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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6·25전쟁이 남긴 것들

현대사 발굴 / 한·대만 斷交 30주년에 돌아보는 화교 참전용사들

대한민국 위해 목숨 바치고 잊힌 화교 참전용사 300여 명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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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적진에 침투해 첩보 활동을 하다 죽거나 다쳐
⊙ 훈장까지 받았지만 외국 국적 이유로 참전용사 대우 못 받아
⊙ 작전 중 붙잡혀 처형되거나 고문당해, 유해도 못 찾는 전사자들
⊙ 현충원에 작은 추모비 세우고 싶어 하는 유족들의 희망
⊙ 지난해 시행된 6·25비정규군보상법, 국방부는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되찾아줄까
서울 연희동에 위치한 한성화교중고등학교. 사진=한성화교중고 제공
  서울 연희동에 있는 한성화교중고등학교를 찾았다. 지난 5월 6일 오전이었다. 교문을 통과해 교정으로 들어섰다. 한문이 적힌 돌비석이 보인다. ‘자강불식(自强不息)’. ‘평생 쉬지 않고 스스로 연마하라’는 뜻이다. 《주역(周易)》 64괘(卦) 중 첫 괘인 ‘건괘(乾卦)’의 풀이에서 따온 말이다. ‘하늘의 운행은 건장하니 군자는 그것을 본받아 스스로 강건하여 쉼이 없어야 한다(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
 
  ‘자강불식’은 칭화(淸華)대학의 교훈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칭화대학은 대만과 중국 양국에 모두 있다. 베이징에서 개교했는데,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가서 국립칭화대학을 다시 세웠다.
 
 
  한-대만 단교 30년
 
1992년 8월 24일 서울 명동 중화민국 대사관에서 열린 마지막 국기 하강식에 참석한 화교 학생들이 청천백일기가 내려오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조선DB
  3층짜리 학교 건물이 보였다. 고색창연한 건물 외관이 추억 속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간간이 들려오는 교실 안 소리까지 더해져 정답게 느껴졌다. 한성화교중고는 1948년 개교했다. 원래는 명동 중국대사관 안에 있었다. 학생수가 늘어나 1969년 초등학교만 명동에 남고 중고등학교는 연희동으로 옮겨왔다.
 
  건물 입구 쪽으로 다가가자 동상이 보였다. 장제스(蔣介石) 전 총통과 쑨원(孫文) 선생의 동상이다. 장제스 전 총통은 대만의 국부(國父)이고, 쑨원은 신해혁명의 주역이다. 두 동상은 한국과 대만 관계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성화교중고처럼 이 동상들도 원래는 명동 중국대사관 안에 있었다. 한국과 대만이 단교하기 전 이야기다.
 
  1992년 8월 단교 후 대만대사관이 철수하면서 동상들을 본국으로 가져가는 방안을 검토하다 한성학교에 남겨두기로 했다. ‘화교 학생들에게 역사를 알려주는 유물로 남겨놓자’는 국내 화교 단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한국과 대만이 단교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가 대사관 게양대에서 하강하고, 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화교들의 모습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서럽게 우는 모습을 TV로 지켜봤는데, 꽤 강렬한 기억으로 뇌리에 남았다.
 
  ‘학교까지 중공에 넘겨주게 되면 당장 우리 아이들의 사상 교육은 어떡하냐’고 분개하던 화교 여성도 당시 뉴스에 등장했었다. 중국과 수교 후 명동의 대사관 등 대만의 외교 관련 자산은 강제로 중국에 넘겨졌다. 화교 여성의 지적처럼 한성화교학교는 어떻게 되느냐는 우려가 당시에 있었다. 학교는 비외교 자산으로 분류되어 지금까지 대만식 교육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참전한 화교들
 
참전 화교의 아들들. 왼쪽부터 왕성민(부친 왕죽삼), 나국위(부친 뤄야퉁), 김육안(부친 김성정).
  본관 건물 옆쪽에 기념관이 있었다. 아담한 규모에 한국의 화교 역사와 관련한 전시물들을 만날 수 있다. 한국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 때 한반도로 넘어온 청나라인들을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현재 3대에서 4대, 5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젊은 세대 중에는 한국으로 귀화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구(舊)화교’라 부를 수 있다. 최근에 한국에 정착한 중국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1990년대 이후 중국 대륙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이들은 ‘신(新)화교’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이들이다. 흔히 ‘조선족’이라 부르는 이들도 신화교에 포함된다. 한성화교학교엔 구화교에 속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최근엔 중국 본토에서 온 학생과 중국권에서 살다 온 한국인 학생들도 함께 공부한다.
 
  기념관에는 주현미 등 유명한 한국 화교들의 사진도 보인다. 안쪽에 세 명의 중년 남성이 기자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김육안, 왕성민, 나국위 선생이다. 모두 화교 2세, 3세들이다. 기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왜인지 가라앉아 있었다. 이들의 아버지는 6·25 참전용사였다.
 
  김육안(金育安·진위안) 여한(旅韓·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회장이 진열장 속 사진을 손으로 가리켰다. 군복을 입은 20대 젊은이 두 명이 총을 쥐고 앉아 있다. 그의 아버지 김성정(金聖亭·진성팅)씨와 아버지의 사촌 동생 김정의씨다. 두 분 모두 ‘SC지대원’이었다. SC지대원이 뭔지 알려면 한국 화교의 한국전쟁 참전사를 알아야 한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약 7만2000명의 화교가 살고 있었다. 남한에 약 1만2000명, 북한 지역에 6만여 명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이들의 삶도 요동쳤다. 정확히 말하면 동아시아 전체가 전운(戰雲)에 휩싸였다.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자유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한국 파병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6월 27일 UN안보리는 긴급회의를 열어 한국에 군사 지원을 할 것을 결의한다. 29일 장제스 총통은 미국 워싱턴에 참전 의사를 전했다. 자유중국의 국민혁명군(국부군·國府軍) 3만3000명을 한반도에 파병해 한국을 돕겠다는 내용이었다.
 
  미국과 한국은 국부군 참전에 반대했다. 중공이 한국전에 개입할 여지를 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한국을 구하기 위해 전 세계 21개국에서 젊은이들을 보냈다. 그러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1950년 10월 중공군(中共軍)이 개입했다. ‘항미원조(抗美援朝)’, 조선을 도와 미국에 대항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전세가 불안해지자 장 총통은 다시 한 번 미국에 국부군 출병 의사를 전한다. 미국은 또다시 국민당 정부의 참전에 반대한다. 이로써 국민당 정부는 한국전쟁 참전국 명단에 들지 못하게 됐다. 여기까지가 알려진 역사다. 이제부터는 잘 안 알려진 역사의 한 대목이다.
 
 
  평양에서 반공청년단 결성
 
김육안 승계회 회장의 부친 김성정 용사(왼쪽)와 부친의 사촌동생 김정의 용사. 이들은 육군첩보부대 SC지대원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사진=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제공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 2개월 전인 1949년 4월 20일, 평양에서 한중반공애국청년단(韓中反共愛國靑年團)이 결성된다. 조선인(북한인) 520명, 재북(在北)화교 50명 등 총 570명이 참여했다. 초대 단장으로 화교 위서방, 부단장으로 북한인 김명국, 화교 강혜림이 취임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중앙일보》에 1979년 연재된 진유광(秦裕光·친위광) 전 한성화교협회장이 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화교 편을 참조했다.
 
  위서방(魏緖舫)은 1923년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에서 태어났다. 진유광씨는 위서방이 신의주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는데, 착오로 보인다. 신의주로 이주해 소학교를 다닌 위서방은 중국 본토로 유학을 간다. 1945년 안둥(安東·현 단둥)에서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국·공내전에 참전한다. 국부군 상위(上尉·대위 해당)였다. 그는 정보 장교로 활약했다.
 
  1949년 국민당이 패배하자 그는 신의주로 돌아온다. 국부군으로 참전했다는 걸 숨기기 위해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옮겨간다. 평양 인근의 장산탄광은 몸을 숨기기에 적당했다. 그는 그곳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장산탄광엔 한국인과 화교가 절반씩 일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강혜림을 만난다.
 
  1925년 중국 산둥(山東)성 치샤(栖霞)현에서 태어난 강혜림은 국·공내전 시기 역시 국부군으로 참전했다. 국민당이 패배한 후 그는 평양에 정착해 중화요리점을 운영했다. 위서방처럼 강혜림도 반공 의식이 투철했다. 두 사람은 위서방의 동북군 정보 장교 시절 동료였던 한국인 김명국과 함께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결성한다. 이름처럼 반공을 기치로 한 게릴라 조직이었다. 이들은 인민군 병사들을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등 활동을 벌인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은 후방에서 무장교란작전을 벌일 계획을 세운다. 이때쯤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의 대원 수는 한국인 800여 명, 화교 200여 명으로 총 1000여 명에 달했다. 전쟁 발발 2개월 뒤인 8월 중순 위서방은 특공대 50명을 선발해 서평양내무서를 습격한다. 습격은 실패로 끝났다. 전투 중 동료 김명국을 잃은 위서방은 모처에 피신해야 했다. 그러다 10월 중순이 되자 유엔군이 평양에 가까워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위서방과 대원들은 평양 모란봉(平壤 牡丹峰)의 인민군 고사포 진지를 기습한다. 대성공이었다.
 
 
  백선엽 장군과의 만남
 
한성화교중고 기념관에서 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회장이 참전 화교 관련 서류를 보여주고 있다.
  1950년 10월 20일 드디어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다. 위서방은 국군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준장을 만난다. 백 장군은 정보참모 김안일(金安一) 중령과 함께 평양시청 지휘본부를 찾은 위씨에게 그동안의 게릴라 활동상을 보고받았다. 그러면서 위서방은 백 장군에게 요청을 했다.
 
  “한국군 작전에 참여하게 해 달라. 1사단과 함께 싸우겠다.”
 
  백 장군은 위씨의 요청을 즉각 받아들였다. 8월 습격 때 숨진 김명국의 장례도 치러줬다. 위서방은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平壤華僑反共愛國保衛團)으로 재편했다. 화교 250여 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주로 정보 수집 업무를 담당했다.
 
  한편 중국에서 한반도로 거대한 인파가 몰려오고 있었다. 중공군이었다. 10월 18일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10월 25일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은 미군에겐 낯선 존재였다. 화교반공보위단은 이들의 전술, 장비, 사고방식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포로를 심문하고 정보를 습득했다. 위서방과 강혜림의 국·공내전 참전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위서방은 국부군 정보 장교 시절 경험을 되살려 1사단 지휘부에 여러 조언을 했다. 그는 정보 참모 김안일 중령에게 “중공군이 참전했다면 틀림없이 린뱌오(林彪)의 제4야전군이 주축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훗날 사실로 밝혀졌다.
 
  12월 5일 유엔군이 평양에서 후퇴했다. 위서방과 화교반공보위단도 1사단과 함께 후퇴했다. 원래는 50명이 함께 출발했다. 이 중 20명은 아군의 재반격을 준비하기 위해 사리원(沙里院), 개성(開城) 등 요충지에 몇 명씩 떨어뜨려 놓았다. 위서방은 화교단원 30명을 중국수색대로 재편했다. 수색대장은 물론 위씨였고 김안일 중령의 지휘를 받았다. 대원들은 한국(韓國) 군복을 입고 주로 노획한 무기를 썼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이들의 참전에 반대하지 않았다. ‘외국인’이란 이유로 계급과 군번은 부여받지 못했다.
 
 
  중공군 참전 증거 확보
 
전장에서 전사한 참전용사 강혜림의 묘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사진=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제공
  화교수색대는 1950년 12월 24일, 경기도 연천 고랑포리(高浪浦里)에서 중공군을 습격한다. 여기에서 이들은 큰 성과를 낸다. 당시 국제사회는 미군에 증거를 요구했다.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중공군 부대가 38선 이남으로 내려왔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김안일 중령은 화교수색대와 함께 고랑포리로 들어갔다. 중공군 생포(生捕)특공작전이었다. 이들은 중공군 1명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38선 이남에서의 첫 중공군 포로였다. 작전에는 프랑스인 신문기자가 종군기자로 함께했다. 그의 기사로 이들의 활약이 세계에 알려졌다. 김안일 중령은 한국군 최초로 미국 은성무공(銀星武功)훈장을 받게 됐다.
 
  1951년 1월 김안일 중령은 대령으로 진급한다. 제1사단 제15연대장을 맡았다. 화교수색대의 소속과 명칭도 제1사단 제15연대 중국인특별수색대로 바뀌었다. 중국인특별수색대는 수색대로서 이상적이었다. 중공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깊숙이 침투할 수 있었다.
 
  2월 2일, 중국인특별수색대는 경기도 과천전투에 투입됐다. 상대는 중공군 정예부대였다. 수색대원들은 중공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해 적의 진지 8곳을 격파했다. 수색대 부(副)대장 강혜림은 실탄이 떨어지자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국군은 관악산을 점령했다. 강혜림의 유해는 부산화교소학교에 임시 안치됐다. 다시 북진하면 가족들이 있는 평양에 안치할 예정이었다. 그의 평양행은 이뤄지지 못했다. 1959년 한국 정부는 강혜림에게 은성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1964년엔 주한국 중화민국대사관과 김안일 장군 등 전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강혜림의 유해를 국립묘지(현 국립현충원)로 이장했다.
 
 
  서울 재탈환 작전
 
  1951년 3월 14일 미군은 서울 재탈환을 위한 총공격을 감행한다. 공격에 앞서 미군은 적의 동태를 살피며 일종의 위장전술을 펼쳤다. 밤마다 빈 트럭을 총동원해 일렬로 인천 쪽으로 가는 모습을 연출했다. 물론 후에 조용히 차를 돌렸다. 한강 반대쪽을 살피던 김안일 대령은 적이 퇴각한 걸로 판단, 강 건너로 정찰대를 보낸다. 중국인 수색대였다. 수색대원들은 인도교 교각에 바싹 붙어 소리 없이 강을 건넜다. 적의 진지를 살펴본 후 이들은 ‘비어 있다’고 김 대령에게 보고했다. 위장전술에 속은 적군이 인천 쪽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15연대는 아무런 저항 없이 마포까지 진출했다. 후에 보고받은 미군사령부는 왜 단독으로 작전을 했냐며 김 대령을 질책했다. ‘중국인 수색대가 정찰해보니 적이 없어 1개 중대를 보냈다’고 김 대령은 답했다. 그제야 미군 측은 납득을 했다고 한다.
 
  3월 14일 서울 입성 명령이 떨어졌다. 15연대가 선봉이었다. 이들은 되찾은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았다. 중국인 수색대도 함께였다. 이들의 서울 탈환 활약은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도 생생히 적혀 있다.
 
  서울에 입성한 중국인 수색대는 4월 녹번리(현 서울 은평구 녹번동)전투에 투입된다. 인근 야산에 중공군·북한군 혼성 1개 대대 병력이 잔류해 아군에게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었다.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에 이들을 섬멸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4월 28일, 중국인특별수색대는 적진 침투 작전에 투입된다. 5개 분조(分組)로 흩어져 적진에 침투했다. 적진에 숨어들어 폭격 표시용 신호기(信號旗)를 게양하는 게 이들의 임무였다.
 
  하지만 적진을 미처 빠져나오기 전에 이들은 적에게 노출됐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적진 가운데에 갇혀버린 수색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위서방과 대원 6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아군에 구출돼 대구 제27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위서방의 부상은 심각했다. 폐에 닿을 정도까지 파편이 깊이 박혔다. 4시간의 수술 끝에 살아났다. 사실상 녹번리 전투가 중국인 수색대의 마지막 전투였다. 1951년 4월 춘계 대공세가 마지막 열전(熱戰)이었다. 전쟁은 그 후로 2년간 이어졌지만 이 정도의 충돌은 없었다.
 
 
  ‘서울 차이니스 부대’
 
  1951년 3월, 전시 수도 부산에서는 또 하나의 화교 부대가 창설된다. 육군첩보부대(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HID) 산하 정식 중국인 부대인 제4863부대 SC지대다. ‘SC’는 ‘서울 차이니스(Seoul Chinese·한국 화교)’의 약자였다.
 
  위서방, 강혜림의 중국인 수색대가 재한 화교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의용군이었다면, SC지대는 중화민국 정부와 한국 정부가 함께 결성한 특수첩보부대였다.
 
  1951년 1월, 대만에서 한국에 들어온 왕스유(王世有)와 류궈화(劉國華)는 육군정보본부에 화교정보부대 창설을 제안한다. 국민당 정부가 이들의 뒤에 있었다. 류궈화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2기 졸업생이고 류궈화는 4기였다. 그런 탓에 류궈화는 한국군에 지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소개로 만난 박경원 육군첩보부대장은 화교정보부대 창설 제안을 수락했다. 이들과 한국 군 당국은 다음과 같은 참전세부조항에 합의했다.
 
  〈본국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와 고무에 힘입은 한국 내 거주하는 반공청년들은 1951년 2월 한국 군 당국과 참전세부조항에 합의했다. 합의사항 1. 한국군은 무기, 탄약, 주식(主食) 및 운송의 편리를 제공하고 2. 화교들은 인원 및 소요경비를 책임진다.〉
 
  대만 정부가 직접 파병한 듯, 안 한 듯한 뉘앙스의 합의문이다. SC지대의 지대장엔 뤄야퉁(羅亞通)이 임명됐다. 한성화교학교 기념관에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던 나국위(한국식 발음) 선생의 아버지다. 뤄야퉁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 같다. 그는 1949년 황푸군관학교(육군사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해 임관한 후 국·공내전에 참전했다. 뤄야퉁은 전투 중 중공군 포로가 된다. 6·25전쟁이 터지자 중공군 포병 교관으로 참전한다. 한반도에 온 그는 탈영을 하여 한국군으로 귀순한다.
 
 
  陸海空으로 북한 침투
 
  한국에 사는 화교 청년 200명이 SC지대 대원이 됐다. 이들은 경기도 문산과 서울 사직공원에서 10주간 훈련을 받았다. SC지대의 본부는 처음엔 서울 사직공원 옆의 한 주택이었다가 2개월 후 청진동의 이시영씨 저택 자리로 옮겼다.
 
  대원들은 12명 단위 소조로 편성되어 전방 HID부대에 분산 배치됐다. 이들은 적 후방에 들어가 군사 첩보를 캐오는 임무를 맡았다. 황해도 연백·해주 지역과 철원·금화·평강 지역 등 적 후방 침투 작전, 평남 성천·순천 지역 공중투하 작전, 함남, 함흥 북방 해상침투 등 육해공(陸海空) 모든 루트로 북한 전역을 누볐다.
 
  이들은 중공군 옷과 북괴군 옷을 겹쳐 입고 북한으로 넘어갔다. 적진에서 중공군을 만나면 북괴군 옷을 입고 인민군 행세를 했다. 북괴군을 만나면 중공군 행세를 했다. 부대 특성상 강화도와 교동도 등 본부를 옮겨가며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대원 200명 가운데 무장공작대원은 70여 명이었다. 나머지는 후방에서 포로 설득과 심문, 심리전 같은 임무를 맡았다.
 
  아무리 이들이 위장에 능하다 해도 적진에 침투하는 게 쉬울 리 없다. 1953년 7월의 원산(元山) 작전을 마지막으로 SC지대는 해체됐다. 무장공작대원 70여 명 중 살아남은 이는 불과 20여 명뿐이었다. 나머지 40여 명은 공작 중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됐다. 대부분 붙잡혀 고문당하거나 처형당한 경우다. 낙하산 침투 작전 전사자도 많았다고 한다. 유해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회장의 아버지 김성정씨와 오촌 당숙 김정의씨 모두 SC지대원이었다. 김정의씨는 1952년 낙하산으로 북한에 침투하던 중 사망했다. 왕성민씨의 아버지 왕죽삼(王竹三)씨도 SC지대원인 걸로 추정된다.
 
 
  켈로부대의 화교들
 
  화교 참전용사들은 중국인 수색대원, SC지대원 외에 또 있었다. 켈로(KLO)부대 소속 대원들이다. 켈로부대는 미국 극동사령부가 북한 출신 부대원을 중심으로 자생적 유격부대를 흡수해 1949년 창설한 부대다. 한국 주둔 전투병력을 철수하면서 북한 지역 첩보 및 공작 임무 수행을 위해 만들었다. 켈로(KLO)는 광복 이후 일본 도쿄에 있던 연합군사령부(GHQ) 정보참모부(G2)가 관리하던 주한 연락사무소(Korea Liaison Office)의 약칭이다.
 
  켈로부대의 자세한 행적은 아직도 베일에 쌓여 있다. 대원들은 적진에 뛰어내리기 위한 강하는 물론 무기·통신·외국어 등을 단기간에 익히기 위해 미군으로부터 고강도 훈련을 받았다. 첩보 수집과 요인 암살, 시설물 파괴 등 비밀공작도 했다.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한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의 주역도 켈로부대원들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켈로부대는 적진 내 첩보와 후방 교란을 맡았다. 1951년 7월 창설된 미군 8240부대에 통합됐다. 이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비정규군이었기 때문에 계급과 군번이 없었다.
 
  이들은 피란민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했다. 특히 어린 여성들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들은 북한 지역에서 적군을 만나면 ‘헤어진 오빠를 찾아다닌다’고 둘러댔다. 적군의 정세를 살펴서 보고하고, 무전기를 들고 실시간으로 포탄 투하 위치를 미군에 알려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포탄을 맞고 전사한 여성 대원들도 있다고 한다. 전쟁이 후반으로 갈수록 여성 대원들의 비중이 많아졌다.
 
  켈로부대에도 화교들이 복무했다. 부대 활동 자체가 잘 드러나지 않았으니, 화교들이 몇 명이나 복무했는지 또한 확인할 길이 적다.
 
 
  종군기장 받은 화교 용사들
 
1971년 12월 4일 열린 한국전 참전 화교 종군기장 수여식. 왼쪽부터 오중현(吳中賢), 류궈화(劉國華), 김재명(金在命) 장군, 뤄야퉁(羅亞通), 위서방(魏緖舫). 오중현(吳中賢)은 국군6사단 HID 제6지대 소속 북파공작원으로 활약했다.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사진=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제공
  1953년 7월 27일, 정전(停戰) 협정이 체결됐다. 화교 용사들은 어떻게 됐을까.
 
  중국인 수색대 대장 위서방은 전쟁이 끝난 후 한의학 공부를 했다. 강원도 강릉에서 한의원을 했다. 극빈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장학사업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1989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그해 12월 한국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로 위서방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기로 결정한다.
 
  SC지대는 정전 협정 2개월 후인 9월에 해체됐다. 해체 후에도 일부 대원은 군에 남았다. 중공군 포로 귀순 설득 작업을 하고 대북 중국어 방송 아나운서로 활약했다. 대북 심리전 요원을 한 대원도 있었다. 나머지는 생업으로 돌아갔다. 중식 요리사가 많다.
 
  나국위씨의 부친 뤄야퉁씨는 한성화교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직에서 물러난 후엔 중식당을 경영했다. 왕성민씨의 부친 왕죽삼씨는 중국 요리사로 일했다. 아서원, 태화관 등 당시 유명했던 중국 요릿집에서 요리를 하다 후엔 직접 식당을 차려 운영했다.
 
  김육안씨의 부친도 중식당을 경영했다. 경기도 의정부의 중식당 ‘지동관(志東館)’이다. 1963년 문을 열어, 의정부 인근에서 유명한 노포(老鋪)다.
 
  한국전쟁 전선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화교 용사들은 오랜 시간 잊힌 존재들이었다. 1971년 한국 정부는 SC지대의 활동을 공식 인정했다. 대원 중 53명에게 종군기장을 수여했다. 1975년엔 보국포장을 수여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5월 15일 강혜림의 묘소가 위서방 묘소 옆으로 옮겨졌다. 드디어 두 전우가 나란히 안식하게 된 것이다. 이날을 기려 매년 5월 15일 화교들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추모식을 연다. 화교들의 현충일인 셈이다.
 
 
  국가유공자 혜택 못 받아
 
  참전용사라는 사실을 한국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받았지만, 이들은 국가유공자의 혜택은 전혀 받지 못했다. 전쟁에서 입은 후유증도 자비로 치료해야 했다. 왕성민씨의 부친도 다리에 입은 관통상의 후유증을 혼자 감당했다고 한다. 외국 국적이라는 사유였다. 심지어 보국포장을 받았다가, 후에 박탈당한 화교 용사도 있다. 켈로부대 소속이었다는 이유다. 유가족들 역시 어떠한 보훈 지원도 받지 못했다.
 
  국방부에선 ‘대만 정부 측에 문의하라’고 답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육안 회장에게 대만 정부에서 지원을 받았는지 물었다.
 
  “대만 정부든 한국 정부든 어디에서도 지원을 받은 게 없습니다. 보국포장을 받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하셨답니다. ‘참전용사가 노후 생활을 걱정하지 않도록 나라에서 보상하겠다.’ 결국 말뿐이었어요. 이런 건 있습니다. 전쟁이 나고 SC지대원으로 참전하기 위해 떠나자, 남아 있는 가족에게 쌀 한 포대를 줬답니다. 군에서요. 아버지로부터 들었어요. 그게 전부입니다.”
 

  가족이 북한에 있던 중국인 수색대와 비밀 활동을 했던 켈로부대원들은 쌀 한 포대도 그나마 받지 못했을 터다. 그렇다고 대만 정부에 유공자 혜택을 요구하기도 모호하다. 무엇보다 대만군 차원의 공식 참전이 아니었다. 결국 한국 정부가 나섰어야 했다.
 
  참전 화교들은 왜 좀 더 강력히 한국 정부에 국가 유공자 대우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 중요했다. 유공자 대우는커녕 살아남기에 바빴다.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참전해서 무슨 일을 했는지 비밀을 지키라는 요구도 받았다고 한다. 왕성민씨는 부친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는 중식당에서 일하며 한 달에 하루 쉬었어요. 그 하루 동안 모든 일을 봐야 했어요. 그러니 유공자 문제를 어떻게 신경 쓸 수 있겠어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해가 갈까 봐 참전했던 사실을 말하지 않으셨어요.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봤는데, 설명을 해주지 않으셨지요. 어릴 적엔 아버지가 한국에 오기 전에 중국에서 군 복무한 걸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공작금 20년간 갚아
 
  전시 상황을 기록한 회고록이 있으면 누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당시엔 글을 모르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하긴 광복 직후 기준 12세 이상 한국인 중 문맹률이 약 78%였던 시대다. 김 회장의 설명이다.
 
  “아버지한테 들었을 땐 지대원이 200명보다 많았다고 해요. 300명쯤. 인원도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됐어요. 공식 기록을 조회하려고 국방부에 열람 신청을 했더니 다 공백으로 나와요. 활동상이 기밀이라 공개할 수 없다고요.”
 
  두 번째 이유는 거듭된 거절과 포기다. 나국위씨의 설명이다.
 
  “1980년대 중반쯤 아버지와 몇몇 어르신이 열심히 여기저기 알아보고 청원하고 다니셨어요. 심지어 혹시 무슨 얘기라도 들을 수 있을까 국립현충원까지 갔으니까요. 그래도 안 되니 나중엔 포기하시더군요.”
 
  세 번째 이유는 ‘돈 문제’였다. SC지대의 경우, 활동에 드는 공작비용을 화교들이 대기로 국군과 합의했다. 대원들이 돈을 보태고 류궈화는 화교 친지로부터 거액을 빌려오기도 했다. 2년 반 동안 쓴 활동 비용은 당시 돈으로 1억7000만원. 대만 정부는 이 돈을 지원하지 않았다. 결국 SC지대 책임자였던 왕스유와 류궈화가 부채를 떠 짊어졌다. 이들은 20년 동안 빚을 갚았다고 한다. 먹고살기 힘든데 빚 문제까지 걸려 있으니 더더욱 함께 모여 목소리를 내기 껄끄러웠을 터다.
 
  화교 참전용사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외국으로 이주해 연락이 안 되는 참전용사를 감안해 대부분이라고 표현했다.) 전쟁이 발발한 후 72년이 흘렀으니 스무 살에 참전했어도 92세다.
 
  유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해보지 그랬냐고 김 회장에게 물었다. 김 회장은 약간 긴장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저희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살게 된 것만도 감사한 걸요. 혹시 추방이라도 당하면 저희가 어디로 갈 수 있겠어요. 대만에 가면 저희 보고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국제 고아처럼 느껴집니다.”
 
  그래도 김 회장은 주위 사람들이 부친을 참전용사로 대우해주었다고 회고했다.
 
  “6·25 참전용사라고 주위 분들이 식당에 많이 와주셨어요. ‘짜장면 먹으려면 이왕이면 김 상사네 가게로 가자’, 김 상사로 불리셨지요. 인근 미군 부대에서도 저희 가게를 우대했어요. 부대 안에 공고를 해요. ‘A식당은 별로고 B식당을 가라. 이 식당은 참전용사가 하는 식당이니 많이 이용해라.’ 미국 사람들은 파티를 많이 하잖아요. 어릴 적에 음식이 든 접시를 신문지로 둘둘 싸서 배달 가곤 했어요.”
 
  화교 참전용사의 가족들이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 ‘추모비’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한 참전용사들을 위한 추모비다. 마침 강혜림과 위서방의 묘역 사이에 공간이 있다. 이 얘기를 하면서도 김육안 회장은 강혜림과 위서방 용사의 묘역이 장군 묘역처럼 잘 조성되어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6·25비정규군보상법
 
  이들의 바람이 이뤄질 수 있을까. 지난해 4월 ‘6·25전쟁 전후 적 지역에서 활동한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약칭 6·25비정규군보상법)’이 제정됐다. 조문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이 법은 6·25전쟁 전후 적 지역에서 비정규군 신분으로 국가를 위하여 중대하고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였거나 특별한 희생을 한 것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공로자와 그 유족에 대한 보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비정규군”이란 1948년 8월 1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의 기간 동안 「국군조직법」에 따른 국군이 아닌 신분으로 다음 각 목의 조직이나 부대에 소속되어 비정규전을 수행한 사람을 말한다.
  가.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Korea Liaison Office)
  나. 미군 8240부대(한국군 8250부대로 전환된 인원)
  다.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조직 또는 부대
 
  2. “비정규전”이란 적의 점령·지배·활동 지역(이하 “적 지역”이라 한다)으로 침투하여 수행한 적 병력 살상, 주요시설 파괴, 화력유도 등 유격 또는 첩보 수집 활동을 말한다.
 
  3. “공로자”란 비정규군으로서 특수하고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였거나 특별한 희생을 하여 그 보상 필요성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 제4조 제1항에 따른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공로자로 인정된 사람을 말한다.〉
 
  법 조문엔 ‘국적’에 대한 언급이 없다. 조문대로라면 화교 참전용사들도 공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원 자격은 충분하되, 최종 판단은 국방부의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내릴 것으로 보인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실의 보좌진도 같은 의견이었다.
 
 
  유해도 못 찾은 참전 화교
 
  내년은 종전 70주년이 되는 해다. 국방부는 중공군의 유해를 발굴해 매해 중국 정부에 송환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국가 간 통행이 어려웠을 시절에도 거르지 않고 중공군 유해를 송환했다. 지난해에도 109구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300명이 넘는 화교 용사들은 자유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청춘과 생명을 바쳤다. 이들 중 많은 이는 죽어서조차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화교가 7만2000여 명이었던 걸 감안하면, 300명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260명 중 1명이 참전했단 얘기다.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생을 마친 화교 용사들의 유해는 아무도 찾지 않는다.
 
  한국 정부가 이들을 국가 유공자로 대우하지 않는 데엔 어떤 국제 정치적 고려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지 않으면서, 또다시 위기가 닥쳤을 때 타국의 친구들이 우리를 돕길 기대할 수 있을까.
 
  SC지대 소속으로 참전한 화교 지건반씨는 예전 인터뷰에서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 피로 지킨 이 땅이 바로 내 고향이고 나도 한국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국적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현충원에 있는 강혜림의 묘비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의백장존(義魄長存)’, 의로운 넋은 오랫동안 남는다는 뜻이다. 내년 이맘 때쯤엔 이 ‘의로운 이들’을 떳떳하게 기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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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ic7800@hotmail.com    (2022-06-13) 찬성 : 0   반대 : 0
명동에 있는 중공 대사관은 대한민국에 문재인 추종 좌익이 많음을 알고 공산화 노리고 중공 대사관을 길에서 못보게 담을 5m 정도 높이 쌓았습니다.한국에 있는 중공 유학생 80% 공산당원.중공은 시진핑과 중국정부 비판하면 구속 처벌. 세계 3대 박물관 파리,런던, 대만 중에 대만 국립 고웅박물관 유물이 인상에 남음
  combatmedic    (2022-05-30) 찬성 : 13   반대 : 0
화교 참전 용사 어르신분들의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화교 용사 분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꼭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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