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淇春 전 장관, “지역감정 좀 일으켜야”
⊙ 복집 발언자들의 선거법 위반 놓고 치열한 법리 논쟁
⊙ 金斗喜 검찰총장, ‘검찰의 正道’ 강조, 金淇春 전 장관 불구속 기소
⊙ 복집 발언자들의 선거법 위반 놓고 치열한 법리 논쟁
⊙ 金斗喜 검찰총장, ‘검찰의 正道’ 강조, 金淇春 전 장관 불구속 기소
- 초원복집 사건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출두하는 정몽준 의원(왼쪽)과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민주자유당 김영삼(金泳三), 민주당 김대중(金大中), 통일국민당 정주영(鄭周永) 후보의 3파전이 벌어진 제14대 대선(大選). 그 선거일을 딱 일주일 앞둔 1992년 12월 11일 아침, 부산 남구 대연동의 음식점 초원복국 지하층 별실.
- 김기춘 전 법무장관=부산은 잘돼 갑니까? …우리 부산, 경남 분들이 좋아. 선량하고 목소리는 큰데 야물게 뭉치는 힘은 많이 약해. 단단함이 다른 지방 분들 못 당해. 사람이 순할 때 순하더라도 독할 때 독해야 단단한 거다. …서울 있으면 걱정이 태산이라. 믿을 곳이라곤 여기밖에 없다. 사실 여기서 똘똘 뭉쳐야 되는데.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 발전에는 긍정적,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일으켜야 돼. …잘못하면 혁명적 상황이 와서 전부 끌려들어 갈 판인데 여당 해야지. 광주일보다 무등일보다 자기네 고장 사람 대통령 만들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관리들은 힘드니까 업계에서 (부산일보나 국제신문) 신문사 사장이랑 밥이나 한 번 사주면서 고향을 위해 너희가 해달라고 해보십시오. 이번에 부산 사람들 단결 못 하면 이건 뭐 인간도 아닙니다. 역사적 중요한 시기에 기관장 하시니까 어렵기도 하지만 훗날 보면 보람 있는 시민이라고 다들 느끼게 되지 않겠습니까. …(선거운동을) 노골적으로 해도 괜찮지 뭐.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 아마 경찰청장도 양해…
- 박일룡 부산경찰청장=양해라뇨. 제가 더 떠듭니다.
- 우명수 부산교육감=우리는 지역감정이 좀 일어나야 돼.
-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언론계통에는 제가 제일 강하게 얘기하는데, (간부들이) 같은 세대, 거의 친구들이니까. 그런데 요즘은 그 밑에 기자 애들 때문에…
- 김대균 부산기무부대장=이번 대선에서 경남, 부산이 발전할 기회를 못 잡으면 영영 파이다.
-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팔이 안으로 굽는 것 같이, 상공회의소 회장은 다 여당권입니다. (※이상 1992년 12월 15일 통일국민당이 공개한 녹취록에서 발췌)
‘밀실의 핵폭탄’ 터지다
밀실에서 오간 ‘민감한’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녹음됐다. 그리고 공개됐다. 제14대 대선의 막바지 열기가 뜨겁던 1992년 12월 15일 오전, 통일국민당의 김동길(金東吉) 선거대책위원장은 광화문 당사에서 긴급회견을 열어 기자들을 모았다. 그러고는 “나흘 전인 12월 11일 부산 남구 대연동의 초원복국집에서 김기춘(金淇春) 전 법무부 장관의 주선으로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 모여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 지원을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등의 방안을 모의했다”고 폭로했다.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이날 모임의 대화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참석자들이 모임을 마치고 식당을 나서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증거물로 공개했다. 모임에 참석한 면면을 보면 김 전 장관을 비롯해 김영환(金英煥) 부산시장, 정경식(鄭京植) 부산지검장, 박일룡(朴一龍) 부산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김대균 부산기무사 부대장, 우명수(禹明洙) 부산교육감 그리고 부산상공회의소의 박남수(朴南守) 회장과 강병중(姜丙中) 부회장 등이었다. 그야말로 부산 지역의 힘 있는 민관 기관장들이 거의 다 모인 셈이었다.
누구든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우리네 대선 시즌, 그런 시기에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육성’이, 더욱이 특정 지역의 기관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현장’이 폭로된 것이다.
당장 이 사건은 다른 화제들을 압도하며 국민의 이목을 집중하게 한 전국적, 초대형 이슈로 떠올랐다. 이 같은 폭로 내용은 곧 현승종 국무총리에 의해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정부는 즉각 물의를 일으킨 김 시장, 박 청장, 이 지부장, 김 부대장 등 현직 기관장들을 해임하거나 직위해제했다. 불과 한나절 사이에 이들 직위 앞에는 ‘전(前)’ 자가 붙게 됐다. 기자회견과 함께 통일국민당은 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초원복집 참석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당시 판세가 유리하다고 전망하던 김영삼 후보와 여당 쪽에는 하루아침에 ‘선거가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시커먼 먹구름이 드리웠고, 반면 정주영 후보 및 김대중 후보 쪽은 쾌재를 부르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러나…
시민 제보? 도청하지 않고는…
그렇다면 당시 초원복집 사건의 고발을 접수하던 검찰 상황은 어떠했을까.
바로 두 달 전인 10월 8일 제40대 김기춘 법무장관이 퇴임하고 41대 이정우(李正雨) 장관이 법무장관에 임명됐다. 또 12월 5일에는 검찰총장도 제23대 정구영(鄭銶永) 총장에서 24대 김두희(金斗喜) 총장으로 교체됐다. 노태우 정권 말기 그리고 대선 시즌에 새로이 임명된 장관과 총장에게, 나아가 검찰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정권 교체기의 안정과 질서 유지’였다. 그런 터에 온 나라가 들썩이는 초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검찰로서는 서둘러 사건을 해결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검찰은 이미 TV 중계 및 뉴스를 통해 초원복집 사건의 내용을 ‘인지’하고 있던 터였다. 국민당 측이 이를 검찰에 고발하면서, 검찰은 이에 대해 고소고발사건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국민당의 폭로와 고발이 있은 바로 그날 오후, 서울지검 3차장이던 내게도 당장 대검에서 호출 명령이 날아왔다. 검찰총장과 차장, 서울지검장 및 서울지검 1, 2, 3 차장 등 대검과 서울지검 관계자들로 대책회의가 열리고 지체없이 업무 배정이 이뤄졌다.
사실 복집 사건이 공개되면서 당시 세상의 이목은 온통 한쪽 측면, 즉 ‘기관장 모임’에 참석한 이들의 면면과 그들의 대화 내용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법적 차원에서 사건을 마주해야 하는 검찰로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사건을 다뤄야 했다. 하나는 이날 모임의 성격을 따져 그 위법성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청(盜聽)’ 부분이었다(모임의 대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가 제시됐다는 것은 곧 모임이 도청됐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도청이 아니고서는 그 같은 녹음테이프가 생겨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기관장 모임 및 거기서 나온 발언 내용은 어디까지나 선거법에 관련된 것이므로 공안(公安) 쪽, 즉 안강민(安剛民) 서울지검 제1차장 휘하의 공안1부(임휘윤 부장검사)가 수사를 맡았다. 도청 부분 수사는 두말할 필요 없이 서울지검 3차장이던 내가 지휘하는 특수2부(조용국 부장검사)에 배정됐다(경찰에서 넘어오는 일반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서울지검 제2차장 쪽은 복집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누가 도청했나?
바깥 대선 일정과 관계없이 검찰은 즉각 수사에 돌입했다. 폭로 다음 날인 12월 16일, 당연한 수순으로 고발인인 국민당 관계자들부터 먼저 불렀다. 사건의 개요와 녹음테이프를 입수한 경위 등을 조사했으나 기자회견 때 발표한 내용을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건에 직접 관계된 이들의 신병을 확보하고 그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임 부분에 대한 수사를 맡은 1차장 쪽에서는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어 보였다. 이미 국민당의 폭로를 통해 모임 참석자들의 신원이 공개된 데다, 대부분 주요 기관장인 까닭에 도주 등의 우려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청 지휘자 및 실행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 신병을 확보해야 하는 우리 특수부 쪽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드러난 게 없었다. 국민당 측도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도청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자회견 때 그저 ‘시민 제보’라고만 밝힌 터였다. 다른 사건 같았으면 자칫 이 부분을 조사하는 데 검찰의 시간과 힘을 잔뜩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연 누가 감히 권세 있는 지역 기관장들의 모임을, 그것도 무슨 군사작전하듯 감쪽같이 도청할 수 있을까. 답은 선명했다. 안기부 쪽 사람들일 것이었다.
그런 만큼 검찰이 도청에 관계한 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 따로 힘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또한 안기부 지역책임자(이규삼 부산지부장)까지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난 만큼 안기부 쪽에서도 사태의 조속한 수습을 위해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 생각했다. 절차를 밟아 신속히 안기부 쪽에 협조를 구했다.
이따금 정보기관과 관련한 문제가 생길 때면 사람들은 으레 이러니저러니 비판을 하곤 하지만 역시 정보기관의 ‘저력’은 대단하다. 검찰의 요청이 있고 나서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그 이튿날 도청을 실행한 안기부 요원 및 여타 관계자들의 신원이 파악되고 그 명단이 검찰로 넘어왔다.
안기부 6급, 정보 어떻게 입수했는지 알려진 것 없어
‘신원’이 확인됐다고 해서 곧바로 그들을 불러들여 조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조사할 것인지, 사전검토가 필요하다. 이런저런 준비작업을 거쳐 사건에 대한 본격 수사는 선거가 끝난 직후인 12월 19일부터 시작했다.
모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김기춘 전 장관과 김 전 부산시장, 박 전 부산경찰청장 등 현직 기관장과 부산교육감, 상공회의소 회장 등은 공안1부에서 맡아 조사하기로 했다.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과 도청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난 안기부 직원, 그리고 김대균 기무부대장은 특수신분이었기 때문에 각각 해당 기관에서 1차 조사를 벌인 뒤 검찰에 신병을 인도하거나 조사결과를 통보하기로(김 부대장) 했다. 정경식 부산지검장은 검찰 고위층인 만큼 서울지검이 아닌 대검에서 직접 불러 사건경위를 묻기로 했다.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검찰 소환 및 조사는 12월 20일 밤부터 22일까지 신속히 이루어졌다. 사흘에 걸쳐 면밀하게 진행된 조사를 통해 사건의 경위는 예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게 드러났다. 그것을 간추리면 이러한 것이었다.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 초원복집에서 조찬 모임을 갖는다는 정보를 처음 입수한 이는 당시 안기부 부산지부 6급 직원인 김남석이었다. 그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손에 쥐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확하게 외부에 알려진 바가 없다.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몰라도 일부 언론에서는 김씨가 안기부 부산지부장의 ‘차트사’라는,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한 보도가 나오기는 했다. 자신이 모시는 부산지부장의 일정 및 차트를 맡아 정리하던 중 복집 모임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김씨가 국민당 측 인사에게 이를 제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적다. 당장 상식만으로 판단해도, 정보기관 책임자가 자기 일정과 동선(動線)을 무슨 공개 브리핑 자료라도 되는 양 차트화하거나 문서화하는 일이란 애당초 있을 수가 없다.
007작전처럼…
그렇다면 당시 안기부 일개 직원이 어떻게 기관장들의 모임에 대해 정보를 얻게 되었는가. 그것에 대해 내가 여기서 시시콜콜 밝히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국가를 위해 음지에서 뛰는 정보기관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시절엔 국가 각급 기관장에 대해 도청 등을 통해 동향을 감시하는 일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정보기관과 정보요원들의 안테나는 웬만한 곳에는 다 뻗어 있었다. 다만 당시 도청 부분의 수사 책임자로서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의 초원복집 모임처럼 중요한 사항은 아무리 정보요원이라 해도 ‘오다가다 우연히 주워담을 수 있는 게 아니다’는 사실이다.
대선 열기가 뜨겁던 와중에 기관장들 모임의 정보를 입수한 김씨는 12월 5일 이를 평소 알고 지내온 자신의 고교 선배 문종렬씨에게 전했다. 앞서 두어 달 전까지 현대중공업의 예비군 업무를 맡았던 문씨는 대선 정국이 되면서 국민당 부산지역선거대책본부 강원도 출신 주민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문씨는 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직후 평소 예비군 업무 등으로 친해진 부산태화고무의 예비군 중대장인 안종윤씨를 이 계획에 합류케 해 도청기 설치작업 등에 도움을 받기로 했다. 문씨는 이어 부산시 광복동의 한 전파사에서 수신기와 송신기 등 도청장비를 구입하고 기관장들의 모임이 예정된 현장인 초원복집 지하방 답사까지 마쳤다. 그러고는 12월 9일 이 같은 계획을 당시 국민당 부산지역본부 부본부장이던 안충승 현대중공업 부사장에게 보고했다. 이때부터 안 부사장이 도청 작업을 지휘하게 됐다. 안 부사장은 문씨 등에게 당장 소모경비를 지원하는 한편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본부 최충영 이사에게는 모임 참석자들의 사진 촬영을 지시했다.
준비를 마친 이들은 기관장들이 모임을 갖기 하루 전인 12월 10일 자신들이 먼저 복집 지하방에서 점심 회식을 가졌다. 손님을 가장해 ‘현장’을 미리 찾아가 도청장치를 설치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던 김 전 장관 등 일행은 예정대로 11일 아침 모임을 가졌고 참석자들의 발언은 그대로 도청, 녹음됐다.
노태우 정권 들어 세상이 민주화됐다고들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주요인사가 일류 호텔이나 유명 음식점에 식사 등 일정을 잡으면 으레 정보기관 등에서 미리 도청장치나 사람을 심어 동향 및 대화내용을 탐지한다는 확인 못 할 소문이 돌고 있었다. 비록 정보기관의 행위는 아니었지만 복집 도청은, 도청과 ‘말조심’에 대해 새삼 인식하게 한 계기가 됐다.
“문제 확산시켜 좋을 게 뭐 있느냐?”
도청에 성공한 문씨 등은 이날 기관장들의 모임이 끝난 직후 다시 초원복집에 찾아가 도청장비를 회수했다. 이들은 곧장 안충승 부사장과 서울로 올라와 그날 밤 늦게 롯데호텔에서 국민당의 정몽준(鄭夢準) 의원을 만났다.
(나중에 정 의원의 진술에 따르면) 정 의원은 이들을 만나기 몇 시간 전인 그날 오후 안 부사장을 통해 미리 전화로 도청 사실을 보고받고 이들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정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문씨 등은 녹음테이프를 넘기는 대가로 100억원을 달라 요구했으나 확답을 듣지 못했다(문씨는 이 대목에서 정 의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고 했으나 정 의원은 그런 일이 없다고 진술했다). 정 의원은 안 부사장에게 일단 도피자금 등 경비로 쓸 2000만원을 이들에게 내어주라고 지시했다.
이튿날인 12월 12일 새벽 문씨 등은 다시 롯데호텔에서 정 의원과 만났다. 이번에는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정 의원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때도 돈에 대해서는 합의(?)가 되지 않았다. ‘큰일을 해냈다’고 생각했을 문씨 등 도청자들로서는 답답했을 것이다. 결국 이들은 나중에, 복집 모임이 폭로되고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 의원을 한 차례 더 만났다. 강남의 인터콘티넨탈호텔이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정 의원을 만날 때도 치밀하게 대화 내용을 모두 녹음했다. 우리 수사팀이 확보한 이 녹음 내용을 들어보면, 추가로 돈을 더 달라고 종용하는 문씨 등에 대해 정 의원은 (노련하게도) 액수는 절대 밝히지 않으면서 그저 ‘더 주겠다’고만 했다. 이 녹음 내용은 당시 수사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심지어 대화 당사자인 정 의원조차도 검찰 조사를 받을 때까지 자신의 말이 녹음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건개(李健介) 서울지검장에게 이를 보고하고 언론 공개를 건의했으나 이 검사장은 “문제를 자꾸 확산시켜 좋을 게 뭐 있느냐”며 극구 만류해 결국 이는 미공개 자료로 남게 됐다.
여론, “당장 구속하라”
앞서 12월 12일 정 의원에게 넘겨진 기관장 모임의 녹음테이프는 이내 국민당에 넘겨졌고 앞서 본 것처럼 그로부터 3일 뒤 전면 공개됐다. 안타까운 것은 검찰이 본격 수사에 착수한 12월 19일 아침, 도청작업을 지휘한 안충승 부사장이 해외로 나갔다는 점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12월 20일 밤부터 12월 22일까지 사흘에 걸쳐, 소환에 불응한 정 의원과 출국한 안 부사장을 제외한 사건 관계자 대부분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22일 오후 그간 파악된 사건의 경위 및 조사결과를 들고 나와 조용국(趙鏞國) 특수2부장, 안강민 1차장과 임휘윤(任彙潤) 공안1부장이 이건개 지검장실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는 오후 5시 반부터 두 시간여에 걸쳐 사건 관계자들의 구속 여부 등 이후 수사방향이 논의됐다.
도청 부분의 수사를 맡았던 나로서는 사실 고민할 게 별로 없었고, 또 평소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강경한 쪽인 내 스타일대로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도청작업을 실행한 몇몇 피의자들에 대해 충분히 구속할 수 있다고 보았고 또 나중에 기소 및 공소유지 또한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도청 수사가 기관장 모임 수사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던 만큼 내 생각대로, 독자적으로 액션을 취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기관장 모임 수사를 맡은 저쪽(1차장과 공안1부)이었다.
언론과 야권 등 바깥에서는 김기춘 전 장관 등 모임에 참석한 기관장들을 ‘당장 구속하라’고 다그치고 있었지만 검찰로서는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터놓고 말해서 김 전 장관은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역임한 검찰 및 법조계의 대선배이자 원로였다. 그런 그를 구속한다는 것은 검찰 얼굴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꼴이었다. 또한 기관장 모임을 주도한 그의 행위가 실제로 위법성이 있느냐도 신중하게 따져야 했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김 전 장관은 검찰 조사과정에서 자신이 모임을 주선하고 대화를 주도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모임의 성격에 대해서는 “선거와 관련해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모종의 액션을 도모하기 위해 모인 것이 결코 아니며 부산 기관장들과 퇴임 인사를 나누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지역감정을 내세워 김영삼 후보를 지원해야 한다는 등 대화 내용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대선과 관련해 계획이나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하려던 것이 아니라 때가 때이니만큼 자연스럽게 선거 이야기가 나온 것일 뿐”이라고 진술하던 터였다.
검찰의 고민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일단 김 전 장관 등 기관장들에 대한 불구속 수사 방침이 결정됐다. 나아가 기관장 모임 쪽과의 형평성을 감안해 도청 관계자들 역시 불구속 수사를 하는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났다. 결국 문종렬, 안종윤씨 등 우리 특수부에서 조사를 받던 도청 관계자 8명을 이날 저녁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언론에는 “검찰의 조사시한인 48시간이 다 돼서”라고 궁색한 이유를 둘러대야 했다.
여론을 의식할 것 없이 따로따로 사건을 분리 수사해서 도청 사건 쪽이라도 구속 수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속이 아렸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이브 무드에 들떠 있던 12월 24일, 검찰 수사팀은 부산에 내려가 초원복집 현장검증을 마치고 (도청 실행자들의 진술에 따라) 김해공항 근처에 파묻어놓은 도청장비도 찾아내 압수했다. 이와 함께 대검에는 그간의 수사 중간결과 및 법률검토 의견을 정리한 법률검토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에는 수사 실무진의 고민, 특히 기관장 모임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즉 김 전 장관 등 기관장들을 어떻게 사법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딱 부러지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무혐의’와 ‘불구속 기소’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제시한 것이다.
먼저 무혐의론은 “공무원도 아닌 민간인(김 전 장관)이 지인들과 가진 사적(私的)인 자리에서, 선거철에 선거를 주제로 무슨 강연이나 토론이 아닌 방담 혹은 정담을 나눈 것은 대통령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요지였다.
비록 불구속이라도 기소해 죄를 물어야 한다는 쪽은 “김 전 장관이 분명히 특정후보를 지지할 목적으로 대화를 끌어갔고, 선거운동원이 아닌데도 선거법에 규정되지 않은 좌담회 형식을 빌려 선거운동을 한 셈이어서 대통령선거법(제35, 36, 61조 등)을 위반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요지였다.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기관장 모임 수사를 맡은 안강민 1차장 쪽은 물론 서울지검과 대검까지도,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盜聽 처벌 법규 없어
도청 사건 수사를 맡은 나와 휘하 특수2부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도청 행위를 사법처리하기 위해 과연 어떤 법조항을 적용해야 할지 따져봐야 했다.
당시 남의 편지를 훔쳐보거나 전화를 엿듣는 것을 금하는 등의 도청에 대한 금지 규정은 있었지만 처벌 조항은 없었다. 한마디로 직접적으로 도청을 금지한 법조항들은 사실상 실효성이 없는 것들이었다. 고민 끝에 우리 수사진은 복집 사건의 도청 실행자들에게 형법상 주거침입죄(319조)를 적용하기로 했다. 비록 일반인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음식점이라 해도 도청을 목적으로 주인 허락 없이 출입한 것은 주거침입과 다름없다 판단한 것이었다. 또 그것에서 연장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가중처벌조항 2조) 혐의도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야간 또는 2인 이상이 공동으로 주거침입 등의 죄를 저지를 경우 가중처벌한다’는 취지의 규정이다.
나와 수사진을 끝까지 고민하게 한 또 다른 한 가지는 정몽준 의원 문제였다. 도청 사건 수사를 완결짓기 위해서는 정 의원에 대한 조사가 필요했다. 과연 그가 ▲사전에 도청 계획을 보고받았는지 ▲직접 도청을 지시했는지 ▲도청 실행자들에게 도청에 대한 대가로 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는지 여부 등에 대해 조사해야 했다. 당시 우리는 앞서 조사를 마친 문씨 등으로부터 “12월 11일 정 의원을 만났을 때 문씨와 김남석, 안종윤 등 3명의 몫으로 100억원을 요구했으며 정 의원이 고개를 끄덕여 묵시적인 승낙의 뜻을 표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당장 문제는 정 의원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앞서 우리 특수부 수사팀은 정 의원 측에 1차로 12월 22일, 2차로 24일, 3차로 26일에 출두할 것을 통보했으나 정 의원은 세 차례 모두 소환에 불응한 터였다. 이미 기관장 모임 쪽이든 도청 사건 쪽이든 관계자들이 전원 소환돼 사건의 경위와 윤곽이 드러나고, 사건에 대한 법리 검토 단계에 접어든 시점까지도 우리 수사진은 정 의원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 총장은 “왜 빨리 정 의원을 불러들이지 않느냐”고 우리 팀에 호통을 치고 있었다.
숨은 鄭夢準, 기지 발휘해 결국 소환
우스갯소리로 고진감래(고민 끝에 감이 떨어진다)라 했던가. 정 의원 소환 문제로 끙끙거리던 수사진에 이건개 검사장이 아이디어를 내놨다. “유명인사나 고위인사들은 대한민국 땅에 있는 이상 특급호텔 주변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듯했다.
세 번째 소환에도 정 의원이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12월 26일, 수사진은 서울시내 특급호텔의 벨보이와 도어맨, 식당 종업원들에까지 “정몽준 의원을 보면 연락해 달라” 전화로 사발통문을 돌려 협조를 구했다. 유명인사가 호텔에 나타나면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정보 입수와 전달이 빠르리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몇 시간 뒤 S호텔 측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이곳 중식당에 정 의원이 와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수사관이 그곳으로 날아갔고 정 의원과 대면했다.
검찰이 기어이 자신을 찾아내자 정 의원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수사관에게 “내일(12월 27일) 검찰에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어느 쪽에서 어떻게 그 소식이 풀려나갔는지는 몰라도 언론은 일제히 ‘정몽준 의원이 27일 자진 출두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윽고 이튿날 오후 2시, 정 의원은 약속대로 서초동 검찰청사에 들어왔다.
그는 “롯데호텔에서 초원복집의 도청 실행자인 문씨 등을 만나 녹음테이프를 건네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도청이 이루어진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2월 11일 문씨와 만나기 전 안충승 부사장에게 연락을 받고 나서”였다고 진술했다. 또 “안 부사장에게서 부산 지역 기관장들의 모임에 대해서도 그때 보고받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애당초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씨 등에게 100억원을 주기로 했느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거철에 온갖 이야기가 나돌게 마련인데 그것을 일일이 다 확인하고 또 믿어야 하느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문씨 등에게 2000만원을 주었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는 의미로 봐야 할 대답이었다.
사실상 大檢이 사건 지휘
초원복집 사건이 처음 불거진 12월 15일부터 정 의원에 대한 조사까지 마친 27일까지, 현장에서의 사건 수사는 서울지검이 맡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사실상 수사를 총지휘한 것은 대검 즉 검찰총장이었다.
수사가 진행되던 동안 이건개 서울지검장, 안강민 1차장, 나 그리고 수사를 맡은 임휘윤 공안1부장과 조용국 특수2부장은 거의 매일 아침마다 총장실에 올라가야 했다. 그런 우리로부터 김 총장은 직접 수사상황을 보고받고 다음 수사방향을 함께 논의하거나 지시했다. 그래서 사실 여느 사건과 달리 초원복집 사건 수사 때는 총장에게 올리는 보고서 같은 것이 따로 필요 없었다. 물론 그날그날 수사상황 보고서를 작성해 총장실 회의 때 들고 가기는 했지만, 대개 대화를 주고받으며 일을 풀어나갔다.
정 의원을 끝으로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를 마친 이튿날(12월 28일 월요일) 총장실에서 초원복집 사건을 마무리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제 과연 사건 관계자들을 어떻게 사법처리할 것인가…. 최종 방침을 정할 때도 김 총장의 판단과 의지가 가장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김 총장이 직접적으로 구속, 불구속 혹은 기소, 불기소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다만 수사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김 총장은 검찰의 엄정 중립 혹은 검찰의 정도(正道)를 강조했다.
휘하 검사들이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 한마디로 ‘아무리 검찰 원로라 해도 죄가 될 것이 있으면 죄를 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총장 휘하의 우리 일선 검사들에게 그것은 다소 의아하게 비쳤다. 김 총장이 고교 때 월반을 해서 1년 빨리 대학(서울 법대)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김 전 장관과는 엄연히 대학동기였다. 그런 인연에도 불구하고 김 총장은 ‘정도’를 강조했으니….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세상에서는 구속, 불구속 여부에 눈길을 두지만 사실 기소냐 불기소냐 여부가 대단히 중요하다. ‘구속’은 잡아두겠다는 것이지만 ‘기소’는 공식적으로 법원에 죄를 묻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검찰이 누군가를 기소한다는 것은 곧 ‘검찰로서는 그에게 죄가 있다고 확신하고 그것을 입증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 된다.
김 전 장관의 경우도 불구속 상태로 기소됐다. 그 여파 때문일까. 그와 동향(同鄕)인 데다 선거 때 열정을 부은 YS가 대통령이 됐음에도 정작 그 자신은 문민정부 내내 손발이 묶인 듯 비상(飛翔)하지 못했다.
정몽준 의원도 불구속 기소
우여곡절 끝에 검찰은 초원복집 사건의 사법처리 방침을 결정했다. 기관장 모임을 주도한 김 전 장관에 대해서는 대통령선거법 위반죄가 적용됐다. 검찰은 “선거운동원이 아닌 김 전 장관이 특정후보를 지지할 목적으로, 선거법에 규정되지 않은 방법으로 모임을 가진 것은 선거법 제35조와 36조를 위반한 것”으로 보았다.
문씨 등 도청을 실행한 3명에 대해서는 앞서 본 것처럼 형법상 주거침입죄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도청 실행자들에게 주거침입 혐의 등을 적용한 이 대목을 둘러싸고 1심, 2심, 3심까지 법리 다툼이 계속되었으나 대법원은 1995년 3월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도청 실행자들에게 도피자금 등을 제공한 정몽준 의원은 범인은닉 혐의로 불기속 기소했다.
12월 29일 이건개 검사장은 이 같은 내용의 수사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국민당의 전격 폭로로 사건이 불거진 지 꼭 14일 만이었다. 온 나라를 벌겋게 달굴 만큼 정치적으로는 뜨거운 사건이었지만 정작 사법 차원에서는 열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은 평범한(?) 사건이었다. 더욱이 선거가 끝나고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이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나 열기는 급속 냉각됐다.
선거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을 바라는 것은 전혀 나쁜 일도 문제될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법무부장관까지 지낸 김 전 장관이 ‘수단과 방법을 가림 없이 어떻게든 우리 편이 이겨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쏟아낸 것은 (그것이 드러난 이상) 누가 보아도 지나친 것이었다. 도청테이프를 손에 쥔 정 의원과 국민당 입장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상대 진영을 똘똘 뭉치게 하는 뜻밖의 역효과를 초래했다.
反轉
초원복집 사건이 벌어지자 온 국민이, 심지어 당시 김영삼 캠프조차 지역감정을 내세운 김 전 장관의 언행을 비난하고 성토했다. 그러나 투표함 뚜껑을 열어보니 지역감정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김 전 장관의 생각대로) 단단하게 결집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김 전 장관과 그가 지원한 김영삼 후보 쪽에는 생각지도 못한 반전(反轉)이었다.
반대편 곧 국민당과 정몽준 의원 쪽에서도 반전이 일어났다. 자칫 밀실에서 바람처럼 쓰윽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중대한 비밀 혹은 비리를 광장으로 끌어내고, 그 힘으로 선거에 이길 것으로 예상했을 터였다. 그러나 웬걸, 도청에서 폭로까지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는 언론과 국민의 눈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싸늘했다. 그리고 선거는 그들의 패배로 끝났다. 이 또한 뜻밖의 역풍이요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가 던지는 아이로니컬한 이 교훈은 2012년 12월 다시 돌아온 이번 대선에도 참고할 만한 것이리라.
돌이켜보건대 실로 한 편의 드라마 같던 그 사건에 이제 와서 제목을 붙인다면 ‘김기춘의 오버, 정몽준의 오판’쯤 되지 않을는지….⊙
- 김기춘 전 법무장관=부산은 잘돼 갑니까? …우리 부산, 경남 분들이 좋아. 선량하고 목소리는 큰데 야물게 뭉치는 힘은 많이 약해. 단단함이 다른 지방 분들 못 당해. 사람이 순할 때 순하더라도 독할 때 독해야 단단한 거다. …서울 있으면 걱정이 태산이라. 믿을 곳이라곤 여기밖에 없다. 사실 여기서 똘똘 뭉쳐야 되는데.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 발전에는 긍정적,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일으켜야 돼. …잘못하면 혁명적 상황이 와서 전부 끌려들어 갈 판인데 여당 해야지. 광주일보다 무등일보다 자기네 고장 사람 대통령 만들려고 혈안이 돼 있는데, 관리들은 힘드니까 업계에서 (부산일보나 국제신문) 신문사 사장이랑 밥이나 한 번 사주면서 고향을 위해 너희가 해달라고 해보십시오. 이번에 부산 사람들 단결 못 하면 이건 뭐 인간도 아닙니다. 역사적 중요한 시기에 기관장 하시니까 어렵기도 하지만 훗날 보면 보람 있는 시민이라고 다들 느끼게 되지 않겠습니까. …(선거운동을) 노골적으로 해도 괜찮지 뭐.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 아마 경찰청장도 양해…
- 박일룡 부산경찰청장=양해라뇨. 제가 더 떠듭니다.
- 우명수 부산교육감=우리는 지역감정이 좀 일어나야 돼.
-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언론계통에는 제가 제일 강하게 얘기하는데, (간부들이) 같은 세대, 거의 친구들이니까. 그런데 요즘은 그 밑에 기자 애들 때문에…
- 김대균 부산기무부대장=이번 대선에서 경남, 부산이 발전할 기회를 못 잡으면 영영 파이다.
-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팔이 안으로 굽는 것 같이, 상공회의소 회장은 다 여당권입니다. (※이상 1992년 12월 15일 통일국민당이 공개한 녹취록에서 발췌)
‘밀실의 핵폭탄’ 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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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원복집 회식에 참석했던 김영환 부산시장, 정경식 부산지검장, 박일룡 부산경찰청장(왼쪽부터). |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이날 모임의 대화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참석자들이 모임을 마치고 식당을 나서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증거물로 공개했다. 모임에 참석한 면면을 보면 김 전 장관을 비롯해 김영환(金英煥) 부산시장, 정경식(鄭京植) 부산지검장, 박일룡(朴一龍) 부산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김대균 부산기무사 부대장, 우명수(禹明洙) 부산교육감 그리고 부산상공회의소의 박남수(朴南守) 회장과 강병중(姜丙中) 부회장 등이었다. 그야말로 부산 지역의 힘 있는 민관 기관장들이 거의 다 모인 셈이었다.
누구든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우리네 대선 시즌, 그런 시기에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육성’이, 더욱이 특정 지역의 기관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현장’이 폭로된 것이다.
당장 이 사건은 다른 화제들을 압도하며 국민의 이목을 집중하게 한 전국적, 초대형 이슈로 떠올랐다. 이 같은 폭로 내용은 곧 현승종 국무총리에 의해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정부는 즉각 물의를 일으킨 김 시장, 박 청장, 이 지부장, 김 부대장 등 현직 기관장들을 해임하거나 직위해제했다. 불과 한나절 사이에 이들 직위 앞에는 ‘전(前)’ 자가 붙게 됐다. 기자회견과 함께 통일국민당은 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초원복집 참석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당시 판세가 유리하다고 전망하던 김영삼 후보와 여당 쪽에는 하루아침에 ‘선거가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시커먼 먹구름이 드리웠고, 반면 정주영 후보 및 김대중 후보 쪽은 쾌재를 부르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러나…
시민 제보? 도청하지 않고는…
그렇다면 당시 초원복집 사건의 고발을 접수하던 검찰 상황은 어떠했을까.
바로 두 달 전인 10월 8일 제40대 김기춘 법무장관이 퇴임하고 41대 이정우(李正雨) 장관이 법무장관에 임명됐다. 또 12월 5일에는 검찰총장도 제23대 정구영(鄭銶永) 총장에서 24대 김두희(金斗喜) 총장으로 교체됐다. 노태우 정권 말기 그리고 대선 시즌에 새로이 임명된 장관과 총장에게, 나아가 검찰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정권 교체기의 안정과 질서 유지’였다. 그런 터에 온 나라가 들썩이는 초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검찰로서는 서둘러 사건을 해결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검찰은 이미 TV 중계 및 뉴스를 통해 초원복집 사건의 내용을 ‘인지’하고 있던 터였다. 국민당 측이 이를 검찰에 고발하면서, 검찰은 이에 대해 고소고발사건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국민당의 폭로와 고발이 있은 바로 그날 오후, 서울지검 3차장이던 내게도 당장 대검에서 호출 명령이 날아왔다. 검찰총장과 차장, 서울지검장 및 서울지검 1, 2, 3 차장 등 대검과 서울지검 관계자들로 대책회의가 열리고 지체없이 업무 배정이 이뤄졌다.
사실 복집 사건이 공개되면서 당시 세상의 이목은 온통 한쪽 측면, 즉 ‘기관장 모임’에 참석한 이들의 면면과 그들의 대화 내용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법적 차원에서 사건을 마주해야 하는 검찰로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사건을 다뤄야 했다. 하나는 이날 모임의 성격을 따져 그 위법성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청(盜聽)’ 부분이었다(모임의 대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가 제시됐다는 것은 곧 모임이 도청됐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도청이 아니고서는 그 같은 녹음테이프가 생겨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기관장 모임 및 거기서 나온 발언 내용은 어디까지나 선거법에 관련된 것이므로 공안(公安) 쪽, 즉 안강민(安剛民) 서울지검 제1차장 휘하의 공안1부(임휘윤 부장검사)가 수사를 맡았다. 도청 부분 수사는 두말할 필요 없이 서울지검 3차장이던 내가 지휘하는 특수2부(조용국 부장검사)에 배정됐다(경찰에서 넘어오는 일반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서울지검 제2차장 쪽은 복집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누가 도청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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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원복집 사건의 선거법 관련 부분을 수사했던 안강민 서울지검1차장(왼쪽)과 임휘윤 부장검사(오른쪽). |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건에 직접 관계된 이들의 신병을 확보하고 그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임 부분에 대한 수사를 맡은 1차장 쪽에서는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어 보였다. 이미 국민당의 폭로를 통해 모임 참석자들의 신원이 공개된 데다, 대부분 주요 기관장인 까닭에 도주 등의 우려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청 지휘자 및 실행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 신병을 확보해야 하는 우리 특수부 쪽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드러난 게 없었다. 국민당 측도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도청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자회견 때 그저 ‘시민 제보’라고만 밝힌 터였다. 다른 사건 같았으면 자칫 이 부분을 조사하는 데 검찰의 시간과 힘을 잔뜩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연 누가 감히 권세 있는 지역 기관장들의 모임을, 그것도 무슨 군사작전하듯 감쪽같이 도청할 수 있을까. 답은 선명했다. 안기부 쪽 사람들일 것이었다.
그런 만큼 검찰이 도청에 관계한 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 따로 힘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또한 안기부 지역책임자(이규삼 부산지부장)까지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난 만큼 안기부 쪽에서도 사태의 조속한 수습을 위해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 생각했다. 절차를 밟아 신속히 안기부 쪽에 협조를 구했다.
이따금 정보기관과 관련한 문제가 생길 때면 사람들은 으레 이러니저러니 비판을 하곤 하지만 역시 정보기관의 ‘저력’은 대단하다. 검찰의 요청이 있고 나서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그 이튿날 도청을 실행한 안기부 요원 및 여타 관계자들의 신원이 파악되고 그 명단이 검찰로 넘어왔다.
안기부 6급, 정보 어떻게 입수했는지 알려진 것 없어
‘신원’이 확인됐다고 해서 곧바로 그들을 불러들여 조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조사할 것인지, 사전검토가 필요하다. 이런저런 준비작업을 거쳐 사건에 대한 본격 수사는 선거가 끝난 직후인 12월 19일부터 시작했다.
모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김기춘 전 장관과 김 전 부산시장, 박 전 부산경찰청장 등 현직 기관장과 부산교육감, 상공회의소 회장 등은 공안1부에서 맡아 조사하기로 했다.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과 도청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난 안기부 직원, 그리고 김대균 기무부대장은 특수신분이었기 때문에 각각 해당 기관에서 1차 조사를 벌인 뒤 검찰에 신병을 인도하거나 조사결과를 통보하기로(김 부대장) 했다. 정경식 부산지검장은 검찰 고위층인 만큼 서울지검이 아닌 대검에서 직접 불러 사건경위를 묻기로 했다.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검찰 소환 및 조사는 12월 20일 밤부터 22일까지 신속히 이루어졌다. 사흘에 걸쳐 면밀하게 진행된 조사를 통해 사건의 경위는 예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게 드러났다. 그것을 간추리면 이러한 것이었다.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 초원복집에서 조찬 모임을 갖는다는 정보를 처음 입수한 이는 당시 안기부 부산지부 6급 직원인 김남석이었다. 그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손에 쥐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확하게 외부에 알려진 바가 없다.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몰라도 일부 언론에서는 김씨가 안기부 부산지부장의 ‘차트사’라는,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한 보도가 나오기는 했다. 자신이 모시는 부산지부장의 일정 및 차트를 맡아 정리하던 중 복집 모임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김씨가 국민당 측 인사에게 이를 제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적다. 당장 상식만으로 판단해도, 정보기관 책임자가 자기 일정과 동선(動線)을 무슨 공개 브리핑 자료라도 되는 양 차트화하거나 문서화하는 일이란 애당초 있을 수가 없다.
007작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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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원복집 사건 수사를 지휘한 이건개 서울지검장. |
대선 열기가 뜨겁던 와중에 기관장들 모임의 정보를 입수한 김씨는 12월 5일 이를 평소 알고 지내온 자신의 고교 선배 문종렬씨에게 전했다. 앞서 두어 달 전까지 현대중공업의 예비군 업무를 맡았던 문씨는 대선 정국이 되면서 국민당 부산지역선거대책본부 강원도 출신 주민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문씨는 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직후 평소 예비군 업무 등으로 친해진 부산태화고무의 예비군 중대장인 안종윤씨를 이 계획에 합류케 해 도청기 설치작업 등에 도움을 받기로 했다. 문씨는 이어 부산시 광복동의 한 전파사에서 수신기와 송신기 등 도청장비를 구입하고 기관장들의 모임이 예정된 현장인 초원복집 지하방 답사까지 마쳤다. 그러고는 12월 9일 이 같은 계획을 당시 국민당 부산지역본부 부본부장이던 안충승 현대중공업 부사장에게 보고했다. 이때부터 안 부사장이 도청 작업을 지휘하게 됐다. 안 부사장은 문씨 등에게 당장 소모경비를 지원하는 한편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본부 최충영 이사에게는 모임 참석자들의 사진 촬영을 지시했다.
준비를 마친 이들은 기관장들이 모임을 갖기 하루 전인 12월 10일 자신들이 먼저 복집 지하방에서 점심 회식을 가졌다. 손님을 가장해 ‘현장’을 미리 찾아가 도청장치를 설치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던 김 전 장관 등 일행은 예정대로 11일 아침 모임을 가졌고 참석자들의 발언은 그대로 도청, 녹음됐다.
노태우 정권 들어 세상이 민주화됐다고들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주요인사가 일류 호텔이나 유명 음식점에 식사 등 일정을 잡으면 으레 정보기관 등에서 미리 도청장치나 사람을 심어 동향 및 대화내용을 탐지한다는 확인 못 할 소문이 돌고 있었다. 비록 정보기관의 행위는 아니었지만 복집 도청은, 도청과 ‘말조심’에 대해 새삼 인식하게 한 계기가 됐다.
“문제 확산시켜 좋을 게 뭐 있느냐?”
도청에 성공한 문씨 등은 이날 기관장들의 모임이 끝난 직후 다시 초원복집에 찾아가 도청장비를 회수했다. 이들은 곧장 안충승 부사장과 서울로 올라와 그날 밤 늦게 롯데호텔에서 국민당의 정몽준(鄭夢準) 의원을 만났다.
(나중에 정 의원의 진술에 따르면) 정 의원은 이들을 만나기 몇 시간 전인 그날 오후 안 부사장을 통해 미리 전화로 도청 사실을 보고받고 이들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정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문씨 등은 녹음테이프를 넘기는 대가로 100억원을 달라 요구했으나 확답을 듣지 못했다(문씨는 이 대목에서 정 의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고 했으나 정 의원은 그런 일이 없다고 진술했다). 정 의원은 안 부사장에게 일단 도피자금 등 경비로 쓸 2000만원을 이들에게 내어주라고 지시했다.
이튿날인 12월 12일 새벽 문씨 등은 다시 롯데호텔에서 정 의원과 만났다. 이번에는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정 의원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때도 돈에 대해서는 합의(?)가 되지 않았다. ‘큰일을 해냈다’고 생각했을 문씨 등 도청자들로서는 답답했을 것이다. 결국 이들은 나중에, 복집 모임이 폭로되고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 의원을 한 차례 더 만났다. 강남의 인터콘티넨탈호텔이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정 의원을 만날 때도 치밀하게 대화 내용을 모두 녹음했다. 우리 수사팀이 확보한 이 녹음 내용을 들어보면, 추가로 돈을 더 달라고 종용하는 문씨 등에 대해 정 의원은 (노련하게도) 액수는 절대 밝히지 않으면서 그저 ‘더 주겠다’고만 했다. 이 녹음 내용은 당시 수사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심지어 대화 당사자인 정 의원조차도 검찰 조사를 받을 때까지 자신의 말이 녹음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건개(李健介) 서울지검장에게 이를 보고하고 언론 공개를 건의했으나 이 검사장은 “문제를 자꾸 확산시켜 좋을 게 뭐 있느냐”며 극구 만류해 결국 이는 미공개 자료로 남게 됐다.
여론, “당장 구속하라”
앞서 12월 12일 정 의원에게 넘겨진 기관장 모임의 녹음테이프는 이내 국민당에 넘겨졌고 앞서 본 것처럼 그로부터 3일 뒤 전면 공개됐다. 안타까운 것은 검찰이 본격 수사에 착수한 12월 19일 아침, 도청작업을 지휘한 안충승 부사장이 해외로 나갔다는 점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12월 20일 밤부터 12월 22일까지 사흘에 걸쳐, 소환에 불응한 정 의원과 출국한 안 부사장을 제외한 사건 관계자 대부분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22일 오후 그간 파악된 사건의 경위 및 조사결과를 들고 나와 조용국(趙鏞國) 특수2부장, 안강민 1차장과 임휘윤(任彙潤) 공안1부장이 이건개 지검장실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는 오후 5시 반부터 두 시간여에 걸쳐 사건 관계자들의 구속 여부 등 이후 수사방향이 논의됐다.
도청 부분의 수사를 맡았던 나로서는 사실 고민할 게 별로 없었고, 또 평소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강경한 쪽인 내 스타일대로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도청작업을 실행한 몇몇 피의자들에 대해 충분히 구속할 수 있다고 보았고 또 나중에 기소 및 공소유지 또한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도청 수사가 기관장 모임 수사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던 만큼 내 생각대로, 독자적으로 액션을 취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기관장 모임 수사를 맡은 저쪽(1차장과 공안1부)이었다.
언론과 야권 등 바깥에서는 김기춘 전 장관 등 모임에 참석한 기관장들을 ‘당장 구속하라’고 다그치고 있었지만 검찰로서는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터놓고 말해서 김 전 장관은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역임한 검찰 및 법조계의 대선배이자 원로였다. 그런 그를 구속한다는 것은 검찰 얼굴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꼴이었다. 또한 기관장 모임을 주도한 그의 행위가 실제로 위법성이 있느냐도 신중하게 따져야 했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김 전 장관은 검찰 조사과정에서 자신이 모임을 주선하고 대화를 주도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모임의 성격에 대해서는 “선거와 관련해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모종의 액션을 도모하기 위해 모인 것이 결코 아니며 부산 기관장들과 퇴임 인사를 나누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지역감정을 내세워 김영삼 후보를 지원해야 한다는 등 대화 내용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대선과 관련해 계획이나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하려던 것이 아니라 때가 때이니만큼 자연스럽게 선거 이야기가 나온 것일 뿐”이라고 진술하던 터였다.
검찰의 고민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일단 김 전 장관 등 기관장들에 대한 불구속 수사 방침이 결정됐다. 나아가 기관장 모임 쪽과의 형평성을 감안해 도청 관계자들 역시 불구속 수사를 하는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났다. 결국 문종렬, 안종윤씨 등 우리 특수부에서 조사를 받던 도청 관계자 8명을 이날 저녁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언론에는 “검찰의 조사시한인 48시간이 다 돼서”라고 궁색한 이유를 둘러대야 했다.
여론을 의식할 것 없이 따로따로 사건을 분리 수사해서 도청 사건 쪽이라도 구속 수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속이 아렸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이브 무드에 들떠 있던 12월 24일, 검찰 수사팀은 부산에 내려가 초원복집 현장검증을 마치고 (도청 실행자들의 진술에 따라) 김해공항 근처에 파묻어놓은 도청장비도 찾아내 압수했다. 이와 함께 대검에는 그간의 수사 중간결과 및 법률검토 의견을 정리한 법률검토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에는 수사 실무진의 고민, 특히 기관장 모임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즉 김 전 장관 등 기관장들을 어떻게 사법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딱 부러지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무혐의’와 ‘불구속 기소’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제시한 것이다.
먼저 무혐의론은 “공무원도 아닌 민간인(김 전 장관)이 지인들과 가진 사적(私的)인 자리에서, 선거철에 선거를 주제로 무슨 강연이나 토론이 아닌 방담 혹은 정담을 나눈 것은 대통령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요지였다.
비록 불구속이라도 기소해 죄를 물어야 한다는 쪽은 “김 전 장관이 분명히 특정후보를 지지할 목적으로 대화를 끌어갔고, 선거운동원이 아닌데도 선거법에 규정되지 않은 좌담회 형식을 빌려 선거운동을 한 셈이어서 대통령선거법(제35, 36, 61조 등)을 위반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요지였다.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기관장 모임 수사를 맡은 안강민 1차장 쪽은 물론 서울지검과 대검까지도,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盜聽 처벌 법규 없어
도청 사건 수사를 맡은 나와 휘하 특수2부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도청 행위를 사법처리하기 위해 과연 어떤 법조항을 적용해야 할지 따져봐야 했다.
당시 남의 편지를 훔쳐보거나 전화를 엿듣는 것을 금하는 등의 도청에 대한 금지 규정은 있었지만 처벌 조항은 없었다. 한마디로 직접적으로 도청을 금지한 법조항들은 사실상 실효성이 없는 것들이었다. 고민 끝에 우리 수사진은 복집 사건의 도청 실행자들에게 형법상 주거침입죄(319조)를 적용하기로 했다. 비록 일반인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음식점이라 해도 도청을 목적으로 주인 허락 없이 출입한 것은 주거침입과 다름없다 판단한 것이었다. 또 그것에서 연장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가중처벌조항 2조) 혐의도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야간 또는 2인 이상이 공동으로 주거침입 등의 죄를 저지를 경우 가중처벌한다’는 취지의 규정이다.
나와 수사진을 끝까지 고민하게 한 또 다른 한 가지는 정몽준 의원 문제였다. 도청 사건 수사를 완결짓기 위해서는 정 의원에 대한 조사가 필요했다. 과연 그가 ▲사전에 도청 계획을 보고받았는지 ▲직접 도청을 지시했는지 ▲도청 실행자들에게 도청에 대한 대가로 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는지 여부 등에 대해 조사해야 했다. 당시 우리는 앞서 조사를 마친 문씨 등으로부터 “12월 11일 정 의원을 만났을 때 문씨와 김남석, 안종윤 등 3명의 몫으로 100억원을 요구했으며 정 의원이 고개를 끄덕여 묵시적인 승낙의 뜻을 표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당장 문제는 정 의원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앞서 우리 특수부 수사팀은 정 의원 측에 1차로 12월 22일, 2차로 24일, 3차로 26일에 출두할 것을 통보했으나 정 의원은 세 차례 모두 소환에 불응한 터였다. 이미 기관장 모임 쪽이든 도청 사건 쪽이든 관계자들이 전원 소환돼 사건의 경위와 윤곽이 드러나고, 사건에 대한 법리 검토 단계에 접어든 시점까지도 우리 수사진은 정 의원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 총장은 “왜 빨리 정 의원을 불러들이지 않느냐”고 우리 팀에 호통을 치고 있었다.
숨은 鄭夢準, 기지 발휘해 결국 소환
우스갯소리로 고진감래(고민 끝에 감이 떨어진다)라 했던가. 정 의원 소환 문제로 끙끙거리던 수사진에 이건개 검사장이 아이디어를 내놨다. “유명인사나 고위인사들은 대한민국 땅에 있는 이상 특급호텔 주변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듯했다.
세 번째 소환에도 정 의원이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12월 26일, 수사진은 서울시내 특급호텔의 벨보이와 도어맨, 식당 종업원들에까지 “정몽준 의원을 보면 연락해 달라” 전화로 사발통문을 돌려 협조를 구했다. 유명인사가 호텔에 나타나면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정보 입수와 전달이 빠르리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몇 시간 뒤 S호텔 측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이곳 중식당에 정 의원이 와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수사관이 그곳으로 날아갔고 정 의원과 대면했다.
검찰이 기어이 자신을 찾아내자 정 의원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수사관에게 “내일(12월 27일) 검찰에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어느 쪽에서 어떻게 그 소식이 풀려나갔는지는 몰라도 언론은 일제히 ‘정몽준 의원이 27일 자진 출두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윽고 이튿날 오후 2시, 정 의원은 약속대로 서초동 검찰청사에 들어왔다.
그는 “롯데호텔에서 초원복집의 도청 실행자인 문씨 등을 만나 녹음테이프를 건네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도청이 이루어진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2월 11일 문씨와 만나기 전 안충승 부사장에게 연락을 받고 나서”였다고 진술했다. 또 “안 부사장에게서 부산 지역 기관장들의 모임에 대해서도 그때 보고받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애당초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씨 등에게 100억원을 주기로 했느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거철에 온갖 이야기가 나돌게 마련인데 그것을 일일이 다 확인하고 또 믿어야 하느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문씨 등에게 2000만원을 주었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는 의미로 봐야 할 대답이었다.
사실상 大檢이 사건 지휘
초원복집 사건이 처음 불거진 12월 15일부터 정 의원에 대한 조사까지 마친 27일까지, 현장에서의 사건 수사는 서울지검이 맡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사실상 수사를 총지휘한 것은 대검 즉 검찰총장이었다.
수사가 진행되던 동안 이건개 서울지검장, 안강민 1차장, 나 그리고 수사를 맡은 임휘윤 공안1부장과 조용국 특수2부장은 거의 매일 아침마다 총장실에 올라가야 했다. 그런 우리로부터 김 총장은 직접 수사상황을 보고받고 다음 수사방향을 함께 논의하거나 지시했다. 그래서 사실 여느 사건과 달리 초원복집 사건 수사 때는 총장에게 올리는 보고서 같은 것이 따로 필요 없었다. 물론 그날그날 수사상황 보고서를 작성해 총장실 회의 때 들고 가기는 했지만, 대개 대화를 주고받으며 일을 풀어나갔다.
정 의원을 끝으로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를 마친 이튿날(12월 28일 월요일) 총장실에서 초원복집 사건을 마무리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제 과연 사건 관계자들을 어떻게 사법처리할 것인가…. 최종 방침을 정할 때도 김 총장의 판단과 의지가 가장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김 총장이 직접적으로 구속, 불구속 혹은 기소, 불기소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다만 수사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김 총장은 검찰의 엄정 중립 혹은 검찰의 정도(正道)를 강조했다.
휘하 검사들이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 한마디로 ‘아무리 검찰 원로라 해도 죄가 될 것이 있으면 죄를 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총장 휘하의 우리 일선 검사들에게 그것은 다소 의아하게 비쳤다. 김 총장이 고교 때 월반을 해서 1년 빨리 대학(서울 법대)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김 전 장관과는 엄연히 대학동기였다. 그런 인연에도 불구하고 김 총장은 ‘정도’를 강조했으니….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세상에서는 구속, 불구속 여부에 눈길을 두지만 사실 기소냐 불기소냐 여부가 대단히 중요하다. ‘구속’은 잡아두겠다는 것이지만 ‘기소’는 공식적으로 법원에 죄를 묻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검찰이 누군가를 기소한다는 것은 곧 ‘검찰로서는 그에게 죄가 있다고 확신하고 그것을 입증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 된다.
김 전 장관의 경우도 불구속 상태로 기소됐다. 그 여파 때문일까. 그와 동향(同鄕)인 데다 선거 때 열정을 부은 YS가 대통령이 됐음에도 정작 그 자신은 문민정부 내내 손발이 묶인 듯 비상(飛翔)하지 못했다.
정몽준 의원도 불구속 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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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이 확정된 1992년 12월 19일 새벽 김영삼 후보가 민자당 당직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 |
문씨 등 도청을 실행한 3명에 대해서는 앞서 본 것처럼 형법상 주거침입죄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도청 실행자들에게 주거침입 혐의 등을 적용한 이 대목을 둘러싸고 1심, 2심, 3심까지 법리 다툼이 계속되었으나 대법원은 1995년 3월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도청 실행자들에게 도피자금 등을 제공한 정몽준 의원은 범인은닉 혐의로 불기속 기소했다.
12월 29일 이건개 검사장은 이 같은 내용의 수사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국민당의 전격 폭로로 사건이 불거진 지 꼭 14일 만이었다. 온 나라를 벌겋게 달굴 만큼 정치적으로는 뜨거운 사건이었지만 정작 사법 차원에서는 열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은 평범한(?) 사건이었다. 더욱이 선거가 끝나고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이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나 열기는 급속 냉각됐다.
선거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을 바라는 것은 전혀 나쁜 일도 문제될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법무부장관까지 지낸 김 전 장관이 ‘수단과 방법을 가림 없이 어떻게든 우리 편이 이겨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쏟아낸 것은 (그것이 드러난 이상) 누가 보아도 지나친 것이었다. 도청테이프를 손에 쥔 정 의원과 국민당 입장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상대 진영을 똘똘 뭉치게 하는 뜻밖의 역효과를 초래했다.
反轉
초원복집 사건이 벌어지자 온 국민이, 심지어 당시 김영삼 캠프조차 지역감정을 내세운 김 전 장관의 언행을 비난하고 성토했다. 그러나 투표함 뚜껑을 열어보니 지역감정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김 전 장관의 생각대로) 단단하게 결집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김 전 장관과 그가 지원한 김영삼 후보 쪽에는 생각지도 못한 반전(反轉)이었다.
반대편 곧 국민당과 정몽준 의원 쪽에서도 반전이 일어났다. 자칫 밀실에서 바람처럼 쓰윽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중대한 비밀 혹은 비리를 광장으로 끌어내고, 그 힘으로 선거에 이길 것으로 예상했을 터였다. 그러나 웬걸, 도청에서 폭로까지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는 언론과 국민의 눈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싸늘했다. 그리고 선거는 그들의 패배로 끝났다. 이 또한 뜻밖의 역풍이요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가 던지는 아이로니컬한 이 교훈은 2012년 12월 다시 돌아온 이번 대선에도 참고할 만한 것이리라.
돌이켜보건대 실로 한 편의 드라마 같던 그 사건에 이제 와서 제목을 붙인다면 ‘김기춘의 오버, 정몽준의 오판’쯤 되지 않을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