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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선언 20주년 | 현대사 증언

대기업 임원이 말하는 내가 겪은 南北 경협사업

“DJ는 퇴임 후에도 對北 핫라인을 유지하려 했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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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김정남의 후견인인 조경춘씨가 전화를 했습니다. ‘VIP가 VIP에게 보내는 가장 중요한 선물’이라며 60인치 LG TV를 주문했습니다.”

“아태는 대기업이 사업제안이나 방북을 요청하면 어떻게든 ‘입장료’를 받으려 했습니다. 가령 ‘현대 그룹 회장단이 평양의 정주영체육관 기공식에 참석하려 한다’고 협의를 시작하면 ‘TV 1만 대부터 거론했습니다.”

“DJ 정부의 대북 관련 핵심인물들은 퇴임 후에도 통일정책 등에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북한과의 교류에 물꼬를 튼 것이 가장 큰 업적이었던 전 정권의 대북정책 입안자들은 노무현 당선자 측에 당시 정권의 대북라인을 완전히 넘기지 않고 공유하자는 의중을 비쳤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LG전자, 한글로 만든 북한 내수용 GSM 핸드폰 개발해 판매(2003년)
⊙ 북한 비즈니스맨들과 소통에서 가장 큰 장애는 원가 개념에 대한 오해
⊙ 서해교전과 핵개발 문제로 북한 통신망 사업 논의 무산(2002년)

유재영
경남고·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 LG회장실·LG전자 근무. 現 대기업 재무실장 전무
지난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이후 2000년 6월 15일, 두 사람은 5개 조항을 담은 ‘6·15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2000년 6월 15일, 당시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은 ‘6·15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선언문에는 평화통일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 남북한 교류 등 5개 항목이 담겼다. 남북(南北)의 최고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쌍방이 합의한 선언문을 채택한 것은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북 관계는 선언문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6·15선언 후속 조치는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고, 북한의 핵(核)개발은 남북 관계를 오히려 경색시켰다. 6·15선언 이후 DJ 정부는 국내 대기업에 대북(對北)사업 참여를 사실상 종용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가장 급한 일은 외환(外換)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를 정상화시키는 것과 남북 관계의 획기적 진전이었다. 이 획기적 진전의 일환은 국내 4대 그룹이 북한과 손잡고 사업하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과 선언문을 채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길에는 대기업 총수들이 함께 했다. 정몽헌(鄭夢憲) 당시 현대아산 회장과 정몽준(鄭夢準) 현대중공업 고문, 윤종용(尹鍾龍)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具本茂) LG그룹 회장, 손길승(孫吉丞) SK그룹 회장이 포함됐다. 4대 그룹 총수는 평양에서 돌아온 후 그룹 내에 팀을 꾸려서 대북사업을 하도록 지시했다.
 
 
  김대중 방북과 함께 본격화된 南北경협
 
지난 2000년 6월 12일, 롯데호텔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각국 언론인과 방송기자들이 취재를 하는 모습. 남북 정상이 마주한 것은 분단 이후 55년 만에 처음이라 해외에서도 관심이 컸다.
  6·15선언 후 지금까지 현대그룹 외 대기업들이 대북사업과 관련해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추측과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LG그룹에서 대북사업을 맡았던 유재영씨는 “북한과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해본 경험이 있을 뿐, 나는 북한전문가가 아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예민한 문제들이 많았고 남북 양측에 관련자들도 많아 누구에게도 얘기를 꺼낸 적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북한의 문은 열릴 것이고, 초창기 우리의 경험이 북한과의 교류협력에 나서는 기업인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유씨가 대북사업에 뛰어든 계기는 DJ 정부의 6·15선언이었다. LG그룹은 1990년대 초반부터 LG상사를 통해 북한과 각종 임가공(賃加工) 사업을 했다. 6·15선언 후 남북 관계가 핑크빛 무드로 무르익자, 대북사업은 주력사인 LG전자가 맡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LG 회장실 과장이던 그는 구본무 회장이 평양 방문에서 돌아온 직후 LG전자의 북한 데스크로 선발됐다. LG전자의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했던 노용악 부회장이 이끄는 LG전자 중국지주회사 소속으로 베이징(北京)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2000년 7월이었다.
 
  북한과 가진 남북 교류에 대한 대략적인 오리엔테이션은 통일부와 관계 기관의 도움을 받았다. 유씨는 “통일부는 북한과의 교류가 활발해야 하는 부서이기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북한 체제의 실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문가 집단이고, 그동안의 교류들이 큰 성과가 없었기에 대북사업의 실질 성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분위기가 있던 것이 사실이다”고 말했다. 그의 임무는 타당성이 있는 대북사업을 찾는 것, LG 브랜드를 북한에 알리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중국 땅을 밟은 그의 눈에 비친 2000년의 베이징은 어떠했을까.
 
 
  베이징 풍경
 
  “당시만 해도 중국이 실질적 자본주의 경제로서 성공할 것인가에 대해 찬반양론이 팽팽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길에 다니는 자동차의 3분의 1 정도가 대사관 차량일 만큼 뉴욕 다음으로 외교관 그리고 스파이들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북한 사람들과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는데, 1990년대 후반 발생한 황장엽 망명사건, 흑금성 사건 등의 여파로 늘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 가장 먼저 한 업무는 무엇인지요.
 
  “LG상사 베이징 지사 북한팀으로부터 업무를 이관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LG상사가 하던 북한 관련 사업은 대부분 무역이나 임가공 형태의 사업들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관받아야 할 사업은 TV 임가공 관련 업무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사람과 관련된 것이었죠. LG상사가 오랫동안 관리하고 개발해 온 북한 사업 파트너들을 소개받는 것이 급했습니다.”
 
  ― 북한 사업 창구를 상사에서 전자로 옮겼다지만, 이를 북한에서 쉽게 받아들일 리 없는데요.
 
  “북한은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국가잖습니까. 북한이 오랫동안 상사 측과 신뢰를 쌓아왔는데, 하루아침에 낯선 사람으로 거래선을 바꾼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소개받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불편하고 내키지 않는 듯했고, 서로 불편했죠. 그렇다고 LG상사가 해왔던 무역·임가공 사업을 LG전자에서 인수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LG전자 입장에서는 LG상사의 거래선을 소개받되, 완전히 새로운 사업, 사람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LG상사는 어느 정도 규모로 대북사업을 운영했나요.
 
  “상사라는 조직은 상업적 마인드와 수완으로 똘똘 뭉친 소수(少數) 정예의 인력이 네트워크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회사입니다. LG상사 대북팀은 본사에 4~5명, 베이징 지사에 3~4명이 직접 북한 거래선을 상대하고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LG상사 베이징 지사장을 겸직했던 장경환 지사장과 이종근 팀장은 북한 사업과 관련한 업계에서 매우 존경받는 개척자분들입니다. 경험이 풍부했고, 원만하고 겸손한 품성으로 북한 사람들의 호감을 샀습니다.”
 
 
  김정일이 애착을 가졌던 공장에서 LG TV 임가공 해
 
LG상사는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에서 TV를 임가공 생산해왔다. LG전자 엔지니어가 북측 노동자들에게 TV 조립을 교육하고 있는 모습. 사진=유재영씨
  ― LG상사의 임가공 사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었지요. 작업복을 만드는 일도 했는데, 우리가 옷감과 디자인을 전달하면 북한에서 그대로 작업복을 만드는 일이었죠. LG상사 베이징 지사에서 맡았고, 북한에서 가공해서 우리에게 납품했습니다. 1996년부터 TV 임가공을 했습니다.”
 
  ― 북한에 TV 제조 공장을 지어줬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1990년대 초반에 북한은 조총련 자본을 유치해 여러 공장을 설립합니다. 그때 ‘애국(愛國)’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공장이 여럿 세워졌죠. ‘애국’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조총련이 북한에 투자하고, 북한을 위해 하는 활동에 대해 붙이는 관용어로 이해하면 됩니다. 때문에 북한에 있는 ‘애국 XX공장’은 조총련을 위시한 해외교포 자금으로 설립됐다고 보면 됩니다.
 
  그중 하나가 대동강 구역에 만들어진 ‘애국천연색텔레비젼조립공장’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사용될 컬러TV 조립을 위해 조총련 자금으로 만들어졌는데, 판매대금 입금이 늦어지고, 부품 조달을 위한 운전자금이 끊어지는 바람에 2년 뒤 가동이 중단됐습니다. 1992년 공장을 만들 때부터 김정일이 현지지도를 했던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자금 회수에 문제가 발생해서 문을 닫은 것이죠. 북한이 LG상사에 ‘우리에게 빈 공장이 있다. 거기서 TV를 조립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결국 LG전자가 LG상사의 요청으로 일부 부족했던 설비를 투자해서 TV 임가공 사업이 이 공장에서 시작됐습니다.”
 
  유재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이 직접 현지 방문까지 했지만 2년 만에 가동이 중단된 공장에서 LG의 TV가 생산됐다. LG전자 구미 공장에서 TV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과 자재, 포장박스까지 컨테이너에 실어서 인천항으로 보내면, 인천항에서 선적해 비(非)정기 운항선박을 통해 남포항으로 이동하고, 남포에서부터 철로를 통해 공장 앞마당까지 컨테이너로 이동시키는 방식이었다. 북한의 TV공장에서는 컨베이어벨트에서 조립하고, 납땜해 TV를 완성, 포장한 뒤, 정확하게 역순(逆順)으로 다시 구미공장까지 운송, 그 과정에서 북한은 TV 한 대당 얼마의 임가공비를 취하는 방식이었다.
 
 
 
북한에서 TV 한 대 생산하면 오히려 적자

 
  ― 말만 들어도 효율적이지 않은 사업 형태입니다.
 
  “그렇죠. 인천-남포 간 20피트 컨테이너 하나의 운반 단가가 1200달러인 적도 있었습니다. 이는 인천-유럽 간 운임보다 더 비쌌습니다. 정기선이 아니고 특수 지역을 오가는 비정기 노선이어서 그랬습니다. 더구나 LG전자가 임가공을 맡긴 TV는 국내에서 수요가 거의 사라져가는 매우 저렴한 21인치 제품이었는데, 한 대를 생산하면 2만원 정도 손실이 났습니다.”
 
  ― 그런데 왜 사업을 계속했습니까.
 
  “이 사업이 초기 대북 협력사업의 모범적 모델이었습니다. 대북사업을 어떻게든 해야 하는 그룹 입장에서는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지속하며 경험을 쌓아갈 수 있는 적당한 아이템이었죠. 실무를 맡은 입장에서 북한 실무진과 언쟁이나 크고 작은 사고들 때문에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손실 때문에 사업을 중단할 경우에 북한 측이 입게 될 손실이 눈에 보여서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는 일감이 부족해서 나중에는 삼성전자도 같은 시설에서 임가공을 시작했는데, 작업 물량이 공장 규모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기에 일감이 부족해서 작업장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생산직 사원들 생각을 하면 참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 회사가 손해를 입어도 대북 협력사업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그만둘 수 없었다는 거죠.
 
  “당시에는 대북 관련 사업이 매우 장려되는 분위기였습니다. 단기적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시각, 또 정부의 중점 과제에 적극 협조한다는 차원에서 4대 그룹은 할 수밖에 없었고, 각 그룹들도 IMF 이후 성장 한계의 돌파구를 북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지 기대하며 처음에는 매우 의욕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상대방의 특수성과 외교적 갈등으로 경색된 시기가 장기화돼 지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만둘 수 없는 의무 방어전 성격도 있었습니다. 기업의 노력과 적은 비용 부담으로 남북 관계 개선에 조그마한 기여를 한다는 점에서라도 기꺼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죠. 삼성은 고○○ 상무가 대북 업무 리더였고, SK는 구해우 상무를 필두로 하태경씨 등이 동북아협력팀에 소속을 두고 활발히 활동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삼성, LG, SK가 서로 경쟁
 
  ― 현대는 빠졌나요.
 
  “현대는 북한과 직접 거래를 하는 상황이어서 베이징에 따로 직원을 두지 않았습니다. 삼성, LG, SK의 경우 베이징 지사에서 대북 업무 창구역을 맡았습니다. 롯데, 한화 등 규모가 작은 그룹은 대북사업에 대해 체크만 하는 상황이었죠.”
 
  ― 3대 그룹은 서로 협력자 관계였나요.
 
  “아닙니다. 정보는 공유했지만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습니다. DJ 정부가 대기업들에 대북사업을 제대로 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삼성, LG, SK가 서로 견제하는 분위기였죠. 일례로 북한을 자주 왕래하며 북한사업가로 한때 유명했던 재미교포 박경윤씨는 그럴싸한 아이템을 들고 대기업 사람들을 모두 접촉하면서 저울질을 했고 서로 경쟁을 부추기며 과열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형태의 접근방식은 업계의 브로커들에게는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 대북브로커는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박 회장처럼 교포로서 북한을 왕래하며 고위층의 니즈를 파악해서 사업화시키는 경우가 있었고, 베이징에서 개인사업을 하면서 북한 관리들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거간꾼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폐쇄된 사회의 정보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악용해 북한 사업에 뛰어든 기업인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정부 눈치보느라 하기는 해야 했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나요.
 
  “꼭 눈치를 봐서는 아닙니다. 정부가 강한 시그널을 보내긴 했지만 기업으로서도 정말 애착을 가지고 시작했으니까요. 가장 쉬운 것이 제품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정부 차원에서 TV 구매 규모가 컸습니다. 체제 선전에 필수적인 TV를 정부가 구매해서 배급하는 형식이었기에 중국산 TV를 대량 구매한다는 얘기를 대사관 주변에서 들었습니다. 때마침 북한은 흑백TV를 컬러TV로 한창 바꾸는 중이었습니다.”
 
 
 
북한의 공식 창구는 민경련과 아태

 
  ― 대사관 주변에서 얘기를 들었다고요.
 
  “네. 기존에 LG상사가 갖고 있던 북한 인맥도 소개받았지만 새로운 선을 개척해야 했습니다.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직접적인 업무 연관성과 별도로 다양한 각도에서 도움이 된 분들이 많습니다. 가장 큰 북한 식당인 ‘해당화’는 북한 대사관 뒤편에 있어서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나 평양에서 출장 온 북한 관리들이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일주일에 절반 이상은 그곳에서 식사했습니다. ‘북한과 장사하려고 서울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그냥 드나드는 겁니다. 처음에는 종업원들이 경계했는데 끊임없이 드나드니까 단골이 됐고, 또 새로운 북한 사람들을 사귀게 될 우연한 기회가 많이 생겼었죠. 그들을 통해 대사관 직원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로비를 했습니까. 언더 머니를 줬다든지요.
 
  “그런 건 없었습니다. 남측으로부터 그런 돈을 받으면 사실 우리에게 그들의 목숨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관료들이 베이징에 나와 있을 때에도 아이들 중 한 명은 늘 평양에 두고 나왔기 때문에 아이들 문방구나 옷가지 등을 잔뜩 사주는 정도였고 큰 비용이 드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듯 개개인에 대한 로비는 없었고, 오히려 중국의 관시(關係)문화와 비슷했습니다. 친분 관계를 쌓기 위해 가족을 잘 알아야 하고, 인간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인들을 공식적으로 상대하는 곳은 민족경제협력연합회(이하 민경련)와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이하 아태)였다. 민경련은 대남(對南) 교육을 받고, 남한 사정에 밝은 이들로 베이징의 북한대사관 혹은 단둥(丹東)영사관에 경제 참사가 나와 있는 상설 조직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과 무역을 맡은 북한의 공식 조직으로, 한국 기업들을 상대했다. 개성공단 등 한국 기업과 함께 하는 교역에서의 실무적 업무는 이후에도 민경련이 맡았다. 예전에 광명성경제연합회로 알려졌던 이 조직에는 광명성총회사, 삼천리총회사, 개선무역 등의 산하 단체가 있었는데, 2000년대 초에 국내 대기업이 접촉했던 상당수의 담당자는 산하 단체 내에서 여러 업무를 겸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경련은 무역·임가공 분야 등의 사업에만 수동적으로 응하는 수준이어서, 무역 이외에 남한 기업의 새로운 투자와 관련된 사업 아이템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TV를 訪北 선물로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2000년 9월 14일 오전 특사 자격으로 온 김용순 노동당비서와 청와대 오찬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남북 경협 사업을 위한 북한 측 창구는 민경련과 아태였다.
  이때 탄생한 아태는 민경련보다 높은 노동당 소속이었다. 원래 이 조직은 1990년대 중반에 대남 대외정책 전담기구로, 노동당 대남비서 김용순이 진두 지휘했다. 아태는 1998년 이후 현대의 금강산 사업을 성사시킨 이후에는 큰 규모의 정책적 의사 결정이 필요한 경제 협력 관련 업무에 반드시 개입했다. 이들은 정무원 산하인 민경련과 달리 노동당 소속이었고, 김용순 아래에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송호경, 전금철, 이종혁 등이 있었다. 면면이 말해주듯 외교 및 대남 정책부서 인물들이 소속돼 있었다. 남측의 대기업이 대북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아태가 움직였다. 이들은 상설 조직이 아니었고 필요할 때만 베이징으로 왔다.
 
  ― 흑금성 사건도 아태 조직과 관련 있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흑금성의 북측 파트너였던 강덕순이 아태 부실장, 참사로 일했습니다. 그는 김일성과 외종 관계였고 매우 유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나중에 좌천됐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는 강(康)씨 성을 가진 몇몇 인물이 있는데 대부분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씨 집안 사람들로 이해하면 됩니다. 제가 맡은 업무와 관련해서 강관주라는 이도 있었는데, 그도 김일성의 외종질이었습니다.”
 
  ― 아태가 남한 대기업을 상대했다는 것이죠.
 
  “네. 대기업의 굵직한 사업은 민경련과 얘기할 수 없었죠. 민경련은 루틴한 상업적 업무에는 아주 뛰어난 기량을 지니고 있었으나, 비정형적이고 정책적 대화를 할 수 있는 파트너는 아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고사해서 아태와 얘기를 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2인 1조로 필요할 때만 잠시 베이징에 나와서 한 달 정도 머물다가 평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우리는 늘 ‘아태는 언제 나오느냐?’고 체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 날 불쑥 ‘유 선생, 우리 나왔소’라며 전화가 와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아태 참사들은 민경련보다 비교적 유연하게 다양한 논의를 할 수 있었는데, 2000년 6·15선언 이후에 우리 기업들의 아태 미팅 요청이 쇄도해서 만나기 쉽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는 일단 돈이 되는 사업인지 판단한 뒤에 미팅 우선순위를 잡는 듯했습니다.
 
  아태는 대기업이 사업제안이나 방북을 요청하면 어떻게든 ‘입장료’를 받으려 했습니다. 가령 ‘현대 그룹 회장단이 평양의 정주영체육관 기공식에 참석하려 한다’고 협의를 시작하면 ‘TV 1만 대부터 거론했습니다. 남북의 무르익는 평화 분위기로 남한의 사회 단체에서 북한 방문 의사를 내비치면 ‘이번에는 TV 5000대’ ‘100만 달러’ 이렇게 요구를 합니다.”
 
 
  “순안공항 청사 지어달라”
 
  ― 통이 크다고 해야 할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죠.
 
  “북한 사람들은 돈에 대한 감각이 없었습니다. 무조건 시작은 ‘100만 달러’ 였어요. 남한에서 어떤 제안을 한다고 하면 무조건 ‘TV를 기증하면 좋겠다’ ‘어떤 대가를 생각하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LG, 삼성 TV를 선물로 주고 북한과 대화를 시작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쉽게 말해 그 TV를 보는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인데 정작 돈을 내는 것은 남한 사람들인 것이죠.
 
  이들은 선물의 규모, 사업에 투자할 자본의 규모를 가장 중요시했고, 사업 자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한국 기업들의 과열된 경쟁이 촉발한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선물을 받는 북한 측이 LG TV를 지정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저의 중요 영업 활동 중 하나였습니다.”
 
  ― 아태와는 어떤 사업을 협의했습니까.
 
  “LG그룹이 보유한 사업 포트폴리오 전체를 두고 여러 가지 협의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LG 브랜드를 북한 주민들 다수가 인지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서 익숙하고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것이었죠.”
 
  ― 구체적인 제안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LG 브랜드를 알릴 만한 온갖 계획을 다 세워봤었고 온갖 사안을 제안했죠. 몇 번 평양을 가보니 공항에 오래된 수화물 카트가 몇 개 있더라고요. 우연히 만난 브로커에게 ‘LG그룹이 평양공항에 수화물 카트를 사주겠다. 대신에 LG 로고를 부착하는 것이 가능한지 알아봐 달라’고 말했습니다. 2주일 뒤에 브로커가 북한 관리를 한 명 데리고 왔습니다. 이 북한인은 ‘유 선생이 원하는 사업을 충분히 진행할 수 있다. 순안공항 청사를 근사하게 지어만 주면 그깟 LG 로고는 원하는 만큼 도배를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 카트 증정을 제안했는데 공항을 지어달라고 했다고요.
 
  “장난치는 표정은 아니었고 매우 진지했었기에 끝까지 듣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습니다.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어쩌면 당연한 일들이었죠.”
 
  ― 또 어떤 제안을 해보셨나요.
 
  “평양에 주유소를 만들어주면 LG 로고를 붙여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한창 사업을 진행해나갔는데 기름은 어디서 어떻게 가져올 거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되물었다가 좌초된 경우도 있었는데, 주유소가 문제가 아니라 기름을 가지고 오라는 거였죠.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주유소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죠. 참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실수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자본주의 原價 개념 이해 못 해
 
  유재영씨는 2000년대 초반에 북한 사람들과 얘기를 하면서 가장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던 것이 ‘자본주의적 원가(原價) 개념’이었다고 했다.
 
  TV 임가공 경험 실무를 맡은 사람들은 TV 원가가 15만원(20인치 보급형 브라운관 TV)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우리가 한 대 손해 보면서 이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실제로 이 TV 뒷면에 붙은 ‘권장소비자가 20만원’ 스티커를 거론하며 임가공비 협상을 할 때마다 “한국 대기업들은 폭리(暴利)를 취하고 유 선생은 거짓말한다”고 화를 내곤 했다. 권장소비자가격과 실제 팔리는 가격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한다는 말인가. TV라는 한 대의 제품 안에 재료비, 인건비 등 원가 이외에 광고비, 각종 간접비용 등이 있다고 설명을 해도 잘 이해하지 못했기에 서로 언쟁도 잦았다고 한다. 그의 얘기다.
 
  “TV 원가 안에 나 같은 사람의 임금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수긍하지 못했죠. 자본주의 원가 계산이나 회계가 엉터리 돈 계산에다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 거 같아요.”
 
  그는 “사업을 5년 정도 하는 동안 끝내 이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자본주의 개념이었다”고 회고했다. 자신의 실수들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여럿 들려줬다.
 
  그는 지난 2001년 북한 사업가 조경춘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조경춘은 김정남의 후견인으로, 김정남의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계좌를 대신 개설한 인물이다. 그는 대뜸 “60인치 PDP TV를 구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60인치 TV는 LG전자가 개발 생산한 가장 큰 규격의 TV였고, 중국 선양(瀋陽)공장에서는 생산되지 않아 구미 공장에서 소량 수입해 일부 특수층에 팔고 있었다. 영업부서에 확인하니 TV의 최저가는 1만2000달러였다.
 
  조씨는 얘기를 듣고 “VIP가 VIP에게 보내는 가장 중요한 선물이니 모든 면에서 신경 써달라”는 당부를 수차례 반복했고, 2주일 뒤에 단둥에서 인도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뒤 조씨가 “여기 홍콩인데, 60인치를 7000달러에 팔고 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소리를 치며 전화를 했다. 전말을 확인해보니, 실제 양판점에서는 그 가격에 판매를 하고 있었다. LG전자의 출고가는 1만2000달러인데, 홍콩 양판점에서 5000달러의 전략 판촉비를 지급해 실제로는 7000달러만 내면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전략 판촉비 규모를 확인하지 못한 데서 온 실수였다.
 
  그가 ‘본의 아니게 북한 VIP 간의 선물에 바가지를 씌우는 격이 됐다’고 본사에 보고를 했고, 결국 60인치 LG PDP TV를 ‘1+1’로 2대 보내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2001년도 당시에 일반인들은 구경도 하기 어려웠던 ‘60인치 최고가 TV’다. ‘VIP가 VIP에게 보내는 선물’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짐작이 간다.
 
 
  SK·LG 모두 북한 내 통신망 프로젝트에 관심
 
지난 1998년 5월 25일, 한국 루슨트 테크놀로지가 공개한 무선 가입자망(WLL)을 시연하는 모습. SK는 북한 내 통신 사업권을 확보하는 데 열을 올렸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상관없음.
  유재영씨는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평양 순안공항에 나오는 이들은 늘 일정했다고 한다. 남한 사람과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전(事前) 교육을 받은 요원들이다 보니, 일정한 인력풀에 속한 이들이 순환하면서 평양에 들어오는 외국인과 한국인을 할당받아서 일정 내내 안내했다.
 
  북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회용 여권’을 받아야 하는데, 업무관계가 있는 북한 기관이나 회사에서 팩스로 초청장을 보내면, 그 초청장을 들고 베이징에 있는 북한대사관에 신청을 하면 일회용 비자가 발급이 되었다. 일회용 비자는 여권 크기의 종이 한 장인데 나중에 평양을 떠나는 출입국관리대에서 회수했기에 통상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의 여권에는 방북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TV 판매에서 사업 분야 확대를 고민하던 LG전자는 정보통신 장비를 통해 남북 교류 분야를 넓혀보고자 시도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의 남북 간 교류는 2000년 이전에도 여러 사례가 있었다. 1971년 남북적십자 간 2회선 연결을 시작으로 남북대화용, 경수로(輕水爐) 건설사업용, 금강산 관광사업용 등으로 직간접 연결돼 사용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북한 통신망에 연결되거나 북한의 정보통신 분야 인력들과 정식으로 교류가 이뤄진 적은 없었다. 2005년경 63회선 직간접 연결 선로가 있었지만, 이는 통신 엔지니어의 입장과 교류 협력 차원에서 의미가 있었을 뿐 상업적으로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상업적 접근은 SK텔레콤이 빨랐다. 구해우 상무를 중심으로 SKT동북아협력팀이 2001년부터 향후 북한에서의 이동통신사업과 관련한 MOU를 맺으면서 발빠르게 치고 나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고 말했다. 정보통신 관련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측면에서의 교류는 매우 제한적이고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재미교포 조명호의 등장
 
재미교포 사업가였던 고 조명호씨. 조씨는 북한의 고위층과 친분이 두터웠고, LG전자가 대북사업을 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사진=유재영 전무
  LG가 고민했던 사업모델은 제3자의 돈으로 사업 진행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UNDP 산하의 ‘투먼(圖們) 프로젝트(Tumen Project·두만강 유역 개발을 위한 인근 국가 간 프로젝트)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이런 사업구도를 착안하게 되었다.
 
  유씨는 “SOC와 같은 공공성을 띤 프로젝트의 경우는 월드뱅크나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을 포함한 국제기구나 인근 국가들의 전략적 예산이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았지만 당장 LG건설이 북한 내 SOC 건설과 관련된 일을 시도해볼 상황은 아니었다. 대신, LG전자가 가지고 있는 사업 중에 통신 인프라 관련 장비사업에 초점을 맞췄다”며 “특히 교환기나 전송기 등의 통신 장비들은 한 번 설치해놓으면 용량 확장이나 업그레이드, 유지·보수에서도 지속적 선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시도해봐야 하는 분야였다”고 말했다.
 
  ― 늘 그렇듯 아태와 협의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기관들과 논의하기에는 사업의 성격이 너무 전문적이었고, 실제 통신 인프라와 관련된 정책 및 기술 담당자와 직접 대화를 해도 상당 시간이 소요될 분야였기에 새로운 컨택 포인트를 찾아야 했습니다. 때마침 중국지주회사 노용악 부회장의 대학 동창으로 미국에서 내비게이션 관련 사업을 했던 조명호 사장이 나섰습니다.”
 
  ― 조명호 사장은 어떤 분입니까.
 
  “평남 출신으로 미국에서 IT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뒀는데 2001년 초 상하이(上海)를 다녀온 북한 수뇌부의 지시에 따라 노동당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IT사업 육성전략의 수립 관련 전문 용역을 의뢰받으면서 북한과 인연을 맺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이후 북한 내 교회 설립 등을 목적으로 북한 최고위층과 수차례 면담하며 자유롭게 북한을 왕래했습니다. 조 사장이 평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베이징에서 며칠씩 머물러야 했습니다.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비자를 받고, 평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정기 항로가 매주 두 번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조 사장은 저를 동석시킨 만찬에서 북한과 관련한 서로의 생각을 다양하게 교환했습니다. 조 사장이 어떤 목적으로 북한을 오가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에 대해서 신중하게 살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봐 온 그 누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정책적 수준의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계속 북한정보통신 정책부서 사람들에게 어떤 경로로 선을 대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 주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온 조 사장은 체신성 담당자들을 만났고, 희망하는 협의 내용과 일정을 주면 즉각 회신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세부적인 조율까지 끝마친 통신장비 시범사업
 
북한에 입국하기 위해서 받아야 했던 일회용 비자. 사진=유재영 전무
  북한과의 접촉경로 문제는 해결됐는데, LG그룹 본사에서는 갸우뚱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SK그룹이 북한에서의 통신 사업권 선점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는 터였다. 사업권 획득에 들어가는 돈은 크지만, 실제로 수익이 회수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되었고, 아직은 적대적 관계가 해소되지 않은 국가의 기반통신 운영사업권을 허용해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룹 내 통신운영업체인 LG텔레콤은 애당초 관심도 없었다. 대신 통신장비 관련 사업부와 연구소 인력이 충원돼 협의를 시작했다.
 
  ― 어떻게 가닥을 잡았습니까.
 
  “북한에서는 이동통신 시스템 제안을 기대하는 분위기였지만, 실제 유선 기간망도 전자식으로 전환시키지 못한 형편에 이동전화만 도입하는 것은 통신 정책이나 발전단계 차원에서 실익(實益)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대신 베트남에서의 WLL(Wireless Local Loop) 성공 사례를 검토해보자고 설득했습니다. WLL은 가정이나 사무실에 설치된 통신 단말기들을 무선(無線)으로 연결해 음성이나 데이터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인데, 유선통신망을 새롭게 설치하기 어려운 낙후된 빌딩이나 아파트에 WLL 설비를 설치, 수백 가구가 유선전화보다 더 나은 디지털통신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베트남과 같은 개발도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WLL 장비가 단말기 등의 구성을 고려할 때 시범 사업으로 진행하기에 매우 적합해 보였고 베트남의 성공사례를 확인한 북한 측은 크게 환영했습니다.”
 
  ― 어떤 방식으로 북한과 얘기했습니까.
 
  “조명호 사장이 평양에서 설명하고, 이에 설득된 고위 인사들이 산하 기관에 직접 지시해 매우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진행됐습니다. 조 사장이 통신 건을 논의했던 상대방은 전병호 전 군수(軍需)부장 및 국방위원이었는데 이 계통에서 정보통신 관련한 실권(實權)을 행사하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우리의 제안을 매우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는 견지에서 실무자급 만남을 수락했는데, 2001년 11월로 예정된 출장에 여러 IT 관련 기술진을 포함시켜 LG전자의 정보통신 기술 및 생산시설 현황에 대한 견학을 요청해왔습니다.
 
  그동안 민경련이나 아태와 같은 협의 상대 외에 베이징에서 만날 수 있는 이들은 대부분 보위부나 대외연락부 소속의 정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었죠. 이번에 북한 최고의 IT 관련 정책 인원들과 몇 주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실무자인 저에게는 실로 꿈같은 기회였습니다. 2001년 11월 20일부터 10명의 인원이 베이징, 톈진, 창사, 난징, 상하이, 광저우, 옌타이에 있는 LG전자 생산시설 일부를 방문하는 견학 일정을 마련했고, 마지막 이틀간 협력사업 관련 협의를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 결국 최종 합의는 됐나요.
 
  “네. 교환기와 WLL 시범망을 2000회선 규모로 구축하기로 합의했습니다. 2002년 2~3월에 우리가 평양 현지 실사를 해서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하기로 했습니다.”
 
 
  원자력총국과 노동당의 연락
 
  하지만 일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LG그룹이 평양의 초청장을 기다리는 사이에 한국 정부에서 제동을 걸었다. 통신 사업 진출을 준비했지만 마땅한 북한의 접촉 경로를 찾지 못했던 장비업계의 경쟁사 A사는 미국 상무성(EAR)의 수출제한 규정을 거론하며 이의를 제기했고, SK그룹은 사업 관련 계획을 북한에 제출하는 등 발빠른 행보를 보이는 와중이었는데 정보통신부(이하 정통부)가 조율을 시작한 것이다. 결국 2002년 6월 4일, 정통부 기획실장을 단장으로 컨소시엄 대표들이 방북해 협의를 했으나, 한국 컨소시엄 측의 일방적 구애에 불과하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북한이 한국 정부는 합의의 상대방이 될 수 없다고 고집하여 합의문서는 KT 담당 상무가 대표로 서명했다.
 
  이렇게 유재영씨가 조명호 사장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체신성과 연락이 닿을 즈음, 북한의 핵개발은 완성 단계였다. 희한한 낌새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있었다. 그의 얘기다.
 
  “조명호 사장은 북한의 전병호씨와 가까웠습니다. 전씨는 노동당 군수비서이자 북한 핵무기 개발의 책임자였습니다. 하루는 조 사장이 당사에서 전씨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팩스가 한 장 보이더랍니다. 내각의 누군가가 묻고, 당이 답하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북한의 원자력총국이라는 곳이 ‘IAEA 사찰과 관련해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입장’에 대해 당에 공식 질의하는 팩스였는데, 그는 옆에 있던 그것을 제록스 복사기로 복사해서 제게 보여줬습니다.”
 
  ― 그 복사본을 직접 봤나요.
 
  “직접 봤습니다. 그때는 별 의미없이 지나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북한 원자력총국이 당과 그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북한의 핵개발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정황증거가 될 만한 내용인데, 시간이 오래 지나서 기억도 희미합니다. 조 사장께 이런 위험한 일 행여 다시 하지 마시라고 당부도 했었지요. 그해 가을에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特使)가 방북했을 때 북한은 핵개발을 스스로 시인하면서 파행이 시작되던 시점이었습니다.”
 
 
  서해교전 이후 대북사업 좌초
 
지난 2005년 6월 29일, 서해교전 3주년 추모식이 열린 경기도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 추모비 앞에서 장병들이 고인들에게 묵념하고 있다. 2002년 발발한 서해교전은 남북 경협 사업에 찬물을 끼얹었다.
  어찌 됐든 한창 무르익고 있던 남북 관계는 2002년 6월 29일, 서해교전이 발발하면서 극도로 경색됐다. 서해교전으로 일이 틀어진 7월 초, 정통부는 LG전자가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던 WLL 장비 관련 사업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 정부의 조율하에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진행돼야 할 통신 관련 협력구도가 LG의 단독 진행으로 다른 모든 이해관계자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정보당국에서 LG 측을 돕던 조명호 사장에 대해 불편한 내색을 했던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고 한다. 정치권이나 고위층에 친분이 많았던 조 사장은 평소에 정보당국 실무자들의 협조 요청에 매우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정보당국과 편치 않은 사이였다.
 
  LG의 통신장비 시장 진출이 지연되고 있을 무렵, 북한 체신성에서 ‘통신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줄 수 있겠느냐’며 연락을 취해왔다. 이후 2002년 11월20일, 체신성 실무자들과 체신연구소 연구원, 김일성대 통신 관련 교원 20여 명이 4주간의 교육 프로그램 일정으로 베이징으로 출장을 나왔다. 서울에서는 13명의 전문 기술진이 이들과의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베이징으로 날아왔다. 3주 동안 일요일만 휴식하고 매일 9시간 강의를 이어가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유재영씨는 “열기가 뜨거웠다. CDMA 상용화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당시 LG전자 베이징 연구소장 이정률 부사장의 특강은 당초 2시간이 예정되었는데 저녁 늦게까지 이어질 정도였다”고 말했다.
 
  당시 산둥성 옌타이(燃台)에 있는 LG전자의 CDMA 단말기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었는데, 방문단 중 김일성대 교수였던 한 사람이 공장 견학을 하면서 단말기판을 몇 개 숨겨 나왔다 공항 검색에서 발견되어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유재영씨의 얘기에 따르면 이때 이정률 박사가 ‘우리도 80년대에 일본 기업 견학 갔을 때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기술자들의 기술에 대한 열정으로 이해하고 잘 무마하자’고 해 소동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서해교전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의 대북 창구는 열려 있던 셈이다.
 
  하지만 북한은 한국 기업의 움직임이 중단되자, 태국업체 록슬리가 중흥통신(ZTE)의 구식 GSM 장비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도록 허가했다. 평양 고려호텔 인근을 중심으로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이는 북한과 우리의 통신사업이 물 건너갔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그는 “통신 관련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쉽다”고 말했다.
 
 
  北, 정통부 끼어들자 거부감
 
  “서해교전이라는 북측의 도발, 미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도 있었지만 관련 업계와 정부 부처의 손발이 제대로 안 맞았던 것도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통신 사업과 관련해 북한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은 사업권을 획득하는 것, 사업에 필요한 장비를 공급하는 것 두 가지였는데, 북한 내 통신 운영사업권 획득에만 지나치게 치중했다고 봅니다. 또 이를 정부가 앞장서서 주도하려는 의욕과잉도 아쉬운 부분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 왜 그렇습니까.
 
  “어느 나라든 자국의 기반통신사업의 운영권을 외국, 그것도 적대적으로 대치하는 국가에 허용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북한은 자주(自主)·자강(自彊)이라는 명분에 집착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모두 자기 회사와 자기 부처의 성과에만 급급해서 일이 꼬였습니다.”
 
  ― 정통부의 주도적 중재가 있지 않았습니까.
 
  “주무부서의 개입·중재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개입과 중재 방식, 그 의도 등에서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 당시 관련자들의 일치된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민간업체들을 앞세우고 정부는 2선에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후원하고, 조정 역할을 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2002년에 우리가 북한의 체신성 대표들과 미팅을 시도할 때마다 정통부 관계자들이 함께 참석하게 해달라고 강하게 요청해왔었습니다. 하지만 정통부 관계자들이 동석하는 바람에 북한 측이 강하게 거부감을 표시해서 실무 협의가 헛돈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LG전자는 남한 정부의 대리인으로 사업을 추진했구나. 이제 본모습을 드러내느냐?’는 험한 말이 오갔습니다.”
 
  ― 정통부를 배제할 수는 없었나요.
 
  “정권 차원의 대북협력 드라이브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부처의 공무원들이 남북관계에서 일정 역할을 맡고 싶어 했습니다. 조직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상업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에서 한국 기업과 만나서 일정한 성과를 얻어오겠다는 명분으로 평양에서 어렵게 나온 북한 측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접근법이었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미팅 장소에서 상대 측 정부의 고위 당국자들을 만나는 순간 그 미팅은 순식간에 정치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출장자들을 움츠리게 합니다.”
 
 
  LG, 노무현 측과 김정일 특사 연결시켜줘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7년 10월 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해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모습. 김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때에도 대북 핫라인을 놓지 않고 싶어 했다.
  북한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2002년 하반기에 급변하기 시작한다. 2002년 10월 말, 김정일은 북한의 핵개발과 관련한 우려를 전하려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에게 직접 핵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이후 2002년 12월 12일, 미국은 북한에 제공하던 중유(重油) 공급을 중단하고, 북한의 핵동결 해제 선언이 나온다. 2003년 1월에 북한은 NPT 탈퇴를 재선언하게 된다.
 
  그즈음 우리나라도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정권이 이양된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북 관련 접촉경로를 전임(前任)인 DJ 정부가 아닌 국내 대기업의 손을 빌리고자 했다. 당시 국정원장으로 거론됐던 라종일씨를 김정일의 특사와 연결시킨 것은 국정원이 아닌 LG전자였다. 그의 얘기다.
 
  “DJ 정부의 대북 관련 핵심인물들은 퇴임 후에도 통일정책 등에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북한과의 교류에 물꼬를 튼 것이 가장 큰 업적이었던 전 정권의 대북정책 입안자들은 노무현 당선자 측에 당시 정권의 대북라인을 완전히 넘기지 않고 공유하자는 의중을 비쳤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당선자 측에서는 ‘우리가 알아서 하자’는 생각으로 제3의 라인을 모색한 끝에 베이징에 나와 있던 국내 기업들의 핫라인을 활용해보자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 당시 느꼈던 새 정부의 대북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당시 라종일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점은 새로 출범하는 정부가 매우 실용적이고 균형잡힌 기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기대가 컸었습니다.”
 
  ―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 북한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북한은 유력 대권 주자였던 이회창 후보 대신에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것에 대해서는 안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핵개발과 관련해 국제사회와 충돌하면서 매우 어수선한 시기가 지속됐습니다. 이때 저는 북한 관련 업무는 손에서 놓은 채 중국 사업에서 맡겨진 경영관리 업무에 집중하던 때였습니다.”
 
 
  북한 주민용 한글 GSM 휴대폰 만들어
 
LG 북한용 휴대폰. 한글자판과 운용시스템이 설치된 유일한 GSM폰이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에 북한 대사관 뒷길을 지나던 길이었다고 한다. 마당 한쪽에 쌓여 있는 박스들이 유 전무의 눈에 들어왔다. 가전제품이나 의류가 아닐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이동전화 단말기였다. 당시 중국산 GSM 폰은 영문과 한자만 구현할 수 있었는데, 북한이 중국의 이 단말기를 가져가는 듯 보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CDMA 체제를 쓰고 있었기에 GSM 폰에서 한글이 구현되지 않았다. 한국의 연구소 담당자들에게 ‘혹시 GSM 폰에 한글을 적용시킬 수 있을까’를 물었는데 “가능은 한데 대체 왜?”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쩌면 북한 사람들이 ‘GSM 한글폰’을 쓸 길이 열리는 셈이었다.
 
  때마침 베이징에는 조선체신회사 사장 황철풍이 출장 나와 있었다. 황씨는 유씨의 얘기를 듣더니 “한글로 된 GSM 폰이 존재하느냐? 있기만 하다면 대히트다”며 반색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GSM 휴대폰을 쓰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북한 맞춤용’ GSM 폰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얼마 뒤 샘플 작업을 완료해 황 사장 일행을 베이징으로 불렀다. 긍정적인 반응은 역시 나오지 않았다.
 
  “이건 남쪽에서 쓰는 한글이지 우리식 조선글이 아니잖소!”
 
  황 사장이 불만을 표시했다. 한글로 바꾸면 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 쓰는 한글과 북한의 한글은 글자 모양만 같았을 뿐 사용하는 단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두어 차례 수정을 거쳐 2003년 가을에 완벽한 북한판 GSM 폰이 나왔다. 하지만 대금 회수 등 여러 문제가 꼬이는 바람에 LG산(産) GSM 한글폰은 불과 500대만 판매하고 끝났다. 세상에서 유일한 한글로 된 GSM 폰에 대한 소문만 무성했는데 처음으로 알려진 이야기다.
 
 
  “北, 한국을 한 수 아래로 여겨”
 
  5년 동안 베이징에서 대북사업을 주도했던 그는 2005년에 후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돌아와서 다른 회사로 옮겼다고 한다. 그가 경험한 북한은 이렇다.
 
  “북한은 일반적 기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매우 특수한 체제인 만큼 북한과의 비즈니스는 예상과 상식을 깨는 당혹스러운 상황들이 늘 발생했습니다.
 
  우선 당시 북한은 한국을 정식 교류의 상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한 수 아래의 정치 체제로, 미국의 관여와 개입만 없다면 바로 복속(服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 내부의 역학 관계나 필요성 때문에 자신들과의 교류와 협력에 매달린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백분 활용하려는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공화국과 거래하는 것 자체가 당신들에게는 영광’이라는 생각을 하는 상대와 대가(代價) 교환을 전제로 한 공정한 거래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또 경화(硬貨)가 없는 그들로서는 정상적인 교환거래 자체가 원천적으로 어려웠을 겁니다.”
 
  ―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합니까.
 
  “북한과의 거래에서 그 어떤 경우라도 신용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 사업을 개척했던 1세대 선배들로부터 반복해서 들었던 1번 교훈이었습니다.
 
  개별 사업에 들어가보면 금액이 크지 않을 경우, 또 단기간 외상을 해달라는 경우, 상대의 사정이 딱해 보이는 경우 등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인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특히 상대방이 우리와 계속 봐야 할 키맨인 경우에는 더욱 판단을 흐리는 경우가 있는데, 하지만 온정적 판단으로 기존의 모든 관계가 다 틀어져 버린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또 현금으로만 거래하고자 한다면 북한이 지불자가 되는 정상적인 구도는 불가능하고, 제3의 지불자가 있는 사업으로 구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언제나 북한은 한국의 기업이나 단체, 정치권이 접촉을 요구하거나 신청할 경우에 수수료, 입장료 같은 대가를 요구했다는 점과 기꺼이 그 돈을 지원하는 측도 존재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이번에 인터뷰를 한 이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경협 사업은 재개되고 지속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 최근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던 거처럼 현재의 지도체제에 변화가 생기면, 그 어느 누가 집권을 하건 관계없이, 남북 경협 사업은 재개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현행 집권 구조에 큰 변화가 없다는 전제에서도 경제 교류 측면에서 조그만 개방의 움직임이라도 보인다면 우선 북한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제조업에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개성공단과 같은 시도를 반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개성공단의 한계와 문제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경쟁력을 잃은 기업들이 경협 지원금을 탐내며 뛰어드는 것은 우리 측의 현실적 문제이고, 더욱 근본적인 것은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노무자들과의 직접 접촉이 가능하고 그들에게 확실한 인센티브를 포함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부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근로자들은 블랙박스 속 노동기계에 불과한 셈인데 그렇게 해서는 경쟁력이라는 게 발생할 수가 없고, 기업과 사업 자체가 한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충분히 시행착오를 했으니 이제 좀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남북 경협에서 시행 착오는 단순히 체제와 환경 탓으로 변명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 만약에 북한 체제에 급변 사태가 온다면 어떨까요.
 
  “여러 가지 혼란이 야기될 수 있지만 어떤 체제로 대체된다고 해도 현재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던 경제적 차원의 대외개방이 급속히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사업은 SOC를 확충할 토목, 건설업이 될 겁니다. 또 발전소를 비롯한 전력과 에너지 인프라, 물류나 유통 등과 같이 물리적 선점이 필요한 산업이 필수적이 될 겁니다.”
 
 
  “기본교육부터 先行해야”
 

  ― 북한 경제의 문이 열리면 한국 기업에 똑 같은 기회가 될까요.
 
  “그럴 겁니다. 현재의 체제가 계속된다면 과거 제가 북한을 다니던 시절처럼 노동당 간부들이나 북한 정부의 테크노크라트들과의 관계가 중요하겠죠. 하지만 현행 체제에서 본격적 경협은 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북한 사람과의 개별적 인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20년 전에는 북한 사람을 아는 것이 대북사업가로서의 가장 큰 자산인 양 여겨졌지만요.
 
  이제는 사업 본연의 경쟁력을 먼저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업들은 북한에 진출해 자본주의 혹은 기업의 운영원리에 대한 기본교육을 선행(先行)하는 방법도 고려해봐야 합니다. 예전에 어느 회계법인 회장께서 북한에 회계를 비롯한 자본주의 공부를 시키자는 말씀을 하시며 모임을 만들었던 사례가 있었는데, 현실성과는 별개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주장이었습니다.”
 
  ― 기업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은 북한 경제, 시장으로서 혹은 생산기지로서의 북한에 대한 공부에 집중하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복잡하고 이질적인 체제나 사회시스템에 대한 학습은 일단 놔두고서라도 북한 각 지역의 특성과 명칭, 그리고 지리적 의미와 산업적 특성 등에 대해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 차원의 연구를 해본다면 북한 경제의 문이 열리는 순간 남보다 반발 앞서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업은 돈이 되지 않는 사업은 안 해”
 
  ― 정부의 역할을 어디까지라고 생각합니까.
 
  “심시티(SimCity) 같은 비즈니스 게임의 북한판을 개발하여 기업들이 북한 지역을 대상으로 다양한 사업계획 시뮬레이션을 해볼 수 있도록 하면 그 과정에서 지역에 대한 이해도 풍부하게 하면서 북한 지역에 대한 현실적 투자수요와 관심을 유발하는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런 사소하지만 실질적 기반부터 마련하고, 적극적 후원자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정부가 전면에 나서면 북한과의 상업적 차원의 관계 형성이 처음부터 어려워지고 모든 것이 정치·정책적 차원으로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당국 간 협상에서 사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적 보장을 확보하는 것에 자제해야 하고, 미국 등 국제사회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겠죠. 사업별로 과열을 방지하거나 적절한 속도 조절을 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기업들이 자신들의 능력에 맞게 시행 착오를 하면서 적응해나가도록 둬야 합니다. 정부가 아무리 드라이브를 걸어도 기업들은 실제로 돈이 되지 않는 사업은 하지 않습니다. 너무 드러내놓고 압박한다면 과거 북한 파트너들은 그 점을 잊지 않고 이용하려 했었다는 점도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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