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성종합대 출신으로 ‘당 간부’ 꿈꾸다 돌연 ‘반역자의 딸’로 낙인찍혀 서른에 탈북
⊙ “언어가 통하는 것 외에 모든 것을 대한민국에서 새로 배워”
⊙ “북에서는 자유북한방송을 ‘민족 반역자 중에서 가장 악질 반역자가 하는 방송’이라고 해”
⊙ “국정원 조사 받으면서도 ‘장군님의 딸로 죽겠다’던 나의 달라진 모습, 북한 주민에게 전하고 싶다”
이시영
1982년 양강도 해산 출생. 특목고 외국어학원, 김일성종합대 컴퓨터 단과대학 졸업 / 2012년 탈북, 자유북한방송 기자, 국장 역임, 現 자유북한방송 대표
⊙ “언어가 통하는 것 외에 모든 것을 대한민국에서 새로 배워”
⊙ “북에서는 자유북한방송을 ‘민족 반역자 중에서 가장 악질 반역자가 하는 방송’이라고 해”
⊙ “국정원 조사 받으면서도 ‘장군님의 딸로 죽겠다’던 나의 달라진 모습, 북한 주민에게 전하고 싶다”
이시영
1982년 양강도 해산 출생. 특목고 외국어학원, 김일성종합대 컴퓨터 단과대학 졸업 / 2012년 탈북, 자유북한방송 기자, 국장 역임, 現 자유북한방송 대표
조막만 한 얼굴에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체구의 야리야리한 손녀를 두고 친할머니, 외할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저 여성 당 간부라 함은 살집이 있어서 남자들을 휘어잡아야 하는데, 자가 그럴 수 있같어? 걱정이다 걱정.”
할머니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북한의 엘리트로 자라 ‘당 간부’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손녀딸이 ‘반역자의 딸’로 낙인찍혀 목숨을 걸고 탈북하고, 대한민국에서 북한 주민에게 실상을 알리는 대북(對北) 방송의 대표가 될 줄 말이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이사장이 20여 년간 이끌어오던 대표이사 자리를 이시영 국장에게 물려줬다. 지난 2월 4일에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이 있는 강서구 마곡동에서 이시영 대표를 만났다.
‘북한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북한의 특목고에 해당하는 외국어학원, 김일성종합대 컴퓨터 단과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큰 규모의 식당을 두 개나 운영했던 그는 서른이 다 되어서야 탈북해 2013년도에 한국 땅을 밟았다. 북한의 초(超) 엘리트에서 ‘반역자의 딸’로 신분이 수직 낙하한 기구한 사연이 있는데다, 아직 북에 가족이 남아 있기에 그는 조용히 살려고 했단다. 하지만 북한의 실상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이를 알리기 위해 TV 조선에서 방송한 〈모란봉 클럽〉에 출연하며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북한도 살 만한 곳이 아니냐’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서 ‘북한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낱낱이 얘기하고 싶어서 방송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막상 방송국에서 다른 탈북자 패널들을 만나보니 저와는 비교도 안 되게 사람 취급을 못 받으면서 살다가 넘어온 사람들이 많더군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 북한 사람들끼리도 서로 처지를 알지 못한다는 소리네요.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 가르치고, 가진 자나 배운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북한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철저한 계급 사회이고 나와 출신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너와 나는 다른 종자(種子)’라며 외면합니다. 북한의 상위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저와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 평등, 분배를 얘기하면서 세상 어디보다 계급 사회라니 아이러니하죠.
“왕과 신하, 노비가 있는 거죠.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 다시 태어났다 싶을 정도로 새로 배우는 것들이 많아요. 대한민국은 제가 북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몇천 배 대단한 세상이에요. 탈북 전에 라디오를 들으면서 막연하게 ‘남한은 이런 곳이겠구나’ 상상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세상입니다. 30년간 누구보다 북한을 찬양했던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에서 느낀 것을 북한 주민에게 전달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라디오 방송을 기다리는 북한 주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꽃제비가 재벌 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
〈모란봉 클럽〉에 출연하며 한국 생활에 적응해 가던 이시영 대표는 고향에서부터 삼촌이라고 부른 최정훈 당시 자유북한방송 국장을 따라 자유북한방송 멤버들과 1박 2일 야유회에 함께했다. 몇 달 뒤에 그는 김성민 이사장을 찾아가 일자리가 있는지를 물었다. 한국 회사에 다니면서 TV 출연을 하는 것이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김성민 이사장이 그러시더군요.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누구는 수준이 있네, 없네’ ‘공부를 많이 했네, 무식하네’라며 헐뜯는데 아무 쓸모없는 얘기라고요. 탈북민들은 고향을 떠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인데 서로 흠집 내는 것은 자신의 허물을 들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당신도 북한에서 엘리트였으니 그리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각자의 분야에서 북한 주민에게 진실을 전하는 일을 하면 된다.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았지만, 대한민국에서 재벌이 되어 통일 시대에 북한에 빌딩을 지을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가슴에 콕 와닿았습니다.”
― 태어날 때 조건은 나쁘지만, 본인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죠.
“당연한 말인데 그게 그렇게 놀라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일 하나라는 것, 그것에 동참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김 이사장은 ‘탈북민들이 자유북한방송을 디딤돌로 삼아서 대한민국에 제대로 적응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덧붙였어요. 북에서 배웠던 지식만으로 대한민국 사회에 잘 적응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럴 때 자유북한방송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있으면 조금 낫지 않겠느냐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 보통은 네게 기회를 줄 테니, 여기 뼈를 묻으라고 할 텐데요.
“그러게요(웃음). 오히려 여기서 이력을 충분히 쌓으라고 하시더군요.”
“김성민 이사장을 만난 것은 천운”
이시영 대표가 첫 업무로 주문받은 것은 ‘북한 주민용 기사 작성’이었다. 글이라고는 써본 적이 없던 이 대표는 ‘조선중앙통신’에서 ‘위대한 수령 동지께서’라고 쓰는 방식처럼 대한민국 찬양 기사 같은 것을 썼다. 김성민 이사장이 이 대표의 글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북한에서 기자는 별 볼 일 없는 직업이에요. 당에서 지시하는 대로 ‘위대한 수령 동지의 영도하에 올해 어느 농장에서 애초 계획의 300%를 초과 달성했다’라고 쓰는 사람이 기자입니다. 일반인이 장사해서 돈을 버는 것은 불법(不法)이기 때문에 돈과 관련된 취재거리도 없고, 체제 비판을 할 수도 없고, 사실 위대한 수령 동지가 다 하는 거니까 쓸 기사가 없습니다. 제가 쓴 기사를 보고 김성민 이사장이 북한식이라면서 ‘대한민국의 기자는 사실만 전달하는 사람이야. 그에 대한 의미 부여와 분석은 독자가 하는 것이지’라고 했습니다. 그때 또 놀랐죠. 당의 지침대로가 아니라 개개인이 알아서 판단한다는 것이 낯설어서요.”
― 온통 신기한 일투성이였군요.
“언어가 통한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교육받고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느꼈습니다. 실제 탈북자들도 처음은 대한민국의 자유를 느끼면서 행복해하다가 나중에 변질되고, 같은 탈북자끼리 사기치고 싸우고, 뒤에서 헐뜯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 그거야 탈북자뿐 아니라 어느 사회에나 있는 일이지요.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 완전히 새로 태어났습니다. 김성민 이사장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죠. 초창기 헤매던 제게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서 좋다’며 호방하게 웃었고, 실수를 할 때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며 칭찬해 줬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변함없는 분은 처음 뵀어요.”
“삶은 계란을 마음껏 먹는 세상”
이시영 대표는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묻는 말에 필요한 말만 정확히 골라서 답했고, 자기 의사 표현이 똑 부러졌다. 앳된 외모 탓에 혹여 그가 외부의 바람에 휩쓸릴까 걱정된다면 그건 기우(杞憂)에 불과할 것 같았다. 학습 능력이 빨랐던지라, 이 대표가 자유북한방송에 합류해 석 달 정도 지나니 업무가 어느 정도 손에 익었다. 김 이사장은 그에게 기사에 국한되지 말고 프로그램도 기획해 보라고 했다. 이시영 대표가 북에 있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나와 비슷하게 살다가 탈북해 남한으로 간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였다.
“방송에서 미국, 한국 정치권 뉴스, 북녘 동포를 위한 소식 등 여러 가지를 전해주는데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탈북하려면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하나, 탈북한 사람들은 정말 남한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을까였습니다.”
― 그게 제일 궁금할 것 같긴 합니다. 남한에서 어떤 당국에 잡혀간 것은 아닐까 궁금할 테고요.
“맞아요. 제가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면 북한 동포들이 ‘나도 탈북하면 저렇게 살 수 있을 거야’라는 마음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자유북한방송이 유튜브를 했는데, 저는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음식 얘기를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수백, 수천 가지 음식이 있고 진짜 맛있고 신기하다고요. 동영상으로 찍어 먹는 거를 보여줬습니다.”
― 뭐가 가장 신기하던가요. 음식의 가짓수, 아니면 퀄리티, 뭐가요?
“삶은 계란, 그게 가장 신기했습니다. 북한에서 남한 드라마를 보는데 찜질방에서 삶은 계란 먹는 장면이 자주 나와요. 북한에서 삶은 계란은 생일, 명절, 수학여행, 등산 가는 날에만 먹을 수 있거든요. 엄마가 다른 형제들 모르게 도시락 사발 밑에 한 알씩 넣어줍니다. 그런데 남한은 찜질방에서 매번 삶은 계란을 먹는 거예요. 게다가 나쁜 사람에게 날계란을 던집니다. 너무 이상했어요. 돌을 던져야지, 저 아까운 계란을 왜 던지나 싶어서요. 북한에서는 고기를 배급받아도 물에 빠뜨려서 멀건 국으로 먹는 것이 다인데 여기는 삼겹살을 불판에다 구워 먹어요. 더구나 여자들은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안 먹습니다. 저는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영상으로 찍었습니다.”
“도와달라고 하면 다들 흔쾌히 도와줘”
― 2012년에 탈북했는데 삶은 계란을 마음껏 먹는 것이 그토록 신기했다니요.
“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북한에서 식당 가는 사람은 돈 많은 부자예요. 여기는 삼시 세 끼를 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꿈도 못 꾸죠. 그래서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았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일하면 삼시 세 끼 식당에서 밥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북한에서 여자가 감히 어떻게 운전을 하나요? 자동차도 없을뿐더러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참 희한한 것이 탈북자들이 펜션으로 1박 2일 야유회를 가면 주차장 사이즈부터 확인해야 해요. 같은 동네 사는 사람들은 카풀해서 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요. 탈북자들에게는 약간의 보상심리랄까, 남한에 와서 자동차도 돈 주고 사고 운전도 마음껏 한다는 것, 그런 마음이 남아서 꼭 혼자 차를 몰고 옵니다(웃음).”
― 북에서 라디오를 듣는 청취자에서 프로그램 기획자가 되어보니 어땠나요.
“누군가가 듣는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정말 신기하고 설레서 프로그램을 수없이 만들었습니다. ‘탈북하려면 누구를 통해서 어디로 도망쳐라’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이건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북한 주민뿐만 아니라 보위부도 듣고 있으니까요. 북한 주민들의 인식 개선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북한 사람들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탈북자들은 남한에 오면 자기가 모르는 것이 탄로 날까 봐 몰라도 아는 척을 하곤 해요. 제가 경험한 남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 탈북자라서 뭐를 몰라요. 도와주실래요?’라고 물으면 열 명이면 열 명이 다들 흔쾌히 도와줬습니다. 그게 대한민국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물어가면서 하나하나 배웠습니다.
하루는 김성민 이사장이 ‘예산안 짜는 것이 어려운데 해보겠니’라고 하기에 프린트한 종이를 잔뜩 들고 갔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누구한테 물어서라도, 필요하면 통일부 앞마당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배우겠다고 말하면서요(웃음). ‘이사장님이 외부 활동을 하신다면 저는 방송 안살림을 책임질게요’라고 당돌하게 말했는데 그런 것을 좋게 봐주셨습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자유북한방송이라는 게 진짜 있어요?’
― 자유북한방송에서 일하면서 보람을 느꼈을 때는요.
“탈북자들이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때 ‘여기 정말 자유북한방송이 있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국정원 조사를 마치자마자 찾아옵니다. 북에서는 탈북민이 주축이 된 자유북한방송을 ‘민족 반역자 중에서 가장 악질 반역자가 하는 방송’이라 말합니다. 우리 방송을 들었다 하면 처벌이 더욱 세집니다. 탈북자들이 방송국을 찾아와서 ‘정말 이 방송국이 있네’라고 말할 때 뿌듯했습니다.”
― 반면 상처를 받는 일도 있었겠죠.
“금전적으로 넉넉지 못하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우리를 다르게 보는 것은 각오했어요. 그런데 방송국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나가서 우리를 헐뜯을 때는 많이 속상했습니다. 김성민 이사장이 ‘우리를 딛고 일어서서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것만큼 뿌듯한 것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우리를 깎아내리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라고 할 때 정말 이 사람은 그릇이 다르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친북(親北) 세력이 우리를 공격할 때는 오히려 신이 났습니다. ‘와, 우리가 얼마나 잘하기에’ 싶어서 늘 파이팅 하고 싶던데요(웃음).”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으리라’가 신념
이시영 대표는 양강도 해산에서 태어났다. 고등중학교 6년을 양강도에 있는 특목고 외국어학원을 다녔고 김일성종합대학 컴퓨터 단과대학을 졸업했다. 당시 김정일은 1999년도에 러시아를 다녀오고 그곳의 컴퓨터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김일성종합대학의 자동화학부에 있던 컴퓨터 학부를 단과대학으로 승격시켜서 3년 6개월 만에 졸업시키는 속성반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통상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이라고 해도 농촌 동원, 건설 현장 지원 등에 나가느라 졸업 때까지 6~7년이 걸리기 마련이다. 1기 출신인 이시영 대표는 4학년 언니들보다 빨리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부친은 북한 정권의 해외 노동자 파견으로 러시아에서 5년간 보위원으로 일하다 세관에 배치를 받아 달러를 다뤘다. 어머니는 당 간부 출신인데 아버지 덕에 ‘돈 걱정 없는 당 간부’로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해산 시장을 지냈다. 어머니는 다섯 자매였는데 큰이모는 우리로 치면 판사로 일했고, 두 명의 이모는 의과대학, 교대를 졸업했다. 친할아버지댁은 김일성이 다녀간 유적지로 지정돼 집 앞 화단을 당에서 관리해 줬다.
“대학 입학 때까지 제 신념은 ‘나는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친가, 외가 모두 장군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집안이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희한했던 것은 권력가로 진출하지 않은 이모가 둘 있었는데 북한 국영 식당 지배인인 이모의 허세가 장난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일개 식당 지배인인 이모 앞에서 조직비서, 책임비서, 도당비서들이 다들 굽실거렸습니다. 이모가 싸주는 도시락과 담배, 맥주를 받아가려고요.
판사였던 이모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사람들이 이모한테 ‘오늘 집으로 기름 넣었습네다, 쌀 좀 보냈습네다’라고 하면 큰이모는 그걸 그렇게 고마워했습니다. 가끔은 집으로 돌아와서 ‘그 사람은 잘못이 없는데…’라며 자신이 판결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 사회에서 권력을 잡더라도 돈을 다루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김대(그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이렇게 지칭했다)에 들어가기 위해서 평양에 왔는데 또 다른 세상이더군요. 여태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제일 못사는 축에 속했습니다.”
― 평양은 평양이군요.
“출신 성분을 얘기하는데 저와 차원이 달랐고, 수업에 들어오면서 남한 수집물이 들어 있는 USB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다니더군요.”
― 남한물을 보기만 해도 교화형, 때로는 숙청 아닙니까.
“나를 건드릴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처럼 당당하게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도 돌연 변해서 장군님 찬양을 하는 거예요. 제가 분명히 남한물 소지한 것을 봤는데 ‘장군님, 장군님’을 외치면서 목이 쉴 때까지 부르는 겁니다. 그때 사람은 앞과 뒤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양에서 식당 차려
북한에서는 지방에서 상경해 평양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여자들의 경우 결혼하지 않으면 평양에 배치를 받지 못한다. 이시영 대표는 대학 졸업 후에 다시 양강도 도청으로 배치받았다. 그는 조직 문서원으로서 아침마다 출근해 당비서 방을 청소하고, 산처럼 쌓인 담배꽁초를 치우는 허드렛일을 맡았다. 도청 공무원임에도 월급도 없고, 배급도 없었다. 컴퓨터가 없어 온종일 먹지에 대고 회의록을 베끼고 나면 손이 새까매졌다. 의대를 졸업한 이후에 의사의 길을 걷지 않고 평양에서 개인 식당을 했던 이모가 ‘평양은 아무나 올라올 수 없다. 식당을 운영해 임시 거주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식당을 하려면 미화 5000달러 정도가 필요했습니다. 아버지께 ‘저 시집갈 때 주시려고 모아놓은 돈 있으면 미리 주세요. 평양 가서 식당을 운영하려고요’라며 사정을 했습니다. 평양의 좋은 집안 자제를 만나 결혼하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많이 망설였지만, 제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 아버지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겁니다.
“그럼요. 아버지는 늘 저를 믿어주셨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식인데 아버지는 러시아에 5년간 있다 오신 다음에 제 남동생을 앉혀두고 ‘내가 큰 나라에 가보니 여자들을 최우선으로 대접하더라. 누나를 극진히 대해라’고 할 정도로 늘 저를 위해주셨습니다.”
이시영 대표는 아버지가 준 달러를 들고 평양에서 식당을 열었다. 평양냉면 위주로 양꼬치, 국수 등을 팔았다. 스무 살짜리 식당 접객원을 뽑고, 김일성종합대 동창들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그렇게 반년 만에 식당이 자리 잡혔다. 2006년 당시로서는 식당 주인이 20대인 것도, 종업원들이 20대 초반인 것도 드문 일이었다. 식당이 번창하자 공영 식당의 위층에 있던 2층 맥줏집을 개인에게 넘긴다고 하기에 그것도 이어받았다. 1층 국영식당은 6시 반까지 운영하고, 2층 맥줏집은 7시부터 운영하는 형태였다.
공짜 술, 공짜 밥이 일상인 북한 간부들
― 평양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것은 불법 아닙니까.
“불법이죠. 하지만 장마당처럼 눈감아 주는 겁니다. 경찰들이 숱하게 왔는데, 그들은 신분증이 곧 돈이에요. ‘우리 이 구역 안전부 감찰이야’ 하고 들이닥치면 그냥 테이블 내주고 공짜 술을 줍니다. 돌아갈 때면 담배도 한 갑씩 찔러 줍니다.”
―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나요.
“매일 최소한 열 테이블은 공짜 테이블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오면 식당 주인은 만날 숨을 수밖에 없었어요.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면 무한정 공짜를 요구하니까요.”
― 진짜 돈 내는 손님은요?
“어떤 날은 공짜가 열 테이블, 돈 내는 손님은 세 테이블인 때도 있었어요. 안전부 감찰이래도 월급, 배급이 일절 없으니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낮에는 공짜 밥을 먹고, 저녁에는 공짜 술을 먹는 겁니다. 너무 심하다 싶어 ‘너보다 높은 계급에 얘기할 거야’라고 윽박지르면 매일 오다가 3일에 한 번꼴로 오고….”
― 날강도가 따로 없네요.
“제가 남한에 와서 제일 신기한 것 중의 하나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반드시 계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간부 사모님들께 인사를 드릴 때 가끔 ‘어머, 그 반지 예쁘다’고 하면 그건 빼서 달라는 얘기였어요. 두 번 얘기했는데도 눈치 없이 주지 않으면 다음부터 슬슬 제재가 들어옵니다.”
‘지배인 만세’
그렇게 살던 2006년 4월에 탈이 났다. 4년 아래 남동생은 키가 178cm로 훤칠했는데 어려서부터 백혈구 감소증에 시달려 병으로 인해 집에서 가까운 경무부(헌병대)에서 군사경찰로 근무했다. 북한군에서는 ‘풀과 고기를 바꾸자’라는 김정일의 방침을 관철한다고 군부대마다 염소와 토끼를 키운다. 군인들이 교대제로 염소방목을 하는데 몸이 아픈 동생이 염소 방목을 나갔다가 산에서 잠이 들어 부대로 돌아 올 때쯤 염소 두 마리를 잃어버렸다. 그러잖아도 동생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분대장이 이를 빌미로 남동생을 구타했고, 남동생은 병원에 실려가서 한 달 만에 사망했다. 심장이 약했던 아버지는 이 충격으로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연이어 아들과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직장에 출근해야 함에도 충격으로 인해 몸져누웠다.
식음을 전폐하는 어머니를 보고 이모들은 평양에 사는 딸 곁으로 가라고 했다. 평양에는 혼자 사는 과부들을 위한 당 간부 일거리가 있었다. 어머니는 평양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슬픔을 잊으려는 듯 일에 매진했다.
“애초 어머니 자리에 가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엄마가 직원에게 월급 준다, 배급 준다’며 투서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중앙당에서는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니 잘못을 따지지 마라’고 덮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굉장히 끈질겼어요. 장성택 라인으로 투서를 지속적으로 넣었고, 엄마는 엄마대로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일할 뿐’이라며 편지를 넣었습니다. ‘월급 준다’는 말에도 별 반응이 없던 중앙당은 의외의 곳에서 어머니를 몰아세웠습니다.”
― 어떤 대목에서요?
“직원들이 지배인(어머니)이 잘해주니까 정말 고맙다면서, 가끔 회식을 할 때 ‘지배인 만세’를 한 겁니다. 일종의 건배사였던 거죠. 이 얘기가 전해지자 난리가 났습니다. 어머니가 반(反)정부의 기조단체를 결성했다면서 한순간에 반역자가 된 거예요. 당 간부들은 어머니에게 얼른 지방으로 내려가 숨어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일순간에 이시영 대표의 어머니는 수배지가 주요 기차역에 붙는 반역자가 됐다. 군경들이 할머니, 이모, 이시영 대표 등 온 가족을 따라다니며 감시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지나자 다들 지쳤다. 이모들은 이 대표의 어머니에게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며 “네가 죽어야 우리가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이시영 대표를 불렀다. 이미 최후를 결심한 사람 같았다. 이 대표는 울며불며 엄마에게 매달렸다.
탈북
인터뷰 내내 강단 있고, 똑 부러진 모습을 보였던 이 대표는 이 대목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이날의 기억이 선명해 보였다.
“‘나는 엄마가 반동이든 정치범으로 끌려가든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며 펑펑 울었습니다. 엄마가 ‘그건 사는 게 아니야. 나는 언제 햇빛 한 번 보며 걷니’라고 하시더군요. 그제야 우리 엄마가 지난 2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가 실감이 났습니다. 울며불며 매달리자 엄마가 ‘그럼, 우리 북을 떠날까?’라고 했습니다. 엄마가 숨어 지내면서 라디오 방송을 매일 들었거든요.”
― 그래서 남한으로의 탈북을 결심한 건가요.
“아니요. 엄마가 말하기에 ‘그건 안 돼. 꽃제비는 북에서 탄압받았으니까 남한에서 불쌍하다고 받아준 거지만, 우리는 여기서 혜택을 다 보고 충성했는데 왜 받아주겠어.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죽일 거야’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별다른 방법이 없더군요. 결국 엄마를 남한으로 보내고, 엄마가 ‘장군님 말씀에 따른 것밖에 없는데 억울하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오해가 풀리면 다시 북으로 돌아오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탈북 루트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이시영 대표는 당시에도 평양에서 잘나가고 있었고, 어머니는 수배자인지라 마땅한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1년 넘게 다양한 방법을 알아본 끝에 마약을 하고, 밀수하는 고향 친구들과 수시로 어울리며 밀수꾼으로 위장해 탈북하기로 했다.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시영 대표에게 친척들은 사촌 동생을 스파이로 붙였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2012년 11월의 어느 날, 이시영 대표는 어머니와 사촌 동생을 데리고 탈북했다. 강을 건널 때 온몸이 얼어붙어 어머니는 저체온증에 시달려 사선(死線)을 넘나들고, 여성 셋은 손발톱이 모두 빠져 한족이 사는 집에서 의사소통도 되지 않았지만 두 달간 머물며 치료해야 했다. 두 사람은 먼저 서울로 떠났고, 이시영 대표는 2013년 4월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때는 바야흐로 메르스 시국, 국정원 직원은 이 대표에게 마스크를 건넸다.
‘비록 이곳이 남한이라도 나는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겠다’
“아, 남한에서는 나를 바이러스 취급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에 데려가서 피검사한다기에 ‘이놈들이 탈북자를 피 뽑아 죽인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이구나’ 싶었습니다. 의사가 엄마 이름을 대면서 잘 지낸다고 했지만, 엄마 얼굴을 보지 못하니 의심은 계속 쌓여갔습니다. 국정원에 조사를 받으러 갔더니 CCTV가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여기나 저기나 감시는 똑같구나’ 싶어서 계속 북한 찬양 노래를 불렀습니다. ‘비록 이곳이 남한이라도 나는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끝없이 의심했군요.
“네. 창밖을 보니 사람들이 걸어오지 않고 차를 타고 오기에 그건 좀 신기했습니다. 조사를 받을 때 중국에 오래 거주하다가 넘어온 두 명과 같이 생활했어요. 그 언니들한테 ‘죽이려면 빨리 죽이지 왜 이렇게 잘해주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침마다 바나나, 우유를 주고, 북에서 비싼 ‘미샤’ 화장품이며 생리대를 풍족하게 줬거든요. 두 명이 저를 보고서 ‘이래서 직행들은 안 돼. 아무것도 몰라’라고 할 때도 저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습니다.”
― 다시 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랬겠지요.
“저도 북에서 라디오를 들어서 상상은 했지만, 엄마의 안전이 보장된 후에 저는 다시 돌아가면 그뿐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국정원 직원이 삼성 컴퓨터를 제 앞에 놓고 ‘시작합시다’라고 하더군요. 뭘 시작하느냐고 했더니 ‘다 알고 왔다’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또 쳐다봤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제가 김일성대 컴퓨터학부를 졸업한 해커로 생각하고 있더군요. 저는 졸업 후에는 컴퓨터를 다룬 적이 없는데…. 하다못해 남한으로 내려온 경위라도 컴퓨터로 적으라고 했는데, 자판이 북한과 달라서 독수리 타법으로 치니까 국정원에서 황당해하더군요(웃음).”
“북한 정권 무너지는 날까지 걷겠다”
국정원 조사를 끝마치고 꿈에 그리던 엄마를 만났다. 그의 어머니는 진찰 과정에서 병이 발견되어, 병원에서 치료 중이었다. 모녀는 국정원이 제공한 11평짜리 아파트에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3년은 많이 힘들었단다. 북한에서 잘살았던 때 생각이 나고, 남한의 모든 것이 새로워서 받아들이기가 꽤 어려웠다.
“솔직히 북에서 살 때는 잘난 척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출신 성분 따지고 그랬습니다. 사람들끼리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따뜻한 마음, 나눔, 희생하는 마음은 모두 대한민국에서 배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탈북민이 끊겼지만, 이 땅에 있는 3만5000여 명의 탈북자가 북한 정권의 피해자이자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 방송국을 어떻게 꾸려갈 생각입니까.
“꿈꿔본 적도 없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그냥 김성민 이사장의 말씀을 잘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소식을 전할 계획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정말 행복하니까, 아직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욱 불쌍합니다. ‘나 정말 잘 살거든. 너희 때문에 너무나 가슴이 아파’라는 말을 방송을 통해 꼭 전하고 싶습니다. 방송이 번창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초심(初心)은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북한 정권의 붕괴, 딱 하나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가지겠지만, 불법 유턴하지 않고, 꼼수 부리지 않고 묵묵히 걷겠습니다.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그들이 온전한 자유를 찾는 날까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고저 여성 당 간부라 함은 살집이 있어서 남자들을 휘어잡아야 하는데, 자가 그럴 수 있같어? 걱정이다 걱정.”
할머니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북한의 엘리트로 자라 ‘당 간부’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손녀딸이 ‘반역자의 딸’로 낙인찍혀 목숨을 걸고 탈북하고, 대한민국에서 북한 주민에게 실상을 알리는 대북(對北) 방송의 대표가 될 줄 말이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이사장이 20여 년간 이끌어오던 대표이사 자리를 이시영 국장에게 물려줬다. 지난 2월 4일에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이 있는 강서구 마곡동에서 이시영 대표를 만났다.
‘북한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북한의 특목고에 해당하는 외국어학원, 김일성종합대 컴퓨터 단과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큰 규모의 식당을 두 개나 운영했던 그는 서른이 다 되어서야 탈북해 2013년도에 한국 땅을 밟았다. 북한의 초(超) 엘리트에서 ‘반역자의 딸’로 신분이 수직 낙하한 기구한 사연이 있는데다, 아직 북에 가족이 남아 있기에 그는 조용히 살려고 했단다. 하지만 북한의 실상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이를 알리기 위해 TV 조선에서 방송한 〈모란봉 클럽〉에 출연하며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북한도 살 만한 곳이 아니냐’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서 ‘북한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낱낱이 얘기하고 싶어서 방송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막상 방송국에서 다른 탈북자 패널들을 만나보니 저와는 비교도 안 되게 사람 취급을 못 받으면서 살다가 넘어온 사람들이 많더군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 북한 사람들끼리도 서로 처지를 알지 못한다는 소리네요.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 가르치고, 가진 자나 배운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북한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철저한 계급 사회이고 나와 출신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너와 나는 다른 종자(種子)’라며 외면합니다. 북한의 상위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저와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 평등, 분배를 얘기하면서 세상 어디보다 계급 사회라니 아이러니하죠.
“왕과 신하, 노비가 있는 거죠.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 다시 태어났다 싶을 정도로 새로 배우는 것들이 많아요. 대한민국은 제가 북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몇천 배 대단한 세상이에요. 탈북 전에 라디오를 들으면서 막연하게 ‘남한은 이런 곳이겠구나’ 상상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세상입니다. 30년간 누구보다 북한을 찬양했던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에서 느낀 것을 북한 주민에게 전달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라디오 방송을 기다리는 북한 주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꽃제비가 재벌 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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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8일에 열린 ‘자유북한방송 20주년’ 송년회에서 김성민 이사장과 함께한 이시영 대표. |
“김성민 이사장이 그러시더군요.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누구는 수준이 있네, 없네’ ‘공부를 많이 했네, 무식하네’라며 헐뜯는데 아무 쓸모없는 얘기라고요. 탈북민들은 고향을 떠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인데 서로 흠집 내는 것은 자신의 허물을 들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당신도 북한에서 엘리트였으니 그리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각자의 분야에서 북한 주민에게 진실을 전하는 일을 하면 된다.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았지만, 대한민국에서 재벌이 되어 통일 시대에 북한에 빌딩을 지을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가슴에 콕 와닿았습니다.”
― 태어날 때 조건은 나쁘지만, 본인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죠.
“당연한 말인데 그게 그렇게 놀라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일 하나라는 것, 그것에 동참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김 이사장은 ‘탈북민들이 자유북한방송을 디딤돌로 삼아서 대한민국에 제대로 적응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덧붙였어요. 북에서 배웠던 지식만으로 대한민국 사회에 잘 적응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럴 때 자유북한방송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있으면 조금 낫지 않겠느냐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 보통은 네게 기회를 줄 테니, 여기 뼈를 묻으라고 할 텐데요.
“그러게요(웃음). 오히려 여기서 이력을 충분히 쌓으라고 하시더군요.”
“김성민 이사장을 만난 것은 천운”
이시영 대표가 첫 업무로 주문받은 것은 ‘북한 주민용 기사 작성’이었다. 글이라고는 써본 적이 없던 이 대표는 ‘조선중앙통신’에서 ‘위대한 수령 동지께서’라고 쓰는 방식처럼 대한민국 찬양 기사 같은 것을 썼다. 김성민 이사장이 이 대표의 글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북한에서 기자는 별 볼 일 없는 직업이에요. 당에서 지시하는 대로 ‘위대한 수령 동지의 영도하에 올해 어느 농장에서 애초 계획의 300%를 초과 달성했다’라고 쓰는 사람이 기자입니다. 일반인이 장사해서 돈을 버는 것은 불법(不法)이기 때문에 돈과 관련된 취재거리도 없고, 체제 비판을 할 수도 없고, 사실 위대한 수령 동지가 다 하는 거니까 쓸 기사가 없습니다. 제가 쓴 기사를 보고 김성민 이사장이 북한식이라면서 ‘대한민국의 기자는 사실만 전달하는 사람이야. 그에 대한 의미 부여와 분석은 독자가 하는 것이지’라고 했습니다. 그때 또 놀랐죠. 당의 지침대로가 아니라 개개인이 알아서 판단한다는 것이 낯설어서요.”
― 온통 신기한 일투성이였군요.
“언어가 통한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교육받고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느꼈습니다. 실제 탈북자들도 처음은 대한민국의 자유를 느끼면서 행복해하다가 나중에 변질되고, 같은 탈북자끼리 사기치고 싸우고, 뒤에서 헐뜯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 그거야 탈북자뿐 아니라 어느 사회에나 있는 일이지요.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 완전히 새로 태어났습니다. 김성민 이사장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죠. 초창기 헤매던 제게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서 좋다’며 호방하게 웃었고, 실수를 할 때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며 칭찬해 줬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변함없는 분은 처음 뵀어요.”
“삶은 계란을 마음껏 먹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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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자유북한주간 행사에 참여한 이시영 대표.(왼쪽에서 네 번째) |
“방송에서 미국, 한국 정치권 뉴스, 북녘 동포를 위한 소식 등 여러 가지를 전해주는데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탈북하려면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하나, 탈북한 사람들은 정말 남한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을까였습니다.”
― 그게 제일 궁금할 것 같긴 합니다. 남한에서 어떤 당국에 잡혀간 것은 아닐까 궁금할 테고요.
“맞아요. 제가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면 북한 동포들이 ‘나도 탈북하면 저렇게 살 수 있을 거야’라는 마음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자유북한방송이 유튜브를 했는데, 저는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음식 얘기를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수백, 수천 가지 음식이 있고 진짜 맛있고 신기하다고요. 동영상으로 찍어 먹는 거를 보여줬습니다.”
― 뭐가 가장 신기하던가요. 음식의 가짓수, 아니면 퀄리티, 뭐가요?
“삶은 계란, 그게 가장 신기했습니다. 북한에서 남한 드라마를 보는데 찜질방에서 삶은 계란 먹는 장면이 자주 나와요. 북한에서 삶은 계란은 생일, 명절, 수학여행, 등산 가는 날에만 먹을 수 있거든요. 엄마가 다른 형제들 모르게 도시락 사발 밑에 한 알씩 넣어줍니다. 그런데 남한은 찜질방에서 매번 삶은 계란을 먹는 거예요. 게다가 나쁜 사람에게 날계란을 던집니다. 너무 이상했어요. 돌을 던져야지, 저 아까운 계란을 왜 던지나 싶어서요. 북한에서는 고기를 배급받아도 물에 빠뜨려서 멀건 국으로 먹는 것이 다인데 여기는 삼겹살을 불판에다 구워 먹어요. 더구나 여자들은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안 먹습니다. 저는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영상으로 찍었습니다.”
“도와달라고 하면 다들 흔쾌히 도와줘”
― 2012년에 탈북했는데 삶은 계란을 마음껏 먹는 것이 그토록 신기했다니요.
“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북한에서 식당 가는 사람은 돈 많은 부자예요. 여기는 삼시 세 끼를 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꿈도 못 꾸죠. 그래서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았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일하면 삼시 세 끼 식당에서 밥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북한에서 여자가 감히 어떻게 운전을 하나요? 자동차도 없을뿐더러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참 희한한 것이 탈북자들이 펜션으로 1박 2일 야유회를 가면 주차장 사이즈부터 확인해야 해요. 같은 동네 사는 사람들은 카풀해서 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요. 탈북자들에게는 약간의 보상심리랄까, 남한에 와서 자동차도 돈 주고 사고 운전도 마음껏 한다는 것, 그런 마음이 남아서 꼭 혼자 차를 몰고 옵니다(웃음).”
― 북에서 라디오를 듣는 청취자에서 프로그램 기획자가 되어보니 어땠나요.
“누군가가 듣는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정말 신기하고 설레서 프로그램을 수없이 만들었습니다. ‘탈북하려면 누구를 통해서 어디로 도망쳐라’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이건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북한 주민뿐만 아니라 보위부도 듣고 있으니까요. 북한 주민들의 인식 개선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북한 사람들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탈북자들은 남한에 오면 자기가 모르는 것이 탄로 날까 봐 몰라도 아는 척을 하곤 해요. 제가 경험한 남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 탈북자라서 뭐를 몰라요. 도와주실래요?’라고 물으면 열 명이면 열 명이 다들 흔쾌히 도와줬습니다. 그게 대한민국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물어가면서 하나하나 배웠습니다.
하루는 김성민 이사장이 ‘예산안 짜는 것이 어려운데 해보겠니’라고 하기에 프린트한 종이를 잔뜩 들고 갔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누구한테 물어서라도, 필요하면 통일부 앞마당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배우겠다고 말하면서요(웃음). ‘이사장님이 외부 활동을 하신다면 저는 방송 안살림을 책임질게요’라고 당돌하게 말했는데 그런 것을 좋게 봐주셨습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자유북한방송이라는 게 진짜 있어요?’
― 자유북한방송에서 일하면서 보람을 느꼈을 때는요.
“탈북자들이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때 ‘여기 정말 자유북한방송이 있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국정원 조사를 마치자마자 찾아옵니다. 북에서는 탈북민이 주축이 된 자유북한방송을 ‘민족 반역자 중에서 가장 악질 반역자가 하는 방송’이라 말합니다. 우리 방송을 들었다 하면 처벌이 더욱 세집니다. 탈북자들이 방송국을 찾아와서 ‘정말 이 방송국이 있네’라고 말할 때 뿌듯했습니다.”
― 반면 상처를 받는 일도 있었겠죠.
“금전적으로 넉넉지 못하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우리를 다르게 보는 것은 각오했어요. 그런데 방송국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나가서 우리를 헐뜯을 때는 많이 속상했습니다. 김성민 이사장이 ‘우리를 딛고 일어서서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것만큼 뿌듯한 것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우리를 깎아내리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라고 할 때 정말 이 사람은 그릇이 다르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친북(親北) 세력이 우리를 공격할 때는 오히려 신이 났습니다. ‘와, 우리가 얼마나 잘하기에’ 싶어서 늘 파이팅 하고 싶던데요(웃음).”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으리라’가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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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에 북한을 방문한 해외 동포가 촬영한 평양시의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상관없음. 사진=뉴시스 |
“대학 입학 때까지 제 신념은 ‘나는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친가, 외가 모두 장군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집안이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희한했던 것은 권력가로 진출하지 않은 이모가 둘 있었는데 북한 국영 식당 지배인인 이모의 허세가 장난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일개 식당 지배인인 이모 앞에서 조직비서, 책임비서, 도당비서들이 다들 굽실거렸습니다. 이모가 싸주는 도시락과 담배, 맥주를 받아가려고요.
판사였던 이모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사람들이 이모한테 ‘오늘 집으로 기름 넣었습네다, 쌀 좀 보냈습네다’라고 하면 큰이모는 그걸 그렇게 고마워했습니다. 가끔은 집으로 돌아와서 ‘그 사람은 잘못이 없는데…’라며 자신이 판결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 사회에서 권력을 잡더라도 돈을 다루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김대(그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이렇게 지칭했다)에 들어가기 위해서 평양에 왔는데 또 다른 세상이더군요. 여태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제일 못사는 축에 속했습니다.”
― 평양은 평양이군요.
“출신 성분을 얘기하는데 저와 차원이 달랐고, 수업에 들어오면서 남한 수집물이 들어 있는 USB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다니더군요.”
― 남한물을 보기만 해도 교화형, 때로는 숙청 아닙니까.
“나를 건드릴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처럼 당당하게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도 돌연 변해서 장군님 찬양을 하는 거예요. 제가 분명히 남한물 소지한 것을 봤는데 ‘장군님, 장군님’을 외치면서 목이 쉴 때까지 부르는 겁니다. 그때 사람은 앞과 뒤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양에서 식당 차려
북한에서는 지방에서 상경해 평양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여자들의 경우 결혼하지 않으면 평양에 배치를 받지 못한다. 이시영 대표는 대학 졸업 후에 다시 양강도 도청으로 배치받았다. 그는 조직 문서원으로서 아침마다 출근해 당비서 방을 청소하고, 산처럼 쌓인 담배꽁초를 치우는 허드렛일을 맡았다. 도청 공무원임에도 월급도 없고, 배급도 없었다. 컴퓨터가 없어 온종일 먹지에 대고 회의록을 베끼고 나면 손이 새까매졌다. 의대를 졸업한 이후에 의사의 길을 걷지 않고 평양에서 개인 식당을 했던 이모가 ‘평양은 아무나 올라올 수 없다. 식당을 운영해 임시 거주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식당을 하려면 미화 5000달러 정도가 필요했습니다. 아버지께 ‘저 시집갈 때 주시려고 모아놓은 돈 있으면 미리 주세요. 평양 가서 식당을 운영하려고요’라며 사정을 했습니다. 평양의 좋은 집안 자제를 만나 결혼하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많이 망설였지만, 제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 아버지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겁니다.
“그럼요. 아버지는 늘 저를 믿어주셨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식인데 아버지는 러시아에 5년간 있다 오신 다음에 제 남동생을 앉혀두고 ‘내가 큰 나라에 가보니 여자들을 최우선으로 대접하더라. 누나를 극진히 대해라’고 할 정도로 늘 저를 위해주셨습니다.”
이시영 대표는 아버지가 준 달러를 들고 평양에서 식당을 열었다. 평양냉면 위주로 양꼬치, 국수 등을 팔았다. 스무 살짜리 식당 접객원을 뽑고, 김일성종합대 동창들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그렇게 반년 만에 식당이 자리 잡혔다. 2006년 당시로서는 식당 주인이 20대인 것도, 종업원들이 20대 초반인 것도 드문 일이었다. 식당이 번창하자 공영 식당의 위층에 있던 2층 맥줏집을 개인에게 넘긴다고 하기에 그것도 이어받았다. 1층 국영식당은 6시 반까지 운영하고, 2층 맥줏집은 7시부터 운영하는 형태였다.
공짜 술, 공짜 밥이 일상인 북한 간부들
― 평양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것은 불법 아닙니까.
“불법이죠. 하지만 장마당처럼 눈감아 주는 겁니다. 경찰들이 숱하게 왔는데, 그들은 신분증이 곧 돈이에요. ‘우리 이 구역 안전부 감찰이야’ 하고 들이닥치면 그냥 테이블 내주고 공짜 술을 줍니다. 돌아갈 때면 담배도 한 갑씩 찔러 줍니다.”
―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나요.
“매일 최소한 열 테이블은 공짜 테이블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오면 식당 주인은 만날 숨을 수밖에 없었어요.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면 무한정 공짜를 요구하니까요.”
― 진짜 돈 내는 손님은요?
“어떤 날은 공짜가 열 테이블, 돈 내는 손님은 세 테이블인 때도 있었어요. 안전부 감찰이래도 월급, 배급이 일절 없으니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낮에는 공짜 밥을 먹고, 저녁에는 공짜 술을 먹는 겁니다. 너무 심하다 싶어 ‘너보다 높은 계급에 얘기할 거야’라고 윽박지르면 매일 오다가 3일에 한 번꼴로 오고….”
― 날강도가 따로 없네요.
“제가 남한에 와서 제일 신기한 것 중의 하나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반드시 계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간부 사모님들께 인사를 드릴 때 가끔 ‘어머, 그 반지 예쁘다’고 하면 그건 빼서 달라는 얘기였어요. 두 번 얘기했는데도 눈치 없이 주지 않으면 다음부터 슬슬 제재가 들어옵니다.”
‘지배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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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대표(맨 오른쪽)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준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한 모습. |
식음을 전폐하는 어머니를 보고 이모들은 평양에 사는 딸 곁으로 가라고 했다. 평양에는 혼자 사는 과부들을 위한 당 간부 일거리가 있었다. 어머니는 평양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슬픔을 잊으려는 듯 일에 매진했다.
“애초 어머니 자리에 가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엄마가 직원에게 월급 준다, 배급 준다’며 투서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중앙당에서는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니 잘못을 따지지 마라’고 덮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굉장히 끈질겼어요. 장성택 라인으로 투서를 지속적으로 넣었고, 엄마는 엄마대로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일할 뿐’이라며 편지를 넣었습니다. ‘월급 준다’는 말에도 별 반응이 없던 중앙당은 의외의 곳에서 어머니를 몰아세웠습니다.”
― 어떤 대목에서요?
“직원들이 지배인(어머니)이 잘해주니까 정말 고맙다면서, 가끔 회식을 할 때 ‘지배인 만세’를 한 겁니다. 일종의 건배사였던 거죠. 이 얘기가 전해지자 난리가 났습니다. 어머니가 반(反)정부의 기조단체를 결성했다면서 한순간에 반역자가 된 거예요. 당 간부들은 어머니에게 얼른 지방으로 내려가 숨어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일순간에 이시영 대표의 어머니는 수배지가 주요 기차역에 붙는 반역자가 됐다. 군경들이 할머니, 이모, 이시영 대표 등 온 가족을 따라다니며 감시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지나자 다들 지쳤다. 이모들은 이 대표의 어머니에게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며 “네가 죽어야 우리가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이시영 대표를 불렀다. 이미 최후를 결심한 사람 같았다. 이 대표는 울며불며 엄마에게 매달렸다.
탈북
인터뷰 내내 강단 있고, 똑 부러진 모습을 보였던 이 대표는 이 대목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이날의 기억이 선명해 보였다.
“‘나는 엄마가 반동이든 정치범으로 끌려가든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며 펑펑 울었습니다. 엄마가 ‘그건 사는 게 아니야. 나는 언제 햇빛 한 번 보며 걷니’라고 하시더군요. 그제야 우리 엄마가 지난 2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가 실감이 났습니다. 울며불며 매달리자 엄마가 ‘그럼, 우리 북을 떠날까?’라고 했습니다. 엄마가 숨어 지내면서 라디오 방송을 매일 들었거든요.”
― 그래서 남한으로의 탈북을 결심한 건가요.
“아니요. 엄마가 말하기에 ‘그건 안 돼. 꽃제비는 북에서 탄압받았으니까 남한에서 불쌍하다고 받아준 거지만, 우리는 여기서 혜택을 다 보고 충성했는데 왜 받아주겠어.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죽일 거야’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별다른 방법이 없더군요. 결국 엄마를 남한으로 보내고, 엄마가 ‘장군님 말씀에 따른 것밖에 없는데 억울하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오해가 풀리면 다시 북으로 돌아오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탈북 루트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이시영 대표는 당시에도 평양에서 잘나가고 있었고, 어머니는 수배자인지라 마땅한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1년 넘게 다양한 방법을 알아본 끝에 마약을 하고, 밀수하는 고향 친구들과 수시로 어울리며 밀수꾼으로 위장해 탈북하기로 했다.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시영 대표에게 친척들은 사촌 동생을 스파이로 붙였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2012년 11월의 어느 날, 이시영 대표는 어머니와 사촌 동생을 데리고 탈북했다. 강을 건널 때 온몸이 얼어붙어 어머니는 저체온증에 시달려 사선(死線)을 넘나들고, 여성 셋은 손발톱이 모두 빠져 한족이 사는 집에서 의사소통도 되지 않았지만 두 달간 머물며 치료해야 했다. 두 사람은 먼저 서울로 떠났고, 이시영 대표는 2013년 4월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때는 바야흐로 메르스 시국, 국정원 직원은 이 대표에게 마스크를 건넸다.
‘비록 이곳이 남한이라도 나는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겠다’
“아, 남한에서는 나를 바이러스 취급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에 데려가서 피검사한다기에 ‘이놈들이 탈북자를 피 뽑아 죽인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이구나’ 싶었습니다. 의사가 엄마 이름을 대면서 잘 지낸다고 했지만, 엄마 얼굴을 보지 못하니 의심은 계속 쌓여갔습니다. 국정원에 조사를 받으러 갔더니 CCTV가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여기나 저기나 감시는 똑같구나’ 싶어서 계속 북한 찬양 노래를 불렀습니다. ‘비록 이곳이 남한이라도 나는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끝없이 의심했군요.
“네. 창밖을 보니 사람들이 걸어오지 않고 차를 타고 오기에 그건 좀 신기했습니다. 조사를 받을 때 중국에 오래 거주하다가 넘어온 두 명과 같이 생활했어요. 그 언니들한테 ‘죽이려면 빨리 죽이지 왜 이렇게 잘해주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침마다 바나나, 우유를 주고, 북에서 비싼 ‘미샤’ 화장품이며 생리대를 풍족하게 줬거든요. 두 명이 저를 보고서 ‘이래서 직행들은 안 돼. 아무것도 몰라’라고 할 때도 저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습니다.”
― 다시 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랬겠지요.
“저도 북에서 라디오를 들어서 상상은 했지만, 엄마의 안전이 보장된 후에 저는 다시 돌아가면 그뿐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국정원 직원이 삼성 컴퓨터를 제 앞에 놓고 ‘시작합시다’라고 하더군요. 뭘 시작하느냐고 했더니 ‘다 알고 왔다’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또 쳐다봤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제가 김일성대 컴퓨터학부를 졸업한 해커로 생각하고 있더군요. 저는 졸업 후에는 컴퓨터를 다룬 적이 없는데…. 하다못해 남한으로 내려온 경위라도 컴퓨터로 적으라고 했는데, 자판이 북한과 달라서 독수리 타법으로 치니까 국정원에서 황당해하더군요(웃음).”
“북한 정권 무너지는 날까지 걷겠다”
국정원 조사를 끝마치고 꿈에 그리던 엄마를 만났다. 그의 어머니는 진찰 과정에서 병이 발견되어, 병원에서 치료 중이었다. 모녀는 국정원이 제공한 11평짜리 아파트에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3년은 많이 힘들었단다. 북한에서 잘살았던 때 생각이 나고, 남한의 모든 것이 새로워서 받아들이기가 꽤 어려웠다.
“솔직히 북에서 살 때는 잘난 척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출신 성분 따지고 그랬습니다. 사람들끼리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따뜻한 마음, 나눔, 희생하는 마음은 모두 대한민국에서 배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탈북민이 끊겼지만, 이 땅에 있는 3만5000여 명의 탈북자가 북한 정권의 피해자이자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 방송국을 어떻게 꾸려갈 생각입니까.
“꿈꿔본 적도 없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그냥 김성민 이사장의 말씀을 잘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소식을 전할 계획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정말 행복하니까, 아직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욱 불쌍합니다. ‘나 정말 잘 살거든. 너희 때문에 너무나 가슴이 아파’라는 말을 방송을 통해 꼭 전하고 싶습니다. 방송이 번창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초심(初心)은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북한 정권의 붕괴, 딱 하나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가지겠지만, 불법 유턴하지 않고, 꼼수 부리지 않고 묵묵히 걷겠습니다.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그들이 온전한 자유를 찾는 날까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