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배우를 만나다 ① 한국영화 93년의 역사를 이어온 미녀군단 : 월간조선

요즘 영화계는 강제규 감독의 야심작 <마이웨이>의 흥행참패로 뒤숭숭하다. 연말 대통령 선거 때문에 세상까지 뒤숭숭해 영화계는 더 심란하다. 하지만 넓게 보면 <마이웨이> 같은 대작은 한국영화사에서 나름 의미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 크게 낙심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불과 8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왕이 있었고(1926년 조선 마지막 왕 순종 별세), 왕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가 아직도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고 있을 만큼 한국에서 현대문명의 역사는 짧다. 영화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의리적 구투> (김도산 감독)로 시작된 한국영화 제작의 역사는 올해로 93년을 맞았다. 첫 영화라는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지만, 35년간 이어진 일제강점기 속에서 한국영화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 시대에 변사가 등장하는 무성영화 몇 편이 나왔지만 일본은 조선인이 만든 영화에 대해 심한 검열을 가하여 한국의 영화계는 거의 질식상태에 빠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한국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1950년 6·25전쟁 이후나 되어서였다. 서구에서는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루이·오귀스트)가 파리에서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한 이래 영화라는 장르가 눈부신 발전을 이뤄온 것에 비하면 우리 영화는 시작도 한참 뒤졌고, 발전과정도 순탄치 못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 영화 제작이 본격화됐다고는 하지만 그 후 군사독재 18년간 한국영화는 사전·사후 검열과 우수영화제도(정부가 우수영화로 인정하는 국산영화를 만들어야 외화 수입쿼터를 주던 시절의 제도) 속에서 제대로 된 성장과정을 밟지 못했다.

“최은희 언니댁 식모가 되면…”

이런 순탄치 못한 과정 속에서 거칠게 성장해 온 한국영화를 이끌어온 일등공신은 아마 여배우들일 것이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도시 한구석에서도, 엄혹한 군사정권의 압박 속에서도, 영사기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주인공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만인의 연인이 되어 진정한 위안을 안겨주었다.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50년대 영화계 분위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제작자보다는 감독이었으며, 감독보다는 배우가 그 위에 있던 시절이었다. 한국영화 역사상 감독의 숫자가 가장 많았던 그 시절, 이들이 자신의 영화에 적합한 배우를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행운’이었다.

당시 매스컴은 배우들에 처음으로 ‘스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특히 여배우들은 전쟁 이후 영화 관객의 주요 수요였던 여성관객들에게 궁핍하고 어려웠던 당시 현실을 벗어나게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동일시하기 좋은, 하늘의 별과 같은 흠모의 대상이었다.

이 시기에 극단 출신 여배우들이 대거 스크린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표적인 배우로는 이빈화, 염매리, 이민자, 문정숙, 윤인자, 최은희, 조미령 등이 꼽힐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광복 전부터 활동하던 복혜숙, 전옥, 주증녀, 한은진 등과 함께 여배우라는 존재를 관객들에게 각인시켰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최은희씨가 받은 팬레터를 보면 당시 관객들이 갖고 있던 스타급 여배우에 대한 선망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어떤 배우 선생님이던 그 댁의 식모로 일하고 싶습니다. 특히 최은희 언니 댁의 식모가 된다면 원이 없겠습니다. 최은희 언니가 전에 《영화세계》 애독자 위안공연차 목포에 오셨을 때 저에게 “서울로 놀러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 서울로 올라와 최은희 언니를 만나 식모로 써달라고 부탁하려는 데 만날 길도 없고, 막막해졌습니다.(이하 생략)’(전남 광주 염**)

이런 최은희가 <로맨스 그레이>(1963년, 신상옥 감독)에서 첩으로 등장하자 팬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이후 그녀는 이미지 변신을 포기해야 했다고 한다.

〈춘향전〉의 영화化

1966년 10월 14일 밤 시민회관에서 있은 제4회 청룡상 시상식에서 인기여배우 베스트3으로 뽑힌 고은아, 최은희, 김지미(왼쪽부터) .

특히 조미령이 타이틀 롤을 맡았던 <춘향전>(1955년, 이규환 감독)은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영화로 처음 등장한 <춘향전>은 당시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10만명(당시 서울인구 1백57만명)이 넘는 대대적인 흥행기록을 세우며 한국영화의 초기 르네상스를 이끌어냈다. 이 여세를 몰아 2년 후인 1957년에는 당시 대세였던 여성국극(國劇)을 영화로 만든 <대춘향전>(김향 감독)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춘향전은 그 시절의 인기 여배우가 타이틀 롤로 등장하는 통과의례적 작품으로 연이어 리메이크됐다. 1961년에는 김지미가 주인공을 맡은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최은희를 앞세운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맞대결을 펼쳐 <성춘향>이 압승을 거두는 이색 라이벌전도 펼쳐졌다.

또 1968년에는 김수용 감독이 당시 대세이던 홍세미를 앞세워 <춘향전>을 개봉해 성공을 거뒀다. 1971년에는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이었던 문희가 춘향으로 등장한 이성구 감독의 <춘향전>이 개봉됐다. 2000년에 임권택 감독이 만든 <춘향뎐>은 신인여배우인 이효정을 등장시켜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조미령의 <춘향전> 성공을 계기로 한국영화는 멜로드라마 전성시대를 열게 되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상을 영화는 발 빠르게 재현해 냈다. 이 드라마 안에서 여성의 캐릭터는 단순한 선(善)과 악(惡)의 이분법적 대립관계가 아니라 보다 다양한 사회적 위치 혹은 성적 역할을 대변하는 복잡한 형태로 분화되었다. 그만큼 다양한 색채를 가진 여배우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 속에서 여배우들은 가부장제 속의 희생양이거나 불운에 우는 존재들이 아니라 ‘여성이 어떻게 주어진 인생여건을 이겨내면서 험난하고 복잡한 사회를 강한 생활의지로 살아갔는가에 대한 생활기록’(《영화세계》·1963.2)을 보여주는 캐릭터로 변화해 갔다. 근대화로 급변하는 한국의 사회상을 어떤 실체보다 잘 설명하는 존재들이었던 셈이다.

트로이카의 등장

한국영화의 본격적인 태동기인 1950년대는 캐릭터가 분명한 ‘아름다운 악녀(惡女)’의 전성기였다. 이들은 그 전 시절 비련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헤로인들과는 달리 반쯤은 자유롭고 반쯤은 부도덕한 그런 존재였다. 그 시절에는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1958)에서 최은희가 연기한 ‘소냐’의 캐릭터가 대표적인 존재가 될 것 같다. 가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와 기지촌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거주하게 된 ‘양공주’들은 미국적 모더니티를 가장 먼저 경험한 ‘모던 걸’들로 화면에 등장했다.

이즈음 한국형 미인의 이미지가 조미령 스타일의 현모양처형에서 <아름다운 악녀>(1958)의 최지희처럼 보다 현대적 개성을 갖춘 모습으로 변모해 가기 시작했다. ‘한국의 소피아 로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녀처럼 개성 넘치는 여배우들의 등장을 전후 ‘아프레걸’ 이미지로 분류하는 영화사학자들도 있다. 귀엽지만 당돌해 보이는 미인인 김지미의 등장도 이런 시대적 변화와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 혹은 황금기였다. 1959년에 제작편수 100편을 돌파한 한국영화는 다양한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한 일차적 요건을 충족시켰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직업도 다양해졌다. 여류 비행사, 여성 판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등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장르적 다양한 시도도 함께 이뤄졌다.

이 속에서 청춘영화 트로이카가 등장했다. 문희, 남정임, 윤정희 3인방이 경쟁적으로 스크린을 누볐고,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견인해 갔다. 여배우와 재벌가의 결혼이 사회적 화젯거리로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육체파 배우 김혜정이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과 결혼하면서 은퇴했고, 트로이카 중 한 명인 문희가 《한국일보》 장기영 회장의 아들인 장강재 《한국일보》 부사장과 결혼하면서 영화계를 떠났다. 윤정희 역시 프랑스 유학을 떠나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하면서 트로이카는 무너졌다.

1970년대 초 트로이카 체제가 깨진 이후부터는 한국영화 역시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70년대 엄혹했던 유신시대 검열을 피하기 위해 하이틴 영화와 호스티스물이 범람했다. 이런 풍조 속에서 하이틴 스타 임예진, 퇴폐적인 이미지의 현대적 여성상으로 등장했던 나영희 등 특정 아이콘으로 팬층을 확보한 여배우들이 등장했다.

영화와 TV의 스타 공유로 스타 마케팅 성공

한국영화의 암흑기로 불리는 이 시기는 TV의 보급 등 미디어 환경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있던 시절이다. 이 문제는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해결이 된다.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등 신 트로이카의 등장에 의해서다.

이들은 더 이상 TV 탤런트와 영화배우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등장했다. 이들은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다. 당시 방송 3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마케팅 전략을 보여줬던 TBC는 신 트로이카 3인을 모두 전속배우로 보유하면서 시청률 경쟁에서 단연 앞서나갔다. 이들이 출연한 영화 역시 계속해서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와 TV의 스타 공유가 스타 마케팅의 성공을 불러온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 번째 요인은 1970년대 전반기 영화와 TV로 분류되어 있었던 스타의 영역을 하나로 묶은 데 있었다. 이런 현상은 스타의 가치를 확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둘째로는 이들이 TV와 영화가 구성하는 스타의 이미지의 교환을 극대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기력 논란에도 불구하고 TV에서는 친근한 이미지를, 영화에서는 모호하고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각자 개별적 시장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셋째로 1970년도 이후 TV와 영화 사이의 역할 분담도 작용했다. 당시 영화는 선정성으로 승부를 걸었는데, 신 트로이카는 성적 매력을 보여주는 데도 성공하고 있었다.

이 시절부터 스타 마케팅이 화두로 자리를 잡아왔는데, 이 이후부터 여배우의 스타덤은 영화와 TV 양자에 걸친 형태로 확장됐다. 이는 TV 스타와 영화 스타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온 미국과는 달랐다. 한국의 스타급 여배우들이 두 분야를 모두 활동영역으로 삼게 된 것은 한국의 문화시장이 협소한 탓도 있지만 문화산업의 성장과 함께 스타의 영역이 다양한 매체의 수요를 충족시켜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80년대 컬러 TV의 보급과 함께 CF도 스타급 여배우의 데뷔 무대가 될 수 있었다.

오늘날 여배우들은 신 트로이카 체제 이후 만들어진 미디어 환경 속에서 분화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로 승부를 걸고 있다. 1960년대에는 데뷔조차 어려웠을 개성파 여배우들이 속속 등장하는 건 그만큼 역할뿐만 아니라 배우들에게 원하는 재능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또 광고시장의 확장으로 여배우들의 스타성이 부(富)의 창출과 직결되면서 이들의 사생활 패턴 역시 달라졌다. 한국영화 초창기의 배우들은 당대 이름을 떨치던 감독과 결혼하면서 동업자 관계에서 성공의 발판을 다졌다. 그 이후에 등장한 청춘스타들은 재벌과의 결혼으로 연예계를 떠나는 장면을 해피엔딩으로 선망했다. 당시 여배우들은 한결같이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반영하듯 “현모양처가 꿈”이라는 판에 박힌 말을 하고 있었다.

신세대 여배우들

하지만 요즘 여배우들은 프로페셔널한 직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스스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다 보니 결혼도 같은 직업을 가진 연예인과 하는 경우가 많다. 성공한 배우가 창출하는 수익이 중견 산업체에 견줄 수 있을 정도라 스타 한 명이 곧 기업체인 시대에 와 있다. 물론 스타가 되기까지 그만큼 어려운 경쟁과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과거보다 더 치열한 물밑 접전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여배우를 바라보는 눈도 많이 너그러워져 결혼이 곧 은퇴이던 여배우의 운명은 옛이야기가 됐다. 이혼을 비롯해 여러 가지 불미스런 사건 사고의 주인공으로 등장해도 은퇴라는 길을 택하기보다는 정면승부로 난관을 극복하고 재등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직업인으로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여배우들의 모습이 다양해진 매체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대중은 이제 생활인으로서 여배우의 모습 또한 넉넉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제 그다지 길지 않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쓰고 있는 스크린의 헤로인들을 만나보자. 두 해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이런 의미를 되새기는 뜻에서 한국의 여배우들 기획전을 한 적도 있다. 이번 호에는 한국영화의 전방을 지켜온 여배우들의 역사를 훑어보고, 다음 호부터는 이들 중 대표주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스크린 앞과 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일제강점기 無聲영화 시대의 트로이카: 문예봉-김신재-김소영]

무성영화 시대의 트로이카 중 하나였던 김소영.

1932년 <임자 없는 나룻배>에서 뱃사공의 딸로 데뷔하여 ‘조선의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로 불린 문예봉은 조선영화계의 최고 스타였다. 전통적인 정숙한 여인상을 보여주었던 문예봉이 <미몽>(1936)에서 남자를 위해 자식마저 버리고 가출하고, 그 남자가 범죄자임을 알게 되자 경찰에 밀 고해 버리는 애순 역을 맡은 것은 그녀의 팬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고전적인 모습을 <조선해협>(1943)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생끗 웃는 모습이 귀여운 ‘만년소녀’ 김신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문예봉, 김신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여배우였던 새치름한 자태의 김소영은 당시 영화인들의 지난한 삶을 그린 <반도의 봄>(1941)에서 만날 수 있다.

[1950년대 이후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극단 출신의 스타軍團]

영화 <조선해협>에 출연한 문예봉(왼쪽)과 김신재(오른쪽).

1950년대에는 전후 허무주의와 퇴폐풍조를 마릴린 먼로 풍의 드레스를 입고 한 몸으로 구현하는 ‘아프레 걸’이 유행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극단 출신의 배우들이었는데, 윤인자는 <운명의 손>(1954)에서 북한 스파이 마가렛으로 분해 한국영화사 최초로 상대방 남자와 키스신을 연기했으며, 최은희는 <지옥화>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애인의 남동생을 유혹하는 양공주 소냐를, 조미령은 <여사장>(1959)에서 여성잡지사 사장이며 페미니스트인 요안나를 연기했다. 최은희는 <로맨스 그레이>에서 뽀글거리는 파마머리를 하고 본부인들이 집에 쳐들어 와 살림을 부수자 이에 맞서 싸우는 첩 만자로도 변신했다.

또한 입이 떡 벌어지리만큼 아름다운 김지미의 모습을 <비 오는 날의 오후 세시>(1959)에서 보노라면 그녀가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외에도 자애로운 한국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 황정순과 한은진 역시 극단 출신 여배우였으며, 통통 튀는 듯이 깜찍한 아가씨 엄앵란과 최지희, 큰 키에 서구적인 마스크, 육감적인 몸매로 뭇남자들을 단번에 녹였을 것 같은 김혜정, 특유의 우아한 매력을 지닌 문정숙, 가냘픈 몸매에 슬픈 얼굴 고은아의 다재다능한 모습이 스크린에 다양하게 등장했다. 이들이 출연한 이 시기의 대표작이 한국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육체의 고백>(1964), <열녀문>(1962), <육체의 문>(1965), <이쁜이>(1964), <김약국의 딸들>(1963), <귀로>(1967), <갯마을> (1965) 등과 같은 작품들이다.

1950년대 초를 대표하는 스타인 조미령(1929년생)은 여덟 살 때 <임자 없는 자식들>이라는 연극무대를 통해 데뷔해 제작자 겸 프로듀서인 이철혁과 결혼한 이후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그녀는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여배우였다. 그녀가 춘향이로 등장한 <춘향전>은 한국영화계의 전기를 마련한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수수한 화장과 패션으로 정적인 역할에 단골 출연했는데, 이런 영화 속 이미지 때문에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에 기대를 하는 당시 관객들에게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 이미지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1950~60년대에 선 굵은 여배우로 활약했던 윤인자.

황해도 사리원 출생인 윤인자(1928년생)는 요즘 관객들에게는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에서 비중 있는 노스님 역할로 더 익숙하겠지만, 1950~1960년대 그녀는 걸출한 아름다움을 가진 선이 굵은 여배우였다. 당시 영화잡지에는 ‘쾌활하고 개방적, 사교적이며 여장부 스타일로 폭이 크고 매듭진 성격의 여배우’라는 평이 나와 있다. 윤인자는 해주에서 월남한 후 악극단 단원이 되어 활동하던 중 부산공연 때 한국전쟁을 맞았는데, 전후 이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에 출연하면서 스크린의 여주인공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많은 영화에서 주로 마담으로 많이 출연했는데, 신상옥 감독은 그녀에 대해 “윤인자에게는 아무도 따르지 못할 독특한 매력이 있는데 다른 감독들이 그 장점을 따르지 못하고 다만 육감적인 마담으로만 이용해 왔다”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최은희(1928년생)는 여배우가 경험할 수 있는 폭넓은 경험을 다 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연극무대와 스크린을 오갔고, 남한과 북한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했고, 여배우와 감독으로서 활약했다. 이런 폭넓은 이력을 가진 배우는 아직까지 없다. 극단 신협 출신인 최은희는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1947)를 통해 영화에 데뷔했다. 관객들에게 배우로서 각인이 되기 시작한 때는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1949)에서부터였다. 신인감독 신상옥을 만나 결혼한 후 제작사 ‘신필림’을 만들고 회사를 정상의 위치에 올려놓기까지 강력한 파트너가 돼 주었다. 120편이 넘는 출연작의 대부분이 신필림 작품이었다는 건 그녀의 헌신을 한눈에 알게 한다. 그 정점은 <성춘향>(1961)일 것이다. 이 영화는 2개월간의 장기상영으로 32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였고, 일본, 미국, 홍콩 등지로 수출돼 그때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국산영화의 해외진출에 대한 꿈에 불을 댕겼다.

1960년대 국내 첫 육체파 여배우 등장

영화 <천년호>에 출연한 ‘국내 육체파 여배우’ 1호 김혜정.

이들처럼 극단 출신이면서 1950~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뛰어난 성격배우로 꼽히고 있는 문정숙(1929년생)은 누구보다 영화적 연기를 구사한 배우였다. 데뷔작은 신상옥 감독의 <악야>(1952)지만 영화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은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1956)이다. 문정숙은 이만희 감독을 만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페르소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 감독과의 첫 작품은 <다이얼 112를 돌려라> (1962)인데, 대중에게 가장 기억되는 작품은 아무래도 <만추>(1966)일 것이다. 문정숙의 마지막 작품은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1996)로 세월에 마모돼 가는 자신의 얼굴을 기피하지 않고 거의 쉼 없이 카메라와 함께한 진정한 배우의 모습을 끝까지 보여줬다.

1963년 11월 30일 제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팬들의 투표로 인기상을 차지한 신성일과 엄앵란(오른쪽).

이들의 후배 중에서는 김혜정(1937년생)을 빼놓을 수 없다. 국내 육체파 배우 1호인 그의 사진 밑에는 ‘38-24-38’이라는 신체 사이즈가 늘 따라다녔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서구형의 세련된 얼굴은 요즘 미인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조건을 모두 갖춘 현대적 모습이었다. 1958년 이만홍 감독의 <봄은 다시 오려나>를 통해 데뷔했다. 대표작은 조긍하 감독의 <아까시아 꽃잎 필 때>(1962)로 산업경제신문사가 주최한 신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즈음 한국영화계는 여배우의 관능미가 새로운 미의 기준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김혜정은 욕망과 관음적 시선의 대상으로 등장해 강간을 당하거나 옷이 찢기는 고문을 당하는 포로 등의 역할로 단골 등장해, 그런 장면은 일종의 클리세(너무 반복해 진부한 표현)가 됐다.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과 결혼한 후 1968년에 스크린을 떠났다. 지금까지 관능적 여배우의 원조를 이야기할 때 김혜정이라는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그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최근 남편 신성일의 고백 수기 여파로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엄앵란(1936년생)은 청춘영화의 상징적 존재이다. 일제강점기 연극배우 출신으로 초기 영화에서 단골 노역으로 출연했던 여배우 노재신의 딸로 데뷔는 전창근 감독의 <단종애사>(1956)의 어린 송비 역할이었다.

숙명여대 가정과를 졸업한 엄앵란은 우리나라 ‘학사 배우 1호’로 남녀 대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이미 인기 여배우가 된 엄앵란과 신인배우 신성일은 한 시절을 풍미한 청춘영화의 커플로 상류층 또는 하층민 역할을 서로 바꿔가며 사랑에 빠지고 이별하기를 수없이 반복한 끝에 실제 결혼에 골인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결혼 후 10년 만에 한 차례 스크린으로 돌아왔지만 변해버린 모습으로 인해 이후 영화 활동은 없었다.

김지미의 시대

1960년대는 김지미의 시대였다.

고교 재학 시절인 1957년 김기영 감독에게 발탁돼 <황혼열차>에 출연하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여배우 김지미(1940년생)는 지금까지 미의 전형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을 정도로 카리스마 넘치는 미모로 스크린을 주름잡았다. 1958년 <별아 내 가슴에>에 출연하던 열아홉 시절 이 영화를 만든 홍성기 감독과 결혼해 최은희와 필적하는 인기배우로 성장했다. 196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최무룡과의 간통사건으로 이혼을 한 후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그녀를 ‘낭만적 사랑의 표상’의 위치로 각인시키기도 했다.

1960년대는 김지미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성숙한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배우로 연기의 폭을 넓혔다. 1969년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최무룡과 이혼했으며, 1976년에는 연하의 가수 나훈아와의 약혼으로 세간의 화제가 됐다. 나훈아와는 6년간 동거생활을 한 후 헤어졌는데, 이후에도 연기활동은 쉬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은 걸쭉한 그녀의 목소리로 동시녹음한 <길소뜸>(1985)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1986년에는 지미필름을 설립해 자신이 주인공으로 나서기도 하며 몇 편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생명이 긴 주연급 여배우로 지속적으로 활동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경제력은 물론 나이를 먹어감에도 불구하고 여성성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해왔기 때문이었다. 1991년 심장외과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의 네 번째 결혼 역시 십 년 만에 끝나고 현재는 가족과 미국에서 살고 있다.

심은하와 같은 맑은 이미지의 여배우의 원조인 고은아(1946년생)도 이 시절의 헤로인으로 꼽힌다. 홍익대 재학시절 정진우 감독에게 발탁돼 <란의 비가(悲歌)> (1965)로 데뷔한 이후 같은 해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로 스타덤에 올랐다. 인기 절정이던 1967년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과 결혼한 이후 TV로 활동무대를 바꾸기도 했다. 이후에는 종교영화 제작사인 ‘은아필름’을 만들어 제작자로 변신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극장을 개관하는 등 사업가적 면모도 보여줬다.

[1960년대의 트로이카 시대: 문희-남정임-윤정희]

1969년 제6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 참석한 1960년대의 트로이카 남정임, 문희, 윤정희(왼쪽부터).

1960년대 국산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간 트로이카 3인방은 각자 차별화되는 뚜렷한 개성으로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서라벌예대 재학 시절 친구를 따라 KBS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다가 카메라 테스트를 참관하러 온 이만희 감독의 조감독 눈에 띄어 데뷔한 문희(1947년생)는 ‘작은 몸매에 때 묻지 않은 청순가련한 이미지’로 팬들을 울리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이만희 감독의 <흑맥>(1965)으로 데뷔한 문희는 임권택 감독의 <법창을 울린 옥이>(1966)에서는 가난으로 동생들을 죽이고 법정에 서야 하는 불운한 옥이로, 이만희의 <원점>(1967)에서는 거리의 여인 선을 연기한다. 대표작은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으로 비련의 여주인공 이미지를 각인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의 흥행으로 4편의 <미워도 다시 한 번> 속편이 만들어졌다. 결혼으로 인한 은퇴 전까지 모두 6년간 활동을 했는데, 출연했던 영화가 300편이 넘는다는 건 얼마만큼 겹치기 출연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장강재 《한국일보》 부사장과 결혼하기 직전 촬영한 <씻김불>(1973>을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떠났다.

국제배우학원의 배우 모집에 발탁돼 김수용 감독의 <유정>(1966)으로 데뷔한 이후 360여 편에 이르는 영화에 출연한 남정임(1945년생)은 발랄하고 깜찍한 모습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1971년 재일교포 사업가 임방광과 결혼한 후 영화계를 떠나지만 1976년 이혼하고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이후 사업가 노승주와 재혼하지만 그 이후의 활동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마지막 작품이 된 <웃음소리>(1978)에서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해 자살여행을 떠난 오학자를 영화전편 내내 대사 없이 연기하며 완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2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1960년대 말 ‘지적이고 성실한 배우’로 평가받던 윤정희(1944년생)는 합동영화사의 신인배우 모집에 선발돼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1967)으로 데뷔했다. 트로이카를 형성하던 다른 두 배우에 비해 작품 선정에 신중한 모습을 보여 영화계 일각에서는 ‘그의 영화가 한국영화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문희와 남정임이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떠난 뒤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1973년 파리로 유학을 떠나며 트로이카는 완전히 붕괴된다. 1976년 파리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한 후 파리를 근거지로 하면서 가끔씩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2010년에는 이창동 감독의 <시>로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쓰는 등 지금까지 쉼 없는 연기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윤정희는 억센 시골여성에서 세련된 도시여성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았는데 김승옥 감독의 <감자>(1968)에서는 억척스러운 복녀를, 최하원 감독의 <무녀도>(1972)에서는 신들린 무녀 모화로 분하고 있다. 윤정희 역시 3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1970년대 新트로이카 시대: 정윤희-장미희-유지인]

1970년대 ‘신(新) 트로이카’시대를 열었던 정윤희,장미희,유지인(왼쪽부터).

TV의 등장으로 영화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던 1970년대, 영화와 TV를 넘나드는 신(新) 트로이카의 시대로 접어든다.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 3인방은 그 전 세대 트로이카 못지않은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며 한 시대를 주름잡았다.

정윤희(1954년생)는 이경태 감독의 <욕망>(1975)에 캐스팅되었지만 뛰어난 미모에 비해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1980~ 1981년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아 대종상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결혼으로 은퇴한 이후 활동을 접었다.

장미희(1957년생)는 박태원 감독의 <성춘향전>(1976)으로 데뷔, TBC 드라마 <해녀 당실이>에 출연하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에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와 인기드라마 <청실홍실>에 출연해 영화와 TV에서 모두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본격적인 연기자로서 인정을 받은 작품은 그녀가 미국에 머물고 있을 당시 촬영한 배창호 감독의 <적도의 꽃>(1983)과 <깊고 푸른 밤>(1985)이다. 현재까지 연기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에서 영화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 중이던 1974년 연방영화사와 《주간한국》이 공동으로 주관한 신인배우 공모를 통해 배우의 길에 들어선 유지인(1956년생)은 그해 <그대의 찬 손>으로 데뷔한 이후 CF, TV 드라마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였다. 지적이고 도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에서 맡았던 가난한 주인공을 마음대로 갖고 노는 부잣집 딸의 이미지를 많은 배역에서 그대로 살려가며 카리스마적인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한 배우였다. 결혼으로 인해 은퇴를 했다가 최근 이혼과 함께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과 함께 하이틴 스타로 등장한 임예진(1960년생) 또한 이들 트로이카와는 별개로 그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1974년 김기영 감독의 <파계>로 데뷔한 그녀는 1975년 김응천 감독의 <여고졸업반>을 시작으로 문여송 감독의 하이틴 영화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아역배우에서 성인배우로: 전영선, 안인숙, 이영옥, 강수연]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강수연(왼쪽).

1958년 <종말 없는 비극>으로 데뷔하여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소녀로 전설적인 아역배우가 된 전영선(1950년생)의 인상적인 연기를 하길종 감독의 <한네의 승천>(1977)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후 그녀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1981)의 명희로 출연하였지만 성인 여배우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1963년 <부부조약>으로 데뷔한 안인숙(1952년생)은 발랄한 여대생 역할을 거쳐 1974년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에서 사랑하는 남자들에게 버림받고 자살하는 호스티스 경아 역으로 성인연기를 보여주었다. 신상옥 감독의 <꿈>(1967)에서 조신의 딸 역으로 데뷔한 이영옥(1955년생)은 <바보들의 행진>에서 발랄한 여대생 역으로 스타가 된 후 <병태와 영자>, <수절>, <너 또한 별이 되어>에서 성숙한 연기를 꾸준히 보여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잡지 《어깨동무》에 사진이 실리면서 연기활동을 시작한 강수연(1966년생)은 <별 삼형제> (1977),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1979) 등 손수건을 적시게 만드는 멜로드라마에 아역으로 출연한 후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에서 미미 역을 맡으면서 청춘스타로 변신하였다. 다시 <연산군> (1987), <감자>(1987) 등에 잇달아 출연해 성인연기자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1986)로 1987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국내 여배우 중 최초로 ‘월드스타’ 애칭을 얻는다. 강수연은 1980년대 중반 대세를 이뤘던 원미경, 이미숙, 이보희가 결혼 등으로 주춤한 이후 1990년대 새로운 여배우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오로지 영화만을 지키는 독보적 존재로 남아 영화계를 지켜준 공로자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준 1980년대 여배우들: 원미경, 이미숙, 이보희, 안소영]

〈애마부인〉 안소영.

1978년 미스 롯데로 선발되어 TBC 20기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후 1979년 <청춘의 덫>으로 데뷔한 원미경(1960년생), 역시 1978년 미스 롯데 인기상을 수상하고 TBC 탤런트로 선발된 후 김응천 감독의 <모모는 철부지>로 데뷔한 이미숙(1960년생), 그리고 MBC 11기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이보희(1959년생)가 이 시절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이보희는 탤런트 시절에는 무명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다 선배 김보연의 소개로 이장호 감독과 인연이 돼 <일송정 푸른 솔은>(1983)으로 데뷔하면서 영화배우로서 성공가도를 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개성 있는 연기자들도 적지 않았는데, 1980년 MBC 10기 탤런트로 선발된 후 <어둠의 자식들>(1981)로 데뷔한 나영희(1960년생)는 1980년대 텔레비전과 스크린을 오가며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준 여배우이다. 또한 1980년대 정치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제작되었던 ‘성애영화’의 헤로인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배우들이 있었는데, 임권택 감독의 <내일 또 내일>로 데뷔하여 1982년 <애마부인>으로 그해 흥행기록을 세운 안소영(1959년생)이 그 대표적인 여배우일 것이다.

또 중학교 2학년 때 CF모델로 데뷔해 박중훈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황림 감독의 <깜보>(1986)에 출연했던 김혜수(1970년생)의 영화인생도 이즈음에 시작됐다. 김혜수 역시 지금까지 TV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다양한 캐릭터의 연기를 해오고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성숙한 외모로 주목을 받았는데, 현재까지 ‘건강미인’의 대명사로서 정상의 자리를 지켜오는 건 그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춘추 전국시대 개성파 여배우들]

〈타짜〉 김혜수.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영화의 지형은 많이 바뀌었다. 특히 ‘기획영화’의 등장으로 새로운 판도가 짜였다. 기획영화란 영화의 주관객층인 젊은 관객층의 구미에 맞는 기획안과 시나리오를 미리 확보하고 감독을 물색해서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스토리라인이 중시되면서 영화배우들의 캐릭터도 범주가 확장되었다.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배우들의 연기경쟁 또한 치열해졌다. 미모보다는 연기력으로 승부하는 여배우들이 보다 스크린에 많이 등장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고 있기도 하다.

여배우들의 풀도 그만큼 다양해졌다. 주연여배우들의 연령층도 두터워졌고, 외모에서도 미모만큼 개성도 강력한 경쟁요소로 드러나고 있다.

1970년대 트로이카 중 한 명인 유지인을 비롯해 하이틴 스타였던 임예진, 1980년대 대표주자였던 이미숙 같은 중견연기자들이 자신들의 나이대에서 무르익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또 전형적인 미인형인 이영애, 김희선, 김태희, 송혜교 등의 배우들이 정상의 자리에 있는가 하면 배두나, 문소리, 강혜정, 이나영, 전도연, 하지원 등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승부하는 여배우들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속에서 김혜수와 같이 오랜 세월 꾸준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여배우도 한 축을 지키고 있다.

현재 한국영화 시장은 한국영화계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 계열의 대형 배급사들이 투자에 나서 100억원 이상이 투자된 대형작품들이 연이어 발표되는 등 과거와는 다른 규모로 확대되고 있다. 일 년에 140편 정도의 작품이 만들어지지만 이런 대형배급사의 구미에 맞는 영화들이 주로 제작되기 때문에 여배우들이 설 무대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래서 요즘 스타들의 움직임은 영화보다는 TV에 더 치중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특히 최근 경향은 여배우의 아름다움을 전면에 내세우는 멜로드라마보다는 스토리라인과 화면 그 자체로 승부를 내는 남성적 취향의 액션물들이 많아졌다. 이 때문에 스스로 자신만의 시장성을 만들어서 무한경쟁해야 하는 여배우들에게 현 시점은 아마 춘추전국시대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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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배우를 만나다 ① 한국영화 93년의 역사를 이어온 미녀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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