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국제영화제 회고전에 초대받아
⊙ 임화수씨의 한국연예주식회사에 들어가 차태진씨와 인연
⊙ <대괴수 용가리>로 한국 공상과학 영화에 한 획을 그어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 임화수씨의 한국연예주식회사에 들어가 차태진씨와 인연
⊙ <대괴수 용가리>로 한국 공상과학 영화에 한 획을 그어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관객 1000만명 넘는 영화가 나타난 요즘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영화계의 진정한 르네상스는 이미 왔다 갔다. TV 수상기가 제대로 보급되기 전, 영화가 대중의 오락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영화사적으로 1960년대를 한국영화 최초의 르네상스기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직후 한 해에 고작 40여 편 제작하던 한국영화가 국산영화 장려정책 덕분으로 이 시기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230편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우기 때문이다. 물론 이 중에는 소위 ‘실적영화’도 적지 않았다. 외화쿼터를 얻어내기 위해 개봉도 하지 않으면서 제작해 창고로 직행하는 불운의 작품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영화의 고전으로 인정되는 명작들이 쏟아져 나온 것도 이때다.
한국 청춘영화의 효시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킨 <맨발의 청춘>(1964)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바로 김기덕(77) 감독이다. 그는 한국영화의 첫 르네상스 시절, ‘흥행의 보증수표’라는 닉네임을 달고 한국 대중·장르 영화의 최전선을 지켰다.
이런 공로를 기려 김 감독의 작품이 올해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회고전에 초대돼 대중 앞에 다시 공개됐다. 김 감독의 데뷔작인 <5인의 해병> (1961)을 비롯한 대표작 8편을 다시 보는 일은 영화팬들에게 반가운 일이었다. 이런 대규모 영화제 회고전에 초청된다는 것은 고전영화로 인정을 받는 일이라 원로감독들에게는 남다른 감회가 있다.
‘흥행의 보증수표’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그는 한국 대중·장르 영화의 최전선에서 가장 진취적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청춘영화의 효시인 <맨발의 청춘>을 비롯해 최초의 호스티스 영화인 <칠십칠번 미스 김> (1963), 최초로 야구를 소재로 한 스포츠 영화 <사나이의 눈물>(1963), 그리고 최초의 괴수영화로 국내 최초의 특수촬영 영화인 <대괴수 용가리>(1967) 등 실험적인 작품들을 연이어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1961년 <5인의 해병대>로 데뷔해 1977년 <영광의 9회말>로 영화감독의 길을 떠날 때까지 모두 66편(공식기록, 김 감독은 69편으로 기억하고 있다)의 영화를 만들었다. 70편에 가까운 그의 작품들을 더듬어 보는 작업은 한국영화 중흥기를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김 감독은 서울에서 팔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토국제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배재학당의 교감, 오산중학교 교장,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세브란스의전 교수를 지낸 교육자이다. 이런 환경 때문인지 그의 형제들은 대부분 명문고 출신이다. 그 역시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 한국전쟁을 겪지만 않았다면 아마 예정대로 의사가 돼 있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의 기록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사조의 언덕> 배우 하려다 조연출로 영화와 인연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갔던 그는 미 공군부대 통역관으로 취업을 했고, 그 부대의 이동에 따라 군산에 머물게 됐다. 이 시절 시나리오 작가인 이종기씨와 가깝게 지내며 시인 고은, 시나리오 작가 유두연 등 문화계 인사들과 어울리게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화는 그의 관심사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영화와의 인연은 우연히 맺어졌다. 이종기씨가 <종말없는 비극>이라는 시나리오를 진해에 머물고 있는 전창근 감독에게 보여주러 가는 자리에 동행하면서 시작됐다. 이렇게 알게 된 전창근 감독은 공보처에서 제작하는 한미친선 영화 <불사조의 언덕>(1955)의 연출을 맡았고, 영어를 잘하던 김 감독에게 주인공을 제안했다. 하지만 같이 출연하는 미군에 비해 키가 작다는 이유로 캐스팅이 불발되자 그는 조연출로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후 김 감독은 <단종애사>(1956)를 비롯한 전창근 감독의 영화와 <순애보> (1957)를 한 한형모 감독의 영화를 거치면서 조감독 생활을 했다.
1950년대 우리나라 영화계는 소위 뉴웨이브와 같은 흐름이 있었다. 당시 영화를 한다는 것은 ‘딴따라’라고 천대받던 시절이어서 엘리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접근을 꺼렸었는데, 전창화 감독 밑에서 경력을 쌓은 그와 이종기씨, 연출계의 홍일점 홍은원 감독, 촬영감독 장환씨 등이 모여 ‘우리(宇利)필림’을 만들고 뉴웨이브를 이끌어 갔다. 이때 준비한 창립 작품이 바로 이범선 원작의 <오발탄>이었다. 충무로에 사무실도 차렸지만, 의욕만 앞섰을 뿐 이들에게 제작비를 대줄 사람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현목 감독이 작품을 양보해 달라고 했고, 결국 유 감독의 손에서 한국영화 걸작으로 꼽히는 <오발탄> (1961)이 탄생했다.
그즈음 그는 생계를 위해 영화계의 큰손 임화수씨가 경영하는 ‘한국연예주식회사’에 들어가 편집기사로 일했는데, 이 회사에서 그의 영화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인연을 만나게 된다. 바로 당시 제작부장 역할을 맡았던 차태진씨다. 4·19혁명 이후 정치범으로 몰린 임화수씨가 처형되면서 회사가 쓰러지자 차씨는 그에게 ‘극동흥업’이라는 영화사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전무급 전속감독이 되었고, 차태진씨가 대표를 맡았다. 그의 첫 작품인 <5인의 해병> (1961)부터 극동흥업 시절의 사실상 마지막 히트작인 <아네모네 마담>(1968)까지 모두 38작품을 여기서 만들었다. 전성기 시절 그의 영화는 대부분 극동흥업 작품이다. 이렇게 안정된 제작환경 속에는 그는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흥행의 보증수표’ 격인 감독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극동흥업은 해외서커스 수입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결국 1970년대 초 도산하면서 없어졌다.
차태진씨와 함께 세운 극동흥업에서 계속 히트작 내놔
그 이후 1977년 그가 영화감독직을 떠나기까지 6~7년간 만든 20여 편의 작품은 대부분 프리랜서 감독이 된 그가 제작자의 의뢰에 따라 만든 작품들이라 큰 히트작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전무급 감독으로서 마음껏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던 극동흥업 시절 영화와 의뢰한 작품을 찍어 주는 프리랜서 감독으로 하강한 시절의 영화들로 크게 양분될 수 있을 것 같다.
극동흥업 시절 그는 다른 감독들과는 다른 제작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같은 제작사-동일한 스태프-스타 시스템(신성일·엄앵란 커플)’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시스템은 1930~194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가 짧은 기간 내에 장르영화를 양산할 수 있던 요인으로 확실한 뒷받침이 된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청춘영화 전용 상영관이었던 아카데미극장을 통한 안정된 배급은 그에게 일시적인 형태로나마 제작시스템을 완성시켜 줬다. 이런 남다른 환경이 동시대 다른 감독들 사이에서 그를 압도적인 거장으로 부각시키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환경이 뒷받침해 주니 그만큼 한다는 뒷담화도 적지 않았다), 당대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을 다채롭게 하며 다양한 층위의 관객들과 교감에 성공했던 주요한 원인으로 보인다.
물론 어떤 시기의 작품이든 평론가들은 그의 영화 속에서 그만의 고유한 특징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고 푸념한다. 그만큼 그는 장르와 장르 사이를 종횡무진 넘어 다녔다. 하지만 장르와 캐릭터적 특징을 찾겠다는 의도만 접어 두면, 그의 영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보인다. 바로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는 ‘실험정신’이다. 그의 영화에는 한국 ‘최초’, 혹은 ‘효시’라는 타이틀이 붙은 영화가 적지 않다.
그의 첫 영화인 <5인의 해병>(1961)은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큰 성과를 거뒀다. 그는 이 영화로 1962년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이 상은 그가 감독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상이다. 예술성보다는 흥행성을 더 좇은 그에게 상복은 없었던 것 같다. 사회는 움직였지만, 심사위원들은 못 움직이는 그런 영화들을 만들었기 때문인 듯.
두 번째로 만들었던 <신입사원 미스터 리> (1962)는 시골에서 올라온 신입사원이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나가는 과정을 빠른 속도로 그린 영화다. 이 작품 역시 ‘소포모어 징크스’(두 작품이 연이어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징크스)를 깨고 연이어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고는 호스티스 영화의 첫 시도인 <칠십칠번 미스 김>(1963)과 청춘영화의 시작이었던 <가정교사>(1963)를 같은 해에 발표하며 관객몰이에 나섰다. 다음해인 1964년에 공전의 히트작 <맨발의 청춘>을 만들어 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작품세계는 전쟁, 멜로, 에로틱 코미디, 권투영화, 괴수영화 등 새롭고 과감한 시도로 이어졌다. 에로틱 코미디인 <말띠신부>(1966)는 당시만 해도 금기시된 성적 유머가 등장해 관심을 끌었다. 또 사주센터 소장인 김희갑의 내레이션으로 영화 전체를 진행하고, 다섯 여자의 옴니버스 이야기로 구성한다든지, 타이틀과 크레디트 장면에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성격을 나타내는 만화가 신동헌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등 갖가지 새로운 영화적 시도가 등장했다.
최초로 야구를 소재로 삼았던 <사나이의 눈물>(1963)에 이어 최초로 실제 복서인 동양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씨를 출연시킨 <내 주먹을 사라>(1966)도 화제였다. 이미 수백만 청취자를 울린 라디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현역 프로복서 20명과 실제 복서 출신인 박노식씨, 그리고 두 명의 신인 복서를 후원하고 있던 김지미씨가 출연해 여러 모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철저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이해한 감독
그의 유일한 SF작인 <대괴수 용가리> (1967)는 한국 공상과학 영화에 한 획을 그었다. 이 영화로 한국영화의 특수촬영 기술을 진일보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 영화계의 중론이다. 국내에서는 불가능한 특수촬영을 위해 일본 기술진을 부르느라 그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1300만원의 제작비를 투자했다. 당시 100만~200만원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으니 엄청난 제작비다. 이러니 어쩌면 최초의 블록버스터급 영화(흥행을 목표로 대규모의 제작비를 투자한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고속촬영, 미니어처촬영, 화면합성 기법 등 다양한 특수촬영 기법이 소개돼 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유일한 문예영화인 주요섭 원작의 <아네모네 마담>(1968)은 신성일·엄앵란 시대의 마침표를 찍은 영화이기도 했다. 청춘영화와 역사를 같이한 아카데미 극장이 이 영화를 끝으로 문을 닫아 더 화제였다. 이 영화에서 김 감독은 슈베르트 음악을 모티브로 쓰면서 등장인물들의 클로즈업, 정면구도 등의 사용을 통해 내면의 드라마를 정적이면서 감각적으로 표현해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 냈다.
사실 그가 영화계에 들어온 1960년대 초 한국영화의 장르는 혼돈성 속에 있었다. 아직 시도해 보지도 않은 장르가 적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만든 장르영화도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말하자면 그때 텍스트적(내용상) 장르영화는 있었지만, 요즘처럼 제작체계가 뒷받침되는 그런 영화장르는 없던 시절이었다.
장르에 대한 인식도 없이 혼성장르적 영화가 양산되던 시절 김기덕 감독은 무대 중앙에서 스타감독의 위치에 서 있었다. 이런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본질적으로 영화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텍스트에 일관성을 입혀 가는 작가주의적 관점과 의지보다는 대중지향적인 가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더 중시했다. 그에게 영화는 철저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일 뿐이었다. 그래서 당대 주목할 만한 영화감독들이 각종 상과 비판적 승인을 받기 위한 지름길인 문예영화 제작에 관심을 기울일 때 그는 이에 무관심했다. 이런 특징은 그가 전무급 감독으로서 극동흥업의 경영진이었기 때문에 갖게 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얼마나 종횡무진했었는가는 그의 절정기로 꼽히는 1967년 한 해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청춘영화 <맨주먹 청춘>, 멜로드라마 <타인들> <원죄>, 계몽드라마 <섬마을 선생>, 코미디 <내 멋에 산다>, 가족드라마 <후회>, SF영화 <대괴수 용가리> 를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그 시대 문화적 통섭의 산물이기도 하다. TV연속극을 영화화한 <타인들>과 <내 멋에 산다>, 라디오 드라마와 가요의 대대적 히트를 기반으로 한 <섬마을 선생>, 일본소설 번안작품 <원죄>, 일본 대중장르의 한국적 적용인 <대괴수 용가리> 등이 그 증거이다. 그래서 그를 그 시절 한국 대중영화의 지형도를 그려낸 상징적 감독이라고 한다.
그의 영화 중 거의 절반 이상인 35편이 당시 대세를 이뤘던 멜로드라마이다. 이 안에는 가족드라마와 청춘영화, 액션, 사극, 뮤지션영화까지 포함돼 있다. 멜로드라마가 우세했던 것은 관객들이 이야기를 영상을 통해 전달받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라디오 연속극이 공전의 히트를 치던 시절이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김 감독의 영화 중 14편의 영화가 라디오나 TV 연속극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 중 주목할 만한 작품들도 나왔다. 그 가운데 가족 멜로드라마인 <오늘은 왕> (1966)과 치정 멜로드라마인 <늦어도 그날까지는> (1969)은 단지 드라마 각본만을 충실히 따라가지 않고 그 나름의 해석을 통해 영상화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한국영화가 질식해 갔던 1970년대는 그에게도 암흑기였다. <124군 부대> (1970)와 <무작정상경> (1970)에서 알 수 있듯이 김 감독은 그 시절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내적으로는 극동흥업의 도산으로 제작시스템을 잃었고, 외부적으로는 강화된 영화검열제도가 목을 조이는 변화 속에서 1970년대 이후의 필모그래피는 더 복잡해졌다. <청춘교사>(1972)나 <유관순>(1974)과 같은 프로파간다성 영화와 <꽃상여> (1974)와 같은 문예지향적 영화, <가수왕>(1975)이나 <영광의 9회말>(1977)과 같은 흥행지향적 영화를 아우르는 다난한 형태를 띠고 있다.
<맨발의 청춘>과 같은 대히트작 다시 나올까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부터 영화를 권력 안정화의 정책 홍보적 수단으로 도구화했지만, 1972년 10월 유신 이후에는 이를 더 노골적으로 강행했다. 사전 각본 검열과 사후 심사 검열이라는 이중 검열장치를 통해 영화인들의 상상력을 제약했다. 우수영화제도를 만들어 이런 영화를 제작한 제작사에 외화쿼터를 배분하는 형식으로 국산영화 제작을 유도하는 정책 역시 영화인들을 틀 안에 가둬 버렸다.
이처럼 영화가 현실에 대해 발언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국가안보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복종해 정권 친화적인 영화들을 생산하도록 하는 정권적 전략은 1970년대 내내 지속됐다. 이 시절에 만들어진 그의 영화는 어쩌면 필사적 생존의 노력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 같다.
그가 1977년에 만든 마지막 작품 <영광의 9회말>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긍정적 힘이 넘치는 영화이다. 이 영화를 끝으로 그는 교단으로 인생의 행로를 바꿨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영화학과가 있었던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교수가 된 것이다.
그후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일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인 20년 동안 서울예대 교수와 학장으로서 영화계의 현실을 타파하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 그는 감독이 되기까지 반노예와 같은 과정을 겪어야 했던 도제 형식의 현실이 가슴 아팠기 때문에 이를 후학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나름 애를 써 왔다. 그러면서 대종상의 심사위원, 영화검열 심의위원, 공연윤리위원회 영화심의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등의 일을 하면서 영화현장을 지켰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01년 예술인 최고의 영예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다. 평생직인 이 자리에 영화인 중 감독으로는 그와 김수용, 임권택 감독 세 명, 시나리오 작가로는 신봉승 김지헌 작가 두 명, 배우로는 황정순씨만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에게 영화는 “나의 모든 것”이라는 말로 함축된다. 감독으로서 일선은 떠났지만 아직도 그의 꿈은 “죽기 전에 한 편 더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생을 정리할 나이에 이르다 보니 나름대로 무엇인가 결론을 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든다고 한다. 그동안 영화로 인해 그가 존재한 만큼 무엇인가 결론을 낸다는 의미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는 작품을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말문 트기를 해낸 감독인 그가 기술적으로나 산업적으로 비약적 성장을 거듭한 현재의 한국영화계에서 마지막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스토리가 될까. 아마도 <2011 맨발의 청춘>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아직도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처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니까.⊙
▣ 김기덕 인터뷰
“<맨발의 청춘>, 황당한 영화제목이었지”
인생의 절정기를 누렸던 사람은 그 시절의 추억만으로도 늘 풍요로운 삶을 살 것 같다. ‘한국영화계 신사(紳士)’로 알려진 김기덕 감독을 마주한 순간 바로 그런 느낌이 다가왔다. 청춘기에는 영화를 직접 만들며 무수한 장르적 실험을 감행했고, 중년기로 접어들면서는 영화와 관련된 지식과 기술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데 평생을 보내 온 진정한 영화인의 모습이 한눈에 느껴졌다.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을 앞두고 분주한 그를 일산 자택에서 만나 보았다.
―전작전은 이번 영화제에서 처음하는 거지요?
“한두 편씩 영상자료원 특별 기획전에 포함된 적은 있지만 전작전은 처음이에요. 내가 16년간 모두 69편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영상자료원에 보관돼 있는 작품이 모두 27편이에요. 나머지는 다 분실됐죠. 그중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하는 8편은 장르별 대표작을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선정한 것이에요. 저는 선정 과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안 미쳤어요.”
―그중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면요?
“자주 그런 질문을 받는데, 자식 중 누가 가장 예쁘냐는 질문처럼 어려워요. 단, 그중에 아쉬운 작품이 있는데, <남과 북>(1965)이에요. 당시 공전의 히트를 친 라디오 드라마를 영화화한 건데, 흥행영화만 주문받던 저에게 모처럼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만들 기회가 와서 정말 목욕재계하고 신중하게 접근했던 작품이었음에도, 당시 정치상황으로 인해 제작환경이 너무 어려웠어요. 전후에 우리 민족의 아픔을 정면으로 그리는 건 금기시된 상황이어서, 라디오와는 달리 영상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각본부터 완성 이후 검열에서까지 다 가위질을 당해 원작을 살리지 못한 애매한 작품으로 끝난 게 정말 아쉬워요.”
“영화는 감독 만족하라고 있는 것 아냐”
―1960년대 한국 대중·장르 영화 최전선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데, 작품을 둘러보니 하고 싶었던 작품은 원도 한도 없이 다 해 본 것 같아요.
“정말 정신없이 만들었어요. 얼떨결에 감독이 돼서 한 작품 끝나기 전에 다른 작품 시작하고, 두 작품을 같이 할 때도 있었고. 그런 식으로 무모하게 1960년대를 지났어요. 그때 저는 시한부 인생처럼 사전에 개봉날을 잡아 놓고 촬영 강행하며 스케줄을 맞추는 일상을 보냈어요. 당시 관중 동원 숫자로 톱클래스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영화를 평가할 때 예술성과 흥행성 양면을 생각하는데, 전 영화에서 작가주의는 아니라는 입장이에요. 영화가 한두 푼 들어가는 작업이 아닌데, 감독이 자기 혼자 만족하는 작품 만드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거지요. 저는 최소한 영화가 산업적 측면에서 투자한 것 정도는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영화평단에 작가주의 감독에 대한 숭배 풍조는 어떻게 보는지요.
“저 역시 정말 영화의 특성만 다 살려서 남이 이해하든 말든 만들라면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전 영화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달랐어요. 사람들이 나한테 예술적 작품이 없다고 하는데, 내가 못 만들어서 안 만든 게 아니에요(그의 유일한 문예영화는 주요섭 원작 <아네모네 마담>(1968)으로 이 작품 역시 흥행에 성공했다). 몇 사람밖에 안 보는 영화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영화가 어떤 형태를 갖춰야 하느냐가 늘 저의 고민이었어요. 예술영화 한 편 만들고 다음 작품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영화는 수지타산이 맞게 찍어야 한다는 게 제 신조였고, 영화사 극동흥업을 통해 그렇게 돈을 벌어서 유현목 감독이 <아낌없이 주련다> <김약국의 딸들> 같은 걸작을 만드는 데 뒷받침을 해 줬어요. 하지만 그런 거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한 적 없어요.”
―조연출 시절 전창화, 한형모 두 감독을 거쳤는데, 무엇을 배웠나요.
“전 감독님한테는 힘 있고 굵은 연출 스타일, 한 감독님한테는 당시로서는 앞선 기술적 노하우를 전수받았다고 볼 수 있지요. 특히 전 전 감독님한테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간결한 문장으로 분명한 묘사가 있는 콘티를 쓰시던 분이세요. 편집 프레임을 찾아서 자르는 작업까지 저한테 시키셔서 감독으로서 갖춰야 할 여러 가지 부분을 배웠다고 할 수 있어요.”
―특이하게 편집기술이 좋아 한때 전문 편집기사로 일하다가 감독이 된 경력이 있잖아요. 편집기술이 특출한 감독은 어떤 장점이 있는 건가요.
“여러 가지 이점이 많죠. 일례로 제가 감독했을 당시에는 우리 계약서에 이 영화를 찍는 데 필요한 네거티브 필름까지 정해요. 보통 2만5000자 분량이에요. 2만5000자면 1분에 900자 정도 돌아가니까 1시간30분이면 8100자가 들거든요. 8100자를 만들기 위해 2만5000자를 쓰는 거예요.”
―요즘은 보통 10만자를 넘게 쓰지요?
“요즘은 우리가 했을 때하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호조건이에요. 우리는 2만5000자보다 더 쓰면 나머지는 우리 개런티에서 물어내야 했어요. 그러니까 편집을 아는 게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예를 들어서 1분짜리 쇼트(shot-한 장면)를 촬영하면서 한 50초까지 잘했는데 나중에 10초 남기고 NG가 났을 때, 편집을 잘하는 사람은 그 50초를 살리면서 다른 쇼트로 연결해 가는 콘티 수정을 하는 거예요. 현장의 임기응변으로 편집개념이 사용되는 거지요. 편집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거 다 NG라며 버려요.”
<맨발의 청춘> 표 사려고 광화문에서 덕수궁까지 줄서
―필름을 아낄 때는 편집을 하는 게 절대적이었겠어요.
“그럼요. 우리는 빨리 찍고, 필름을 적게 쓰는 데 달인이었어요(웃음).”
―제작자들이 좋아했겠어요.
“너무 좋아했어요. 빨리 찍으니까 뭐, 아주 최고인기였지.”
―1960년대 영화에 대한 비판 중 하나가 일본의 원작들을 모방한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는 거예요. 김 감독의 대표작으로 당시 문화적 신드롬까지 일으킨 <맨발의 청춘>(1964)도 일본작품인 <진흙투성이의 순정>을 모방한 작품이라는 비판이 있는데요.
“그런 면이 있었어요. 해방 후 모든 게 새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물론 문학적으로 그 전에 좋은 작품들이 많았지만, 그렇게 수적으론 많지 않았어요. 특히 드라마적인 요소를 갖출 수 있는 작품들이 우리에겐 적었어요. 당시 아무것도 없던 우리에게 일본은 서양문화의 루트로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걸 두고 문화적 번역이냐 표절이냐 하면서 갑론을박하는데요.
“만들어 본 사람이 아니면 표절이라는 걸 정의내릴 수 없어요. 소재가 비슷하다고 표절이라고 할 수는 없죠. 영화라는 것은 디테일이 쌓여서 완성되는 건데,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일본 사람들과는 전혀 정서가 달라요.”
―표절이라고 볼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맨발의 청춘> 이전에는 그냥 간단한 도구정도로 쓰이던 영화음악이 그 작품 이후 굉장히 중요한 미장센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거든요.
“제가 우리나라에서는 경음악이라고 하는 팝송에 관심이 많았어요. 내가 일찍이 미군부대에서 통역병으로 일하면서 미군들이 R&R이라고 해서 휴가를 갔다 오는 병사에게 디스크를 부탁해서 사다 듣고 그랬어요. 남들보다 팝송을 많이 알아서 감독이 된 후에 다른 사람들보다 작품이 요구하는 선곡을 잘하는 감독이 된 거지요.”
―영화주제가라는 것이 <맨발의 청춘> 부터 시작된 거지요?
“그렇죠. 그전 영화에는 주제가라는 게 흔치 않았어요. 그때 주제가 작사는 유호 선생님한테 맡겼고, 작곡은 신예 재즈뮤지션인 이봉조씨한테 맡겼어요. 솔직히 말해서 저도 그때 처음 청춘영화에 도전하는 건데 겁이 없을 수가 없었죠. 주제곡도 <눈물도 한숨도 씹어 삼키며>라든지,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마라> 등 그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표현이라 전 영화제목에 주제가까지 그 모양이니 망했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영화와 주제가가 다 대박 아니었나요. 최희준씨가 부른 그 노래는 지금도 애창곡이잖아요.
“파격적인 노래더니 이렇게 오래 가네요(웃음).”
―당시 <맨발의 청춘>은 사회적으로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작품으로 기록되던데, 어느 정도 히트를 했나요.
“그때 단일극장에서 10만명이 들면 히트였어요. 20만명이면 홈런, 30만명이면 장외홈런이었는데, 23만명으로 추산됐으니까요. 표를 사려는 관객의 줄이 광화문사거리에서 덕수궁 골목길까지 이어질 정도였으니까요.”
<맨발의 청춘> 이후 청춘 시리즈 대유행
―이 영화로 신성일-엄앵란 커플이 스타덤에 올랐는데, 어떻게 픽업한 건가요.
“당시 엄앵란씨는 인기스타였지만, 신성일씨는 신상옥 감독이 운영하는 신필름의 전속 신인배우로 이렇다 할 작품이 없었어요. 신영균, 김진규, 최무룡씨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라 현대적인 느낌의 신성일이라는 배우한테까지 시선이 가지 않았던 거지요. 그 배우를 저와 같이 극동흥업에 소속되었던 유현목 감독이 픽업해서 <아낌없이 주련다> (1962)에 출연시키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 거예요. 그 작품에서 신성일씨는 연상의 미망인을 사랑하는 남자로 나왔어요. 그 뒤에 제가 <가정교사> (1963)라는 작품에 출연시키면서 인연을 맺었지요. <가정교사>가 신·엄 커플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했고요.”
―신필름 소속 배우가 다른 감독 영화에 출연해도 됐나 보죠.
“신필름에서 그만큼 안 쓴 배우였다는 거지요.”
―그 이후에 ‘신·엄 콤비-김기덕 감독-아카데미극장(현재 조선일보사)’이 흥행의 3대 요소였다고 알려지더군요.
“좀 전에 얘기한 대로 개봉날 정해 놓고 영화를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결혼과 함께 은퇴한 엄앵란씨를 복귀시킨 것도 김 감독이지요?
“엄앵란씨가 결혼하고 아이 셋 낳으면서 몇 년간 쉬었으니까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생각에서 기획한 작품이 주요섭 원작 <아네모네 마담>(1968)이에요. 그때 엄앵란씨의 몸이 엄청나게 불어 있더라고요.”
―<아네모네 마담>은 유일한 문예영화이자, 복귀한 엄앵란씨의 마지막 영화고, 또 청춘영화의 산실이었던 아카데미극장의 마지막 상영작이었지요?
“맞아요.”
―<맨발의 청춘> 히트 이후 ‘청춘’의 환영에서 못 벗어났나 봐요. <불타는 청춘>(1966), <맨주먹 청춘>(1967), <청춘 고백>(1968), <청춘을 다 바쳐>(1969), <청춘 교사>(1972)가 줄줄이 나왔거든요.
“나만 그런 게 아니고. 그때는 한국영화 타이틀을 쭉 한번 보세요. 청춘이라는 말 안 붙인 영화가 없었어요. 그만큼 관중의 관심사가 그리로 옮아간 거예요. 그 전까지는 기성세대 가족의 이야기가 영화의 주제였는데, 그 영화 이후 젊은 사람들의 고뇌 같은 개인적 이야기가 주제로 옮아간 거예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는 거예요.”
―영화가 여러 장르를 넘나들고 있는데, 그중 스포츠 영화로 <내 주먹을 사라> (1966)도 상당히 재미있는 기획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동양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김기수씨가 주인공으로 나왔으니까요. 연기지도가 힘들진 않았나요.
“그 사람을 어떻게 연기수업까지 시켜서 영화를 찍겠어요? 그래서 연기를 아예 안 시켰어요. 그대로의 너 자신을 보여 달라고 주문했지요. 너는 그냥 챔피언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 해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했어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재미로 느껴
―요즘 프로야구계의 큰 별이었던 고 최동원 선수의 업적을 기리는 스포츠 영화 <퍼펙트게임>이 관심을 끌고 있는데, 한국 최초의 야구영화인 <사나이의 눈물> (1963)도 김 감독께서 만들었지요?
“제가 고교 시절부터 광적인 야구팬이거든요. 영화평론가 정영일씨도 야구팬이라 만나면 야구얘기만 할 정도로 좋아했어요. 그래서 기쿠지마 류조라는 일본 시나리오 작가의 시나리오를 수입해서 만든 작품이에요. 당시 야구감독들이 다 와서 보고 울고 갔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SF영화인 <대괴수 용가리>(1967)도 만들었는데, 특이한 장르에 도전한 거네요.
“그 당시 일본에서는 그런 영화들이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환호를 받았어요. 미국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옛날에 우리 기술로 화면 합성하려고 하면 엄청 힘들었어요. 그런 거 알지도 못했어요. 그런 것을 처음으로 해낸 게 <대괴수 용가리>예요. 저는 감독이지만 그런 기술적인 미개척 분야를 탐험하는 데 흥미를 많이 느꼈거든요. 영화의 성패를 떠나서 우리나라 영화기술사적으로 <대괴수 용가리>가 기여한 부분은 엄청나다고 봐요. 미술, 특수촬영, 특수효과, 화면합성 기술적인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그런 작품이에요.”
―왜 이 장르는 딱 한 작품만 하고 끝냈나요.
“제작과정이 어려웠어요. 일본 기술자들 데려다 한 거거든요. 그 팀이 제 영화를 계기로 20~30년간 계속 한국영화 기술자로 남아서 활동했어요. 그 사람들이 해 놓으면 날아가던 새가 그림 속에 들어가는 게 가능해지더라고요. 참 신기한 기술이었어요.”
―당시부터 일본의 기술력이 대단했었나 봐요.
“미국은 그보다 앞섰지만 팀을 데려오려면 경비가 10배는 더 들어가서 일본 기술진을 데려온 거예요. 사실 영화에서는 기술적인 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거든요. 영화가 카메라를 빼면 통하지 않으니까 결국은 기술력의 승부라고 할 수 있어요. 감독이라고 카메라와 전혀 관계 없는 게 아니에요. 우선 카메라를 알아야 나의 영상언어를 표현할 수 있을 게 아니에요? 그래서 카메라를 들여다봤어요. 렌즈의 특성이라든가, 필름의 특성이라든가. 다른 감독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하고 했을 거예요. 그래서 촬영감독들이 날 좋아했어요.”
―한때 한 시절을 풍미했던 호스티스 영화도 처음 시작했지요. <칠십칠번 미스김>(1963)이라고. 감독님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한국 장르영화의 효시로 기록되는 영화가 많네요. SF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로 이어졌고, 호스티스 영화는 변장호 감독의 <눈물의 웨딩드레스>(1972)로 이어졌어요. 청춘영화와 스포츠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요.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실험했나요.
“탐구심이라고 할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건 늘 재미있었어요(웃음).”
이명세·곽지균 감독이 제일 기억에 남아
―1977년에 만든 <영광의 9회말>이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이 돼 있어요. 김 감독이 영화계를 떠나는 분위기와 타이틀하고 잘 맞는데, 일부러 고른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그때 고교야구가 지금의 프로야구만큼 워낙 열렬한 지지를 받던 시절이라 역전의 명수인 군산고 야구부를 주제로 한 영화였어요.”
―1978년에 영화계를 떠나 서울예전 교수로 자리를 바꾼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요. 같은 길을 걸었던 배창호 감독은 교수로 지내다가 영화제작에 대한 욕구를 누를 길 없어 다시 척박한 영화계로 돌아와서 독립영화 감독이 돼 있거든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억도 있고, 그런 욕구를 느꼈을 것 같은데요.
“왜 없어요? 있죠. 있는데, 내가 교육도 중도에 그냥 그만두고 나왔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게 됐을 거예요. 사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가서 토대만 잡아 주고 현장으로 돌아오겠다 그랬는데, 도저히 그때는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이라고 할까, 소명의식 그런 걸 버리고 못 나오겠더라고요.”
―제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독이라면.
“이명세 감독하고 곽지균 감독? 그리고 젊은 감독도 많은데, 일일이 거론하기는 힘들고요. 연기자도 많은데, 아무래도 제가 감독 출신이니까 배출한 사람들 중에 연출, 촬영, 기술 쪽 사람이 많아요.”
―그간 영화검열, 심의에 관련한 일도 여러 가지 해 왔는데, 감독 입장에서 가위질을 당할 때와 할 때 관점의 차이가 있지요.
“운전하는 사람 마음 같지요. 왜 걸어갈 때 자동차를 보는 시선과 내가 운전할 때 걷는 사람을 볼 때가 다르잖아요(웃음). 하지만 감독으로서 조금 더 깊이 보게 되는 건 있어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윤리의식이라든가 도덕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지금은 전혀 없어진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 욕들은 왜 그렇게 많이 하는지….”
―관객들의 수준은 어떻게 변화한 것 같은가요.
“관객들 수준도 높아졌죠. 이제는 웬만한 거는 안 보잖아요? 관객들도 이제 훈련이 됐어요.”
―오랜 시간 대종상 심사위원으로서 한국영화 변천사를 지켜봤죠? 심사하는 입장에서, 한국영화는 진화하고 있나요.
“엄청나게 진화하고 있어요. 기술적으로도 굉장히 향상됐고, 부러울 정도예요. 그런데 지금 제작풍토가 다른 것 같아요. 옛날에는 감독이 절대적 주도권을 쥐고 있었거든요. 감독에게 작품을 맡기면 참견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영화를 보면 주제를 벗어난,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지엽적인 요소들이 많아지는데, 그 이유가 투자자들이 원하는 것을 수용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그러더라고요. 그게 좀 아쉬워요. 지금 영화상영 시간이 다 2시간 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관중을 집중시켜서 끌고가려면 주제에 초점이 더 강하게 맞춰져야 하는데, 그러니까 아쉬움이 있더라고요.”⊙
영화사적으로 1960년대를 한국영화 최초의 르네상스기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직후 한 해에 고작 40여 편 제작하던 한국영화가 국산영화 장려정책 덕분으로 이 시기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230편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우기 때문이다. 물론 이 중에는 소위 ‘실적영화’도 적지 않았다. 외화쿼터를 얻어내기 위해 개봉도 하지 않으면서 제작해 창고로 직행하는 불운의 작품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영화의 고전으로 인정되는 명작들이 쏟아져 나온 것도 이때다.
한국 청춘영화의 효시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킨 <맨발의 청춘>(1964)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바로 김기덕(77) 감독이다. 그는 한국영화의 첫 르네상스 시절, ‘흥행의 보증수표’라는 닉네임을 달고 한국 대중·장르 영화의 최전선을 지켰다.
이런 공로를 기려 김 감독의 작품이 올해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회고전에 초대돼 대중 앞에 다시 공개됐다. 김 감독의 데뷔작인 <5인의 해병> (1961)을 비롯한 대표작 8편을 다시 보는 일은 영화팬들에게 반가운 일이었다. 이런 대규모 영화제 회고전에 초청된다는 것은 고전영화로 인정을 받는 일이라 원로감독들에게는 남다른 감회가 있다.
‘흥행의 보증수표’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그는 한국 대중·장르 영화의 최전선에서 가장 진취적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청춘영화의 효시인 <맨발의 청춘>을 비롯해 최초의 호스티스 영화인 <칠십칠번 미스 김> (1963), 최초로 야구를 소재로 한 스포츠 영화 <사나이의 눈물>(1963), 그리고 최초의 괴수영화로 국내 최초의 특수촬영 영화인 <대괴수 용가리>(1967) 등 실험적인 작품들을 연이어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1961년 <5인의 해병대>로 데뷔해 1977년 <영광의 9회말>로 영화감독의 길을 떠날 때까지 모두 66편(공식기록, 김 감독은 69편으로 기억하고 있다)의 영화를 만들었다. 70편에 가까운 그의 작품들을 더듬어 보는 작업은 한국영화 중흥기를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김 감독은 서울에서 팔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토국제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배재학당의 교감, 오산중학교 교장,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세브란스의전 교수를 지낸 교육자이다. 이런 환경 때문인지 그의 형제들은 대부분 명문고 출신이다. 그 역시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 한국전쟁을 겪지만 않았다면 아마 예정대로 의사가 돼 있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의 기록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사조의 언덕> 배우 하려다 조연출로 영화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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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네모네 마담. |
영화와의 인연은 우연히 맺어졌다. 이종기씨가 <종말없는 비극>이라는 시나리오를 진해에 머물고 있는 전창근 감독에게 보여주러 가는 자리에 동행하면서 시작됐다. 이렇게 알게 된 전창근 감독은 공보처에서 제작하는 한미친선 영화 <불사조의 언덕>(1955)의 연출을 맡았고, 영어를 잘하던 김 감독에게 주인공을 제안했다. 하지만 같이 출연하는 미군에 비해 키가 작다는 이유로 캐스팅이 불발되자 그는 조연출로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후 김 감독은 <단종애사>(1956)를 비롯한 전창근 감독의 영화와 <순애보> (1957)를 한 한형모 감독의 영화를 거치면서 조감독 생활을 했다.
1950년대 우리나라 영화계는 소위 뉴웨이브와 같은 흐름이 있었다. 당시 영화를 한다는 것은 ‘딴따라’라고 천대받던 시절이어서 엘리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접근을 꺼렸었는데, 전창화 감독 밑에서 경력을 쌓은 그와 이종기씨, 연출계의 홍일점 홍은원 감독, 촬영감독 장환씨 등이 모여 ‘우리(宇利)필림’을 만들고 뉴웨이브를 이끌어 갔다. 이때 준비한 창립 작품이 바로 이범선 원작의 <오발탄>이었다. 충무로에 사무실도 차렸지만, 의욕만 앞섰을 뿐 이들에게 제작비를 대줄 사람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현목 감독이 작품을 양보해 달라고 했고, 결국 유 감독의 손에서 한국영화 걸작으로 꼽히는 <오발탄> (1961)이 탄생했다.
그즈음 그는 생계를 위해 영화계의 큰손 임화수씨가 경영하는 ‘한국연예주식회사’에 들어가 편집기사로 일했는데, 이 회사에서 그의 영화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인연을 만나게 된다. 바로 당시 제작부장 역할을 맡았던 차태진씨다. 4·19혁명 이후 정치범으로 몰린 임화수씨가 처형되면서 회사가 쓰러지자 차씨는 그에게 ‘극동흥업’이라는 영화사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전무급 전속감독이 되었고, 차태진씨가 대표를 맡았다. 그의 첫 작품인 <5인의 해병> (1961)부터 극동흥업 시절의 사실상 마지막 히트작인 <아네모네 마담>(1968)까지 모두 38작품을 여기서 만들었다. 전성기 시절 그의 영화는 대부분 극동흥업 작품이다. 이렇게 안정된 제작환경 속에는 그는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흥행의 보증수표’ 격인 감독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극동흥업은 해외서커스 수입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결국 1970년대 초 도산하면서 없어졌다.
차태진씨와 함께 세운 극동흥업에서 계속 히트작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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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입사원 미스터 리. |
극동흥업 시절 그는 다른 감독들과는 다른 제작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같은 제작사-동일한 스태프-스타 시스템(신성일·엄앵란 커플)’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시스템은 1930~194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가 짧은 기간 내에 장르영화를 양산할 수 있던 요인으로 확실한 뒷받침이 된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청춘영화 전용 상영관이었던 아카데미극장을 통한 안정된 배급은 그에게 일시적인 형태로나마 제작시스템을 완성시켜 줬다. 이런 남다른 환경이 동시대 다른 감독들 사이에서 그를 압도적인 거장으로 부각시키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환경이 뒷받침해 주니 그만큼 한다는 뒷담화도 적지 않았다), 당대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을 다채롭게 하며 다양한 층위의 관객들과 교감에 성공했던 주요한 원인으로 보인다.
물론 어떤 시기의 작품이든 평론가들은 그의 영화 속에서 그만의 고유한 특징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고 푸념한다. 그만큼 그는 장르와 장르 사이를 종횡무진 넘어 다녔다. 하지만 장르와 캐릭터적 특징을 찾겠다는 의도만 접어 두면, 그의 영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보인다. 바로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는 ‘실험정신’이다. 그의 영화에는 한국 ‘최초’, 혹은 ‘효시’라는 타이틀이 붙은 영화가 적지 않다.
그의 첫 영화인 <5인의 해병>(1961)은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큰 성과를 거뒀다. 그는 이 영화로 1962년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이 상은 그가 감독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상이다. 예술성보다는 흥행성을 더 좇은 그에게 상복은 없었던 것 같다. 사회는 움직였지만, 심사위원들은 못 움직이는 그런 영화들을 만들었기 때문인 듯.
두 번째로 만들었던 <신입사원 미스터 리> (1962)는 시골에서 올라온 신입사원이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나가는 과정을 빠른 속도로 그린 영화다. 이 작품 역시 ‘소포모어 징크스’(두 작품이 연이어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징크스)를 깨고 연이어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고는 호스티스 영화의 첫 시도인 <칠십칠번 미스 김>(1963)과 청춘영화의 시작이었던 <가정교사>(1963)를 같은 해에 발표하며 관객몰이에 나섰다. 다음해인 1964년에 공전의 히트작 <맨발의 청춘>을 만들어 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작품세계는 전쟁, 멜로, 에로틱 코미디, 권투영화, 괴수영화 등 새롭고 과감한 시도로 이어졌다. 에로틱 코미디인 <말띠신부>(1966)는 당시만 해도 금기시된 성적 유머가 등장해 관심을 끌었다. 또 사주센터 소장인 김희갑의 내레이션으로 영화 전체를 진행하고, 다섯 여자의 옴니버스 이야기로 구성한다든지, 타이틀과 크레디트 장면에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성격을 나타내는 만화가 신동헌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등 갖가지 새로운 영화적 시도가 등장했다.
최초로 야구를 소재로 삼았던 <사나이의 눈물>(1963)에 이어 최초로 실제 복서인 동양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씨를 출연시킨 <내 주먹을 사라>(1966)도 화제였다. 이미 수백만 청취자를 울린 라디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현역 프로복서 20명과 실제 복서 출신인 박노식씨, 그리고 두 명의 신인 복서를 후원하고 있던 김지미씨가 출연해 여러 모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철저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이해한 감독
그의 유일한 SF작인 <대괴수 용가리> (1967)는 한국 공상과학 영화에 한 획을 그었다. 이 영화로 한국영화의 특수촬영 기술을 진일보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 영화계의 중론이다. 국내에서는 불가능한 특수촬영을 위해 일본 기술진을 부르느라 그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1300만원의 제작비를 투자했다. 당시 100만~200만원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으니 엄청난 제작비다. 이러니 어쩌면 최초의 블록버스터급 영화(흥행을 목표로 대규모의 제작비를 투자한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고속촬영, 미니어처촬영, 화면합성 기법 등 다양한 특수촬영 기법이 소개돼 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유일한 문예영화인 주요섭 원작의 <아네모네 마담>(1968)은 신성일·엄앵란 시대의 마침표를 찍은 영화이기도 했다. 청춘영화와 역사를 같이한 아카데미 극장이 이 영화를 끝으로 문을 닫아 더 화제였다. 이 영화에서 김 감독은 슈베르트 음악을 모티브로 쓰면서 등장인물들의 클로즈업, 정면구도 등의 사용을 통해 내면의 드라마를 정적이면서 감각적으로 표현해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 냈다.
사실 그가 영화계에 들어온 1960년대 초 한국영화의 장르는 혼돈성 속에 있었다. 아직 시도해 보지도 않은 장르가 적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만든 장르영화도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말하자면 그때 텍스트적(내용상) 장르영화는 있었지만, 요즘처럼 제작체계가 뒷받침되는 그런 영화장르는 없던 시절이었다.
장르에 대한 인식도 없이 혼성장르적 영화가 양산되던 시절 김기덕 감독은 무대 중앙에서 스타감독의 위치에 서 있었다. 이런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본질적으로 영화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텍스트에 일관성을 입혀 가는 작가주의적 관점과 의지보다는 대중지향적인 가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더 중시했다. 그에게 영화는 철저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일 뿐이었다. 그래서 당대 주목할 만한 영화감독들이 각종 상과 비판적 승인을 받기 위한 지름길인 문예영화 제작에 관심을 기울일 때 그는 이에 무관심했다. 이런 특징은 그가 전무급 감독으로서 극동흥업의 경영진이었기 때문에 갖게 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얼마나 종횡무진했었는가는 그의 절정기로 꼽히는 1967년 한 해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청춘영화 <맨주먹 청춘>, 멜로드라마 <타인들> <원죄>, 계몽드라마 <섬마을 선생>, 코미디 <내 멋에 산다>, 가족드라마 <후회>, SF영화 <대괴수 용가리> 를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그 시대 문화적 통섭의 산물이기도 하다. TV연속극을 영화화한 <타인들>과 <내 멋에 산다>, 라디오 드라마와 가요의 대대적 히트를 기반으로 한 <섬마을 선생>, 일본소설 번안작품 <원죄>, 일본 대중장르의 한국적 적용인 <대괴수 용가리> 등이 그 증거이다. 그래서 그를 그 시절 한국 대중영화의 지형도를 그려낸 상징적 감독이라고 한다.
그의 영화 중 거의 절반 이상인 35편이 당시 대세를 이뤘던 멜로드라마이다. 이 안에는 가족드라마와 청춘영화, 액션, 사극, 뮤지션영화까지 포함돼 있다. 멜로드라마가 우세했던 것은 관객들이 이야기를 영상을 통해 전달받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라디오 연속극이 공전의 히트를 치던 시절이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김 감독의 영화 중 14편의 영화가 라디오나 TV 연속극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 중 주목할 만한 작품들도 나왔다. 그 가운데 가족 멜로드라마인 <오늘은 왕> (1966)과 치정 멜로드라마인 <늦어도 그날까지는> (1969)은 단지 드라마 각본만을 충실히 따라가지 않고 그 나름의 해석을 통해 영상화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한국영화가 질식해 갔던 1970년대는 그에게도 암흑기였다. <124군 부대> (1970)와 <무작정상경> (1970)에서 알 수 있듯이 김 감독은 그 시절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내적으로는 극동흥업의 도산으로 제작시스템을 잃었고, 외부적으로는 강화된 영화검열제도가 목을 조이는 변화 속에서 1970년대 이후의 필모그래피는 더 복잡해졌다. <청춘교사>(1972)나 <유관순>(1974)과 같은 프로파간다성 영화와 <꽃상여> (1974)와 같은 문예지향적 영화, <가수왕>(1975)이나 <영광의 9회말>(1977)과 같은 흥행지향적 영화를 아우르는 다난한 형태를 띠고 있다.
<맨발의 청춘>과 같은 대히트작 다시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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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발의 청춘. |
이처럼 영화가 현실에 대해 발언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국가안보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복종해 정권 친화적인 영화들을 생산하도록 하는 정권적 전략은 1970년대 내내 지속됐다. 이 시절에 만들어진 그의 영화는 어쩌면 필사적 생존의 노력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 같다.
그가 1977년에 만든 마지막 작품 <영광의 9회말>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긍정적 힘이 넘치는 영화이다. 이 영화를 끝으로 그는 교단으로 인생의 행로를 바꿨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영화학과가 있었던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교수가 된 것이다.
그후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일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인 20년 동안 서울예대 교수와 학장으로서 영화계의 현실을 타파하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 그는 감독이 되기까지 반노예와 같은 과정을 겪어야 했던 도제 형식의 현실이 가슴 아팠기 때문에 이를 후학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나름 애를 써 왔다. 그러면서 대종상의 심사위원, 영화검열 심의위원, 공연윤리위원회 영화심의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등의 일을 하면서 영화현장을 지켰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01년 예술인 최고의 영예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다. 평생직인 이 자리에 영화인 중 감독으로는 그와 김수용, 임권택 감독 세 명, 시나리오 작가로는 신봉승 김지헌 작가 두 명, 배우로는 황정순씨만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에게 영화는 “나의 모든 것”이라는 말로 함축된다. 감독으로서 일선은 떠났지만 아직도 그의 꿈은 “죽기 전에 한 편 더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생을 정리할 나이에 이르다 보니 나름대로 무엇인가 결론을 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든다고 한다. 그동안 영화로 인해 그가 존재한 만큼 무엇인가 결론을 낸다는 의미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는 작품을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말문 트기를 해낸 감독인 그가 기술적으로나 산업적으로 비약적 성장을 거듭한 현재의 한국영화계에서 마지막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스토리가 될까. 아마도 <2011 맨발의 청춘>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아직도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처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니까.⊙
▣ 김기덕 인터뷰
“<맨발의 청춘>, 황당한 영화제목이었지”
인생의 절정기를 누렸던 사람은 그 시절의 추억만으로도 늘 풍요로운 삶을 살 것 같다. ‘한국영화계 신사(紳士)’로 알려진 김기덕 감독을 마주한 순간 바로 그런 느낌이 다가왔다. 청춘기에는 영화를 직접 만들며 무수한 장르적 실험을 감행했고, 중년기로 접어들면서는 영화와 관련된 지식과 기술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데 평생을 보내 온 진정한 영화인의 모습이 한눈에 느껴졌다.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을 앞두고 분주한 그를 일산 자택에서 만나 보았다.
―전작전은 이번 영화제에서 처음하는 거지요?
“한두 편씩 영상자료원 특별 기획전에 포함된 적은 있지만 전작전은 처음이에요. 내가 16년간 모두 69편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영상자료원에 보관돼 있는 작품이 모두 27편이에요. 나머지는 다 분실됐죠. 그중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하는 8편은 장르별 대표작을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선정한 것이에요. 저는 선정 과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안 미쳤어요.”
―그중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면요?
“자주 그런 질문을 받는데, 자식 중 누가 가장 예쁘냐는 질문처럼 어려워요. 단, 그중에 아쉬운 작품이 있는데, <남과 북>(1965)이에요. 당시 공전의 히트를 친 라디오 드라마를 영화화한 건데, 흥행영화만 주문받던 저에게 모처럼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만들 기회가 와서 정말 목욕재계하고 신중하게 접근했던 작품이었음에도, 당시 정치상황으로 인해 제작환경이 너무 어려웠어요. 전후에 우리 민족의 아픔을 정면으로 그리는 건 금기시된 상황이어서, 라디오와는 달리 영상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각본부터 완성 이후 검열에서까지 다 가위질을 당해 원작을 살리지 못한 애매한 작품으로 끝난 게 정말 아쉬워요.”
“영화는 감독 만족하라고 있는 것 아냐”
―1960년대 한국 대중·장르 영화 최전선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데, 작품을 둘러보니 하고 싶었던 작품은 원도 한도 없이 다 해 본 것 같아요.
“정말 정신없이 만들었어요. 얼떨결에 감독이 돼서 한 작품 끝나기 전에 다른 작품 시작하고, 두 작품을 같이 할 때도 있었고. 그런 식으로 무모하게 1960년대를 지났어요. 그때 저는 시한부 인생처럼 사전에 개봉날을 잡아 놓고 촬영 강행하며 스케줄을 맞추는 일상을 보냈어요. 당시 관중 동원 숫자로 톱클래스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영화를 평가할 때 예술성과 흥행성 양면을 생각하는데, 전 영화에서 작가주의는 아니라는 입장이에요. 영화가 한두 푼 들어가는 작업이 아닌데, 감독이 자기 혼자 만족하는 작품 만드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거지요. 저는 최소한 영화가 산업적 측면에서 투자한 것 정도는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영화평단에 작가주의 감독에 대한 숭배 풍조는 어떻게 보는지요.
“저 역시 정말 영화의 특성만 다 살려서 남이 이해하든 말든 만들라면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전 영화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달랐어요. 사람들이 나한테 예술적 작품이 없다고 하는데, 내가 못 만들어서 안 만든 게 아니에요(그의 유일한 문예영화는 주요섭 원작 <아네모네 마담>(1968)으로 이 작품 역시 흥행에 성공했다). 몇 사람밖에 안 보는 영화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영화가 어떤 형태를 갖춰야 하느냐가 늘 저의 고민이었어요. 예술영화 한 편 만들고 다음 작품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영화는 수지타산이 맞게 찍어야 한다는 게 제 신조였고, 영화사 극동흥업을 통해 그렇게 돈을 벌어서 유현목 감독이 <아낌없이 주련다> <김약국의 딸들> 같은 걸작을 만드는 데 뒷받침을 해 줬어요. 하지만 그런 거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한 적 없어요.”
―조연출 시절 전창화, 한형모 두 감독을 거쳤는데, 무엇을 배웠나요.
“전 감독님한테는 힘 있고 굵은 연출 스타일, 한 감독님한테는 당시로서는 앞선 기술적 노하우를 전수받았다고 볼 수 있지요. 특히 전 전 감독님한테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간결한 문장으로 분명한 묘사가 있는 콘티를 쓰시던 분이세요. 편집 프레임을 찾아서 자르는 작업까지 저한테 시키셔서 감독으로서 갖춰야 할 여러 가지 부분을 배웠다고 할 수 있어요.”
―특이하게 편집기술이 좋아 한때 전문 편집기사로 일하다가 감독이 된 경력이 있잖아요. 편집기술이 특출한 감독은 어떤 장점이 있는 건가요.
“여러 가지 이점이 많죠. 일례로 제가 감독했을 당시에는 우리 계약서에 이 영화를 찍는 데 필요한 네거티브 필름까지 정해요. 보통 2만5000자 분량이에요. 2만5000자면 1분에 900자 정도 돌아가니까 1시간30분이면 8100자가 들거든요. 8100자를 만들기 위해 2만5000자를 쓰는 거예요.”
―요즘은 보통 10만자를 넘게 쓰지요?
“요즘은 우리가 했을 때하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호조건이에요. 우리는 2만5000자보다 더 쓰면 나머지는 우리 개런티에서 물어내야 했어요. 그러니까 편집을 아는 게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예를 들어서 1분짜리 쇼트(shot-한 장면)를 촬영하면서 한 50초까지 잘했는데 나중에 10초 남기고 NG가 났을 때, 편집을 잘하는 사람은 그 50초를 살리면서 다른 쇼트로 연결해 가는 콘티 수정을 하는 거예요. 현장의 임기응변으로 편집개념이 사용되는 거지요. 편집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거 다 NG라며 버려요.”
<맨발의 청춘> 표 사려고 광화문에서 덕수궁까지 줄서
―필름을 아낄 때는 편집을 하는 게 절대적이었겠어요.
“그럼요. 우리는 빨리 찍고, 필름을 적게 쓰는 데 달인이었어요(웃음).”
―제작자들이 좋아했겠어요.
“너무 좋아했어요. 빨리 찍으니까 뭐, 아주 최고인기였지.”
―1960년대 영화에 대한 비판 중 하나가 일본의 원작들을 모방한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는 거예요. 김 감독의 대표작으로 당시 문화적 신드롬까지 일으킨 <맨발의 청춘>(1964)도 일본작품인 <진흙투성이의 순정>을 모방한 작품이라는 비판이 있는데요.
“그런 면이 있었어요. 해방 후 모든 게 새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물론 문학적으로 그 전에 좋은 작품들이 많았지만, 그렇게 수적으론 많지 않았어요. 특히 드라마적인 요소를 갖출 수 있는 작품들이 우리에겐 적었어요. 당시 아무것도 없던 우리에게 일본은 서양문화의 루트로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걸 두고 문화적 번역이냐 표절이냐 하면서 갑론을박하는데요.
“만들어 본 사람이 아니면 표절이라는 걸 정의내릴 수 없어요. 소재가 비슷하다고 표절이라고 할 수는 없죠. 영화라는 것은 디테일이 쌓여서 완성되는 건데,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일본 사람들과는 전혀 정서가 달라요.”
―표절이라고 볼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맨발의 청춘> 이전에는 그냥 간단한 도구정도로 쓰이던 영화음악이 그 작품 이후 굉장히 중요한 미장센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거든요.
“제가 우리나라에서는 경음악이라고 하는 팝송에 관심이 많았어요. 내가 일찍이 미군부대에서 통역병으로 일하면서 미군들이 R&R이라고 해서 휴가를 갔다 오는 병사에게 디스크를 부탁해서 사다 듣고 그랬어요. 남들보다 팝송을 많이 알아서 감독이 된 후에 다른 사람들보다 작품이 요구하는 선곡을 잘하는 감독이 된 거지요.”
―영화주제가라는 것이 <맨발의 청춘> 부터 시작된 거지요?
“그렇죠. 그전 영화에는 주제가라는 게 흔치 않았어요. 그때 주제가 작사는 유호 선생님한테 맡겼고, 작곡은 신예 재즈뮤지션인 이봉조씨한테 맡겼어요. 솔직히 말해서 저도 그때 처음 청춘영화에 도전하는 건데 겁이 없을 수가 없었죠. 주제곡도 <눈물도 한숨도 씹어 삼키며>라든지,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마라> 등 그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표현이라 전 영화제목에 주제가까지 그 모양이니 망했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영화와 주제가가 다 대박 아니었나요. 최희준씨가 부른 그 노래는 지금도 애창곡이잖아요.
“파격적인 노래더니 이렇게 오래 가네요(웃음).”
―당시 <맨발의 청춘>은 사회적으로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작품으로 기록되던데, 어느 정도 히트를 했나요.
“그때 단일극장에서 10만명이 들면 히트였어요. 20만명이면 홈런, 30만명이면 장외홈런이었는데, 23만명으로 추산됐으니까요. 표를 사려는 관객의 줄이 광화문사거리에서 덕수궁 골목길까지 이어질 정도였으니까요.”
<맨발의 청춘> 이후 청춘 시리즈 대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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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덕 감독. |
“당시 엄앵란씨는 인기스타였지만, 신성일씨는 신상옥 감독이 운영하는 신필름의 전속 신인배우로 이렇다 할 작품이 없었어요. 신영균, 김진규, 최무룡씨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라 현대적인 느낌의 신성일이라는 배우한테까지 시선이 가지 않았던 거지요. 그 배우를 저와 같이 극동흥업에 소속되었던 유현목 감독이 픽업해서 <아낌없이 주련다> (1962)에 출연시키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 거예요. 그 작품에서 신성일씨는 연상의 미망인을 사랑하는 남자로 나왔어요. 그 뒤에 제가 <가정교사> (1963)라는 작품에 출연시키면서 인연을 맺었지요. <가정교사>가 신·엄 커플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했고요.”
―신필름 소속 배우가 다른 감독 영화에 출연해도 됐나 보죠.
“신필름에서 그만큼 안 쓴 배우였다는 거지요.”
―그 이후에 ‘신·엄 콤비-김기덕 감독-아카데미극장(현재 조선일보사)’이 흥행의 3대 요소였다고 알려지더군요.
“좀 전에 얘기한 대로 개봉날 정해 놓고 영화를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결혼과 함께 은퇴한 엄앵란씨를 복귀시킨 것도 김 감독이지요?
“엄앵란씨가 결혼하고 아이 셋 낳으면서 몇 년간 쉬었으니까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생각에서 기획한 작품이 주요섭 원작 <아네모네 마담>(1968)이에요. 그때 엄앵란씨의 몸이 엄청나게 불어 있더라고요.”
―<아네모네 마담>은 유일한 문예영화이자, 복귀한 엄앵란씨의 마지막 영화고, 또 청춘영화의 산실이었던 아카데미극장의 마지막 상영작이었지요?
“맞아요.”
―<맨발의 청춘> 히트 이후 ‘청춘’의 환영에서 못 벗어났나 봐요. <불타는 청춘>(1966), <맨주먹 청춘>(1967), <청춘 고백>(1968), <청춘을 다 바쳐>(1969), <청춘 교사>(1972)가 줄줄이 나왔거든요.
“나만 그런 게 아니고. 그때는 한국영화 타이틀을 쭉 한번 보세요. 청춘이라는 말 안 붙인 영화가 없었어요. 그만큼 관중의 관심사가 그리로 옮아간 거예요. 그 전까지는 기성세대 가족의 이야기가 영화의 주제였는데, 그 영화 이후 젊은 사람들의 고뇌 같은 개인적 이야기가 주제로 옮아간 거예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는 거예요.”
―영화가 여러 장르를 넘나들고 있는데, 그중 스포츠 영화로 <내 주먹을 사라> (1966)도 상당히 재미있는 기획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동양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김기수씨가 주인공으로 나왔으니까요. 연기지도가 힘들진 않았나요.
“그 사람을 어떻게 연기수업까지 시켜서 영화를 찍겠어요? 그래서 연기를 아예 안 시켰어요. 그대로의 너 자신을 보여 달라고 주문했지요. 너는 그냥 챔피언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 해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했어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재미로 느껴
―요즘 프로야구계의 큰 별이었던 고 최동원 선수의 업적을 기리는 스포츠 영화 <퍼펙트게임>이 관심을 끌고 있는데, 한국 최초의 야구영화인 <사나이의 눈물> (1963)도 김 감독께서 만들었지요?
“제가 고교 시절부터 광적인 야구팬이거든요. 영화평론가 정영일씨도 야구팬이라 만나면 야구얘기만 할 정도로 좋아했어요. 그래서 기쿠지마 류조라는 일본 시나리오 작가의 시나리오를 수입해서 만든 작품이에요. 당시 야구감독들이 다 와서 보고 울고 갔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SF영화인 <대괴수 용가리>(1967)도 만들었는데, 특이한 장르에 도전한 거네요.
“그 당시 일본에서는 그런 영화들이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환호를 받았어요. 미국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옛날에 우리 기술로 화면 합성하려고 하면 엄청 힘들었어요. 그런 거 알지도 못했어요. 그런 것을 처음으로 해낸 게 <대괴수 용가리>예요. 저는 감독이지만 그런 기술적인 미개척 분야를 탐험하는 데 흥미를 많이 느꼈거든요. 영화의 성패를 떠나서 우리나라 영화기술사적으로 <대괴수 용가리>가 기여한 부분은 엄청나다고 봐요. 미술, 특수촬영, 특수효과, 화면합성 기술적인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그런 작품이에요.”
―왜 이 장르는 딱 한 작품만 하고 끝냈나요.
“제작과정이 어려웠어요. 일본 기술자들 데려다 한 거거든요. 그 팀이 제 영화를 계기로 20~30년간 계속 한국영화 기술자로 남아서 활동했어요. 그 사람들이 해 놓으면 날아가던 새가 그림 속에 들어가는 게 가능해지더라고요. 참 신기한 기술이었어요.”
―당시부터 일본의 기술력이 대단했었나 봐요.
“미국은 그보다 앞섰지만 팀을 데려오려면 경비가 10배는 더 들어가서 일본 기술진을 데려온 거예요. 사실 영화에서는 기술적인 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거든요. 영화가 카메라를 빼면 통하지 않으니까 결국은 기술력의 승부라고 할 수 있어요. 감독이라고 카메라와 전혀 관계 없는 게 아니에요. 우선 카메라를 알아야 나의 영상언어를 표현할 수 있을 게 아니에요? 그래서 카메라를 들여다봤어요. 렌즈의 특성이라든가, 필름의 특성이라든가. 다른 감독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하고 했을 거예요. 그래서 촬영감독들이 날 좋아했어요.”
―한때 한 시절을 풍미했던 호스티스 영화도 처음 시작했지요. <칠십칠번 미스김>(1963)이라고. 감독님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한국 장르영화의 효시로 기록되는 영화가 많네요. SF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로 이어졌고, 호스티스 영화는 변장호 감독의 <눈물의 웨딩드레스>(1972)로 이어졌어요. 청춘영화와 스포츠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요.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실험했나요.
“탐구심이라고 할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건 늘 재미있었어요(웃음).”
이명세·곽지균 감독이 제일 기억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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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의 9회말. |
“그건 아니고요. 그때 고교야구가 지금의 프로야구만큼 워낙 열렬한 지지를 받던 시절이라 역전의 명수인 군산고 야구부를 주제로 한 영화였어요.”
―1978년에 영화계를 떠나 서울예전 교수로 자리를 바꾼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요. 같은 길을 걸었던 배창호 감독은 교수로 지내다가 영화제작에 대한 욕구를 누를 길 없어 다시 척박한 영화계로 돌아와서 독립영화 감독이 돼 있거든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억도 있고, 그런 욕구를 느꼈을 것 같은데요.
“왜 없어요? 있죠. 있는데, 내가 교육도 중도에 그냥 그만두고 나왔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게 됐을 거예요. 사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가서 토대만 잡아 주고 현장으로 돌아오겠다 그랬는데, 도저히 그때는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이라고 할까, 소명의식 그런 걸 버리고 못 나오겠더라고요.”
―제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독이라면.
“이명세 감독하고 곽지균 감독? 그리고 젊은 감독도 많은데, 일일이 거론하기는 힘들고요. 연기자도 많은데, 아무래도 제가 감독 출신이니까 배출한 사람들 중에 연출, 촬영, 기술 쪽 사람이 많아요.”
―그간 영화검열, 심의에 관련한 일도 여러 가지 해 왔는데, 감독 입장에서 가위질을 당할 때와 할 때 관점의 차이가 있지요.
“운전하는 사람 마음 같지요. 왜 걸어갈 때 자동차를 보는 시선과 내가 운전할 때 걷는 사람을 볼 때가 다르잖아요(웃음). 하지만 감독으로서 조금 더 깊이 보게 되는 건 있어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윤리의식이라든가 도덕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지금은 전혀 없어진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 욕들은 왜 그렇게 많이 하는지….”
―관객들의 수준은 어떻게 변화한 것 같은가요.
“관객들 수준도 높아졌죠. 이제는 웬만한 거는 안 보잖아요? 관객들도 이제 훈련이 됐어요.”
―오랜 시간 대종상 심사위원으로서 한국영화 변천사를 지켜봤죠? 심사하는 입장에서, 한국영화는 진화하고 있나요.
“엄청나게 진화하고 있어요. 기술적으로도 굉장히 향상됐고, 부러울 정도예요. 그런데 지금 제작풍토가 다른 것 같아요. 옛날에는 감독이 절대적 주도권을 쥐고 있었거든요. 감독에게 작품을 맡기면 참견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영화를 보면 주제를 벗어난,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지엽적인 요소들이 많아지는데, 그 이유가 투자자들이 원하는 것을 수용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그러더라고요. 그게 좀 아쉬워요. 지금 영화상영 시간이 다 2시간 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관중을 집중시켜서 끌고가려면 주제에 초점이 더 강하게 맞춰져야 하는데, 그러니까 아쉬움이 있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