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군포로 추정 자녀’라는 기막힌 현실 “보수 정부도 우릴 외면”
⊙ “남조선에 가면 너희는 영웅의 자녀”라고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 국군포로 아버지와 남동생이 처형당한 이순금씨의 피맺힌 사연
⊙ “총살형 앞둔 아버지의 눈빛에서 ‘남조선으로 가라’는 신호를 읽었다”
⊙ “남조선에 가면 너희는 영웅의 자녀”라고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 국군포로 아버지와 남동생이 처형당한 이순금씨의 피맺힌 사연
⊙ “총살형 앞둔 아버지의 눈빛에서 ‘남조선으로 가라’는 신호를 읽었다”
- 손명화 회장, 이순금씨, 정남순씨(왼쪽부터). 사진=조준우
지난 7월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김영아 부장판사는 탈북 국군포로 노사홍(91)·한재복(86)씨가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북한과 김정은은 두 사람에게 각각 2100만원씩 배상하라”는 원고 승소(勝訴) 판결을 내렸다.
두 사람은 2016년 10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군의 포로가 돼 정전(停戰) 후에도 송환되지 못하고 내무성 건설대에 배속돼 탄광 등에서 노동력 착취를 당했다”면서 이 기간 못 받은 임금과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포함해 1인당 1억6800만원을 김정은에게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제기한 지 4년 만에 법원이 원고 2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이 북한 독재 정권에 공식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국군포로로 북한에서 고초를 겪은 당사자들은 이 소송에서 승소함에 따라 조금이나마 원한을 풀 수 있게 됐다.
호적상 자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노사홍·한재복씨처럼 귀환 국군포로의 실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미귀환 국군포로 가족들이 처한 상황이다. 국군포로의 비참한 삶은 그들의 대(代)에서 끝나지 않았다. 국군포로 가족들은 북한에서 비참한 삶을 살다가 목숨을 걸고 ‘아버지의 조국’ 대한민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북한 땅에서 죽어갔지만, 자녀들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자유의 땅을 찾아온 것이다.
이들 국군포로 가족은 북한에서 당한 핍박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김정은과 북한 정권을 ‘악(惡)’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정부를 곱게 보는 건 아니다. 미귀환 국군포로 가족 대다수는 우리 정부가 자신들을 홀대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국방부는 1998년 4월 행방불명(미귀환) 상태로 남아 있던 국군포로들을 일괄적으로 전사(戰死) 처리했다. 국방부가 임의로 전사 날짜(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를 설정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불씨를 야기했다. 이렇게 되면 미귀환 국군포로 자녀들은 아버지의 사망 이후 태어난 게 된다. 그럼 한국에 오더라도 부모의 호적(戶籍)에 올라갈 수가 없다. 그 바람에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에 온 미귀환 국군포로 자녀들은 졸지에 부모 없는 신세가 돼버렸다.
이후 정부는 미귀환 국군포로도 ‘참전유공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전사한 ‘국가유공자’와 달리 ‘참전유공자’의 유족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한국으로 귀환에 성공한 국군포로들은 미지급된 군인 보수를 받을 수 있지만, 미귀환 국군포로 자녀들에 대한 지원은 없다. 미귀환 국군포로 자녀들이 정부에 요구하는 핵심 사항이 바로 이 부분이다.
국군포로 가족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가 있다. 사단법인 6·25국군포로가족회(이하 가족회) 회장을 맡고 있는 손명화(58)씨다. 지난 5월 19일 서울 만리동 가족회 사무실에서 손명화씨를 만났다.
“우리가 남조선 괴뢰 집안이었다니…”
손명화씨의 아버지 손동식씨는 1953년 4월 육군 9사단 소속 이등중사(병사)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도중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 비참한 삶을 살았다. 함경북도 길주 펄프공장 확장 공사 및 무산광산 등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 1984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손명화씨의 말이다.
“학창 시절, 제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악기(바이올린)를 좀 다룰 줄 알아 고등학교 졸업 후 음악 계통으로 진출하려고 했죠. 제 친구들은 출신 성분에 맞게 자기 일을 잘 찾아가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저는 번번이 친구들에게 밀리더라고요.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들었습니다.”
동식씨가 명화씨에게 한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동식씨는 “네가 아무리 사회 진출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휴전 3개월을 남기고 잡힌 국군포로”라고 명화씨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명화씨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내 아버지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그토록 증오하던 ‘남조선 괴뢰’의 집안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명화씨는 그 후부터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일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게 됐다’는 이유도 컸다.
결국 명화씨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부친과 마찬가지로 광산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30여 년 가까운 광산 일로 인해 폐가 나빠져 일을 못 하게 되자 무산군에서 60여 리나 떨어진 산골로 보내졌다. 명화씨의 회고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열흘 전쯤이었습니다. 우리 형제가 6남매였는데 아버지는 나만 남고 모두 밖에 나가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제게 남쪽에 있는 할아버지·할머니 이름, 그리고 고향을 알려줬습니다. 그러면서 통일이 되든 안 되든 죽으면 자신의 고향에 가서 묻히고 싶다고 말하고 열흘 뒤 아침에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김해였습니다.”
부친 사망 후, 명화씨는 가정을 꾸리고 두 아들도 낳았다. 하지만 불행은 피해가지 않았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았던 명화씨는 광산 등지에서 일하다가 보위사령부 산하 ‘518소(所)’로 가게 됐다. 518소는 양귀비(대마)를 몰래 재배해 내다 파는 곳이었다.
그러던 중 양귀비를 중국에 몰래 팔던 게 중국 당국에 걸려, 518소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보위부는 출신 성분이 나쁜 명화씨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명화씨는 악명 높은 보위부 구치소에 수감됐다. 그때가 2002년 5월이었다.
탈북 결심… 아들과 함께 두만강 渡江
이곳에서 10개월간 복역한 명화씨는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아들 둘이 눈에 밟혀 혀를 깨물고 죽지도 못했다. 이를 악문 채 구치소 생활을 견뎠고, 이듬해 3월 풀려났다. 불행은 끝난 게 아니었다. 수감돼 있는 동안 남편이 약을 먹고 자살한 것이다. 두 아들이 겨우 장사(葬事)를 치렀단 이야기를 들었다. 명화씨는 결심했다. 두 아들을 위해서라도 ‘이 지옥을 탈출해야겠다’고.
하지만 고문 후유증 때문에 곧바로 탈북을 결행할 수는 없었다. 또한 주변 정리는 물론 탈출에 따른 상황을 엿봐야 해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렇게 2년을 절치부심했다. 손명화씨의 이야기다.
“큰아들은 내가 출옥한 직후에 군대에 갔고, 작은아들은 2년 뒤 18세가 되어 입대했습니다. 그때가 2005년이었어요. 작은아들이 군대에 간 지 몇 달 만에 잠시 집에 왔습니다. 그때 작은아들에게 ‘탈북하자’고 설득했습니다. 작은아들이 ‘형을 두고 갈 수 없다’며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너 하나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하소연했지요. 아들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 3일이 걸렸어요. 결국 아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둘이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그날이 2005년 10월 30일, 보름달이 환히 뜬 날이었지요. 평생 잊지 못할 날이에요.”
명화씨와 그의 아들은 북중(北中) 국경에서 간신히 버스를 타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때 두 사람의 손에는 ‘쥐약’이 들려 있었다. 북송(北送)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탈출은 성공이었다. 두 사람은 베이징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명화씨는 처음엔 ‘국군포로의 자녀가 남녘 땅을 밟았으니 조국(대한민국)이 반겨주겠지’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지위는 찾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도 명화씨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유해 송환’ 작전
국군포로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 국방부 등 관계 당국을 오갔지만, 앞서 말한 대로 아버지가 전사자로 처리돼 명화씨는 ‘국군포로 추정 자녀’라는 꼬리표를 다는 데 그쳐야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때 명화씨는 결심했다.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는 아버지의 유언도 지키고, 아버지가 국군포로였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북한에 있는 선친의 유해를 송환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명화씨는 북한에 있는 동생을 통해 아버지의 유해 송환 절차에 들어갔다.
“2013년 9월 여동생이 아버지 유해를 수습해 중국 옌지(延吉)로 보냈어요.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중국 내 브로커가 잠시 유해를 보관했지요. 저는 유해 송환을 위해 국방부에 도움을 청했지만, 국방부는 ‘정치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거부하더라고요. 그 순간 너무 참담했습니다.”
이때 명화씨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가 있었다. 국회의원을 지낸 박선영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이사장이었다. 박선영 이사장은 명화씨에게 ‘유해 송환에 쓰라’며 800만원을 지원했다. 명화씨는 그 돈을 받고 중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아버지와 마주할 수 있었다.
명화씨는 “30년 만에 아버지의 유해를 안는 순간 ‘내 아버지’라는 확신이 들었다”며 “자세히 보니 아버지 유골 하나하나에 부친임을 증명하는 여동생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중국에 27일간 방치됐던 유해를 되찾고, 중국 세관을 통과한 후 인천 연안부두에 당도했다. 이때 명화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가 유해를 갖고 돌아오니 어떻게 알았는지 그곳에 수십명의 취재진이 나와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그렇게 울고불고했어도 모른 척했던 이들이 가까스로 유해를 찾아오니 마치 자신들이 송환해온 것처럼 들떠 있는 모습에서 환멸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유해는 송환됐지만, 명화씨는 또 한 번 슬픔을 맛봐야 했다.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했던 여동생과 오빠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내 참았던 눈물이 북받쳐 흘렀다.
대한민국 정부와의 싸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9월 13일 국가보훈처는 고(故) 손동식씨에게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했다.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유공자의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으로서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하여 이 증서를 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명화씨는 국가유공자 증서와 아버지 유해를 통해 자신과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했다고 여겼다. 시련은 끝난 게 아니었다. 2016년 5월 보훈처로부터 받은 증서를 토대로 보훈지청에 국가 유자녀 신청을 접수했으나 ‘손동식씨는 국가유공자 등록자 명단에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보훈처를 찾아가 따졌더니 ‘유공자 증서를 준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 손동식이라는 이름조차 등록된 일이 없었습니다. 증서에 적힌 등록번호에 대해 물었더니 ‘모르겠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유공자 등재는 안 하고 증서만 준 거 같다는 의심이 들더군요.”
보훈처는 이후 손동식씨를 ‘참전유공자’로 새롭게 등록했다. 앞서 말한 대로 ‘참전유공자’ 자녀는 ‘국가유공자’ 자녀와 달리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명화씨는 이에 반기(反旗)를 들어 법적 투쟁에 나섰다. 2016년 8월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에 대한 예우 등을 대통령령(令)으로 제정하지 않은 건은 헌법에 위반된다’며 입법부작위 위헌확인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5월 31일 해당 부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국방부 담당자에게 나를 아버지 호적에 올려달라고 했어요. 그러나 (전사 날짜로 인해) 호적에 올릴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할 수 없이 2015년 아버지의 딸임을 확인해달라는 인지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후 판결 경정, 등록부 정정 허가 판결까지 3개의 법적·행정적 판단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명화씨는 변호사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이 소송을 치렀다. 그는 “보수 정부라고 불렸던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국군포로 문제에는 소홀했다”며 “우리(국군포로 자녀)는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신세”라고 자조했다.
“이름을 절대 종이에 적지 마라”
기자는 손명화씨의 소개로 미귀환 국군포로 유가족 네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모두 여성이었는데,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아버지와 자녀 모두 탄광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국군포로와 그 자녀에게 일종의 ‘연좌제’를 적용, 탄광에서 일하도록 강요했다. 탄광에서 일하는 포로와 그 자녀들은 사회안전부와 국가보위부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네 사람의 사연 모두 손명화씨의 그것처럼 절절하기 그지없다. 그중 가장 애달픈 사연을 가진 이는 이순금(59)씨다. 갸름한 얼굴의 순금씨는 함경북도 영흥군 아오지에서 태어나 탈북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걸 13세 때 알았습니다. 하루는 언니가 아버지한테 ‘괴뢰군이 뭐야’라고 묻는 거예요. 아버지가 ‘누가 괴뢰군이라고 말하니’라고 되묻자 언니가 ‘우리 학급 아이들이 나를 괴뢰군 딸이라고 한다’고 했어요. 나중에는 저도 주변에서 괴뢰군 딸이라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그러면서 ‘포로 새끼’라고 손가락질도 받았어요.”
순금씨 아버지는 “나는 남조선에서 왔다. 절대 나쁜 짓 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고백했다. 순금씨 아버지가 순금씨와 언니, 남동생을 앉혀놓고 했다는 말을 옮겨본다.
“아버지 대(代)에는 통일이 안 될 것 같다. 아버지가 죽으면 너희 대에 누구라도 반드시 우리 고향에 꼭 가야 한다. 남조선에 가면 아버지는 영웅이다. 거기엔 아버지 훈장도 있다. 너희는 ‘영웅의 아들딸’로 대접받으며 꽃다발도 안겨줄 거고 목말 태우며 환영할 거다. 절대 다른 생각하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아버지 고향에 가서 아버지 몫을 할 수 있단다.”
순금씨 아버지는 남한에 있는 가족들의 이름을 순금씨와 언니에게 알려줬다. 그때 고모 이름과 큰아버지 이름을 들었다. 아버지 이름이 두 개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한 가지 신신당부를 했다. 그 이름들을 “절대 종이에 적어두지 말라”고.
순금씨는 공부를 잘했지만, 그 역시 국군포로의 자녀라는 한계에 부딪혔다. 순금씨도 결국 아버지, 언니, 남동생과 마찬가지로 탄광에서 일하게 됐다.
사달은 남동생으로 인해 일어났다. 순금씨의 말이다.
“남동생은 탄광 일이 힘들다고 자주 울면서 못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마다 통일이 되면 아버지 메달(훈장)도 있으니 대접받으면서 살 수 있다고 설득을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남동생이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다가 가슴에 맺힌 말을 한 거예요. 동생이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말한 거예요. 아버지가 우리한테 이야기해줬던 걸 그대로요. 남한이 물도 좋고 쌀도 많고, 먹을 게 그렇게도 많다, 그렇게 살기 좋다고. 우리는 (북)조선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고. 통일되면 아버지 고향으로 갈 거라고 말한 거예요.”
아버지와 남동생 잔인하게 銃殺
다음 날 순금씨네 가정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안전원들이 들이닥쳐 순금씨 아버지와 동생을 끌고 간 것이다. 며칠간 소식이 없어 순금씨는 발을 동동 굴렀다. 다행히 안전부에 순금씨의 학교 동창이 있었다. 끌려간 지 며칠이 지난 후 친구가 동생을 데리고 순금씨 집에 왔다. 순금씨는 눈물을 흘리며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아마 사형이 확실하니까 친구가 배려 차원에서 동생을 집에 갈 수 있도록 한 거겠지요. 보자마자 깜짝 놀랐어요. 동생이 온몸에 주렁주렁 무언가를 달고 왔더라고요. 와서 하는 첫마디가 ‘배가 고프니 밥 좀 달라’였어요. 새벽 두 시에 두붓집을 두드려 콩비지를 조금 얻어서 먹였죠. 저는 울면서 도망치자고 했어요. 동생이 하는 말이 ‘자기가 도망가면 아버지가 죽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다음은 누나(순금씨)라면서…. 둘이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순금씨는 친구인 안전원에게 ‘아버지를 보게 해달라’며 면회를 사정했다. 그러자 친구는 ‘면회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아들 교육을 잘못 시켰고, 그 아들이 잘못된 말을 한 게 죄’라며 아버지와 동생의 처형을 기정사실화했다. 동생이 안전부로 되돌아간 후 순금씨는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앓아누워버리고 말았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처형은 공개처형 방식으로 이뤄진다.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다. 순금씨도 예외는 아니라 처형 장소에 끌려갔다. 얼마 뒤 주민들이 하나둘 그곳에 모였다. 주저앉은 순금씨는 저만치서 차에 실려 온 아버지와 남동생을 목격했다.
“안전부 요원이 십자가 모양의 작대기를 갖고 오더라고요. 그러더니 나란히 그 작대기를 땅에 박아 세우더군요. 그 후에 아버지와 남동생이 차에서 내리는 걸 봤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산목숨이 아닌 것 같았어요. 흐느적거리며 끌려왔으니까요. 동생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안전원이 아버지와 동생에게 ‘반역자’ ‘간첩’ ‘반동’이라고 모욕을 주면서 온갖 나쁜 말은 다 붙이며 죄명(罪名)을 낭독했습니다. 그 직후 먼저 동생에게 총을 쐈어요. 그러자 몸이 훅하고 처지는 거예요. 남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봤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봤어요. 그때 아버지 눈빛을 보고 알았어요. 아버지가 내게 ‘남조선으로 가라’는 신호를 보낸다는 걸요. 곧바로 아버지에게도 총살형이 집행됐습니다.”
명절 때만 되면 우시던 아버지
정남순(54)씨도 아오지 탄광이 있던 경흥군에서 태어났다가 함경북도 온성군 용남리에서 자랐다. 워낙 깊고 깊은 심심산골인데다가 뱀이 많아 ‘뱀소굴’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남순씨의 꿈은 ‘은행원’이었다. 운이 좋게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까지는 얻었지만 합격·불합격 통보는 받지 못했다. 대신 회령에 있는 회령교원대학에 갈 기회가 생겼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남순씨는 “부모님이 ‘선생 하는 것은 죽어도 안 된다’면서 여자가 혼자 합숙 생활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말했다. 아마도 국군포로 자녀라는 출신 성분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그랬던 것 같다. 남순씨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탄광에서 일하게 됐다.
“저 역시 아빠가 있는 탄광에 들어가 별일을 다 해봤어요. 제가 탄광에 들어갔을 때는 기계식 발파(發破)도 없었어요. 곡괭이로 석탄을 쪼개가며 캘 때였어요. 그때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죠.
그러던 중 어머니가 1988년에 돌아가셨어요. 이틀 동안 유언을 남겼는데 그때 하셨던 말이 ‘너희 아빠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다’고 했어요. 저의 부모님은 결혼하고 5년 뒤에야 혼인신고를 했는데, 아버지의 성분 때문에 안전부에서 어머니에게 ‘결혼하지 마라’고 했대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말을 차마 못 하고, ‘아버지가 이렇게 불쌍한 사람이니 네가 (아버지를) 잘 돌봐드려라’는 느낌으로 말했어요.”
정남순씨는 자신의 출신 성분이 안 좋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건 어머니 사후(死後)에 알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탄광 일에 매진하던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때 북한에서도 이산가족 상봉 신청이 있을 거란 소문이 돌았다. 남순씨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내심 이산가족 상봉 명단에 포함되지 않을까 기대를 많이 했어요. ‘남조선에 있는 내 부모·형제를 만날 것 같다’고 하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 근데 우리 형편에 거기에 포함될 수 있었겠어요? 당연히 신청 자격조차 안 됐죠. 그래도 아버지는 신청을 하셨나 보더라고요. 결과는 참담했죠. 탈락한 날 돌덩이처럼 마른 옥수수 알을 드시면서 많이 우셨어요. 아버지는 명절 때만 되면 항상 우셨어요. 어린 제가 ‘아버지 왜 울어’라고 물으면 ‘너는 몰라도 돼’라고 하시면서 계속 눈물을 훔치시더라고요.”
상실감이 컸던 탓일까. 이듬해 1월 3일 정남순씨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포로로 끌려온 뒤 탄광에서 곡괭이질만 하던 그였다.
“아버지가 숨을 거둔 걸 확인한 순간 정신을 잃었어요. 삼일장이 어떻게 지나간지도 모르겠어요. 아버지 관을 빨간 천으로 덮었는데, 그 위에 흙을 한 줌 덮어야 한다대요. 주변에서는 어서 흙을 던지라고 했는데, 저는 관이 있는 구덩이에 들어갔어요. 같이 죽고 싶어서….”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정남순씨는 참담한 일을 겪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 묘소 앞에 몰려와 “공화국을 반대한 간첩”이라고 마구 손가락질을 한 것이다. 그때 남순씨는 “더는 이곳에서 살 필요를 못 느껴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정남순씨는 2001년 11월 한국에 와 아버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남한에서 낳은 자식, 그러니까 이복 언니와 오빠를 찾은 것이다. 정남순씨는 “(이복)언니·오빠랑 잘 지낸다. 나는 그래도 아빠라는 존재가 있었지 않으냐”며 아버지 없이 자란 언니·오빠를 더 측은하게 여겼다.
“아버지가 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했기에…”
이주은(가명·58)씨는 북한에 아들이 살고 있어 가명을 써달라고 했다. 이주은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주은씨 아버지가 6·25전쟁 참전 이전부터 기독교 신자였던 터라 그 영향을 받았다. 이주은씨는 지금도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 일을 맡아 하고 있다.
3남 1녀 중 장녀인 이주은씨는 함경북도 온성에 살았다. 공부를 잘했던 주은씨는 대학 진학을 못 하게 되며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걸 알았다.
“제가 차라리 바보였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때 소문이 다 났어요. 국군포로 딸이라서 저렇게(대학을 못 가게) 됐다고요. 그 순간만큼은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대학에 못 갈 바엔 차라리 양잿물을 먹겠다’고 아버지한테 달려들었어요. 그러면서 ‘이 반동아, 괴뢰군아. 너네 집에 가라’며 ‘어째 너네 나라 안 가고 여기서 나를 낳았느냐’고 할 말 못 할 말 다 했어요. 아버지와 한 열흘 가까이 대화를 안 한 거 같아요. 그 후 아버지가 제게 ‘나라가 힘이 없어서 (포로들을) 못 데려간 거뿐이다’라고 씁쓸히 말씀하시더라고요.”
주은씨 아버지는 “비록 내 나라로 돌아갈 순 없지만 그래도 용서하고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 말에 감명을 받아 주은씨도 대학을 포기하고 탄광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1978년 주은씨가 처음 탄광에 들어가던 날, 그의 어머니는 가슴이 아파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주은씨 아버지는 함연탄광이란 곳에 배치돼 그곳에서 갱도(坑道)를 뚫는 가장 위험한 일을 했다. 이주은씨의 말에 따르면, 온성탄광의 갱도를 뚫는 데에는 거의 다 국군포로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제 눈엔 우리 아버지가 너무 잘생기고 멋있는 분이었어요. 그런 분이 탄광에서 비참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딸의 심정이 어떨지 생각해보셨나요.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는 게 가장 슬펐던 거 같아요. 갱에서 짐승처럼 기어 다니며 일하는 그 모습…. (울음) 우리가 보는 하늘은 늘 무너지는 하늘이었어요. 그리고 늘 새카맸죠. 아버지는 혹시라도 갱도가 무너질까 봐 제 주변에 선목을 깔아주셨어요. 돌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나무판이 선목인데, 아버지는 자신의 구간에 있는 선목을 다 뽑아 제가 일하는 구간에 놓아주셨죠.”
주은씨 아버지는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비장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대한민국이 국군포로 문제에 대해 냉랭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 가족이고 병사들인데…. 제가 8~9년 전에 한국에 들어와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어요. 부치지는 않았는데, 여기 오기 3일 전에 그때 쓴 편지를 열어봤더니 이렇게 써 있더라고요.
‘종군위안부 문제는 나라가 없을 때 이 나라 여인들이 당한 슬픔이다. 그 상처에선 피고름이 흐르고 있다. 국군포로 문제는 대한민국이 건국됐을 때, 30대 미만의 젊은이들이 당한, 말할 수 없는 수난이고 고통이다. 그 상처에서는 지금도 선지피가 흐르고 있다. 그 여인들이 흘린 피고름과 그 선지피가 콸콸 흐르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왜 외면하는가’라고요.”
주은씨는 “나라가 없을 때 당한 것, 나라가 있으면서도 당한 것 모두 다 책임져야 한다”며 “대한민국이 국군포로를 외면하면 다음 세대 또한 국가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이 나라를 외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아버지가 조국을, 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참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자식이 부모 찾는데 그게 죄인가’
함경북도 산성이란 곳에서 살던 황금주(가명·52세)씨는 여섯 살이던 1976년, 아버지가 보위부에 끌려가는 걸 목격했다. 당시 황금주씨의 아버지는 강안탄광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4시쯤 검은색 차가 와 밑도끝도 없이 아버지를 묶어서 데려갔습니다. 사실 그전부터 우리 가족 주변에 보위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늘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아무래도 국군포로 집안이니까 감시가 필요했겠죠. 우리 가족은 늘 공포에 떨며 살았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끌려갔으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어린 제가 ‘아버지 어디 가세요’라고 울부짖었지만, 보위부 요원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아버지를 압송해갔습니다. 아버지가 청진수송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까지만 들었고, 그 이후 소식은 모릅니다. 시신도 못 찾았고요.”
황금주씨 아버지는 석탄 캐는 일이 아닌 설계도면 제작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치고는 학력을 갖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황금주씨는 “아버지 방에 각종 설계도면, 자그마한 석유등잔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보위부에서 다 압수해갔다”고 증언했다.
금주씨가 16세가 됐을 때 그 역시 탄광 일을 했다. 그의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았다. 황금주씨는 “우리 가족이 도둑 취급 받는 건 예사였다. 그만큼 안 당해본 설움이 없다”고 말했다.
금주씨는 2004년 3월, 내몽골 초원과 중국을 거쳐 가까스로 탈북에 성공했다. 탈북을 결행할 때 금주씨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에 가 아버지의 신원(身元)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금주씨가 잊지 않고 있던 한 가지가 또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군번이었다.
“군번(1102208)을 가지고 2006년 국방부를 갔어요. 아버지의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국방부 관계자가 ‘이미 행방불명이 됐는데 확인해서 뭐하냐’는 식으로 대꾸하더라고요. 제가 ‘자식이 부모 찾는데 그게 죄인가요’라고 따지자 ‘행방불명이면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 제가 펄쩍 뛰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국군포로다. 이 나라를 위해, 너희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너희가 가만히 있는 게 말이 되냐’고 막 화를 냈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울음도 안 나오더라고요.”
황금주씨는 관계 당국과 씨름한 끝에 아버지의 고향이 의정부 덕계리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형제가 경기도 부천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겨우 알아냈다. 그의 아버지 형제는 9남매였는데 모두 사망하고, 현재는 사촌들만 살아 있다고 한다.
“사촌 중에 제가 가장 어려요. 처음 만났을 때 사촌들이 놀라면서 ‘우리는 외삼촌이 돌아가신 줄 알고 매년 제사 지냈다’며 안타까워하면서도 짐짓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더라고요.”
남한의 가족들은 찾았지만 정작 그의 아들은 북한에 아직 살고 있다. 금주씨는 “요양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북한에 있는 아들에게 중국인 브로커를 통해 송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과의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손명화 회장을 만났다. 손 회장은 굵은 눈물 방울을 흘리며 기자에게 “왜 우리는 아버지의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국군포로의 자녀로 태어난 죄, 이 죄를 안고 가야 하는 우리의 설움을 대한민국이 마땅히 닦아줘야 할 의무가 있다”며 “북한에서 국군포로 자녀로 산 것도 억울한데…. 우리 아버지가 이 나라 대한민국을 잘살도록 만들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피흘려 지킨 이 나라는 왜 우리를 사각지대로 밀어 넣으려 하나요? 인권을 존중한다면서 왜 우리의 인권은 보장하지 않는 겁니까?”고 절규했다.⊙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두 사람은 2016년 10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군의 포로가 돼 정전(停戰) 후에도 송환되지 못하고 내무성 건설대에 배속돼 탄광 등에서 노동력 착취를 당했다”면서 이 기간 못 받은 임금과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포함해 1인당 1억6800만원을 김정은에게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제기한 지 4년 만에 법원이 원고 2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이 북한 독재 정권에 공식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국군포로로 북한에서 고초를 겪은 당사자들은 이 소송에서 승소함에 따라 조금이나마 원한을 풀 수 있게 됐다.
호적상 자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노사홍·한재복씨처럼 귀환 국군포로의 실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미귀환 국군포로 가족들이 처한 상황이다. 국군포로의 비참한 삶은 그들의 대(代)에서 끝나지 않았다. 국군포로 가족들은 북한에서 비참한 삶을 살다가 목숨을 걸고 ‘아버지의 조국’ 대한민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북한 땅에서 죽어갔지만, 자녀들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자유의 땅을 찾아온 것이다.
이들 국군포로 가족은 북한에서 당한 핍박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김정은과 북한 정권을 ‘악(惡)’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정부를 곱게 보는 건 아니다. 미귀환 국군포로 가족 대다수는 우리 정부가 자신들을 홀대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국방부는 1998년 4월 행방불명(미귀환) 상태로 남아 있던 국군포로들을 일괄적으로 전사(戰死) 처리했다. 국방부가 임의로 전사 날짜(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를 설정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불씨를 야기했다. 이렇게 되면 미귀환 국군포로 자녀들은 아버지의 사망 이후 태어난 게 된다. 그럼 한국에 오더라도 부모의 호적(戶籍)에 올라갈 수가 없다. 그 바람에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에 온 미귀환 국군포로 자녀들은 졸지에 부모 없는 신세가 돼버렸다.
이후 정부는 미귀환 국군포로도 ‘참전유공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전사한 ‘국가유공자’와 달리 ‘참전유공자’의 유족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한국으로 귀환에 성공한 국군포로들은 미지급된 군인 보수를 받을 수 있지만, 미귀환 국군포로 자녀들에 대한 지원은 없다. 미귀환 국군포로 자녀들이 정부에 요구하는 핵심 사항이 바로 이 부분이다.
국군포로 가족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가 있다. 사단법인 6·25국군포로가족회(이하 가족회) 회장을 맡고 있는 손명화(58)씨다. 지난 5월 19일 서울 만리동 가족회 사무실에서 손명화씨를 만났다.
“우리가 남조선 괴뢰 집안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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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리는 손명화 회장(맨 왼쪽). 사진=조준우 |
“학창 시절, 제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악기(바이올린)를 좀 다룰 줄 알아 고등학교 졸업 후 음악 계통으로 진출하려고 했죠. 제 친구들은 출신 성분에 맞게 자기 일을 잘 찾아가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저는 번번이 친구들에게 밀리더라고요.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들었습니다.”
동식씨가 명화씨에게 한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동식씨는 “네가 아무리 사회 진출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휴전 3개월을 남기고 잡힌 국군포로”라고 명화씨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명화씨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내 아버지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그토록 증오하던 ‘남조선 괴뢰’의 집안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명화씨는 그 후부터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일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게 됐다’는 이유도 컸다.
결국 명화씨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부친과 마찬가지로 광산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30여 년 가까운 광산 일로 인해 폐가 나빠져 일을 못 하게 되자 무산군에서 60여 리나 떨어진 산골로 보내졌다. 명화씨의 회고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열흘 전쯤이었습니다. 우리 형제가 6남매였는데 아버지는 나만 남고 모두 밖에 나가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제게 남쪽에 있는 할아버지·할머니 이름, 그리고 고향을 알려줬습니다. 그러면서 통일이 되든 안 되든 죽으면 자신의 고향에 가서 묻히고 싶다고 말하고 열흘 뒤 아침에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김해였습니다.”
부친 사망 후, 명화씨는 가정을 꾸리고 두 아들도 낳았다. 하지만 불행은 피해가지 않았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았던 명화씨는 광산 등지에서 일하다가 보위사령부 산하 ‘518소(所)’로 가게 됐다. 518소는 양귀비(대마)를 몰래 재배해 내다 파는 곳이었다.
그러던 중 양귀비를 중국에 몰래 팔던 게 중국 당국에 걸려, 518소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보위부는 출신 성분이 나쁜 명화씨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명화씨는 악명 높은 보위부 구치소에 수감됐다. 그때가 2002년 5월이었다.
탈북 결심… 아들과 함께 두만강 渡江
이곳에서 10개월간 복역한 명화씨는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아들 둘이 눈에 밟혀 혀를 깨물고 죽지도 못했다. 이를 악문 채 구치소 생활을 견뎠고, 이듬해 3월 풀려났다. 불행은 끝난 게 아니었다. 수감돼 있는 동안 남편이 약을 먹고 자살한 것이다. 두 아들이 겨우 장사(葬事)를 치렀단 이야기를 들었다. 명화씨는 결심했다. 두 아들을 위해서라도 ‘이 지옥을 탈출해야겠다’고.
하지만 고문 후유증 때문에 곧바로 탈북을 결행할 수는 없었다. 또한 주변 정리는 물론 탈출에 따른 상황을 엿봐야 해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렇게 2년을 절치부심했다. 손명화씨의 이야기다.
“큰아들은 내가 출옥한 직후에 군대에 갔고, 작은아들은 2년 뒤 18세가 되어 입대했습니다. 그때가 2005년이었어요. 작은아들이 군대에 간 지 몇 달 만에 잠시 집에 왔습니다. 그때 작은아들에게 ‘탈북하자’고 설득했습니다. 작은아들이 ‘형을 두고 갈 수 없다’며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너 하나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하소연했지요. 아들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 3일이 걸렸어요. 결국 아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둘이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그날이 2005년 10월 30일, 보름달이 환히 뜬 날이었지요. 평생 잊지 못할 날이에요.”
명화씨와 그의 아들은 북중(北中) 국경에서 간신히 버스를 타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때 두 사람의 손에는 ‘쥐약’이 들려 있었다. 북송(北送)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탈출은 성공이었다. 두 사람은 베이징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명화씨는 처음엔 ‘국군포로의 자녀가 남녘 땅을 밟았으니 조국(대한민국)이 반겨주겠지’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지위는 찾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도 명화씨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국군포로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 국방부 등 관계 당국을 오갔지만, 앞서 말한 대로 아버지가 전사자로 처리돼 명화씨는 ‘국군포로 추정 자녀’라는 꼬리표를 다는 데 그쳐야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때 명화씨는 결심했다.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는 아버지의 유언도 지키고, 아버지가 국군포로였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북한에 있는 선친의 유해를 송환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명화씨는 북한에 있는 동생을 통해 아버지의 유해 송환 절차에 들어갔다.
“2013년 9월 여동생이 아버지 유해를 수습해 중국 옌지(延吉)로 보냈어요.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중국 내 브로커가 잠시 유해를 보관했지요. 저는 유해 송환을 위해 국방부에 도움을 청했지만, 국방부는 ‘정치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거부하더라고요. 그 순간 너무 참담했습니다.”
이때 명화씨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가 있었다. 국회의원을 지낸 박선영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이사장이었다. 박선영 이사장은 명화씨에게 ‘유해 송환에 쓰라’며 800만원을 지원했다. 명화씨는 그 돈을 받고 중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아버지와 마주할 수 있었다.
명화씨는 “30년 만에 아버지의 유해를 안는 순간 ‘내 아버지’라는 확신이 들었다”며 “자세히 보니 아버지 유골 하나하나에 부친임을 증명하는 여동생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중국에 27일간 방치됐던 유해를 되찾고, 중국 세관을 통과한 후 인천 연안부두에 당도했다. 이때 명화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가 유해를 갖고 돌아오니 어떻게 알았는지 그곳에 수십명의 취재진이 나와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그렇게 울고불고했어도 모른 척했던 이들이 가까스로 유해를 찾아오니 마치 자신들이 송환해온 것처럼 들떠 있는 모습에서 환멸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유해는 송환됐지만, 명화씨는 또 한 번 슬픔을 맛봐야 했다.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했던 여동생과 오빠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내 참았던 눈물이 북받쳐 흘렀다.
대한민국 정부와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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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화 회장은 “보수 정부라고 불렸던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도 국군포로 문제에는 소홀했다. 우리는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을 받은 신세”라며 한탄했다. 사진=조준우 |
명화씨는 국가유공자 증서와 아버지 유해를 통해 자신과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했다고 여겼다. 시련은 끝난 게 아니었다. 2016년 5월 보훈처로부터 받은 증서를 토대로 보훈지청에 국가 유자녀 신청을 접수했으나 ‘손동식씨는 국가유공자 등록자 명단에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보훈처를 찾아가 따졌더니 ‘유공자 증서를 준 일이 없다’고 하더군요. 손동식이라는 이름조차 등록된 일이 없었습니다. 증서에 적힌 등록번호에 대해 물었더니 ‘모르겠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유공자 등재는 안 하고 증서만 준 거 같다는 의심이 들더군요.”
보훈처는 이후 손동식씨를 ‘참전유공자’로 새롭게 등록했다. 앞서 말한 대로 ‘참전유공자’ 자녀는 ‘국가유공자’ 자녀와 달리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명화씨는 이에 반기(反旗)를 들어 법적 투쟁에 나섰다. 2016년 8월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에 대한 예우 등을 대통령령(令)으로 제정하지 않은 건은 헌법에 위반된다’며 입법부작위 위헌확인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5월 31일 해당 부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국방부 담당자에게 나를 아버지 호적에 올려달라고 했어요. 그러나 (전사 날짜로 인해) 호적에 올릴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할 수 없이 2015년 아버지의 딸임을 확인해달라는 인지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후 판결 경정, 등록부 정정 허가 판결까지 3개의 법적·행정적 판단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명화씨는 변호사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이 소송을 치렀다. 그는 “보수 정부라고 불렸던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국군포로 문제에는 소홀했다”며 “우리(국군포로 자녀)는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신세”라고 자조했다.
기자는 손명화씨의 소개로 미귀환 국군포로 유가족 네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모두 여성이었는데,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아버지와 자녀 모두 탄광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국군포로와 그 자녀에게 일종의 ‘연좌제’를 적용, 탄광에서 일하도록 강요했다. 탄광에서 일하는 포로와 그 자녀들은 사회안전부와 국가보위부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네 사람의 사연 모두 손명화씨의 그것처럼 절절하기 그지없다. 그중 가장 애달픈 사연을 가진 이는 이순금(59)씨다. 갸름한 얼굴의 순금씨는 함경북도 영흥군 아오지에서 태어나 탈북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걸 13세 때 알았습니다. 하루는 언니가 아버지한테 ‘괴뢰군이 뭐야’라고 묻는 거예요. 아버지가 ‘누가 괴뢰군이라고 말하니’라고 되묻자 언니가 ‘우리 학급 아이들이 나를 괴뢰군 딸이라고 한다’고 했어요. 나중에는 저도 주변에서 괴뢰군 딸이라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그러면서 ‘포로 새끼’라고 손가락질도 받았어요.”
순금씨 아버지는 “나는 남조선에서 왔다. 절대 나쁜 짓 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고백했다. 순금씨 아버지가 순금씨와 언니, 남동생을 앉혀놓고 했다는 말을 옮겨본다.
“아버지 대(代)에는 통일이 안 될 것 같다. 아버지가 죽으면 너희 대에 누구라도 반드시 우리 고향에 꼭 가야 한다. 남조선에 가면 아버지는 영웅이다. 거기엔 아버지 훈장도 있다. 너희는 ‘영웅의 아들딸’로 대접받으며 꽃다발도 안겨줄 거고 목말 태우며 환영할 거다. 절대 다른 생각하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아버지 고향에 가서 아버지 몫을 할 수 있단다.”
순금씨 아버지는 남한에 있는 가족들의 이름을 순금씨와 언니에게 알려줬다. 그때 고모 이름과 큰아버지 이름을 들었다. 아버지 이름이 두 개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한 가지 신신당부를 했다. 그 이름들을 “절대 종이에 적어두지 말라”고.
순금씨는 공부를 잘했지만, 그 역시 국군포로의 자녀라는 한계에 부딪혔다. 순금씨도 결국 아버지, 언니, 남동생과 마찬가지로 탄광에서 일하게 됐다.
사달은 남동생으로 인해 일어났다. 순금씨의 말이다.
“남동생은 탄광 일이 힘들다고 자주 울면서 못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마다 통일이 되면 아버지 메달(훈장)도 있으니 대접받으면서 살 수 있다고 설득을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남동생이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다가 가슴에 맺힌 말을 한 거예요. 동생이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말한 거예요. 아버지가 우리한테 이야기해줬던 걸 그대로요. 남한이 물도 좋고 쌀도 많고, 먹을 게 그렇게도 많다, 그렇게 살기 좋다고. 우리는 (북)조선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고. 통일되면 아버지 고향으로 갈 거라고 말한 거예요.”
아버지와 남동생 잔인하게 銃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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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금씨는 국군포로 아버지와 남동생이 공개처형되는 것을 보는 비극을 겪었다. 사진=조준우 |
“아마 사형이 확실하니까 친구가 배려 차원에서 동생을 집에 갈 수 있도록 한 거겠지요. 보자마자 깜짝 놀랐어요. 동생이 온몸에 주렁주렁 무언가를 달고 왔더라고요. 와서 하는 첫마디가 ‘배가 고프니 밥 좀 달라’였어요. 새벽 두 시에 두붓집을 두드려 콩비지를 조금 얻어서 먹였죠. 저는 울면서 도망치자고 했어요. 동생이 하는 말이 ‘자기가 도망가면 아버지가 죽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다음은 누나(순금씨)라면서…. 둘이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순금씨는 친구인 안전원에게 ‘아버지를 보게 해달라’며 면회를 사정했다. 그러자 친구는 ‘면회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아들 교육을 잘못 시켰고, 그 아들이 잘못된 말을 한 게 죄’라며 아버지와 동생의 처형을 기정사실화했다. 동생이 안전부로 되돌아간 후 순금씨는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앓아누워버리고 말았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처형은 공개처형 방식으로 이뤄진다.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다. 순금씨도 예외는 아니라 처형 장소에 끌려갔다. 얼마 뒤 주민들이 하나둘 그곳에 모였다. 주저앉은 순금씨는 저만치서 차에 실려 온 아버지와 남동생을 목격했다.
“안전부 요원이 십자가 모양의 작대기를 갖고 오더라고요. 그러더니 나란히 그 작대기를 땅에 박아 세우더군요. 그 후에 아버지와 남동생이 차에서 내리는 걸 봤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산목숨이 아닌 것 같았어요. 흐느적거리며 끌려왔으니까요. 동생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안전원이 아버지와 동생에게 ‘반역자’ ‘간첩’ ‘반동’이라고 모욕을 주면서 온갖 나쁜 말은 다 붙이며 죄명(罪名)을 낭독했습니다. 그 직후 먼저 동생에게 총을 쐈어요. 그러자 몸이 훅하고 처지는 거예요. 남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봤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봤어요. 그때 아버지 눈빛을 보고 알았어요. 아버지가 내게 ‘남조선으로 가라’는 신호를 보낸다는 걸요. 곧바로 아버지에게도 총살형이 집행됐습니다.”
명절 때만 되면 우시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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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순씨는 국군포로였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 묘소를 향해 “공화국을 반대한 간첩”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사진=조준우 |
남순씨의 꿈은 ‘은행원’이었다. 운이 좋게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까지는 얻었지만 합격·불합격 통보는 받지 못했다. 대신 회령에 있는 회령교원대학에 갈 기회가 생겼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남순씨는 “부모님이 ‘선생 하는 것은 죽어도 안 된다’면서 여자가 혼자 합숙 생활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말했다. 아마도 국군포로 자녀라는 출신 성분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그랬던 것 같다. 남순씨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탄광에서 일하게 됐다.
“저 역시 아빠가 있는 탄광에 들어가 별일을 다 해봤어요. 제가 탄광에 들어갔을 때는 기계식 발파(發破)도 없었어요. 곡괭이로 석탄을 쪼개가며 캘 때였어요. 그때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죠.
그러던 중 어머니가 1988년에 돌아가셨어요. 이틀 동안 유언을 남겼는데 그때 하셨던 말이 ‘너희 아빠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다’고 했어요. 저의 부모님은 결혼하고 5년 뒤에야 혼인신고를 했는데, 아버지의 성분 때문에 안전부에서 어머니에게 ‘결혼하지 마라’고 했대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말을 차마 못 하고, ‘아버지가 이렇게 불쌍한 사람이니 네가 (아버지를) 잘 돌봐드려라’는 느낌으로 말했어요.”
정남순씨는 자신의 출신 성분이 안 좋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건 어머니 사후(死後)에 알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탄광 일에 매진하던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때 북한에서도 이산가족 상봉 신청이 있을 거란 소문이 돌았다. 남순씨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내심 이산가족 상봉 명단에 포함되지 않을까 기대를 많이 했어요. ‘남조선에 있는 내 부모·형제를 만날 것 같다’고 하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 근데 우리 형편에 거기에 포함될 수 있었겠어요? 당연히 신청 자격조차 안 됐죠. 그래도 아버지는 신청을 하셨나 보더라고요. 결과는 참담했죠. 탈락한 날 돌덩이처럼 마른 옥수수 알을 드시면서 많이 우셨어요. 아버지는 명절 때만 되면 항상 우셨어요. 어린 제가 ‘아버지 왜 울어’라고 물으면 ‘너는 몰라도 돼’라고 하시면서 계속 눈물을 훔치시더라고요.”
상실감이 컸던 탓일까. 이듬해 1월 3일 정남순씨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포로로 끌려온 뒤 탄광에서 곡괭이질만 하던 그였다.
“아버지가 숨을 거둔 걸 확인한 순간 정신을 잃었어요. 삼일장이 어떻게 지나간지도 모르겠어요. 아버지 관을 빨간 천으로 덮었는데, 그 위에 흙을 한 줌 덮어야 한다대요. 주변에서는 어서 흙을 던지라고 했는데, 저는 관이 있는 구덩이에 들어갔어요. 같이 죽고 싶어서….”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정남순씨는 참담한 일을 겪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 묘소 앞에 몰려와 “공화국을 반대한 간첩”이라고 마구 손가락질을 한 것이다. 그때 남순씨는 “더는 이곳에서 살 필요를 못 느껴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정남순씨는 2001년 11월 한국에 와 아버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남한에서 낳은 자식, 그러니까 이복 언니와 오빠를 찾은 것이다. 정남순씨는 “(이복)언니·오빠랑 잘 지낸다. 나는 그래도 아빠라는 존재가 있었지 않으냐”며 아버지 없이 자란 언니·오빠를 더 측은하게 여겼다.
“아버지가 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했기에…”
이주은(가명·58)씨는 북한에 아들이 살고 있어 가명을 써달라고 했다. 이주은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주은씨 아버지가 6·25전쟁 참전 이전부터 기독교 신자였던 터라 그 영향을 받았다. 이주은씨는 지금도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 일을 맡아 하고 있다.
3남 1녀 중 장녀인 이주은씨는 함경북도 온성에 살았다. 공부를 잘했던 주은씨는 대학 진학을 못 하게 되며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걸 알았다.
“제가 차라리 바보였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때 소문이 다 났어요. 국군포로 딸이라서 저렇게(대학을 못 가게) 됐다고요. 그 순간만큼은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대학에 못 갈 바엔 차라리 양잿물을 먹겠다’고 아버지한테 달려들었어요. 그러면서 ‘이 반동아, 괴뢰군아. 너네 집에 가라’며 ‘어째 너네 나라 안 가고 여기서 나를 낳았느냐’고 할 말 못 할 말 다 했어요. 아버지와 한 열흘 가까이 대화를 안 한 거 같아요. 그 후 아버지가 제게 ‘나라가 힘이 없어서 (포로들을) 못 데려간 거뿐이다’라고 씁쓸히 말씀하시더라고요.”
주은씨 아버지는 “비록 내 나라로 돌아갈 순 없지만 그래도 용서하고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 말에 감명을 받아 주은씨도 대학을 포기하고 탄광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1978년 주은씨가 처음 탄광에 들어가던 날, 그의 어머니는 가슴이 아파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주은씨 아버지는 함연탄광이란 곳에 배치돼 그곳에서 갱도(坑道)를 뚫는 가장 위험한 일을 했다. 이주은씨의 말에 따르면, 온성탄광의 갱도를 뚫는 데에는 거의 다 국군포로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제 눈엔 우리 아버지가 너무 잘생기고 멋있는 분이었어요. 그런 분이 탄광에서 비참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딸의 심정이 어떨지 생각해보셨나요.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는 게 가장 슬펐던 거 같아요. 갱에서 짐승처럼 기어 다니며 일하는 그 모습…. (울음) 우리가 보는 하늘은 늘 무너지는 하늘이었어요. 그리고 늘 새카맸죠. 아버지는 혹시라도 갱도가 무너질까 봐 제 주변에 선목을 깔아주셨어요. 돌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나무판이 선목인데, 아버지는 자신의 구간에 있는 선목을 다 뽑아 제가 일하는 구간에 놓아주셨죠.”
주은씨 아버지는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비장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대한민국이 국군포로 문제에 대해 냉랭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 가족이고 병사들인데…. 제가 8~9년 전에 한국에 들어와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어요. 부치지는 않았는데, 여기 오기 3일 전에 그때 쓴 편지를 열어봤더니 이렇게 써 있더라고요.
‘종군위안부 문제는 나라가 없을 때 이 나라 여인들이 당한 슬픔이다. 그 상처에선 피고름이 흐르고 있다. 국군포로 문제는 대한민국이 건국됐을 때, 30대 미만의 젊은이들이 당한, 말할 수 없는 수난이고 고통이다. 그 상처에서는 지금도 선지피가 흐르고 있다. 그 여인들이 흘린 피고름과 그 선지피가 콸콸 흐르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왜 외면하는가’라고요.”
주은씨는 “나라가 없을 때 당한 것, 나라가 있으면서도 당한 것 모두 다 책임져야 한다”며 “대한민국이 국군포로를 외면하면 다음 세대 또한 국가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이 나라를 외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아버지가 조국을, 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참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자식이 부모 찾는데 그게 죄인가’
함경북도 산성이란 곳에서 살던 황금주(가명·52세)씨는 여섯 살이던 1976년, 아버지가 보위부에 끌려가는 걸 목격했다. 당시 황금주씨의 아버지는 강안탄광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4시쯤 검은색 차가 와 밑도끝도 없이 아버지를 묶어서 데려갔습니다. 사실 그전부터 우리 가족 주변에 보위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늘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아무래도 국군포로 집안이니까 감시가 필요했겠죠. 우리 가족은 늘 공포에 떨며 살았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끌려갔으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어린 제가 ‘아버지 어디 가세요’라고 울부짖었지만, 보위부 요원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아버지를 압송해갔습니다. 아버지가 청진수송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까지만 들었고, 그 이후 소식은 모릅니다. 시신도 못 찾았고요.”
황금주씨 아버지는 석탄 캐는 일이 아닌 설계도면 제작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치고는 학력을 갖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황금주씨는 “아버지 방에 각종 설계도면, 자그마한 석유등잔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보위부에서 다 압수해갔다”고 증언했다.
금주씨가 16세가 됐을 때 그 역시 탄광 일을 했다. 그의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았다. 황금주씨는 “우리 가족이 도둑 취급 받는 건 예사였다. 그만큼 안 당해본 설움이 없다”고 말했다.
금주씨는 2004년 3월, 내몽골 초원과 중국을 거쳐 가까스로 탈북에 성공했다. 탈북을 결행할 때 금주씨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에 가 아버지의 신원(身元)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금주씨가 잊지 않고 있던 한 가지가 또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군번이었다.
“군번(1102208)을 가지고 2006년 국방부를 갔어요. 아버지의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국방부 관계자가 ‘이미 행방불명이 됐는데 확인해서 뭐하냐’는 식으로 대꾸하더라고요. 제가 ‘자식이 부모 찾는데 그게 죄인가요’라고 따지자 ‘행방불명이면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 제가 펄쩍 뛰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국군포로다. 이 나라를 위해, 너희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너희가 가만히 있는 게 말이 되냐’고 막 화를 냈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울음도 안 나오더라고요.”
황금주씨는 관계 당국과 씨름한 끝에 아버지의 고향이 의정부 덕계리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형제가 경기도 부천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겨우 알아냈다. 그의 아버지 형제는 9남매였는데 모두 사망하고, 현재는 사촌들만 살아 있다고 한다.
“사촌 중에 제가 가장 어려요. 처음 만났을 때 사촌들이 놀라면서 ‘우리는 외삼촌이 돌아가신 줄 알고 매년 제사 지냈다’며 안타까워하면서도 짐짓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더라고요.”
남한의 가족들은 찾았지만 정작 그의 아들은 북한에 아직 살고 있다. 금주씨는 “요양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북한에 있는 아들에게 중국인 브로커를 통해 송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과의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손명화 회장을 만났다. 손 회장은 굵은 눈물 방울을 흘리며 기자에게 “왜 우리는 아버지의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국군포로의 자녀로 태어난 죄, 이 죄를 안고 가야 하는 우리의 설움을 대한민국이 마땅히 닦아줘야 할 의무가 있다”며 “북한에서 국군포로 자녀로 산 것도 억울한데…. 우리 아버지가 이 나라 대한민국을 잘살도록 만들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피흘려 지킨 이 나라는 왜 우리를 사각지대로 밀어 넣으려 하나요? 인권을 존중한다면서 왜 우리의 인권은 보장하지 않는 겁니까?”고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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