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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75)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美軍進駐와 兩分되는 政局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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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軍의 진주를 앞두고 政局은 두 갈래로 회오리쳤다. 9월 6일에 右派民族主義者들은 ‘독립한국의 主流’가 될 우파 단일정당 결성을 위한 통합발기총회를 열고 黨名을 韓國民主黨으로 결정했다. 같은 날 밤에 左翼人士들은 建國準備委員會의 실권을 장악한 共産黨의 주동으로 ‘朝鮮人民共和國’을 급조했다. 발표된 55명의 中央人民委員가운데에는 李承晩, 金九, 金奎植 등 臨時政府要人들과 金性洙, 曺晩植, 安在鴻, 金炳魯 등 국내 우익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9월 8일에 仁川에 상륙한 하지(John R. Hodge) 미군사령관은 이튿날 日本軍의 降服文書調印式이 끝나자 아베(阿部信行) 총독 이하 조선총독부의 일본인관리들을 일시적으로 유임시켰다. 그러나 韓國人들의 격심한 반발과 美國輿論의 비판에 당황한 美國政府의 지시로 총독부 간부들은 모두 바로 파면되었다.
 
  트루먼大統領은 9월 18일에 한국사태에 대한 특별성명을 발표했는데, 李承晩은 그날로 트루먼에게 감사전보를 쳤다.
 

  1. 하지司令官의 布告文이 뿌려지다
 
  일반국민들이 남한에 미군이 진주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9월 1일에 이르러서였다. 이날 B24폭격기 한 대가 날아와 부산, 서울, 인천 세 도시에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제24군단장 하지(John R. Hodge) 중장의 포고문이 인쇄된 전단을 뿌리고 간 것이다. 하지는 8월 19일에 태평양방면 미육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로부터 미육군 남한주둔군사령관에 임명되어 있었다. 포고문은 “미군은 일본군의 항복과 항복조건을 이행하고 한국의 재건과 질서있는 정치를 실현하고자” 근일 중에 한국에 상륙한다고 천명했다.1) 전단은 13만 장을 인쇄하여 부산에 3만5,000장, 서울에 7만 장, 나머지를 인천에 뿌렸다.2)
 
 
  “어떤 改革도 서서히 進行한다”
 
   이튿날 일본의 도쿄만(東京灣)에 정박한 미해군의 미조리 호(USS Missouri)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거행되고, 연합군이 점령할 지역을 자세히 밝힌 태평양 미육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일반명령 제1호’가 공표되었다. 거기에는 북위38도선 이남의 한국은 미군이 점령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일본의 항복조인식과 맥아더의 ‘일반명령 제1호’에 관한 뉴스는 국내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자로 된 하지 사령관의 두 번째 포고문이 9월 5일에 다시 한국의 중요 도시에 뿌려졌는데, 그것은 나흘 전의 포고문보다 한결 구체적으로 진주군의 목적과 한국인들에 대한 요구사항을 밝힌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군의 진주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일반국민들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내용이었다. 포고문은 “어떠한 개혁도 서서히 진행한다”고 언명하고, “국민에 대한 포고나 명령은 현존하는 제기관을 통하여 공표되며…”라고 하여 우선 현상유지 정책을 채택할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반하는 자는 처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3)
 
  하지 사령관의 이러한 포고는 8월 29일에 맥아더의 전보를 통하여 알게 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의 북한상황에 대한 부정확한 보고와 8월 31일부터 직접 연결된 조선군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의 무전 내용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와 고즈키 사이에는 9월 4일까지 닷새 동안에 무려 40회 이상의 전신이 왕복했다.4) 고즈키는 9월 1일에 한국에서는 “목하의 혼란상태를 악용하여 평화와 질서를 교란시키려고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을 선동하는 자들이 횡행하고 있다”고 타전한 데 이어, 9월 3일에는 인천항의 300여 하역노동자들이 임금과 식료품에 대한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고 미군의 한국상륙은 아마도 적색 노동조합의 사보타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한국인 폭도들의 일본인 경찰관에 대한 폭력행위 및 탄약탈취와 빈발하는 파업에 대해서도 보고했다. 그러면서 고즈키는 자기의 입장은 극히 곤란하며, 미군의 도착을 절실히 기다리고 있다고 타전했다. 하지는 고즈키에게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질서를 확보하고 기존의 통치기구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5)
 
 
  攻擊作戰用보고서 『JANIS 75』가 유일한 情報資料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한국을 통치했던 미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
  일리노이 주의 벽촌 골콘다(Golconda)에서 성장한 하지는 정규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미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1917년에 고등사관양성소에 입학함으로써 직업군인으로 출발한 하지는 맥아더 장군과 같은 정치가형이 아니라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평판을 듣는 전형적인 야전지휘관이었다. 하지를 지휘관으로 하여 1944년 4월에 하와이에서 창설된 제24군단은 태평양지역의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쌓은 정예 전투부대였다. 태평양지역에서의 마지막 전투였던 오키나와 상륙전에 참여했던 제24군단이 한국점령군으로 선정된 것은 한국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 장군은 9월 8일에 인천항에 상륙할 때까지 본국정부나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한국점령에 관한 명확한 지침을 하달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인식하고 있던 한국의 장래 문제에 대한 본국정부의 정책은 카이로 선언에 따라 한국은 독립될 것이고 당면해서는 남한에 군정을 실시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가 오키나와에서 입수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한국에 관한 자료는 ‘제니스(JANIS) 75’라는 연구보고서였다. 미육군과 해군의 정보국은 제2차대전기에 국가별로 정보를 집대성한 편람형식의 연구보고서를 공동으로 작성했는데, ‘제니스 75’는 그것의 한국편이었다〈JANIS 75는 Joint Army-Navy Intelligence Study of Korea(한국에 관한 육-해군합동정보연구)의 약자이다. 75는 한국을 뜻하는 숫자이다〉. 1945년 4월에 완성된 ‘제니스 75’는 상세한 지도와 함께 한국의 지리와 문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정보를 요령있게 집대성한 보고서였으나, 기본적으로 점령작전보다는 전술적 공격작전에 이용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었다.6) 대마도에 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하지는 점령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군정수립에 대한 상부의 지원을 기대하고 8월 21일에 군단 군정장교 해리스(Charles Harris) 준장을 대동하고 마닐라로 갔다. 그러나 마닐라 주재 총영사관의 존슨(U. Alexis Johnson) 영사로부터 한국문제에 대해서는 합동참모본부나 그 밖의 어떤 기관으로부터도 훈령이 아직 접수되지 않았고, 따라서 대일훈령을 적당히 수정하여 한국에 적용하는 것, 곧 미군정관의 지시 아래 조선총독과 그의 참모들을 한국행정에 활용하는 것이 기본계획임이 틀림없다는 말만 듣고 25일에 오키나와로 돌아왔다.7)
 
 
  제24군단 사령부의 ‘軍團野戰命令 제55호’
 
  일본에서는 군정을 실시하지 않고 기존의 일본정부기구를 통하여 행동하기로 결정한, 미태평양사령부는 8월 29일에 하지에게 보낸 지령에서 항복조건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일본정부 및 모든 이용가능한 공공기관들을 최대한 활용하라고 지시했다.8) 제24군단사령부는 태평양사령부의 이러한 지시에 따라 한국점령에 대한 독자적인 지침을 작성하고 9월 1일에 ‘군단야전명령 제55호(Corps Field Order No. 55)’에 첨부하여 각급부대에 시달했다. 이 문서는 한국의 군사점령의 직접적 목적은 “군국주의의 폐지, 전쟁범죄자의 즉시 체포와 처벌, … 인종, 국적, 신앙 또는 정치적 신념에 의한 차별의 철폐, … 정치, 경제, 사회적인 자유주의의 고양, 국내문제를 관리할 수 있고 다른 국가들이나 국제연합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책임 있는 한국정부의 수립”이라고 천명했다. 그리고 정부 행정에 대해서는 기존의 정부기구의 활용, 일본의 군국주의적 민족주의자의 배제, 현재의 경찰조직의 유지 등 6개 항을 구체적으로 들었다.9)
 
  그런데 이 ‘군단야전명령 제55호’는 태평양사령부의 지령과는 모순된 점이 없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이용가능한 모든 일본기관들과 총독을 비롯한 일본인 요원들을 활용하면서 전쟁범죄자를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과 같은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하지는 8월 18일에 본국정부에 대하여 국무부 대표 한 사람을 정치문제를 담당할 자신의 참모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국무부는 극동사정에 밝은 극동국의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를 ‘연락관 겸 정치고문’으로 임명했다. 베닝호프는 9월 3일에 오키나와에 도착했다.10)
 
 
  “國民大會準備會는 國會開設 준비기구”
 
  광복 이튿날부터 계파별로 정당결성을 추진하고 있던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고려사회민주당(高麗社會民主黨) 등의 우익정당 발기인들은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와 대결하기 위한 민족주의 세력의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통합작업을 서둘렀다. 중경임시정부의 추대를 주장하면서 정당결성의 시기상조론을 주장하며 시국을 관망해 오던 송진우(宋鎭禹)도 8월말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송진우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하는 일이었다. 그가 구상한 국민대회란 한 번으로 끝나는 행사가 아니라 건준을 의식한 매우 광범위한 조직체였다.
 
  송진우는 8월 하순의 어느 날 조선민족당 발기를 주동하고 있는 이인(李仁)을 자기 집으로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가 건립되자면 국회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나는 국회개설준비로 각계각층을 망라한 국민대회준비회를 발기할까 하오. 이것은 결코 애산(愛山: 李仁)을 위시한 동지들이 만드는 정당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또 별도로 깃발을 들고 나오자는 것이 아니니 양해하고 협력해 주기 바라오.”11)
 
  이처럼 송진우가 구상한 국민대회준비회는 국회개설운동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인, 조병옥(趙炳玉), 원세훈(元世勳) 등의 주동으로 8월 17일에 반도호텔에서 결성된 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회는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하기 위한 조직기반이 되었다. 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회는 8월 25일에 반도호텔에 두고 있던 사무실을 종로의 YMCA회관으로 옮기고 조직확대에 주력하여, 9월 3일에는 위원장 권동진(權東鎭)과 함께 부위원장으로 동아일보 그룹의 총수 김성수(金性洙)와 이튿날 건준 부위원장으로 선임되는 변호사 허헌(許憲)과 이인 세 사람,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50명의 위원명단을 발표했다. 또 조병옥 사무장과 구자옥(具滋玉), 조헌영(趙憲泳) 두 사무차장 아래 8부(총무, 접대, 회계, 설비, 선전, 정보, 경호, 교통)의 실행위원 100여 명을 선임했다.12)
 
 
  ‘獨立祖國의 主流’ 될 韓國民主黨 발기
 
  미군의 진주가 확실해지자 정국은 또다시 회오리쳤다. 좌파와 우파의 당동벌이(黨同伐異: 뜻맞는 사람끼리 한패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척함)가 한결 뚜렷해졌다. 대동단결이라는 명분 아래 통합활동을 벌여온 우파 민족주의 인사들은 9월 6일 오후 4시에 종로의 협성실업학교(協成實業學校) 강당에 700명가량이 모여 우파단일정당을 결성하기 위한 통합발기총회를 개최했다. 당명은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이하 韓民黨)으로 결정되었다. 회의는 9개부의 임원 90명을 선정했는데, 각부의 책임자는 다음과 같았다.
 
  총무부 김병로(金炳魯)
  선전부 함상훈(咸尙勳)
  계획부 장덕수(張德秀)
  정보부 박찬희(朴瓚熙)
  조직부 김약수(金若水)
  조사부 이중화(李重華)
  지방부 정로식(鄭魯植)
  심사부 김용무(金用茂)
  재정부 박용희(朴容喜)13)
 
  회의는 또 다음과 같은 ‘강령’과 ‘정책’을 채택했다. ‘강령’은 (1)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2)민주주의의 정체수립을 기함, (3)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4)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5)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이라는 5개항이었고, ‘정책’은 (1)국민기본생활의 확보, (2)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 (3)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앙의 자유, (4)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5)중공주의(重工主義)의 경제정책 수립, (6)주요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7)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8)국방군의 창설이라는 8개항이었다.14)
 
  ‘강령’과 ‘정책’의 기초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국민적 관심사였던 토지제도 개혁문제였다. 좌익들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고 있었는데, 신도성(愼道晟)이 작성한 초안에는 ‘유상매입 무상분배’로 되어 있었다. ‘유상매입 유상분배’로 할 것이냐 ‘유상매입 무상분배’로 할 것이냐를 두고 초안의 심의단계에서 중진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합리적 재편성’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이 되고 말았다.15)
 
  한민당의 ‘정책’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토지문제와 함께 국민적 논란거리였던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의 처리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는 점이었다. 이날의 대회에서 총무부 임원으로 선정된 허정의 이 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술회는 새겨볼 만하다.
 
  “처음 우리가 한민당을 준비할 때에는 독립조국의 주류형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인물의 엄선이 확고한 원칙이었다. 친일파나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사람들은 제외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객관적 정세는 급변해 갔다. 건준의 독주만이 아니라 공산당의 재건, 사회주의 계열의 정당 사회단체의 난립 등은 우리의 이상만을 고수하여 민주진영 밑에 뭉치려고 하는 사람들을 배척할 수 없는 형세였다. 우리는 인선에서 융통성을 갖기로 했고, 이것이 후일 한민당의 일각을 친일파가 점령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 원인이었다. …”16)
 
  그러나 그것은 한민당이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을 비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17) 공산당과 좌익인사들이 한민당을 친일파집단이라고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날의 발기인 회의에서 채택된 ‘선언’의 주목되는 점은 중경임시정부를 “광복벽두의 우리 정부”로 맞이하겠다고 천명한 것이었다.18)
 
 
  2. 建國準備委員會에서 人民共和國으로
 
  한민당의 통합발기인대회가 열리고 두세시간쯤 지난 9월 6일 밤에 좌파인사들은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선포를 위한 이른바 인민대표대회를 열었다. 그것은 건준의 실권 장악에 성공한 재건파공산당의 박헌영(朴憲永)의 주동으로 부랴부랴 소집된 회의였다.
 
  광복정국의 큰 혼란의 불씨가 된 조선인민공화국의 선포과정에 대해서는 정확히 규명해야 할 점이 아직도 많다. 남로당(南勞黨) 간부였던 박일원(朴馹遠)은 좌익들이 인민공화국을 만든 목적은 첫째, 국민의 광복의 환희와 애국심을 이용하여 계급독재와 계급전제의 정권을 수립하려고 한 것, 둘째 중경임시정부의 무력화를 기도한 것, 셋째 미군상륙을 앞두고 기성정부로서 미군과 상대하고자 한 것, 넷째 정부의 권위로 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를 제압하고자 한 것 등이었고, 그 구체적인 것은 9월 4일에 허헌이 입원해 있는 경성의전(京城醫專) 병원에서 박헌영, 여운형(呂運亨), 허헌, 정백(鄭栢) 네 사람이 비밀히 만나 협의하여 결정했다고 기술했다.19) 한편 건준의 조직에 깊이 관여했던 여운형계의 이영근(李榮根)은 여운형에게 인민공화국 수립문제를 맨 먼저 제의한 사람은 박헌영과 여운형 사이의 연락을 맡고 있던 경성제대 출신의 두 이론가 이강국(李康國)과 최용달(崔容達)이었다고 술회했다.20) 이강국과 최용달은 9월 4일에 열린 건준확대위원회에서 건준 중앙집행부의 두 핵심부서인 조직부와 치안부의 부장에 각각 선임된 재건파공산당원들이었다.
 
 
  建準擴大委員會에서 執行部 개편
 
  건준은 위원장 여운형과 부위원장 안재홍(安在鴻)을 비롯한 간부 전원이 총사퇴한 상황에서 9월 4일에 안국동 사무실에서 제1회 확대위원회를 열었다. 회의에는 통첩을 받은 135명의 인사 가운데에서 재경위원의 반수가 넘는 57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안재홍은 개회인사를 통하여 그동안 회의가 여러 차례 연기된 것은 내외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건준의 사업이 극히 난관에 봉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회의는 여운형과 안재홍의 유임을 결의한 다음, 부위원장 한 명을 증원하기로 결의하고 허헌을 추대하기로 했다. 조선변호사회장,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좌우익 독립운동자들을 변호했던 허헌은 1943년의 단파방송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옥중에서 건강을 해쳐 1945년 4월에 병보석으로 출감한 뒤에는 처가가 있는 황해도 신천(信川)온천에 가서 요양하고 있었다. 그는 8월 30일에야 서울로 올라왔다.21) 회의의 가장 중요한 안건인 중앙집행위원 선거는 위원장단에 일임하기로 했다.22)
 
  이렇게 하여 건준 지도부의 총사직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건준의 성격에 대하여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안재홍이 계속 건준에 참여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는 이미 사흘 전에 결성된 조선국민당(朝鮮國民黨)의 위원장으로 추대된 상태였다.23)
 
  문제는 새로 조직된 건준 중앙집행부의 진용이었다. 8월 22일에 구성했던 집행부 가운데에서 안재홍계의 김교영(金敎英), 이승복(李昇馥), 이의식(李義植), 함상훈, 홍기문(洪起文)을 포함한 우파 민족주의 쪽의 김도연(金度演), 김준연, 이규갑(李奎甲), 이용설(李容卨), 김약수, 그리고 여운형계의 이동화(李東華), 여운형이 건준을 결성하면서 맨 먼저 상의한 장안파공산당의 정백과 권태석(權泰錫), 정순용(鄭珣容)의 14명을 탈락시키고, 박헌영이 이끄는 재건파공산당의 김형선(金炯善), 이순근(李舜根), 이정구(李貞求) 등 11명을 새로 선임했는데,24) 핵심부서인 조직부, 기획부, 교통부, 치안부의 부장 자리는 재건파공산당의 이강국, 박문규(朴文圭), 김형선, 최용달이 각각 차지했다.25) 건준은 이 인선을 조선인민공화국이 결성된 9월 6일에 발표하면서 “이 인민대표위원으로 조직된 부서가 결성될 때까지는 건준 집행부가 그냥 계속될 것”이라고 발표했다.26)
 
 
  “人民共和國을 만든 뜻이 무엇인가?”
 
  8월 말까지도 서울에 소련군이 진주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좌익인사들은 9월 7일에 미군이 진주한다는 뉴스에 여간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권수립을 서둔 것은 소련군이 북한에서 하는 것을 보고 미군도 진주하면 똑같은 방법을 취하여 행정 일체를 한국인 기관에 넘길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27) 인민공화국의 결성을 주동한 좌익인사들이 시국전망을 얼마나 안이하게 하고 있었는가는 이른바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기 하루 전인 9월 5일에 안재홍과 허헌 사이에 오간 다음과 같은 대화가 단적으로 말해 준다. 좌익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안재홍은 허헌에게 말했다.
 
  “연합군이 들어와서 당신들을 상대하지 않는 때에 가서 뒷일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오?”
 
  그러자 허헌은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어째서 상대를 아니 할 이유가 있소? 민세(民世: 安在鴻)가 어째 시국을 그렇게 보는 거요?”28)
 
  또한 한 달 뒤인 10월 5일에 열린 각 정당 수뇌 간담회에서 인민공화국을 만든 뜻이 무엇이냐는 송진우의 질문에 허헌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는 것이 시사적이다.
 
  “우리 조선사정을 잘 모르는 소련군이 들어온다 해도, 우리는 행정이라는 이것을 모르니 너희한테 무슨 준비가 있으면 같이하자, 이렇게 할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법적 근거가 있는 무슨 단체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나의 견해는 여운형씨하고 같아서, 불완전하지만 … 제1차 인민대회를 소집하였던 것입니다.…”29)
 
  인민공화국을 만든 사람들은 이처럼 이 시점에도 소련군이 단독으로 진주하거나 적어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서울에 진주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하여 박헌영과 허헌은 여운형을 설득하여 벼락치기로 정권수립 작업을 강행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지와 고즈키 사이에 전신이 왕래하고 있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京仁地域의 공장에서 動員된 ‘人民代表’들
 
  이른바 전국인민대표대회는 9월 6일 저녁 9시부터 이튿날 새벽 1시까지 안국동의 경기고녀(지금의 창덕여고) 강당에서 열렸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그곳은 일본군 만주국군 출신들의 조직인 치안단(治安團)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어서 경호에 염려가 없었다.
 
  이날의 회의는 우선 ‘인민대표’의 대표성에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다. 주최쪽 문헌에는 이날의 회의참가자들은 건준의 ‘지정추천(指定推薦)’으로 선정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30) 그 말은 이 대회가 주최쪽의 일부 사람들과 그들이 동원한 군중 집회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 밤에 급조된 조선인민공화국은 정통성이 있을 수 없었다. 이영근에 따르면, 이날의 인원동원은 박헌영의 재건파공산당계가 맡았는데, 실제로 모인 사람들은 재건파공산당의 오르그(상부기관에서 파견된 조직요원)가 파견되어 있는 철도노동자를 중심으로 경인(京仁) 지역의 공장에서 동원된 노동자들이었다.31)
 
  건준의 간부라고 자처하던 인사들이나 여운형의 개인적 막료들인 건국동맹과 건준의 비공산계 인사들은 인민공화국 설립과정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여운형의 측근이던 이동화(李東華)는 “그날 나도 연락도 없다가 회의를 한다고 해서 밀려가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 … 그것은 사실 박헌영이 미리 계획을 해가지고 몽양(夢陽: 呂運亨) 선생과 협의를 해서 몽양 선생이 동의를 하시니까 갑자기 부랴부랴 모여가지고 그런 방법을 쓴 것”이었다고 술회했다.32) 그러나 재건파공산당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건준이 8월 28일에 발표한 ‘선언’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강력한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해야” 하고, 그 정권은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 구성될 것이며 …”라고 하여 정권수립계획을 천명했었다.
 
 
  “非常한 때에는 非常한 人物들이 非常한 方法으로 …”
 
9월 6일 밤에 ‘朝鮮人民共和國’이 조직되었음을 알리는 『每日新報』 지면.
  이렇게 하여 황급히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는 1,000여 명의 전국대표가 모인 것으로 보도되었으나,33) 이날 대회에서 인민위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발표된 같은 재건파공산당의 김철수(金綴洙)에 따르면 모인 사람은 600여 명이었다.34)
 
  테러를 당한 머리를 붕대로 감고 나온 여운형이 의장으로 선출되어 회의를 진행했다. 여운형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개회사를 했다.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인물들이 비상한 방법으로 비상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후문제의 국제적 해결에 따라 우리 조선에도 해방의 날이 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허다한 투쟁은 아직 남아 있다. 우리의 새 국가는 노동자, 농민, 일체 근로인민대중을 위한 국가가 아니면 안 된다. 우리의 새 정권은 전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요구를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권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세력을 일소할 뿐만 아니라 모든 봉건적 잔재세력과 반동적, 반민주주의적 세력과도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이곳에 모인 여러분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야수적 폭압 아래에서도 백절불굴하고 싸워온 투사들이다.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나아갈 때에 우리는 우리의 앞길에 가로놓여 있는 어떠한 곤란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35)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인물들이 비상한 방법으로 비상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이날의 여운형의 연설은 이내 대표성이 없는 이날의 회의와 그러한 회의에서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변명하는 논리로 두고두고 이용되었다.
 
  회의는 허헌의 경과보고에 이어 ‘인민의 정부’를 즉시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했다. 이만규(李萬珪)는 “국호는 건국동맹안이 조선공화국으로 제출한 것을 석상의 다수 의결로 조선인민공화국이라고 개정하였다”라고 했는데,36) 앞에서 본 이동화의 증언 등으로 미루어보아 건국동맹 인사들이 국호까지 준비하여 회의에 참석했는지는 적이 의심스럽다. 회의는 이어 조선인민공화국의 ‘조직기본법안’을 상정하여 축조 낭독하고 다소의 수정을 가하여 통과시켰다고 하나,37) 그 ‘조직기본법안’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제1조 제1장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재(在)함”이라고 되어 있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38) ‘기본법안’ 뿐만 아니라 이 중대한 회의의 회의록도 없는 것을 보면 회의가 얼마나 황급히 진행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中央幹部 75명 중 52명이 共産主義者
 
  다음 순서는 중앙인민위원 선거였다. 여운형과 허헌을 포함한 다섯 사람의 전형위원이 지명되고, 이들이 그 자리에서 중앙인민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발표된 인민위원 가운데에는 아직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비롯하여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김구, 김규식(金奎植), 김원봉(金元鳳), 신익희(申翼熙)와 연안(延安)에 있는 독립동맹의 무정(武亭), 하바로프스크의 소련군 제88보병여단에 있는 김일성(金日成: 발표에는 金一成) 등 아직 해외에 있는 인사 9명과 김성수, 조만식(曺晩植), 안재홍, 김병로, 이용설, 김준연 등 국내의 우익인사들 1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재건파공산당이 중앙위원 30명, 후보위원 10명으로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여운형계는 중앙위원 4명, 후보위원 3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재건파공산당과 장안파공산당, 거기에 연안파와 김일성을 합하면 총원 75명 가운데에서 52명이 공산주의자들이었다. 39) 중앙인민위원 명단에서 야릇한 느낌을 주는 것은 재건파공산당의 중심인물인 박헌영, 우파 민족주의자의 대표격인 송진우, 연안의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세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앙위원회 제도와 후보위원 제도는 정부조직이기보다는 공산당의 조직구조를 본뜬 것이었다.40)
 
  이날의 회의가 얼마나 기만적이었는가는 회의장의 열기를 유도하느라고 전 만주국군 중위였던 박승환(朴承煥)이라는 인물이 벌인 촌극으로도 여실히 드러났다. 군인대표라면서 등단한 그는 “조선의용군 7만명이 오늘 신의주를 통과했고, 모레면 서울에 입성한다”라고 거짓보고를 했다. 이 무렵 조선의용군은 무정 등 간부들은 나귀를 타고, 일반 대원들은 걸어서 화북(華北) 산야를 이동하고 있었다.41)
 
 
  建準幹部들은 人民共和國에 반대
 
  건준은 이튿날 전체회의를 열어 전날 밤의 인민대표대회 문제를 심각하게 토의했다. 이 회의에서도 여운형은 인민공화국 반대론을 무마하는 연설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속으로 갈등을 느끼고 있는 여운형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 수 없었다.
 
  “어제 저녁에 급히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한 데 대하여 여러분에게 미처 알리지 못한 것은 나로서 사과한다. 그러나 지금은 건국의 비상시이니 비상조치로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선출된 인민위원은 각계각층을 망라하였다고는 하나 완전하다고 할 수 없고, 이제부터 인민총의에 의한 대표위원이 나올 때까지의 잠정적 위원이라고 볼 수 있다. 선출된 위원은 대개는 승낙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말은 외국에 있는 인사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국내에 있는 인사들의 사전 승낙도 받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진주가 금명일 중에 있을 것이오, 연합군과 절충할 인민총의의 집결체가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그 집결체의 준비공작으로 이리 급히 전국대표회의를 개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사업의 진전에 따라서는 건국준비위원회는 사무가 종료될 것이다.…”42)
 
  인민공화국을 인정한다면 건준은 여운형의 말대로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될 것이었다. 여운형의 가장 측근인 총무부장 최근우(崔謹愚)를 비롯하여 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건준의 존속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날 여운형은 원서동에서 계동으로 넘어가는 집 근처 길에서 정체불명의 청년들에게 또다시 테러를 당했다. 그는 심호섭(沈浩燮) 박사에게서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심호섭의 가평 시골집으로 내려가서 가료를 받으며 정양했다.43)
 
 
  “行政의 대강을 總督에게 指令하고…”
 
  9월 6일 밤 안국동의 경기고녀 강당에서 이른바 인민대표대회가 열리고 있는 바로 그 시각에 조선호텔의 한 방에서는 해리스 준장을 대표로 한 미군 제24군단의 선발대 장교들과 조선총독부 및 일본군 간부들이 예비회담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 한국인은 없었다. 미군 선발대는 날씨 관계로 9월 4일과 6일 오후에 나뉘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44) 선발대는 행정 각 분야에 대한 광범한 참고자료 제출시한을 9월 7일 정오까지로 못박는가 하면 진주군이 사용할 사령부 사무실과 장병의 숙소, 병원, 창고 등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총독부 청사와 총독관저, 반도호텔과 조선호텔 등 주요건물은 9월 8일 오후 4시까지 비우라고 했다. 미군들은 “이것은 부탁이나 요구가 아니다. 명령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일본군은 경인지역에서 바로 철수하기로 결정되었다. 한편 이날 연합군 총사령부는 일본정부에 대해 인천항에 노무자 1,500명가량을 대기시킬 것과 7만5,000배럴의 석유를 급유할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다.45)
 
  미군의 점령정책의 기본방침은 9월 7일 오전 10시부터 한 시간 동안 해리스 준장과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의 회담에서 확실하게 표명되었다. 해리스는 당면한 중대한 문제는 일본의 항복조건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그 제일요건으로서 진주군은 한국의 치안유지를 확보하고 현재의 경제 산업 상태를 혼란시키지 않고 현상을 계속시킬 방침이라고 말했다. 행정방침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의 관청 집무 중의 관리 및 관청의 건물 설비를 계속 사용하고 싶다. 계속 사용이 가능한가?”
 
  그러자 엔도는 그것이 군정을 실시한다는 뜻이냐고 물었다. 해리스는 “군정을 실시한다고 명확하게는 말할 수 없다. 한국은 여전히 총독과 총감의 총괄 아래 두고, 미군사령관은 그 행정의 관리 감독을 할 의향이다”라고 대답했다.
 
  엔도는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해리스의 말을 서면으로 작성하기를 제의했다. 그러나 해리스는 이 일은 미군사령관의 결정권에 속하는 것이고, 자기는 사전에 자기의 대략적인 의사를 전하여 당신들의 준비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석했던 야마나 미키오(山名酒喜男) 총무과장이 구체적으로 물었다.
 
  “행정의 관리 감독은 실제로는 개개의 안건에 대하여 일일이 군사령관의 결재가 필요한가, 아니면 군사령관은 행정의 대강을 지시하고 그 취지를 실시하는 총독의 재량에 맡기는 것인가?”
 
  해리스는 미군사령관은 행정의 대강을 총독에게 지령하고 구체적 안건에 대해서는 총독에게 결재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야마나는 다시 그러한 행정체제는 언제까지 계속하는가 물었고, 해리스는 “행정체제의 계속시한은 최고사령관이 결정한다”라고 대답했다.
 
  해리스가 엔도에게 총독과 정무총감에게 호위병을 붙일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엔도는 지금은 일본군대와 일본경찰이 호위하고 있으나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하면 미군에 의하여 호위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38도 이북 지방으로부터 많은 공산당원이 잠입하고 있는데, 최근 1주일 동안의 정보에 따르면 총독, 정무총감, 군사령관, 참모장 등은 그들의 테러행위의 목표 인물이 되어 있다. 그들 공산당원은 미-일 간의 충돌을 이용하려고 책동하고 있다.”
 
  그러자 해리스는 총독부 청사는 꽤 많은 사람이 집무하고 있는 것 같으므로, 미군사령관의 사무실은 따로 있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반도 호텔을 사령부건물로 쓰게 되었다.
 
  회담은 오후에도 계속되었고, 엔도는 미리 준비한 ‘조선시정사정일반’ 및 ‘조선총독부 희망사항’을 건네주고 설명했다.46)
 
 
  3. 韓國民主黨 發起人들의 人民共和國 성토
 
  우익인사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해리스 장군이 엔도 정무총감을 만나고 있는 시각인 9월 7일 오후 3시부터 송진우가 추진하는 국민대회 준비회의 결성대회가 광화문의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동아일보사는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강제 폐간된 뒤 1942년 11월에 사옥의 임대차 및 부대사업을 위해 설립한 동본사(東本社)가 되어 있었다. 사장은 송진우였다.47)
 
  회의에는 8월 15일 이후에 서울로 모여든 전국의 우파 민족주의 인사 300여 명이 모였다.48) 대회의 주지는 송진우의 지론대로 중경임시정부를 절대지지한다는 것을 천명하자는 것이었다.49) 대회는 김준연의 개회사에 이어 대구에서 올라온 서상일(徐相日)을 의장으로 추대했다. 경과보고는 송진우가 했다. 이어 안건토의에 들어가서, 먼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참석자 전원의 기립으로 결의했다. 두 번째로는 연합국에 대한 감사표시를 하기로 결의하고, 시행위원으로 송진우, 장택상(張澤相), 윤치영(尹致暎), 김창숙(金昌淑), 최윤동(崔允東), 백상규(白象圭) 6명을 선출했다. 유림의 중심인물인 김창숙은 송진우가 직접 여관으로 찾아가서 고문이 되기로 응낙받았다. 송진우는 홍명희와 공산당의 김철수에게도 협력을 요청했으나 두 사람은 거절했다. 이튿날 홍명희는 인민공화국의 고문으로, 김철수는 중앙인민위원으로 발표되었다. 셋째로는 전국적인 국민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준비위원장에 송진우, 부위원장에 서상일과 고려사회민주당의 원세훈을 선출했다. 그리고 전국 각지의 각계를 망라하는 집행위원 100명을 선출하여 그들에게 준비작업을 일임하기로 했다.50) 회의는 다음과 같은 ‘국민대회준비회 선언’을 채택했다.
 
  “강토는 잃었다 하더라도 3천만의 마음에 응집된 국혼의 표상은 경술국변(庚戌國變) 이래로 망명지사의 기백과 함께 해외에 엄존하였던 바이니, 오늘날 일본의 정권이 퇴각하는 이 순간에 이를 대신할 우리의 정부, 우리의 국가대표는 기미 독립선언 이후로 구현된 대한 임시정부가 최고요 또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우리 전 국민의 당면한 관심사는 우선 (1) 국민의 총의로써 우리 재중경 대한임시정부의 지지를 선언할 것, (2) 국민의 총의로써 연합각국에 사의를 표명할 것, (3) 국민의 총의로써 민정수습의 방도를 강구할 것 등이다. …”51)
 
  이처럼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좌파인사들이 급조한 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명분으로 중경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大公報’ 記者편에 金九에게 편지 보내
 
  국민대회준비회를 마친 송진우는 광복정국을 취재하러 온 중국의 유력지 ‘대공보(大公報)’의 기자를 만나서도 중경임시정부가 한국의 정통정부임을 강조했다. ‘대공보’기자는 군복차림에 권총까지 차고 있었다. 한국은 장기간 일본의 식민지 노예생활을 해 왔으므로 독립하기까지 후견(後見) 또는 신탁통치를 받는 과도적 과정을 밟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으냐는 ‘대공보’기자의 질문에 송진우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은 카이로선언에 조선은 적당한 시기에 독립될 것이라고 한 조항을 염두에 두고 질문하는 것 같은데, 나와 우리 국민은 어느 국가 또는 어느 국제기구의 신탁 또는 후견도 원치 않는다. 미국, 중국, 영국이 경제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원조만 해 주면 우리는 독립국가로 훌륭히 자립할 수 있다.”
 
  ‘대공보’기자는 이어 한국이 독립국가가 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할 사회계층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송진우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비록 식민지교육일지라도 전문학교 이상 대학교육을 받은 수십만의 지식계급과 해외에 나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항일투쟁을 해 온 혁명세력이 주축이 되어 독립국가 건설이 달성될 것으로 믿는다.”
 
  ‘대공보’기자는 다시 박헌영과 공산당에 대하여 물었다.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에 대한 벽보가 여러 곳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박헌영씨는 어떤 인물이며, 공산당세력은 현재 어느 정도인가?”
 
  송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크게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인물로 안다. 현재의 조선공산당 세력도 보잘것없다. 출옥한 극소수의 공산분자를 중심으로 철모르는 젊은이들이 부화뇌동해서 만든 것이 조선공산당이다.”
 
  자신의 정치적 구상과 활동목표를 묻는 질문에는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빨리 귀국할 것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국민은 하루바삐 중국에 있는 망명정부가 환국하기를 바라고 있다. 임시정부의 혁명원로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서 민주주의 신생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것이 나의 정치구상이다.”
 
  그러고는 ‘동아일보’ 등 언론기관의 부활이 시급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건전한 신문과 방송국만 우리 수중에 있다면 공산주의를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송진우는 또 이튿날에는 프랑스의 공산계 신문 기자를 만났다.52)
 
  송진우는 이때에 만난 ‘대공보’기자편에 김구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 같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국무원 비서장이었던 조경한(趙擎韓)은 이때에 송진우가 보낸 편지에는 국내 사정이 “정확 치밀하게”적혀 있었다고 회고했다.53)
 
 
  長文의 聲明書로 人民共和國성토
 
  국민대회준비회가 결성된 이튿날인 9월 8일에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은 발기인 명의로 여운형을 포함한 건준과 인민공화국 주동자들을 격렬히 매도하는 ‘결의’와 ‘성명서’를 발표했다. 발기인 명단에는 무려 648명에 이르는 우익 인사들의 이름이 망라되어 있는데, 전날 국민대회준비회 결성을 주도한 송진우, 김성수, 서상일, 김준연 등의 이름은 빠져 있다. 이들은 아직 한민당 발기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의’는 “우리 독립운동의 결정체요 현하 국제적으로 승인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이외에 소위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은 그 어떤 종류를 불문하고 이것을 단호히 배격함”이라고 하여 인민공화국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장문의 ‘성명서’는 크게 4개항에 걸쳐서 한민당의 입장을 천명했다. 제1항은 국내적으로 사상을 통일하고 결속을 공고히 하여 돌아오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맞이하고, 이 정부로 하여금 하루바삐 4국공동관리의 군정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독립정부가 되도록 지지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미군과 소련군에 의한 한반도 분할점령을 단순히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잠정적 조처로만 생각한 안이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54) 제2항과 제3항에서는 건준의 여러 가지 실책과 분열상을 구체적으로 들어 비판했다. 제4항은 인민공화국 선포의 부당성에 대한 규탄이었다.
 
  “그들은 이제 반역적인 소위 인민대회란 것을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정부란 것을 조직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가소롭다 하기에는 너무도 사태가 중대하다. 출석도 않고 동의도 않은 국내 지명인사의 이름을 도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해외 우리 정부의 엄연한 주석, 부주석, 영수되는 제영웅의 이름들을 자기의 어깨에다 같이 놓아 모모위원 운운한 것은 인심을 현혹하고 질서를 교란한 죄, 실로 만사(萬死: 아무리 하여도 목숨을 건질 수 없음)에 해당한다. …”
 
  이때는 아직 인민공화국의 각료명단이 발표되기 전이었으므로, 위와 같은 규탄은 이승만과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나 김성수, 조만식, 김병로 등 국내인사들의 이름이 인민위원명단에 포함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좌익인사들이 중경임시정부를 우리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데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반박했다.
 
  “오호라 사도(邪徒)여, 그대들은 현 대한임시정부의 요인이 기미독립운동 당시의 임시정부의 요인들이었으며, 그 뒤 상해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발발 후 중국국민당정부와 미국정부의 지지를 받아 중경, 워싱턴, 사이판, 오키나와 등지를 전전하여 지금에 이른 사실을 모르느냐? 동 정부가 카이로회담의 3거두로부터 승인되고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그대들은 왜 일부러 은폐하려 하는가?”
 
  임시정부가 사이판과 오키나와 등지를 전전하고 카이로회담의 3거두로부터 승인되었다는 말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대한 한민당의 이러한 과장된 선전은 일반국민들로 하여금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과 기대를 실제 이상으로 크게 갖게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좌우대립의 치열한 논쟁점이 되었다.
 
 
  呂運亨의 親日行爲를 집중매도
 
  ‘성명서’는 마지막으로 여운형 등이 지난 날 다음과 같은 친일행동을 했다고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저명인사의 이름을 빌려다가 자기 위세를 보이려는 도배야. 일찍이 그대들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총독관저에서 합법운동을 일으키려다 잠꼬대라고 웃음을 샀던 도배이며, 해운대 온천에서 일인 마나베(眞鍋) 아무개와 조선의 라우렐(Jose P. Laurel)이 될 것을 꿈꾸던 도배이며, 일본의 압박이 소멸되자 정무총감, 경기도 경찰부장으로부터 치안유지 협력의 위촉을 받고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나선 일본제국의 주구들이다.”55)
 
  이러한 주장은 여운형 그룹이 친일행위자들임을 역설한 것이었다. 한민당의 주장에 따르면, 여운형은 1944년 2월쯤에 고이소 총독을 통하여 흥아동맹(興亞同盟)이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하려고 13도 대표 한 사람씩을 뽑아 총독관저에서 성대한 만찬회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경기도의 공진항(孔鎭恒), 함경북도의 김기도(金基道), 전라남도의 고경흠(高景欽) 등 여남은 명이었는데, 이 일을 주선한 사람이 고이소의 개인비서인 마나베였다. 그러나 이 일은 본국에 다녀온 다나카(田中) 정무총감의 단호한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또한 여운형은 일본의 어용학자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와 상통하여 해운대 온천 등지에서 이른바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을 일으키기로 한 사실이 당시의 ‘경성일보(京城日報)’에 보도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성명서’는 끝으로 인민공화국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국민들에게 자기들이 벌이는 ‘민족적 일대운동’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56)
 
  이 ‘성명서’에서 눈에 띄는 것은 공격의 주된 대상으로 여운형 그룹을 지목하고 있는 점이다. 인민공화국을 결성한 것도 건준의 실패에 따른 “반역적인”기만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들의 지난날의 친일행적을 들면서 ‘일본제국의 주구들’이라고 극언했다. 이에 비하여 정작 인민공화국 수립을 주도한 박헌영이나 재건파공산당에 대해서는 ‘성명서’는 지목하여 비난하지 않았다. 인민공화국의 수립이 박헌영 그룹의 우격다짐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한민당으로서는 다분히 정략적인 고려를 한 것 같다.
 
 
  共産黨 내부에서도 呂運亨의 親日行爲 문제 삼아
 
  여운형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공산당 내부에서도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 무렵에 작성된 한 문건은 일본이 중국침략전쟁을 개시한 때부터 8·15 광복까지가 조선 혁명자에게는 “일제와의 투쟁의식상의 시험기”였는데, 이 기간에 여운형은 “일제와의 투쟁의식이 연약하였고, 그의 태도는 정확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1931년 이래의 여운형의 행적을 그 실례로 들었다. 첫째, 1931년에 대전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할 때에 적의 상장을 타고 형기를 마치기 전에 가출옥한 것, 둘째 출옥하자 즉시 조선중앙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이 되어 조선총독부와의 왕래가 빈번했던 것, 셋째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로 일본 내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는 ‘아세아협회(亞細亞協會)’특무기관 인물들과 접촉이 빈번했던 것, 넷째 독-소전쟁과 태평양전쟁이 개시된 뒤 공개적으로 일본 도쿄의 야마토주쿠(大和塾)에 가 있었고, 학도지원병 권고문을 발표한 것, 다섯째 조선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로 감옥에 있는 사회주의자를 전향시켜 석방하는 운동을 감행하여 투쟁의식이 미약한 혁명자를 타락적 경향에 빠지게 한 것(보기 김태준(金台俊)) 등을 들었다. 이 문건은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상에 말한 여러 가지 사실에 비추어 볼 때에 여씨는 신조선건설에 참가할 지도인물의 자격을 도저히 언급할 수 없을까 하며, 특히 친일분자의 소멸을 당면적 정치투쟁 구호로 (내세우고 있는) 우리로서 아름답지 못한 여씨의 명단을 신정권 지도인물로 제출하게 된다면 그는 반동진영에 구실만 줄 뿐 아니라 친일분자 소멸투쟁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인가 한다.…”57)
 
  이 문건이 공산당 내부의 어느 그룹에 의하여 작성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문제제기가 당내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논의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呂運亨의 친일행위를 열거하면서 그가 지도인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共産黨의 내부문건.
 
  4. 사흘 만에 취소된 總督府存置計劃
 
  하지 사령관이 탄 캐톡틴 호(USS Catoctin)를 비롯한 스물한 척의 군함에 분승한 제24군단 장병들은 9월 5일에 태풍 속에 오키나와를 출발하여 9월 8일 새벽에 인천항에 입항했다. 상륙일은 7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태풍 때문에 하루가 지연된 것이었다. 이때에 당돌한 일이 벌어졌다. 여운형이 파견한 백상규, 여운홍(呂運弘), 조한용(趙漢用) 세사람이 캐톡틴 호 함상에 올라와서 하지 장군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 백상규는 미국의 명문 브라운대학교(Brown University) 졸업생이었고,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오하이오주의 우스터대학(College of Wooster) 졸업생이었다. 조한용은 여운형의 가장 가까운 측근의 한 사람이었다.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의 일본인들이나 한국인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하지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지는 이들을 만나기를 거부했다. 대신에 제24군단 참모장 가빈(Crump Garvin) 준장이 세 사람을 만났다. 세 사람은 가빈 준장에게 여운형의 편지를 전했다. 이만규는 여운형의 편지 내용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대표하여 하지 사령관과 연합국장병에게 감사의 뜻을 표명하고 “인민공화국은 조선 전 민족, 해내 해외의 각계각층의 대표를 망라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선출된 인민위원 50명에 의하여 그 지도부를 구성한 조선민족의 통일적 공화국”임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적었다.58) 그러나 여운홍과 조한용은 뒷날 자신들은 9월 5일부터 사흘 동안 바다 위에서 지냈으므로 인민공화국이 선포된 사실을 몰랐다고 술회했다. 조한용에 따르면, 가빈 참모장은 소련군의 동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상황, 발전소의 현황, 건준의 성격 등에 대하여 자세히 물었고, 자신들은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나 건준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는 가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인민공화국의 성립에 대하여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59)
 
 
  呂運亨이 파견한 세 사람의 特使
 
  미군 측의 정보기록도 비슷하게 기술했다. ‘G-2정보일지(G-2 Periodic Report)’는 세 사람은 임시한국위원회(the Provisional Korean Commission)의 대표라고 말했다고 했다. 세 사람은 건준을 그렇게 간략하게 표기한 것이었다.60) 세 사람은 미군 참모들에게 망명 한국정부 가운데 어느 것을 승인해야 될 것인지 어떤지를 묻고, 자기들은 미군정부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미군정부와 한국민중 사이에서 연락 역할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세 사람은 또 미군 참모들에게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한국인 17명과 “친일파” 14명의 이름이 적힌 명부를 제출했는데, 그것은 여운형과 그의 측근들이 그토록 모험적으로 하지를 면담하려고 기도한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의심하게 한다. “믿을 수 있는 한국인” 명부에는 여운형 다음으로 여운형의 다른 측근들인 이만규, 황진남(黃鎭南), 이임수(李林洙)와 함께 자신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고, 안재홍, 김성수, 조만식, 김창숙, 장덕수, 구자옥 등 우파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공산당인사들의 이름은 빠져 있다. 그리고 “친일파” 명부에는 윤치호(尹致昊), 박중양(朴重陽), 한상룡(韓相龍) 등 일본인들로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들과 김연수(金秊洙), 박흥식(朴興植) 등 기업인, 신흥우(申興雨), 양주삼(梁柱三) 등 기독교계 지도자, 조선총독부 고위관리 등이 열거되어 있었다.61)
 
  그러나 세 사람이 전달한 여운형의 편지와 그들이 제출한 두 가지 명부는 미국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결국 이 생뚱맞은 여운형의 특사 해프닝은 “그들의 놀라운 기회주의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새로운 미국 체제에 영합하려는 우스꽝스러운 시도였다”62)고 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는 뒷날 기자들에게 백상규는 이때에 자기에게 새 정부의 재무장관 자리를 원했다고 말했다.63)
 
  인천부두에서는 상륙하는 미군 병사들을 환영하려고 몰려나온 한국인들과 검은 외투를 입고 무장을 갖춘 일본 특별경비대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일본경찰의 발포로 두 사람이 즉사하고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사망자는 인천지역 노동조합 위원장 권평근(權平根)과 보안대원 이석우(李錫雨)였다.64) 하지는 일본군 사령관 고즈키에게 미군상륙 때의 인천항의 경비를 지시하면서 미군의 상륙작전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한국인들의 환영시위를 금지하게 했었다.65) 그러나 이 뜻밖의 사고는 일반국민들의 미군 환영 분위기를 급격히 냉각시켰다.
 
  이튿날 기차와 트럭으로 서울로 이송된 미군이 서울역에서 총독부까지 열을 지어 행진하는 동안 시가지는 조용했다. 승리의 시위도, 환영하는 인파도 없었다. 중심가에는 일본 경찰이 늘어서 있어서 한국인들은 환영을 표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늘에는 미군기가 굉음을 내면서 시위비행을 했다.65)
 
 
  “人民共和國 만드느라 너무나 바빠서…”
 
9월 9일에 朝鮮總督府 제1회의실에서 거행된 日本軍의 降服文書調印式.
  인천부두에 미 제24군단 병사들이 상륙하고 있는 시각인 9월 8일 오후 3시부터 계동 홍증식(洪增植)의 집에서는 공산주의 운동자 60여 명이 모여 열성자대회를 열었다.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된 안기성(安基成)이 주선한 모임이었다. 그것은 장안파공산당과 재건파공산당의 통합을 위하여 모인 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박헌영도 재건파공산당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박헌영은 인사말에서 “나는 인민공화국을 만들어내기에 너무나 바빠서 동무들과의 회견이 오늘까지 늦어져서 미안하다”고 말하고,67) 인민공화국의 설립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면의 가장 긴급히 필요한 문제는 조선 좌익의 통일문제의 해결이다. … 이러한 형편에 지주와 대부르주아지들의 반동적, 반민주주의적 운동은 권모술책을 가지고 좌익 내부에 그 손을 뻗쳐 오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중요 모멘트에 당하야 만일 좌익이 분열상태로 통일되지 못하는 날에는 그것은 반동세력의 진영을 강화함인 동시에 좌익의 무력(無力)을 폭로하며 전 조선의 인민을 위하야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선 행동의 통일을 위한 콤미씨‘협의회’가 성립되었고, 이 콤미씨는 최대한도의 포용력을 발휘하야 각 단체, 각 파벌, 각 계급에 접근하야 신교(信敎)와 성별을 초월하고서 가장 넓은 범위의 통일민족전선을 결성하기에 노력한 결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건설하기에 노력하였다. 또한 인민중앙위원회를 선거 발표한 것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 좌익통일의 큰 성공인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68)
 
  이러한 말은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의 조직을 서둔 큰 이유가 좌익진영의 통괄의 필요성 때문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것은 장안파공산당에 대한 압박이었다.
 
  마지막으로 박헌영은 재건되는 조선공산당은 “지하운동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그룹들과 출감한 전투적 동지들이 중심이 되고” “과거의 파벌두령이나 운동을 휴식한 분자는 아무리 명성이 높다 해도 이번 중앙에는 들어올 자격이 없다”라고 단호하게 못박았다.69)
 
  장안파공산당 인사들의 드센 반발이 있었으나 회의는 재건위원회 쪽의 의도대로 진행되어, 장안파공산당 일부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1) 당 건설에 대한 박헌영의 견해를 지지하고, (2) 당중앙의 선출에서 노동자 농민의 기초조직을 가진 공산주의 각 그룹과 연락하여 협의하되, 그 연락은 박헌영에게 일임하며, (3) 당이 건설된 뒤 당의 기본강령과 전략전술을 규정하기 위해 빠른 시일 안에 당대회를 소집하도록 힘쓰며, 당면 과업의 수행을 위한 「행동강령」을 속히 작성하여 발표한다는 것이었다.70) 이영, 정백, 최익한, 이청원(李淸源) 등 장안파 인사들은 이 열성자대회의 불법성을 들어 결의안채택을 반대했다. 그러나 열성자대회를 자신들의 의사대로 강행한 재건위원회는 9월 11일에 조선공산당이 통일 재건되었다고 발표했다.71)
 
  공산당의 열성자대회가 열리고 있는 시각에 같은 계동의 건준본부 회의실에서는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참석한 위원은 37명이었다. 이강국의 개회선언에 이어 임시집행부 선거에 들어가서 의장에 이만규, 서기에 정태식(鄭泰植)을 선출했다. 경과보고는 정태식이 했는데, 그는 이틀 전의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건준의 조직을 최대한 동원하고, 또 해외의 여러 동지와도 힘을 다하여 연락한 결과 “다수의 해외대표와 해외장병단 ○○명의 참가를 얻어”인민대표대회가 열렸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가장 중요한 사안은 인민공화국의 부서문제였다. 각료를 뜻하는 각 부서의 책임위원 선거는 위원장 여운형과 부위원장 허헌에게 위임하고, 1주일 뒤에 발표하기로 했다. 그리고 각 기관 접수 임시위원 선출은 여운형, 허헌 및 치안부장 최용달 세 사람에게 일임했다. 이어 ‘선언’과 ‘정강’을 발표해야 한다는 이강국의 동의가 채택되어 이강국, 박문규, 정태식 세 사람을 기초위원으로 지명했다.72)
 
 
  “英語를 公用語로 한다”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반도호텔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조선호텔을 고급장교 숙소로 정했다. 일본군의 항복문서조인식은 9월 9일 오후 3시45분에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거행되었다. 일본쪽에서는 제17방면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 진해경비사령관 야마구치 기사부로(山口儀三郞)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미군을 대표해서 하지 중장과 킨케이드(Thomas C. Kinkaid) 해군대장이 수락서명을 했다. 서명식은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후 4시를 기하여 남한 전 지역에서 일장기의 게양이 금지되고 사람 눈에 뜨이는 곳에 있는 일장기 및 일장기 표지는 제거하게 했다. 오후 4시30분이 되자 총독부 정문 앞에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었다.73)
 
  항복조인식이 끝나자 ‘미국태평양육군총사령관포고 제1호’, ‘제2호’, ‘제3호’가 함께 공포되었다. 흔히 ‘맥아더 포고’로 통칭되는 ‘포고 제1호’는 먼저 “일본국 천황과 정부, 그리고 대본영(大本營)을 대표하여 서명된 항복문서의 조항에 따라 본관 휘하의 전승군은 오늘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 지역을 점령한다. 한국국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되게 한다는 결의를 유념하면서 점령의 목적은 항복문서의 이행과 한국인들의 개인 및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임을 확인한다.…”고 전제하고, “본관은 본관에게 부여된 미국태평양육군 최고사령관의 권한으로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지역과 그곳 주민에게 군정을 수립한다”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6개조로 된 점령 조건을 발표했다. 그것은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 및 이 지역의 주민에 대한 행정권은 당분간 자신의 권한하에서 시행하고(제1조), 정부, 공공단체 및 명예단체의 모든 직원과 고용원, 공공복지 및 공중위생을 포함한 모든 공공시설 및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임원과 고용원, 그리고 다른 중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별명이 없는 한 종래의 직무에 종사하고, 또한 일체의 기록과 재산을 보관하는 데 힘써야 하며(제2조), 점령군에 대한 적대행위나 치안 교란행위를 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고(제3조), 주민의 소유권은 존중된다(제4조)고 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군정기간 중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하고, 영어문장과 한국어 또는 일본어 문장 사이에 해석이나 정의에 불명료한 점이나 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영어문장을 기본으로 한다고 한 조항(제5조)이었다. ‘포고 제2호’는 범죄자 처벌에 관한 내용이었고, ‘포고 제3호’는 통화(通貨)에 관한 것이었다.74) 포고문은 전국의 주요 거리에 나붙었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에 군정을 실시한다고 선포한 이 ‘맥아더 포고’는,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는 규정이 단적으로 말해 주듯이, 미국식 법치개념에 입각한 법률적인 내용이었으나, 광복의 흥분 속에서 당장 독립정부가 수립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위압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라고 하면서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한껏 고무한 치스차코프(Ivan H. Chistiakov) 소련군 사령관의 정치적인 포고문 내용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실제로 북한당국은 두 포고문을 대비하면서 미국을 비방하는 자료로 이용했다.75)
 
 
  總督은 日本의 天皇과 같은 地位에 남도록
 
9월 12일에 초대 軍政長官으로 임명된 미제24군단 제7사단장 아널드 소장.
  ‘맥아더 포고’의 발표에 이어 하지도 한국인에게 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일본군의 항복조건을 실시하기 위하여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한국의 경제상태를 향상시키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그 밖에 국제법에 의하여 점령군에게 주어진 제의무를 이행한다”고 선포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해방국이 아니라 패전국에 대한 국제법상의 권리를 강조한 것이었다. 하지는 이어 “나의 지휘 아래 있는 여러분은 연합국최고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발하는 나의 제명령을 엄숙히 지키라”고 말했다. 그것을 지키는 이상은 “공포의 염”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그러나 만일 명령을 지키지 않거나 미국 군인을 해치거나 혼란을 야기하는 일이 있으면 “즉시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고는 항복조건을 이행하기 위하여 우선 “현행정부의 기구를 이용할 필요”가 있으므로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관리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말했다.76) 하지의 이러한 성명은 ‘맥아더 포고 제1호’를 설명한 것이었으나, 그 문면은 훨씬 더 위압적이었다.
 
  하지는 이어 기자회견을 갖고, 행정의 편의와 질서 있는 정부 이양을 위해 아베 총독 이하 총독부의 일본 관리들을 당분간 유임시켰다고 발표했다. 제24군단 참모장 가빈 장군의 설명으로는, 아베 총독의 지위는 일본에서의 천황의 그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77)
 
  일본인 관리들의 유임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격분했다. 당연히 항의시위가 잇달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날 저녁에 서울 성북경찰서를 접수한 연희전문학생 안기창(安其昌), 이인제(李仁濟) 두 학도대원이 일본경찰의 발포로 즉사하고 세 사람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튿날에도 또 용산지구에서 일본경찰의 발포로 동양의전 학생 학도대원 신성문(申成文)이 숨졌다.78)
 
  일본인 관리의 유임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격렬한 반응은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자세히 보도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우려한 미국정부는 재빨리 하지의 명령을 취소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9월 10일에 3부조정위원회(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와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거쳐 9월 11일에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에게 “정치적인 이유에서 귀관은 아베 총독, 총독부의 각 국장, 각도의 도지사와 경찰 책임자를 즉각 해임할 것을 권고한다. 나아가 귀관은 그 밖의 일본인 및 대일협력 한국인 관리들의 해임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79)라고 훈령했다.
 
  이 훈령에 따라 하지는 9월 12일에 아베 노부유키 총독과 니시히로 다다오(西廣忠雄) 경무국장을 해임했다. 그리고 9월 14일에는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를 비롯한 총독부 국장들을 모두 해임했다.80) 하지는 9월 12일부로 제24군단 제7사단장 아널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을 군정장관으로 임명하고 해임된 아베 총독의 직무는 군정장관이 수행한다고 발표했다. 경무국장으로는 미군헌병대장 쉭(Lawrence Schik) 준장을 새로 임명했다.81) 일본총독의 해임으로 한국인들의 미군 정책에 대한 비판은 누그러졌다.
 
 
  李承晩은 트루먼에게 感謝電報 보내
 
  그러나 그것으로 한국의 상황에 대한 미국정부의 우려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애치슨(Dean Acheson) 국무차관은 9월 14일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하지 사령관이 총독부 관리들을 잠정적으로 유임시킨 것은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바람직스럽지 못한 반응을 일으켰다면서 대통령이 정부의 의지를 밝히는 공식 성명을 발표할 것을 건의했다. 트루먼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9월 18일에 한국에 관한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트루먼의 성명은 한국의 옛 수도 서울에서 일본군이 항복한 것은 “자유를 사랑하는 영웅적 국민의 해방을 뜻하는 것”이라고 천명한 다음, 그러나 “한국인들 스스로 자유롭고 독립된 민족으로서의 책임과 기능을 감당하고 한국의 경제적 및 정치적 생활에 대한 일본 지배의 모든 잔재를 제거하는 일은 응당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고, “목표는 명백히 보이지만 그것을 조속히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 국민들과 연합국의 공동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82)
 
  귀국을 위하여 미 국무부를 상대로 여권 발급교섭을 벌이고 있던 이승만은 이 성명을 보자 그날로 트루먼에게 전보를 쳤다.
 
  “경애하는 대통령 각하, 저는 우리나라와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오늘 백악관이 발표한 성명을 접하고 전 한국인이 느꼈을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안도를 무엇이라고 각하에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경애하는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각하의 의지를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각하의 이름과 각하의 성실성은 한국인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83)
 
  이승만은 8월 15일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승축하 전보를 친 지 한 달 만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백악관을 향하여, 또다시 이처럼 정중한 감사 전보를 친 것이다.⊙
 

  1) 『每日新報』1945년 9월 1일자, 「B24삐라撒布」; 森田芳夫-長田かな子 編, 『朝鮮終戰の記錄 資料篇(一)』, 巖南堂書店, 1979, p. 278; 서울新聞社, 『駐韓美軍30年』, 杏林出版社, 1979, p. 484. 2) 『駐韓美軍史(1)』(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이하 HUSAFIK 1), 돌베게影印版, 1988, p. 83.
 
  3) 『駐韓美軍史(1)』(HUSAFIK 1), p. 83; 千寬宇, 「史料로 본 解放十年略史(4)」, 『한국일보』 1955년 8월 18일자; 서울新聞社, 앞의 책, p. 485. 4) 鄭秉峻, 「남한진주를 전후한 주한미군의 對韓정보와 초기 점령정책의 수립」, 『史學硏究』제51호, 韓國史學會, 1996, p. 141. 5) 『駐韓美軍史(1)』(HUSAFIK 1), pp. 72~73, pp. 84~85. 6) 鄭秉峻, 앞의 글, p. 138;『JANIS 75』의 전문은 李吉相 編,, 『解放前後史資料集(Ⅰ) 美軍政準備資料』, 原主文化社, 1992, pp. 264~295에 수록되어 있다. 7) Steintorf to Byrnes, Aug. 26, 1945,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Ⅵ,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9, p. 1041.
 
  8) C. L. Hoag,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War Policy and the First Year of Occupation 1941~1946 (manuscript), Department of the Army, 1970, pp. 102~103, 번역문은 C. L. 호그 지음, 신복룡-김원덕 옮김, 『한국분단보고서(상)』, 풀빛, 1992, p. 97. 9) C. L. Hoag, op. cit., pp. 104~105, C. L. 호그 지음, 신복룡-김원덕 옮김, 앞의 책, pp. 98~99. 10) 『駐韓美軍史(1)』(HUSAFIK 1), p. 78. 11) 李仁, 「解放前後片片錄」, 『愛山餘滴 第3輯』, 世文社, 1970, pp. 271~272. 12) 『每日新報』 1945년 9월 4일자, 「聯合軍의入京歡迎」;『資料·大韓民國史』, 國史編纂委員會, 1968, pp. 50~51. 13) 『每日新報』 1945년 9월 9일자, 「大韓民國臨時政府支持의 韓國民主黨을 結成」; 許政, 『내일을 위한 證言』, 샘터, 1979, p. 103.
 
  14) 『每日新報』 1945년 9월 9일자, 「大韓民國臨時政府支持의 韓國民主黨을 結成」. 15) 愼道晟, 「轉換期의 內幕(37) 韓民黨創黨⑤」, 『朝鮮日報』1981년 2월 28일자. 16) 許政, 앞의 책, p. 102. 17) 沈之淵, 『韓國民主黨硏究 Ⅰ』, 풀빛, 1982, p. 63. 18) 李革 編, 『愛國삐라全集 第一輯』, 祖國文化社, 1946, pp. 51~52. 19) 朴馹遠, 『南勞黨總批判(上卷)』, 極東情報社, 1948, p. 32. 20) 李榮根, 「八·一五解放後のソウル ─ 政界·政局中心に回顧する(3)」, 『統一朝鮮新聞』, 1970年 9月 10日字, 번역문은 『月刊朝鮮』, 1990년 9월호, p. 430. 21) 심지연, 『허헌 연구』, 역사비평사, 1994, pp. 84~91. 22) 『每日新報』 1945년 9월 4일자, 「委員會全體大會」. 23) 『每日新報』 1945년 9월 4일자, 「大同合流를 目標로 朝鮮國民黨結成」.
 
  24) 李萬珪, 『呂運亨先生鬪爭史』, 民主文化社, 1946, pp. 221~222. 25) 李庭植, 「呂運亨과 建國準備委員會」, 『歷史學報』, 第134-135合輯, 1992年, pp. 70~71. 26) 『每日新報』 1945년 9월 7일자, 「各部署도新組織」. 27) 李萬珪, 앞의 책, p. 185. 28) 安在鴻, 「八·一五 당시의 우리 政界」, 『새한민보』 1949. 9, 安在鴻選集刊行委員會 編, 『民世安在鴻選集(2)』, 知識産業社, 1983, p. 474. 29) 『朝鮮週報』創刊號(1945. 10. 15), 「新朝鮮建設의 大道」, 夢陽呂運亨先生全集發刊委員會 編,『夢陽呂運亨全集(1)』, 한울, 1991, pp. 224~225. 30) 民主主義民族戰線 編, 『朝鮮解放一年史(朝鮮解放年報)』, 文友印書館, 1946, p. 85. 31) 李榮根, 앞의 글, 『統一朝鮮新聞』 1970年 9月 10日字, 번역문은 『月刊朝鮮』1990년 9월호, p. 432. 32) 李東華 證言, 이정식,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p. 534. 33) 『每日新報』 1945년 9월 7일자, 「國號는 朝鮮人民共和國」. 34) 金綴洙, 「解放後動作槪要記」, 『遲耘 金綴洙,』, 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1999, p. 35.
 
  35) 李萬珪, 앞의 책, pp. 259~260; 『朝鮮解放一年史』, p. 86. 36) 李萬珪, 위의 책, p. 260. 37) 『每日新報』1945년 9월 7일자, 「國號는 朝鮮人民共和國」. 38) 『解放日報』 1945년 10월 18일자, 「社說: 제2차 全國代表者大會의 政治的方向에 대한 提議」. 39) 이정식, 위의 책, pp. 547~548; 朴馹遠은 중앙위원 가운데 29명, 후보위원 가운데 16명이 共産黨 출신이라고 기술했다(朴馹遠, 앞의 책, p. 34.) 40) 이정식, 위의 책, p. 546. 41) 李榮根, 앞의 글, 『統一朝鮮新聞』 1970年 9月 10日字, 번역문은 『月刊朝鮮』 1990년 9월호, p. 432.
 
  42) 呂運亨, 「朝鮮人民共和國發足」, 『白民』 創刊號, 1945. 12, p. 13; 李萬珪, 앞의 책, pp. 261~262. 43) 呂運弘, 『夢陽 呂運亨』, 靑廈閣, 1967, p. 159. 44) 『駐韓美軍史(1)』(HUSAFIK 1), pp. 237~241; 山名酒喜男, 「終戰前後に於ける朝鮮事情槪要」, 森田芳夫-長田かな子 編, 앞의 책, p. 27. 45) 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1967, p. 270. 46) 森田芳夫-長田かな子 編,, 앞의 책, pp. 28~30. 47) 東亞日報社, 『東亞日報社史(一)』, 東亞日報社, 1975, pp. 393~394. 48) 『每日新報』 1945년 9월 9일자, 「全國各層을 網羅하야 國民大會召集準備」.
 
  49) 金俊淵, 「國民大會의 發端」, 『獨立路線(第六版)』, 時事時報社出版局, 1959, p. 13. 50) 『每日新報』 1945년 9월 9일자, 「全國各層을 網羅하야 國民大會召集準備」. 51) 薛義植, 『解放以前』, 東亞日報社, 1947, pp. 15~16. 52) 古下先生傳記編纂委員會 編, 『古下宋鎭禹先生傳』, 東亞日報社出版局, 1965, pp. 311~316; 李相敦, 「눈부신 政治工作, 쓰러진 巨木」, 『新東亞』 1977년 8월호, pp. 124~125. 53) 趙擎韓, 『白岡回顧錄: 國外篇』, 韓國宗敎協議會, 1979, p. 367.
 
  54) 許政, 앞의 책, p. 103. 55) 李革 編, 앞의 책, pp. 46~50. 56) 韓國民主黨宣傳部, 『韓國民主黨小史』, 1945, 沈之淵, 『韓國現代政黨論(韓國民主黨硏究 Ⅱ)』, 創作과批評社, 1984, pp. 272~273.
 
  57) 「呂運亨氏에 關하야」, 『朝鮮共産黨文件資料集(1945~46)』,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pp. 227~228. 58) 李萬珪, 앞의 책, pp. 237~238. 59) 서울新聞社, 앞의 책, p. 32. 60) 呂運弘, 『夢陽 呂運亨』, 靑廈閣, 1967, p. 165.
 
  61) G-2 Periodic Report, No. 1(1945.9.9), 『駐韓美軍情報日誌 (1)』, 翰林大學아시아文化硏究所, 1988, pp. 2~3. 62)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Ⅰ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p. 140. 63) Michael C. Sandusky, America’s Parallel, Old Dominion Press, 1983, p. 272. 64) 『每日新報』 1945년 9월 12일자, 「仁川의 事件」, 「兩氏의 市民葬」. 65) 『駐韓美軍史(1)』(HUSAFIK 1), p. 242; Bruce Cumings, op. cit., pp. 137~138. 66) 위의 책, p. 243. 67) 鄭禧泳, 「朴憲永同志에게 書簡」, 『朝鮮共産黨文件資料集(1945~46)』, p. 90. 68) 『해방일보』 1945년 9월 25일자, 「熱誠者大會의 經過 ─ 分裂者의 行動을 批判하자」. 69) 위와 같음. 70) 『해방일보』 1945년 10월 18일자, 「我田引水格의 排擊 ─ 熱誠者大會의 經過報告 (下)」. 71) 『해방일보』 1945년 9월 19일자, 「朝鮮共産黨은 마침내 統一再建되었다」.
 
  72) 『每日新報』 1945년 9월 9일자, 「人民共和國委員會開催의 經路」; 李萬珪, 앞의 책, p. 203. 73) 森田芳夫, 앞의 책, pp. 279~282; C. L. Hoag, op. cit., p. 140. 74) “Proclamation No.1 by 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 FRUS 1945, vol. Ⅵ, pp. 1043~1044; 『每日新報』 1945년 9월 10일자, 「美軍總司令官佈告」. 75) 朝鮮中央通信社, 『朝鮮中央年鑑 1950年版』, 朝鮮中央通信社, 1950, pp. 19~22; 「북조선로동당 제2차 전당대회 회의록」, 『朝鮮勞動黨資料集(第一輯)』, 國土統一院, 1980, pp. 129~130.
 
  76) 『每日新報』 1945년 9월 10일자 「號外」, 「핫지將軍의 聲明」. 77) 『駐韓美軍史(1)』(HUSAFIK 1), pp. 252~253. 78) 『每日新報』 1945년 9월 12일자, 「無道한 日本警官隊, 學徒隊員들을 殺害」. 79) “Memorandum by the Acting Chairman of 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ept.10, 1945, FRUS 1945, vol. Ⅵ, p. 1044. 80) 『駐韓美軍史(1)』(HUSAFIK 1), p. 255. 81) 『每日新報』 1945년 9월 13일자, 「朝鮮軍政長官 아놀드少將」. 82) “Draft Statement Prepared for President Truman,” Sept.18, 1945, FRUS 1945, vol. Ⅵ, p. 1048. 83) Rhee to Truman, Sept.18, 1945, FRUS 1945, vol. Ⅵ, p.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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