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여러 편의 서로 다른 영화를 통해 일정하게 만나는 김수용 감독의 모습은 자연주의, 인본주의, 평화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적 질감이 물씬 풍기는 작품을 만들어 낸 영상미학가라는 점이다.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1960년대 한국영화는 첫 번째 황금기를 누렸다. 텔레비전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 일반인들이 접할 수 있는 오락시설로 극장은 절대지존의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주연급 배우들의 인기는 지금 아이돌 스타의 인기 못지않았다. 흑백 필름을 통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몽환적이었다. 김수용(82) 감독은 신상옥, 이만희, 유현목 감독과 이 시절을 이끌어 갔다.
특히 1960년은 한국 문예영화의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시절이다. 이 시절을 지나면서 그는 ‘한국 문예영화의 대부’라는 타이틀을 받을 만큼 한국영화사에 남는 대단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1958년 첫 작품 <공처가>에서 2000년 <침향>까지 이어진 109편의 영화 중 <혈맥>(1963), <갯마을>(1965), <안개>(1967> 등은 지금 다시 보아도 명작 반열에 놓이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40년 동안 109편을 만들다 보니 ‘겹치기 연출’도 다반사였는데, 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연속적으로 가작을 만들어 내는 저력을 보였다. <까치소리> 등 10편을 내놓은 1967년에는 발표작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만선>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등 가작이 쏟아졌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대한민국 예술인들의 최고 영예인 대한민국예술원에서 영화 부문 회원이 됐다. 30년 넘게 활동한 순수예술 분야 100인에게 주어지는 이 자리에 영화인 중에서는 그와 임권택 감독, 원로배우 황정순씨, 극작가 신봉승·김지헌씨 등 몇 명이 회원 자격을 인정받았을 뿐이다. 평생을 한길에 매진해 온 영화인들에게 이보다 더한 영예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사회적인 평가가 반드시 작품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영화사에서 ‘문예영화’가 갖는 의미와 또 그가 만들어 낸 ‘김수용표 문예영화’가 남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반드시 한번쯤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국방부 정훈국 정훈과에서 영화인생 시작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 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문예영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문예영화는 대중 사이에서 잘 알려진 문학작품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권위주의 정권 시절 혹독한 검열을 피하는 수단으로 즐겨 이용됐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축소시킨 문예영화는 혹평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김수용의 문예영화는 문학적인 요소에 걸맞은 영상미로 멜로드라마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평론가 안병섭씨는 한국영화의 전통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한 가지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으로부터 이규환, 최인규가 계승해 온 리얼리즘의 전통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운규의 <오몽녀>(1937)로부터 나오는 성적 욕망을 바탕으로 한 인간드라마의 전통이다. 전자의 리얼리즘은 1960년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과 김수용·이만희 감독의 사실적 영화들에서, 또 후자의 전통은 신상옥·김기영 감독의 작품에서 계승되었다는 분석이다.
굳이 이런 분석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영화는 사실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형식미를 추구한 영화라는 데 평론가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작품이 워낙 많다 보니 그는 코미디에서 멜로, 문예, 시대물, 액션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지만, 거의 사실주의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그의 영화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영화세계로 입문한 과정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작품이든 작가의 삶이 녹아들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1929년 경기도 안성에서 중농인 부친 김준옥씨와 모친 이금선씨 사이에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기서 심상소학교, 안성공립농고를 졸업했고, 서울에 올라가 경성사범학교 본과(현재의 서울사대)로 진학했다. 안성에서 농고를 다닐 당시 일본 유학생 박모씨가 고향의 논밭에 세운 애원극장에서 영화와 연극, 음악회 등의 공연을 보면서 이 세계에 눈을 떴다.
대학생 때 습작소설 ‘K선생의 초상’을 잡지에 발표하기도 하고, 연극부를 만들어서 <춘향전> <대륙에 피는 꽃> 등을 연출하고,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고, 피란지인 부산에서 군에 입대했다. 그는 중위 계급장을 단 통역장교가 됐다.
국방부 정훈국에 한 은사가 장교로 근무하고 있어서, 그의 추천을 받고 정훈국 영화과에 전속되면서 영화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바로 촬영기사인 부하에게 영화기술을 하나에서 열까지 다 물어 가면서 배웠다. 그는 이 시기를 거치며 ‘영화를 구성하는 절반은 기술이고 나머지 반은 예술이다’는 영화관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도 “영화는 소설이나 그림처럼 맨손으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매체기 때문에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화예술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첫 작품은 <잊지말자 6·25>(1955). 다음해 <10분간의 휴식>(1956)을 발표했다. 이 두 작품은 현실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이 일치하는 색다른 단편들이었다. 그 뒤에 <윤중사의 수기> <조국찬가> <해 뜨는 마을>과 같은 탈영병 방지, 방첩교육, 국군의 긍지 등을 주제로 한 단편작을 이어 만들어 냈다. 다른 감독들이 보통 선배 감독의 오랜 조감독 생활을 거치면서 영화이론을 배우는 데 비해 그는 국군영화를 만들며 스스로 자신만의 영화적 체험을 습득해 가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이런 습작기를 거치며 그는 군인 신분으로 극영화에 데뷔했다. <공처가>(1958)가 첫 작품이고 이어 2편을 더 만든 뒤 1958년 대위로 예편하게 된다.
그는 이후 늘 여배우들 속에 파묻혀 사는 유명 감독이 되었지만, 가정적으로도 안정된 가장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공숙영 여사와 사이에서 2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석화 서울의대 성형외과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의 쌍꺼풀 수술을 집도한 터에 한때 세간에 이름이 회자되기도 했다. 차남 김세화 교수(용인대 생명과학과) 역시 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필름에 파묻혀 산 인생에 후회는 없다”
예편 뒤 코미디물을 선보였던 김 감독의 작품세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쏟아지게 된 작품은 <혈맥> (1963)부터이다. 가난한 실향민의 아픔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 이 작품은 평론가들에게 그의 존재를 알렸다. 뒤이어 국제적인 평가를 받은 <갯마을>(1965)은 탐미적인 사실주의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이다. 작품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 <안개>(1967)는 도시 속 현대인의 갈등을 심리적 의식의 세계로 풀어 보는, 영상 실험성이 강한 한국 현대영화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단지 이 세 작품에서 드러나듯 그는 폭넓은 영화세계를 탐험해 오면서 한국영화의 범주를 확장시켰다. 특히 ‘문예영화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만든 50여 편의 문예영화가 특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나머지 50편 정도의 B급 영화 때문에 혹자는 그의 영화에 대한 평가를 격하시키려 들지만, 당시 영화산업의 열악한 현실을 감안해서 본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수작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는 “지금에 와서 다작(多作)은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필름에 파묻혀 산 영화인생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는 일 년에 하루도 쉬지 않을 정도로 메가폰을 잡을 수 있는 인기감독으로서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왔지만, 중광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허튼소리>(1986)의 지나친 검열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항했다. 영화계를 떠나 청주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후 1995년 일본에서 <사랑의 묵시록>을 발표하기까지 휴식기를 보냈다. 이런 시절을 보냈던 그가 나중에 두 번이나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되니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109편에 달하는 그의 작품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연대별 특성보다는 장르별로 작품세계를 분석하는 것이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만큼 다양한 영화를 시기에 무관하게 선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자신의 영화 20선을 보면 몇 개의 범주로 나뉜다. 영화평론가 김수남씨는 《한국의 영화감독론2》에서 각 범주에 김 감독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배치시켜 놓았다.
첫 번째는 리얼리즘적 상황극이다. 실향민의 애환을 그린 <혈맥>(1963)에 이어 현대인이 직면한 인간 양심의 소재와 행동을 묻는 <망명의 늪>(1978),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이 있다.
두 번째는 지역적 향토성이 짙은 작품들이다. <갯마을>(1965)과 같은 느낌으로 <만선>(1967), <산불>(1967; 1977년 리메이크작), <물보라> (1980) 등이 있다.
세 번째는 대서사극 <토지>(1974)이다. 사극의 철저한 고증을 시도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네 번째는 현대인의 정신적 갈등을 다양하게 다룬 작품으로 <안개>(1967),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가 꼽힐 수 있다. 또 문학의 관념성을 영상화한 <까치소리>(1967), 그리고 윤회관을 담은 <극락조>(1975)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는 그의 주무기인 순수 문예영화들이다. <유정>(1966), <봄봄>(1969)이 그중 대표작으로 꼽힌다.
여섯 번째는 아동물이다. 그의 아동물의 특징은 아이들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성인이 함께 보는 아동영화라는 점에서 선구적이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년 흑백, 1984년 컬러 리메이크), <사격장의 아이들>(1967) 등이 있다.
이렇게 한국영화 100년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있는가 하면, 프로파간다성 메시지를 담은 영화도 적지 않다. 공무원의 청렴결백한 생활관을 강조하는 <날개부인>(1965), 위장탈출 간첩 이수근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고발>(1967) <동경특파원>(1968) 등의 반공드라마, 오사카 엑스포70을 배경으로 한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1970) 등의 국책영화도 있다.
잠시 훑어만 보아도 이렇게 다양한 작품세계를 일정한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우리가 여러 편의 서로 다른 영화를 통해 일정하게 만나는 김수용 감독의 모습은 자연주의, 인본주의, 평화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적 질감이 물씬 풍기는 작품을 만들어 낸 영상미학가라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를 두고 ‘영상의 테크니션’이라고 범주를 좁혀 평가하지만, 이제 그는 한국영화의 지평을 넓히며 한국영화 현대화를 이끈 선구자로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김수용 감독 인터뷰
“윤정희와 대통령 스캔들 소문은…”
#scene1
고아원에서 자란 청년 X(원빈 분)는 자수성가해서 검사가 됐다. 그래서 부잣집에서 사위로 들였는데, 그는 결혼조건으로 ‘1년간 주말에 여행을 다니겠다’고 했다. 그 목적은 절에서 자신을 낳고 공산당과 관련해 처형당한 어머니에 대한 소문을 남몰래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scene2
9월 달맞이꽃이 잔뜩 필 때 그는 매주 그랬던 것처럼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한 지방의 여관, 등목을 해 주겠다고 나선 중년의 여주인(윤정희 분)은 은밀히 “밤에 색시가 필요하냐?”고 말을 건넨다. 남자는 못 들은 척하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저녁상을 들고 주인여자가 들어온다. 밥상을 들고 나서는 그녀에게 불을 끄고 나가 달라고 부탁하는 청년. 그때 주인여자는 “외롭지 않냐?”며 슬그머니 옷을 벗고 옆에 눕는다.
#scene3
알몸으로 누워 있는 두 남녀. 대화 끝에 청년은 그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벌떡 일어나 뛰어나간다. 문밖 철로 옆의 달맞이꽃은 달빛을 받아 더 노랗게 빛이 난다. 영문을 모르는 여자는 치마로 앞만 가린 채 “손님, 내가 뭐 잘못했어요?”라며 쫓아간다. 산 너머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 후 요란한 브레이크 굉음. 달맞이꽃은 피로 물드는데, 산 너머 달은 밝기만 하다.
김수용(82) 감독이 최근에 구상한 신작영화의 시놉시스이다. 그의 머릿속 캐스팅으로 자리잡은 주인공은 원로배우 윤정희씨와 요즘 잘나가는 배우 원빈이다. 인터뷰 중 이 아이디어를 말할 때 김 감독의 눈이 가장 빛났던 것 같다.
이 시놉시스가 영화화된다는 상상은 그를 뜨겁게 만드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제작 파트너만 등장한다면, 팔순의 대감독이 만든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1999년 <침향> 이후 11년간의 공백기를 갖고 있는 김 감독은 늘 이렇게 영화현장에 나설 준비를 다 갖추고 있다. 언제나 손에서 소설책을 놓지 않는 것도 사실 감각을 갈고 닦기 위해서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칼칼한 목청과 또렷한 눈망울을 보여주고 있는 그를 장충동 자택에서 만났다. ‘세계경영연구원’ 간판을 달고 있는 그의 7층집은 유명 건축가가 지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외양부터 아름다웠지만, 통유리를 통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경관이 더 절경이었다. 대다수 영화인들의 노년이 척박한 한국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즐기고 있는 노감독을 만나는 일은 행복했다.
영화기술은 문학의 문장력이나 마찬가지
―얼마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지금까지 제작된 4편의 국내외 <만추>를 보여주는 ‘만추특별기획전’을 했는데, 누구의 작품이 가장 좋았나요.
“내가 보기엔 내가 만든 것(1981)이 가장 이만희 감독의 원작 <만추>(1966)에 가깝지 않았나 해요. 이번 김태용 감독의 <만추>(2011)는 투자자들이 많아서 엉뚱한 작품이 나온 거 같고, 1972년 사이토 고이치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약속>은 이만희 감독의 정서와 다르고,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1975)은 너무 에로틱한 부분만 강조됐고요.”
―영화를 시작하면서 영화기술을 먼저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화기술은 한마디로 비유하면 문학에서 문장력입니다. 문장력이 없는 사람이 무슨 글을 씁니까. 영화에서도 기술이 없으면 말만 가지고는 안되거든요.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사람은 문장이 아름다워야죠. 영화기술을 모르면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말도 못하는 아이한테 스피치 잘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군대니까 바로 ‘너는 임무를 띠고 여기 왔으니 해라’였어요. 그러니 공부해서 하는 수밖에 없었죠.”
―초기작으로 코미디를 택했던 이유가 있었나요.
“코미디를 택했다기보다 코미디를 하도록 되어 있었죠. 왜냐면 투자자들이 ‘저 사람의 영화기술 가지고 코미디를 하면 밑지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투자자들은 나를 이용하는 거고, 저는 그 덕분에 감독이 되는 거죠. 상호간 이해관계의 접점에서 이뤄진 것일 뿐이에요. 그래서 처음부터 4편 정도 코미디영화를 했어요. 그러고 나서 제대했죠.
제대 후에는 김소월의 시를 바탕으로 한 <애상>(1959)이라는 작품부터 본격적으로 내 색깔의 작품들을 만들었죠. ‘내가 사람들을 웃길 수 있으면, 왜 울리지는 못하겠냐’라는 생각이었죠. 그 뒤로 <혈맥>(1963),<굴비>(1963) 등 제 길을 찾아간 거죠.”
―군대에서 처음 영화를 시작했는데, 조감독 생활은 따로 안했습니까.
“한번쯤 했어요. 국방부 영화과 임관할 때 편집기사 출신인 양주남이란 사람이 있었어요. 1957년에 그 사람이 <배뱅이굿>이란 극영화의 감독을 하게 됐어요. 그때 오용진 원작에 양주남 감독, 유장산 촬영이었는데, 제가 자진해서 조감독으로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어요. 그때 이미 군 영화는 몇 편 만들었는데, ‘극영화는 대체 뭐냐’라는 생각에서 윗분에게 허락을 받고 참여했죠.”
―그게 딱 한 편 조감독 한 건가요.
“그 뒤로 그 사람들이 ‘당신 같으면 바로 극영화 찍어도 되니까 하자’고 해서 1958년에 데뷔작 <공처가>를 찍은 거죠.”
―역대 감독 중에서 가장 짧은 조감독 기간을 거쳤겠어요.
“조감독 할 때도 이미 내가 스스로 배워서 10분짜리 단편영화를 찍기 시작할 때였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별 하나 달고 사단장 할 때 그 사람한테 가서 <10분간 휴식>이란 영화를 찍을 때였어요. ‘극영화는 뭔가’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현장에 가서 배우들과 감독의 관계, 현장의 관계 등을 눈으로 본 거죠.”
선우휘 영화과장의 도움 많이 받아
―군인으로서 극영화를 찍을 때 제약은 없었나요. 취미생활이 아니고 본격적인 영화를 한 건데.
“아이고, 정말 많죠. 현역군인이니까 시간이 없잖아요. 휴일이나 밤에 촬영하고 고통이 말할 수 없었죠.”
―그런 생활을 얼마나 했습니까.
“현역 때 극영화 3편 찍었어요. 한 편에 3개월쯤 찍었으니까, 1년 정도 되죠. 투자자들은 만든 영화로 돈을 벌어야 하니까 신문광고도 하고, 극장에도 내 이름이 걸리잖아요. 정부에서는 ‘현역장교가 이래도 되나’라며 문제가 됐고, 군법회의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무사히 예비군으로 예편했죠. 옷을 벗고 만든 4번째 영화부터는 그렇게 하늘이 높고 푸를 수가 없었어요.”(웃음)
―그게 누군가요.
“선우휘(鮮于煇)씨가 육군 대령으로 영화과 과장이었는데, 그분이 암암리 도와줘서 가능했어요. 그 사람도 영화와 소설을 좋아했거든요. 그 사람은 저에게 ‘영화에 문학적인 요소를 심어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제가 문예영화를 50편이나 찍었잖아요. 나중에 저도 그 사람에게 소설의 문장표현도 영화처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보라고 권해 줬죠. 그래서 선우휘씨의 첫 소설 ‘불꽃’이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굉장히 참신했죠. 서로 도움을 받았던 거죠.”
―지금까지 109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아쉬운 작품도 있을 것 같습니다.
“100여 편 만들다 보면 절반은 쭉정이죠. 그래도 절망 속에서 다음 작품을 위해 이 악물고 하고 그런 거죠. 그중 검열에서 많이 잘린 작품들이 그래도 아쉽죠. 예를 들어 <도시로 간 처녀>(1981)나 <허튼소리>(1986)같이 무조건 검열에 편집된 작품들은 안타깝죠.”
―실험적 작품들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감독 입장에서는 해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아무 흥행실적도 없는 감독이 자기 하고 싶은 거 한다고 하면 돈도 안 되고 미친 사람이라고 그러죠. 어느 정도 흥행작품이 있으면 다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걸 하고, 그러고 나서 밑지면 다음에는 다시 돈 벌어 주면 되는 거고…. 그렇게 이어지는 거죠.”
―한창 전성기 시절인 1967년에는 1년에 10작품을 개봉했는데, 그 속에 대표작들이 포진해 있는 놀라운 모습이 보입니다. 다작(多作)을 하는 환경 속에서도 대표작이 나온 것이 기적 같은 일로 보입니다.
“3년, 5년 만든다고 해서 그 시간만큼 영화가 나오는 게 아니라, 한정된 시간 안에 그 감독의 능력만큼 담겨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영화가 소설과 비슷하다고 하잖아요. 책 많이 읽은 사람이 제일 승리해요. 소설작품 많이 읽어야 돼요. 저는 세계문학, 일본문학, 한국문학전집들을 모두 읽었어요. 독서량이 있으니까 어떤 작품을 가져와도 그 수준에서 만들 수 있는 거예요. 만약 독서량이 없고, 시나리오를 가지고 자신의 상상력의 한도에서만 만든다고 하면 못 만들죠. 수준이 왔다 갔다 하게 되죠. 영화의 기본은 아무리 봐도 문학작품을 잘 읽는 게 정답인 거 같아요.”
―다른 감독들에 비해 탁월한 상상력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라는 말이네요.
“모든 개인은 한계가 있잖아요. 하지만 작품에는 얼마든지 있거든요. 작품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상상력이 작품마다 넘쳐 나지요.”
할리우드에 가 6개월간 영화 300편 봐
―‘문예영화의 대부(代父)’라는 타이틀엔 만족하나요.
“누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무슨 대부예요. 물론 내가 소설을 영화화하면 관객이 오니까 밑지진 않았지요.”
―원작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인지도로 인해 덕을 볼 수도 있지만, 역으로 놓고 보면 감독에게는 오히려 원작을 영상화한다는 측면에서 상상력의 제약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원작을 항상 초월해야죠. 물론 작가들 중에는 자신의 작품과 문장 하나 달라져도 ‘내 작품 아니야. 지워’라는 분들도 있지만요. 저는 김동리 선생의 작품을 <까치소리>(1967)와 <극락조> (1975) 둘씩이나 했거든요. 그분은 ‘영화와 소설은 다른 거니까, 내가 문장으로 표현한 것을 영화 형식으로 표현해라’고 하셨어요. 박경리씨의 <토지> (1974)도 내가 만들었는데, ‘내가 쓴 거 그대로 영화로 만들면 그게 뭐냐’고 하면서 영화적인 상상에 다 맡겨 줬어요. 그러면 저도 자유롭죠.”
―김 감독의 전성기며, 한국영화의 중흥기였던 1960년대와 현재는 무엇이 다른가요.
“지금은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이 두드러져서, 천만관객이 넘지만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굶주리고 있어요. 우리가 일 많이 하던 1960년대에는 저마다 어떤 일이든 하고 있었어요. 이런 빈곤상태는 없었어요. 실패하면 서로 도와주고 격려하고 그랬죠. 거대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돈벌이와 시장성에만 치중하다 보니까 능력위주로 감독을 선별해 쓰는 거죠. 하지만 그렇게 해도 지금 얼마나 적자를 많이 봅니까.”
―옛날에는 흥하든 망하든 정(情)이 있었는데, 지금은 냉혹해졌죠.
“이건 냉혹 정도가 아니예요.”
―지금도 성공한 감독들은 할리우드로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사실 김 감독이야말로 할리우드로 넘어간 1세대 감독 아닌가요.
“1970년대 초에 홍콩에 가서 영화 두 편을 만들었는데, 그중 한 편인 <우중화> (1972)의 주연 여배우였던 리칭이 아시아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큼 성공해서 그때 번 돈 4만 달러를 들고 할리우드로 갔어요. 6개월 동안 300여 편의 영화를 보면서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서성거렸지요. 그때 <더티 해리>를 만든 돈 시겔 감독을 찾아가기도 했어요. 당시 미국 감독들은 ‘한국에도 영화 있냐’라고 할 정도로 한국영화는 쳐주지도 않을 때였어요. 그런데, 저도 통역장교를 할 만큼 어느 정도는 영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모국어로서 영어가 바탕이 되지 않고는 힘들다는 생각을 갖게 되더군요. 그래서 포기하고 귀국했어요.”
―할리우드에 다녀와서 만든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모더니즘 경향으로 넘어가는데요. 할리우드에서 본 300편의 작품에 자극을 받아서인가요.
“당시 할리우드에서 봤던 영화들이 영양소가 돼서 저한테 축적되어 있었겠지요. 그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A Clockwork Orange)>, 노먼 주이슨 감독의 <지붕위의 바이올린> 등의 영화를 봤어요. 모더니즘은 일종의 변신에 대한 몸부림이었어요. 계속 이어지는 패턴이 지겨우니까 변화를 준 거죠. ‘남(미국)은 이만큼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요만큼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어요.”
―결국 할리우드 경험은 큰 자극이 됐군요.
“그렇죠. 구체적으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서울을 떠나 있던 1년 동안 본 다양한 세계적 영화들이 영향을 주긴 했죠. 특히 UCLA 대학생들 작품 시연회가 기억에 남아요. 할리우드에서는 될성부른 신인을 찾아내기 위해 4학년 된 학생들의 시사회를 보러 오거든요. <대부>를 만든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이 UCLA 학창시절에 <면도(Shaving)>란 작품을 냈었어요. 백색의 화장실 거울에 수염이 많은 얼굴 하나가 비쳐요. 면도기를 들고서 수염을 면도하는데 빨간 피 한 방울이 팍 나요. 그게 점점 번지더니 몇 분 후에는 화장실 전체가 새빨개지는 거예요. 얼마나 충격적이에요. 그렇게 해서 할리우드에 뽑혀 갔죠.“
“요즘 여배우들, 우리나라 사람 같지 않아”
―영화를 109편이나 만들다 보니 다양한 배우들을 겪었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를 외국에 소개한다면 누가 될까요.
“사실 배우는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거거든요. 역할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릴린 먼로나 오드리 헵번은 그걸 넘어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배우들이죠. 우리 나라에 아직 그만한 배우는 없어요. 긴 세월 동안 배우들과 정도 나누고 배반도 당해 보고 했지만, 그중에 누군가를 뽑아야 한다면 영화를 제일 많이 같이한 사람을 뽑아야겠죠. 그만큼 내가 신뢰했다는 거니까요. 남자배우로 치면 ‘김승호 김진규 신영균 신성일’, 여자배우는 ‘황정순 최은희 남정임 윤정희’ 정도가 아닌가 싶네요.”
―당시 남정임씨, 윤정희씨는 문희씨와 셋이서 트로이카를 이뤘는데, 문희씨는 두 여배우보다 작품을 덜 했지요?
“저도 문희씨랑 영화 2편 정도 같이 했는데, 문희씨는 이만희 계통의 배우라서 그쪽이랑 많이 했고, 저는 스크린으로만 많이 봤죠. 남정임, 윤정희씨랑은 각각 20~30편씩 했어요.”
―당시 배우들이 겹치기 출연을 많이 할 때였는데, 그런 배우들과 함께 촬영을 진행하려면 애환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상황에 맞춰서 하는데요. 예를 들어서 남정임이 영화를 2편 찍으면 남정임이 나오는 영화 2편을 내가 다 맡는 거예요. 아름다운 난센스 같은 이야긴데, 김승호랑도 같이 작품을 동시에 2개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실수로 A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B영화 주인공 이름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서로 웃고 격려도 해 가면서 재밌게 일했죠.”
―트로이카 여배우들을 키워 내는 맛도 있었겠네요.
“키운다기보다는 그들의 영화가 많이 나오니까 서로 경쟁해서 커 나가는 거지요. 배우는 대중이 키우는 거지, 영화감독이 어떻게 키우겠어요.”
―윤정희(67)씨가 작년에 어느 잡지에 김수용 감독에 대한 회고 글을 쓰면서 ‘20편을 같이 하면서 따뜻하게 마음 편히 연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분이었다’고 했더군요.
“예의상 그렇게 했겠지요(웃음). 물론 내 개인적으로 여배우들에게 가혹하게 안했어요.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에 배우가 전력투구해서 연기를 해야 하거든요. 그 순간에는 배우의 기분이 최상이어야 돼요. 그러니까 조금 미운 날에도 ‘너 최고다, 예쁘다’ 해 주는 거죠. 그렇게 띄워 주고 카메라 앞에 세웠을 때 그 배우가 자신의 최고점까지 연기를 하거든요. 어떤 감독들은 신경질 내거나 지시하니까 여배우가 주눅이 들어서 잘 못하는 경우도 있죠. 영화는 감정으로 하는 작업이니까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은 기본이죠. 같은 예술원 회원인 황정순씨는 저한테 늘 ‘젠틀맨’이라고 불러요.”
―당시 트로이카 배우들의 미모와 현재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는 여배우들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지요?
“완전히 변해서 우리나라 사람 같지가 않아요.”
―이렇게 배우들의 모습이 변한 것이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기여할지, 아니면 한국영화의 캐릭터를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갈지, 어떻게 보나요.
“후자(後者)지죠. 한국만이 가진 것이 세계적인 것이거든요. 우리가 모두 세계적인 것을 흉내내면 한국적인 것이 뭐가 남아요? 한국영화에는 한국사람이 나와야죠.”
촬영 때 윤정희는 바다에서 꼭 혼자 수영
―윤정희씨가 지난해 <시>라는 작품으로 칸에까지 다녀왔었는데 감회가 남달랐겠어요.
“윤정희씨를 두 번 파리에서 봤는데, 참 힘들게 살아왔어요.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꿋꿋히 살아냈어요. 윤정희씨가 파리에 살고 있을 때 내가 국내로 불러들여서 찍은 영화가 17편 정도 되지요. 그중 1977년도에 만든 <화려한 외출>을 처음으로 칸에 보냈어요. 그런데, 영화제가 끝나고 이틀 후에 필름이 도착한 거예요. 그때 한국이 그럴 때였다고요. 너무 억울해서 파리대사관 옆 극장에서 파리 영화 관계자들 불러 놓고 상영했어요.”
―속상했겠네요.
“말도 못하죠. 그래서 응어리진 게 있죠. 이번에도 <시> 시사회를 보고는 ‘이번에라도 윤정희가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만 타면 만사형통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못 탔잖아요. 저 나름대로는 감독이 잘못한 부분도 있어서 상을 못 탔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번에 훈장도 받고 다른 많은 상을 받아서 이전의 상처에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여배우가 칸 여우주연상 하나 거머쥐었다고 하면 대단한 거죠. 나는 너무 억울해서 불만이 있다뿐이지, 그 아래라도 좋은 상을 받았으니 박수 쳐 주고 싶어요. 나는 윤정희씨에게 개인적으로 기회를 한 번 더 줘서 칸 여우주연상을 꼭 받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으려면 말 그대로 주연으로 출연해야 하는데 윤정희씨 연세의 여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칸 여우주연상에서 밀린 것도 쥘리에트 비노슈에 비해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것 아닐까 해요. 물론 비노슈가 그 나라 배우인 점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요”
―윤정희씨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까 한가지 궁금한데요. 윤정희씨도 당시 대통령과 관련된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파리로 떠났잖아요. 사실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당시 트로이카 중에서 남정임씨는 어머니가 재일교포 부잣집 신랑에게 시집보냈고, 문희씨는 신문사 사장이랑 결혼했지요. 그리고 윤정희 혼자 남았으니까 더 바빠지고 더 인기가 올라가야 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의기소침하고 인생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그때부터 그 사람이 프랑스 유학을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비자가 도통 안 나와서 1년을 기다리다가 서강대 여교수의 힘을 빌려서 겨우 파리에 갔죠. 당시 대통령과 스캔들로 인해 영부인으로부터 추방됐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바로 다음날로 보내 버리지 무엇 하러 1년이나 기다리게 했겠어요.
떠나기 전 마지막 작품이 <작은 꿈이 꽃필 때>(1972)라고 남해 작은 섬에서 촬영했는데, 밤에는 윤정희가 바다에서 꼭 혼자 수영을 하더군요. 이유를 물었더니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 싶은데 못 가고 있다고 고민을 털어놓더라고요. 다른 여배우들의 스캔들은 모르겠는데, 윤정희씨가 권력층에 유린당했다는 스캔들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런 여자도 아니고, 그 스캔들 주인공과는 관계도 없어요.”
―윤정희씨가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직접 영화를 한 편 만들면 어떻겠어요. 누구보다 호흡이 잘 맞을 것 같은데요.
“찍고 싶은 영화야 많죠. 저는 지금 머릿속에 영화 두 편 정도가 있거든요.”(그중 한 편이 인터뷰 앞에 소개한 시놉시스)
―군사독재 시절에 검열 많이 당하면서도 잘 견뎠는데, <허튼 소리>(1986) 때는 아예 “영화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했잖아요. 무엇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당시 이영희 공연윤리위원장은 영화전문가도 아니면서 평이 좋지 않았어요. 이 영화가 중광 스님 이야기니까 작품을 만들어 가면서도 검열이 걱정이 돼서 스님과 친한 시인 구상(具常)씨까지 동반해서 검열받으러 갔어요. 구상 선생은 이 위원장의 남편을 시인으로 등단시킨 스승이거든요. 자기 남편 스승과 같이 갔음에도 무자비하게 한 무더기를 잘라내더라고요.
제작자가 센 사람이면 항의도 하고 할 텐데, 남의 돈 빌려서 투자한 거니까 빨리 상영해서 이익을 봐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자르는 대로 받아들이고 상영하자고 결정하더군요. 저는 화가 나서 조계종 스님 30명에 영화인들까지 합세해서 싸웠지만 당시는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영화를 하겠냐. 그만두겠다’라고 성명을 내고 학교에 가서 학생들 가르치겠다고 하고 청주대로 간 거죠.”
―그러고 나서 해외에서 영화를 다시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은퇴 성명이 1980년대에 이뤄진 일이니까 1990년대에 권위주의 정권도 물러가고 자유로워졌으니 자연스럽게 다시 하게 됐죠. 그런데 국내에서 만들기는 조금 그러니까 일본에 가서 <사랑의 묵시록>을 만들 게 된 거죠.”
―한국영화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요.
“영화를 포함해 모든 문화 콘텐츠가 그렇듯이 기복이 굉장히 심할 것 같습니다. 이 속에서 영화도 점점 산업화 구조로 가고 있기 때문에 예술성보다는 상업성만 더 확장돼 갈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라는 형식을 빌려서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다루는 예술 창조 기회는 점점 더 없어질 거라고 봐요.”⊙
특히 1960년은 한국 문예영화의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시절이다. 이 시절을 지나면서 그는 ‘한국 문예영화의 대부’라는 타이틀을 받을 만큼 한국영화사에 남는 대단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1958년 첫 작품 <공처가>에서 2000년 <침향>까지 이어진 109편의 영화 중 <혈맥>(1963), <갯마을>(1965), <안개>(1967> 등은 지금 다시 보아도 명작 반열에 놓이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40년 동안 109편을 만들다 보니 ‘겹치기 연출’도 다반사였는데, 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연속적으로 가작을 만들어 내는 저력을 보였다. <까치소리> 등 10편을 내놓은 1967년에는 발표작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만선>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등 가작이 쏟아졌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대한민국 예술인들의 최고 영예인 대한민국예술원에서 영화 부문 회원이 됐다. 30년 넘게 활동한 순수예술 분야 100인에게 주어지는 이 자리에 영화인 중에서는 그와 임권택 감독, 원로배우 황정순씨, 극작가 신봉승·김지헌씨 등 몇 명이 회원 자격을 인정받았을 뿐이다. 평생을 한길에 매진해 온 영화인들에게 이보다 더한 영예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사회적인 평가가 반드시 작품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영화사에서 ‘문예영화’가 갖는 의미와 또 그가 만들어 낸 ‘김수용표 문예영화’가 남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반드시 한번쯤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국방부 정훈국 정훈과에서 영화인생 시작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 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문예영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문예영화는 대중 사이에서 잘 알려진 문학작품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권위주의 정권 시절 혹독한 검열을 피하는 수단으로 즐겨 이용됐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축소시킨 문예영화는 혹평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김수용의 문예영화는 문학적인 요소에 걸맞은 영상미로 멜로드라마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평론가 안병섭씨는 한국영화의 전통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한 가지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으로부터 이규환, 최인규가 계승해 온 리얼리즘의 전통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운규의 <오몽녀>(1937)로부터 나오는 성적 욕망을 바탕으로 한 인간드라마의 전통이다. 전자의 리얼리즘은 1960년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과 김수용·이만희 감독의 사실적 영화들에서, 또 후자의 전통은 신상옥·김기영 감독의 작품에서 계승되었다는 분석이다.
굳이 이런 분석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영화는 사실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형식미를 추구한 영화라는 데 평론가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작품이 워낙 많다 보니 그는 코미디에서 멜로, 문예, 시대물, 액션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지만, 거의 사실주의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그의 영화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영화세계로 입문한 과정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작품이든 작가의 삶이 녹아들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1929년 경기도 안성에서 중농인 부친 김준옥씨와 모친 이금선씨 사이에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기서 심상소학교, 안성공립농고를 졸업했고, 서울에 올라가 경성사범학교 본과(현재의 서울사대)로 진학했다. 안성에서 농고를 다닐 당시 일본 유학생 박모씨가 고향의 논밭에 세운 애원극장에서 영화와 연극, 음악회 등의 공연을 보면서 이 세계에 눈을 떴다.
대학생 때 습작소설 ‘K선생의 초상’을 잡지에 발표하기도 하고, 연극부를 만들어서 <춘향전> <대륙에 피는 꽃> 등을 연출하고,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고, 피란지인 부산에서 군에 입대했다. 그는 중위 계급장을 단 통역장교가 됐다.
국방부 정훈국에 한 은사가 장교로 근무하고 있어서, 그의 추천을 받고 정훈국 영화과에 전속되면서 영화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바로 촬영기사인 부하에게 영화기술을 하나에서 열까지 다 물어 가면서 배웠다. 그는 이 시기를 거치며 ‘영화를 구성하는 절반은 기술이고 나머지 반은 예술이다’는 영화관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도 “영화는 소설이나 그림처럼 맨손으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매체기 때문에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화예술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첫 작품은 <잊지말자 6·25>(1955). 다음해 <10분간의 휴식>(1956)을 발표했다. 이 두 작품은 현실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이 일치하는 색다른 단편들이었다. 그 뒤에 <윤중사의 수기> <조국찬가> <해 뜨는 마을>과 같은 탈영병 방지, 방첩교육, 국군의 긍지 등을 주제로 한 단편작을 이어 만들어 냈다. 다른 감독들이 보통 선배 감독의 오랜 조감독 생활을 거치면서 영화이론을 배우는 데 비해 그는 국군영화를 만들며 스스로 자신만의 영화적 체험을 습득해 가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이런 습작기를 거치며 그는 군인 신분으로 극영화에 데뷔했다. <공처가>(1958)가 첫 작품이고 이어 2편을 더 만든 뒤 1958년 대위로 예편하게 된다.
그는 이후 늘 여배우들 속에 파묻혀 사는 유명 감독이 되었지만, 가정적으로도 안정된 가장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공숙영 여사와 사이에서 2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석화 서울의대 성형외과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의 쌍꺼풀 수술을 집도한 터에 한때 세간에 이름이 회자되기도 했다. 차남 김세화 교수(용인대 생명과학과) 역시 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필름에 파묻혀 산 인생에 후회는 없다”
예편 뒤 코미디물을 선보였던 김 감독의 작품세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쏟아지게 된 작품은 <혈맥> (1963)부터이다. 가난한 실향민의 아픔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 이 작품은 평론가들에게 그의 존재를 알렸다. 뒤이어 국제적인 평가를 받은 <갯마을>(1965)은 탐미적인 사실주의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이다. 작품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 <안개>(1967)는 도시 속 현대인의 갈등을 심리적 의식의 세계로 풀어 보는, 영상 실험성이 강한 한국 현대영화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단지 이 세 작품에서 드러나듯 그는 폭넓은 영화세계를 탐험해 오면서 한국영화의 범주를 확장시켰다. 특히 ‘문예영화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만든 50여 편의 문예영화가 특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나머지 50편 정도의 B급 영화 때문에 혹자는 그의 영화에 대한 평가를 격하시키려 들지만, 당시 영화산업의 열악한 현실을 감안해서 본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수작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는 “지금에 와서 다작(多作)은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필름에 파묻혀 산 영화인생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는 일 년에 하루도 쉬지 않을 정도로 메가폰을 잡을 수 있는 인기감독으로서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왔지만, 중광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허튼소리>(1986)의 지나친 검열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항했다. 영화계를 떠나 청주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후 1995년 일본에서 <사랑의 묵시록>을 발표하기까지 휴식기를 보냈다. 이런 시절을 보냈던 그가 나중에 두 번이나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되니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109편에 달하는 그의 작품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연대별 특성보다는 장르별로 작품세계를 분석하는 것이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만큼 다양한 영화를 시기에 무관하게 선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자신의 영화 20선을 보면 몇 개의 범주로 나뉜다. 영화평론가 김수남씨는 《한국의 영화감독론2》에서 각 범주에 김 감독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배치시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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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맥〉. |
두 번째는 지역적 향토성이 짙은 작품들이다. <갯마을>(1965)과 같은 느낌으로 <만선>(1967), <산불>(1967; 1977년 리메이크작), <물보라> (1980) 등이 있다.
세 번째는 대서사극 <토지>(1974)이다. 사극의 철저한 고증을 시도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네 번째는 현대인의 정신적 갈등을 다양하게 다룬 작품으로 <안개>(1967),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가 꼽힐 수 있다. 또 문학의 관념성을 영상화한 <까치소리>(1967), 그리고 윤회관을 담은 <극락조>(1975)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는 그의 주무기인 순수 문예영화들이다. <유정>(1966), <봄봄>(1969)이 그중 대표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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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격장의 아들〉. |
이렇게 한국영화 100년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있는가 하면, 프로파간다성 메시지를 담은 영화도 적지 않다. 공무원의 청렴결백한 생활관을 강조하는 <날개부인>(1965), 위장탈출 간첩 이수근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고발>(1967) <동경특파원>(1968) 등의 반공드라마, 오사카 엑스포70을 배경으로 한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1970) 등의 국책영화도 있다.
잠시 훑어만 보아도 이렇게 다양한 작품세계를 일정한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우리가 여러 편의 서로 다른 영화를 통해 일정하게 만나는 김수용 감독의 모습은 자연주의, 인본주의, 평화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적 질감이 물씬 풍기는 작품을 만들어 낸 영상미학가라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를 두고 ‘영상의 테크니션’이라고 범주를 좁혀 평가하지만, 이제 그는 한국영화의 지평을 넓히며 한국영화 현대화를 이끈 선구자로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김수용 감독 인터뷰
“윤정희와 대통령 스캔들 소문은…”
#scene1고아원에서 자란 청년 X(원빈 분)는 자수성가해서 검사가 됐다. 그래서 부잣집에서 사위로 들였는데, 그는 결혼조건으로 ‘1년간 주말에 여행을 다니겠다’고 했다. 그 목적은 절에서 자신을 낳고 공산당과 관련해 처형당한 어머니에 대한 소문을 남몰래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scene2
9월 달맞이꽃이 잔뜩 필 때 그는 매주 그랬던 것처럼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한 지방의 여관, 등목을 해 주겠다고 나선 중년의 여주인(윤정희 분)은 은밀히 “밤에 색시가 필요하냐?”고 말을 건넨다. 남자는 못 들은 척하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저녁상을 들고 주인여자가 들어온다. 밥상을 들고 나서는 그녀에게 불을 끄고 나가 달라고 부탁하는 청년. 그때 주인여자는 “외롭지 않냐?”며 슬그머니 옷을 벗고 옆에 눕는다.
#scene3
알몸으로 누워 있는 두 남녀. 대화 끝에 청년은 그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벌떡 일어나 뛰어나간다. 문밖 철로 옆의 달맞이꽃은 달빛을 받아 더 노랗게 빛이 난다. 영문을 모르는 여자는 치마로 앞만 가린 채 “손님, 내가 뭐 잘못했어요?”라며 쫓아간다. 산 너머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 후 요란한 브레이크 굉음. 달맞이꽃은 피로 물드는데, 산 너머 달은 밝기만 하다.
김수용(82) 감독이 최근에 구상한 신작영화의 시놉시스이다. 그의 머릿속 캐스팅으로 자리잡은 주인공은 원로배우 윤정희씨와 요즘 잘나가는 배우 원빈이다. 인터뷰 중 이 아이디어를 말할 때 김 감독의 눈이 가장 빛났던 것 같다.
이 시놉시스가 영화화된다는 상상은 그를 뜨겁게 만드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제작 파트너만 등장한다면, 팔순의 대감독이 만든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1999년 <침향> 이후 11년간의 공백기를 갖고 있는 김 감독은 늘 이렇게 영화현장에 나설 준비를 다 갖추고 있다. 언제나 손에서 소설책을 놓지 않는 것도 사실 감각을 갈고 닦기 위해서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칼칼한 목청과 또렷한 눈망울을 보여주고 있는 그를 장충동 자택에서 만났다. ‘세계경영연구원’ 간판을 달고 있는 그의 7층집은 유명 건축가가 지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외양부터 아름다웠지만, 통유리를 통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경관이 더 절경이었다. 대다수 영화인들의 노년이 척박한 한국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즐기고 있는 노감독을 만나는 일은 행복했다.
영화기술은 문학의 문장력이나 마찬가지
―얼마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지금까지 제작된 4편의 국내외 <만추>를 보여주는 ‘만추특별기획전’을 했는데, 누구의 작품이 가장 좋았나요.
“내가 보기엔 내가 만든 것(1981)이 가장 이만희 감독의 원작 <만추>(1966)에 가깝지 않았나 해요. 이번 김태용 감독의 <만추>(2011)는 투자자들이 많아서 엉뚱한 작품이 나온 거 같고, 1972년 사이토 고이치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약속>은 이만희 감독의 정서와 다르고,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1975)은 너무 에로틱한 부분만 강조됐고요.”
―영화를 시작하면서 영화기술을 먼저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화기술은 한마디로 비유하면 문학에서 문장력입니다. 문장력이 없는 사람이 무슨 글을 씁니까. 영화에서도 기술이 없으면 말만 가지고는 안되거든요.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사람은 문장이 아름다워야죠. 영화기술을 모르면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말도 못하는 아이한테 스피치 잘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군대니까 바로 ‘너는 임무를 띠고 여기 왔으니 해라’였어요. 그러니 공부해서 하는 수밖에 없었죠.”
―초기작으로 코미디를 택했던 이유가 있었나요.
“코미디를 택했다기보다 코미디를 하도록 되어 있었죠. 왜냐면 투자자들이 ‘저 사람의 영화기술 가지고 코미디를 하면 밑지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투자자들은 나를 이용하는 거고, 저는 그 덕분에 감독이 되는 거죠. 상호간 이해관계의 접점에서 이뤄진 것일 뿐이에요. 그래서 처음부터 4편 정도 코미디영화를 했어요. 그러고 나서 제대했죠.
제대 후에는 김소월의 시를 바탕으로 한 <애상>(1959)이라는 작품부터 본격적으로 내 색깔의 작품들을 만들었죠. ‘내가 사람들을 웃길 수 있으면, 왜 울리지는 못하겠냐’라는 생각이었죠. 그 뒤로 <혈맥>(1963),<굴비>(1963) 등 제 길을 찾아간 거죠.”
―군대에서 처음 영화를 시작했는데, 조감독 생활은 따로 안했습니까.
“한번쯤 했어요. 국방부 영화과 임관할 때 편집기사 출신인 양주남이란 사람이 있었어요. 1957년에 그 사람이 <배뱅이굿>이란 극영화의 감독을 하게 됐어요. 그때 오용진 원작에 양주남 감독, 유장산 촬영이었는데, 제가 자진해서 조감독으로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어요. 그때 이미 군 영화는 몇 편 만들었는데, ‘극영화는 대체 뭐냐’라는 생각에서 윗분에게 허락을 받고 참여했죠.”
―그게 딱 한 편 조감독 한 건가요.
“그 뒤로 그 사람들이 ‘당신 같으면 바로 극영화 찍어도 되니까 하자’고 해서 1958년에 데뷔작 <공처가>를 찍은 거죠.”
―역대 감독 중에서 가장 짧은 조감독 기간을 거쳤겠어요.
“조감독 할 때도 이미 내가 스스로 배워서 10분짜리 단편영화를 찍기 시작할 때였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별 하나 달고 사단장 할 때 그 사람한테 가서 <10분간 휴식>이란 영화를 찍을 때였어요. ‘극영화는 뭔가’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현장에 가서 배우들과 감독의 관계, 현장의 관계 등을 눈으로 본 거죠.”
선우휘 영화과장의 도움 많이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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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 영화과장 시절 김수용 감독을 도운 선우휘 전 조선일보 주필. |
“아이고, 정말 많죠. 현역군인이니까 시간이 없잖아요. 휴일이나 밤에 촬영하고 고통이 말할 수 없었죠.”
―그런 생활을 얼마나 했습니까.
“현역 때 극영화 3편 찍었어요. 한 편에 3개월쯤 찍었으니까, 1년 정도 되죠. 투자자들은 만든 영화로 돈을 벌어야 하니까 신문광고도 하고, 극장에도 내 이름이 걸리잖아요. 정부에서는 ‘현역장교가 이래도 되나’라며 문제가 됐고, 군법회의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무사히 예비군으로 예편했죠. 옷을 벗고 만든 4번째 영화부터는 그렇게 하늘이 높고 푸를 수가 없었어요.”(웃음)
―그게 누군가요.
“선우휘(鮮于煇)씨가 육군 대령으로 영화과 과장이었는데, 그분이 암암리 도와줘서 가능했어요. 그 사람도 영화와 소설을 좋아했거든요. 그 사람은 저에게 ‘영화에 문학적인 요소를 심어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제가 문예영화를 50편이나 찍었잖아요. 나중에 저도 그 사람에게 소설의 문장표현도 영화처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보라고 권해 줬죠. 그래서 선우휘씨의 첫 소설 ‘불꽃’이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굉장히 참신했죠. 서로 도움을 받았던 거죠.”
―지금까지 109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아쉬운 작품도 있을 것 같습니다.
“100여 편 만들다 보면 절반은 쭉정이죠. 그래도 절망 속에서 다음 작품을 위해 이 악물고 하고 그런 거죠. 그중 검열에서 많이 잘린 작품들이 그래도 아쉽죠. 예를 들어 <도시로 간 처녀>(1981)나 <허튼소리>(1986)같이 무조건 검열에 편집된 작품들은 안타깝죠.”
―실험적 작품들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감독 입장에서는 해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아무 흥행실적도 없는 감독이 자기 하고 싶은 거 한다고 하면 돈도 안 되고 미친 사람이라고 그러죠. 어느 정도 흥행작품이 있으면 다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걸 하고, 그러고 나서 밑지면 다음에는 다시 돈 벌어 주면 되는 거고…. 그렇게 이어지는 거죠.”
―한창 전성기 시절인 1967년에는 1년에 10작품을 개봉했는데, 그 속에 대표작들이 포진해 있는 놀라운 모습이 보입니다. 다작(多作)을 하는 환경 속에서도 대표작이 나온 것이 기적 같은 일로 보입니다.
“3년, 5년 만든다고 해서 그 시간만큼 영화가 나오는 게 아니라, 한정된 시간 안에 그 감독의 능력만큼 담겨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영화가 소설과 비슷하다고 하잖아요. 책 많이 읽은 사람이 제일 승리해요. 소설작품 많이 읽어야 돼요. 저는 세계문학, 일본문학, 한국문학전집들을 모두 읽었어요. 독서량이 있으니까 어떤 작품을 가져와도 그 수준에서 만들 수 있는 거예요. 만약 독서량이 없고, 시나리오를 가지고 자신의 상상력의 한도에서만 만든다고 하면 못 만들죠. 수준이 왔다 갔다 하게 되죠. 영화의 기본은 아무리 봐도 문학작품을 잘 읽는 게 정답인 거 같아요.”
―다른 감독들에 비해 탁월한 상상력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라는 말이네요.
“모든 개인은 한계가 있잖아요. 하지만 작품에는 얼마든지 있거든요. 작품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상상력이 작품마다 넘쳐 나지요.”
할리우드에 가 6개월간 영화 300편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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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 |
“누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무슨 대부예요. 물론 내가 소설을 영화화하면 관객이 오니까 밑지진 않았지요.”
―원작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인지도로 인해 덕을 볼 수도 있지만, 역으로 놓고 보면 감독에게는 오히려 원작을 영상화한다는 측면에서 상상력의 제약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원작을 항상 초월해야죠. 물론 작가들 중에는 자신의 작품과 문장 하나 달라져도 ‘내 작품 아니야. 지워’라는 분들도 있지만요. 저는 김동리 선생의 작품을 <까치소리>(1967)와 <극락조> (1975) 둘씩이나 했거든요. 그분은 ‘영화와 소설은 다른 거니까, 내가 문장으로 표현한 것을 영화 형식으로 표현해라’고 하셨어요. 박경리씨의 <토지> (1974)도 내가 만들었는데, ‘내가 쓴 거 그대로 영화로 만들면 그게 뭐냐’고 하면서 영화적인 상상에 다 맡겨 줬어요. 그러면 저도 자유롭죠.”
―김 감독의 전성기며, 한국영화의 중흥기였던 1960년대와 현재는 무엇이 다른가요.
“지금은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이 두드러져서, 천만관객이 넘지만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굶주리고 있어요. 우리가 일 많이 하던 1960년대에는 저마다 어떤 일이든 하고 있었어요. 이런 빈곤상태는 없었어요. 실패하면 서로 도와주고 격려하고 그랬죠. 거대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돈벌이와 시장성에만 치중하다 보니까 능력위주로 감독을 선별해 쓰는 거죠. 하지만 그렇게 해도 지금 얼마나 적자를 많이 봅니까.”
―옛날에는 흥하든 망하든 정(情)이 있었는데, 지금은 냉혹해졌죠.
“이건 냉혹 정도가 아니예요.”
―지금도 성공한 감독들은 할리우드로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사실 김 감독이야말로 할리우드로 넘어간 1세대 감독 아닌가요.
“1970년대 초에 홍콩에 가서 영화 두 편을 만들었는데, 그중 한 편인 <우중화> (1972)의 주연 여배우였던 리칭이 아시아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큼 성공해서 그때 번 돈 4만 달러를 들고 할리우드로 갔어요. 6개월 동안 300여 편의 영화를 보면서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서성거렸지요. 그때 <더티 해리>를 만든 돈 시겔 감독을 찾아가기도 했어요. 당시 미국 감독들은 ‘한국에도 영화 있냐’라고 할 정도로 한국영화는 쳐주지도 않을 때였어요. 그런데, 저도 통역장교를 할 만큼 어느 정도는 영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모국어로서 영어가 바탕이 되지 않고는 힘들다는 생각을 갖게 되더군요. 그래서 포기하고 귀국했어요.”
―할리우드에 다녀와서 만든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모더니즘 경향으로 넘어가는데요. 할리우드에서 본 300편의 작품에 자극을 받아서인가요.
“당시 할리우드에서 봤던 영화들이 영양소가 돼서 저한테 축적되어 있었겠지요. 그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A Clockwork Orange)>, 노먼 주이슨 감독의 <지붕위의 바이올린> 등의 영화를 봤어요. 모더니즘은 일종의 변신에 대한 몸부림이었어요. 계속 이어지는 패턴이 지겨우니까 변화를 준 거죠. ‘남(미국)은 이만큼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요만큼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어요.”
―결국 할리우드 경험은 큰 자극이 됐군요.
“그렇죠. 구체적으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서울을 떠나 있던 1년 동안 본 다양한 세계적 영화들이 영향을 주긴 했죠. 특히 UCLA 대학생들 작품 시연회가 기억에 남아요. 할리우드에서는 될성부른 신인을 찾아내기 위해 4학년 된 학생들의 시사회를 보러 오거든요. <대부>를 만든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이 UCLA 학창시절에 <면도(Shaving)>란 작품을 냈었어요. 백색의 화장실 거울에 수염이 많은 얼굴 하나가 비쳐요. 면도기를 들고서 수염을 면도하는데 빨간 피 한 방울이 팍 나요. 그게 점점 번지더니 몇 분 후에는 화장실 전체가 새빨개지는 거예요. 얼마나 충격적이에요. 그렇게 해서 할리우드에 뽑혀 갔죠.“
“요즘 여배우들, 우리나라 사람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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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갯마을〉. |
“사실 배우는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거거든요. 역할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릴린 먼로나 오드리 헵번은 그걸 넘어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배우들이죠. 우리 나라에 아직 그만한 배우는 없어요. 긴 세월 동안 배우들과 정도 나누고 배반도 당해 보고 했지만, 그중에 누군가를 뽑아야 한다면 영화를 제일 많이 같이한 사람을 뽑아야겠죠. 그만큼 내가 신뢰했다는 거니까요. 남자배우로 치면 ‘김승호 김진규 신영균 신성일’, 여자배우는 ‘황정순 최은희 남정임 윤정희’ 정도가 아닌가 싶네요.”
―당시 남정임씨, 윤정희씨는 문희씨와 셋이서 트로이카를 이뤘는데, 문희씨는 두 여배우보다 작품을 덜 했지요?
“저도 문희씨랑 영화 2편 정도 같이 했는데, 문희씨는 이만희 계통의 배우라서 그쪽이랑 많이 했고, 저는 스크린으로만 많이 봤죠. 남정임, 윤정희씨랑은 각각 20~30편씩 했어요.”
―당시 배우들이 겹치기 출연을 많이 할 때였는데, 그런 배우들과 함께 촬영을 진행하려면 애환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상황에 맞춰서 하는데요. 예를 들어서 남정임이 영화를 2편 찍으면 남정임이 나오는 영화 2편을 내가 다 맡는 거예요. 아름다운 난센스 같은 이야긴데, 김승호랑도 같이 작품을 동시에 2개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실수로 A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B영화 주인공 이름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서로 웃고 격려도 해 가면서 재밌게 일했죠.”
―트로이카 여배우들을 키워 내는 맛도 있었겠네요.
“키운다기보다는 그들의 영화가 많이 나오니까 서로 경쟁해서 커 나가는 거지요. 배우는 대중이 키우는 거지, 영화감독이 어떻게 키우겠어요.”
―윤정희(67)씨가 작년에 어느 잡지에 김수용 감독에 대한 회고 글을 쓰면서 ‘20편을 같이 하면서 따뜻하게 마음 편히 연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분이었다’고 했더군요.
“예의상 그렇게 했겠지요(웃음). 물론 내 개인적으로 여배우들에게 가혹하게 안했어요.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에 배우가 전력투구해서 연기를 해야 하거든요. 그 순간에는 배우의 기분이 최상이어야 돼요. 그러니까 조금 미운 날에도 ‘너 최고다, 예쁘다’ 해 주는 거죠. 그렇게 띄워 주고 카메라 앞에 세웠을 때 그 배우가 자신의 최고점까지 연기를 하거든요. 어떤 감독들은 신경질 내거나 지시하니까 여배우가 주눅이 들어서 잘 못하는 경우도 있죠. 영화는 감정으로 하는 작업이니까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은 기본이죠. 같은 예술원 회원인 황정순씨는 저한테 늘 ‘젠틀맨’이라고 불러요.”
―당시 트로이카 배우들의 미모와 현재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는 여배우들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지요?
“완전히 변해서 우리나라 사람 같지가 않아요.”
―이렇게 배우들의 모습이 변한 것이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기여할지, 아니면 한국영화의 캐릭터를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갈지, 어떻게 보나요.
“후자(後者)지죠. 한국만이 가진 것이 세계적인 것이거든요. 우리가 모두 세계적인 것을 흉내내면 한국적인 것이 뭐가 남아요? 한국영화에는 한국사람이 나와야죠.”
촬영 때 윤정희는 바다에서 꼭 혼자 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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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외출〉. |
“윤정희씨를 두 번 파리에서 봤는데, 참 힘들게 살아왔어요.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꿋꿋히 살아냈어요. 윤정희씨가 파리에 살고 있을 때 내가 국내로 불러들여서 찍은 영화가 17편 정도 되지요. 그중 1977년도에 만든 <화려한 외출>을 처음으로 칸에 보냈어요. 그런데, 영화제가 끝나고 이틀 후에 필름이 도착한 거예요. 그때 한국이 그럴 때였다고요. 너무 억울해서 파리대사관 옆 극장에서 파리 영화 관계자들 불러 놓고 상영했어요.”
―속상했겠네요.
“말도 못하죠. 그래서 응어리진 게 있죠. 이번에도 <시> 시사회를 보고는 ‘이번에라도 윤정희가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만 타면 만사형통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못 탔잖아요. 저 나름대로는 감독이 잘못한 부분도 있어서 상을 못 탔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번에 훈장도 받고 다른 많은 상을 받아서 이전의 상처에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여배우가 칸 여우주연상 하나 거머쥐었다고 하면 대단한 거죠. 나는 너무 억울해서 불만이 있다뿐이지, 그 아래라도 좋은 상을 받았으니 박수 쳐 주고 싶어요. 나는 윤정희씨에게 개인적으로 기회를 한 번 더 줘서 칸 여우주연상을 꼭 받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으려면 말 그대로 주연으로 출연해야 하는데 윤정희씨 연세의 여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칸 여우주연상에서 밀린 것도 쥘리에트 비노슈에 비해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것 아닐까 해요. 물론 비노슈가 그 나라 배우인 점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요”
―윤정희씨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까 한가지 궁금한데요. 윤정희씨도 당시 대통령과 관련된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파리로 떠났잖아요. 사실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당시 트로이카 중에서 남정임씨는 어머니가 재일교포 부잣집 신랑에게 시집보냈고, 문희씨는 신문사 사장이랑 결혼했지요. 그리고 윤정희 혼자 남았으니까 더 바빠지고 더 인기가 올라가야 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의기소침하고 인생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그때부터 그 사람이 프랑스 유학을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비자가 도통 안 나와서 1년을 기다리다가 서강대 여교수의 힘을 빌려서 겨우 파리에 갔죠. 당시 대통령과 스캔들로 인해 영부인으로부터 추방됐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바로 다음날로 보내 버리지 무엇 하러 1년이나 기다리게 했겠어요.
떠나기 전 마지막 작품이 <작은 꿈이 꽃필 때>(1972)라고 남해 작은 섬에서 촬영했는데, 밤에는 윤정희가 바다에서 꼭 혼자 수영을 하더군요. 이유를 물었더니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 싶은데 못 가고 있다고 고민을 털어놓더라고요. 다른 여배우들의 스캔들은 모르겠는데, 윤정희씨가 권력층에 유린당했다는 스캔들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런 여자도 아니고, 그 스캔들 주인공과는 관계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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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튼소리〉. |
“찍고 싶은 영화야 많죠. 저는 지금 머릿속에 영화 두 편 정도가 있거든요.”(그중 한 편이 인터뷰 앞에 소개한 시놉시스)
―군사독재 시절에 검열 많이 당하면서도 잘 견뎠는데, <허튼 소리>(1986) 때는 아예 “영화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했잖아요. 무엇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당시 이영희 공연윤리위원장은 영화전문가도 아니면서 평이 좋지 않았어요. 이 영화가 중광 스님 이야기니까 작품을 만들어 가면서도 검열이 걱정이 돼서 스님과 친한 시인 구상(具常)씨까지 동반해서 검열받으러 갔어요. 구상 선생은 이 위원장의 남편을 시인으로 등단시킨 스승이거든요. 자기 남편 스승과 같이 갔음에도 무자비하게 한 무더기를 잘라내더라고요.
제작자가 센 사람이면 항의도 하고 할 텐데, 남의 돈 빌려서 투자한 거니까 빨리 상영해서 이익을 봐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자르는 대로 받아들이고 상영하자고 결정하더군요. 저는 화가 나서 조계종 스님 30명에 영화인들까지 합세해서 싸웠지만 당시는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영화를 하겠냐. 그만두겠다’라고 성명을 내고 학교에 가서 학생들 가르치겠다고 하고 청주대로 간 거죠.”
―그러고 나서 해외에서 영화를 다시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은퇴 성명이 1980년대에 이뤄진 일이니까 1990년대에 권위주의 정권도 물러가고 자유로워졌으니 자연스럽게 다시 하게 됐죠. 그런데 국내에서 만들기는 조금 그러니까 일본에 가서 <사랑의 묵시록>을 만들 게 된 거죠.”
―한국영화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요.
“영화를 포함해 모든 문화 콘텐츠가 그렇듯이 기복이 굉장히 심할 것 같습니다. 이 속에서 영화도 점점 산업화 구조로 가고 있기 때문에 예술성보다는 상업성만 더 확장돼 갈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라는 형식을 빌려서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다루는 예술 창조 기회는 점점 더 없어질 거라고 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