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앰네스티 인권상 수상
⊙ “北에서 중학교 교사 하다 아버지 유언 지키기 위해 탈북”
⊙ “가족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제 결혼 당했다”
⊙ “중국인 남편 도박과 알코올 중독자… 도망갈까 봐 한겨울에도 슬리퍼만 줘”
⊙ “남편이 100일 된 아들을 도박 빚 때문에 팔겠다고 해”
⊙ “주변 사람의 신고로 2004년 북송돼”
⊙ “北에서 중학교 교사 하다 아버지 유언 지키기 위해 탈북”
⊙ “가족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제 결혼 당했다”
⊙ “중국인 남편 도박과 알코올 중독자… 도망갈까 봐 한겨울에도 슬리퍼만 줘”
⊙ “남편이 100일 된 아들을 도박 빚 때문에 팔겠다고 해”
⊙ “주변 사람의 신고로 2004년 북송돼”
-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맨체스터주 베리 자치구의 홀리루드 워드 구의원 후보로 출마한 인권운동가 탈북민 박지현씨. 사진=박지현 페이스북
최근 국내외 언론에 자주 언급되는 탈북민이 있다. 영국에 거주하는 박지현(52)씨다. 박씨는 오는 5월 시행되는 영국 지방선거에 구의원 후보로 출마한다. 2008년 영국에 난민으로 정착해 13년째 거주 중인 박씨는 탈북민 최초로 제3국에서 공직에 출마한다.
현재 영국 맨체스터에 거주하는 박씨는 최근 영국 보수당 홀리루드(Holyrood) 지역 구의원 후보로 최종 선정돼 선거 준비에 한창이다. 영국의 집권당인 보수당도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베리(Bury)의 홀리루드 구의원 후보가 박지현씨라며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박 후보는 2008년 영국에 정착해 2017년부터 탈북 여성과 북한 아동의 인권보호 등을 목표로 한 민간단체 ‘징검다리’의 공동대표로 활동해왔다. 그는 전 세계를 돌며 탈북 여성들의 중국 내 인권실태와 북한 인권에 대해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박 후보는 2020년 2월 국제앰네스티 영국지부가 수여하는 ‘앰네스티 브레이브 어워즈’를 수상했다. 기자는 박지현 후보를 지난 1월 25일 영상으로 처음 만났다.
“오늘 인터뷰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1월 25일은 제가 영국에 도착한 지 만 13년째 되는 날입니다.”
박 후보의 말이다. 기자도 고향이 북한이지만 박지현 후보에 대해서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그는 활달한 성격의 50대 초반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었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시다. 그는 그곳에서 중학교 수학교사로 일했다.
동생의 탈영
― 언제 탈북했습니까.
“1998년 일명 ‘고난의 행군’ 시기에 처음 탈북했습니다.”
― 청진에서 교원대학을 나온 건가요.
“아닙니다. 농업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수학 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고, 어머니의 지인이 힘을 써주어 중학교 교사로 가게 된 겁니다.”
― 그럼 교사를 하다 탈북한 건가요.
“교사 생활을 막 그만둔 뒤였어요. 탈북하기 1년 전인 1997년에 어머니의 사업이 망하면서 집안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죠. 당시는 고난의 행군 시기라 경제난까지 겹치면서 큰아버지는 굶어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졌어요.”
― 어머니는 어떤 사업을 했나요.
“다른 사람과 달리 조금 일찍 중국과 밀무역을 하셨어요. 마른 명태와 오징어 등을 중국으로 수출해 돈을 꽤 버셨어요. 그러다 1994년부터 장사가 내리막길에 들어서면서 나중엔 엄청난 빚까지 지게 됐죠.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만 빼고 다 가져갔어요.”
― 한순간에 집안 경제가 힘들어진 거네요.
“그렇죠. 거기에 아버지까지 앓아누우시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중국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러 가셨는데 이후에 연락이 없었어요. 제가 교사를 그만두고 장사를 조금씩 하면서 그런대로 살아나갔죠. 그러던 어느 날 군대 나갔던 동생이 갑자기 집에 온 거예요. 휴가를 왔다고 하는데 조금 이상했어요. 북한은 보통 병사들이 고향으로 휴가를 가면 부대 장교가 함께 옵니다. 그런데 동생은 아무런 짐도 없이 혼자 온 것을 보고 조금 이상했죠.”
― 탈영인가요.
“탈영이었죠. 동생이 오고 이틀 지나 동생 부대 장교들이 집에 왔어요. 동생을 찾더라고요. 당시 동생은 다른 곳으로 이미 피신한 상태였어요. 이들은 다음 날 동생을 찾아서 데리고 왔는데 사람을 어떻게나 때렸는지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집에 와서도 아버지와 제가 있는데도 엄청 때렸어요. 아버지는 병 때문에 거동을 못 하셨고, 나는 때리지 말라고 울면서 고함만 질렀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바로 부대로 돌아갔어요.”
― 이후 동생의 소식은 들었나요.
“네.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장교들에게 맞아서 얼굴이 피투성이 된 동생에게 돈이 없어 제대로 된 도시락도 챙겨주지 못했습니다. 동생은 장교들과 집을 나선 지 3일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 어떻게 다시 온 거죠.
“장교들과 부대로 가는 중에 열차가 멈춘 기회를 이용해 도망친 거죠. 자기도 이대로 끌려가면 분명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동생을 얼른 아는 집에 숨겼어요.”
의식도 없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탈북
― 이후에 어떻게 됐나요.
“장교들이 다시 돌아와서 동생을 내놓으라고 미친 사람처럼 날뛰더라고요. 그때가 1997년 11월이었어요. 장교들은 계속해서 동생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고, 저는 그 사람들 몰래 동생에게 먹을 것을 챙겨줬죠. 그들은 다음 해인 1998년 2월까지 집에서 머물면서 동생을 찾아다녔어요.”
그들은 박지현씨 동생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자신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도 동생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누나인 그를 인질로 끌고 다니며 동생을 찾아다니겠다는 협박을 남기고. 그때 그는 탈북을 결심했다. 문제는 병으로 누워 있는 아버지였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버지는 유언처럼 동생을 꼭 지키라고 말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의식이 거의 없으셨어요. 그래서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우리가 가길 기다리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는 의식이 조금씩 돌아올 때마다 손짓으로 빨리 가라고 했어요. 우리가 무사히 떠나는 것을 보고 싶으셨나 봐요.”
결국 아픈 아버지를 두고 떠나야 했다. 동생과 언니네 가족을 이끌고 탈북길에 나섰다.
“무작정 떠났습니다. 예전에 어머니한테서 두만강 근처까지 가면 중국으로 바로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함경북도 온성군 일대 두만강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가기로 한 거죠. 마침 온성에는 예전에 농촌 지원 활동을 하기 위해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인신매매 브로커에게 걸리다
― 많이 두려웠을 텐데요.
“왜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거죠. 차를 타고 온성까지 이동해 새벽이 되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새벽 2시가 돼서 몰래 강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거의 건너자 뒤쪽에서 북한 군인들이 총을 쏘고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더라고요.”
― 어디까지 따라왔나요.
“잘은 모르겠어요. 저희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으니까요. 강에서 총소리가 나니까 중국 쪽 집들에 불이 켜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는 무작정 아무 집이나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사정 얘기를 하니 조선족분이 우리를 위해 밥에 여러 반찬을 만들어주더라고요.”
두만강을 건너자 북한군은 더 이상 따라올 수 없었다. 집주인은 아주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착각이었다. 그 사람은 인신매매 브로커였다. 그는 박지현씨에게 가족들을 살리려면 중국인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고 했다. 박씨가 거부하자 집주인은 박씨의 가족들을 신고하겠다고 했다. 박씨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북한은 박씨의 동생을 체포하기 위해 박씨의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곳 부근까지 사람을 보내놓은 터였다.
“나중에 동생에게서 들었는데 동생은 평양에서 김정일의 비자금을 만드는 부대에서 일했다고 해요. 당시 김정일의 비자금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동생 부대는 북한의 금을 해외로 팔다가 적발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팀이 모두 탈영을 했고, 당국에선 체포 명령이 떨어진 것이죠. 그러니 동생은 잡히면 무조건 정치범수용소나 공개처형이 될 것이 뻔했죠.”
중국인에게 팔려 가다
―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인신매매 브로커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네요.
“그렇죠. 제가 시집을 가지 않으면 우리 가족을 신고하겠다고 협박을 하니 저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 했죠.”
그는 중국 돈 5000위안 정도에 팔려 갔다. 하지만 동생은 끝내 북송이 됐고 언니네 가족과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한다.
―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알코올 중독자에 도박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매일 술을 마시고 도박에 미쳐 살다 보니 돈도 벌지 못하고 일도 하지 않았죠. 제가 다른 집 농사일을 도와주고 식량을 받아와 그것으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도망을 친다고 생각해 신발도 제대로 주지 않고 한겨울에도 슬리퍼만 신고 다녀야 했습니다. 인간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 집에 노예로 팔려 갔던 겁니다.”
― 그 마을에는 북한에서 온 사람이 혼자였나요.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거리를 지나면서 만나도 서로 말도 못 하게 했어요. 그러니 힘든 일이 있어도 누구에게도 말도 못 하고, 정말 죽지 못해 살아가던 중 아이가 생겼어요.”
― 상황이 더 힘들어진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저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저에게 유일한 가족이 생긴 거였죠.”
― 중국인 남편과 그의 가족들도 좋아했나요.
“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애라고 오히려 싫어했죠. 임신했을 때 제가 복숭아가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개도 안 먹는 것을 왜 먹겠다고 하냐며 사주지도 않았어요. 그때 서러움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이가 태어나 100일이 되자 아빠라는 사람이 아이를 팔려고 하더라고요.”
― 아이를 팔아요?
“자신의 도박 빚을 갚기 위해 100일 된 자기 자식을 팔자고 말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저는 이성을 잃었고 그때 처음 남편이라는 사람과 싸웠어요. 그 전엔 시키는 대로 말대꾸도 못 하고 살아왔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 더는 못 참겠더라고요.”
― 아이를 팔고 사는 게 가능합니까.
“중국에선 가능하죠. 그곳은 무엇이든지 돈만 있으면 가능한 세상입니다.”
― 남편은 뭐라고 하던가요.
“얌전히 있던 제가 이성을 잃고 덤벼들자 그 사람도 말을 못 하더라고요. 그 이후부터 아이를 한시도 내 등에서 내려놓지를 못했어요. 오죽하면 화장실 갈 때도 데려갔으니까요. 인간도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충격적인 일이 또 있었어요.”
공안도 “아이 팔라”
― 무슨 말씀입니까? 또 있었다니요.
“아이가 돌이 되기 전 어느 날 갑자기 공안이 쳐들어와 저와 그 동네에 사는 북한 여성들을 모두 잡아갔어요.”
― 북송하려고 잡아간 것인가요.
“아니요. 돈을 벌기 위해서죠.”
― 무슨 얘기죠.
“우리를 잡아가서 북송하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북한 사람들이 다시 북송되면 어떤 처벌을 받는지 알고서 우리의 심리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잡아가서 중국 돈 5000위안만 주면 북송하지 않겠다고 협상을 하는 거죠.”
― 어떻게 됐나요.
“저는 그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돈을 내지 못하겠다고 하니 북송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었죠. 당시 나에게는 5000위안이 없었으니까요.”
―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도 돈이 없었어요. 그렇게 잡혀간 다음 날 공안 한 명이 저에게 오더니 좋은 제안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말해보라 했더니 제 아들을 1만 위안에 팔아서 5000위안을 벌금으로 내고 5000위안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정말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이것들은 인간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어요. 당신도 사람이냐고 그러니 저에게 욕을 하더니 가더라고요.”
― 돈을 못 냈으니 북송이 된 건가요.
“아니요. 당시 음력설 때였어요. 그래서 우리를 그냥 집으로 보내더라고요. 집에 돌아와 생각했죠. 더는 이곳에서 살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이와 함께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집을 나왔어요. 나와서 제가 어디로 갔을까요.”
― 어디로 갔는데요.
“저를 중국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낸 인신매매 브로커를 찾아갔어요.”
― 거긴 왜요? 다시 다른 곳에 팔면 어쩌려고요.
“제가 오죽하면 거기로 다시 갔겠습니까. 정작 집을 나오긴 했는데 갈 곳이 없더라고요.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중국 땅에서 그래도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그곳뿐이었어요. 저도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 인신매매 브로커가 뭐라고 하던가요.
“본인도 황당하죠. 그런데 이 여자가 오죽하면 날 찾아왔을까 하는 표정이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당분간만이라도 살 집을 구해달라고 했어요. 근데 중국에서 집을 구하려면 신분증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신분증이 없었습니다. 그 남자가 그랬어요. 남편을 다시 오라고 해서 남편 신분증으로 집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근데 제가 남편과 집이 싫어서 나왔는데 또 그 사람을 봐야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됐어요.”
―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다시 남편을 불러 다른 지역에 반지하 방을 구했죠.”
네 살 된 자식과 생이별
― 그곳의 삶은 어떠셨나요.
“별로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낮에는 시장에 나가 음식을 만들어서 팔고, 저녁엔 동네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지만 남는 건 없었어요.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와서도 술과 도박에 빠져 살았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공안에 잡혀 북송을 당하게 됐습니다.”
― 그게 언제인가요.
“2004년 4월이었어요. 시장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저를 신고했더라고요. 저는 그곳에 가면 제가 북에서 온 사실을 모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됐는지 신고를 당해 공안에 잡히게 된 거죠.”
― 그럼 아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온다 간다 얘기도 없이 한밤중에 잡혀 나왔어요. 그러니 아이는 그냥 집에 두고 나온 거죠. 그때 아이는 네 살이었는데 너무 미안했어요. 죄책감에 처음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요. 그렇게 북송된 거죠.”
― 북송 이후 다시 탈북을 하기까지 북한에서 얼마 정도 머물렀나요.
“한 8~9개월 정도 있었어요. 8~9개월을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단련대에서 짐승처럼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틴 거죠. 중간에 일하다 발을 다쳤는데 그곳엔 약도 제대로 없어 하마터면 발을 절단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운 좋게 상처가 잘 치료가 된 거죠.”
― 1998년에 떠나서 2004년에 다시 갔는데 북한이 변했던가요.
“아니요. 더 심해졌더라고요. 정말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람과 환경이 너무 많이 변해 있었어요. 딱 지옥이란 표현이 맞을 정도였어요.”
다시 탈북
― 그러다 어떻게 다시 탈북을 한 겁니까.
“가족의 생사를 알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가족에 대한 소식은 없었어요. 그러던 중 브로커를 만나게 됐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간 거죠. 가는 길도 참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당시 다리가 성치 않은 상태라 거의 한쪽 다리를 끌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래도 아들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겨우 버텼어요.”
― 처음 와서 그럼 아들에게 전화했나요.
“네, 브로커가 처음엔 안 된다고 하더니 전화기를 빌려주더라고요. 근데 문제는 아들이 전화를 안 받았어요. 몇 번을 했는데 받았다 끊어버리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아들 엄마야’ 하니 그제야 말을 하는 거예요. 그때 아들과 나는 엄청 울었어요. 말을 거의 못 했던 것 같아요.”
― 아들을 거의 1년 만에 만난 심정이 궁금합니다.
“뭐 두말할 게 있겠습니까. 아주 좋죠. 하지만 반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돌봐주지 않아 애가 거지가 됐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니 더 미안해졌어요. 물론 나도 쉬다 온 것은 아니지만 어린 것이 혼자 살다시피 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 이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아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남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알아봤어요. 처음엔 베이징에 있는 대사관과 선양에 있는 영사관 등을 돌았지만, 남한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떠돌다 베이징에 정착하게 됐지요.”
― 보통 탈북 상황에서 베이징에 정착하기는 어렵다고 들었는데요.
“네, 쉽지 않습니다. 저도 중국어를 잘했지만 신분증이 없어 하루하루 불안함 속에 살아갔죠. 그래도 먹고살 길을 찾아야 하니 음식을 만들어 시장에서 장사했습니다.”
영국行
― 그러다 어떻게 영국까지 가게 된 겁니까.
“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 단골손님이 생기더라고요. 중국 사람으로 알고 있던 단골손님 중 한 분이 미국 국적의 목사님이셨어요. 그분의 도움으로 베이징에 있는 유엔사무소 같은 곳을 소개받아 그곳으로 갔죠. 물론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까지는 베이징의 작은 사무실에 직원 몇 명 해서 있었습니다.”
― 그런데 어쩌다 영국을 선택한 겁니까.
“한국과 미국으로 가다 잡힐 경우 처벌이 강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전하게 유럽으로 가자고 생각을 한 거죠.”
― 유엔사무소의 도움으로 영국까지 간 거네요.
“네, 2008년 1월 25일에 영국에 도착했습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정말 얼마나 행복한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더라고요.”
― 어떤 것이 가장 좋았습니까.
“먼저 더는 목숨을 걸고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인신매매로 팔려 갈 걱정이 없고, 가장 행복했던 것은 지옥 같은 중국을 떠났다는 거였습니다.”
― 영국에서 적응하는 데 힘든 점은 없었습니까.
“있죠. 왜 없겠어요. 사실 영국에서 가장 처음 문제가 됐던 것은 언어였습니다. 초반엔 언어가 되지 않아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근데 뭐 생지옥 같은 북한과 중국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좋은 영국에서 못 살겠습니까.”
“지저스 크라이스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요?”
― 어떻게 견뎠나요.
“처음 맨체스터라는 곳에 오니 아시아인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이상한 사람들이 영어도 못 하는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일일이 그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면 내가 힘들어지잖아요. 그래서 모른 척하고 넘어갈 때도 있었죠. 그러다 든 생각이 다른 것은 천천히 해도 언어는 먼저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죽기 살기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죠.”
― 잘되던가요.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공부를 하지 않은 탓에 학원에 가면 계속 졸고,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런데 집에 가서 숙제는 또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백날 해서는 안 될 것 같더라고요.”
― 특별한 영어 공부 방법이 있으셨습니까.
“생각 끝에 내가 좀 아는 쪽으로 시작해서 공부해보자 하고 북한 관련 책이나 논문들을 놓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당연히 어려웠죠. 그러다 내용을 대략 알고 있으니 쉽게 읽히고 영어 공부도 되더라고요. 또 내가 북한 인권 활동을 하면서 통역의 도움으로 강연이나 세미나를 했어요. 아무리 훌륭한 통역사라고 해도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잘 전달이 안 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한 문장이라도 내 입으로 대중에게 북한 인권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 영국에 정착하면서 언어나 문화 때문에 겪었던 일화는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처음에 제가 이곳에 오니 사람들이 남북한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박지현이라고 소개를 하니 박지성을 아느냐고 친척이냐고 막 그러는 거예요. 근데 그땐 제가 박지성 선수를 모를 때였어요.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얘기하는 거 아니냐고 하니까 분위기가 이상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와서 아들에게 물어보니 유명한 축구 선수더라고요. 그리고 한번은 북한 인권 운동에 함께하는 동료와 문자를 주고받다 그 친구가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라고 보낸 문자를 보고 어떤 사람 이름인 줄 알고 동료에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아들의 질문
― 그렇게 열심히 영어 공부도 하면서 적응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북한 인권 운동도 함께 했는데요.
“네. 저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중국에 있는 북한 여성들의 인권 상황과 그들과 함께 고통받고 있는 어린아이들에 대해 알리고 싶어요. 여기에 북한 인권 상황도 얘기해야겠지만 저와 제 아들이 겪은 고통을 토대로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여성들을 위해 일하려고 시작한 거죠.”
― 북한 인권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네, 처음엔 적응하기도 바쁜데 무슨 인권 활동이냐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인권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배운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아들이 질문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12세 된 아들이 단 한 번만 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릴 거라고 하면서 했던 질문인데 그 질문에 답을 못 했어요.”
― 어떤 질문이었나요.
“12세짜리 아들이 저에게 ‘엄마는 왜 내가 네 살 때 버리고 갔느냐’고 묻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저는 답을 못 하고 펑펑 울었어요. 제가 북송 당시 아들과 강제로 이별해야 되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런데 아들이 그걸 기억하고 있었더라고요. 그러면서 ‘자기는 100까지 세도 엄마가 오지 않아서 너무 무서웠다’고 하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프며 어린아이가 혼자 얼마나 무서웠으면 아직도 그 상처를 품고 있을까 생각했죠.”
― 아들의 질문이 인생을 바꿔놓은 거네요.
“그렇죠. 그 질문을 듣고 처음 알았어요. 저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보다 그 고난을 겪었던 내가 제일 아프고,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주변에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 내 자식이었던 거예요. 그 질문이 내 인생을 바꿨어요. 그리고 지금 함께하는 남편도 북한 인권 운동을 하는 데 힘과 용기를 줬어요.”
― 중국에서 만난 남편 말씀하는 건가요.
“아니요. 영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저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죠. 그 사람을 만나 사랑을 처음 알게 됐고,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 남편은 뭐라고 하던가요.
“솔직히 여자가 인신매매 당하고 이러한 것들이 자랑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용기가 안 났었는데 남편이 만약 당신이 앞에 나서서 얘기할 때 누군가 당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 내가 앞에서 막아주겠다며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시작하게 된 거죠.”
“나는 항상 보수당 당원증을 지갑에 넣고 다닌다”
― 봉사활동도 다양하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제가 영국에 정착한 탈북민 1세대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700여 명의 탈북민이 있지만, 그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제도적으로 잘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시작한 일이 아직 비자를 받지 못한 탈북민들에게 변호사를 소개해주고, 영어가 부족한 탈북민들을 위한 영어 강좌도 열고, 지금은 뉴몰든이라고 탈북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요 주민센터 비슷한 것도 마련해놨습니다. 이 밖에 양로원 봉사나 이런 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 구의원 출마 결심은 왜.
“아마 제 인생의 두 번째 챕터가 코로나19 이후가 아닌가 싶어요. 팬데믹 되고 매일 사망자들의 소식을 듣는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다 한국에 있는 탈북자가 보내온 마스크를 여기 양로원에 기부를 했습니다. 그때 영국 시민이 저희에게 보내준 문자 내용 중에 난민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도와준다는 것에 너무 놀랐고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는 글에 용기가 생겼어요. 또 저희가 비록 난민으로 여기에 왔지만, 우리 손길을 바라는 사람들이 지역사회에 많을 것이란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지역 후보로 나가는 것을 생각했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 그런데 왜 보수당입니까.
“저는 한 5년 전부터 보수당 당원입니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 당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가입한 이유는 저 자신의 노선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수당의 기본 가치는 자유입니다. 저의 기본 노선도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갑을 열면 가족사진이나 이런 것이 있는데, 저는 당원증이 있습니다. 내가 가끔 다른 길을 가게 되면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 보수당 후보가 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나요.
“당원에 후보를 뽑는다는 이메일이 와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서 포기했었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다음은 인터뷰를 해요. 거기서 통과되면 구역을 정하거든요. 여기서 (몇 곳) 선택을 하라고. 그래서 선택을 하면 지원자들이 많잖아요. 그럼 또 인터뷰해요. 왜냐하면 한 구역에 한 사람만 뽑으니까. 인터뷰를 해서 또 뽑히고 그렇게 해서 크리스마스 직전에 확정됐어요.”
“北정권에 타격될 것”
― 출마 지역은 야당인 노동당이 강세인 지역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선거 계획이 있습니까.
“원래 1월 초부터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춰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비대면으로 온라인 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을 개설하고 동영상으로 인사말을 올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이민자도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진심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보다 좋은 선거 전략은 없을 것입니다.”
―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나요.
“아니요. 지금은 저 혼자 하고 있습니다.”
― 북한에서도 선거를 치러본 경험이 있죠.
“네, 해봤죠. 제가 영국에서 처음 투표를 한 것이 5년 전입니다. 저와 남편은 북한처럼 생각하고 정장을 입고 아침 일찍 나갔어요. 그런데 문이 닫혀 있더라고요. 저는 투표 날을 잘못 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7시가 되니 문을 열더라고요. 북한은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줄을 서야 합니다. 안 그럼 처벌을 받게 되지요.”
―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뭐 말을 해서 뭐 하겠습니까. 정말 인간 지옥에서 살다 이제는 떳떳한 후보가 되어 내가 직접 선거에 나선다는 것이 감격스럽죠. 북한에 있었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죠.”
― 만약 당선이 되면 정말 북한에 큰 충격을 안겨주는 일이 될 텐데요.
“그렇죠. 북한 정권에는 큰 타격일 것이고, 주민들에겐 희망이 되겠죠. 북한에서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정말 당선 여부를 떠나서 탈북 국민이 보수당 후보가 됐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영광이죠. 특히 민주주의의 꽃인 영국에서요.”
― 북한 주민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먼저 코로나19로 인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김정은 정권도 지나갈 것입니다.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더 버티시면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희망을 잃지 마시고 저희도 외부에서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현재 영국 맨체스터에 거주하는 박씨는 최근 영국 보수당 홀리루드(Holyrood) 지역 구의원 후보로 최종 선정돼 선거 준비에 한창이다. 영국의 집권당인 보수당도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베리(Bury)의 홀리루드 구의원 후보가 박지현씨라며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박 후보는 2008년 영국에 정착해 2017년부터 탈북 여성과 북한 아동의 인권보호 등을 목표로 한 민간단체 ‘징검다리’의 공동대표로 활동해왔다. 그는 전 세계를 돌며 탈북 여성들의 중국 내 인권실태와 북한 인권에 대해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박 후보는 2020년 2월 국제앰네스티 영국지부가 수여하는 ‘앰네스티 브레이브 어워즈’를 수상했다. 기자는 박지현 후보를 지난 1월 25일 영상으로 처음 만났다.
“오늘 인터뷰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1월 25일은 제가 영국에 도착한 지 만 13년째 되는 날입니다.”
박 후보의 말이다. 기자도 고향이 북한이지만 박지현 후보에 대해서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그는 활달한 성격의 50대 초반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었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시다. 그는 그곳에서 중학교 수학교사로 일했다.
동생의 탈영
― 언제 탈북했습니까.
“1998년 일명 ‘고난의 행군’ 시기에 처음 탈북했습니다.”
― 청진에서 교원대학을 나온 건가요.
“아닙니다. 농업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수학 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고, 어머니의 지인이 힘을 써주어 중학교 교사로 가게 된 겁니다.”
― 그럼 교사를 하다 탈북한 건가요.
“교사 생활을 막 그만둔 뒤였어요. 탈북하기 1년 전인 1997년에 어머니의 사업이 망하면서 집안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죠. 당시는 고난의 행군 시기라 경제난까지 겹치면서 큰아버지는 굶어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졌어요.”
― 어머니는 어떤 사업을 했나요.
“다른 사람과 달리 조금 일찍 중국과 밀무역을 하셨어요. 마른 명태와 오징어 등을 중국으로 수출해 돈을 꽤 버셨어요. 그러다 1994년부터 장사가 내리막길에 들어서면서 나중엔 엄청난 빚까지 지게 됐죠.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만 빼고 다 가져갔어요.”
― 한순간에 집안 경제가 힘들어진 거네요.
“그렇죠. 거기에 아버지까지 앓아누우시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중국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러 가셨는데 이후에 연락이 없었어요. 제가 교사를 그만두고 장사를 조금씩 하면서 그런대로 살아나갔죠. 그러던 어느 날 군대 나갔던 동생이 갑자기 집에 온 거예요. 휴가를 왔다고 하는데 조금 이상했어요. 북한은 보통 병사들이 고향으로 휴가를 가면 부대 장교가 함께 옵니다. 그런데 동생은 아무런 짐도 없이 혼자 온 것을 보고 조금 이상했죠.”
― 탈영인가요.
“탈영이었죠. 동생이 오고 이틀 지나 동생 부대 장교들이 집에 왔어요. 동생을 찾더라고요. 당시 동생은 다른 곳으로 이미 피신한 상태였어요. 이들은 다음 날 동생을 찾아서 데리고 왔는데 사람을 어떻게나 때렸는지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집에 와서도 아버지와 제가 있는데도 엄청 때렸어요. 아버지는 병 때문에 거동을 못 하셨고, 나는 때리지 말라고 울면서 고함만 질렀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바로 부대로 돌아갔어요.”
― 이후 동생의 소식은 들었나요.
“네.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장교들에게 맞아서 얼굴이 피투성이 된 동생에게 돈이 없어 제대로 된 도시락도 챙겨주지 못했습니다. 동생은 장교들과 집을 나선 지 3일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 어떻게 다시 온 거죠.
“장교들과 부대로 가는 중에 열차가 멈춘 기회를 이용해 도망친 거죠. 자기도 이대로 끌려가면 분명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동생을 얼른 아는 집에 숨겼어요.”
의식도 없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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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현씨가 2019년 6월 영국 주재 중국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강제북송 중단과 홍콩의 자유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박지현 페이스북 |
“장교들이 다시 돌아와서 동생을 내놓으라고 미친 사람처럼 날뛰더라고요. 그때가 1997년 11월이었어요. 장교들은 계속해서 동생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고, 저는 그 사람들 몰래 동생에게 먹을 것을 챙겨줬죠. 그들은 다음 해인 1998년 2월까지 집에서 머물면서 동생을 찾아다녔어요.”
그들은 박지현씨 동생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자신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도 동생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누나인 그를 인질로 끌고 다니며 동생을 찾아다니겠다는 협박을 남기고. 그때 그는 탈북을 결심했다. 문제는 병으로 누워 있는 아버지였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버지는 유언처럼 동생을 꼭 지키라고 말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의식이 거의 없으셨어요. 그래서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우리가 가길 기다리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는 의식이 조금씩 돌아올 때마다 손짓으로 빨리 가라고 했어요. 우리가 무사히 떠나는 것을 보고 싶으셨나 봐요.”
결국 아픈 아버지를 두고 떠나야 했다. 동생과 언니네 가족을 이끌고 탈북길에 나섰다.
“무작정 떠났습니다. 예전에 어머니한테서 두만강 근처까지 가면 중국으로 바로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함경북도 온성군 일대 두만강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가기로 한 거죠. 마침 온성에는 예전에 농촌 지원 활동을 하기 위해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인신매매 브로커에게 걸리다
― 많이 두려웠을 텐데요.
“왜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거죠. 차를 타고 온성까지 이동해 새벽이 되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새벽 2시가 돼서 몰래 강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거의 건너자 뒤쪽에서 북한 군인들이 총을 쏘고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더라고요.”
― 어디까지 따라왔나요.
“잘은 모르겠어요. 저희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으니까요. 강에서 총소리가 나니까 중국 쪽 집들에 불이 켜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는 무작정 아무 집이나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사정 얘기를 하니 조선족분이 우리를 위해 밥에 여러 반찬을 만들어주더라고요.”
두만강을 건너자 북한군은 더 이상 따라올 수 없었다. 집주인은 아주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착각이었다. 그 사람은 인신매매 브로커였다. 그는 박지현씨에게 가족들을 살리려면 중국인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고 했다. 박씨가 거부하자 집주인은 박씨의 가족들을 신고하겠다고 했다. 박씨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북한은 박씨의 동생을 체포하기 위해 박씨의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곳 부근까지 사람을 보내놓은 터였다.
“나중에 동생에게서 들었는데 동생은 평양에서 김정일의 비자금을 만드는 부대에서 일했다고 해요. 당시 김정일의 비자금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동생 부대는 북한의 금을 해외로 팔다가 적발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팀이 모두 탈영을 했고, 당국에선 체포 명령이 떨어진 것이죠. 그러니 동생은 잡히면 무조건 정치범수용소나 공개처형이 될 것이 뻔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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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난민 지위로 정착한 탈북민 박지현씨가 2020년 1월 영국 의회 인권 청문회에서 증언했다. 사진=박지현 제공 |
“그렇죠. 제가 시집을 가지 않으면 우리 가족을 신고하겠다고 협박을 하니 저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 했죠.”
그는 중국 돈 5000위안 정도에 팔려 갔다. 하지만 동생은 끝내 북송이 됐고 언니네 가족과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한다.
―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알코올 중독자에 도박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매일 술을 마시고 도박에 미쳐 살다 보니 돈도 벌지 못하고 일도 하지 않았죠. 제가 다른 집 농사일을 도와주고 식량을 받아와 그것으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도망을 친다고 생각해 신발도 제대로 주지 않고 한겨울에도 슬리퍼만 신고 다녀야 했습니다. 인간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 집에 노예로 팔려 갔던 겁니다.”
― 그 마을에는 북한에서 온 사람이 혼자였나요.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거리를 지나면서 만나도 서로 말도 못 하게 했어요. 그러니 힘든 일이 있어도 누구에게도 말도 못 하고, 정말 죽지 못해 살아가던 중 아이가 생겼어요.”
― 상황이 더 힘들어진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저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 저에게 유일한 가족이 생긴 거였죠.”
― 중국인 남편과 그의 가족들도 좋아했나요.
“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애라고 오히려 싫어했죠. 임신했을 때 제가 복숭아가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개도 안 먹는 것을 왜 먹겠다고 하냐며 사주지도 않았어요. 그때 서러움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이가 태어나 100일이 되자 아빠라는 사람이 아이를 팔려고 하더라고요.”
― 아이를 팔아요?
“자신의 도박 빚을 갚기 위해 100일 된 자기 자식을 팔자고 말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저는 이성을 잃었고 그때 처음 남편이라는 사람과 싸웠어요. 그 전엔 시키는 대로 말대꾸도 못 하고 살아왔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 더는 못 참겠더라고요.”
― 아이를 팔고 사는 게 가능합니까.
“중국에선 가능하죠. 그곳은 무엇이든지 돈만 있으면 가능한 세상입니다.”
― 남편은 뭐라고 하던가요.
“얌전히 있던 제가 이성을 잃고 덤벼들자 그 사람도 말을 못 하더라고요. 그 이후부터 아이를 한시도 내 등에서 내려놓지를 못했어요. 오죽하면 화장실 갈 때도 데려갔으니까요. 인간도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충격적인 일이 또 있었어요.”
공안도 “아이 팔라”
― 무슨 말씀입니까? 또 있었다니요.
“아이가 돌이 되기 전 어느 날 갑자기 공안이 쳐들어와 저와 그 동네에 사는 북한 여성들을 모두 잡아갔어요.”
― 북송하려고 잡아간 것인가요.
“아니요. 돈을 벌기 위해서죠.”
― 무슨 얘기죠.
“우리를 잡아가서 북송하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북한 사람들이 다시 북송되면 어떤 처벌을 받는지 알고서 우리의 심리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잡아가서 중국 돈 5000위안만 주면 북송하지 않겠다고 협상을 하는 거죠.”
― 어떻게 됐나요.
“저는 그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돈을 내지 못하겠다고 하니 북송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었죠. 당시 나에게는 5000위안이 없었으니까요.”
―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도 돈이 없었어요. 그렇게 잡혀간 다음 날 공안 한 명이 저에게 오더니 좋은 제안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말해보라 했더니 제 아들을 1만 위안에 팔아서 5000위안을 벌금으로 내고 5000위안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정말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이것들은 인간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어요. 당신도 사람이냐고 그러니 저에게 욕을 하더니 가더라고요.”
― 돈을 못 냈으니 북송이 된 건가요.
“아니요. 당시 음력설 때였어요. 그래서 우리를 그냥 집으로 보내더라고요. 집에 돌아와 생각했죠. 더는 이곳에서 살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이와 함께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집을 나왔어요. 나와서 제가 어디로 갔을까요.”
― 어디로 갔는데요.
“저를 중국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낸 인신매매 브로커를 찾아갔어요.”
― 거긴 왜요? 다시 다른 곳에 팔면 어쩌려고요.
“제가 오죽하면 거기로 다시 갔겠습니까. 정작 집을 나오긴 했는데 갈 곳이 없더라고요.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중국 땅에서 그래도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그곳뿐이었어요. 저도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 인신매매 브로커가 뭐라고 하던가요.
“본인도 황당하죠. 그런데 이 여자가 오죽하면 날 찾아왔을까 하는 표정이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당분간만이라도 살 집을 구해달라고 했어요. 근데 중국에서 집을 구하려면 신분증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신분증이 없었습니다. 그 남자가 그랬어요. 남편을 다시 오라고 해서 남편 신분증으로 집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근데 제가 남편과 집이 싫어서 나왔는데 또 그 사람을 봐야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됐어요.”
―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다시 남편을 불러 다른 지역에 반지하 방을 구했죠.”
― 그곳의 삶은 어떠셨나요.
“별로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낮에는 시장에 나가 음식을 만들어서 팔고, 저녁엔 동네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지만 남는 건 없었어요.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와서도 술과 도박에 빠져 살았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공안에 잡혀 북송을 당하게 됐습니다.”
― 그게 언제인가요.
“2004년 4월이었어요. 시장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저를 신고했더라고요. 저는 그곳에 가면 제가 북에서 온 사실을 모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됐는지 신고를 당해 공안에 잡히게 된 거죠.”
― 그럼 아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온다 간다 얘기도 없이 한밤중에 잡혀 나왔어요. 그러니 아이는 그냥 집에 두고 나온 거죠. 그때 아이는 네 살이었는데 너무 미안했어요. 죄책감에 처음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요. 그렇게 북송된 거죠.”
― 북송 이후 다시 탈북을 하기까지 북한에서 얼마 정도 머물렀나요.
“한 8~9개월 정도 있었어요. 8~9개월을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단련대에서 짐승처럼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틴 거죠. 중간에 일하다 발을 다쳤는데 그곳엔 약도 제대로 없어 하마터면 발을 절단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운 좋게 상처가 잘 치료가 된 거죠.”
― 1998년에 떠나서 2004년에 다시 갔는데 북한이 변했던가요.
“아니요. 더 심해졌더라고요. 정말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람과 환경이 너무 많이 변해 있었어요. 딱 지옥이란 표현이 맞을 정도였어요.”
다시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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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회 아시아여성상 대상을 받은 박지현씨가 2018년 5월 9일 시상식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박지현 제공 |
“가족의 생사를 알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가족에 대한 소식은 없었어요. 그러던 중 브로커를 만나게 됐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간 거죠. 가는 길도 참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당시 다리가 성치 않은 상태라 거의 한쪽 다리를 끌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래도 아들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겨우 버텼어요.”
― 처음 와서 그럼 아들에게 전화했나요.
“네, 브로커가 처음엔 안 된다고 하더니 전화기를 빌려주더라고요. 근데 문제는 아들이 전화를 안 받았어요. 몇 번을 했는데 받았다 끊어버리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아들 엄마야’ 하니 그제야 말을 하는 거예요. 그때 아들과 나는 엄청 울었어요. 말을 거의 못 했던 것 같아요.”
― 아들을 거의 1년 만에 만난 심정이 궁금합니다.
“뭐 두말할 게 있겠습니까. 아주 좋죠. 하지만 반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돌봐주지 않아 애가 거지가 됐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니 더 미안해졌어요. 물론 나도 쉬다 온 것은 아니지만 어린 것이 혼자 살다시피 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 이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아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남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알아봤어요. 처음엔 베이징에 있는 대사관과 선양에 있는 영사관 등을 돌았지만, 남한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떠돌다 베이징에 정착하게 됐지요.”
― 보통 탈북 상황에서 베이징에 정착하기는 어렵다고 들었는데요.
“네, 쉽지 않습니다. 저도 중국어를 잘했지만 신분증이 없어 하루하루 불안함 속에 살아갔죠. 그래도 먹고살 길을 찾아야 하니 음식을 만들어 시장에서 장사했습니다.”
영국行
― 그러다 어떻게 영국까지 가게 된 겁니까.
“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 단골손님이 생기더라고요. 중국 사람으로 알고 있던 단골손님 중 한 분이 미국 국적의 목사님이셨어요. 그분의 도움으로 베이징에 있는 유엔사무소 같은 곳을 소개받아 그곳으로 갔죠. 물론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까지는 베이징의 작은 사무실에 직원 몇 명 해서 있었습니다.”
― 그런데 어쩌다 영국을 선택한 겁니까.
“한국과 미국으로 가다 잡힐 경우 처벌이 강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전하게 유럽으로 가자고 생각을 한 거죠.”
― 유엔사무소의 도움으로 영국까지 간 거네요.
“네, 2008년 1월 25일에 영국에 도착했습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정말 얼마나 행복한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더라고요.”
― 어떤 것이 가장 좋았습니까.
“먼저 더는 목숨을 걸고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인신매매로 팔려 갈 걱정이 없고, 가장 행복했던 것은 지옥 같은 중국을 떠났다는 거였습니다.”
― 영국에서 적응하는 데 힘든 점은 없었습니까.
“있죠. 왜 없겠어요. 사실 영국에서 가장 처음 문제가 됐던 것은 언어였습니다. 초반엔 언어가 되지 않아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근데 뭐 생지옥 같은 북한과 중국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좋은 영국에서 못 살겠습니까.”
“지저스 크라이스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요?”
― 어떻게 견뎠나요.
“처음 맨체스터라는 곳에 오니 아시아인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이상한 사람들이 영어도 못 하는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일일이 그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면 내가 힘들어지잖아요. 그래서 모른 척하고 넘어갈 때도 있었죠. 그러다 든 생각이 다른 것은 천천히 해도 언어는 먼저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죽기 살기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죠.”
― 잘되던가요.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공부를 하지 않은 탓에 학원에 가면 계속 졸고,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런데 집에 가서 숙제는 또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백날 해서는 안 될 것 같더라고요.”
― 특별한 영어 공부 방법이 있으셨습니까.
“생각 끝에 내가 좀 아는 쪽으로 시작해서 공부해보자 하고 북한 관련 책이나 논문들을 놓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당연히 어려웠죠. 그러다 내용을 대략 알고 있으니 쉽게 읽히고 영어 공부도 되더라고요. 또 내가 북한 인권 활동을 하면서 통역의 도움으로 강연이나 세미나를 했어요. 아무리 훌륭한 통역사라고 해도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잘 전달이 안 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한 문장이라도 내 입으로 대중에게 북한 인권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 영국에 정착하면서 언어나 문화 때문에 겪었던 일화는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처음에 제가 이곳에 오니 사람들이 남북한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박지현이라고 소개를 하니 박지성을 아느냐고 친척이냐고 막 그러는 거예요. 근데 그땐 제가 박지성 선수를 모를 때였어요.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얘기하는 거 아니냐고 하니까 분위기가 이상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와서 아들에게 물어보니 유명한 축구 선수더라고요. 그리고 한번은 북한 인권 운동에 함께하는 동료와 문자를 주고받다 그 친구가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라고 보낸 문자를 보고 어떤 사람 이름인 줄 알고 동료에게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아들의 질문
― 그렇게 열심히 영어 공부도 하면서 적응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북한 인권 운동도 함께 했는데요.
“네. 저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중국에 있는 북한 여성들의 인권 상황과 그들과 함께 고통받고 있는 어린아이들에 대해 알리고 싶어요. 여기에 북한 인권 상황도 얘기해야겠지만 저와 제 아들이 겪은 고통을 토대로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여성들을 위해 일하려고 시작한 거죠.”
― 북한 인권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네, 처음엔 적응하기도 바쁜데 무슨 인권 활동이냐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인권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배운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아들이 질문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12세 된 아들이 단 한 번만 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릴 거라고 하면서 했던 질문인데 그 질문에 답을 못 했어요.”
― 어떤 질문이었나요.
“12세짜리 아들이 저에게 ‘엄마는 왜 내가 네 살 때 버리고 갔느냐’고 묻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저는 답을 못 하고 펑펑 울었어요. 제가 북송 당시 아들과 강제로 이별해야 되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런데 아들이 그걸 기억하고 있었더라고요. 그러면서 ‘자기는 100까지 세도 엄마가 오지 않아서 너무 무서웠다’고 하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프며 어린아이가 혼자 얼마나 무서웠으면 아직도 그 상처를 품고 있을까 생각했죠.”
― 아들의 질문이 인생을 바꿔놓은 거네요.
“그렇죠. 그 질문을 듣고 처음 알았어요. 저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보다 그 고난을 겪었던 내가 제일 아프고,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주변에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 내 자식이었던 거예요. 그 질문이 내 인생을 바꿨어요. 그리고 지금 함께하는 남편도 북한 인권 운동을 하는 데 힘과 용기를 줬어요.”
― 중국에서 만난 남편 말씀하는 건가요.
“아니요. 영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저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죠. 그 사람을 만나 사랑을 처음 알게 됐고,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 남편은 뭐라고 하던가요.
“솔직히 여자가 인신매매 당하고 이러한 것들이 자랑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용기가 안 났었는데 남편이 만약 당신이 앞에 나서서 얘기할 때 누군가 당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 내가 앞에서 막아주겠다며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시작하게 된 거죠.”
“나는 항상 보수당 당원증을 지갑에 넣고 다닌다”
― 봉사활동도 다양하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제가 영국에 정착한 탈북민 1세대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700여 명의 탈북민이 있지만, 그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제도적으로 잘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시작한 일이 아직 비자를 받지 못한 탈북민들에게 변호사를 소개해주고, 영어가 부족한 탈북민들을 위한 영어 강좌도 열고, 지금은 뉴몰든이라고 탈북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요 주민센터 비슷한 것도 마련해놨습니다. 이 밖에 양로원 봉사나 이런 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 구의원 출마 결심은 왜.
“아마 제 인생의 두 번째 챕터가 코로나19 이후가 아닌가 싶어요. 팬데믹 되고 매일 사망자들의 소식을 듣는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다 한국에 있는 탈북자가 보내온 마스크를 여기 양로원에 기부를 했습니다. 그때 영국 시민이 저희에게 보내준 문자 내용 중에 난민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도와준다는 것에 너무 놀랐고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는 글에 용기가 생겼어요. 또 저희가 비록 난민으로 여기에 왔지만, 우리 손길을 바라는 사람들이 지역사회에 많을 것이란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지역 후보로 나가는 것을 생각했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 그런데 왜 보수당입니까.
“저는 한 5년 전부터 보수당 당원입니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 당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가입한 이유는 저 자신의 노선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수당의 기본 가치는 자유입니다. 저의 기본 노선도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갑을 열면 가족사진이나 이런 것이 있는데, 저는 당원증이 있습니다. 내가 가끔 다른 길을 가게 되면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 보수당 후보가 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나요.
“당원에 후보를 뽑는다는 이메일이 와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서 포기했었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다음은 인터뷰를 해요. 거기서 통과되면 구역을 정하거든요. 여기서 (몇 곳) 선택을 하라고. 그래서 선택을 하면 지원자들이 많잖아요. 그럼 또 인터뷰해요. 왜냐하면 한 구역에 한 사람만 뽑으니까. 인터뷰를 해서 또 뽑히고 그렇게 해서 크리스마스 직전에 확정됐어요.”
“北정권에 타격될 것”
― 출마 지역은 야당인 노동당이 강세인 지역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선거 계획이 있습니까.
“원래 1월 초부터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춰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비대면으로 온라인 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을 개설하고 동영상으로 인사말을 올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이민자도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진심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보다 좋은 선거 전략은 없을 것입니다.”
―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나요.
“아니요. 지금은 저 혼자 하고 있습니다.”
― 북한에서도 선거를 치러본 경험이 있죠.
“네, 해봤죠. 제가 영국에서 처음 투표를 한 것이 5년 전입니다. 저와 남편은 북한처럼 생각하고 정장을 입고 아침 일찍 나갔어요. 그런데 문이 닫혀 있더라고요. 저는 투표 날을 잘못 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7시가 되니 문을 열더라고요. 북한은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줄을 서야 합니다. 안 그럼 처벌을 받게 되지요.”
―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뭐 말을 해서 뭐 하겠습니까. 정말 인간 지옥에서 살다 이제는 떳떳한 후보가 되어 내가 직접 선거에 나선다는 것이 감격스럽죠. 북한에 있었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죠.”
― 만약 당선이 되면 정말 북한에 큰 충격을 안겨주는 일이 될 텐데요.
“그렇죠. 북한 정권에는 큰 타격일 것이고, 주민들에겐 희망이 되겠죠. 북한에서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정말 당선 여부를 떠나서 탈북 국민이 보수당 후보가 됐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영광이죠. 특히 민주주의의 꽃인 영국에서요.”
― 북한 주민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먼저 코로나19로 인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김정은 정권도 지나갈 것입니다.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더 버티시면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희망을 잃지 마시고 저희도 외부에서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