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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72)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原子爆彈 투하와 소련의 對日參戰
-1945年 8月(上)-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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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다시 연재를 시작하면서
월간조선은 이번 호부터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를 다시 연재합니다.
2001년 8월호부터 시작된 <李承晩과 金九>는 한국 근대사 최대의 거목 두 사람을 비교평전의 형식으로 다루었다는 점과,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을 새로이 발굴된 사료들에 기초해 객관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관련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필자는 2008년 2월에 2부 연재를 마친 후 지난 2년 동안 새로운 사료를 발굴, 연구하는 데 전념해 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번호부터 시작되는 3부(72~100회)에서는 8ㆍ15 광복에서부터 해방정국, 건국, 백범 암살을 거쳐 6ㆍ25 전야까지를 다룰 예정입니다.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에는 소련이 서둘러 對日戰에 참전함으로써 6년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일본의 만주침략부터 계산하면 아시아대륙에서는 15년 전쟁이 끝난 것이었다.
 
  대일참전 직전에 발표된 소련공산당의 한국 국내정세 보고서는 李承晩에 대해 국제회의에서 “한국을 소련의 영향권으로 집어 넣는” 안을 결정했다고 비난 성명을 냈던 “반소련 성향으로 유명한 인물”로, 金九에 대해서는 “중국국민당의 반동분자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고, 蔣介石정부의 보조금을 받고 있는” 반동적인 인물로 평가했다.
 
  李承晩은 8월 3일에 미육군참모총장 마셜에게 마닐라로 가서 단파방송을 통하여 국내동포들의 봉기를 선동하겠다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8월 8일에는 또 같은 내용의 편지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냈다.
 
  金九는 李靑天, 李範奭과 상의하여 OSS(미전략첩보국) 훈련을 받은 광복군으로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여 국내로 진입시키기로 하고, 이범석을 대장으로 한 광복군 선발대를 OSS요원들과 함께 C-46수송기편으로 국내로 들여보냈다.
 
  金九는 이청천과 함께 李承晩을 통하여 재미동포들에게 독립축하전보를 쳤다. 그것은 李承晩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였다.
 
  金九는 8월 18일에 시안(西安)에서 충칭(重慶)으로 돌아왔다.
 

  1. 20억 달러 투입한 맨해튼 計劃
 
  1945년 8월은 인류가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원자력시대’가 개막된 것이다.1) 그것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들의 해방을 동반했으나, 그와 동시에 냉전구조라는 새로운 국제정치 체제를 창출했다. 8월 11일(미국시각)의 3부조정위원회(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SWNCC) 회의에서 획정된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은 그러한 새로운 국제정치 체제의 가장 비극적인 산물이었다.
 
  原爆開發計劃은 副統領도 몰라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급사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Harry S. Truman)이 극비의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 원자폭탄 개발제조계획)’에 대하여 처음으로 보고를 받은 것은 1945년 4월 25일이었다. ‘맨해튼 계획’은 20억 달러라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여 1942년 8월부터 육군공병단 안에 맨해튼 관구라는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추진하고 있었다. 이날 전쟁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과 ‘맨해튼 계획’ 책임자 그로브스(Leslie R. Groves) 장군이 백악관에서 트루먼에게 수교한 보고서는 “아마도 4개월 이내에 우리는 폭탄 하나로 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인류사상 가장 무서운 무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보고서는 현재로서는 미국이 이 무기를 가진 유일한 나라이지만 이 상태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앞으로 몇 년 안에 이 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나라는 소련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기술적 발전과 비교하여 윤리적 발전이 뒤져 있는 현재의 세계는 앞으로 이 무기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현대문명은 완전히 파괴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보고서는 원자폭탄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일이 미국 외교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원자폭탄의 윤리적 의의와 원자력의 국제관리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던 스팀슨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스팀슨은 원자력의 국제관리는 인류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소련을 참가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따라서 폴란드 문제로 소련과 지금 결렬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소련과의 대결은 원자폭탄의 개발이 성공했을 때에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
 
  트루먼은 스팀슨의 권고를 받아들여 5월 1일에 원자폭탄에 대한 자문위원회인 잠정위원회(Interim Committee)를 창설했다. 그러나 원자폭탄 개발과 소련 문제를 두고 트루먼과 스팀슨 사이에는 중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포커 게임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에 비유한 스팀슨은 소련을 원자력의 국제관리에 참가시키는 문제를 더 중요시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그러한 위력을 갖는 원자폭탄이 극동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시키는 결정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3)
 
 
  韓半島는 소련의 作戰管轄區域으로
 
  트루먼은 6월 18일에 전쟁장관과 해군장관 및 각군 참모총장 등이 참석하는 군수뇌회의를 소집했다. 그것은 임박한 포츠담회담에 대비하여 일본본토 상륙작전을 검토하기 위한 회의였다. 회의에서는 한반도 작전문제도 함께 검토되었다. 회의를 주도한 육군참모총장 마셜(George C. Marshall)은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미군의 규슈(九州)상륙과 함께 소련의 참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시아 대륙의 소탕과 관련하여 우리의 목적은 반드시 소련으로 하여금 만주에 있는 일본군을(그리고 필요하다면 한국에 있는 일본군도) 상대하게 하고, 또한 미 공군력과 얼마쯤의 보급의 지원으로 중국을 강화하여 중국 국내를 소탕하는 데 있다.”
 
  마셜은 현지 육군사령관인 맥아더(Douglas MacArthur)도 소련의 참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4) 그리하여 이날의 미군수뇌회의에서 한반도는 대일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소련 작전관할에 소속될 가능성이 확실해졌다.5) 트루먼의 최대 관심사는 미군병사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문제였다. 1945년 11월 1일로 예정된 규슈 상륙작전(올림픽: Olympic)과 12월 말로 예정된 간토(關東)평야 상륙작전 (코로네트: Coronet)에서 미군의 사상자 수는 6만3000명 내지 19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었다.
 
  트루먼은 포츠담회담의 중요한 과제의 하나는 전쟁수행을 위하여 소련으로부터 필요한 도움을 받는 것이며 그러므로 “포츠담에서의 토론에서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미리 결정해 두어야 할 사안에 대하여 알아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의 참석자들 가운데에는 원자폭탄 개발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입밖에 내지 않는 논의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군 수뇌들은 모두 ‘올림픽’작전을 지지했다. 트루먼은 ‘올림픽’작전을 승인하고 ‘코로네트’작전은 승인을 보류했다.
 
 
 
中國이 얄타密約을 拒否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포츠담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참석한 3巨頭. 왼쪽부터 처칠 영국 수상, 트루먼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수상.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베를린의 교외 포츠담(Potsdam)에서 열린 트루먼, 처칠(Winston S. Churchill), 스탈린(Iosif V. Stalin) 3거두의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있었던 마지막 정상회담이었다. 포츠담회담은 유럽의 전쟁종결에 따른 전후처리 문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폴란드 문제를 비롯한 동유럽처리 문제와 독일처리 문제가 중요의제였다. 그리고 아직 계속되고 있는 태평양전쟁의 종결문제와 그에 관련하여 전개된 트루먼과 스탈린 사이의 암투는 전후 세계의 미-소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처칠은 이 회담을 더 빨리 열 것을 요구했었으나, 트루먼은 원자폭탄 실험 성공이 확실히 전망될 때까지 연기해 왔다. 뉴멕시코주의 앨라모고도(Alamogordo) 사막에서 실시된 역사적인 원자폭탄 실험은 포츠담회담 개최 바로 전날인 7월 16일에 성공했다.
 
  7월 17일에 열린 트루먼과의 첫 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의 대일참전에 대한 얄타밀약에 대해 언급한 다음 소련은 8월 중순까지는 전쟁을 개시할 수 있으나 그 전에 중국과의 교섭을 마치고 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모스크바를 출발하기 직전에 있었던 중국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과의 교섭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중국은 얄타밀약에서 소련의 대일참전 대가로 소련에 제공하기로 한 만주의 철도와 대련(大連), 여순(旅順)에 관한 권익의 보장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스탈린은 미국이 중국에 압력을 행사해 줄 것을 기대했으나, 트루먼은 확약하지 않았다.6)
 
  소련은 6월 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열린 소련공산당 정치국, 정부, 군의 합동회의에서 8월에 만주의 일본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기로 확정해 놓고 있었다. 합동회의는 세 전선에서 동시에 만주의 중앙부로 향하여 침공하는 참모본부의 작전계획안을 채택했다. 회의에서는 군사행동의 작전 범위가 논의되었다. 군사작전의 목적은 얄타밀약에서 약속된 만주, 남 사할린, 쿠릴(지시마: 千島)열도를 점거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한반도 북부의 점거는 일본군의 퇴로를 봉쇄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앞서 소련군 참모본부는 소련군 참모장 바실레프스키(Aleksandr M. Vasillevskii)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소련군 극동총사령부를 창설하고, 필요한 병력과 장비를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하여 이송했다. 그리하여 소련이 만주를 침공할 때까지에는 극동의 소련군은 40개 사단에서 80개 사단으로 배증했다. 반대로 만주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군은 일본 본토 방위작전을 위하여 16개 사단이 본토로 이송되었다.7)
 
 
  原爆 통보받고 스탈린은 反應 없어
 
  트루먼은 7월 18일에 처칠을 만나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음을 알렸다. 미국과 영국은 원자폭탄 개발계획을 공동으로 추진함에 따라 그와 관련된 정보도 공유하고 있었다. 처칠은 이 “지구를 뒤흔들 만한 뉴스”를 듣고 기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 사실을 스탈린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지에 대해 상의했다. 스탈린에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한다면 소련은 당장 전쟁에 참가해 버릴 위험이 예상되었다. 처칠은 원자폭탄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연합군은 이제 병사들의 큰 희생이 따르는 일본 본토상륙 작전이 필요 없게 될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합국은 이제 소련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8)
 
  트루먼은 7월 21일에 8월 1일 이후에는 원자폭탄의 사용이 가능하다는 추가 보고를 받았다. 그러자 그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단호한 태도”로 러시아인들과의 토론에 임했다. 트루먼은 소련의 참전에 대한 확실한 언질을 받기 위해 포츠담에 갔으나, 원자폭탄의 사용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소련참전을 재검토하게 된 것이다. 그는 소련이 대일전을 시작하기 전에 원자폭탄을 사용함으로써 대일전을 종결시키고 싶었다. 한편 영국과 미국의 정보기관과 심지어 맨해튼 계획 참가자들 사이에까지 스파이를 침투시키고 원자폭탄 개발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던 스탈린은 원자폭탄이 실전에 사용할 수 있게 되기 이전에 대일전을 개시해야 했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정부는 1941년 8월에 체결한 소-일 중립조약을 근거로 하여 소련이 연합국과의 전쟁종결 교섭을 알선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고, 일본 정부의 암호전신을 해독하고 있던 미국은 그러한 사실을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포츠담회담에서 한반도에서의 연합군의 작전문제는 7월 24일에 처음 열린 영-미 연합참모본부와 소련 참모본부의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레이히(William D. Leahy) 제독은 소련군 참모장 안토노프(Aleksei I. Antonov) 장군에게 일본에 대한 소련의 작전계획을 물었다. 안토노프는 8월 하순에 작전을 개시할 예정이지만 실제의 날짜는 중국과의 교섭결과에 달렸다고 대답했다. 안토노프는 쿠릴열도의 작전협력 문제,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사이의 통로문제를 논의하다가 갑자기 “한반도에 공격을 가하게 될 소련군에 호응하여 미군이 한반도 해안작전을 전개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마셜은 “그러한 육-해-공 작전은 아직 계획된 일이 없으며, 가까운 장래에도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한반도에 대한 공격은 규슈상륙 뒤에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덧붙였다.9)
 
  이날 저녁에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자폭탄의 실험이 성공한 사실을 능청스러운 방법으로 알렸다. 저녁 7시30분에 회의가 휴식에 들어가자 트루먼은 통역을 대동하지 않고 스탈린에게 다가가 문득 생각난 듯이 “우리는 심상찮은 파괴력을 가진 신무기를 가졌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아무런 흥미도 표명하지 않았다. 적어도 트루먼에게는 그렇게 여겨졌다. 트루먼은 이때의 일을 그의 회고록에서 “소련 수상은 그저 반가운 소식이다. 그것을 일본인들에게 잘 사용하기 바란다고 말했다”라고 적었다.10) 한편 이들의 대화를 몇 걸음 뒤에서 지켜보았던 영국 외상 이든(Anthony Eden)은 스탈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짧게 “고맙다(Thank you)”라고만 말했다고 회고했고,11) 스탈린의 통역은 스탈린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고 증언했다.12)
 
 
 
포츠담宣言을 ‘默殺’한다고

 
  트루먼은 그것이 원자폭탄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스탈린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스탈린은 회의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전화로 내무인민위원 베리아(Lavrenty Beria)를 불러내어 실험에 대한 정보가 있는지 물었다. 베리아는 2주일 전에 실험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현재로서는 정보가 없다고 대답했다. 화가 난 스탈린은 베리아가 허위정보에 번롱되었다면서 질책했다. 주미소련대사관 참사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 참석했던 그로미코(Andrei Gromyko)는 스탈린이 숙소에 돌아오자 미국이 원자폭탄의 독점으로 유럽에서의 미국의 계획을 밀어붙이려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러나 그렇게는 안돼” 하고 내뱉듯이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을 앞당길 것을 결심했다는 것이다.13)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선언은 일본에 대하여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이었다. 1943년 1월의 카사블랑카(Casa blanca)회담 이래로 종전의 조건으로 천명해 온 ‘무조건 항복’의 요구는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으로 수정되었다. 그밖에 군국주의의 제거, 연합군에 의한 일본 점령, 전쟁범죄인의 처벌과 민주주의의 확립, 배상의 지급과 군수산업의 금지 등이 항복조건으로 제시되었다. 선언은 또한 (8)항에서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라고 하여 카이로선언에서 일본영토의 제한과 함께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한 연합국의 공약을 재확인했다.
 
  포츠담선언은 트루먼, 처칠, 장제스(蔣介石) 세 수뇌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선언을 준비한 미국 관리들이 스탈린을 서명자의 이름에서 뺀 것은 소련과 일본은 1941년에 체결한 소-일중립조약에 따라 비교전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 국무장관 번스(James F. Byrnes)는 선언의 사본을 기자들에게 배포하고 나서 외교의례로 소련 외상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에게 보냈는데, 경악한 몰로토프는 선언의 발표를 2, 3일 늦추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번스는 이미 기자들에게 배포했으므로 불가능하다면서 거절했다.
 
  포츠담선언은 발표에 앞서 세 수뇌 사이에서 회의의 정식의제로 토의될 것으로 기대했던 스탈린은 소련이 제외된 것은 미국의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트루먼의 특사로 5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홉킨스(Harry L. Hopkins)로부터 그러한 약속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련은 포츠담선언의 초안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14)
 
  그러나 포츠담선언에서 소련이 제외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스탈린에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포츠담선언에 스탈린의 서명이 없는 것을 눈여겨본 일본 정부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여 항복하기보다는 소련의 알선에 의한 교섭을 통하여 전쟁을 종결짓겠다는 종래의 정책에 더욱 집착하게 된 것이다. 일본 수상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는 7월 28일에 군부의 강경한 요구를 반영하여 포츠담선언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오직 묵살(默殺)할 뿐이다”라고 했는데, 미국은 그것을 ‘거부’를 뜻하는 일본정부의 공식회답으로 받아들였다.15)
 
 
  “이것은 史上最大의 事件이다”
 
8월 14일(미국시각)에 일본의 항복을 발표하는 트루먼 대통령.
  7월 16일에 실험에 성공한 원자폭탄은 플루토늄폭탄이었다. 그것은 둥그스럼한 모양이었기 때문에 ‘팻맨(Fat Man)’이라고 명명되었다. 이 형의 폭탄은 8월 6일까지는 실전에 사용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이와는 별도의 종류인 우라늄폭탄이 함께 제조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길쭉하게 생겨서 ‘리틀 보이(Little Boy)’로 불렸다. 이 형은 실험은 하지 않았으나 실험된 형에 뒤지지 않는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리틀 보이’는 예정대로 7월 31일에 태평양의 티니언(Tinian)섬에서 투하준비를 완료했다. 그런데 일본에 태풍이 불어서 8월 5일까지 대기해야 했다. ‘리틀 보이’는 8월 5일 오후에 B-29폭격기에 실렸다. 기장 티베츠(Paul W. Tibbets) 대령은 이 폭격기를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에놀라 게이(Enola Gay)’라고 명명했다. ‘에놀라 게이’는 8월 6일 오전 2시45분에 이륙했고, 그 뒤를 따라 두 대의 관측기 B-29가 2분 간격으로 이륙했다.
 
  ‘리틀 보이’는 현지 시각 오전 8시15분에 히로시마(廣島)에 투하되었다. 티베츠는 기내의 확성기를 통하여 “편대원들에게 알린다. 여러분은 지금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라고 알렸다. ‘리틀 보이’의 위력은 TNT 1만2500톤의 폭발과 같은 위력이었다. 폭발 순간의 열과 폭발 뒤에 발생한 폭풍에 의한 화재로 히로시마는 7만6000개의 건물 가운데에서 7만 개가 전소했다. 인명피해는 한국인 2만명을 포함한 35만명의 히로시마 인구 가운데에서 시민 11만명과 군인 2만명이 즉사하고, 1945년 말까지 14만명이 사망했다.16) 한국인 가운데에는 군수산업에 강제동원된 노무자들이 많았다. 귀국하는 오거스타 호(USS Augusta) 선상에서 해군병사들과 함께 점심을 들다가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크게 웃으면서 “이것은 사상 최대의 사건이다”라고 소리쳤다.
 
  백악관은 미리 준비되어 있던 트루먼의 성명을 발표했다.
 
  “16시간 전에 우리 미국의 한 폭격기가 일본 육군의 근거지인 히로시마에 폭탄 한 개를 투하했다. 이 폭탄은 TNT 2만 톤보다 더 큰 파괴력을 가진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성명은 이 폭탄은 일본이 진주만(Pearl Harbor) 공격으로 전쟁을 도발한 행위에 대한 보복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원자폭탄임을 밝혔다. 성명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7월 26일에 발표한 포츠담의 최후통첩은 일본 국민들을 완전한 파괴로부터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들은 즉시 이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만일에 그들이 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보지 못했던 하늘로부터의 파괴의 비(rain of ruin)를 예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하늘로부터의 공격이 있은 다음에 해상과 육상의 공격이 뒤따를 것이다. 그 수와 힘은 그들이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이고 그 전투기술은 그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 될 것이다.”
 
  트루먼의 성명은 마지막으로 문명사회의 보존을 위해 가공할 원자력의 관리방안을 미국의회가 즉시 강구할 것을 촉구했다.17)
 
 
  2. 예정일 앞당겨 對日宣戰布告
 
  원자폭탄의 투하로 히로시마가 한순간에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 지도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소련의 알선에 더욱 매달리게 했다. 트루먼의 원자폭탄 투하 성명이 전해진 뒤에도 원자폭탄의 개발은 기술적으로 아직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던 일본 군부는 그것이 모략 선전일지 모른다면서 보도를 금지했다. 8월 8일 오후에 원자폭탄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미국이 제조한 원자폭탄은 한 개뿐일지 모른다면서, “신형의 특수폭탄”이라고만 발표했다.
 
  종전교섭 알선의뢰에 대한 회답을 얻기 위해 몰로토프의 귀국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주소 일본대사 사토 나오타케(佐藤尙武)는 8월 8일 오후 5시에 가까스로 몰로토프를 회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몰로토프는 인사를 하려는 사토의 발언을 제지하면서 소련 정부의 성명을 읽을 테니까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것은 소련 정부는 8월 9일부터 일본과 전쟁상태에 들어간다는 성명이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독일이 항복한 뒤 3개월 이내에 참전하겠다고 한 약속을 정확히 이행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포츠담회담에서는 트루먼이나 처칠은 소련의 대일참전을 요구하지 않았다.
 
  포츠담회담 중에 소련이 포츠담선언의 서명국에서 배제되자 스탈린은 대일전의 개시시기를 앞당기려고 서둘렀다. 그는 바실레프스키에게 연락하여 8월 11일로 정해 놓았던 대일전 개시시각을 하루나 이틀 앞당길 것을 명령했던 것 같다.18) 그리고 8월 2일에는 소련군 최고사령부가 소련 극동군 안에 세 개의 방면군을 창설할 것을 결정했다. 메레츠코프(Kirill A. Meretskov) 원수를 사령관으로 하는 제1극동방면군, 푸르카에프(Maxim A. Purkaev)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2극동방면군, 말리노프스키(Rodion. I. Malinovskii) 원수를 사령관으로 하는 자바이칼(Zabaikal) 방면군이 신설되었다.
 
  8월 5일 늦게 모스크바로 돌아온 스탈린은 이튿날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듣고 의기소침했다. 그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미국이 소련의 대일전 개시 이전에 소련을 배제한 채 일본을 항복시키려고 한 것이며, 나아가 원자폭탄이라는 채찍을 가지고 소련을 외교정책에서 굴복시키려는 적대행위라고 판단한 것이다. 스탈린은 그러나 사토 일본대사가 몰로토프와의 회견을 애타게 요청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당장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바실레프스키에게 공격개시 시기를 48시간 앞당겨 8월 9일 0시(자바이칼 시각, 모스크바 시각으로는 8월 8일 오후 6시)로 설정하라고 명령했고, 바실레프스키는 즉시 자바이칼방면군, 제1극동방면군, 제2극동방면군, 태평양함대에 모든 전선에서 자바이칼 시각으로 8월 9일 오전 0시를 기하여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시달했다.19)
 
  극동 소련군의 군사행동의 목적은 말할 나위도 없이 얄타조약에서 약속받은 영토와 철도와 항구를 점거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자바이칼방면군이 서쪽으로부터, 제1극동방면군이 동쪽으로부터 협공작전을 펴고 제2극동방면군이 북쪽으로부터 보조하는 공격으로 세 방향에서 만주의 중앙부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白堊館 역사상 가장 짧은 記者會見
 
히로시마 원폭투하 때에 생긴 구름버섯.
  소련군이 세 방향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서 트루먼과 번스 국무장관은 주소대사 해리먼(W. Averell Harriman)의 긴급전보로 소련이 대일전을 개시한 사실을 알았다. 워싱턴 시각으로 8월 8일 오후 3시를 조금 지나서 트루먼은 미소를 띠고 기자회견실에 나타났다. 기자들 앞에 서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통상의 기자회견을 할 수 없고, 그러나 이 발표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제한 다음, 트루먼은 짤막한 성명을 읽었다.
 
  “소련은 일본에 대하여 선전을 포고했습니다.”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것이 전부요(That’s all).”20)
 
  그것은 백악관 역사상 가장 짧은 기자회견이었다. 이 지극히 짧은 성명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키고 싶어한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정부 관리들의 깊은 실망을 드러낸 것이었다.
 
  트루먼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시간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을 실은 B-29 폭격기는 일본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폭격기는 ‘복스 카(Bock’s Car)’라고 명명되었다. ‘팻맨’은 앨라모고도에서 실험했던 것과 같은 플루토늄 폭탄이었다. 나가사키(長崎)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에는 우연의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 처음에는 8월 11일로 예정되었던 것이 티니언섬에서의 기술적 이유에서 10일로 앞당겨지고, 다시 기상예보가 9일을 넘기면 일본열도의 일기가 계속 나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루 더 앞당겨졌다. 목표도시도 나가사키가 아니라 고쿠라(小倉)였다. 그런데 고쿠라 상공에 도착하자 짙은 구름이 시가를 덮고 있어서 세 번이나 선회해도 투하지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료를 생각하면 돌아가야 했으나 그에 앞서 두 번째 목표지인 나가사키로 향했다.21) 나가사키 상공에도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어서 단념하려고 할 때에 갑자기 구름이 갈라지면서 나가사키만과 시가지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팻맨’이 투하되었고, 폭탄은 부정확한 지점에서 폭발했다. 현지 시각으로 8월 9일 오전 11시2분. 2만5000명에서 4만명의 사람이 사망했다. 원자폭탄은 하나뿐일 것이라고 했던 일본 군부의 희망적 관측은 무참히 깨어졌다.22)
 
  트루먼은 라디오를 통하여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폭탄을 개발하고 그것을 사용했다. 진주만에서 경고 없이 우리를 공격한 자들에 대하여, 미국의 포로들을 아사(餓死)시키고 구타하고 처형한 자들에 대하여, 그리고 전쟁에서의 행동을 규정한 국제법을 준수하는 일조차 모두 포기한 자들에 대하여 이 폭탄을 사용하였다.”23)
 
  트루먼은 이처럼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서도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기름통 터져 港口 안은 불바다 돼
 
소련군의 韓國進攻(1945년 8월 9~12일).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침공은 제1극동방면군 산하의 제25군이 담당했다. 제25군은 치스차코프(Ivan H. Chistiakov) 상장의 지휘 아래 4만명가량의 병력으로 편성되었다. 치스차코프는 연해주집단군의 여단장과 사단장 경험이 있어서 극동 시베리아 지역에 대해 밝았고, 1945년 6월에 제25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소련군의 한반도 공격은 두만강 하구에 인접한 경흥군(慶興郡) 토리(土里)에서 있었던 경찰주재소 습격사건으로 시작되었다. 8월 8일 밤 11시50분에 일단의 한국인 80명이 소련군과 함께 쾌속정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서 토리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토리주재소의 경관들과 교전 끝에 주재소에 방화하고, 부락 사람들을 불러모아 “9일 정오에 소련은 일본에 선전을 포고한다. 그때에는 이 부근 사람들을 전부 총살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강 건너 소련 땅으로 사라졌다.24) 그런데 이 토리의 전투에 대해서는 소련의 공식 제2차세계대전사25)를 비롯한 참전자들의 회상기 등에도 언급이 없다.
 
  8월 9일 0시4분에 나진(羅津)항 상공에서 갑자기 파란 조명탄이 터졌다. 등화관제 아래 있던 깜깜한 항구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일본군의 고사포 응전은 거의 없었다. 나진부두에서는 쌓아 둔 관동군의 물자와 창고가 투하된 폭탄으로 불타 올랐다. 폭격은 이튿날까지 계속되었다. 부두의 드럼통이 터져서 기름이 바다로 유출되는 바람에 항구 안은 글자 그대로 불바다가 되었다. 태평양함대 비행기의 공격이었다. 일본군은 시민들을 놓아 두고 철수해 버렸다.
 
  웅기(雄基)항에 소련군의 공습이 시작된 것은 8월 9일 오전 5시반이었다. 항구에서 시가로 폭탄이 잇달아 투하되었다. 10일 오후에 부두, 세관, 병영, 경찰서, 헌병대의 건물이 자폭했다. 11일 오후 5시반에 웅기항에 소형 군함 두 척이 입항하여 소련군의 상륙이 시작되었다. 일본인이 없어진 거리에 급히 만든 붉은 기를 손에 든 한국인들이 소련군을 환영하기 위해 몰려들었다.26) 치스차코프는 웅기의 해방이 소련군의 주목할 만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웅기가 연해주를 공격하기 위한 일본군의 작전기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27) 마르킨(Markin) 소령이 점령된 웅기의 경비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웅기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경무사령부에 나타나 읍에 있는 창고와 상점 등을 경비하겠다고 말했다. 웅기의 치안대는 이렇게 결성되었고, 이들은 소련군과 함께 거리를 순찰했다.
 
  웅기가 점령된 8월 12일 오전 9시에 나진에 대한 태평양함대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웅기를 점령한 뒤 1개 대대만을 남기고 남진한 제393사단이 13일에 나진 점령을 완료했다. 13일 저녁에 일단의 한국 지식인들이 소련군 경비대의 포프코프(Popkov) 중위를 찾아와서 지역 행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포프코프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다른 한국인들이 이들 지식인 가운데 일부는 부일협력자였다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28)
 
  함경북도 도청소재지인 청진(淸津)항에도 8월 9일 오전부터 폭격이 시작되었다. 13일 오전 11시30분쯤 청진 앞바다에 소련 함대가 나타나서 맹렬한 함포사격과 함께 연막을 치고 상륙정이 쇄도했다. 일본군은 소련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 없었다. 해안에 배치된 일본군은 거의가 마지막으로 동원된 특설경비부대이고 그 가운데에는 교육을 받지 못한 한국인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4일 밤에는 새로 소련군 1개 사단이 상륙했고, 이어 15일에는 소련군 전차부대가 상륙하여 소련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청진방면의 전투는 8월 18일이 되어서야 완전히 끝났다.29)
 
  일본군의 어떤 보고서는 이때에 한반도에 진격한 소련군에 대해 “급여는 좋고 배낭에는 보드카와 미제 통조림과 하루분의 식량이 들어 있었고, 군화는 미군과 같은 것을 신었으며, 72연발 자동소총을 가졌고 배낭에는 수백 발의 탄환이 들어 있었다”라고 적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보고서는 “복장은 더러웠고 각자 자동소총, 체코 총, 소총을 가지고 작은 배낭을 멘 차림이었다”라고 적었는데, 체코 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에 대해서는 “머리는 빡빡 깎았고, 손에 죄수번호가 먹으로 새겨져 있는 사람도 많았다”고 했다.30)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소련은 강력한 독일군에 대적하기 위하여 정예군을 유럽전선에 배치한 반면에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극동전선에는 유럽정예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병력을 배치했는데, 개중에는 중앙아시아의 소련 영토 안에 있는 감옥에서 서둘러 입대시킨 죄수들도 있었다.31)
 
 
  “소련에 友好的이고 긴밀한 관계를 갖는 政府가 수립되어야”
 
소련군의 淸津공격(1945년 8월 13~14일).
  소련은 대일전쟁 계획의 검토와 때를 같이하여 전후 한국처리 문제에 대한 기본정책을 준비했다. 앞에서 본 소련공산당 정치국, 정부, 군의 합동회의가 열린 직후인 6월 29일자로 외무인민위원부가 작성한 「한국 ― 간단한 조회」라는 보고서는 전후의 한국 처리에 대한 소련의 구상을 처음으로 밝힌 것이어서 눈여겨볼 만하다. 제2극동국장 주코프(D. A. Zhukov)와 부국장 자브로딘(Evgeny. G. Zabrodin)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5개 항목으로 요약된 것이었다.
 
  (1) 일본이 한국을 통해 아시아 대륙으로 팽창하려 한 데 대해 러시아가 투쟁한 것은 역사적으로 정당한 행위였다. 그러나 그때에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막을 만한 충분한 힘이 없었고, 근본적으로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2) 일본은 영원히 한국에서 축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본 지배하의 한국은 소련의 극동에 대한 항구적인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한국의 독립은, 극동으로부터 소련에 대한 압력을 기도하려는 일본으로부터는 물론 다른 국가들로부터, 한국이 소련에 대한 미래의 공격 근거지로 전환되지 않게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효과적이어야 한다. 한국의 독립과 극동에서의 소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실제적이고 믿을 만한 보장은 소련과 한국 사이에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가 확립되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한국정부 수립에 반영되어야 한다.
 
  (4) 만약 중국과 미국이 한국에서의 과거의 이해관계를 고려한다면, 한국문제 해결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은 확실하다. 그밖에도 일본으로부터 대만(臺灣)과 팽호제도(澎湖諸島)를 거두어들이면 일본은 남쪽 방향으로 진출할 길이 차단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경제적 이해관계를 인정받는 형태로 한국에서 배출구를 찾으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소련의 이해관계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적 및 경제적 영향력은 배제되어야 한다.
 
  (5) 한국에 대하여 후견제(신탁통치)가 실시된다면 소련은 그것에 참여해야 한다.32)
 
  이처럼 이 보고서는 소련의 한국에 대한 주된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안보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해방된 뒤에 한반도는 일본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밖의 어떤 다른 나라로부터도 소련에 대한 공격의 근거지가 되어서는 안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에 소련과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가진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전후 한국처리 문제에 대한 소련의 이러한 태도를 감지하고 있었다. 포츠담회담에 참여하고 있던 주소대사 해리먼은 7월 23일 오전에 전쟁장관 스팀슨을 방문하여 “소련이 요구를 확대하고 있다”고 보고했는데, 이러한 요구는 단지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어쩌면 소련은 한국에 대한 단독신탁통치를 주장할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스팀슨은 해리먼의 우려를 트루먼에게 보고했다.33)
 
 
  金九는 反動的, 李承晩은 반소련 성향으로 유명한 人物
 
  전후의 한국처리 문제에 대한 소련의 정책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발행하는 『공보(公報)』(1945년 8월 1일자)에 실린 「한국의 국내외 정세에 대하여」라는 장문의 보고서에 자세하게 표명되었다. 보고서는 먼저 한국이 소련의 안보상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의 군사 전략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만주 및 소련과 육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그 지리적 조건에 규정된다. 일본은 한국을 작전근거지로 사용하여 1931년에 만주를 합병했으며, 그 뒤 일본 제국주의가 소련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면서 한국의 군사 전략적 의의가 더욱 증대했다. 일본 권력은 ‘북쪽 국경을 수호하라’는 슬로건으로 자신들의 반소비에트적 군사준비를 속이고 있다. 새로운 철도의 건설, 한국 북동쪽 항구들의 건설과 재건, 군수공업 성장의 강화, 한국 주민들에 대한 반소비에트 선전─ 이 모든 것이 일본 군부에 의해 성숙하고 있는 계획들을 증명한다.”
 
  보고서는 이어 한국의 지리와 러-일전쟁 이후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관계를 서술하고, 한국이 일본에 어떤 군사적 및 경제적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한국민족해방운동에 관한 서술의 대부분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정당과 인물에 할애한 점이다. 임시정부는 1937년 이후에 내부갈등으로 많이 변화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중국 망명 한국인들의 보수적인 성향을 대변한다고 이 보고서는 설명했다. 보수적인 한국독립당의 지도자인 김구는 “중국국민당의 반동분자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고, 장제스 정부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고 했고, 조소앙은 “김구보다는 덜 반동적이지만 친미적”이라고 기술했다. 그리고 이승만에 대해서는 국제회의에서 “한국을 소련의 영향권으로 집어넣는” 안을 결정했다고 비난성명을 냈던 “반소련 성향으로 유명한” 인물로 평가했다.34) 이승만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1945년 4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창설회의에서 이승만이 터뜨린 얄타밀약 ‘폭로’ 성명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또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이해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미국, 영국, 중국 3국 지도자들이 1943년에 카이로에서 대일전의 승리 이후 적당한 시기에 한국에 독립을 허여하기로 한 결정은 외국에서 한국의 장래와 그 정치체제에 대한 많은 반향과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특별히 미국에서 이 문제가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할 때까지 미국인들은 그곳에서 대단히 중요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은 당연하다. 한국 광산업의 대부분은 미국인들의 수중에 있었으며, 한국의 금광은 모두 미국인 소유였다. 그들은 한국에 종교 선교단, 자선 시설, 다양한 학교 등의 연결망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갈 좋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전후 한국의 처리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미국은 한국에 대해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한국에서 우월한 영향력이 보장될 수 있는 제도를 세울 준비를 하고 있다.
 
  (2) 중국국민당 집단은 스스로를 위해 장래의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을 보장받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 집단은 미국과 비밀스럽게 교섭을 유지하고 있다. 대체로 중국국민당과 미국은 한국문제 결정에서 소련의 역할을 최대한 약화시키려 한다.
 
  (3) 미국, 영국, 중국이 한국에 독립을 허여하기까지 국제적 후견(오페카)을 실행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
 
  (4) 소련의 참여 없이 한국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35)
 
 
  3. 挺進隊 구성하여 국내로 급파
 
  샌프란시스코회의에 가서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워싱턴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한동안 희망과 혼란과 좌절감이 뒤섞인 착잡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36) 전쟁이 마무리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는 초조했다.
 
 
  마셜 參謀總長과 트루먼 大統領에게 편지
 
  7월 27일에 맥아더 장군과 니미츠(Ches ter Nimitz) 제독에게 마닐라에 가서 국내동포들을 상대로 선동방송을 하겠다고 제안하는 전보를 쳤던 이승만은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8월 3일에는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에게 그 전보 사본과 함께 같은 제안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이 이렇게 선동방송을 제안하는 것은 무슨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국내에서 봉기할 적절한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일전에 합동참모본부에 제안한 모든 요망사항은 동정적인 고려와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만일에 대일전에 참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더라도, 나는 그것이 미군당국의 관심부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장군께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한국인들이 생각하기로는 이 요망사항에는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습니다. … 일부 인사들은 우리의 동기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프로그램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처럼 받아들였다면, 일찍이 전시정보국(OWI)이 나에게 한국인들에게 단파방송을 통한 연설을 하도록 부탁했던 1942년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저는 여러 번 연설을 했고 그 연설들은 모두 녹음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때의 한 연설을 통하여 동포들에게 일본에 대항하여 성급한 반란을 일으키지 말고 그것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고, 적절한 기회가 와서 우리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제안을 미군장교들의 요청에 따라 했습니다. 그들은 시기적으로 부적합한 봉기는 미국이 적절한 시기에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망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봉한 정보가 증명하듯이, 저는 그 적절한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동포들이 기다리고 있는 저의 메시지를 보내고자 합니다.”37)
 
  이승만은 마닐라로 가서 단파방송을 통하여 동포들의 봉기를 선동하고, 연합군과 함께 귀국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승만의 제안을 미 군부가 심각하게 고려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8월 8일에 트루먼에게 또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맥아더와 니미츠에게 보낸 전보와 마셜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동봉했다.
 
  “저는 각하께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수많은 미국인처럼 장래의 한국의 지위에 대해 깊이 고심하고 계신 것을 알기 때문에, 각하께서 참고하시도록 동봉한 전보통신과 육군참모총장 마셜 장군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함께 각하께 보냅니다. 이 문건들은 스스로 설명하기 때문에 부연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가지만 더 첨언하고자 합니다. 소련이 대일참전을 간청받고 있는 동안 일본 군국주의 제국의 패배와 파괴를 위하여 1905년부터 일본과 싸워온 3000만 한국인들이 요망해 온 전쟁참여의 기회는 계속 거부당해 왔습니다. 이는 전반적 상황에 비추어 일관성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정책이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지속된다면, 한국인들은 다가오는 몇 년 동안 그 때문에 고통을 받을 것이며 미국은 궁극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 각하! 투쟁하는 인류는 각하께 희망을 걸고 있으며, 우리는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하께 용기와 지혜와 건강을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38)
 
 
  “天皇의 權威는 聯合軍最高司令官에게 종속된다”
 
  원자폭탄의 투하와 소련군의 침공이라는 절망적인 충격을 동시에 받은 일본정부는 드디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일억옥쇄(一億玉碎)의 각오”로 본토결전(本土決戰)을 주장하는 육군을 누르고 항복이 결정된 것은 8월 9일 오전부터 8월 10일 새벽에 이르는 긴박한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스즈키 수상을 비롯한 종전파들은 본토결전의 상황까지 가는 경우 군부쿠데타가 아니면 내란이나 ‘적색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8월 9일 오전 11시 조금 전부터 열린 최고전쟁지도회의는 회의도중에 나가사키의 원자폭탄투하 소식이 전해졌는데도 불구하고 결론을 짓지 못하고 오후 1시에 휴회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긴급 각료회의는 밤 10시까지 계속되었으나 양파의 대립은 타결되지 않았다. 위기상황에서 정부의 정책결정 기능이 완전히 파탄된 것이었다. 밤 11시50분에 어전회의가 소집되었다. 그것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외상과 천황의 측근인 기도 고이치(木戶幸一) 내대신(內大臣)의 공작에 따른 것이었다. 천황 앞에서도 본토결전파들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즈키 수상은 이례적인 조치로서 천황의 ‘성단(聖斷)’을 주청했고, 천황은 “나의 의견은 외무대신이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천황의 ‘국법상의 지위’는 유지되는 것을 조건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가 8월 10일 오전 2시30분이었다.39)
 
  이러한 천황의 결단에도 불구하고 흥분한 일부 육군장교들은 쿠데타계획을 추진하는 등 일본정부의 내부갈등은 가라앉지 않았다. 한편 이 결정은 바로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 정부에 통달되었다. 『도매이(同盟)통신』은 모스 부호(Morse code)를 사용하여 일본정부의 포츠담선언 수락결정 뉴스를 타전했고, 그것을 UP가 바로 수신하여 연합국에 전해졌다. 『도매이 통신』이 모스 부호를 사용한 것은 모든 단파방송이 군부의 검열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 10일 오전 9시에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 각료회의는 논란 끝에 일본의 포츠담선언 조건부수락을 거부하기로 결정하고, 번스 국무장관이 작성한 회답안을 채택했다. 번스의 회답은 “항복한 때로부터 천황과 일본정부의 권위(authority)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종속된다”(제1항)는 것과, 그러면서도 “일본의 궁극적인 정체(政體)는 일본 국민의 자유롭게 표명된 의사에 의하여 결정된다”(제4항)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것은 그동안 전쟁종결의 걸림돌이 되어 온 천황의 지위 유지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이 회답은 영국, 중국, 소련의 동의를 거쳐 8월 11일 오전에 스위스정부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통보되었다.40) 협의 과정에서 소련은 항복을 접수할 연합군최고사령관을 두 사람으로 할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宮城守備隊가 反亂 일으켜
 
  장관들이 일본정부에 통보할 회답을 검토하고 있는 동안 3부조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관계 관료들은 일본의 항복에 관한 일련의 문서를 작성하느라고 분주했다. 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가 포고할 「일반명령 제1호」와 항복문서는 8월 11일의 3부조정위원회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일반명령 제1호」는 극동과 태평양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일본군의 항복절차를 규정한 것이었으나, 기본적으로 그것은 연합국의 세력권의 범위를 규정한 것이었다. 한반도의 경우 이 「일반명령 제1호」에 따라 북위38도 이남에 주둔하는 일본군은 연합군최고사령관에게, 그 이북에 주둔하는 일본군은 소련군최고사령관에게 항복하도록 함으로써 북위38도선은 운명의 분단선이 되고 말았다.41)
 
  미국정부의 회답을 일본정부가 수신한 것은 8월 12일 오전 0시45분이었다. 천황의 측근은 전례없는 방법을 준비했다. 그것은 예상되는 군부의 저항에 대비하여 천황이 직접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에게 포츠담선언 수락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강경파를 압박하기 위하여 8월 10일부터 14일 사이에 1000대 이상의 폭격기로 일본도시를 공습했고, 이 공습으로 1만5000명 이상의 일본인이 사망했다.42) 8월 14일 정오에 마침내 천황의 두 번째 ‘성단’으로 항복이 확정되었다. 이날 밤에 궁성을 수비하는 군대가 궁성을 점거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내 진압되었다. 숨겨 두었던 천황의 녹음반은 8월 15일 오전 11시까지 방송국으로 옮겨져 예고한 대로 정오에 방송되었다. 이날 오후에 스즈키 내각은 총사직했고, 강경파의 우두머리인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육군대신은 15일 새벽에 할복자살했다.
 
 
  光復軍은 終戰에 실망 낙담해
 
  8월 10일 저녁에 섬서성(陝西省) 주석 축소주(祝紹周)의 집에서 일본의 항복소식을 들은 김구는 서안(西安)에 마련되어 있던 모든 환영일정을 취소하고 두곡(杜曲)으로 돌아왔다. 서안은 종전의 흥분에 들떠 있었다. 큰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만세소리가 성내에 진동했다. 자동차 안에서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며 가는 김구의 마음은 무거웠다. 당당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대일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처리에서 임시정부의 발언권이 약화될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두곡으로 돌아왔을 때의 상황을 김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 광복군은 계획하였던 자기 임무를 달성치 못하고 전쟁이 끝나 실망 낙담하는 분위기에 잠기었고, 반면 미국 교관과 군인들은 매우 기뻐하여 질서가 문란한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미국은 한국 병사 수천 명을 수용할 장소를 두곡에다 건설할 목적으로 종남산에서 재목을 실어오고 벽돌을 운반하는 등 거대한 공사를 진행하였는데, 그날부터 그 공사도 일제히 중지되었다. 나의 원래 목적은 먼저 서안에서 훈련을 마친 청년들을 본국으로 들여보내고, 부양(阜陽)으로 가서 그곳에서 훈련받은 청년들도 아울러 본국으로 보낼 예정이었으나, 그 역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43)
 
  막사와 교련장의 증축공사만이 중단된 것이 아니었다. 결연한 각오로 국내진입을 준비하고 있던 제2지대 대원들은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졌다. 그들은 조국광복의 기수가 될 기회가 상실되었다는 생각에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44)
 
 
  李範奭의 주장에 따라 國內挺進軍 편성
 
  김구는 이청천(李靑天), 이범석(李範奭)과 함께 이틀에 걸쳐 구수회의를 가졌다. 이청천과 이범석은 8월 9일에도 미전략첩보국(OSS)의 사전트(Clyde B. Sargent) 대위와 독수리작전의 실행문제를 놓고 자세히 검토하고, 소련의 대일전 참전 문제에 관해서도 진지하게 의견을 교환했었다.45)
 
  이범석은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국내로 진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김구는 이범석의 의견에 찬성했다.46) 그리하여 OSS 훈련을 받은 제2지대 대원들을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으로 편성하여 신속히 국내로 진입시키기로 했다. 이범석은 사전트에게 국내정진군 편성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설득했고, 사전트는 이에 동의했다. 사전트는 OSS요원 쿠퍼(Chester Cooper)에게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정보보고를 수행할 목적으로 한반도에 ‘승리사절단(Victory Mission)’을 파견하는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고, 곤명(昆明)에 있는 미군사령부에 이러한 계획을 건의했다.47)
 
 
  OSS도 國內進入 서둘러
 
  OSS 관계자들도 소련의 참전과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소식을 듣고 초조했다. 유럽전구에서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못한 OSS가 대일전에서마저 끝내 아무런 전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여간 낭패스럽지 않을 것이었다. 도노반은 중국전구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에게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경계하면서 “러시아인들이 쳐들어올 때에 만약 우리가 한국과 만주에 없다면, 우리는 다시 그곳에 발붙일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경고한 적도 있었다.48)
 
  사전트의 건의와는 별도로 헤프너는 8월 10일에 중경의 OSS 작전장교 데이비스(William P. Davis) 대령에게 중국의 주요도시들과 만주와 한국에서 펼칠 OSS 작전에 대한 병참지원을 요청하는 긴급전보를 쳤다. 한반도 지역의 작전과 관련해서는 “러시아의 점령 이전에 우리의 이익이 지켜질 수 있도록 한국의 전략지점에 현재 가용한 OSS팀이 투입될 경우 긴급 공중지원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49) 이어서 그는 OSS 중국지부의 부책임자 버드(Willis Bird) 중령에게 즉시 서안으로 가서 독수리 작전을 지휘하고 한반도 진입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50)
 
  1945년 8월 9일부로 한국이 정식으로 중국전구에 포함된 사실이 발표되자 김구는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것만큼이나 기뻐했다. 그는 먼저 서안에서 발행되는 『서경일보(西京日報)』에 서면담화를 발표했다. 김구는 자신이 섬서성에 온 뒤에 대일작전에서 한국이 정식으로 중국전구에 포함된 것, 일본의 항복, 트루먼이 한국의 독립광복을 보증한 것 등의 희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말하고, 광복군 제2지대에 보여준 섬서성의 후의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예정되어 있는 일정을 치르지 못하고 서둘러 중경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51)
 
 
  蔣介石과 트루먼에게 祝電
 
  김구는 이어 장제스와 트루먼과 웨드마이어에게 각각 전승 축하 전보를 쳤다. 세 전보는 모두 한국이 중국전구에 포함된 것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의 사업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장제스에게 보낸 전보는 중국의 투쟁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음을 칭송하는 것이었다.
 
  “9년에 걸친 귀국의 피 흘린 항전은 동아(東亞)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인민을 대표하여 각하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다만 이제 광복을 맞이한 한국이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더욱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시찰차 섬서에 왔던 일이 마무리되어 곧 중경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만나뵙고 축하의 말씀 전하기 전에 우선 축전으로 대신합니다.”
 
  트루먼에게 보낸 전보는 포츠담선언이 카이로선언에서 천명한 한국독립의 약속을 재확인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한 것이었다. 김구는 또한 웨드마이어에게 보낸 전보에서 한국을 중국전구에 포함시킨 조치는 “군략이나 정략으로 볼 때에 앞을 내다보는 결정”이라고 그 의의를 특별히 강조했다.52)
 
  이러한 문서작업은 중경에서 같이 온 엄항섭(嚴恒燮)이 담당했다. 중경에서는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중국정부도 김구가 빨리 돌아오도록 재촉하고 있었으나,53) 김구는 서안을 떠나지 않았다. 광복군 활동의 실질적인 성과가 될 수 있는 국내정진군 파송계획이 실현되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헤프너의 지시에 따라 독수리 작전을 인수받은 버드는 8월 11일에 서안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 이범석과 상의하여 파견단은 세 팀으로 구성하기로 하고, 첫 팀을 일주일 안에 출발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만약 작전실행 전에 전쟁이 끝나면 버드를 포함한 혼성그룹이 단독으로 서울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54) 일주일 안에 국내정진군의 출발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자 김구는 8월 13일에 이범석을 ‘광복군 국내정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국내 동포들에게 배포할 포고문을 작성해 주었다. 이청천도 별도의 포고문을 만들었다.55) 국내정진군의 선발대는 이범석을 비롯하여 이해평(李海平), 장준하(張俊河), 김준엽(金俊燁), 노능서(魯能瑞), 이계현(李啓玄), 장덕기(張德棋) 일곱 명으로 결정되었다.56)
 
 
  OSS의 주안점은 美軍捕虜의 안전한 구출
 
국내 정진군 선발대.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국내정진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열정의 사나이 이범석은 흥분했다. 그날로 그는 제2지대의 구대장들과 선발대 인원을 소집하고, 국내정진군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거창하게 설명했다.
 
  “오늘 내일 사이에 여기 모인 동지들과 함께 나는 국내로 들어갈 계획이오. 오늘 아침에 임시정부는 나에게 국내정진군 사령관의 직책을 맡겨 주었소. 국내에 누구보다도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생겼는데, 다름 아니라 중국전구 미군사령부가 곧 사절단을 서울로 들여보낼 것이니 우리도 그편에 편승하라는 전달이 있었소. 우리의 임무는 대단히 무겁소. 국내에 진입하는 대로 일군에 징집된 우리 병사들을 인수해야 하고, 일군의 무기접수를 지휘해야 하며, 국민자위군을 조직하고 또 불순 정치세력이 작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할뿐더러, 국내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협조를 하면서 하루 속히 우리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환국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야 하오.”57)
 
  이범석의 이러한 설명은 김구와 이청천과 함께 논의했던 사항이 어떤 것이었고, 김구가 이 국내정진대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여느 전승군 선발대의 일반적인 역할보다도 더 막중한 임무였다. 장준하는 자신들이 해방된 조국이 내전에 휩싸인 중국의 재판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회고했다.58) 그만큼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경계심과 경쟁의식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 사령부의 한국진입 작전 목적은 국내정진군의 이러한 희망과는 사뭇 달랐다. 데이비스는 헤프너에게 버드가 수행해야 할 ‘임시지침’을 전보로 통보했는데, ‘임시지침’에 따르면 “공산당의 상황이나 일본군 투항자들의 반발을 가져올 수 있는 작전”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한 종류의 작전은 중국전구 사령관의 특별지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59) 버드의 임무는 중국전구의 공식적인 작전활동이라기보다 OSS의 독수리작전의 연장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전구 미군사령부는 8월 14일에 버드의 임무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독수리작전을 버드의 지휘 아래 새로 편성된 동북야전지휘부(North Eastern Field Headquarters)로 이관시켰다. 헤프너는 버드에게 그의 임무에 대한 사령부의 정식 승인을 알리면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서울, 인천, 부산의 수용소에 있는 전쟁포로들과 접촉하는 것이고 이들의 철수에 대한 병참지원과 철수계획안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이범석에게는 한국정진대는 도노반의 특별감독 아래 작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라고 지시했다.60) 이범석이 독자적인 계획을 가지고 돌발행동을 벌일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버드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미 계획되어 있던 독수리작전에 한결 포괄적인 중국전구 미군사령부의 목적이 추가된 것이었다. 1945년 8월 현재 한국, 만주, 인도차이나에 수용되어 있는 연합군의 전쟁포로는 2만명, 민간인 피억류자들은 1만5000명에 이르고,61) 한국에만 2500명이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뒤에 확인된 바로는 한국에 수용되어 있는 연합군 포로는 680명이었다.62) 연합국은 패전한 일본군이 이들에게 복수를 자행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 대책으로 OSS가 추진한 것이 ‘자비 작전(Mercy Mission)’이었다. 웨드마이어는 8월 15일에 OSS를 포함한 여러 특별기관에 중국, 만주, 한국에 있는 전쟁포로와 민간인들의 철수를 위한 포괄적 작전지침을 시달했다.63) 독수리작전팀에 전쟁포로 접촉과 이들의 철수작전이 임무로 주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挺進隊 出動 기다리며 李承晩에게 打電
 
  출동명령을 애타게 기다리던 국내정진군 선발대는 8월 15일 오후 4시에 두곡을 떠나 서안비행장으로 갔다. 이범석은 이때의 비장한 심정을 흰 손수건에 “苟存猶今 志在報國(구존유금 지재보국: 아직 구차히 목숨을 유지한 것은 나라에 보답하기 위함이다)”라고 썼다.
 
  8월 16일 새벽 3시에 버드가 이끄는 미국사절단이 서안비행장으로 들어섰다. 이범석과 버드는 의논 끝에 한반도의 상공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기체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한국 쪽에서는 네 명만 탑승시키기로 했다. 이에 따라 버드를 비롯한 미군 18명과 이범석을 비롯한 광복군 네 명만 탑승하게 되었다.64)
 
  그러나 뜻밖의 일이 또 발생했다. 8월 16일 오전 4시경에 서안비행장을 이륙하여 서울 여의도로 향하던 C-47 수송기는 호남(湖南), 산서(山西)를 거쳐 산동(山東)반도 상공을 지날 때에 곤명으로부터 “한국진입 중지”라는 무전을 받고 오후 5시30분쯤에 돌아와야 했다. 14일 아침에 도쿄만에 진입하던 미국 항공모함이 일본 특공대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사절단의 안전을 걱정한 사령부가 진입중지를 명령한 것이었다.65) 서안으로 돌아온 국내정진군 선발대는 실망 속에 하루를 보냈다. 17일에도 비행기의 고장으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버드와 이범석은 고장난 C-47기 대신에 C-46 수송기를 보내줄 것을 중경에 요청했다.66)
 
  국내정진대가 지루하게 재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8월 17일(워싱턴 시각 8월 16일)에 김구는 이청천과 같이 이승만에게 독립축하 전보를 쳤다. 그것은 재미동포들에게 이승만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였다. 전보는 열흘 동안 서안에서 추진한 일이 만족스럽게 되었다고 말하고, 자신은 속히 국내에 가 있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부와 육군의 소식을 본국으로 보냈나이다. 모든 정당싸움을 그치며 합동하고 모든 세력을 정부로 집중하며 이후로 모든 정부사건은 워싱턴에 있는 위원부를 통하야 취급하겠소. 이승만 박사를 후원하시어 지금은 당신들의 정부를 위하야 최선을 다할 시기입니다. 워싱턴 위원부를 통하야 할 수 있는 대로 재정을 정부에 공헌하시오. 본인은 일단 중경으로 귀환하겠소. 본인이 속히 내지에 가 있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내지에 가서 소식을 다시 전하겠소.”
 
  이청천의 전보도 광복군이 선발대를 따라 곧 본국으로 들어간다는 감격적인 내용이었다.
 
  두 사람의 전문은 8월 22일자, 『북미시보』 호외로 재미동포들에게 알려졌다.67)
 
  중경에서 새로 지원된 C-46 수송기는 8월 18일 새벽 5시에야 서안비행장을 떠났고, 서안에 머물던 김구도 같은 날 착잡한 마음으로 중경으로 돌아갔다.68) 이날은 토요일이었다. 김구는 서안으로 갈 때와 같이 군용기를 타려고 했으나 “질서가 문란하여” 군용기를 탈 수 없어서 여객기를 탔다.69)⊙
 

  1) David Holloway, “Jockeying for Position in the Postwar World―Soviet Entry into the War with Japan in August 1945”, Tsuyoshi Hasegawa ed., The End of The Pacific War―Reappraisals,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7, p. 147.
 
  2) 長谷川毅, 『暗鬪―スタ-リン, トル-マンと日本降伏』, 中央公論社, 2006, pp. 110~111. 3) 위의 책, pp. 127~128. 4) U. S. Department of Defence, The Entry of the Soviet Union into the War against Japan: Military Plans, 1941-45 (manuscript), 1955, pp. 77~79. 5) 李用熙, 「38線劃定新攷―蘇聯對日戰參戰史에 沿하여」, 『李用熙著作集(1) 韓國과 世界政治』, 民音社, 1987, p. 39.
 
  6)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이하 FRUS) Conference of Berlin (The Potsdam Conference) 1945 vol.Ⅱ,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0, pp. 43~46. 7) 長谷川毅, 앞의 책, pp. 189~190, pp. 139~140. 8) Winston S. Churchill, The Second World War―Triumph and Tragedy, Houghton Mifflin, 1953, pp. 638~639. 9) FRUS Potsdam Conference 1945 vol.Ⅱ, pp. 345~348.
 
  10) Harry S. Truman, Memoirs vol.Ⅰ, ─ Year of Decision, Doubleday & Company, 1955, p. 416. 11) Anthony Eden, The Eden Memoirs-The Reckoning, Cassell, 1965, p. 548. 12) David Holloway, op. cit., p. 169. 13) Andrei Gromyko, Memoirs, Doubleday, 1989, pp. 109~110. 14) 長谷川毅, 앞의 책, p. 275. 15) 伸晃, 『默殺(下)―ポツタム宣言の眞實と日本の運命』, 日本放送出版會, 2000, pp. 111~144 참조. 16) 長谷川毅, 앞의 책, pp. 306~309.
 
  17) FRUS 1945 Potsdam Conference vol.Ⅱ, pp. 1376~1378. 18) 長谷川毅, 앞의 책, p. 309. 19) 위의 책, pp. 324~326.
 
  20) Harry S. Truman, op. cit., p. 425. 21) Len Giovannitti and Fred Freed, The Decision to Drop the Bomb―A Political History, Coward-McCann, 1965, pp. 273~274. 22) 五百旗頭眞, 『米國の日本占領政策(下)』, 中央公論社, 1985, p. 238. 23) 長谷川毅, 앞의 책, pp. 350~351. 24)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 1967, p. 29. 25) ソ連共産黨中央委員會附屬マルクス-レ―ニン主義硏究所 編 川內唯彦譯, 『第二次世界大戰史(10) 關東軍の壞滅と大戰の終結』, 弘文堂, 1966, pp. 227~269 참조.
 
  26) 森田芳夫, 앞의 책, pp. 30~34. 27) I. M. 치스차코프, 「제25군의 전투행로」, 소련과학아카데미 편, 『朝鮮의 解放』, 國土統一院, 1988, p. 48. 28) Erik van Ree, Socialism in One Zone ― Stalin’s Policy in Korea 1945-1947, Berg, 1989, p. 86. 29) 森田芳夫, 앞의 책, pp. 39~42; Michael C. Sandusky, America’s Parallel, Old Dominion Press, 1983, p. 218. 30) 森田芳夫, 앞의 책, pp. 40~41. 31) 김학준, “북한의 역사 제1권 강대국권력정치 아래서의 한반도분할과 소련의 북한군정개시 1863년~1946년1월”,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p. 629.
 
  32) 주코프-자브로딘, 「한국-간단한 조회」, 김성보, 「소련의 대한정책과 북한에서의 분단질서 형성 1945~1946」, 역사문제연구소 편, 『분단50년과 통일시대의 과제』, 역사비평사, 1995, p. 56에서 재인용. 33) 長谷川毅, 앞의 책, p. 257. 34)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국, 「한국의 국내외 정세에 대하여」, 김성보, 앞의 글, pp. 57~60참조.
 
  35) 위의 문서, 김성보, 위의 글, pp. 57~60에서 재인용. 36)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A Personal Narrative, Panmun Book, 1978, p. 17. 37) Syngman Rhee to George C. Marshall, Aug. 3, 1945, Young Ick Lew, et al. eds., The Syngman Rhee Correspondence in English 1904-1948, vol. 1,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2009, p. 548. 38) 미국무부문서 895.01/8-845. Syngman Rhee to Truman, Aug. 8, 1945, ‘美國務省韓國關係文書⑧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아름出版社, 2004, p. 393.
 
  39) 長谷川毅, 앞의 책, pp. 369~371; 麻田貞雄, 「原爆投下の衝擊と降伏の決定」, 細谷千博·入江昭·後藤乾一·波多野澄雄 編, 『太平洋戰爭の終結 アジア·太平洋の戰後形成』, 柏書房, 1997, pp. 195~221 참조. 40) FRUS 1945, vol.Ⅵ, pp. 631~632. 41) 38선 획정의 경위와 그 문제점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성과로는 이완범, 『삼팔선 획정의 진실』, 지식산업사, (2001) 및 김기조, 『한반도 38선 분할의 역사』, 한국학술정보, (2006) 를 들 수 있다. 42) 長谷川毅, 앞의 책, pp. 407~408. 43)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게, 1997, p. 399. 44) 張俊河, 『돌베게』, 禾多出版社, 1982, p. 360.
 
  45) 「일제패망에 즈음한 긴급회의와 관련한 전문―사전트가 헬리웰에게 (1945. 8.1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국사편찬위원회, 2006, pp. 188~189. 46) 「臨時議政院會議 第39回」(1945.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 Ⅲ』, 국사편찬위원회, 2005, p. 151. 47) 「독수리작전 8월 월례보고서―쿠퍼가 스펜서에게(1945.8.2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14; 金俊燁, 『長征(2) 나의 光復軍時節(下)』, 나남, 1989, pp. 532~533. 48) Maochun Yu, OSS in China―Prelude to Cold War, Yale University Press, 1996, pp. 230~231. 49) ibid., p. 231. 50) 「한반도 진출을 촉구하는 전문―헤프너가 버드에게 (1945.8.1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190. 51) 『西京日報』 1945년 8월 12일자, 「한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곧 중경으로 출발―출발 전 서면담화 발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p. 267~268. 52) 「한국임시정부 주석 中, 美 원수에게 축전, 웨드마이어 장군에게는 해방에 협조를 요청」, 『西京日報』(1945. 8.1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p. 268~269. 53) 「서안의 김구 주석의 중경 복귀를 요청하는 전문―루스벨트가 사전트에게(1945.8.9)」, 「김구의 조속한 중경 복귀절차와 관련한 서한―민석린이 루스벨트에게(1945. 8.9)」, 「이범석의 임무와 관련한 전문―루스벨트가 사전트에게(1945.8.1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p. 184~185, p. 199. 54) 「3개팀의 한국파견 계획과 관련한 전문―헥터가 헤프너에게(1945.8.1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194.
 
  55) 「臨時議政院會議 第39回」(1945.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 Ⅲ』, p. 151; 金俊燁, 앞의 책, pp. 532~533. 56) 金俊燁, 앞의 책, p. 533. 57) 위의 책, p. 536. 58) 張俊河, 앞의 책, p. 363. 59) 「버드 대령의 임무와 관련한 전문―데이비스가 헤프너에게 (1945.8.1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p. 193~194. 60) 「한국파견 임무의 승인에 관련한 전문―헤프너가 버드에게 (1945.8.14)」, 「독수리작전 8월 월례보고서―쿠퍼가 스펜서에게 (1945.8.2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198. 61) Corey Ford, Donovan of OSS, Little, Brown & Company, 1970, p. 297. 62)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이하 HUSAFIK), part Ⅰ, ch. Ⅴ, 돌베게影印版, 1988, p. 3. 63) Maochun Yu, op. cit., pp. 230~232.
 
  64) 金俊燁, 앞의 책, p. 538. 65) 「報告: 今番國內進入經過에 關한 件 (1945.9.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261; 張俊河, 앞의 책, pp. 365~367. 66) 「報告: 今番國內進入經過에 關한 件 (1945.9.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 Ⅳ』, p. 161; 金俊燁, 앞의 책, p. 539. 67) 『북미시보(The Korean American Times)』, 1945년 8월 22일자 호외,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한국내지로 들어간다」. 68) 「臨時議政院會議 第39回」(1945.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 Ⅲ』, p. 151. 69) 『백범일지』, p.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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