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 의원을 밀어주기로 했소, 잘 해 보시오.”
1차 투표. 재석 751표 가운데 소석이 292표, YS가 267표, 내가 92표를 얻었다. 그 밖에 신도환 최고위원이 87표, 김옥선 전 의원이 11표, 무효 2표가 나왔다. 2차 투표 준비를 위해 정회(停會)한 사이에 나는 사무총장실로 지지자 40~50명을 모았다. 내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소석에게 표를 몰아주자”, “YS에게 표를 몰아주자”, 의견이 분분했다. 사실 내 지지자들 중에서 골수 지지자들은 20~30%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원래 소석이나 YS를 지지했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말했다.
“지금 우리 표가 갈라지면 안 됩니다. 원래 소석을 지지하다가 내게 온 분들은 이제 와서 소석에게 돌아간다고 해도 손가락질을 받을 것입니다. YS를 지지하다 내게 온 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한 사람을 지지해서 총재로 만들어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과실(果實)이 있을 것입니다.”
내 말을 들은 지지자들은 “총장님께 맡기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다.
“내가 어떤 결심을 하든 여러분은 따라올 수 있겠습니까?”
“죽으나 사나 총장님을 따르겠습니다.”
DJ의 密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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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5·30 전당대회 당시 YS는 나를 창가로 데리고 가서 당사 앞에 모인 시민, 학생, 당원들을 가리키며 결심을 촉구했다. |
그때까지도 나는 가장 가까운 측근인 박관용(朴寬用)에게도 내 생각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애가 타서 내게 “어떻게 할 거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YS를 지지하자는 얘기였다. 나는 그에게 “가만히 있어 봐, 가만히 있어 봐”라며 달랬다.
당원 하나가 작은 주전자를 가지고 왔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속에 DJ의 편지가 있다”고 했다. 메모지에는 “YS를 지지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주전자는 아내가 들여보낸 것이었다. 전당대회장은 대의원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아내는 “총장님이 꼭 이 시각에 약(한약)을 드셔야 한다”면서 당원 편에 밀서(密書)가 들어 있는 주전자를 들여보냈다고 한다. 그때는 이미 내가 YS 지지를 마음먹은 후였기 때문에, DJ의 편지가 내 결심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YS는 대회장 입구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는 “도와줄 거냐, 안 도와줄 거냐?”고 물었다. YS가 내게 “이 총장, 이리와 봐요. 밖을 좀 보시오”라고 말했다. YS와 내가 창가에 모습을 나타내자, 당사 앞마당에 모인 당원, 시민, 학생들이 “김영삼! 이기택!”을 연호(連呼)했다.
대회장에서 나는 YS 지지를 선언했다. 결과는 YS 378표, 소석 367표. 11표 차이의 역전승(逆轉勝)이었다. 대회장 안팎에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대회장 밖으로 나오는데 누군가가 나를 무동 태웠다.
5·30 전당대회는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이었다. 5·30 전당대회를 통해 다시 총재가 된 YS는 ‘선명야당’의 기치를 높이 들고 박정희 정권에 맞섰다. 이어 YH사건이 터졌다. YS의 강공에 초조해진 박정희 정권은 YS 의원직 제명이라는 악수(惡手)를 두었고, 이는 부마(釜馬)항쟁으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의 수습책을 놓고 온건론을 주장하던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은 강경론자인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과 그를 비호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쏘았다. 10·26사태의 원인(遠因)은 5·30 전당대회였던 셈이다. 나는 4·18 고대생 데모를 통해 이승만 정권을, 5·30 전당대회를 통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YS의 독선
혹자는 전당대회가 열렸던 마포당사 앞에 모여든 당원, 시민, 학생들이 YS 지지와 민주화를 외치는 소리가 장내(場內)로 전달된 것이 대의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얘기다. 사실 그 마포당사를 마련한 것은 이철승 대표최고위원과 나였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YS는 시민회관(구 국회의사당, 현 서울시 의회)을 빌려서 하자고 주장했다. 반면에 소석과 나는 마포당사에서 하자고 주장했다. 소석으로서는 자신의 업적인 마포당사에서 전당대회를 여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소석의 발등을 찍는 결과가 됐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YS는 자신의 당선에 1등 공신 역할을 한 내게 “부총재와 원내총무 중 원하는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나는 부총재 쪽을 택했다. 단순히 부총재가 원내총무보다 높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초 당권에 도전할 때부터 내 뜻은 당의 노선을 결정하는 당 지도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YS가 1976년에 총재직을 잃었던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독선적인 당 운영 때문이었다. 3년 만에 총재로 복귀한 후에도 그의 독선적인 면모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당직 인선에서 다른 계파를 전혀 배려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박영록(朴永祿)·조윤형 부총재 등과 함께 총재실로 YS를 찾아갔다. 박영록 부총재가 우물우물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직에서 다른 계파도 좀 배려를 해주셔야…”
YS는 확 짜증을 냈다.
“부총재가 됐으면 됐지, 이 판에 무슨 당직까지 챙기려 듭니까?”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8각 성냥통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면서 소리쳤다.
“총재님,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야당 하는 게 돈이 됩니까, 뭐가 됩니까? 고생하면서 야당 해온 사람들에게 당직이라도 배려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도동만으로 야당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보세요!”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오자 비서실에 모여서 총재실의 추이를 살피고 있던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런 소동이 있은 후에 YS는 각 계파들에 4~5명씩 당직을 배분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밤 11시경이었다. 보험회사 총무국장으로 있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말했다.
“이상한 소식 못 들었나?”
“무슨 소식?”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청와대 쪽에서 총성이 들렸다고 한다.”
나는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4시경, 그 친구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래도 무슨 변고(變故)가 생긴 것 같다. 박 대통령이 총에 맞았다는 얘기가 있다.”
‘설마, 대통령이 총에 맞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나?’ 싶었다. 세수를 하고 난 후 몇 군데에 전화를 걸었다.
“어젯밤에 청와대 쪽에서 총성이 있었고, 박 대통령이 총에 맞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혹시 그런 얘기 들어보았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침 7시가 넘어 김성진(金聖鎭) 문화공보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 서거(逝去)’ 사실을 발표했다.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후 박정희 대통령이 매일 밤 술을 마시는 바람에 건강이 많이 나빠져서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거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 대통령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암투(暗鬪)를 벌이고 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박정희 시대가 그런 식으로 막을 내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순간 ‘유신독재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만사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분명히 있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12·12사태 직후 訪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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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1월 스칼라피노 교수(왼쪽)는 나를 초청해 한국 政情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
나는 12월 13일자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전날 12·12사태가 터졌다. 나는 스칼라피노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당분간 출국하기 어렵겠다”고 했다. 그는 “이해한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미국에 와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전두환(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이 총질까지 하면서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것은 분명 쿠데타였다. 하지만 이를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군부 쿠데타로 규정할 경우에는 정말로 군부를 자극하는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때문에 신민당이나 재야(在野)민주화세력은 속으로 걱정만 할 뿐, 내놓고 전두환 일파를 규탄하지는 못했다.
1980년 1월 4일, 나는 미국행(行)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장차 군부가 정치에 개입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 미국의 힘을 빌려서 군부를 주저앉히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버클리대에서 이렇게 강연했다.
“한국의 야당과 재야민주화세력, 학생들은 새로운 군부정권이 출현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만으로 부족할 경우, 미국이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교민들은 5·30 전당대회에서 YS를 지지해 민주화의 물꼬를 튼 나를 영웅 대접 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내게 “빨리 워싱턴으로 가서 각계 인사들에게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바로 위싱턴에 가서 내가 만나야 할 기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면서 스케줄을 직접 짜주었다. 덕분에 나는 워싱턴의 브루킹스연구소, 우드로윌슨연구소 등 싱크탱크들과 친한파(親韓派) 미국인들의 모임 등에 나가 한국정세를 설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전두환 장군 등 신군부의 성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이어 필라델피아와 뉴욕을 방문했다.
라이샤워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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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김의 분열을 경고한 라이샤워 교수(왼쪽). 1973년 11월 DJ를 만날 때의 모습이다. |
새벽 3시에 공항에 도착하니 한국학을 전공하는 젊은 조교수 한 사람이 나와 있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세력과도 가까운 그는 자기 연구실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역사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라이샤워 교수는 주일(駐日)미국대사를 지낸 거물(巨物)이었다.
라이샤워 교수의 집은 하버드대에서 20분쯤 되는 거리에 있는 숲 속에 있었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한국의 군부 문제 등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미국이 군부를 억제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론(持論)을 다시 펼쳤다.
“한국의 민간정치인들이나 국민들은 민주발전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18년간에 걸친 박정희 독재 때문에 군부만은 민간정치세력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부분만큼은 미국이 힘을 보태주어야 합니다.”
나는 일부 학생운동권에서 나오고 있는 반미(反美)정서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반미사상이 움트고 있습니다. 그들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미국이 도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군사정권이 등장하면, 한국의 민간정치인들은 반미세력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이 그동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 노력해 온 것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라이샤워 교수는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는 말은 100% 이해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참으로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미국은 지금 대통령 선거 와중에 있습니다. 외국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관심을 갖기 어려운 때입니다. 카터와 레이건 중 누가 되더라도, 당분간은 한국 문제에 신경을 쓸 분위기가 아닙니다.
결국 문제는 당신들 스스로 극복해 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군부의 등장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의 야당과 재야민주화세력, 학생들이 똘똘 뭉치는 것입니다. 특히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의 단결이 중요합니다. 지금 두 사람이 균열(龜裂)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그러면 군부가 반드시 등장할 것입니다.”
라이샤워 교수는 종이를 꺼내더니 두 김씨 앞으로 보내는 메모를 작성했다.
“두 분이 정치적으로 분열하면, 군부가 반드시 정치일선에 등장하게 됩니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두 분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라이샤워 교수는 메모를 내게 주면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이것을 두 김씨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안개政局’
14일간의 방미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YS와 DJ를 만나 라이샤워 교수의 경고를 전하면서, 두 사람의 단결을 역설했다. 나는 DJ가 신민당에 들어오고 재야와 학생들이 바깥에서 신민당을 둘러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YS는 재야에 머무르고 있는 DJ에게 신민당에 입당(入黨)해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정하자고 주장했다. DJ는 YS가 기득권(旣得權)을 갖고 있는 신민당에 입당하기를 거부하면서 재야에서 세력을 넓혀갔다. 결국 두 사람의 분열은 군부에 빌미를 주고 말았다.
YS와 DJ는 1987년에도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했다. 두 사람의 분열은 전두환 정권 8년, 노태우 정권 5년, 도합 13년 동안 군사정권이 연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두 사람이 역사에 큰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 서리(署理)를 겸임하면서, 권력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됐다. 하지만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개헌(改憲)에 1년이 소요된다고 주장하는 등 민주화 일정을 미루기만 했다. ‘안개정국(政局)’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정치일정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것이 신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정치권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이를 위해 5월 20일 임시국회를 열기로 했다.
의원직 총사퇴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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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무장병력과 탱크로 국회를 봉쇄하고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막았다.(원 안이 나) |
할 수 없이 국회 건너편에 있는 건물 다방에서 임시의원총회를 열었다. 나와 황낙주(黃珞周, 전 국회의장) 원내총무, 김동영(金東英, 전 정무장관) 의원 등이 회의를 주도했다. 모두 “이럴 수가 있느냐?”며 분개했다. 우리는 정부가 비상계엄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국회의원직을 총사퇴하기로 결의했다. 우리는 사퇴서를 작성한 후 상도동으로 YS를 찾아갔다. 의원직을 사퇴하자는 우리의 말에 YS는 아무 말도 않고 침묵을 지켰다. 5분여 만에 입을 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원직 사퇴는 당분간 보류하기로 합시다.”
YS는 그때까지만 해도 가느다란 미련을 가지고, 우리의 극단적 행동이 군부를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DJ는 사회혼란을 조장했다는 혐의로 계엄군에게 잡혀갔다가, 광주민주화항쟁이 발생한 후 내란죄(內亂罪)를 덮어쓰고 투옥(投獄)됐다. JP(김종필)는 부패혐의로 연행되어 재산을 강제헌납당했다. YS는 연금(軟禁)됐다.
李庭植 교수의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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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식 교수(왼쪽)의 초청으로 1982년부터 1년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연구원 생활을 했다. |
198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유펜)의 이정식(李庭植) 교수가 찾아왔다. 그가 말했다.
“서울에 와서 들으니, 이 부총재께서 앞으로 한국 정치의 중심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서예와 수석 수집으로 소일하고 있지요.”
이정식 교수는 정색을 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정치인은 이럴 때일수록 공부를 해야 합니다. 유펜에 얘기해서 연구실을 하나 내드릴 테니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시야를 넓히십시오. 지금 이 기간을 값있게 활용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니 옳은 얘기였다. 나도 대학 시절 이래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차분하게 공부할 시간을 갖지 못한 게 늘 아쉬웠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당신이 집구석에 있으니 귀찮던 참인데 잘 됐네. 빨리 가시구려.”
상도동으로 YS를 찾아갔다.
“미국에 가서 공부 좀 하고 오겠습니다.”
YS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공부는 무슨 공부…. 가기는 어딜 간다는 말이오. 이럴 때일수록 서울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지금 우리가 서울에서 하는 일이 뭐 있습니까? 언젠가는 정치활동을 재개(再開)하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총재님께서도 상도동 사람들 중에서 공부할 사람은 공부를, 운동할 사람은 운동을, 돈 벌 사람은 돈을 벌게 하면서 그날에 대비해야 합니다.”
YS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총재,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오.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모든 걸 접고 들어와야 합니다. 약속하시겠소?”
“물론입니다. 약속하겠습니다.”
YS 단식 소식에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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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S의 단식 소식을 접하고 귀국한 후, YS를 만나 단신 중단을 호소했다. |
“내가 미국으로 가겠다고 하면, 정부에서 여권은 내주겠지?”
“안기부의 허가를 받아야 할 겁니다.”
며칠 후 그는 “부장님이 부장실에 한번 다녀가시라고 한다”고 전했다. 유학성(兪學聖) 안기부장과는 안면이 있었다. 국회의원 시절 전방(前方) 국군장병위문행사 때 소장(少將)이던 그가 안내를 했었다. 하지만 유학성 부장을 만나러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부장실에는 안 간다. 여권 해주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며칠 후 여권이 나왔다. 유펜에는 1년 정도 머물렀다.
1983년 5월, YS가 광주민주화항쟁 3주년을 맞아 단식(斷食)투쟁을 하다가 다 죽게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모든 걸 접고 들어와야 한다”던 YS의 말이 떠올랐다. 바로 보따리를 쌌다.
YS의 단식은 1년 후 민주화운동추진협의회(민추협) 결성으로 이어졌다. 민추협이 출범하기 전 어느 날, YS가 “얘기 좀 할 게 있다”면서 다녀가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상도동 YS의 집을 찾아갔더니, YS가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여기에 사인 좀 해주시오.”
뭔가 하고 보니 민추협 가입 신청서였다. 순간 기분이 나빴다. 사전(事前)논의도 없이 종이 한 장 내밀면서 다짜고짜 사인을 하라니….
“나는 민추협에 가입하지 않겠습니다.”
YS는 깜짝 놀랐다.
“아니, 왜 가입하지 않겠다는 거요? 상도동, 동교동을 막론하고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은 모두 참여하기로 했소.”
“상도동, 동교동이 아니면 민주화운동을 안 한 겁니까? 이런 걸 하려면 미리 의논이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민추협 안 한다고 해서 이기택이가 민주화투쟁 안 했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3차 解禁
1984년 11월 30일 전두환 정권은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구(舊) 여야(與野) 정치인에 대한 3차 해금(解禁)을 단행했다. 이때 해금된 사람은 모두 84명이었다. 야권에서는 나를 비롯해 이철승·이민우·신도환·조윤형·정해영·이충환·김재광·박영록·송원영 전 의원 등이 해금됐다. 하지만 YS와 DJ 등 15명은 여전히 정치활동규제에 묶여 있었다.
아마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양 김씨는 묶어 놓고 옛 신민당 중진(重鎭)들을 해금하면 소석(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이 중심이 되어 신당(新黨)을 만들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당은 민한당(민주한국당)과 마찬가지로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두환 정권의 이러한 계산이 무너진 것은 나 때문이었다. 소석은 신당 창당 과정에서 YS와 DJ를 따르는 민추협 계열을 배제하려 했다. 나는 여기에 맞서 “신당에는 민추협 계열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3차 해금이 있기 2~3주 전쯤, 소석이 나와 김수한·송원영·박용만 전 의원을 불러 식사를 같이했다. 소석이 말했다.
“곧 3차 해금이 있을 모양이오. 새벽이 곧 옵니다. 우리도 신당 창당을 준비해야겠소.”
소석은 김수한 전 의원에게는 창당선언문과 정책을, 내게는 전국조직을 준비하라고 했다. 얼마 후 3차 해금이 곧 단행될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YS와 DJ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고민이 됐다. 나는 김수한 전 의원과 함께 서울 세검정 부근 올림피아호텔에서 소석을 만났다. 내가 물었다.
“선배님, 지금도 중도통합론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오.”
소석은 내게 중도통합론의 정당성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나를 설득시키지는 못했다.
“선배님, 아무리 저를 설득하려 해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전두환 정권과 타협이나 이론적 논쟁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반드시 투쟁력과 겸비해야 합니다.”
“누가 싸우지 말자고 했소? 이 부총재는 중도통합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지 않는 거 아니오?”
李哲承, 독자 新黨 추진
소석과 헤어지고 난 후, 나는 고흥문 전 신민당 최고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며칠 전 소석과 점심을 같이했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였다. 내가 말했다.
“선배님, 며칠 전에 소석과 만났을 때, 소석이 무슨 얘길 했습니까? 혹시 중도통합론 얘기를 했나요?”
“그렇지. 말도 마시오. 소석이야 중도통합론 아니면 사그라지는 사람 아니오?”
“야당을 하려면 중도통합론으로 되겠습니까?”
고흥문 전 최고위원의 대답은 단호했다.
“안 되지, 안 돼! 그걸로는 야당이 안 돼! 중도통합론은 이미 민한당이 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걸 할 수야 있나?”
마포 가든호텔에서 YS계의 김동영 전 의원과 만나 신당 창당을 논의했다. 내가 말했다.
“이제 신당을 만들어야 하는데, 소석밖에는 대표로 세울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소석은 여전히 ‘중도통합론’만 주장하니 어쩌면 좋겠나?”
김동영은 경상도 사나이답게 시원시원했다.
“소석이라도 모시고 당을 만들어 국회에 들어가야 싸울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1984년 12월 중순, 소석이 구 신민당 노장파(老壯派) 정치인들과 마포 성산회관이라는 불고깃집에서 신당 발기인대회를 갖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나는 YS와 DJ계가 중심이 된 민추협을 배제하는 신당 창당은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이택돈·이택희·김형광·김현수·김옥선 등 소장파 정치인 9명과 만났다. 내가 말했다.
“내일 아침 10시에 소석이 성산회관에서 신당 발기인 대회를 갖는다고 합니다. 거기에 절대로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면 바로 신당이 창당됩니다. 하지만 그 당으로 출마하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내년 총선에서 당선될 수 없을 것입니다. 국민이 그 당에는 표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소석이 추진하는 신당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산회관 발기인대회에 가지 않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그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다음 날 아침 10시에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날 밤 늦게 이택돈 전 의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 부총재, 소석이 자꾸 전화를 걸어오는데…. 내일 발기인대회에 참석만 하면 안 될까?”
“에이, 사람이 좀 야물어야지 그게 뭐요? 그래서 어떻게 정치를 하겠소? 다른 소리 말고 내일 아침 10시에 플라자호텔에서 봅시다.”
YS, 李敏雨 추천
다음 날 아침 약속시각에 플라자호텔로 나갔더니, 아홉 명 모두 모여 있었다. 옛 신민당 원로인 정해영 전 국회 부의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소석한테 안 갔다. 나는 너희 편이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내 이름을 써라.”
잠시 후 박한상(朴漢相) 전 의원도 전화를 걸어와 정 전 부의장과 같은 뜻을 전했다. 결국 소석이 추진하던 신당은 무산되고 말았다.
신당 창당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어느 날, YS가 김동영 전 의원을 통해 나를 보자고 했다. 상도동으로 찾아갔더니, YS가 물었다.
“당 대표는 누구로 할 생각이오?”
“그야 대의원들이 결정하겠지요.”
“그러지 말고…”
“안 그래도 적당한 분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던 참입니다. 소석이 하고 싶어하지만…”
YS는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내가 한 사람 추천해 볼까요?”
“좋은 사람이 있으면 추천해 주십시오.”
“이민우(李敏雨)씨는 어때요?”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었다. 이민우씨는 그때까지 5선(選) 의원으로 국회 부의장, 신민당 부총재 등을 지냈다. 정치인으로 흠이 없는 분이었지만, 그렇다고 두드러진 분도 아니었다. 나도 ‘시골 노인’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YS가 말했다.
“이민우씨는 관록이 있고 중후(重厚)한 분으로, 우리와 의논해서 당을 잘 이끌어갈 만한 분이오. DJ와도 이미 의논이 됐어요. 이 부총재가 결심해 주면 좋겠소.”
“두 분이 그렇게 합의하셨다면, 그렇게 하지요.”
YS는 내 두 손을 잡고 “고맙다”고 했다. 그래서 이민우 전 국회 부의장이 신한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이 됐다.
부산에서 촉발된 直選制 改憲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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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한민주당의 직선제 개헌 투쟁은 부산에서의 현판식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왼쪽부터 문정수, 나, 이민우 총재, YS. |
신한민주당은 1985년 2·12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신한민주당은 29.26%의 득표율로 67석을 차지했다. 5공(共) 정권의 관제야당이었던 민한당은 19.68%를 얻어 35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의원들이 다투어 신한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민한당은 얼마 후 사라지고 말았다.
신한민주당은 직선제(直選制) 개헌을 전면에 내걸고 전두환 정권과 투쟁하기 시작했다. 신한민주당은 헌법개정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서울은 이민우 총재, 부산은 나, 경남은 최형우, 대구-경북은 김수한, 광주-전남은 이중재(李重載), 강원은 김동영 의원이 맡았다.
서울을 시작으로 개헌추진위 현판식을 갖기로 했다. 1985년 3월 11일 서울에서의 현판식은 경찰의 저지로 무산됐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부총재단 중에서 가장 젊었던 내가 “다음 현판식은 부산에서 하자”고 나섰다. 300만원을 만들어 손태인(孫泰仁, 제16대 국회의원) 비서관 편에 내려보냈다.
전두환 정권이 언론을 틀어쥐고 있던 시절이어서 언론은 개헌추진위 현판식에 대해 전혀 보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손 비서관에게 현판식 행사를 알리는 전단을 만들어 뿌리도록 했다. 손 의원은 행사장으로 부산 대한극장을 잡았다. 극장에서 행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니 어마어마한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13만명이 모였다고 주장했는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7만~8만명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자 경찰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를 시작으로 개헌추진위 현판식 행사가 이어졌고, 직선제 개헌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無所屬 의원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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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에 항의해 15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
사실 이민우 구상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YS와 DJ에 대한 반발이었다. 특히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린 YS는 당시 이민우 총재에게 총재직을 자기에게 넘기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민우 구상’이 파문을 일으키자 YS와 DJ는 1987년 5월 자기 계보 의원들을 이끌고 나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비민추계 의원 약간 명만 남은 신한민주당은 순식간에 무력화(無力化)됐다. 나는 그런 식으로 신한민주당을 망가뜨린 YS와 DJ가 미웠다. 통일민주당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신한민주당에 남을 수도 없었다. 나는 무소속(無所屬)을 택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논의 중단과 5공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을 선언했다. 이른바 4·13조치다. 나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15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致死)사건과 4·13조치에 격앙된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6월 민주항쟁이다.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5공 정권이 항복한 것이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YS와 DJ는 다시 갈라섰다. 1989년 11월, DJ는 평화민주당(평민당) 창당을 선언했다. YS와 DJ 모두 나를 영입하려 했다. 11월 5일 나는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 그해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승리했다. 양 김은 다시 한 번 역사에 죄를 지은 것이다. YS가 2위, DJ가 3위를 했다.
원내총무를 겸임한 부총재
이듬해 4월 26일의 제13대 총선에서 YS와 DJ의 관계는 역전됐다. DJ의 평민당이 70석을 차지, 125석을 차지한 민정당에 이어 제2당이 된 것이다. YS의 통일민주당은 59석에 그쳤다.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잠시 총재직에서 물러났던 YS는 그해 5월 12일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복귀했다. YS는 내게 부총재 자리를 제안하면서 “그동안 서운했던 것은 잊으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입당 후에도 한동안 찬밥신세였다. 하지만 나는 4년 정도 당직을 맡지 않으면서 국회의원으로서의 의정 활동에만 전념하고 싶었다. 전당대회 당일 나는 대회장에 가지 않고 태평로 세실다방으로 갔다. 내가 부총재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아도 YS 측에서 대리(代理)등록을 할 것 같아서 박관용 의원에게 부탁을 했다.
“전당대회장에 가서, YS 측이 나를 부총재 후보로 등록하려 하면 박 의원이 막아주시오.”
박 의원은 전당대회장에 갔다가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벌써 등록을 해버렸던데요.”
그렇게 해서 나는 통일민주당 부총재가 됐다.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었지만, 4당 체제 아래서 원내 제3당은 입지가 좁았다. 이듬해 8월 25일 YS는 나를 원내총무로 임명했다. 부총재가 원내총무를 겸임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내 앞에는 5공 청산 정국이라는 격랑이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