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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내 아버지의 6·25 전쟁 ① ‘하우스보이’, 춘천 전투에서 ‘군인’이 되다

글 : 길도형  도서출판 타임라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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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전민의 아들로 떠돌다가 춘천 6사단 하우스보이 돼
⊙ 6·25 당일 소양강 인근 116고지 전투 중 전사자의 총을 넘겨받으면서 소년병 돼
⊙ “네가 적을 죽여야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여기 있는 전우들이 사는 거다”(선임하사)
⊙ 6사단 7연대, 116고지, 옥산포, 우두산 전투 등 통해 인민군 2사단에 타격… 인민군의 초전 전략 좌절시켜
⊙ 춘천 전투, 음성 동락리 전투, 초산 전투, 사창리 전투, 용문산 전투, 화천호 전투, 금성 전투 등 참전
6·25 참전용사 길운하 선생(원 안). 사진=길도형
  6·25전쟁 개전(開戰) 초부터 정전(停戰)까지 국군 제6사단 7연대의 모든 전투 최일선에 있었던 한 소년병(少年兵)의 무용담(武勇談)을 논픽션으로 정리하다 왜 소년병이었는지 밝힐 필요가 있어 이 글을 쓴다. 초라한 가족사를 드러내 보여야 하는 민망함보다도, 한 소년병의 전쟁 무용담을 기록해두어야 할 이유를 나이 먹어 깨달았다. 그 소년병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선친은 생전에 춘천 어느 야산에서 개인 화기(火器)도 없이 개전 첫 전투를 치렀다고 했다. 소양강 건너 어디쯤이라고 했다. 탄약통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참호의 병사들에게 전달했다.
 
  몇 년 전, 춘천전투전적관 방문 중 소양강 건너 춘천댐으로 향하는 도로(5번)를 살펴보았다. 도로 중간쯤 의암호로 흘러드는 개천이 있다. 한계천이다. 옥산포 전투로 유명한 옥산포가 그 개천의 하구, 즉 북한강과의 합류 지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옥산포 우측 5번 도로에서 약 500미터 지점에 야산이 있는 것도 발견했는데, 춘천 전투 주요 전적지 소개에서 국군 6사단 7연대 3대대 12중대가 거둔, 6·25 전쟁 개전 후 대한민국 군대의 첫 번째 승전지(勝戰地)로 소개되고 있었다.
 
 
  춘천 전투에서 금성 전투까지
 
길운하 선생의 병적기록부. 위쪽은 1955년 1월 제대 후인 1956년 제대병 소집훈련(예비군법 입법 전) 후 작성된 것, 아래는 이후 전산화되면서 재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길도형
  병적기록부상의 선친은 국군 제6사단 7연대 3대대 12중대원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초산 온정리 전투 패전(敗戰)과 화천 사창리 전투 패전 같은 병력 손실이 엄청난 전투 후에는 부대 재편을 피할 수 없었다. 손실 병력만큼 신병이 충원됐다. 생존한 병사들은 군 경험과 전투 경험 등을 감안해 연대 내 중대 단위로 재배치됐다. 이는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들로만 중대 및 소대 구성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두 번의 재편 말고도 전투 전후로 병력 재배치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한다.
 

  선친의 주요 전투 이력은 다음과 같다.
 
  ◆ 1950년; 춘천 전투, 홍천-횡성-신림 전투, 충주-음성 전투, 문경 전투, 영천-신녕 전투, 청천강 진격 전투, 초산-온정리 전투, 연천 한탄강 방어 전투, 의정부(도봉산과 수락산 사이 도봉-상계동 일대) 방어 전투
 
  ◆ 1951년; 사창리 전투, 용문산 전투, 화천호 전투, 금성 진격 전투, 금화지구 전투, 1차 교암산 전투, 백암산 전투
 
  ◆ 1952년; 949고지(임남 우두산) 전투, 2차 교암산 전투, 교암산에 주둔하며 교암산-금성천-적근산-백암산-949고지-임남 어은산으로 이어지는 와이오밍선과 노매드선 일대에 대한 수색 및 위력 정찰 활동 및 소부대 전투
 
  ◆ 1953년; 6월 3차 교암산 전투, 7월 휴전 직전 금성지구 전투(425고지 수복 고지전)
 
  ◆ 1955년 1월 28일 이등중사 제대
 
 
  방태산 소년
 
  1939년 늦가을 어느 첫새벽이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태산 산골짜기에서 화전민 일가족이 길을 떠나고 있었다. 힘깨나 쓸 것 같은 건장한 사내의 지게에는 알강냉이며 콩과 팥, 좁쌀 자루 몇 포대가 실려 있었다.
 
  사내가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산골짜기 오솔길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사내의 아내가 낡은 이부자리며 옷가지들을 단단히 옭아맨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는 두 돌 남짓해 보이는 사내아이를 포대기로 업고 따르고 있었다. 여남은 살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와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도 멜빵을 한 채 등짝에 무언가를 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모를 따라 걸었다. 늦가을 찬바람이 텅 빈 화전민 너와집을 훑고 와 골짜기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는 일가족을 배웅했다.
 
  일가족은 내린천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걸어 해가 중천을 지날 무렵 현리에 도착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현리 장터 곡물상으로 가서 지게에 지고 온 곡식들을 돈으로 바꾸었다.
 
 
  인천으로
 
  일가족은 내린천과 소양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여러 날을 걷다 쉬다 하면서 어느 이른 아침 춘천에 도착했다. 그러잖아도 남루한 화전민 일가족이 지치고 고단하기까지 한 행색으로 춘천역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여름(1938년) 개통되고 이제 막 운행을 시작한 경춘선 종착역 춘천역에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표를 끊고 개찰구 검표를 거쳐 우르르 플랫폼으로 나가고 있었다.
 
  소년은 멜빵에 봇짐을 진 채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방태산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현리 닷새장에 나가 보던 것에 비할 수 없는 번잡함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에 소년의 아버지가 기차표를 끊어 와 식구들을 개찰구 통로로 몰았다.
 
  개찰구 검표원 옆에 섰던 순사가 남루한 행색의 일가족을 멈춰 세웠다. 순사는 소년의 아버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소년은 순사의 질문에 답하는 아버지 입에서 나온 ‘인천’이라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소년은 인천이라는 말에 적이 마음이 놓였다. 처음 듣는 동네 이름이지만, 그곳에는 방태산 산골짜기 화전민 아들의 일상과는 다른 날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시커먼 증기기관차가 씩씩거리면서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그 뒤에는 객차 몇 량이 줄지어 달려 있었다. 증기기관차를 처음 본 소년은 두려움보다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연신 뿜어 나오는 희부연 연기를 바라보았다.
 
  기차가 멈추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기차간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등이 떠밀려 기차에 오르기 전까지 난생처음 타보는 이 기차가 데려갈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러나 방태산 산골짜기 예닐곱 살짜리 화전민 아들의 상상력은 방태산이며 오대산을 힘겹게 넘어가던 하얀 구름의 꿈일 뿐이었다. 그냥 막연히 산골짜기의 생활을 벗어나 보고 싶다거나, 아니 그것보다는 겨울이 끝나기도 전부터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먹어야 했던 송기(소나무 속껍질)를 안 먹어도 되는 기대감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춘천이란 도시에 들어설 때부터 자신에게도 뭔지 모를 낯선 꿈이 움트고, 기관차가 멈추기를 기다려 기차간으로 첫발을 올려놓는 순간에는 설렘으로 요동치는 가슴이 느껴졌다.
 
  아침 여덟 시에 춘천을 출발한 기차가 점심때가 지나 서울 종착역인 성동(城東)역에 도착했다. 일가족은 청량리 거리로 나와 전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 인근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인천행 기차에 올랐다. 일가족이 부평역에 내린 것은 방태산 골짜기를 떠난 지 이십여 일 만이었다. 부평역에는 인천 우편국에서 일하는 소년의 외삼촌이 나와 있었다.
 
 
  염부의 아들
 
  일가족은 경인선 철길 남쪽 야산 아래 거처를 마련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외삼촌의 소개로 주안염전 삯꾼 염부(鹽夫)로 일을 시작했다. 일본인 주인은 다른 삯꾼들보다 갑절로 일하고도 거뜬한 소년의 아버지에게 마음이 끌렸다. 일을 시작한 지 단 며칠 만에 소년의 아버지는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다. 그렇게 소년네 가족은 조금씩 인천 십정동(十井洞)에서의 생활 기반이 잡혀 나갔다.
 
  소년은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가 염전으로 출근할 때면 함께 따라나섰다. 삯꾼들 잔심부름을 해주면 군것질거리를 주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거스름돈 동전 몇 닢을 챙겨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때때로 일본인 사장이 주는 용돈은 동전 수준을 넘어 지전 두세 장이었다. 그럴 때마다 소년은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하고 소리쳤다.
 
  그렇게 십정동으로 이주한 지 일 년여가 흘러 소년이 여덟 살 무렵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염전에서 돌아오자 낯선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아버지가 손님과 반갑게 인사했다. 양평에 사는 먼 친척이라고 했다. 친척 어른은 이틀 밤을 자고 사흘째 되는 날 양평 자기 집으로 간다며 집을 나섰다. 친척 어른의 손에는 소년의 손이 잡혀 있었다.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 앞에 허리를 구부리고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이 어른 집에 가서 살도록 해라. 어른께서 잘 먹여주고 학교도 보내주신다니까 가서 말 잘 듣고 학교 공부도 잘하도록 해라.”
 
  그러고는 소년을 꼬옥 안았다가 떼어놓으며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닦았다. 소년은 내키지 않고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어른들이 하는 일이니까 따라야 하나 보다 하며 친척 어른의 손에 이끌려 집을 떠났다.
 
 
  양자
 
  소년이 집을 떠나고 3년여가 흘렀다. 소년의 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안염전으로 가서 일했다. 하루 품삯을 받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 뒤로 상당한 규모의 염전을 관리하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다 마침내 소금을 도매로 떼다가 도도매나 소매로 팔기 시작하면서 강원도 화전민에서 인천의 염상(鹽商)으로 변신하는 데 빠르게 성공했다.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자 어느 날 소년의 아버지는 양자(養子)로 보낸 아들도 볼 겸 양평 친척 집을 방문했다. 소년의 아버지가 들어서자 친척 어른 내외는 호들갑을 떨어가며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내외의 환대는 기분 나쁘게 비굴해 보였고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주인이 내온 막걸리를 들이켜던 소년의 아버지는 지게 한가득 섶나무를 짊어지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아들을 보았다. 퀭한 두 눈에 푹 꺼진 두 볼,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은 모가지를 앞으로 늘어뜨린 소년의 모습은 피골상접 그 자체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가타부타 따질 것도 없이 막걸리 사발부터 내던졌다. 막걸리 사발이 봉당 댓돌에 부딪히며 박살 났다. 소년의 아버지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신을 쳐다보는 아들의 지게 작대기를 빼앗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노여움 가득한 눈을 부라리며 친척 어른에게 지게 작대기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휘두르고 걷어차는 대로 얻어터진 친척 어른이 복날 몽둥이질에 개 널브러지듯 마당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헐떡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의 등에서 섶나무 가득한 지게를 벗겨 번쩍 들어 숨을 할딱거리는 친척 어른에게 내던졌다. 친척 어른의 몸뚱이가 섶나무에 덮여버렸다.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의 손을 틀어쥐고 말했다.
 
  “가자!”
 
 
  7연대 한 병영의 하우스보이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아버지 일을 도와 소금 장사를 시작했다. 형이 중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동생이 국민학교 다니는 동안에도 불운한 운명은 늘 소년의 몫이었다. 그렇게 아버지 밑에서 소금을 져 나르며 소금 장수 일을 배우는 동안 인천에도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과 함께 주안염전의 일본인 주인들이 쫓기듯 일본으로 돌아갔다. 염전 일부를 인수한 소년 아버지의 소금 장사는 멀리 충청도며 경상도, 황해도에서까지 찾아와 입도선매할 정도로 번창했다.
 
  1946년 3월, 소년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소년은 국민학교 3학년에 보내졌다. 그러나 열 살도 되기 전부터 구르는 돌이 되어버린 소년은 단 며칠 만에 학교를 떠났다. 학교를 떠난 소년은 집으로 가는 대신 부평역으로 가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염전 심부름을 하며 모은 푼돈과 일본인 주인이 준 용돈, 아버지 일을 도우며 받은 용돈이 소년의 저고리 안주머니를 채우고 있었다.
 
  부랑하는 소년은 서울과 양평을 거쳐 1949년 겨울 초입 춘천에 다다랐다. 춘천역 근처를 배회하던 소년은 꼭 십 년 전 방태산 골짜기 너와 움막을 벗어나 춘천역 플랫폼에서 기차에 오르던 날을 떠올렸다. 소년은 뭔지 모르게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때 설레던 기대감과 지금 자신의 모습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땅딸보네 가게
 
  심부름이든 날품팔이든 닥치는 대로 하면서 춘천을 떠돌던 소년은 1950년 초입 소양강 다리를 건너 어느 군부대 옆 상회(商會)의 문을 두드렸다. 낡은 문이 열리고 땅딸보 사내가 나와 소년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뒤 좌판에는 이런저런 잡화들이 어지러이 진열되어 있었다. 가게 어느 구석에서 막걸리가 익어가는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년은 땅딸보 주인에게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땅딸보는 돋보기 너머로 소년을 훑어보더니 대뜸 군부대 심부름부터 시켰다. 소년은 땅딸보가 시키는 대로 물건들을 손수레에 싣고 군부대로 갔다. 위병소 앞에 이르자 위병(衛兵)이 익숙한 듯 손수레 속 물건들을 살피다 말고 소년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땅딸보네 새로 온 아이냐?”
 
  소년이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위병은 알았다며 통과를 지시했다.
 
  소년은 거의 날마다 수레에 물건을 싣고 들어갔다가 빈 수레를 끌고 나왔다. 소년이 배달하는 물품들은 대부분 취사반으로 갔다. 그러는 동안 막사 앞을 오가며 병사들과 친해졌고, 쉬쉬해가며 병사들의 개인적인 심부름도 했다. 하사관들과 장교들까지도 소년과 안면이 익숙해지며 먼저 소년에게 말을 건네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하우스보이
 
창군 초기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의 훈련 모습. 일본 군복을 착용하고 일본군 소총을 소지하고 있다. 사진=조선DB
  4월의 어느 일요일, 소년은 그날도 취사반에 식재료 배달을 갔다. 식재료를 배달하고 막사 앞을 지나는 소년에게 병사들이 아는 체를 했다. 소년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소년이 병사들과 농담과 장난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에 일직사관이 다가왔다. 선임 병사로부터 휴식 보고를 받은 일직사관이 병사들과 대화를 하다 말고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도 배달 온 모양이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길운하입니다.”
 
  “몇 살이냐?”
 
  “열일곱입니다.”
 
  “아버님은 뭐 하시냐?”
 
  “인천에서 소금 장사 하십니다.”
 
  “고향이 인천이냐?”
 
  “아닙니다. 강원도 인제입니다.”
 
  “인천에서 아버님 일이나 도울 일이지 여긴 웬일이냐?”
 
  소년은 말문이 막혔다. 일찌감치 객지 먼 친척 집에서 머슴 아닌 머슴살이를 하는 동안 소년에게는 역마살이 끼었다. 소년은 무슨 못 할 짓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냥요.”
 
  일직사관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더니 빙긋 웃으며 객쩍은 질문을 던졌다.
 
  “열일곱 살짜리 키가 제법이구나. 너 군인 시켜줄까?”
 
  소년은 눈이 동그래지며 답했다.
 
  “저 정말요? 시켜주면 하지요!”
 
  농담 삼아 던진 제안에 반색하는 소년을 보고 일직사관이 껄껄 웃더니 말했다.
 
  “너 이 녀석, 따로 갈 데도 없는 모양이구나. 잔심부름이나 도우며 여기 머물도록 해라.”
 
  소년은 그러잖아도 군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했었다. 군복을 입고 어깨에 총을 멘 군인의 모습은 교육이란 것을 받아본 적 없는 소년에게는 감히 넘볼 수 없는 특별한 신분 같은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날 이후, 그렇다고 해서 소년의 역할이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땅딸보 집에서 하던 숙식을 군부대에서 해결하게 된 정도였다.
 
  병사들 막사 침상 끄트머리에 소년의 자리가 마련됐다. 소년에게 여벌 군복 한 벌이 주어졌고 점호와 취침 시간이 기간병들의 규칙 그대로 소년에게 적용됐다. 그러나 낮 동안의 일과는 열외였다. 중대 병사들이 훈련하고 작업하는 동안, 소년은 부대 내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불려 다니며 처리하고 간부들의 심부름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대신했다. 소년은 그렇게 춘천 7연대 한 병영의 하우스보이가 되었다. 그러나 하우스보이는 두 달 뒤 포성과 함께 소년병으로 변신해야 하는 운명을 알지 못했다.
 
 
  포화 속을 달리는 소년
 
  4월이 되자 방태산 동백이 피었는지 졌는지도 모르게 소년에게는 생활의 변화가 생겼다. 소년은 무엇보다도 헐렁하고 허름한 군복이라도 걸치고 있는 자신이 진짜 군인이라도 된 것처럼 들뜬 기분으로 지냈다. 그렇지만 낮 동안 병사들이 훈련하거나 영외로 나가 진지 공사를 할 때도 자신은 열외란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았다. 소년은 훈련 중에 기합 받고 선임병의 가혹한 후임병 군기 잡기 같은 일들이 다 진짜 군인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4월 중순, 소년이 하우스보이로 있는 12중대는 춘천역 부근 1대대 주둔지로 옮겨갔다. 그곳에는 연대 본부대도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4월 말로 접어들면서 중대원들은 진지 공사를 위해 아침 일찍 영외로 나갔다가 저녁에 복귀하고는 했다. 병사들이 단독 군장에 삽과 곡괭이 등을 챙겨 트럭을 타고 영외로 나갔다.
 
  병사들이 진지 공사를 하는 동안 소년은 취사반에서 중대원들의 점심 식사 준비를 도왔다. 취사(炊事)가 끝나고 취사병들이 소대별로 밥과 국, 반찬을 분류해 들통에 담아 트럭에 실었다. 소년은 짐칸에 실린 들통들이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게 밧줄로 잘 묶었다.
 
  소년은 트럭이 소양로를 지나 소양교를 건너고 5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는 동안 짐칸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보이고 얼마를 가자 강물이 제법 거친 여울을 이루어 흘러내렸다. 30여 분을 달려온 트럭이 북한강을 가로지른 다리를 앞에 두고 몇 겹의 바리케이드를 지나 검문소 앞에 멈추었다. 초병이 선탑한 간부와 짧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무언가를 기록하더니 차단기를 올리며 경례했다.
 
  소년은 다리를 건너기 전 다리 초입 기둥에 母津橋(모진교)라고 새겨진 글자를 읽지 못했다. 다리 밑에는 북한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300여 미터에 이르는 다리를 건너자 서편 검문소 초병이 차단기를 들어 올리며 통과를 지시했다. 다리를 건넌 우측 전방에 철조망이 보였고, 그 뒤쪽으로도 검문소가 보였다.
 
  다리를 건넌 트럭은 좌회전해서 500여 미터를 내려갔고, 이어 우회전하며 산 쪽으로 이어진 거친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트럭이 심하게 흔들렸고 국을 담은 들통 뚜껑을 비집고 국물이 새어 나왔다. 얼마를 오르자 능선부 널찍한 공터에 집총(集銃) 상태의 소총들이 보였다.
 
 
  삼팔선 밑에서
 
  총기를 지키고 있던 병사가 힘찬 구호와 함께 선탑 간부에게 경례했다. 능선 곳곳에서 병사들이 참호를 파고, 교통호 흙벽을 높이는 등 진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트럭 엔진 소리가 멈추자 호각이 울리고 이어서 “식사 집합!” 하는 구령이 떨어졌다. 웃통을 벗어젖힌 병사들이 각자의 반합에 밥과 국을 담아 몇 번 휘휘 저은 다음 들이켜다시피 단숨에 먹어 치웠다. 식사를 마친 병사 몇이 소년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덕분에 잘 먹었다. 너도 먹었느냐?”
 
  소년이 대답했다.
 
  “아직요. 형님들 다 드시고 나면 먹을 겁니다.”
 
  다른 병사가 물었다.
 
  “너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소년이 모른다고 하자 병사는 북한강 상류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쪽으로 한 2리쯤 가면 삼팔선이다. 삼팔선 이북이 화천이고. 화천읍에서 강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큰 보가 나오는데 그게 화천댐이다. 원래 서울과 인천에 전기를 대기 위해 만든 건데, 삼팔선이 그어지고 화천이 김일성의 땅이 되면서 김일성이 마적놈이 전기를 끊어버렸지.”
 
  또 다른 병사가 말했다.
 
  “여기가 지암리란 곳이다. 바로 우리 3대대가 화천 방면에서 공격해오는 인민군을 막기 위해 있어야 할 자리지, 하하하.”
 
  진지 개보수 공사는 5월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병사들은 영내외에서의 고된 훈련과는 별도로 진지 개보수 공사에 수시로 투입되었다. 그렇게 5월이 가고 6월로 접어들자 부대에는 돌연 긴장감이 감돌았다. 인민군 대규모 병력과 탱크를 비롯한 장갑차, 곡사포 같은 중화기들이 삼팔선 가까이 집결해서 기동훈련을 하는 장면이 삼팔선 경계 초병들과 은밀히 삼팔선을 넘은 수색대에 의해 포착, 보고되는 일이 잦아졌다.
 
 
  소년과 전쟁의 시작
 
  6월 25일 일요일 새벽, 꿈결인 듯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불침번의 “비상!” 외침이 병사들을 깨웠다. 소년도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침번이 다시 소리쳤다.
 
  “전달! 12중대 전원 완전 군장으로 연병장 집합!”
 
  졸린 눈을 비빌 새도 없이 ‘쿵 쿵’ 하는 소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막사 밖 민간인 거주 지역 곳곳에서도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일직사관이 비에 젖은 채 들이닥쳐 전투 준비 태세 완료를 독려했다.
 
  “막사에 아무것도 남기지 마라. 내무반장은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남은 게 있는지 확인하고, 불필요한 물품들을 수거해 쓰레기 소각장으로 보내라.”
 
  군장을 꾸려 둘러멘 병사들이 소총을 집어 들고 연병장으로 달렸다. 황급히 꾸린 군장에서 반합이 덜렁대는가 하면, 턱끈을 묶지 않은 병사의 머리에서 철모가 떨어져 빗물이 고인 땅바닥에 뒹굴기도 했다. 대대 규모 병력이 주둔한 1대대 연병장에도 막사들에서 쏟아져 나온 병사들이 가랑비 속에 도열하고 있었다. 소년은 군장 대신 밀가루 자루에 자신의 물품을 쓸어 담아 어깨에 메고 중대원들 뒤를 따랐다.
 
  안개마저 짙게 드리운 연병장은 밤새 내리고 있는 비로 추적거렸다. 전방 삼팔선 방향에서 포성과 총성이 요란했다. 영외로 나갔던 중대장과 소대장들이 급거 귀대해 병사들의 출동 태세를 점검했다. 검열에 이어 병사들에게 탄약이 지급됐다. 분대장과 부분대장들에게는 수류탄이 두 발씩 지급됐다.
 
  소대별로 도열한 병사들 앞에는 중기관총과 81밀리 박격포 1문, 60밀리 박격포 3문, 57밀리 대전차포(무반동총) 1문씩이 검열을 마친 상태로 놓여 있었다. 모진교 건너 지난 5월 개보수 공사를 끝낸 진지로 병사들을 실어 나를 트럭들도 시동을 켠 채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중대장이 무전을 주고받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중대원들을 향해 짧은 훈시에 이어 출동을 명령했다.
 
  “북괴 김일성 집단이 전면 남침을 시작했다. 방금 모진교가 피탈됐다고 한다. 3대대 본대는 지암리 일대에 고립된 채 북괴의 남침을 저지하고 있다. 12중대는 지암리 진지 대신 1대대를 따라 신북 116고지 진지로 신속히 이동한다. 중대 출동!”
 
  1소대, 2소대, 3소대, 중대본부 순서로 트럭에 올랐다. 그러나 중대원들 누구도 소년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병사들을 태운 트럭이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본부 중대원들을 태운 트럭 한 대만 행정반을 점검 중인 선임하사를 기다리느라 지체하고 있었다. 잠시 후 선임하사가 본부 소대 트럭을 향해 걷다가 멀뚱하게 서 있는 소년을 보았다. 선임하사가 소년에게 소리쳤다.
 
  “꼬마야, 뭐 하냐? 어서 올라타.”
 
 
  “이 애가 왜 여기 있나?”
 
  선임하사가 소년을 트럭으로 밀어 올리고 자신도 올라탔다. 본부 중대원들이 그제야 소년의 존재를 알아채고 밀착하며 앉을 자리를 내주었다. 선임하사가 소년 앞에 앉았다. 연거푸 들려오는 포탄 터지는 소리, 총격 소리, 군용 차량 달리는 소리, 사이렌 소리, 남침을 알리는 행정기관의 방송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병사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선임하사가 말했다.
 
  “괜찮아, 이놈들아. 우린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김일성이 공산괴뢰 족속들을 때려잡으러 가는 거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 거야.”
 
  소양교로 향하는 소양로에는 병사들을 태운 군용 차량들이 흙탕물을 흩뿌리며 전방으로 내달렸다. 각자의 진지로 향하는 행군 대열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사이렌을 울리며 전방 쪽에서 달려오는 군용 앰뷸런스가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알렸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간파한 민간인들이 일찌감치 소양교를 건너와 소양로를 따라 공지천 방향으로 피란을 가는 모습도 보였다.
 
  소양교에서 모진교로 이어지는 5번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116고지. 5번 도로 좌측으로 옥산포가 보이고 우측으로 500미터쯤 떨어진 야산이다. 큰 수목이 없고 언덕 기슭으로 밭이 있어 적의 이동을 관측하기에 용이했다.
 
  12중대는 아침 7시 전에 능선을 따라 구축한 참호마다 병력과 화력(火力) 배치를 끝냈다. 병사들은 5번 도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 채 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중대장이 참호를 돌면서 병사들에게 결전을 독려했다. 소대별로 자기 진지로 흩어져 참호에 매복한 가운데 소년은 선임하사와 함께 중대장과 본부 중대원들이 있는 벙커로 들어갔다. 중대장이 당황한 목소리로 선임하사에게 소리쳤다.
 
  “선임하사, 이 애가 왜 여기 있나? 누가 데려왔어?”
 
  선임하사가 대답했다.
 
  “당장 오도 가도 못 할 처지에 있는 아이입니다. 일단 제가 데리고 다니다 상황 끝나는 대로 귀가시키겠습니다.”
 
  중대장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달여 중대의 궂은일과 이런저런 잡다한 심부름을 도맡아 해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임하사가 알아서 하시오. 그 대신 아이한테 불상사가 생기면 전적으로 선임하사 책임이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첫 승전
 
6·25 개전 초기 춘천 옥산포 전투에 참전했던 국군 장병들의 모습. 6사단 참전용사 신영진씨가 《조선일보》에 제공한 것이다. 사진=조선DB
  5번 도로 전방 북한강에 면한 옥산포에는 여전히 적의 포탄이 쏟아졌다. 116고지 후방 소양강 북단의 중심 고지인 우두산을 비롯한 고지 곳곳에서 적이 쏜 포탄이 작렬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전 9시, 포격 소리가 일제히 멈추었다. 순간적인 적막이 긴장을 고조시켰다.
 
  오전 9시10분, 트럭과 모터사이클을 앞세운 인민군 보병부대 선두가 5번 도로에 모습을 나타냈다. 모진교를 손쉽게 돌파한 적은 5번 도로를 따라 천천히 소양교를 향해 남하해왔다.
 
  오전 9시20분, 적의 본대가 116고지 12중대 정면에 위치한 순간이었다. ‘탕’ 하는 권총 소리와 함께 중화기들이 5번 도로를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후방 진지에서 81밀리와 60밀리 박격포가 쏘아 올린 포탄들이 5번 도로의 적 대오에 떨어지며 작렬했다. 박격포탄에 강타당한 트럭들에서 적병들이 뛰어내렸다. 고지 후방에 진을 치고 있던 포병대대가 쏜 105밀리 곡사포탄이 연거푸 작렬하며 적 대오를 와해시켰다. 차량에서 뛰어내린 적들이 중기관총 총탄 세례를 받고 쓰러져 갔다.
 
  전열을 정비한 적이 116고지를 향해 병력을 움직였다. 적병들이 고지 하단까지 근접하면서 총격전이 시작됐다. 적병들이 총을 난사하며 언덕을 달려 올라왔다. 중대원들이 교통호 턱에 의지한 채 응사했다. 총격 소리와 함께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곳곳에서 탄약 가져오라는 외침이 빗발쳤다. 소년은 선임하사의 지시대로 교통호를 달리며 병사들에게 탄약통을 배달했다. 적이 응사한 총탄이 소년이 몸을 낮춘 채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교통호 흙벽에 와서 박혔다. 비에 젖은 진흙이 얼굴로 튀며 소년의 얼굴은 땀과 빗물, 흙가루가 범벅이 되어 얼룩졌다. 이따금 날카로운 금속음이 소년의 귓전을 스쳤다.
 
  고지 후방 포병대 진지에서 다시 포탄이 날아와 적진을 때리자 적의 공세가 주춤해졌다. 곡사포 공격이 집중되자 적병들이 마침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기세 좋게 모진교를 건너 남진하던 적들이 116고지 좌측 밭으로 뛰어들어 북동쪽 지내리 방향으로 퇴각했다. 박격포와 곡사포가 달아나는 적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적병들이 타고 온 트럭과 모터사이클들이 파괴된 채 5번 도로와 그 주변 논밭에 널브러져 있었다. 북괴군의 기습 남침과 함께 적의 포격으로 9중대장이 분사하고 절반 훨씬 넘는 중대원이 전사해가며 지키려 한 모진교가 피탈된 지 대여섯 시간 만에 국군 7연대가 거둔 대한민국 국군의 첫 승전보(勝戰報)였다.
 
 
  탱크가 나타나다
 
  적이 퇴각하고 총성과 포성이 잦아들었다 싶은 순간이었다. 정오 무렵, 모진교 방향에서 요란한 굉음이 들려왔다. 적들이 탱크(자주포) 3문을 앞세워 남하해오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탱크를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적 탱크가 5번 도로를 따라 내려오며 전면을 드러내자 116고지에서 추진, 5번 도로에 근접해서 숨죽이고 있던 57밀리 대전차포가 탱크 포탑을 때렸다. 이어서 정면 무한궤도 덮개를 때리는 등 대전차 포탄 대여섯 발이 골고루 명중했으나 탱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가로 이동해서 춘천 시가지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국군의 공세가 뜸해지자 탱크들은 다시 5번 도로를 따라 남하했다. 탱크가 대전차포 추진 진지로부터 30미터쯤 근접했을 때 대전차포가 캐터필러를 겨냥해서 불을 뿜었다. 포탄이 정확히 명중하며 무한궤도가 파괴됐다. 연이은 대전차포 공격에 앞서가던 탱크 두 문의 무한궤도가 부서지며 기동 불능 상태로 주저앉았다.
 
  적 전차병들이 해치를 열고 탱크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탱크 두 대에서 불길이 치솟고 내부에서 폭발음이 들리며 포탑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파괴되었다. 방향을 돌려 도주하던 자주포 한 문도 집중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였다.
 
  116고지 방어 성공에 힘입어 모진교를 건너고 단숨에 소양교를 돌파하여 춘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12중대가 116고지에서 배후의 208고지 진지로 이동을 완료했을 때는 오후 4시 전이었다. 옥산포로 남하해 오던 적 1개 대대가 다시 아군 포병대의 맹렬한 포격에 밀려 208고지 쪽으로 퇴각해오고 있었다.
 
 
  죽음
 
  중대는 본부 중대원까지 다 합쳐봐야 150명도 채 안 되는 숫자였다. 퇴각하던 적은 208고지를 상대적으로 약한 고리로 판단하고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적의 로켓포와 박격포가 고지 능선부 참호를 강타하는 가운데 적병들이 착검한 소총을 난사하며 돌격해 오르기 시작했다.
 
  중대원들이 응사했지만, 수적 우세를 앞세운 적병 일부는 어느새 진지 바로 밑에까지 근접했다. 근접한 적병들과 중대원들 사이에 수류탄 공방이 벌어지며 아군 측 사상자도 적잖았다. 참호 곳곳에서 적의 수류탄이 폭발하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교통호로 뛰어들던 적이 총격을 받고 나가떨어졌다.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며 거친 욕설과 비명이 뒤섞였다.
 
  소년은 오전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탄약통을 들고 정신없이 교통호와 능선 풀숲을 뛰어다녔다. 격렬한 총격전 속에 중대 병사들의 실탄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소모됐다. 소년이 또다시 본부 중대 벙커에서 탄약통을 꺼내 들고 교통호를 달릴 때였다. 바로 앞에서 한 병사가 ‘억!’ 하는 단말마와 함께 교통호 턱에 엎어졌다. 엎어진 병사가 꼼짝도 하지 않는 가운데 선임하사가 달려왔다. 선임하사가 병사의 겨드랑이를 부여잡고 교통호 바닥에 눕혔다. 병사의 눈동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한 가운데 입에서 피가 역류하고 선혈이 전투복 상의를 붉게 적셨다.
 
  선임하사가 손가락을 병사의 콧구멍에 갖다 댔다. 잠깐 선임하사의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내 선임하사가 누워 있는 병사 머리맡에 무릎을 꿇더니 철모를 벗기고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었다. 선임하사가 손을 뗐을 때 병사의 두 눈이 감겨 있었다. 소년이 선임하사를 도와 절명한 병사를 참호 바닥에 누이고는 판초우의로 덮었다.
 
 
  소년, 총을 잡다
 
  총격 소리가 난무하고 수류탄 폭발음이 여전히 고지를 흔드는 가운데 병사의 시신이 누워 있는 참호에는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그 순간 참호를 빗겨 넘어간 적 수류탄이 참호 밖에서 폭발하며 참호 속으로 흙더미를 쏟아부었다. 정신을 차린 선임하사와 소년이 참호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적의 선봉이 중대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고전하고 있는 가운데 본대가 고지로 달려들고 있었다.
 
  선임하사가 절명(絶命)한 병사의 M1 소총을 소년에게 건넸다. 땅바닥에 나뒹굴던 철모가 소년의 머리에 씌워졌고, 탄띠가 허리에 채워졌다. 선임하사가 소년의 철모 턱끈을 조이며 말했다.
 
  “지금부터 이 총이 너를 지켜줄 거다. 총구를 저 아래쪽 적들을 향하고 나처럼 방아쇠를 당겨라.”
 

  선임하사와 소년이 몸을 낮추고 교통호로 나왔다. 선임하사가 교통호 턱에 가슴을 기댄 채 고지로 오르는 적을 향해 조준사격을 시작했다. 소년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선임하사처럼 교통호 턱에 가슴을 기댔다. 개머리판을 오른쪽 어깨 앞쪽에 견착했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 첫 마디를 방아쇠에 걸었다.
 
  자연스럽게 왼쪽 눈이 감기고 오른쪽 눈을 가늠자와 가늠쇠에 일직선으로 맞추었다. 그러자 그 일직선의 저 아래쪽 끝에 한 인민군 병사의 상(像)이 잡혔다. 소년은 총을 난사하면서 고지로 달려드는 인민군 병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저들의 총탄에 절명한 병사의 원수를 갚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작정 쏴댔고 적 병사는 달리던 속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잘했어. 그렇게 쏘는 거야. 적을 죽여야 내가 사는 거다. 네가 적을 죽여야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여기 있는 전우(戰友)들이 사는 거다.”
 
 
  군인이 되다
 
  소년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방아쇠에 검지를 걸었다. 선임하사가 분명 ‘전우’라고 했다. 소년은 자신이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귓전을 때리는 총성과 함께 총구를 빠져나가는 탄환의 속도감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난 어느 순간 ‘틱’ 하는 소리가 들리며 총신 우측으로 무언가 튀어 나갔다. 방아쇠를 당겨도 총성도 반동도 없어졌다. 소년은 당황해서 교통호에 몸을 낮추고 총을 살폈다. 선임하사가 소년의 소총을 낚아채다시피 가져가더니 능숙한 솜씨로 자신의 탄창 주머니에서 클립 탄창을 꺼내 끼웠다. 그러고 총을 소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 총은 너를 지켜주는 제2의 생명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구에게도 총을 넘겨주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게 내가 됐든 중대장이 됐든 누가 됐든. 알았나?”
 
  소년은 평소에 하던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임하사가 이전과는 다르게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상관이나 선임병들의 명령, 지시에는 무조건 복명복창으로 대답한다.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예, 알겠습니다!”
 
  소년의 입에서 ‘예, 알겠습니다’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다. 너는 지금부터 진짜 군인이 되는 거다. 알겠나?”
 
  소년은 다시 작지만 짧고 단호하게 ‘예, 알겠습니다’를 복창했다. 선임하사가 소년의 탄띠 버클 양쪽에 두 개씩 달린 주머니를 가리키며 열어보라고 했다. 주머니마다 클립 탄창이 네 짝씩 들어 있었다.
 
  “총탄이 다 나가면 탄창 주머니에서 클립 탄창을 꺼내 갈아 끼는 거다. 튀어 나간 빈 클립 탄창은 그냥 버려두면 된다.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백병전
 
  소년이 다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처음 순간의 두려움과 긴장감, 흥분이 가시고 소년은 어느새 잘 훈련된 소총수처럼 한 발 한 발 적을 겨냥해 방아쇠를 당겼다. 방아쇠를 당겨 적병을 쓰러뜨릴 때마다 재미마저 느껴졌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소년은 지금도 자신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적병이 그저 잠시 쓰러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인천으로 이사 가서 짧은 기간 동네 아이들과 했던 전쟁놀이가 떠올랐다. 막대기 총에 맞은 아이는 죽은 것처럼 잠깐 쓰러졌다가 곧 다시 일어나 집으로 가고는 했었다. 자신도 물론 다른 아이가 쏜 총에 맞은 걸로 하고 ‘윽’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가 곧 일어나고는 했었다.
 
  자신의 총에 맞은 저 인민군 병사들도 어쩌면 잠시 쓰러져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중 자기 바로 옆 흉탄에 맞아 쓰러진 병사가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소년은 고스란히 지켜봤다. 지금 자신은 전쟁놀이 중이 아님이 분명했다. 참호 속 병사들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방아쇠를 당겨 적을 거꾸러뜨리고 있었다.
 
  중대원들은 고립된 채 208고지 사수를 위해 필사적으로 총을 쏘고 참호를 넘어 들어온 적을 향해 총검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12중대와 본부 중대원들은 옥쇄(玉碎)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그때였다. 적진으로 박격포탄이 쏟아지고 208고지의 남서쪽 하단 방향에서 함성과 함께 요란한 총성이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고지를 집어삼킬 것처럼 돌진해오던 적병들이 돌연 흩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돌격!” 외침과 함께 수세에 몰려 있던 중대원들이 참호에서 뛰쳐나와 적병들을 뒤쫓으며 분풀이하듯 총을 난사했다. 소년은 돌격하는 병사들을 따라 참호에서 달려 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춘천 철수
 
  소년은 6월 25일 하루 동안 소양강 북단 고지들을 오르내리며 전투를 치렀다. 208고지 전투 중 전사한 병사의 M1 소총을 선임하사로부터 받는 것으로 총기 수여식을 대신했다. 총기를 수여하면서 선임하사가 건넨 ‘적을 죽여야 내가 살고 전우가 산다’는 말이 소년이 지금까지 총을 쏜 이유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전사한 전우의 소총을 들고 철모를 쓰고 탄창 주머니와 수통, 대검집이 달린 탄띠를 허리에 두른 채 하루 동안의 전투를 거뜬히 치러냈다. 총 다루는 법을 배워본 적 없고, 말단 소총수에게 부여된 전술적 임무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선임하사가 수여한, 전사한 병사의 소총을 움켜잡고 나와 전우를 위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 1950년 6월 25일, 소년은 자신이 ‘소년병’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춘천 전투
 
소양강변에 있는 춘천대첩비. 국군은 결국 춘천에서 철수했지만 춘천대첩으로 서울을 동쪽에서 포위, 공격하려던 북한군의 남침전략은 실패했다. 사진=조선DB
  7연대는 주력 부대들이 소양강 이북에서만 이틀을 버티며 116고지와 옥산포, 우두산 등 주요 고지에서의 전투를 통해 인민군 2사단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결국 북한강 선까지 후퇴한 적은 6월 26일 예비연대까지 투입하며 재차 공격해왔다. 국군 2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인제 방면에서 홍천을 향해 공격하던 인민군 2군단 예하 12사단 일부도 춘천으로 급히 방향을 선회했다. 적은 증강된 병력과 화력으로 소양강 북단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왔다.
 
  6월 26일부터 27일 양일 동안 인민군 2사단은 탱크를 앞세워 우두산을 비롯한 소양강 북단 고지와 진지들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일발필격의 결기로 무장한 포병대원들의 포격과 중화기 중대의 대전차 공격에 번번이 진영이 와해되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물러나야 했다. 27일 오후, 소년은 중대원들과 함께 소양교를 건너 봉의산으로 이동했다. 해발 301.5미터의 봉의산은 예나 지금이나 춘천의 주봉으로, 춘천 시가지는 물론 북서쪽으로는 북한강을, 북동쪽으로 소양강 멀리까지 관측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要衝)의 감제고지(瞰制高地)이다.
 
  소양강을 건너기 전 이미 궤멸적 타격을 받은 인민군 2사단은 예비연대를 투입하고 인제 방면의 12사단 병력 일부까지 증원해가며 무수한 사상자를 낸 끝에 6월 28일 소양강을 건넜다. 소양강을 건넌 적들은 봉의산과 그 주변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소양교를 건너온 적병 일부가 춘천 시내로 입성을 시작했다. 적 주력 부대가 홍천 삼마치(三馬峙)로 이어지는 원창고개를 차단함으로써 연대 전체가 포위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7연대는 6월 28일 주요 방어 축선을 춘천 동남방의 원창고개로 이동시켰다. 1대대와 2대대가 원창고개를 돌파하려는 적의 공세에 맞서 분전(奮戰)하는 동안 3대대와 연대 본부는 홍천으로 철수하여 29일에는 홍천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사단사령부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서부전선 방어 축선의 속절없는 붕괴에 따른 급속한 철수 남하와 육군본부의 지시에 따라 횡성, 원주 신림고개를 지나 충주에 주둔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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