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71년 사회문화담당비서관으로 언론계·학계와의 소통 담당
⊙ 李厚洛 비서실장, 자신에 대한 비판 담긴 보고서도 朴 대통령에 올려
⊙ 朴 대통령, 화장실에서 만난 비판논객 宋建鎬에게 “물건도 시원찮은 자식이…”
⊙ 金炯旭, “JP가 대통령 되면 나는 이민 간다”며 朴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과시
金鐘信
⊙ 83세. 동아대 법학과 졸업.
⊙ 《부산일보》·《서울신문》·MBC 기자, 《부산일보》편집부국장, 대통령 사회문화비서관,
부산 MBC 사장 역임.
⊙ 李厚洛 비서실장, 자신에 대한 비판 담긴 보고서도 朴 대통령에 올려
⊙ 朴 대통령, 화장실에서 만난 비판논객 宋建鎬에게 “물건도 시원찮은 자식이…”
⊙ 金炯旭, “JP가 대통령 되면 나는 이민 간다”며 朴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과시
金鐘信
⊙ 83세. 동아대 법학과 졸업.
⊙ 《부산일보》·《서울신문》·MBC 기자, 《부산일보》편집부국장, 대통령 사회문화비서관,
부산 MBC 사장 역임.
1966년 2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동남아(東南亞) 순방길에 나섰다. 이를 위해 우리 정부는 10만5000달러를 주고 독일 루프트한자 소속 보잉 707 비행기 한 대를 빌려야 했다. 사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할 때에는 루프트한자 비행기 좌석의 일부를 빌려서 갔고, 그 비용도 서독정부가 대신 내주었다.
당시만 해도 동남아 국가들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인 데 비해 말레이시아는 323달러, 태국은 120달러, 대만은 150달러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말레이시아였다. 말레이시아의 발전된 모습을 나는 그해 출판한 《영시(零時)의 횃불》에 이렇게 기록했다.
<말레이시아 1차 산업의 수출액만 하더라도 연 20억 달러가 넘는다. 작년도 우리나라 총 수출고가 1억7천여 만 달러이니 자그마치 15배가 넘었다. 그뿐 아니라 국민 개인소득의 단면만 보더라도 평균 여섯 사람당 자동차가 한 대씩 돌아가는 꼴이어서 시골의 어느 농가라도 차고 없는 집을 보기 드물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총 대수가 4만1천 대인데 이곳은 겨우 인구 9백만에 150만 대가 된다고 하니 그저 아연할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앞으로 연 1만 대를 생산한다 하더라도 150년 후에나 이 나라를 따라갈 수 있는 셈이다.>
그때 우리나라는 말레이시아에 오징어, 타이어, 직물 등을 수출하고 있었다. 몇 안 되는 말레이시아 교민사회에서는 이런 수출품을 거래할 때 외국상인들을 통하기보다는 교민들을 통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대사관에서는 이런 부분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대사는 나중에 국무총리를 거쳐 10·26 후 대통령이 되는 최규하(崔圭夏)씨였다. 우리 수행기자들은 현지 교민들의 말을 듣고, 대사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그런데도 최 대사는 나를 보면 “정말 수고하십니다”라면서 허리를 굽혔다. ‘박정희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에 대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은 박 대통령을 위해 큰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朴 대통령의 금 간 軍用시계
1966년 10월, 나는 1961년부터 내가 지켜본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담은 책 《영시의 횃불》을 펴냈다. 처음 책을 낼 때에는 ‘이런 책이 팔리겠나’ 싶었다. 그래서 출판사 사장과 이익 분배 등에 대해 사전(事前)에 별다른 약속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가만히 보니 책이 무척 잘 팔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을 비교적 일찍부터 알았던 현직 기자가 쓴 책이어서 관심을 끌었던 게 아닌가 싶다.
출판사 사장에게 돈을 안 주냐고 했더니, 책값의 50%를 인세(印稅)로 주겠다고 했다. 최고 수준의 저자가 보통 책값의 10% 정도를 인세로 받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대우였다. 그건 그만큼 책이 잘 팔린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양심상 인세를 50%나 받을 수는 없었다. 10%만 받겠다고 했다.
부산시장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그는 술을 한잔한 후, “책 좀 주시오”라면서 수표를 내놓았다. 책 몇천 권 값이었다. 여당 의원들도 현금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이 20만 권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사양했다. 모두들 《영시의 횃불》을 뿌려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점수를 따겠다는 생각들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나도 생각이 좀 달라졌다. 출판사 사장에게 내게 직접 주문이 들어오는 책에 대해서는 책값의 40%를 내가 먹겠다고 했다. 대신 출판사 몫 60%는 바로 현금결제(決濟)를 해주기로 했다. 그로서도 이의가 없었다.
매일같이 몇백만 원이 들어왔다. 그 돈으로 서울 서교동 집과 코로나 승용차를 샀다.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은 내가 차(車)를 샀다는 소식을 듣고, 내 차에 경호실 번호판을 달아주었다. 거칠 게 없었다.
1966년 10월 필리핀에서 월남전 참전 7개국 정상(頂上)회담이 열렸다. 나도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했다. 마닐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박 대통령이 나를 찾았다. 잠시 짬이 나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대통령 전용칸으로 가서 인사를 올리는데, 박 대통령의 손목에 찬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에 금이 간 군용(軍用)시계였다. 그때 나는 《영시의 횃불》 인세로 산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었다. 대통령은 고물시계를 차고 있는데, 수행기자인 나는 고급 외제시계를 차고 있다고 생각하니 면구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각하, 저하고 시계 바꿔 차시죠!”
“왜 시계를 바꿔? 시간만 맞으면 됐지. 금시계가 제일인가? 이게 얼마나 정이 든 시계인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근대화문제연구회
1967년경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으로부터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뜻이었다. 기자로 한창 신나게 일하고 있던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듬해 봄 다시 제안이 왔다. 그 제안을 받고 언론인으로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가 기자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은 군대 시절, 일본 작가 기쿠다 가즈오(菊田一夫)의 소설 《그대 이름은》을 읽고서였다. 이 소설은 전후(戰後) 일본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예리하게 파헤치는 군인 출신 기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육군 대위였는데, 공교롭게도 소설 속 주인공 역시 예비역 육군 대위였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사회의 겨자씨’ 역할을 하는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 무렵 나 자신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던 올바른 기자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통령과 가까운 기자라고 간덩이가 부어가지고 까불거리기나 하던 게 당시 나의 모습이었다. ‘계속 이렇게 지내느니, 공무원으로 전직(轉職)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맡게 된 자리는 사회문화담당비서관이었다. 언론계, 학계 등 사회 각계각층과 ‘소통(疏通)’하는 자리였다.
특히 자주 접촉한 곳은 최문환(崔文煥) 서울대 총장 등이 참여하고 있던 근대화문제연구회였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근대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멘토단’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구범모(具範謨, 9·10대 국회의원) 서울대 문리대 교수, 박진환(朴振煥, 대통령경제특보) 서울대 농대 교수, 정재각(鄭在覺, 동국대 총장) 고려대 문과대학장, 강병규(姜秉奎, 9대 국회의원) 중앙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예컨대 1968년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이 《아시아의 드라마》를 펴냈을 때 근대화문제연구회에서 이를 번역해 요약본을 만들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렸었다.
최문환 서울대 총장은 1968년 4월 근대화문제연구회 좌담회에서 ‘농촌개혁의용군’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박 대통령은 보고서에 “대단히 적절한 아이디어이며 꼭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방향을 연구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메모를 남겼다. 이게 새마을운동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宋建鎬, 朴 대통령의 농담 한마디에 누그러져
나는 박정희 대통령과 언론계 사이의 소통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남재희(南載熙, 11~13대 국회의원, 노동부장관) 《조선일보》 논설위원, 송건호(宋建鎬 《한겨레》 회장) 《조선일보》 논설위원, 이명영(李命英, 성균관대 교수)・양흥모(梁興謨) 《중앙일보》 논설위원 등을 자주 만났다. 그들이 전하는 세상소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중앙정보부 등에서 수집해서 가져오는 정보보다 더 정확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그들을 청와대로 초치(招致)해 의견을 들어보라고 권했다.
송건호씨는 소문난 반골(反骨) 기자였다. 그는 나와는 친했다. 한번은 박 대통령이 송건호, 임홍빈(任洪彬, 문학사상사 회장)씨 등 몇몇 언론인에게 저녁을 샀다. 그런데 식사 중에 보니 박 대통령과 송건호씨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나 싶었는데 박 대통령과 송건호씨가 어깨동무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다음 날 만난 송건호씨는 이렇게 말했다.
“소변을 보고 있는데 누가 목을 빼서 내 물건을 보고 있더군. 누군가 하고 보니, 박 대통령이야. 박 대통령은 ‘물건도 시원찮은 자식이…. 떼기놈!’ 그러더군. 난 박 대통령이 그렇게 재미있는 분인 줄 몰랐어. 앞으로는 박 대통령 비판 안 할 거야.”
실제로 송건호씨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누그러뜨렸다. 박 대통령도 후일 그를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단에 포함시키는 등 그에게 잘해 주었다.
“陸 여사를 ‘敬母’라고 부르자”
박정희 대통령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시절에는 육영수(陸英修) 여사나 가족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영시의 횃불》과 관련해 육영수 여사가 신범식(申範植)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이의를 제기해 온 적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일상생활에 대해 육 여사가 대답한 부분이 있었다. 육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은 ~했다”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부분을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하셨다”로 고쳐달라는 요구였다. “내가 바른 말 고운 말을 하자고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존댓말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쓰면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신 대변인에게 “아무리 육 여사라고 해도 책을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고치라고 하느냐? 그렇게는 못 한다”고 거절했다.
나중에 육 여사를 뵈었을 때, 나는 “사모님, 너무 그렇게 쓰면 책이 재미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육 여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번은 국어학자 한갑수(韓甲洙) 교수가 청와대 기자실에 들렀다. 그는 육영수 여사에 대한 호칭으로 ‘경모(敬母)’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국모(國母)’라고 했는데, 지금은 ‘사모님’, ‘여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어요.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시대에는 적절치 않은 것 같으니, ‘경모’라고 하면 어떨까요?”(실제로 당시 육군보안사령관이던 김재규는 육영수 여사를 호칭할 때 ‘경모님’이라고 하곤 했다.)
《중앙일보》는 “경모가 무슨 소리냐. 육 여사는 기저귀 냄새 나는 부인일 뿐이지” 하는 식으로 비판하는 글을 내보냈다. 나는 그 글을 보고 《중앙일보》에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영부인을 ‘기저귀 냄새 나는 부인’이라고 하느냐”고 항의했다. 그 글을 쓴 대학교수는 나중에 내게 전화를 걸어와 “영부인을 일반 국민의 부인처럼 친근한 존재로 표현하려다가 그만 그런 표현을 썼다.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해명했다.
陸 여사, “나를 비판하는 언론에 항의하지 마라”
얼마 후 육영수 여사가 나를 불렀다. 나는 《중앙일보》와 그 글을 쓴 교수가 사과했다고 보고를 드렸다. 육 여사가 말했다.
“김 선생님이 그럴 것 같아서 부른 거예요. 어느 여기자는 나를 두고 아주 심한 욕을 했지만, 아무 소리 하지 않았어요.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도 다 내가 청와대에 있기 때문 아니겠어요? 그런 일이 있다고 언론사에 항의하고 그러지 마세요.”
육영수 여사의 얘기를 들으며 ‘참 마음씨가 고운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몇몇 측근하고 술자리를 하는 것을 싫어했다. 박 대통령의 술자리와 관련해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얘기가 돌기도 했다. 한번은 육 여사가 나를 불렀다.
“고위층에 있는 분들이 술을 좋아하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각하는 간도 안 좋은데 술 많이 드시면 안 되는데요….”
육영수 여사는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 박종규 경호실장을 비롯해 박 대통령을 술자리로 이끄는 측근들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아마 박 대통령의 술 문제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육 여사를 두고 밖에서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고 할 정도로 단호한 면이 있지만, 박 대통령이 술 마시는 것 등에 대해서는 속상해 하는 것을 보면서 그분도 한 남자의 아내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왜 내게 이런 얘기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내가 관료 출신이 아니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박정희 대통령에게 의견을 올리곤 하는 것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았다.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했지만, 박 대통령의 자녀들과 접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나이 어린 영식(令息) 박지만 군과 가끔 놀아준 적은 있지만 큰 영애(令愛)인 박근혜 현 대통령은 얌전했고, 작은 영애는 활달했다는 정도의 기억만 남아 있다.
朴 대통령, “주인이 종을 버릴 수 없다”
아마 이후락 비서실장과 박종규 경호실장도 육영수 여사가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 그리고 부정축재 등과 관련된 비판적 여론 등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후락 실장이 울산, 박종규 실장이 마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이 청와대에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박 대통령을 뵈었을 때, 이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각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후락 실장하고 박종규 실장을 내보내려 하십니까? 두 사람이 국회의원 출마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누가 그런 소릴 해?”(박 대통령은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경우에 따라 말을 놓곤 했다.)
“소문이 그렇습니다. 각하, 이후락 실장은 각하께 충신입니다. 그를 내보내면 기자 사회에서는 각하보고 ‘의리 없다’고 할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주인이 종을 버릴 수도 없고, 종이 주인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는 일이지….”
이건 이후락 실장을 버리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박 대통령 방에서 나와서 이후락 실장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이후락 실장은 무척 좋아했다.
“종신아, 수고했다. 수고했어!”
이후락 실장이 내게 하대를 한 것은 내가 그의 동생과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다. 며칠 후 박정희 대통령이 문태갑(文胎甲, 《서울신문》 사장 역임), 정재호(鄭在虎, 9대 국회의원 역임) 기자 등을 만나는 자리에 이후락 실장이 슬쩍 들어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게 며칠 전 했던 이야기를 이후락 실장에게 해주면서 신임을 표시했다.
이후락 실장은 통이 컸다. 사회문화비서관인 내가 학계나 언론계 인사들과 접촉한 후 작성해 올린 보고서에는 이후락 실장에 대해 비판하는 얘기도 들어 있었다. 이 실장은 그런 내용이 담겨 있는 보고서도 그대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렸다. 그는 “도승지가 상소문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보부장 하고 싶어 했던 朴鐘圭
1969년 10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물러나고 김계원(金桂元) 전 육군참모총장이 중앙정보부장이 되던 날이었다. 박종규 실장이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애들도 다 컸는데, 경호실장만 계속하고 있는 게 창피해요. 내 밑에 있는 아무개 아무개도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까. 걔들도 실장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 무렵 박종규 실장은 경호실장 자리에서 벗어나, 중앙정보부장이나 주미대사를 하고 싶어 했다. 사실 그는 영어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 등과도 친한 사이였다. 후일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 데에는 박 실장의 역할이 컸다.
박종규 실장은 내게 “당신이 각하께 얘기 좀 해달라”고 부추겼다. 난감했지만, 박 실장이 하도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큰 마음먹고 박 대통령 앞에서 입을 열었다. 곁에는 박 대통령의 근접 경호관이 있었다. 박 실장이 내가 제대로 얘기하는지 지켜보라고 들여보낸 것 같았다.
“각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박 실장이 서운해 하고 있습니다. 이제 애들도 다 컸는데, 경호실장만 계속하고 있는 게 창피하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은 눈치가 빨랐다.
“박종규가 가라고 그러지? 정보부장 하고 싶어 하는 걸 내가 알아. 윤필용(尹必鏞, 수도경비사령관)이도, 김재규도 박종규를 정보부장시키라고 하는데, 실은 자기들이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박 실장은 단순한 사람 아닙니까. 박 실장을 불러서 ‘너는 나와 생명을 같이할 사람 아니냐’고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됐어. 시끄러워.”
박 대통령 방에서 나온 뒤, “박 실장은 단순한 사람” 운운한 대목만 빼고, 박종규 실장에게 안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박 실장은 “잘했다”고 했다. 며칠 후 박종규 실장을 만났더니 싱글벙글이었다.
“김 비서관, 오늘 접견실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데 각하께서 오시더니 ‘종규야, 니는 나하고 생명을 같이할 사람 아니냐’라고 하셨어요. 하하하.”
中情에 불려가다
1969년 1월 어느 날이었다. 신범식 대변인이 내게 와서 말했다. “큰일 났소. 정보부에서 나하고 당신을 오라고 하는데….”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요?”
“모르겠소.”
“XX 놈들! 가지 마세요.”
나는 김시진(金詩珍) 정보비서관에게 가서 “정보부에서 부르는데 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김 비서관은 “가더라도 이후락 실장에게 얘기하고 가라”고 했다. 이후락 실장에게 얘기한 후, 나 혼자 정보부로 가서 나를 부른 전재구 3국장을 만났다. 5연대 사병 출신인 그는 나와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건방지게 네가 왜 나를 오라 가라 하는 거야! 정보부 국장이 대통령비서관을 불러?”
내가 세게 나가자 전 국장은 기가 죽었다.
“사장님(김형욱 중앙정보부장-기자 주)이 시켜서…”
전재구 국장이 나를 부른 이유를 말하는데, 그 이유가 어이가 없었다. 당시 신문 1월 1일자 1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년사와 사진, 신년휘호 등을 싣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데 그 얼마 전 《신아일보》 정준모 기자를 만났더니, “김형욱 정보부장이 《신아일보》에 박정희 대통령 신년사와 사진을 옆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기의 AP통신 인터뷰 기사를 실으라고 압력을 가해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XX 놈”이라고 했다. 그 얘기가 김형욱 부장 귀에 들어가서 나를 불렀다는 것이었다.
전재구 국장은 “여기까지 오셨으니, 해명하는 편지나 한 장 써주고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이런 짓 할 시간이 있으면, 달아난 이수근이나 잡아라”라고 쏘아주고 나왔다(그날은 1967년 3월 판문점을 통해 귀순했던 전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이 해외로 탈출했다는 보도가 나온 날이었다. 자유를 찾아 귀순했던 이수근은 정보부의 감시와 핍박을 견디다 못해 변장을 하고 위장여권을 이용해 출국했으나, 월남에서 체포·압송된 후 ‘위장간첩’으로 몰려 처형됐다).
金炯旭, “애니타임 웰컴”
정보부에서 돌아온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뵈었다. 당시 나는 소년용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여유가 있을 때면 언제든지 찾아뵐 수 있었다. 국무총리도 아무 때나 대통령을 만날 수 없었고, 비서실장이나 정보부장 정도가 대통령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각하, 정보부장 잘라버리세요.”
“무슨 소리야?”
나는 정보부에 불려갔다 온 얘기를 하고 난 후 이렇게 말했다.
“각하. 대통령비서관이 정보부에 불려갔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창피해서 비서관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차라리 그만두겠습니다. 정보부 불려다니면서 비서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기분이 나빴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내 일을 이야기했다. 이 실장은 김형욱 정보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대통령비서실장이라 해도 정보부장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크게 따지지는 못하고 “김종신 비서관의 일로 대통령께서 화가 났다”는 정도로밖에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 후 김형욱 정보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야, 김종신이! 당장 와!”
정보부장실로 들어가려는데, 전재구 국장이 방에서 나왔다. 그는 김형욱 부장에게 얻어맞았는지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가 나를 노려봤다. 김형욱 부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 김 비서관, 기자 할 때는 잘 봐주더니, 비서관이 되고서는 왜 날 못 잡아먹어서 그러는 거야?”
김 부장은 정보부에서 나를 부른 것은 자기 뜻이 아니었다면서 “전재구 때문에 내가 괜히 망신을 당했다. 그놈 그래서 나한테 터지고 나간 것 아니겠느냐”라며 나를 달랬다. 그러면서 자기가 얼마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는지를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그는 육사(陸士) 동기이자 혁명동지였던 김종필(金鍾泌)씨 욕을 마구 하면서 “만일 김종필이가 대통령이 되면, 나는 미국으로 이민 가겠다”고 말했다. 헤어지기 전 김형욱 부장은 쿠바산 시가를 한 통 주면서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 전화해.”
“우리 같은 쫄짜가 어떻게 부장님께 그러겠소?”
“애니 타임 웰컴(Anytime welcome).”
그러던 사람이 정보부장에서 밀려난 후에는 불만에 가득 차서 지내다가 결국 미국으로 망명해 박정희 대통령을 험담하던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사람 일이란 정말 모를 일이다.
申範植, “군인들 소개해 달라”
신범식 대변인은 이후락 비서실장과 사이가 안 좋았다. 지난 2월 타계(他界)한 정광모(鄭光謨) 전 한국소비자연맹 회장은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는데, 자기가 관찰한 청와대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그 책을 마뜩지 않게 여겨, 신범수 대변인을 불렀다. 그런데 사실 그 책은 이후락 실장이 지원해 줘서 나온 책이었다. 신범수 대변인이 그 사실을 얘기하자 박 대통령은 이후락 실장을 불렀다. 신 대변인 때문에 박 대통령에게 불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락 실장은 신 대변인의 따귀를 때렸다. 신범식 대변인이 내게 말했다.
“김 비서관, 내가 이후락이보다 못한 게 뭐요?”
“많이 있죠.”
“뭐?”
“첫째, 요즘은 다 군인 판인데, 이후락 실장은 군(軍) 출신이지만 대변인은 아니잖습니까? 둘째, 이 실장은 영어를 잘하는데 대변인은 영어를 못하잖습니까? 그래서 대변인은 안 되는 겁니다.”
신범식 대변인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영어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군 출신이 아닌 것은 군인들을 잘 사귀면 되는 것 아니겠소? 그러니 군을 잘 아는 김 비서관이 사람 좀 소개해 줘요.”
그가 하도 졸라서 내가 소개해 준 사람이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군부(軍部) 실세였던 윤필용 장군이었다. 이때부터 신 대변인은 윤필용 장군과 어울렸다. 신 대변인은 후일 《서울신문》 사장으로 있을 때,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노쇠했으니, 후계자는 형님(이후락)이 되셔야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고했다. 이게 발단이 되어 ‘윤필용사건’이 일어났다.
4·8 抗命 파동
1969년 4월 8일 국회에서 권오병(權五炳) 문교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통과됐다. 당시 의석 분포상 여당인 공화당 내 친(親) JP계(系) 의원들이 가담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방출장 중이었다. 청와대를 지키고 있던 나는 해임건의안 가결(可決) 소식을 접하고 ‘큰일 났다’ 싶었다. 박정희 대통령 성정(性情)에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권 장관을 찾아갔다. 권 장관은 반가워했다. 내가 말했다.
“장관님, 그동안 큰일 많이 하셨습니다.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를 도입한 덕에 애들 건강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권 장관님이 잘못해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게 아닙니다. 국회의원들 부탁을 잘 안 들어줬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권 장관은 내 얘기에 “그렇지, 그렇지” 하면서 좋아했다.
“아마 각하께서는 장관님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해임건의안은 대통령이 이에 따라야 하는 법적 구속력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남는 게 무엇입니까? 결국 각하와 국회가 맞붙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하고 국회가 싸우면 나라 꼴은 뭐가 되겠습니까? 모두 공멸(共滅)하고 맙니다. 꽃도 피면 지는 법 아닙니까? 장관님께서 스스로 물러나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권 장관은 검사 출신이어서 그런지 결심이 빨랐다. 내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여 그날로 보따리를 쌌다.
朴 대통령에게 抗命者 선처하도록 진언
박정희 대통령은 그날 밤 청와대로 돌아왔다. 내가 인사를 드려도 받지 않고 그대로 2층 관저로 올라갔다(당시 청와대 1층에는 집무실과 비서진의 업무공간이, 2층에는 박 대통령 가족의 관저가 있었다). 나는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권오병 장관을 만나 사퇴를 권유한 일을 얘기했다. 얼마 후 박 대통령이 2층 서재로 나를 불렀다.
“왜 쓸데없는 짓을 했노? 앉아.”
“제가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당의장, 사무총장, 원내총무 등을 혼내실 생각을 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잘못 했으면 혼 좀 나야지.”
“각하, 그들도 따지고 보면 각하의 비서관 아닙니까? 그들을 다 잘라버리고 잡아넣으면, 각하의 권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권오병 장관도 그걸 알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난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무섭게 입을 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빌다시피 얘기했다.
“각하,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각하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지금은 군대를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던 혁명 때와는 다릅니다. 이제 그때와는 달라져야 합니다. 파격적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제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박 대통령은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 직접 따주면서 “한잔하라”고 했다. 그때 박 대통령이 기르던 강아지 방울이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박 대통령 무릎에 앉았다. 박 대통령은 “이놈도 참 불쌍한 놈”이라면서 방울이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나도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 이야기를 했다. 그러는 사이에 박 대통령이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각하, 한 번만 봐주이소”라고 사정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알았어. 내 많이 손대지는 않을게.”
그러면서도 박 대통령은 “아무개 아무개는 꼭 손을 봐야겠다”고 했다. 나는 “알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물러 나왔다.
“기노시타 도키치로가 되려 했는데…”
1969년 10월 17일 3선 개헌안(改憲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한 후 개각(改閣)이 단행됐다. 3선 개헌의 선봉에 섰던 이후락 비서실장과 김형욱 정보부장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 비서실장으로는 김정렴(金正濂) 상공부 장관이 임명됐다.
비서실장이 바뀌면서 내 입장이 미묘해졌다. 나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후락 전 실장과 가까운 사이였다. 때문에 내게는 ‘이후락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나는 스스로를 ‘박정희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어도 ‘이후락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다.
1970년 12월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사의(辭意)를 표했다. 김 실장은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썼다.
“저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가 되어 각하의 미투리를 지키려 했는데, 지금 보니 그럴 생각도, 자격도 없습니다. 이제 그만두겠습니다.”
기노시타 도키치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휘하의 병졸로 있을 때의 이름이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추운 날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미투리를 가슴에 품고 덥혀서 내놓아,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려 했지만 그만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붙잡지 말아 달라는 내 뜻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일제(日帝)시대에 교육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편지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바로 사표를 수리했다.
그 후 한동안은 중앙정보부에 자리가 날 것이다, 혹은 공화당 전국구 의원 자리를 줄 것이다 하는 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자리는 나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서운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볼 일이 있어 마산에 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진해로 향하는 갈림길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먼발치에서 인사라도 드릴 생각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박 대통령을 태운 차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200m쯤 앞에서 차가 섰다. 전부터 잘 아는 신동관 경호실 차장이 달려왔다.
“각하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차가 있는 데로 가니, 박 대통령이 차에서 내렸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노니까 번질번질하네. 어떻게 지내?”
“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금년에는 농사가 잘되겠지?” 하더니, “건강 조심하고 잘 있으소”라고 말한 후 차에 올랐다. 눈물이 났다. ‘저런 분한테 내가 서운한 마음을 품었구나’ 생각하니 죄송스러웠다.
朴 대통령 傳記를 日語로 번역
1971년 6월 나는 부산 MBC 사장으로 임명됐다. 내가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구술(口述)을 바탕으로 쓴 소년용 박정희 대통령 전기(傳記)를 읽은 재일교포 조남부(趙南富)씨가 그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는 “일본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무서운 독재자로만 알려져 있는데, 전기를 읽어보니 참 훌륭하고 인간적인 분이더라”면서 “박 대통령의 그런 면모를 꼭 일본에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일본어 전문번역가에게 맡겨 보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당시 부산 MBC 총무부장과 함께 내가 직접 번역을 하기로 했다. 번역을 하다 보니, 청와대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한번은 이 책과 관련해 육영수 여사가 나를 호출한 적이 있었다. 전기 중에 박정희 대통령의 모친이 마흔이 훨씬 넘어 박 대통령을 잉태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낙태(落胎)를 하려고 간장을 많이 마셨다는 대목이 있었다. 육 여사는 그 대목을 빼달라고 했다.
“대통령 어머니가 그랬다는 게 얼마나 촌스럽고 창피한 일입니까? 지만이는 ‘아빠가 얼굴이 새카만 게 그때 할머니가 간장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거냐?’고 합니다. 빼주세요.”
나는 거절했다. “그 시절 우리 어머니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박 대통령께서 그때 대통령이었던 것도 아닌데 부끄러울 게 뭐 있습니까? 그런 걸 빼면 안 됩니다.”
일본어로 번역한 박 대통령 전기는 《산케이신문》에 연재됐다. 원고료로 10만 엔이 나왔다. 우리 돈으로 1000만원쯤 되는 큰돈이었다. 나는 그 돈을 박 대통령에게 보냈다.
“각하께서 구술해 주신 내용을 바탕으로 쓴 각하의 전기를 가지고 번 돈이니 이 돈은 각하의 것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朴 대통령, “이제 그만두어야겠어”
얼마 후인 1975년 12월 방송협회 부회장 자격으로 청와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모금한 불우이웃돕기 성금 전달 행사였다.
박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면서 나는 내심으로 박 대통령이 나를 반갑게 대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전에도 박 대통령은 여름휴가 때면 나를 저도 별장으로 부르곤 했다. 그런 사이인 만큼 내가 박 대통령 전기를 번역해 일본 신문에 연재했던 것이나, 그에 대한 고료를 보내드린 일에 대해 한마디 간단한 치하(致賀)가 있으려니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나와도 가벼운 악수만 나누었다.
‘내가 그동안 박 대통령에 대한 책을 몇 권을 썼는데, 이번에 일본어로 박 대통령 전기를 번역해 일본 신문에 연재한 게 얼마나 큰 홍보인데…. 박 대통령이 내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속이 상해서 행사장에서 나온 후 우리 회사 서울지사장과 함께 술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서는 그 사이에 야단이 나 있었다. 청와대에서 나를 여러 차례 찾았다는 것이었다. 청와대로 달려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까 임자를 보고 바로 연락했는데, 왜 이제 오노?”
“각하께서 저를 모른 척하시는 것 같아서 술 한잔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은 적적해 보였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이젠 그만두어야겠어.”
그런 모습을 보니, 옛날 청와대 비서관 시절처럼 당돌한 소리는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라시대 김춘추부터 시작해서 내가 아는 역사 지식을 총동원해 가면서 “대통령은 아무나 합니까”라고 했다.
“고려시대 이후 중국에 처녀를 바치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는 이 나라 영의정이 명(明)나라 장수의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기도 했잖습니까? 그러던 나라를 각하께서 이만큼 일으켜놓은 것 아닙니까?”
“야당 사람들은 데모를 해도 왜 꼭 미국대사관 앞에 가서 합니까? 그게 다 사대주의(事大主義) 근성 때문입니다.”
무리한 司正활동 비판
박 대통령이 1주일 전 국무총리 서리(署理)로 임명한 최규하(崔圭夏)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박 대통령은 “내가 그만두면 최 총리에게 이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는 10년 전 박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당시 주(駐)말레이시아 대사였던 최규하씨가 수행기자들에게 허리를 굽히던 모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보니 최규하 총리는 각하에 대한 충성심이 무척 강하더군요. 각하의 뜻을 받들어서 잘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한참을 얘기하다가 박 대통령의 얼굴을 보니 싱긋이 웃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기분이 좋아졌다’ 싶어서 나는 당시 청와대 사정(司正)담당특별보좌관실의 무리한 행태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드렸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서정쇄신(庶政刷新)을 외치면서 사정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고 있었다. 사정특보실에서는 실적 위주로 일을 추진했고, 그러다 보니 일선 현장에서는, 엄격하게 법을 적용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慣行) 등에서 보면 다소 억울한 일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부산의 모 경찰서장 등이 그런 식으로 옷을 벗게 된 사례를 말씀드렸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잘못은 바로잡아야겠지만, 너무 잘못한 것만 파헤치는 식으로 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래서는 일선 행정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하면, 쫓겨난 사람들은 각하를 원수(怨讐)로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사정팀이 하는 일에 좀 인정을 두고, 잘못하는 것만 잡아낼 게 아니라, 잘하는 것도 찾아서 칭찬하고 그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자신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정 캠페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조금 언짢아하는 것 같더니, 일선에서 나타나는 폐해에 대해 듣자 사정팀에 대해 화를 냈다. 옆에 배석했던 유혁인 정무수석비서관은 ‘김종신이, 시원시원하게 말 잘한다’ 하는 표정이었다.
落馬
박정희 대통령은 “김 사장이 보내준 돈은 학생새마을운동 하는 데 보태쓰라고 보냈다”는 얘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순간 ‘아이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렇게 쓰시다니…. 괜히 드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통령과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것이 박 대통령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얼마 후 사정특별보좌관실에서 운영하는 특수수사대가 부산 MBC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회사를 먼지 털 듯 샅샅이 뒤졌고, 문제점을 찾아내려 했다. 박 대통령 앞에서 사정특보실의 활동을 비판한 데 대한 보복인 듯 싶었다. 그들은 우리 회사 편성국장이 미국 출장을 갔다가 당시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촬영장비 등을 반입(搬入)한 것을 ‘밀수(密輸)’로 엮어 넣었다. 결국 나는 부산 MBC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이 1976년 10월 26일, 10・26 사태가 나기 꼭 3년 전이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나는 ‘백수’가 됐다. 허탈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원망도 일었다.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는 보고가 올라갔어도, 한번만 나를 불러 확인해 보시지 않고…’ 하는 생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기야 국사(國事)에 바쁘신 분이 어떻게 일일이 나 같은 놈의 일까지 챙기시겠나’ 하는 생각도 했다.
고인 물웅덩이에 고랑을 쳐서 흐르게 한 사람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처음 부임했을 때 박정희 장군의 첫 모습에서부터, 기자 시절 부산 해수욕장이나 저도 별장에서 박 대통령을 뵌 일, 청와대 비서관으로서 모셨던 일 등이 머리를 스쳐갔다.
1966년 펴낸 《영시의 횃불》의 서문에 나는 이렇게 썼다.
<물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썩는 법이다. 지난날의 우리의 역사가 고인 물과 같았다고 하면 잘못된 표현일까? 그리고 고인 물웅덩이에 고랑을 쳐서 흐르게 한 것이 바로 박정희 장군이라고 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전혀 불가능하다는 전망이 없는 한, 안 하고 답보하는 것보다는,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는, 해보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역사는 한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움츠려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고 나아가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시의 횃불》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는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여태껏 우리가 치러온 지도자 중에서 가장 나라를 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마 지금 우리 국민 대부분도 박정희 대통령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나중에 박 대통령의 최후에 대한 책을 읽었다. 10·26 당시 박 대통령의 시신을 살펴본 군의관(軍醫官)이 박정희 대통령이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핀, 해진 혁대, 그리고 국내 공장에서 만든 평범한 세이코 손목시계를 차고 있어서 대통령인 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대목을 접했다. 순간 1966년 필리핀행 비행기 안에서 유리에 금이 간 군용시계를 차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쏟아졌다.⊙
당시만 해도 동남아 국가들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인 데 비해 말레이시아는 323달러, 태국은 120달러, 대만은 150달러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말레이시아였다. 말레이시아의 발전된 모습을 나는 그해 출판한 《영시(零時)의 횃불》에 이렇게 기록했다.
<말레이시아 1차 산업의 수출액만 하더라도 연 20억 달러가 넘는다. 작년도 우리나라 총 수출고가 1억7천여 만 달러이니 자그마치 15배가 넘었다. 그뿐 아니라 국민 개인소득의 단면만 보더라도 평균 여섯 사람당 자동차가 한 대씩 돌아가는 꼴이어서 시골의 어느 농가라도 차고 없는 집을 보기 드물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총 대수가 4만1천 대인데 이곳은 겨우 인구 9백만에 150만 대가 된다고 하니 그저 아연할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앞으로 연 1만 대를 생산한다 하더라도 150년 후에나 이 나라를 따라갈 수 있는 셈이다.>
그때 우리나라는 말레이시아에 오징어, 타이어, 직물 등을 수출하고 있었다. 몇 안 되는 말레이시아 교민사회에서는 이런 수출품을 거래할 때 외국상인들을 통하기보다는 교민들을 통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대사관에서는 이런 부분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대사는 나중에 국무총리를 거쳐 10·26 후 대통령이 되는 최규하(崔圭夏)씨였다. 우리 수행기자들은 현지 교민들의 말을 듣고, 대사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그런데도 최 대사는 나를 보면 “정말 수고하십니다”라면서 허리를 굽혔다. ‘박정희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에 대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은 박 대통령을 위해 큰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朴 대통령의 금 간 軍用시계
1966년 10월, 나는 1961년부터 내가 지켜본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담은 책 《영시의 횃불》을 펴냈다. 처음 책을 낼 때에는 ‘이런 책이 팔리겠나’ 싶었다. 그래서 출판사 사장과 이익 분배 등에 대해 사전(事前)에 별다른 약속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가만히 보니 책이 무척 잘 팔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을 비교적 일찍부터 알았던 현직 기자가 쓴 책이어서 관심을 끌었던 게 아닌가 싶다.
출판사 사장에게 돈을 안 주냐고 했더니, 책값의 50%를 인세(印稅)로 주겠다고 했다. 최고 수준의 저자가 보통 책값의 10% 정도를 인세로 받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대우였다. 그건 그만큼 책이 잘 팔린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양심상 인세를 50%나 받을 수는 없었다. 10%만 받겠다고 했다.
부산시장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그는 술을 한잔한 후, “책 좀 주시오”라면서 수표를 내놓았다. 책 몇천 권 값이었다. 여당 의원들도 현금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이 20만 권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사양했다. 모두들 《영시의 횃불》을 뿌려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점수를 따겠다는 생각들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나도 생각이 좀 달라졌다. 출판사 사장에게 내게 직접 주문이 들어오는 책에 대해서는 책값의 40%를 내가 먹겠다고 했다. 대신 출판사 몫 60%는 바로 현금결제(決濟)를 해주기로 했다. 그로서도 이의가 없었다.
매일같이 몇백만 원이 들어왔다. 그 돈으로 서울 서교동 집과 코로나 승용차를 샀다.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은 내가 차(車)를 샀다는 소식을 듣고, 내 차에 경호실 번호판을 달아주었다. 거칠 게 없었다.
1966년 10월 필리핀에서 월남전 참전 7개국 정상(頂上)회담이 열렸다. 나도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했다. 마닐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박 대통령이 나를 찾았다. 잠시 짬이 나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대통령 전용칸으로 가서 인사를 올리는데, 박 대통령의 손목에 찬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에 금이 간 군용(軍用)시계였다. 그때 나는 《영시의 횃불》 인세로 산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었다. 대통령은 고물시계를 차고 있는데, 수행기자인 나는 고급 외제시계를 차고 있다고 생각하니 면구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각하, 저하고 시계 바꿔 차시죠!”
“왜 시계를 바꿔? 시간만 맞으면 됐지. 금시계가 제일인가? 이게 얼마나 정이 든 시계인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근대화문제연구회
1967년경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으로부터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뜻이었다. 기자로 한창 신나게 일하고 있던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듬해 봄 다시 제안이 왔다. 그 제안을 받고 언론인으로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가 기자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은 군대 시절, 일본 작가 기쿠다 가즈오(菊田一夫)의 소설 《그대 이름은》을 읽고서였다. 이 소설은 전후(戰後) 일본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예리하게 파헤치는 군인 출신 기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육군 대위였는데, 공교롭게도 소설 속 주인공 역시 예비역 육군 대위였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사회의 겨자씨’ 역할을 하는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 무렵 나 자신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던 올바른 기자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통령과 가까운 기자라고 간덩이가 부어가지고 까불거리기나 하던 게 당시 나의 모습이었다. ‘계속 이렇게 지내느니, 공무원으로 전직(轉職)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맡게 된 자리는 사회문화담당비서관이었다. 언론계, 학계 등 사회 각계각층과 ‘소통(疏通)’하는 자리였다.
특히 자주 접촉한 곳은 최문환(崔文煥) 서울대 총장 등이 참여하고 있던 근대화문제연구회였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근대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멘토단’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구범모(具範謨, 9·10대 국회의원) 서울대 문리대 교수, 박진환(朴振煥, 대통령경제특보) 서울대 농대 교수, 정재각(鄭在覺, 동국대 총장) 고려대 문과대학장, 강병규(姜秉奎, 9대 국회의원) 중앙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예컨대 1968년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이 《아시아의 드라마》를 펴냈을 때 근대화문제연구회에서 이를 번역해 요약본을 만들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렸었다.
최문환 서울대 총장은 1968년 4월 근대화문제연구회 좌담회에서 ‘농촌개혁의용군’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박 대통령은 보고서에 “대단히 적절한 아이디어이며 꼭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방향을 연구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메모를 남겼다. 이게 새마을운동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宋建鎬, 朴 대통령의 농담 한마디에 누그러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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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논설위원 시절의 송건호 전 《한겨레》 회장. |
송건호씨는 소문난 반골(反骨) 기자였다. 그는 나와는 친했다. 한번은 박 대통령이 송건호, 임홍빈(任洪彬, 문학사상사 회장)씨 등 몇몇 언론인에게 저녁을 샀다. 그런데 식사 중에 보니 박 대통령과 송건호씨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나 싶었는데 박 대통령과 송건호씨가 어깨동무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다음 날 만난 송건호씨는 이렇게 말했다.
“소변을 보고 있는데 누가 목을 빼서 내 물건을 보고 있더군. 누군가 하고 보니, 박 대통령이야. 박 대통령은 ‘물건도 시원찮은 자식이…. 떼기놈!’ 그러더군. 난 박 대통령이 그렇게 재미있는 분인 줄 몰랐어. 앞으로는 박 대통령 비판 안 할 거야.”
실제로 송건호씨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누그러뜨렸다. 박 대통령도 후일 그를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단에 포함시키는 등 그에게 잘해 주었다.
“陸 여사를 ‘敬母’라고 부르자”
박정희 대통령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시절에는 육영수(陸英修) 여사나 가족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영시의 횃불》과 관련해 육영수 여사가 신범식(申範植)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이의를 제기해 온 적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일상생활에 대해 육 여사가 대답한 부분이 있었다. 육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은 ~했다”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부분을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하셨다”로 고쳐달라는 요구였다. “내가 바른 말 고운 말을 하자고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존댓말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쓰면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신 대변인에게 “아무리 육 여사라고 해도 책을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고치라고 하느냐? 그렇게는 못 한다”고 거절했다.
나중에 육 여사를 뵈었을 때, 나는 “사모님, 너무 그렇게 쓰면 책이 재미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육 여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번은 국어학자 한갑수(韓甲洙) 교수가 청와대 기자실에 들렀다. 그는 육영수 여사에 대한 호칭으로 ‘경모(敬母)’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국모(國母)’라고 했는데, 지금은 ‘사모님’, ‘여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어요.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시대에는 적절치 않은 것 같으니, ‘경모’라고 하면 어떨까요?”(실제로 당시 육군보안사령관이던 김재규는 육영수 여사를 호칭할 때 ‘경모님’이라고 하곤 했다.)
《중앙일보》는 “경모가 무슨 소리냐. 육 여사는 기저귀 냄새 나는 부인일 뿐이지” 하는 식으로 비판하는 글을 내보냈다. 나는 그 글을 보고 《중앙일보》에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영부인을 ‘기저귀 냄새 나는 부인’이라고 하느냐”고 항의했다. 그 글을 쓴 대학교수는 나중에 내게 전화를 걸어와 “영부인을 일반 국민의 부인처럼 친근한 존재로 표현하려다가 그만 그런 표현을 썼다.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해명했다.
陸 여사, “나를 비판하는 언론에 항의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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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후반 육영수 여사가 지방을 시찰하고 있다. |
“김 선생님이 그럴 것 같아서 부른 거예요. 어느 여기자는 나를 두고 아주 심한 욕을 했지만, 아무 소리 하지 않았어요.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도 다 내가 청와대에 있기 때문 아니겠어요? 그런 일이 있다고 언론사에 항의하고 그러지 마세요.”
육영수 여사의 얘기를 들으며 ‘참 마음씨가 고운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몇몇 측근하고 술자리를 하는 것을 싫어했다. 박 대통령의 술자리와 관련해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얘기가 돌기도 했다. 한번은 육 여사가 나를 불렀다.
“고위층에 있는 분들이 술을 좋아하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각하는 간도 안 좋은데 술 많이 드시면 안 되는데요….”
육영수 여사는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 박종규 경호실장을 비롯해 박 대통령을 술자리로 이끄는 측근들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아마 박 대통령의 술 문제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육 여사를 두고 밖에서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고 할 정도로 단호한 면이 있지만, 박 대통령이 술 마시는 것 등에 대해서는 속상해 하는 것을 보면서 그분도 한 남자의 아내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왜 내게 이런 얘기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내가 관료 출신이 아니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박정희 대통령에게 의견을 올리곤 하는 것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았다.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했지만, 박 대통령의 자녀들과 접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나이 어린 영식(令息) 박지만 군과 가끔 놀아준 적은 있지만 큰 영애(令愛)인 박근혜 현 대통령은 얌전했고, 작은 영애는 활달했다는 정도의 기억만 남아 있다.
朴 대통령, “주인이 종을 버릴 수 없다”
아마 이후락 비서실장과 박종규 경호실장도 육영수 여사가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 그리고 부정축재 등과 관련된 비판적 여론 등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후락 실장이 울산, 박종규 실장이 마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이 청와대에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박 대통령을 뵈었을 때, 이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각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후락 실장하고 박종규 실장을 내보내려 하십니까? 두 사람이 국회의원 출마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누가 그런 소릴 해?”(박 대통령은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경우에 따라 말을 놓곤 했다.)
“소문이 그렇습니다. 각하, 이후락 실장은 각하께 충신입니다. 그를 내보내면 기자 사회에서는 각하보고 ‘의리 없다’고 할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주인이 종을 버릴 수도 없고, 종이 주인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는 일이지….”
이건 이후락 실장을 버리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박 대통령 방에서 나와서 이후락 실장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이후락 실장은 무척 좋아했다.
“종신아, 수고했다. 수고했어!”
이후락 실장이 내게 하대를 한 것은 내가 그의 동생과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다. 며칠 후 박정희 대통령이 문태갑(文胎甲, 《서울신문》 사장 역임), 정재호(鄭在虎, 9대 국회의원 역임) 기자 등을 만나는 자리에 이후락 실장이 슬쩍 들어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게 며칠 전 했던 이야기를 이후락 실장에게 해주면서 신임을 표시했다.
이후락 실장은 통이 컸다. 사회문화비서관인 내가 학계나 언론계 인사들과 접촉한 후 작성해 올린 보고서에는 이후락 실장에 대해 비판하는 얘기도 들어 있었다. 이 실장은 그런 내용이 담겨 있는 보고서도 그대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렸다. 그는 “도승지가 상소문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보부장 하고 싶어 했던 朴鐘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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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규 경호실장(가운데)과 김종신 전 비서관. |
“이제 애들도 다 컸는데, 경호실장만 계속하고 있는 게 창피해요. 내 밑에 있는 아무개 아무개도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까. 걔들도 실장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 무렵 박종규 실장은 경호실장 자리에서 벗어나, 중앙정보부장이나 주미대사를 하고 싶어 했다. 사실 그는 영어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 등과도 친한 사이였다. 후일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 데에는 박 실장의 역할이 컸다.
박종규 실장은 내게 “당신이 각하께 얘기 좀 해달라”고 부추겼다. 난감했지만, 박 실장이 하도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큰 마음먹고 박 대통령 앞에서 입을 열었다. 곁에는 박 대통령의 근접 경호관이 있었다. 박 실장이 내가 제대로 얘기하는지 지켜보라고 들여보낸 것 같았다.
“각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박 실장이 서운해 하고 있습니다. 이제 애들도 다 컸는데, 경호실장만 계속하고 있는 게 창피하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은 눈치가 빨랐다.
“박종규가 가라고 그러지? 정보부장 하고 싶어 하는 걸 내가 알아. 윤필용(尹必鏞, 수도경비사령관)이도, 김재규도 박종규를 정보부장시키라고 하는데, 실은 자기들이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박 실장은 단순한 사람 아닙니까. 박 실장을 불러서 ‘너는 나와 생명을 같이할 사람 아니냐’고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됐어. 시끄러워.”
박 대통령 방에서 나온 뒤, “박 실장은 단순한 사람” 운운한 대목만 빼고, 박종규 실장에게 안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박 실장은 “잘했다”고 했다. 며칠 후 박종규 실장을 만났더니 싱글벙글이었다.
“김 비서관, 오늘 접견실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데 각하께서 오시더니 ‘종규야, 니는 나하고 생명을 같이할 사람 아니냐’라고 하셨어요. 하하하.”
中情에 불려가다
1969년 1월 어느 날이었다. 신범식 대변인이 내게 와서 말했다. “큰일 났소. 정보부에서 나하고 당신을 오라고 하는데….”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요?”
“모르겠소.”
“XX 놈들! 가지 마세요.”
나는 김시진(金詩珍) 정보비서관에게 가서 “정보부에서 부르는데 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김 비서관은 “가더라도 이후락 실장에게 얘기하고 가라”고 했다. 이후락 실장에게 얘기한 후, 나 혼자 정보부로 가서 나를 부른 전재구 3국장을 만났다. 5연대 사병 출신인 그는 나와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건방지게 네가 왜 나를 오라 가라 하는 거야! 정보부 국장이 대통령비서관을 불러?”
내가 세게 나가자 전 국장은 기가 죽었다.
“사장님(김형욱 중앙정보부장-기자 주)이 시켜서…”
전재구 국장이 나를 부른 이유를 말하는데, 그 이유가 어이가 없었다. 당시 신문 1월 1일자 1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년사와 사진, 신년휘호 등을 싣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데 그 얼마 전 《신아일보》 정준모 기자를 만났더니, “김형욱 정보부장이 《신아일보》에 박정희 대통령 신년사와 사진을 옆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기의 AP통신 인터뷰 기사를 실으라고 압력을 가해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XX 놈”이라고 했다. 그 얘기가 김형욱 부장 귀에 들어가서 나를 불렀다는 것이었다.
전재구 국장은 “여기까지 오셨으니, 해명하는 편지나 한 장 써주고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이런 짓 할 시간이 있으면, 달아난 이수근이나 잡아라”라고 쏘아주고 나왔다(그날은 1967년 3월 판문점을 통해 귀순했던 전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이 해외로 탈출했다는 보도가 나온 날이었다. 자유를 찾아 귀순했던 이수근은 정보부의 감시와 핍박을 견디다 못해 변장을 하고 위장여권을 이용해 출국했으나, 월남에서 체포·압송된 후 ‘위장간첩’으로 몰려 처형됐다).
金炯旭, “애니타임 웰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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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앞)과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뒤). |
“각하, 정보부장 잘라버리세요.”
“무슨 소리야?”
나는 정보부에 불려갔다 온 얘기를 하고 난 후 이렇게 말했다.
“각하. 대통령비서관이 정보부에 불려갔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창피해서 비서관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차라리 그만두겠습니다. 정보부 불려다니면서 비서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기분이 나빴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내 일을 이야기했다. 이 실장은 김형욱 정보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대통령비서실장이라 해도 정보부장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크게 따지지는 못하고 “김종신 비서관의 일로 대통령께서 화가 났다”는 정도로밖에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 후 김형욱 정보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야, 김종신이! 당장 와!”
정보부장실로 들어가려는데, 전재구 국장이 방에서 나왔다. 그는 김형욱 부장에게 얻어맞았는지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가 나를 노려봤다. 김형욱 부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 김 비서관, 기자 할 때는 잘 봐주더니, 비서관이 되고서는 왜 날 못 잡아먹어서 그러는 거야?”
김 부장은 정보부에서 나를 부른 것은 자기 뜻이 아니었다면서 “전재구 때문에 내가 괜히 망신을 당했다. 그놈 그래서 나한테 터지고 나간 것 아니겠느냐”라며 나를 달랬다. 그러면서 자기가 얼마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는지를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그는 육사(陸士) 동기이자 혁명동지였던 김종필(金鍾泌)씨 욕을 마구 하면서 “만일 김종필이가 대통령이 되면, 나는 미국으로 이민 가겠다”고 말했다. 헤어지기 전 김형욱 부장은 쿠바산 시가를 한 통 주면서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 전화해.”
“우리 같은 쫄짜가 어떻게 부장님께 그러겠소?”
“애니 타임 웰컴(Anytime welcome).”
그러던 사람이 정보부장에서 밀려난 후에는 불만에 가득 차서 지내다가 결국 미국으로 망명해 박정희 대통령을 험담하던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사람 일이란 정말 모를 일이다.
申範植, “군인들 소개해 달라”
신범식 대변인은 이후락 비서실장과 사이가 안 좋았다. 지난 2월 타계(他界)한 정광모(鄭光謨) 전 한국소비자연맹 회장은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는데, 자기가 관찰한 청와대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그 책을 마뜩지 않게 여겨, 신범수 대변인을 불렀다. 그런데 사실 그 책은 이후락 실장이 지원해 줘서 나온 책이었다. 신범수 대변인이 그 사실을 얘기하자 박 대통령은 이후락 실장을 불렀다. 신 대변인 때문에 박 대통령에게 불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락 실장은 신 대변인의 따귀를 때렸다. 신범식 대변인이 내게 말했다.
“김 비서관, 내가 이후락이보다 못한 게 뭐요?”
“많이 있죠.”
“뭐?”
“첫째, 요즘은 다 군인 판인데, 이후락 실장은 군(軍) 출신이지만 대변인은 아니잖습니까? 둘째, 이 실장은 영어를 잘하는데 대변인은 영어를 못하잖습니까? 그래서 대변인은 안 되는 겁니다.”
신범식 대변인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영어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군 출신이 아닌 것은 군인들을 잘 사귀면 되는 것 아니겠소? 그러니 군을 잘 아는 김 비서관이 사람 좀 소개해 줘요.”
그가 하도 졸라서 내가 소개해 준 사람이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군부(軍部) 실세였던 윤필용 장군이었다. 이때부터 신 대변인은 윤필용 장군과 어울렸다. 신 대변인은 후일 《서울신문》 사장으로 있을 때,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노쇠했으니, 후계자는 형님(이후락)이 되셔야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고했다. 이게 발단이 되어 ‘윤필용사건’이 일어났다.
4·8 抗命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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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을 시찰하고 있다. 오른쪽 끝이 김종신 당시 대통령비서관이다. |
박정희 대통령은 지방출장 중이었다. 청와대를 지키고 있던 나는 해임건의안 가결(可決) 소식을 접하고 ‘큰일 났다’ 싶었다. 박정희 대통령 성정(性情)에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권 장관을 찾아갔다. 권 장관은 반가워했다. 내가 말했다.
“장관님, 그동안 큰일 많이 하셨습니다.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를 도입한 덕에 애들 건강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권 장관님이 잘못해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게 아닙니다. 국회의원들 부탁을 잘 안 들어줬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권 장관은 내 얘기에 “그렇지, 그렇지” 하면서 좋아했다.
“아마 각하께서는 장관님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해임건의안은 대통령이 이에 따라야 하는 법적 구속력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남는 게 무엇입니까? 결국 각하와 국회가 맞붙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하고 국회가 싸우면 나라 꼴은 뭐가 되겠습니까? 모두 공멸(共滅)하고 맙니다. 꽃도 피면 지는 법 아닙니까? 장관님께서 스스로 물러나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권 장관은 검사 출신이어서 그런지 결심이 빨랐다. 내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여 그날로 보따리를 쌌다.
朴 대통령에게 抗命者 선처하도록 진언
박정희 대통령은 그날 밤 청와대로 돌아왔다. 내가 인사를 드려도 받지 않고 그대로 2층 관저로 올라갔다(당시 청와대 1층에는 집무실과 비서진의 업무공간이, 2층에는 박 대통령 가족의 관저가 있었다). 나는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권오병 장관을 만나 사퇴를 권유한 일을 얘기했다. 얼마 후 박 대통령이 2층 서재로 나를 불렀다.
“왜 쓸데없는 짓을 했노? 앉아.”
“제가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당의장, 사무총장, 원내총무 등을 혼내실 생각을 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잘못 했으면 혼 좀 나야지.”
“각하, 그들도 따지고 보면 각하의 비서관 아닙니까? 그들을 다 잘라버리고 잡아넣으면, 각하의 권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권오병 장관도 그걸 알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난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무섭게 입을 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빌다시피 얘기했다.
“각하,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각하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지금은 군대를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던 혁명 때와는 다릅니다. 이제 그때와는 달라져야 합니다. 파격적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제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박 대통령은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 직접 따주면서 “한잔하라”고 했다. 그때 박 대통령이 기르던 강아지 방울이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박 대통령 무릎에 앉았다. 박 대통령은 “이놈도 참 불쌍한 놈”이라면서 방울이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나도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 이야기를 했다. 그러는 사이에 박 대통령이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각하, 한 번만 봐주이소”라고 사정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알았어. 내 많이 손대지는 않을게.”
그러면서도 박 대통령은 “아무개 아무개는 꼭 손을 봐야겠다”고 했다. 나는 “알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물러 나왔다.
“기노시타 도키치로가 되려 했는데…”
1969년 10월 17일 3선 개헌안(改憲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한 후 개각(改閣)이 단행됐다. 3선 개헌의 선봉에 섰던 이후락 비서실장과 김형욱 정보부장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 비서실장으로는 김정렴(金正濂) 상공부 장관이 임명됐다.
비서실장이 바뀌면서 내 입장이 미묘해졌다. 나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후락 전 실장과 가까운 사이였다. 때문에 내게는 ‘이후락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나는 스스로를 ‘박정희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어도 ‘이후락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다.
1970년 12월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사의(辭意)를 표했다. 김 실장은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썼다.
“저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가 되어 각하의 미투리를 지키려 했는데, 지금 보니 그럴 생각도, 자격도 없습니다. 이제 그만두겠습니다.”
기노시타 도키치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휘하의 병졸로 있을 때의 이름이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추운 날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미투리를 가슴에 품고 덥혀서 내놓아,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려 했지만 그만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붙잡지 말아 달라는 내 뜻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일제(日帝)시대에 교육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편지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바로 사표를 수리했다.
그 후 한동안은 중앙정보부에 자리가 날 것이다, 혹은 공화당 전국구 의원 자리를 줄 것이다 하는 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자리는 나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서운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볼 일이 있어 마산에 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진해로 향하는 갈림길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먼발치에서 인사라도 드릴 생각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박 대통령을 태운 차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200m쯤 앞에서 차가 섰다. 전부터 잘 아는 신동관 경호실 차장이 달려왔다.
“각하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차가 있는 데로 가니, 박 대통령이 차에서 내렸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노니까 번질번질하네. 어떻게 지내?”
“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금년에는 농사가 잘되겠지?” 하더니, “건강 조심하고 잘 있으소”라고 말한 후 차에 올랐다. 눈물이 났다. ‘저런 분한테 내가 서운한 마음을 품었구나’ 생각하니 죄송스러웠다.
朴 대통령 傳記를 日語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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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서관 시절 박지만 군과는 가끔 놀아주기도 했다. 청와대 경내에서 박지만 군과 함께. |
일본어 전문번역가에게 맡겨 보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당시 부산 MBC 총무부장과 함께 내가 직접 번역을 하기로 했다. 번역을 하다 보니, 청와대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한번은 이 책과 관련해 육영수 여사가 나를 호출한 적이 있었다. 전기 중에 박정희 대통령의 모친이 마흔이 훨씬 넘어 박 대통령을 잉태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낙태(落胎)를 하려고 간장을 많이 마셨다는 대목이 있었다. 육 여사는 그 대목을 빼달라고 했다.
“대통령 어머니가 그랬다는 게 얼마나 촌스럽고 창피한 일입니까? 지만이는 ‘아빠가 얼굴이 새카만 게 그때 할머니가 간장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거냐?’고 합니다. 빼주세요.”
나는 거절했다. “그 시절 우리 어머니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박 대통령께서 그때 대통령이었던 것도 아닌데 부끄러울 게 뭐 있습니까? 그런 걸 빼면 안 됩니다.”
일본어로 번역한 박 대통령 전기는 《산케이신문》에 연재됐다. 원고료로 10만 엔이 나왔다. 우리 돈으로 1000만원쯤 되는 큰돈이었다. 나는 그 돈을 박 대통령에게 보냈다.
“각하께서 구술해 주신 내용을 바탕으로 쓴 각하의 전기를 가지고 번 돈이니 이 돈은 각하의 것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朴 대통령, “이제 그만두어야겠어”
얼마 후인 1975년 12월 방송협회 부회장 자격으로 청와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모금한 불우이웃돕기 성금 전달 행사였다.
박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면서 나는 내심으로 박 대통령이 나를 반갑게 대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전에도 박 대통령은 여름휴가 때면 나를 저도 별장으로 부르곤 했다. 그런 사이인 만큼 내가 박 대통령 전기를 번역해 일본 신문에 연재했던 것이나, 그에 대한 고료를 보내드린 일에 대해 한마디 간단한 치하(致賀)가 있으려니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나와도 가벼운 악수만 나누었다.
‘내가 그동안 박 대통령에 대한 책을 몇 권을 썼는데, 이번에 일본어로 박 대통령 전기를 번역해 일본 신문에 연재한 게 얼마나 큰 홍보인데…. 박 대통령이 내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속이 상해서 행사장에서 나온 후 우리 회사 서울지사장과 함께 술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서는 그 사이에 야단이 나 있었다. 청와대에서 나를 여러 차례 찾았다는 것이었다. 청와대로 달려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까 임자를 보고 바로 연락했는데, 왜 이제 오노?”
“각하께서 저를 모른 척하시는 것 같아서 술 한잔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은 적적해 보였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이젠 그만두어야겠어.”
그런 모습을 보니, 옛날 청와대 비서관 시절처럼 당돌한 소리는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라시대 김춘추부터 시작해서 내가 아는 역사 지식을 총동원해 가면서 “대통령은 아무나 합니까”라고 했다.
“고려시대 이후 중국에 처녀를 바치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는 이 나라 영의정이 명(明)나라 장수의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기도 했잖습니까? 그러던 나라를 각하께서 이만큼 일으켜놓은 것 아닙니까?”
“야당 사람들은 데모를 해도 왜 꼭 미국대사관 앞에 가서 합니까? 그게 다 사대주의(事大主義) 근성 때문입니다.”
무리한 司正활동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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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협회 부회장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김종신 부산 MBC 사장. 이때의 만남이 박정희 대통령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
그런 식으로 한참을 얘기하다가 박 대통령의 얼굴을 보니 싱긋이 웃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기분이 좋아졌다’ 싶어서 나는 당시 청와대 사정(司正)담당특별보좌관실의 무리한 행태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드렸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서정쇄신(庶政刷新)을 외치면서 사정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고 있었다. 사정특보실에서는 실적 위주로 일을 추진했고, 그러다 보니 일선 현장에서는, 엄격하게 법을 적용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慣行) 등에서 보면 다소 억울한 일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부산의 모 경찰서장 등이 그런 식으로 옷을 벗게 된 사례를 말씀드렸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잘못은 바로잡아야겠지만, 너무 잘못한 것만 파헤치는 식으로 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래서는 일선 행정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하면, 쫓겨난 사람들은 각하를 원수(怨讐)로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사정팀이 하는 일에 좀 인정을 두고, 잘못하는 것만 잡아낼 게 아니라, 잘하는 것도 찾아서 칭찬하고 그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자신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정 캠페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조금 언짢아하는 것 같더니, 일선에서 나타나는 폐해에 대해 듣자 사정팀에 대해 화를 냈다. 옆에 배석했던 유혁인 정무수석비서관은 ‘김종신이, 시원시원하게 말 잘한다’ 하는 표정이었다.
落馬
박정희 대통령은 “김 사장이 보내준 돈은 학생새마을운동 하는 데 보태쓰라고 보냈다”는 얘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순간 ‘아이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렇게 쓰시다니…. 괜히 드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통령과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것이 박 대통령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얼마 후 사정특별보좌관실에서 운영하는 특수수사대가 부산 MBC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회사를 먼지 털 듯 샅샅이 뒤졌고, 문제점을 찾아내려 했다. 박 대통령 앞에서 사정특보실의 활동을 비판한 데 대한 보복인 듯 싶었다. 그들은 우리 회사 편성국장이 미국 출장을 갔다가 당시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촬영장비 등을 반입(搬入)한 것을 ‘밀수(密輸)’로 엮어 넣었다. 결국 나는 부산 MBC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이 1976년 10월 26일, 10・26 사태가 나기 꼭 3년 전이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나는 ‘백수’가 됐다. 허탈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원망도 일었다.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는 보고가 올라갔어도, 한번만 나를 불러 확인해 보시지 않고…’ 하는 생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기야 국사(國事)에 바쁘신 분이 어떻게 일일이 나 같은 놈의 일까지 챙기시겠나’ 하는 생각도 했다.
고인 물웅덩이에 고랑을 쳐서 흐르게 한 사람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처음 부임했을 때 박정희 장군의 첫 모습에서부터, 기자 시절 부산 해수욕장이나 저도 별장에서 박 대통령을 뵌 일, 청와대 비서관으로서 모셨던 일 등이 머리를 스쳐갔다.
1966년 펴낸 《영시의 횃불》의 서문에 나는 이렇게 썼다.
<물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썩는 법이다. 지난날의 우리의 역사가 고인 물과 같았다고 하면 잘못된 표현일까? 그리고 고인 물웅덩이에 고랑을 쳐서 흐르게 한 것이 바로 박정희 장군이라고 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전혀 불가능하다는 전망이 없는 한, 안 하고 답보하는 것보다는,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는, 해보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역사는 한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움츠려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고 나아가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시의 횃불》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는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여태껏 우리가 치러온 지도자 중에서 가장 나라를 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마 지금 우리 국민 대부분도 박정희 대통령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나중에 박 대통령의 최후에 대한 책을 읽었다. 10·26 당시 박 대통령의 시신을 살펴본 군의관(軍醫官)이 박정희 대통령이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핀, 해진 혁대, 그리고 국내 공장에서 만든 평범한 세이코 손목시계를 차고 있어서 대통령인 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대목을 접했다. 순간 1966년 필리핀행 비행기 안에서 유리에 금이 간 군용시계를 차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쏟아졌다.⊙
| 취재후기 김종신 전 대통령비서관의 이름을 접한 것은 아마 고등학생 때쯤, 박정희 대통령을 다룬 전기나 《월간조선》 등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또 4·19 당시 부산계엄사무소장으로 일하면서 언론에 처음으로 노출되었을 때, ‘박정희 장군’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한 사람이 《부산일보》 기자였던 그였다. 작년 대선의 와중에서 정수장학회 문제를 다룬 《주간조선》 기사를 보고, ‘김종신 기자’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랍고 반가웠다. 《월간조선》 1월호에 <다시 읽는 현대사-박정희의 제5대 대통령 취임사>를 쓰면서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얘기를 듣기 위해 김종신 전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박 대통령이 처음 대통령에 취임할 때에는 장기집권은 생각지 않았다고 본다”면서 “박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라가 하도 가난한 상황에서 일을 하려다 보니 멈출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어려서부터 박 대통령 관련 책들을 통해 함자(銜字)를 접해왔다”면서 “한번 찾아뵙고 옛날 얘기를 듣고 싶다”고 하자 그는 무척 반가워했다. 지난 2월 6일 부산 해운대에 있는 김종신 전 비서관을 찾아갔다. 그는 8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그의 집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5~6년 전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전(前) ‘국경 없는 기자회’ 활동가 김비태씨였다. 알고 봤더니 김비태씨는 김종신 전 비서관의 막내아들이었다. 김종신 전 비서관은 점심식사를 하면서 6·25 때 얘기부터 시작했다. 정말 생생하고 재미있게 얘기했다. 여기서부터 벌써 정강·이규광 등 한국현대사의 낯익은 이름들이 등장했다. 김 전 비서관은 《부산일보》 기자 시절, ‘박정희 장군’을 접했던 이야기,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 김지태 회장과 정수장학회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신이 난 듯했다. ‘이건 나만이 알고 있는 현대사의 보고(寶庫)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나 비서관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때 내가 참 많이 까불댔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대통령비서관으로 지켜본 이후락·박종규·김형욱 등 ‘권부(權府)의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권력 주위에 있다가 나오고 나면 그 기억을 쉽게 못 잊는다. 어떻게든 다시 거기로 돌아가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 얘기들에서 젊은 시절 우연찮은 기회에 장래의 최고 권력자와 인연(因緣)이 맺어졌고, 그 덕분에 권부에 들어갔다가 이른 나이에 낙마(落馬)한 스스로에 대한 회한(悔恨)이 느껴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