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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71주년

美 공군의 ‘전투공수’가 美 해병 1사단을 死地에서 구출했다!

글 : 장호근  예비역 공군 소장·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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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극동군사령부, 전쟁 발발 직후 병력수송 담당하는 전투공수사령부 창설
⊙ 포위당한 푸에르토리코 대대에 보급용 105mm 곡사포 포탄 투하… “하늘에서 내려온 마나”
⊙ “나의 비행만이 목숨을 바친 이들이 고향에서 명예로운 장례식을 치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폴 프리츠 대위)
⊙ ‘하늘의 영구차’로 불린 수송기들, 병력 1만4510명 실어 날라
⊙ 고토리 탈출 땐 M-2 부교 투하… 임시 교량 건설하고 철수에 성공

張浩根
1946년생. 공군사관학교(17기) 졸업, 전북대 정치학 박사 / 공군 작전사령부 참모장, 한미연합사 공군구성군사령부 부참모장, 공군 전투비행단장, 연합사 정보참모부장, 국방대학교 부총장, 공군 소장 전역, GE 군용엔진 동북아판매담당 전무이사·고문, 공군협회 연구위원장, (사)한국독도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역임 / 저서 《예방외교》
1950년 12월 5일, 하갈우리에서 걸을 수 있는 부상자들이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C-47에서 포탄이 하역되고 있다. 사진=미 공군
  6·25전쟁 당시 미군과 중공군의 전투를 극화한 영화 <장진호(長津湖)>가 중국 내에서 인기라고 한다. 전국 동시 개봉일인 9월 30일을 나흘 앞두고 예매 관객이 무려 1억명에 달했다는 소식이다. 개봉 직후 5000만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미·중 신냉전(新冷戰)에 의해 초래된 강력한 반미(反美) 정서를 영화 <장진호>가 파고든 것이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개마고원으로 진격했던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육군 제7보병사단이 10배에 달하는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12만 명과 2주 동안 벌인 6·25전쟁 최대의 격전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철수하면서 미 해병대가 겪은 참상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미 공군의 활약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미 극동공군은 1950년 9월 전구(戰區) 내의 모든 병력수송 자산을 작전 통제하는 전투공수사령부(Combat Cargo Command)를 창설했다. 사령관에는 미 공군 최고의 공수작전 전문가 윌리엄 터너 소장이 임명됐다.
 
  장진호 전투 71주년을 맞아 장진호 철수작전에서 미 공군의 전투공수사령부가 지상군을 지원한 전투공수(combat airlift) 임무, 즉 어떤 악조건 아래에서 사상자를 후송했고, 어떻게 긴급 소요 보급품을 공수(空輸)해 철수작전을 성공시켰는지 주요 작전을 일자별로 간추려 소개한다.
 
 
  중공군의 유인격멸작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6·25전쟁 종결에 대한 미국의 견해는 낙관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대응은 미국의 판단과는 상이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맥아더 원수가 웨이크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 10월 15일 바로 그날, 중국은 6·25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그러고 10월 19일 중공군 주력을 한반도에 투입함으로써 개입을 시작했다. 중공군은 “공격해오는 한국군과 유엔군을 깊숙이 유인해 섬멸한다”라는 이른바 ‘유인격멸작전’을 선택했다. 당시 유엔군은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북한 서쪽 산악 지역을 미 8군이, 그리고 동쪽을 미 10군단이 담당했다. 10군단에 소속된 미 1해병사단은 장진호를 거쳐 낭림산맥을 넘어 강계로 진출해 미 8군과 연결해 전쟁을 마무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약 30만 명의 중공군 개입은 10월 말부터 시작됐다. 이 중에서 중공군 제9병단 약 12만 명이 장진호 방향으로 진입했다. 이에 상대하는 유엔군은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1해병사단, 그리고 제1해병항공단 및 영국군을 포함해 약 3만 명이었다. 미군 중에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장병들로만 구성된 제65보병연대도 있었다.
 
  장진호 전투는 장진호 서쪽 지역에서 시작해서 장진호 남쪽 끝의 하갈우리, 죽음의 계곡, 고토리, 황초령으로 이어졌다. 장진호 전투를 미국에서는 일본식 지명 발음에 따라 ‘초신(Chosin) 전투’라고 부른다.
 
 
  美 해병1사단의 분투
 
  미 제1해병사단은 10월 25일 원산에 상륙했다. 그러고 10월 30일, 장진호 방향으로 진격했다. 11월 2일 해병대는 중공군과 처음으로 조우하면서 수동리에서 황초령을 넘어 고토리로 진격했다. 중공군 제9병단 병력은 탐지가 어려운 야간을 틈타 이동해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했다. 해병대는 더는 진격할 수도 후퇴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때부터 미 해병대는 장진호라는 커다란 수렁에 빠지게 된다.
 
  장진호 전투 초반인 11월 29일 하갈우리와 고토리 사이는 아수라장으로 죽음의 계곡이 되었다. 제1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수송기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거부하고, 12월 6일이 되어서야 하갈우리에서 지상으로의 철수를 결심했다. 12월 7일 철수하는 해병대의 마지막 병력이 목적지인 고토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16km에 달하는 고토리에서 진흥리 사이의 황초령 고갯길에 구축된 중공군의 화망(火網)을 돌파해야만 했다. 12월 11일이 되어서야 미 해병대는 중공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제1해병사단은 많은 사상자가 있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퇴각에 성공했다. 중공군 제9병단도 대규모 병력 손실로 거의 와해됐다.
 
  미 전투공수사령부는 당시 수송기 자산 중 일부를 한반도 동부에서 진격 중이었던 제10군단 지원에 할애했었다. 그러나 제10군단이 요청한 군수품은 대부분 원산항, 그리고 후에는 흥남을 통해 해상으로 수송됐다. 단지 긴급물품이 필요한 경우에만 수송기로 공수했다. 장진호에서 철수작전이 개시된 이후에는 북동부 전선의 공수지원에 집중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마나
 
  전투 중 지상군의 긴급 요청을 지원한 공수작전의 개요와 성과를 소개한다. 대부분 푸에르토리코의 지원병으로 구성된 제10군단 소속 제65보병연대는 11월 5일 원산에 도착했다. 연대장 해리스 대령의 푸에르토리코 부대는 11월 8일 함흥 남쪽에서 자정을 넘어 중공군과 교전을 시작했다. 적의 공격은 밤새도록 계속됐다. 이 정도로 교전을 계속한다면 아군은 오전에 모든 탄약이 소진될 것 같았다. 해리스 대령은 이와 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제10군단을 통해 보급품 긴급 공중 투하를 요청했다.
 
  새벽에 동이 튼 지 얼마 되지 않아 함흥 남쪽 영흥 상공에 C-47 3대가 나타났다. 그러고 포위당한 대대에 보급용 105mm 곡사포 포탄을 정확하게 투하하기 시작했다. C-47 수송기의 공중지원으로 부대에 필수적으로 필요했던 5300파운드의 탄약이 보급됐다. 보급이 이어지자 중공군은 교전을 중지하고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했다. 제65보병연대 푸에르토리코 장병들은 이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마나(Mana de Cielo)”라고 불렀다. 1950년 11월 8일 C-47 수송기의 공수비행 임무는 푸에르토리코 부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에드워드 아몬드 중장의 제10군단은 1950년 10월 말 압록강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도 흥남에서 출발해 장진호로 전진했다. 11월 10일 진흥리에서 16km 떨어진 고토리를 확보했다. 그러나 11일부터 기온이 급강하하고, 강풍까지 불어 고토리부터 하갈우리까지 18km를 통과하는 데 꼬박 5일이 걸렸다.
 
 
 
고립된 제1해병사단에 C-119로 보급품 투하

 
1950년 12월 하갈우리에서 미 공군 C-47에 부상자들이 탑승하고 있는 사진. 수송기 너머의 산이 중공군이 점령한 고지였다. 사진=미 해병대, “Combat Cargo in the Korean War”(2000년)
  11월 19일 해병대 공병들은 마을의 남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평지에 작은 활주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하갈우리의 해발 고도는 4000피트(1220m)였다. C-47/R4D(미 해군용 C-47) 수송기의 이착륙을 위해서는 활주로 길이가 최소한 7600피트(2316m)는 확보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언 땅 위에 활주로를 공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공병대는 북북서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길이 2500피트(762m), 폭 50피트(15m)의 임시 활주로를 만들었다. 그 후 12월 8일까지 1750피트(533m)를 연장했다.
 
  11월 25일,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방향 서쪽 접근로의 중간에 있는 하갈우리로부터 22km 떨어진 유담리에 도착했다. 11월 27일과 28일 밤, 중공군이 제10군단의 전방 부대를 공격했다. 중공군 2개 사단이 유담리의 해병대 진지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유담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아몬드 사령관은 즉시 전투공수사령부에 연락해 저수지 근방에 고립된 부대에 대한 보급품 공중 투하를 요청했다.
 
  11월 29일, C-119 12대가 유담리의 해병대에 63.9톤의 보급품을 투하했다. 공중 투하 품목에는 볼드윈(Baldwin) 화물 묶음 2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볼드윈은 보병대대의 일일 보급품으로 16톤의 무기, 탄약, 식량, 의료품을 포장한 화물 묶음이다. 추가로 C-47 5대가 10.9톤의 탄약과 의료품을 투하했다.
 
  그다음 날인 30일, C-119의 17회 비행으로 볼드윈 2개를 포함한 86.8톤의 보급품을 해병대에 투하했다. 해병대는 하갈우리를 향해 남쪽으로 돌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병대는 탈출로 개척을 위해 중장비가 필요했다. 연이어 C-47 4대가 유담리, 하갈우리, 그리고 고토리의 해병대에 8.8톤의 탄약과 의료품을 투하했다.
 
 
  6일간 C-119 수송기 238회 출격
 
  12월 1일이 되자, 터너 소장의 전투공수사령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포위된 제10군단을 탈출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했다. 도쿄의 극동공군 본부는 모든 C-119를 장진호 보급품 공중 투하에 투입했다. 이와 같은 임무에는 C-119 수송기가 제일 적합했다. C-47은 출구가 측면에 있어 한 번에 대량의 화물을 투하하기에는 부적합했다. 반면에 C-119는 비교적 대형이고 후면으로 화물 투하가 가능했다. 또한 굴림대(roller)가 탑재되어 있어 한 번에 6톤의 화물까지 투하할 수 있었다.
 
  일본 규슈 북단의 아시야(芦屋) 공군기지 사령부 본부에서는 효과적인 공중 투하를 실제 시험을 하면서 준비했다. 모든 화물의 무게에 따라 18피트짜리 또는 24피트짜리 낙하산을 장착했다. C-119 이륙 전에 후미 출구의 문을 제거하고, 네 줄의 굴림대를 이용해 낙하산 달린 화물을 신속히 투하할 수 있게 개조했다.
 

  또한 투하 승무원들은 조종사와 긴밀히 연락하면서 화물을 투하하도록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 따라서 실전에서도 수송기가 저고도에서 속도를 시속 110노트(204km/h)를 유지하면서 길이가 100야드(91m)도 안 되는 투하 지점에 화물을 정확히 투하할 수 있었다. 전장에서 조종사들은 투하 지점의 확인을 위해 T-6(Mosquito) 공중항공통제기 또는 지상의 전방항공통제관(FAC)의 도움을 받았다.
 
  12월 1일과 6일 사이, C-119는 238회 출격했다. 주로 하갈우리와 고토리의 해병대와 제10군단의 병력을 위해 970.6톤의 화물을 투하했다. 제1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이 기간에 공중 투하된 보급품은 전투를 위한 필수품으로, 사단의 작전 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며 “이러한 사실은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하늘의 영구차’
 
  전투공수사령부는 C-119 60대를 공중 투하 작전에 투입했다. 반면에 C-47은 하갈우리에서 부상자들을 후송하는 임무에 집중됐다. 11월 30일 당시 하갈우리 활주로는 40% 정도 완공돼 있었다. 활주로는 길이 2500피트(762m), 폭 50피트(15m)였다. 비상시 적용하는 단거리 이착륙 절차가 필요했다. 또한 목표 지점 접근을 위해서는 중공군이 점령 중인 산악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위험 부담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 긴박해 공중 수송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30일 오후 2시30분, 첫 번째 C-47이 눈 덮인 활주로에 착륙했다. 조종사는 24명의 사상자를 태운 뒤, C-47의 바퀴를 활주로에 끝에 맞추고 기체 후미의 바퀴가 지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엔진 추력을 증가시켰다. 그러고 이륙을 위해 밟고 있던 브레이크를 놓았다. C-47은 앞으로 나아갔고, 휘청거리면서 이륙했다. 이런 식으로 남쪽의 산을 겨우 넘어 상승한 후에 20분 거리에 있는 함경남도 함주군 연포로 향했다.
 
  8대의 항공기가 어두워지기 전까지 추가로 하갈우리에 들어왔다. 4대는 미 공군 소속이었고, 다른 4대는 제1해병비행단 소속 R4D 수송기들이었다. 작전이 시작된 첫날, 총 143명의 사상자를 후송했다. 공수의 속도는 12월 1일이 되면서 더욱 빨라졌다. 12월 1일과 4일 사이 하갈우리에 집결한 부상자는 1500명으로 늘었다. 이들 중 3분의 1은 동상에 걸려 있었다. 12월의 첫 나흘간 2000명의 부상자를 안전하게 후송했다. 12월 초에 연포와 하갈우리를 왕복 비행했던 조종사 폴 프리츠 대위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들은 단순한 부상자가 아니라 말없이 죽어가는 해병들이었다. 이들은 중앙의 좁은 통로 양쪽에 차곡차곡 누워 있었고, 뒤틀린 손발이 갈지자로 나와 있었다. 이제는 일상적인 복장이 된 더럽고 피에 젖은 전투복을 입고 있는 이들의 뒤틀린 얼굴과 몸은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승무원들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의 팔과 다리를 가지런히 접어 항공기에 실었고, 한 방향으로 민 후, 비행 중 움직이지 않도록 밧줄로 고정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의 비행만이 목숨을 바친 이들이 고향에서 적절한 장지(葬地)를 찾아 명예로운 장례식을 치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로서는 엄숙한 마음으로 이 임무를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층 더 조심스럽게 하늘의 영구차를 조종했다.”
 
 
 
그리스 공군기도 참여

 
  12월 5일, 전투공수사령부 C-47은 미 해병대 R4D와 그리스 공군 C-47과 함께 부상자 후송과 화물 공수 작전을 계속했다. 이날 전투공수사령부는 전구에서 3925명의 환자를 후송해 전쟁 중 일일 최대 의무 후송 기록을 세웠다. 12월 6일, 미 공군은 이착륙 중에 C-47 2대를 잃었다. 이날 해병대는 하갈우리에서 지상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고토리에서는 수송기가 안전하게 이착륙할 수 있도록 기존 활주로의 연장을 계속했다.
 
  해병대 조종사들은 항공모함 착함 유도 장교의 도움을 받아 함재기들이 항공모함에 착륙하듯 착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활주로는 여전히 C-47이 착륙하기에는 부적합했다. 12월 8일, 해병대 공병의 노력으로 활주로 길이는 1750피트(533m) 더 연장됐다. 그날, C-47 1대가 폭설 속에서 기적적으로 찾아왔고, 19명의 부상자를 태우고 떠났다. 12월 9일, 고토리에서 대대적인 후송 작전이 진행돼 부상자 292명을 후송했다. 12월 10일에도 미 공군 C-47이 8명의 부상자를 후송해 장진호 전선에서의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다.
 
  터너 소장의 전투공수사령부는 항공의무후송(Medevac)을 강화하기 위해 1950년 9월 제801항공의무후송대대(Medical Air Evacuation Squadron) 대대장에 항공군의관 중령을 임명했다. 그러고 화물 수송기에 의무 장비 구비와 함께 비행 간호사와 의료진을 배치하는 등 사상자의 공중 후송 업무를 개편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다리’
 
1950년 12월 9일, 해병대원들이 파괴된 황초령 교량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 사진=미 해병대
  고토리로부터 남쪽으로 5km 떨어진 황초령(Funchilin Pass)을 가로지르는 교량은 중공군에 의해 파괴되어 있었다. 지상 철수에 있어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우회로도 없었다. 해병들이 차량과 탱크, 화포를 옮기기 위해서는 16피트(5m) 길이의 교량(교각 받침대를 포함하면 7.3m)이 필요했다. 미 해병대 공병들은 이를 위해 임시 교량으로 M-2 부교(treadway bridge) 4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런 중장비는 단 한 번도 수송기에서 투하된 적이 없었다. 부교는 무게가 2900파운드(1.3톤)에 하나의 길이가 16피트(5m)에 달했다. 12월 6일, C-119 1대가 연포비행장에서 시험 투하했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24피트짜리(7.3m) 낙하산 두 개를 사용했지만, 화물은 그대로 지면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확실히 더 큰 낙하산이 필요했다. 48피트(14.6m) 캐노피의 G-5 낙하산들이 조립 정비사들과 함께 연포로 긴급 공수됐다.
 
1950년 12월 10일, 공중 투하된 부교를 밤사이에 설치 후, 해병대원들이 그 위로 철수하고 있다. 사진=미 해병대
  12월 7일 아침, 공중 투하 작전은 시작됐다. 교각과 교각 사이를 이어줄 부교 경간(treadway span)을 탑재한 C-119 3대가 오전 9시30분 고토리의 투하 지점에 도착했다. 전방항공통제관의 지시에 따라 첫 번째 항공기가 울퉁불퉁한 지면을 향해 빠르게 하강하다 수평비행을 하기 직전 800피트 높이에서 화물을 투하했다. 비록 화물은 안전하게 착지했지만, G-5 낙하산이 완전히 펴지기 위해서는 1000피트(305m) 이상의 고도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다음 C-119 2대도 이상 없이 화물을 투하했다. 정오가 되기 전에 5대가 추가로 투하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 중 하나는 부서지고 하나는 중공군 지역에 깊숙이 떨어졌다.
 
  12월 9일, 해병대원들은 부교 경간을 들고 남쪽의 고토리로 향했다. 오후 늦게 이를 이용해 교량을 복구하고 1500피트(457m) 계곡을 건너 적의 포위망을 돌파했다. 역사상 처음 있는 교량 공수 투하 작전의 성공이었다. 미 해병대는 전쟁사에 공식적으로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12월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밤에 병력과 차량의 긴 부대 행렬이 이어졌다. 의심할 바도 없이 그 시점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다리(A Bridge from the Sky)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임에 틀림없었다.”
 
 
  흥남철수의 계기 만든 전투공수작전
 
  이튿날인 12월 11일, 해병대는 함흥에 도착했다. 전사상 가장 성공적인 후퇴 작전 중 하나를 완수한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제21병력수송대대와 제314병력수송전대, 그리고 제801항공의무후송대대가 우수부대 표창을 받았다. 이는 6·25전쟁에서 미 공군 부대로서는 처음이었다.
 
  미 공군 항공기 승무원들의 회고는 당시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준다. 자신은 ‘하늘의 영구차’를 조종했다고 술회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철수하는 해병대를 항공 지원했던 미 공군 전투공수사령부의 역할은 재조명을 받아야 마땅하다. 통계에 의하면, 철수작전이 진행된 11월 28일부터 12월 11일까지 전투공수사령부는 총 1600회 이상을 출격했다. 그 결과로 총 5280톤 이상의 물자를 공수했고, 총 1만4510명의 병력을 수송했다.
 
  역사학자들은 장진호 전투에서 스미스 소장이 지휘했던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킨 덕에 12월 15일 개시된 흥남철수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제1해병사단의 처절한 희생이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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