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훈 詩人이 쓰는 대한민국 구라열전 ⑨ 작가 愼達子 선생 : 월간조선

내가 사는 집 앞 은행나무에 푸른 잎이 우거진다. 노란 은행잎에 익숙한 나는 매년 당황스러운 눈빛을 신록(新綠)의 은행나무에게 보낸다. 창문을 열면 은행나무 우듬지(나무 꼭대기 줄기)에 무성한 구름이 걸려 있다. 늦봄에 벌써 가을의 이미지를 생각한다. 습관은 강한 근력(筋力)을 가지고 나를 어떤 기억으로 잡아당긴다. 머릿속 기억이나 마음속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시인(詩人) 신달자(愼達子) 선생의 이미지는 환한 햇살과 주택, 그리고 미소이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과의 첫 만남은 서울 은평구에 있던 선생의 자택에서였다. 아마도 당시 다니던 잡지사 일로 선생을 찾아뵙고 원고 관련 일을 했던 것 같다. 그때 그런 이미지가 형성된 것 같다. 고요한 햇살 아래서 환하게 웃고 있는 시인 신달자. 늦은 봄날, 신록의 나뭇잎이 매달려 있는 우듬지의 이미지.

최근 학교(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생활을 정리한 선생은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수가 과로사(過勞死)한다’는 농담이 있듯이 이번 인터뷰도 매우 어렵게 이루어졌다. 책 출간과 더불어 연이은 강연과 기타 등등의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선생과 겨우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50점짜리 능력을 여러 개 갖고 있어”

서울 강남 삼성동에서 인터뷰하기로 했지만, 그 전주에 외국에 다녀오는 등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선생은 그날의 다른 일정을 취소할 정도로 하루 종일 몸이 불편했다. 한 끼 식사도 못했다고 한다. 의자에 앉는 모습이 피곤해 보여서 죄송스러웠지만, 너무나 귀한 시간을 주어서 고마웠다.

우리가 만난 호텔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 시인 고은 선생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손짓을 하면서 호기롭게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선생과 나는 웃으면서 거침없는 고은 시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문득 고은의 시 <그 꽃>이 떠올랐다.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번 인터뷰에서는 신달자 선생이 내려가는 길에 보았던 ‘그 꽃’을 보고 싶었다. 선생의 문학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지 궁금했다. 물론 앞으로 왕성하게 활동을 하겠지만, 인생의 가을날 문득 돌아보는 그런 심경은 없는지 궁금했다. 웃으면서 말하는데 컨디션이 조금은 회복되어 보인다. 다행이다 싶었다. 역시 시인에게 문학에 대한 이야기는 약효(藥效)가 있다.

“나는 50점짜리 능력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건 나쁜 일입니다(웃음). 강연·방송·시·소설·에세이 등 여러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했고, 한때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돈도 좀 벌었지요. 매우 중요한 시기였어요. 돈이 매우 필요한 시기였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100점짜리 능력 하나가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의 나를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동감이다. 나 역시 절실하게 그런 생각을 한다.

신달자 선생의 저서와 작품들.

수십년간 병든 남편 수발

“《백치애인》을 비롯한 소설 《물위를 걷는 여자》와 같은 책들은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았지요. 그 시절에는 책을 내면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지만, 시인으로서는 손해를 봤다고 할까 ….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런저런 사유로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리던 시절이었으니 간절하게 돈이 필요했지요. ‘시인으로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지요. 삶의 여유가 없던 시절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시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 받은 대산문학상은 그런 내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느껴지고요.

타인(他人)의 삶에 대해 우리들은 가혹한 편입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려웠던 시절에 ‘너 어렵니?’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어요. TV 출연이나 방송을 하면 ‘너 왜 그러니?’라고들 했지요. 이런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자기의 삶은 자기가 산다는 자기 판단이 중요하다’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타인의 충고는 고맙게 받아들이지요.”

선생은 병든 남편을 수십년간 수발하면서 살았다. 여자의 몸으로, 아내이자 어머니이자 자식으로서 어깨를 짓누르는 삶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돈이 없다면 감당할 수 없는 삶, 그것을 말로 해야 아나.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매겨지는 것이 현실 아니던가?

선생의 얘기 중에서 “어려웠던 시절에 ‘너 어렵니?’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대목은 인간관계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달자 선생 역시 한 시절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 명성이 시인으로서의 빈자리를 메울 수는 없었다. 선생은 그만큼 고독했고, 이런저런 명성을 탄다는 이유로 삐딱하게 보는 타인의 시선에 외로웠다. 그래도 선생은 ‘자신의 판단’으로 살았다.

“어느 시기가 되자, 더욱 시에 매진했지요. 제 생각에 시집 《아버지의 빛》을 내고 나서부터 시가 많이 변화한 것 같아요.”

《아버지의 빛》 이후 선생은 시집 《종이》《바람 멈추다》 등을 내면서, 왕성하게 시작(詩作)을 해 왔다. 1972년 《현대문학》에 박목월(朴木月)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첫 시집 《봉헌문자》 이후 시, 소설, 에세이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 온 선생은 이제는 시인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 자연과 첫 교감

1991년 박사 학위 수여식 후 부친 신중길(愼重吉·오른쪽) 선생과 신달자 선생.

신달자 선생의 시세계와 인생에 아버지는 바로 열쇠였다. 선생이 최초로 기억하는 그 자리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언제였는지 …, 아마도 서너 살 때였겠지요. 아버지의 등에 업혀 논길을 가고 있었어요. 세상이 나를 안아 주는 것 같은 등이었지요. 아버지의 넓은 등에서 나는 주위에서 들려 오는 개구리소리, 풀벌레소리를 들었고,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감촉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서 대자연과 첫 교감을 했다는 사실은 선생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이 힘으로 선생은 역경을 이겨내고 시인으로 우뚝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요, 저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아버지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일기를 꾸준히 쓰셨는데, 아버지의 일기장을 훔쳐보면서 아버지는 등단하지 않은 시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지요.

아버지처럼 저도 청춘 시절에 일기를 썼는데, 그걸 모두 없애 버렸어요. 제가 아버지의 일기를 훔쳐보았듯, 딸이 제 일기를 훔쳐볼까봐 그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거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후회스러워요. 대학시절 혼자 살면서 정말 모든 이야기를 거기에 해 놓았는데, 딸아이가 볼까 두려워 그런 행동을 했다니 말이지요.”

아버지 …, 나는 신달자 선생의 부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르한 파무크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가방>이란 제목의 그 연설문은 매우 뛰어난 명문장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시인이 되고자 했던 꿈을 접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그런 아버지가 틈틈이 쓴 글들을 모아 놓은 가방을 자신에게 전해 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설가가 되었으니 가방을 열어 그간 적어 놓은 글들을 한번 읽어 보라”고 했지만, 자기는 그 가방을 서재의 한 귀퉁이에 놓아 두고 감히 열어 볼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가방에서 위대한 문학이 나온다면 아버지의 내면에 완전히 다른 사람(훌륭한 작가)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며 파무크는 망설인다.

선생은 파무크의 ‘아버지의 가방’과 같은 것을 당신 부친의 일기를 통해서 발견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아버지는 바로 시인이었다. 훗날 신달자 선생이 시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

“옛말에 딸이 왕비가 되면 큰절을 올린다는데, 이제 네가 시인이 되었으니 내가 너에게 큰절을 올리고 싶다.”

아버지의 일기

“아버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집안으로 돌아오셨지요. ‘전쟁 때 내가 집에 없어서 미안하다’며 ‘내가 지금부터 돈을 벌어서 너희들을 호강시켜 주겠다’고 하셨어요. 오빠가 6·25전쟁 통에 전사(戰死)했거든요.

아버지는 과연 그렇게 하셨어요. 아버지는 마치 돈의 흐름을 알고 있는 듯한, 뛰어난 사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어요. 동네를 돌아다니며 전쟁의 폐허를 보고서는 ‘앞으로 집이 많이 필요하겠다’ 싶어 제재소(製材所)를 차렸고, 나중에는 정미소(精米所)를 차려 재산을 많이 모았어요.

그냥 우리들을 위해 돈을 많이 버는 아버지, 자상한 아버지였는데,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본 아버지의 일기장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요. ‘왜 사람에게는 날개가 없을까, 날개가 있다면 훨훨 날아갔을 텐데’라는 글이었지요. 그리고 그 일기장에 ‘슬프다’ ‘외롭다’ ‘울었다’ 등의 동사가 어지럽게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아버지의 외로움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자인 아버지, 어머니 외에도 여러 여자를 얻어 배다른 자매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아버지의 어떤 면이 외롭고 괴롭고 슬픈 것일까. 소녀 신달자는 ‘아버지의 일기’를 열어서 보고 시인의 길을 발견한다.

“그렇게 몰래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고, 왜 아버지는 이럴까 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글을 써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글은 사람의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읽어 내는 방법이니까 말이지요.

그런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중학교 시절에 부산 경남 백일장에서 장원 아래에 있는 일등을 했어요. 그때 이형기 박재삼 시인을 처음 뵈었지요. 태어나서 진짜 시인을 처음으로 본 거지요. 선생님들이 짜장면도 사 주셨어요. 그렇게 문학과 인연을 맺어 대학까지 국문과로 진학하고 자연스럽게 문인,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이런 아버지와 더불어 어머니는 항상 그 자리에 계시는 ‘내 마음의 학교에 교장선생님’이었어요.”

문학의 전환점이 된 아버지를 기리며

선생의 시에 어머니는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약속 없었지만/ 살던 집에 같이 들어가/ 아버지는 시조 읊으시고/ 나는 교복 입은 채 숙제를 하고/ 부엌에선 어머니 도마소리 들리고/>

부엌에서 나는 도마소리를 묵묵히 들으면서 소녀 신달자는 자란다. 아버지 곁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어머니가 있었다. 시에 더욱 매진하던 어느 날, 신달자 선생은 자신의 문학에 전환점이 되었던 아버지에 대한 시를 썼다. 그리고 시집 《아버지의 빛》을 상재(上梓)한다. 모두 다섯 편의 연작시(連作詩)로 이루어진 아버지의 빛은 지금 이 자리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그중에 한 편을 읽어 본다.

<아버지의 빛 2>

어느 날부터 내 둘레를
가득 메워 오는 그것은
연분홍 미소로 받아도 송구한
은은한 물빛
편안하려라
고향길 골목 어귀 아버지 든든한
등에서 바로 본 일곱 살 하늘빛을
조금은 닮았다

지금은 서서히 흙이 되어 가는
아버지 육신의 마지막 소멸이
이렇듯 염려의 빛으로
딸 앞에 이르시는가

흙 속에 남은
한가닥 뼈가 말하는
헌신의 불꽃
지상의 마지막 말씀으로 이르는
육친의 빛>

6·25때 戰死한 오빠

선생은 〈아버지의 빛〉 다섯 편의 시를 통해 자신에게 문학의 길을 열어 주었던 아버지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복원하고 있다. 편편히 묻어 있는 문학의 진정성이 고인이 된 아버지의 육신을 빛으로 떠오르게 한다.

선생에게, 이 글을 읽는 독자를 위해 자신의 시 세 편을 골라 달라고 했다. 독자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어리석은 질문에 선생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웃으면서 <등잔> <침묵피정> <광야에게>를 골라 주었다. 선생의 시 세계에 세 편의 시는 빙산의 일각이지만 이 시를 찾아 읽어 두면 6월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선생은 6·25전쟁에서 전사한 오빠 이야기도 해 주었다.

“나에게 6·25전쟁은 남북전쟁이 아니라, ‘오빠가 죽은 전쟁’으로 남아 있어요. 오빠는 아마도 안양 부근 어디에서 행군(行軍)을 할 때 부대장의 옷을 대신 입고 대장을 보호하다가 전사했다고 해요. 어린 나이에 참으로 의로운 죽음이지요. 당시 오빠 부대의 부대장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헌병대장이 된 걸로 기억해요. 김모씨였는데, 오빠의 은혜를 잊지 않고 전후(戰後)에 우리 집을 돌봐 주기도 했지요.”

“狂信은 자신들이 믿은 神에게 폐를 끼치는 일”

신달자 선생이 우리 시각으로 기도문을 쓰고, 그림을 그려 《묵주기도서》를 만든 황인수 신부(왼쪽), 정미연 화백(오른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인터뷰를 청하자 선생은 “옛날이야기를 물어보려고 하는 거 아니지요?”라면서 난감해했다. ‘옛날이야기’는 바로 당신이 지어미로서 지독하게 고생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선생이 수십년간 병든 남편을 수발든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어서 여기서 다시 다루지는 않겠다. 그런 지난한 생활에 필요한 것이 바로 돈이었고, 그 돈을 벌기 위해 애썼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이런 생활의 중심에 문학과 종교가 있다. 선생이 고른 시 <침묵피정>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선생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남편과 함께 영세를 받았어요. 저는 조금 남다른 종교체험을 했어요. 하지만 내 존재가 종교 안에 있기 때문에 시에 특별히 종교성을 부여하지는 않아요.

종교는 시와 같은 겁니다. 은유가 필요하지요. 예수가 하신 말씀, 복음(福音)들은 모두 비유(比喩)와 은유(隱喩)로 이루어져 있지요. ‘나를 따르라’, ‘무조건 믿어라’ 식의 직유(直喩)는 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무신론자(無神論者)보다 광신론자(狂信論者)들이 더 나쁘다는 생각이 드네요. 광신은 자신들이 믿은 신(神)에게 폐를 끼치는 일입니다.”

선생에게 시는 기도이고, 일기이고, 신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모든 것이 다 시에 녹아 있다. 한 편의 시를 읽으면 어떤 경우 한 인간이 고스란히 보인다.

소통의 방법

신달자 선생이 2008년 4월 서울 강남구에서 마련한 시 낭송회 ‘길거리 시인과의 데이트’에 참석,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신달자 선생은 소설·시집·수필집 등의 저서 외에도 명(名)강연으로 사랑을 받아 왔다. 강연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말을 해 주는 일이다. 원고를 쓸 때처럼 퇴고(推敲)를 할 수도 없고, 집필을 할 때처럼 복장을 편하게 할 수도 없다. 조심스럽고 단정해야 한다. 강연에는 상당한 집중력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강의도 강연이다. 선생에게 우선 강연을 할 때 어떤 마음이 드는지 궁금했다.

“일단 강단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아 …,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생들을 비롯해서 주부, 회사원, 기업체의 간부들까지 강의를 듣는 사람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들의 표정과 하는 일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거지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거죠. 내가 신명이 나야 듣는 사람도 신명이 나는 겁니다.”

신달자 선생의 명강연에는 몇 가지 비법이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요. 누구나 거의 예외 없이 절실한 문제를 안고 있어요. 그걸 내가 먼저 이야기하고 걷어 내면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귀가 열리는 거지요. 청중의 귀가 열리면 내 입도 같이 열립니다.”

“강연을 할 때 화법(話法)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잘난 척을 하면 안 돼요. 고민을 듣고 싶으면 먼저 고민을 털어놔야 하는 거지요. 그러면 강단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청중이 ‘아, 저 사람도 나하고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거리감이 사라지면서 서로 손을 잡는 겁니다. 똑같은 이야기도 어떤 사람이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요.”

선생은 “삶으로 고통 받은 독자들이 직접 이야기하기를 원해서 버겁기도 했다”고 말한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집으로 전화가 많이 왔어요. 전화를 해서 울면서 인생상담을 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진짜 내 인생도 힘든데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교감을 통해서 나는 독자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시절, 많은 분이 내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위안을 얻었던 거지요. 책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생각하라”

선생에게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의 삶에 대해 물었다. 우리 주위에도 화려하고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는 여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차를 마시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내면은 빈곤하지요. 옛 시절에 비해서 여자들이 팔자 좋은 시절을 살고 있다고들 하지요. 남편에게 큰소리도 치고, 자기개발도 하고, 육아 문제나 집안 문제에서도 비교적 자유롭지요. 조선시대의 ‘시집살이 3년’이란 말과 비교해 보면 외양은 말할 수 없이 행복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복잡해지는 겁니다. 복잡해지니까 자기 정립이 잘 안되는 거지요. 우울증이나 각종 일탈적(逸脫的)인 행동은 이런 복잡한 감정에서 유발되는 부작용입니다.”

여성의 외양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가정을 중심으로 움직이다 보면 획일적인 삶과 직면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 여성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은가? 신달자 선생은 오랜 강연과 많은 여성과의 대화를 통해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인생을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누구라는 것이 잘 드러나는 시대잖아요. 결혼하고 시집살이하고 애 낳고, 애 돌보고, 자식들을 시집 장가 보내고 늙어 부부가 해로(偕老)한다. 이런 시절이 아닙니다.

요즘 여성에게는 비슷한 삶이 없어요. 돈 버는 여자, 날씬한 여자, 지적(知的)인 여자, 정치하는 여자…. 하여간 각양각색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보면서 한 여자의 속이 비어 갑니다. 개개인의 갈등이 깊어지는 거지요. ‘저들에 비해서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삶을 산다’고 느끼는 여성들은 박탈감이 심해져요. 잘난 여자들이 등장하니까, ‘나는 뭔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거지요.”

결국 여성 문제도 인간 근본 문제인 ‘어떻게 살 것인가(How to live)’로 귀착된다.

“집에서 말을 많이 하라”

“지금 너는 뭘 하고 있니,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합니다. 지금 여성들은, 통계를 보면 하루에서 3~5시간 정도 가사(家事)노동을 합니다.

100세 시대가 도래한 오늘날, 어떤 여성이 지금 50살이라면 앞으로도 50년이라는 세월이 남았습니다. 이 50년은 지난 시절의 50년과는 다릅니다. 내가 혼자 써야 하는 시간이 많다는 거지요. 혼자 있어야 할 시간을 견디기 위해선 우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급스럽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용의 일이 아니라, 작고 초라해도 내가 좋아하는 일 말이지요. 남이 좋아하는 거 말고, 한 달에 10만원을 벌더라도 봉사를 한다는 심정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남성들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여성들의 경우 친구들 모임에 다녀와서 스트레스나 마음의 앙금이 남는 경우가 많아요. 서로 비교하니까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자기 인생을 생각하는 사람이 건강하고 밝게 살 수 있어요.”

어떻게 해야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선생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마음속에 ‘혼자 해라’를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능력입니다. 많은 여자가 집단적으로 움직이려 하지요. 극장에 가도, 식당에 가도 우르르 가지 말라는 말이지요. 요즘 여성들은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으면 불안해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책을 하더라도 우선 혼자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말을 많이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밖에서 말을 많이 하는 개그맨들은 집에 가서는 침묵한다고 합니다. 밖에서 기운을 다 쓰고 들어가니까 말입니다.

여자가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고 들어와 집 안에서는 아무 말도 안 하면 불편해집니다. 집 안에서 말이 필요한 겁니다. 특히 아이가 성장하면 부부 사이에 말이 없어집니다. 집 안이 적막강산이에요. 부부가 서로 도와줘야 됩니다. 주부 스트레스 원인의 89%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 집 안이 비는데, 그걸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내성적인 것 같아요. 이걸 발전적인 방향으로 바꿀 필요가 있어요.”

인생의 10가지 지혜

《여성을 위한 인생 10강》.

이러한 선생의 말씀은 최근의 저서 《여성을 위한 인생 10강(講)》에 잘 정리되어 있다. 선생이 말하는 10가지의 인생 지혜를 소개한다.

<1강, 열 번의 실패도 인생에선 작은 숫자다.
2강, 척박한 땅에서 핀 꽃이 더 향기가 짙다.
3강, 물은 1℃만 모자라도 끓지 않는다.
4강, 늙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것이다.
5강, 행복은 여자가 창조하는 신화(神話)다.
6강, 여자가 웃으면 세상도 웃는다.
7강, 마음속 자궁(子宮)으로 남자를 품으라.
8강, 하루에 한 시간, 인생이 달라진다.
9강, 일어나라, 하고 싶은 일도 일어날 것이다.
10강, 그대의 꿈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

신달자 선생이 이 땅을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보내는 다감(多感)한 메시지이다. 여기에는 선생의 전(全) 인생이 스며 있다. 이 중에서 나는 ‘늙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것이다’에 밑줄을 그었다. 이 말처럼 노령화(老齡化) 사회에 필요한 잠언(箴言)이 또 있을까.

늙으면 추레해지고 약해진다. 이런 육체적 결함을 넘어서는 방법은 인문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옛 시절처럼 이 디지털 문명시대에 경로(敬老)사상을 주입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지혜롭게 늙으면 도서관이 된다. 그 도서관에서 젊은이들이 쉴 수 있는 그런 노인이 되어 간다면, 늙어지는 지금의 이 시간도 즐거운 한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을 위한 인생 특강이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사람을 위한 선생의 지혜로운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기까지 선생이 걸어온 길은 지난했다.

산의 한 고개를 넘어선 사람에게 보이는 풍경이 있다. 계곡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산에서는 보이는 법이다. 신달자 선생의 마음의 풍경에는 높은 산의 정상(頂上)에서 볼 수 있는 세상이 있다. 그 세상을 조금의 시간으로 다 알 수는 없는 일. 나뭇잎 같은 몇 마디의 말씀이 고마웠다. 바람이 불고 해가 지고 있다.

“지금의 나는 어디 가도 재미가 없어요 …”

선생은 일산에서 강남까지 꾸역꾸역 찾아온 후배에게 따듯한 밥 한 그릇 먹이고 싶다며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선생은 그날 입맛을 잃어 한 끼도 못해 기운이 없었는데, 장시간 인터뷰를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선생도 기분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아 안도했다.

선생과 근처의 식당으로 가서 복탕을 먹었다. 선생은 복지리탕의 맑은 국물에 하얀 쌀밥을 넣어 조금씩 먹었다. 복의 살덩어리는 모조리 건져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 복어를 맛있게 먹었다.

“지난 겨울 넘어져서 깁스를 하고 지낸 적이 있어요. 뼈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지내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이 이런 환부(患部)를 가지고 있구나’ 하는 …. 보이지 않는 골절을 당한 사람들, 사람들은 아픔을 많이 숨기고들 살아요. 그런데 ‘나는 너무나 솔직하게 사는구나’ 싶어요.”

‘그것이 선생 문학의 핵심이 아닐까. 문학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은유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삼성동 광장으로 나왔다. 수많은 젊은이가 건강하게 지나간다. 여름이 가까워지니 젊고 건강하고 싱싱한 기운들이 몰려다닌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선생이 말했다.

“인생에서 뭘 해도 재미있을 때가 있어요. 소녀들은 사소한 일에도 비눗방울처럼 웃음을 터트리잖아요. 그냥 저렇게 걸어 다녀도 참 예뻐요. 저들에게는 재미있는 걸 찾아가는 게 아니라, 재미가 저절로 찾아오지요. …, 그런데 말이지요. 지금의 나는 어디 가도 재미가 없어요 ….”

삼성역에서 전철을 타고 일산으로 돌아오면서 선생을 생각하니 재미있게 살고 싶어졌다. 내일은 친구와 재미있는 공연이라도 봐야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