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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어선 삼척항 진입으로 본 해안 경계 및 조사 실태

“내려와서 조금 기다려야”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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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들이 나오지 않아 배를 백사장에 대고 소리쳤다”
⊙ 합동 조사과정서 막말과 협박 난무 “다시 북으로 돌려보낸다”
⊙ 선원들 바로 돌려보내면 北 대남공작의 문 열어주는 것
⊙ NLL 넘어와 연평도서 노크 귀순… 마을 이곳저곳 둘러보기도
강원도 삼척에 도착한 북한 어민들이 경찰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저기요~ 거기 사람 없어요?”
 
  2000년대 중반 탈북한 김민철(가명)씨는 동해 한 해안가에서 군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북한을 떠난 지 이틀째. 북한 경비정을 피해 인근 무인도에서 숨어 있다 도착한 곳은 강원도의 한 백사장이었다. 김씨가 백사장에 도착하기까지 북한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군도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일명 ‘해상 노크 귀순’이다.
 
  지난 6월 15일 해상 노크 귀순 사태가 또 벌어졌다. 이날 오전 6시50분경 강원 삼척시 삼척항 인근 해역에서 조업하던 한국 어선이 표류 중인 북한 어선 한 척을 발견해 관계 당국에 신고했다. 남성 4명이 작은 목선을 이용해 북한을 나와 남한의 삼척항까지 내려왔다. 이들이 삼척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 군은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또한 군(軍) 당국은 애초 이들을 삼척항 인근에서 발견한 것으로 발표했다.
 
 
  해상 노크 귀순 어제오늘 일 아니다
 
지난 6월 15일 강원도 삼척항에 도착한 북한 목선의 이동 경로다 사진=뉴시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목격한 현지 주민의 증언과 촬영사진 등이 속속 공개되면서 군의 발표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북한 주민들이 탄 어선은 항구로 유유히 진입해서 부두 방파제에 정박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지 주민이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사진에서도 방파제에 접안한 북한 목선에 탄 4명의 북한 주민은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지만, 군이나 경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북한 주민 중 일부는 “휴대전화를 빌려달라, 서울에 있는 친척에게 전화하겠다”고 우리 주민에게 요구하거나, 육지로 올라와 서성거린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주민의 신고를 받고 나서야 경찰차와 군 병력이 출동해 부랴부랴 현장통제에 나섰다. 이에 보수 야당과 시민은 비무장 북한 주민들이 탄 소형 목선에 뻥 뚫린 해상·해안 경계 실태에 대해 철저한 조사와 보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노크 귀순’은 2012년 10월 북한군 병사 1명이 DMZ 철책을 넘어 22사단 GOP 부대 생활관까지 찾아와 노크한 사건이다. 당시 군 당국의 소홀한 경계근무가 드러나 국민의 공분을 산 바 있다. 지난 6월 삼척항 북한 목선 입항사건 이후 유인 목선이 또다시 강원도에서 발견됐다.
 
  무인 목선은 올해만 벌써 12척(동해 10척, 서해 2척)이나 발견됐다. 북한에서 떠밀려 내려온 목선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군 관계자는 “기존에도 무인 목선은 자주 떠내려왔고, 목선을 이용해 탈북민도 내려왔다. 최근에는 원하지 않으면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온 것을 모르는 것”이라며, 하지만 “이번 목선 사건이 발생하면서 경계병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고, 무인 목선까지 거둬들여 지난번의 치욕을 만회해보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삼척항 입항 목선 ‘간첩선’ 가능성 제기… 국정원 “아니다” 해명
 
  북한 목선이 삼척항에 입항한 지 3개월이 지났다. 당시에는 선원들에 대한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원 네 명 중 두 명은 남한에 남았고, 나머지 두 명은 북한으로 돌아갔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해 이들이 간첩 임무를 받고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국정원은 이를 반박했다. 국정원은 “몸집이나 체격, 어깨 근육의 발달 상태 등을 볼 때 낡은 전투복 상의를 입고 온 고령의 선원은 전투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대공 용의점이 없다고 판단했다. 국정원은 또 ‘목선’의 성능이 ‘간첩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를 댔다. 국정원의 설명이다.
 
  “간첩이 활동하려면, 적발 즉시 도망가야 하기 때문에 통상 300마력 이상의 엔진이 2개 이상 필요하다. 그런데 이 선박은 28마력짜리 엔진이 1개 설치돼 경운기 수준이다. 도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간첩 활동을 할 수 없는 배라는 뜻이다.”
 
  당시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침투하는 간첩은 두 부류다. 첫 번째가 국정원의 설명대로 잘 훈련된 요원들이다. 2010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를 죽이기 위해 보낸 암살조가 대표적이다. 군 정찰국 공작원인 동갑내기 김명호, 동명관은 최정예 엘리트 공작원이었다. 군 정찰국은 요인 암살, 테러를 담당하는 곳이다. 두 사람이 군 정찰국 공작원으로 선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7년 전인 1992년 9월이었다. 현재 두 사람이 45세 정도 됐으니 10대 후반 때부터 ‘인간병기’로 키워진 것이다.
 
  1995년 충남 부여에서 군경과 총격전 끝에 체포된 전직 무장공작원 김동식(가명)도 같은 사례다. 김씨는 1990년 5월과 1995년 8월, 두 번 남파됐다. 처음 남파됐을 때 그는 당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총책이었던 황인오와 대남공작을 총지휘하고 있던 남파공작원 이선실을 대동해 월북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공로로 공화국영웅 칭호도 받았다. 남한에 지하당조직(고정간첩망)을 구축해 혁명 기지를 만드는 것은 당시의 또 다른 남파 목적이었다. 이후 남파는 국내 운동권 인사 접촉 등을 통한 지하망 구축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남파공작원을 전문으로 양성하는 북한 ‘130 연락소’ 출신인 김동식씨는 여전히 젓가락을 던져 나무로 된 과녁을 정확히 뚫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두 번째는 일반인이다. 《월간조선》 최우석 기자는 2013년 김정은 지령을 받고 남한에 직파된 북한 공작원을 직접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함북 무산군 무산광산연합기업소에서 용해공으로 일하는 일반인이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총 세 차례(1998, 2000, 2001) 중국으로 탈북을 시도했지만, 그 족족 공안에 적발돼 북한으로 강제 이송당했다. 마지막 탈북 실패 후인 2002년 8월, 함북 온성군 보위부 구류장에 수용돼 조사를 받던 그에게 보위부 해외반탐처는 “보위부 공작원이 되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공작원 수칙을 배웠다. 휴대전화는 받는 데에만 사용하고, 보위부는 ‘큰 집’, 본인은 ‘소무’, 영사관은 ‘작은 집’ 등의 암호로 호칭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내용이 다였다. 중국에서 간첩활동을 하던 그는 작전을 위해 남한으로 왔다가 체포됐다.
 
 
  北 ‘고난의 행군’ 이후 늘어난 해상 탈북
 
  1990년대 후반부터 탈북민이 늘어나면서 육지가 아닌 해상으로 오는 사람 또한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 나온 기사를 토대로 해상으로 탈북한 사람들의 빈도를 살펴보면 한 해 1~2회 정도 해상을 이용해 탈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든 사람이 해상 노크 귀순을 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자가 만나본 대부분의 사람은 “대한민국 해군과 해양경찰의 눈에 띄지 않고 연평도나 강원도 등 대한민국에 배를 정박했다”고 증언했다.
 
  앞서 말한 김민철씨는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에 오기까지 48시간이 걸렸다. 낮에는 북한 경비정의 눈을 피해 도망 다녔다. 그러다 인근 무인도서 하룻밤을 자고 대한민국 강원도의 한 백사장까지 오게 됐다”며 “이 과정에서 다행히 북한 경비정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남한 경비정도 우리를 막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와 비슷한 시기에 서해를 통해 탈북한 최영선(가명)씨는 NLL(북방한계선)을 넘어 연평도까지 들어가는 데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뭍까지 들어왔다. 최씨의 말이다.
 
  “북한에서 연평도까지 오는데 북한 경비정을 피해 오다 보니 36시간 정도 걸렸다. NLL 넘어서부터는 전속력으로 연평도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를 대고 뭍으로 올라가서 20여 분 기다리니 순찰하는 군인 2명이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놀라며 총부리를 겨누면서 ‘손 들고 어디서 왔는지 밝히라’고 했다. 우리가 ‘북한에서 왔다’고 하자, 그들은 부대에 연락을 취했다. 조금 있으니 바다에서 오고, 하늘에서 헬기가 내려오고, 육지에서 군인들이 달려나왔다.”
 
  2000년대 중반에 NLL을 통해 연평도에 도착한 남녀 2명은 뭍으로 올라와 이곳저곳 구경까지 했다.
 
 
  4명 중 북으로 돌아간 2명 강압적 조사 의혹 제기
 
  지난 6월 15일 강원도 삼척항에 들어온 북한 목선 선원 4명 중 2명은 6월 18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선원 2명은 귀순 의사를 밝혔다. 이를 두고 설왕설래(說往說來)가 많았다. 일각에선 북으로 돌아간 2명은 간첩이라고까지 했다. 해당 어선이 기관 고장으로 인해 파도에 떠밀려 남한 삼척까지 흘러들어 왔고, 이로 인해 2명은 귀순 의사에 따라 남한에 남고 나머지 2명은 북으로 돌아갔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당시 삼척항 인근 CCTV(폐쇄회로)를 보면 해당 목선은 기관 고장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삼척항에 입항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2006년 서해를 통해 해상 탈북한 박명호씨는 “4명 중 2명은 자유 의사로 북한으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이에 대해 의심이 든다. 헌법 3조에 보면 그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수십 년 동안 북한에 억류됐다가 풀려났는데, 그들이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게 충분한 시간을 줘야 했다”면서 “하지만 북한의 눈치만 보는 정부는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이틀 만에 북으로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박명호씨는 2006년 5월 황해남도 옹진군에서 목선을 타고 인천 옹진군으로 가족과 함께 탈북했다. 최근 북으로 송환된 2명은 애초 탈북을 결심하고 남한으로 왔지만, 조사과정에서 암묵적인 협박이나 강압적 조사에 못 이겨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민철씨는 “나도 당시 모 군부대 지하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갖은 협박과 욕설까지 들었다. 그때 조사관이 제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을 다시 판문점을 통해서 북한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며 “당시 같이 온 일행이 이런 협박과 강압적인 조사에 반발해 단식투쟁을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탈북을 준비하면서 4명 중 2명만 몰래 온다는 것은 조금 이해되지 않는다. 특히 기관이 고장 난 것도 아니고, 삼척항에 들어올 당시 옷이 깨끗한 것을 보면 모두 준비하고 왔을 수 있다. 그런데 조사과정에서 암묵적인 협박으로 2명은 돌아가겠다 마음먹었을 것이다.”
 
  군 당국이 발표한 목선의 행적표를 봐도 알 수 있다. 북한 목선은 지난 6월 9일 함경북도를 출항해서 10일 동해 NLL 북방 어선군에 합류하고, 11일과 12일에 위장 조업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12일 오후 9시경 NLL을 남하한 후 13일 오전 6시경 울릉도 동북방 약 30노티컬마일(약 54km) 해상에 도착했다. 엔진을 정지하고 기다리다 오후 8시께 기상악화로 표류했다. 이후 특정할 수 없는 시각에 최단거리 육지를 목표로 항해를 시작했다. 14일 오후 9시께 삼척 동방 2~3노티컬마일(1.8~3.6km)에서 엔진 정지 상태로 대기한 후, 15일 일출 이후 삼척항으로 다시 출발해 이날 오전 6시20분경 삼척항 방파제 부두 끝 부분에 접안했다. 당시 이 목선은 2.8마력 엔진으로 기동해 부두에 댔다. 조사관들의 욕설과 강압적인 언행으로 남한에 내려온 것을 후회한 적이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다음은 최영선씨의 말이다.
 
  “탈북 후 연평도에서 군함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배에서 남한 장교 한 사람과 얘기를 나눴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인천의 한 부두에 도착해 차를 타고 가는 도중 높은 계급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에게 거만한 말투로 이것저것 물어봤다. 내가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답을 못 하자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차를 세우고 우리를 내리라고 하면서 위협했다. 그때 진짜 ‘내가 남한으로 왜 왔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선원들을 제대된 조사 없이 북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대해 북한 당국으로 하여금 주민 통제에 이용하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만약 남한이 해상으로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을 무작정 돌려보낼 경우 북한 주민들의 인식은 부정적일 것이다. 박명호씨는 “대한민국은 북한 주민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북한 내부 사람들을 지킬 순 없지만, 밖으로 나온 사람들만이라도 잘 보호하고 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야 한다. 무작정 돌려보내면 남한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것”이라고 말했다.
 
 
  北 목선 대남공작용 루트 사용 가능성도
 
  일각에선 선원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 이틀 만에 북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북한 간첩들로 하여금 남한 침투 연습을 하게 하는 좋은 길이라는 주장도 있다. 과거 북한 대남공작 부서들은 남파 간첩을 반(半)잠수정에 태워 보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잠수정을 이용해 내려오는 사례는 거의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박명호씨는 “자꾸 이런 식으로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돌려보내게 되면 북한 대남공작 부서에서는 이 통로를 간첩을 파견하는 데 이용할 것이며, 훈련용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국정원 대북실장을 지낸 김정봉 유원대 석좌교수는 “처음 4명을 모두 돌려보내려고 했다가 2명이 완강히 거절하자 2명만 보낸 것으로 보인다. ‘너는 용의점이 없는 것으로 보도 나갈 테니까 돌아가도 될 것’이라고 설득했을 것”이라며 “이들이 우리 지방합동심문조의 심문은 통과할지 몰라도 북한의 심문은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인권 문제고 정치범 수용소에 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돌려보낸 2명도 그렇다. 보통 심문하게 되면 중앙합동심문조가 내려가 심문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이번엔 지방합동심문조가 2시간가량 간첩인지 아닌지를 물어보고 끝낸 식”이라며 “제대로 심문하면 7일이 넘게 걸린다. 이 사람이 거짓말하고 있는지 아닌지와 어떤 목적으로 내려왔는지를 자세히 파악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정봉 교수는 “이런 식으로 조사가 진행되면 앞으로 북한의 대남공작선을 잡아도 무의미해진다. 간첩들이 국내 고정간첩과 접선이나 장비를 전달하기 위해 내려오면 목선을 타고 올 것이다. 오다가 걸리면 장비를 버리고 조난당한 것처럼 우리를 속일 것이다. 이에 대비해서 중앙합동심문조가 심문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덧붙였다.
 
 
  南으로 내려왔다 北으로 돌아간 사람들 어떻게 살고 있나
 
2015년 7월 동해에서 표류하다 우리 해경에 구조된 북한 어민이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돌아가고 있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앞선 사례들처럼 표류되거나 파도에 휩쓸려 남한으로 떠밀려 내려와 귀순 의사를 밝히는 경우도 있지만, 북한으로 돌아간 경우도 적지 않다. 대부분 북으로 돌아간 이유는 비슷할 것이다. 자신이 귀순하면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이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럼 북한으로 송환된 이들의 삶은 어떤가. 대부분 죽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1994년 북한군 두 명이 서해에서 배를 타고 표류하다 우리 군에 의해 구조됐다. 이들은 곧 북한으로 송환됐다. 북한 당국은 이들을 영웅이라고 부르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유는 남한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방송에 나와 “남한군에 의해 나포됐다가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좋은 장소와 음식 등을 권하면서 귀순하라고 유혹까지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장군님(김정일) 품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남한 군인들의 유혹에 맞서 싸워 승리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 당국은 이후 이들에 대한 영화까지 만들어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4~5년이 흐르고 북한에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두 병사가 원인 모를 병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소문이었다. 원인은 ‘두 병사가 남한에 머무를 당시 남조선 괴뢰들이 이들이 먹는 음식에 독을 넣어 원인도 모르게 서서히 죽어가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실제 두 병사는 그 이후 방송이나 선전물 등에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이후에도 군인들은 아니지만 흡사한 사건들에 대한 얘기가 종종 들리긴 했다.
 
  반면 파도에 떠밀려 남한으로 내려왔다 북으로 송환된 사람 중에는 정치범 수용소에 간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말실수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2000년대 초반 서해에서 표류하여 남한으로 왔다 북으로 돌아간 사람 중에 하룻밤 사이에 일가족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사례도 있다. 황해북도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살다 탈북한 김명지(가명)씨 마을에도 표류하여 남한에 내려왔다 돌아간 이후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이 있었다. 김씨의 증언이다.
 
  “어느 날 그 집 남편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마을은 난리가 났었다. 국가보위부(남한 국정원 격)에서 나오고 당에서 내려오고 정말 큰일 난 것 같았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됐던 그 사람이 방송에 나왔다. 파도에 떠밀려 남한으로 갔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그 사람은 다시 집에 돌아왔지만 1년 후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유는 남한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발설했다는 죄로 잡혀간 것이다. 이후 그 가족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익명을 요구한 고위 탈북자는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이런 사건들이 종종 있었다. 표류가 됐든 떠밀려 내려갔든 이들이 한번 북한을 떠나 남한에 갔다 온 이상 그들은 더 이상 북한에서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이유는 이랬다.
 
  “예전에 남한으로 내려갔다 올라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 남한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자 북한 당국은 이를 잡아들였다. 그때 나도 만나봤는데 그 사람이 하는 얘기가 ‘자려고 누우면 눈앞에 남한에서 생활하던 모습과 거리 풍경들이 떠올라서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당시에는 그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 충분히 알 수 없었다.
 
  북한 당국이 이런 사람들을 살려둘 수 있겠나. 절대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한번 맛본 자본주의 물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한번 자유를 맛보면 절대 잊을 수 없다.”
 
  이처럼 남한으로 내려왔다 송환된 사람들의 삶은 비참했다. 이들 중 열의 아홉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쓸쓸히 죽어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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