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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출신 《월간조선》 정광성 기자의 체험기(마지막회)

남한에 와서 자살까지 생각한 까닭은?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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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만에 만난 아버지… 어색했던 4시간
⊙ 탈북보다 힘들었던 남한 고등학교 정착과정
⊙ 0점 처리된 남한에서 본 나의 첫 시험
⊙ 고향은 부끄러운 곳이 아니다
북한의 한 소학교(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에서 국어 수업을 받고 있다. 사진=인터넷 캡처
  2019년 국내에 정착한 탈북 청소년은 300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은 탈북 과정에서의 ‘교육공백’과 ‘서로 다른 남북 교육제도’ ‘문화적 차이에 따른 적응’ 등의 문제로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북하나재단에서 실시한 ‘2016 탈북 청소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탈북 청소년 857명 중 학교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으로 ‘학교 수업 따라가기’를 호소한 청소년이 전체의 48.5%인 415명에 달했다. 이 밖에 ‘친구관계(8.1%)’ ‘문화·언어적응(7.6%)’ ‘교사들과의 관계(2.2%)’ 순으로 나타났다.
 
  탈북 청소년 중 상당수는 1990년대부터 지속된 경제난으로 북한에서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이로 인해 북한에서 기초학습능력을 쌓지 못한 탈북 청소년들은 남한 학교의 수업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청소년들이 공부하기 힘들어하는 부분은 주로 영어와 수학이지만, 국어도 읽는 속도가 느리거나 이해력이 부족한 경우가 적지 않다.
 
  탈북 청소년의 기초학습능력 부족은 학업 중도 포기로 이어진다. 특히 수업 내용이 어려워지는 상급학교로 갈수록 중도 포기 가능성이 커진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2016년 발간한 〈북한이탈주민 보호 및 정착지원 사업 평가〉 보고서에서 “탈북 청소년 초등학교 학업중단율은 0.2%, 중학교는 2.9%지만, 고등학교는 7.3%로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학업중단율이 높다”며 “2015년 기준 탈북 청소년의 학업중단율은 2.2%로 일반 학생 학업중단율(0.8%)보다 2.7배 정도 높다”고 지적했다.
 
 
  남한에서 다시 태어나다
 
  통일부에 따르면, 1990년대부터 2006년까지 국내에 입국한 북한 출신 청소년은 2809명이다. 나도 이 중 한 명이다. 나는 2006년 8월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이후 국정원, 군, 경찰 등 관계기관 합동신문을 마치고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으로 이관됐다. 나는 하나원에서 한 달간 교육을 받고 퇴소했다. 원래 하나원 교육은 3개월이다. 그러나 남한에 가족이 있는 경우 조기(早期) 퇴소가 가능하다.
 
  하나원에서는 연령별로 다양한 교육을 한다. 당시 나는 18세 청소년이었다. 청소년들은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초등학생은 인근 일반 초등학교에서 위탁 교육을 받고, 중·고등학생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위치한 한겨레중고등학교에서 수업했다. 한겨레중고등학교는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로, 제대로 된 건물 없이 컨테이너를 개조한 교실에서 20~30명이 공부했다. 지금은 학생수 100명이 넘는 사립학교다.
 
  우리는 오후 수업까지 마치면 버스를 타고 하나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방과 후에는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런 생활이 주중에는 매일 반복됐다. 남한 사회에서 자주 하는 게임과 문화 콘텐츠들을 경험했다. 주말이면 운동장에서 축구도 하고, 꽃동네에 봉사활동도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원 생활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물론 사회 적응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남한 사회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더 컸다.
 
  청소년반에는 15세부터 20세까지 여러 연령대 학생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 갈 곳이 달랐다. 꿈도 달랐다. 19~20세 학생들은 대학교 입학을 준비했고, 나머지 친구들은 자신의 나이에 맞는 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물론 진학 대신 일하려는 친구들도 있었다.
 
 
  2년간 헤어졌던 가족의 재회… 눈물의 저녁 밥상
 
  행복하던 날도 잠시, 한 달이라는 시간은 금방 흘렀다. 나는 2006년 10월 4일 하나원을 나왔다. 이날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왔다.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대구에 사셨다. 아버지와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분명 보고 싶고, 하루빨리 만나고 싶었던 아버지였지만 어색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 차를 타고 하나원을 나섰다. 차가 출발하자 아버지는 그동안 겪은 일들을 물었다.
 
  아버지: “오는 동안 힘들지 않았니?”
 
  나: “네, 안 힘들었습니다.”
 
  아버지: “북에 있는 다른 가족들은 잘 지내니?”
 
  나: “네, 다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후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았다. 주로 아버지가 묻고 나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어색해서였다.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아버지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운전에 집중했다. 나는 창밖에 펼쳐진 풍경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처음 남한에 도착해 인천국제공항에서 서울까지 오면서 ‘남한엔 참 차가 많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두 시간을 달렸을까?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다른 길로 들어섰다. 휴게소였다. 그때까지 고속도로 중간에 휴게소가 있는지 몰랐다. 휴게소에는 쉬어 가려고 잠시 들른 차들이 많았다. 아버지와 나는 화장실에 들른 후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메뉴판을 가리키며 무엇을 먹을지 말해보라고 했다. 다양한 음식이 있었다.
 
  나는 ‘육개장’을 선택했다. 당시 나는 육개장을 잘 몰랐다. 음식 이름에 ‘개’ 자가 들어 있어 단순히 우리가 아는 개 고기로 만든 음식인 줄 알았다. 남한에선 개를 애완용으로 많이 키우고 반려동물로 애지중지한다. 그러다 보니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북한에선 개를 식용으로 키우는 집이 많다. 나도 남한에 오기 전까지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 그래서 육개장에는 개고기가 들어 있는 줄 알고 시켰다. 물론 육개장에는 개고기가 아닌 쇠고기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밥을 먹고서 다시 집을 향해 출발했다. 이후에도 별로 말이 없었다. 물론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면 많은 대화를 한다. 그때 나는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잠을 청했다. 우리는 흔히 운전자 옆에서 잠을 자면 매너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땐 몰랐다. 두 시간가량 잤을까?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한 아파트에 와 있었다. 우리 집이었다. 우리는 짐을 들고 아파트로 올라갔다.
 
  대한민국이 아버지에게 내준 임대아파트였다. 남한에 내가 살 집이 있다는 데 놀랐고, 기분이 이상했다. 짐을 풀고 조금 쉬다가 인근에 사는 아버지 지인 집으로 갔다.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집으로 왔다. 씻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정말 TV에서만 보던 남한에 와 있었다. 그것도 가족과 함께였다. 그날 밤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출근하고 나 홀로 집에 남았다. 나는 밖으로 나와 집 주변을 둘러봤다. 고층 아파트와 잘 가꾸어진 정원이 도시 풍경을 한껏 더 아름답게 꾸며줬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남한에 온 것을 실감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어머니와 동생이 하나원을 퇴소했다. 어머니와 동생은 조기 퇴소하지 않았다. 교육기간 3개월을 다 마치고서야 그곳을 나왔다. 그날 우리 가족은 2년 만에 다 함께 모여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2004년 장사하러 떠나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 가족 생계를 위해 동생과 장사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 그 후 어딘지 모를 곳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목적지도 모른 채 떠난 여정, 그 여행의 끝은 한반도 남쪽 경상북도 대구였다. 그동안 겪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가족들은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친구의 도움으로 먼저 남한에 오게 됐다. 이후 가족을 무사히 데려오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남한으로 오면서 북한에 남은 가족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홀로 두고 떠났다는 죄책감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 모든 어려움과 고통이 눈물에 다 담겨 있었다. 또 이 눈물은 안도의 눈물, 행복의 눈물이었다.
 
 
  남한에서 첫 달 휴대전화 요금 30만원
 
  다음 날 우리 가족은 휴대전화를 구입하기 위해 매장으로 갔다. 내 생애 첫 휴대전화였다. 아버지는 거금을 들여 당시 최신 휴대전화를 사줬다. 나는 신분증이 나오지 않아 어머니 명의로 휴대전화를 구입했다. 나는 그날부터 전화와 문자는 물론 인터넷 검색까지 하면서 마구 써댔다. 나는 요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냥 쓰면 되는 줄 알고 막 사용했다.
 
  문제는 한 달 뒤 휴대전화 요금 고지서가 왔다. 충격이었다. 30만원이 나왔다. 나는 속으로 아버지한테 혼나겠구나 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아버지는 혼내지 않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북한 출신이 많았다.
 
 
 
시험 답안지에 컴퓨터용 사인펜 아닌 파란색 형광펜

 
이주배경청소년 지원재단인 무지개청소년센터가 2016년 제2회 탈북청소년 사회입문 프로그램 ‘동기야! 놀자!’를 실시하고 있다. 사진=무지개청소년센터
  당시 정부는 북한에서 학교를 졸업하면 학력을 인정해 줬다. 하지만 나는 북한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해 학교를 다녀야 했다. 다음 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19세였다. 19세면 고등학교 3학년이다. 그러나 나는 1학년에 입학했다. 같은 반 친구들보다 두 살 많게 시작했다. 북한 출신에 나이가 많다는 사실은 숨겼다. 단순히 북한에서 온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로 인해 놀림거리가 될까 봐 두려웠다. 북한이 아닌 강원도에서 전학 왔다고 말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북한 사투리가 강원도 사투리와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강원도에서 왔다고 친구들을 속였다. 그땐 내 잘못된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학기가 시작되고 평범한 시간이 흘렀다. 친구도 여러 명 생겼다. 학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의고사 시험 날이 다가왔다. 남한 고등학교에서 치르는 첫 시험이었다. 기대 반 설렘 반이었다. 시험 당일 다른 친구들과 함께 시험을 기다렸다. 종이 울리고 감독관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시험지를 나눠줬다. 그리고 노란 종이를 추가로 배포했다. 나는 순간 긴장했다. 과연 이게 무엇일까? 옆 친구에게 슬쩍 물어봤다. 그 친구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얘는 뭔데 답안지도 모를까?’ 친구를 통해 그것이 답안지라는 것을 알게 됐다. 조금 부끄러웠다. 남한 고등학교의 시험 과정은 북한과 조금 달랐다. 북한은 답안지가 따로 없다. 시험감독 선생님이 문제지를 나눠주면 그곳에 답을 적는다. 남한은 달랐다. 나는 이를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금방 문제에 집중했다. 문제는 어려웠다. 이해 안 되는 문제도 많았다. 그래도 문제를 열심히 풀었다. 시험이 거의 끝날 무렵 답안지에 답을 옮겨 적으려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볼펜이 아니라 다른 펜으로 답을 적고 있었다. 나도 필통에서 그들과 비슷한 펜을 하나 꺼내 답을 적기 시작했다. 시간에 맞춰 겨우 마킹(Marking·시험지나 답안지 따위의 빈칸을 채우는 일)을 마쳤다. 답안지를 들고 당당하게 감독관 선생님 앞으로 갔다. 그러고 나서 답안지를 교탁 위에 놓고 돌아서는 순간 뒤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독관 선생님: “야, 정광성 이리 와.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나는 바로 되돌아서 감독관 선생님 앞으로 갔다.
 
  나: “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감독관 선생님: “뭐라고? 몰라서 물어?”
 
  나는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 그때까지 몰랐다.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반 친구들도 답안지를 제출하면서 내 답안지를 한 번씩 보고 키득대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시험이 끝나고 나는 교무실로 끌려갔다. 한참 혼나고 있을 때쯤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선생님은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상황설명을 들은 담임선생님은 감독관 선생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감독관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렀다. 그리고 컴퓨터용 사인펜을 건네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모든 답안지에 이 펜으로 마킹해야 한다” 하면서 내 잘못에 대해 설명해 줬다.
 
  상황은 이랬다. 보통 시험을 보게 되면 답안지에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마킹을 한다. 그런 사실을 몰랐던 나는 컴퓨터용 사인펜이 아닌 파란 형광펜으로 마킹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교실에서 내 답안지를 보고 웃던 친구들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 부끄러워서 다시 교실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실에 들어서니 친구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친구들 눈에는 내가 정말 이상한 애였다. 강원도에서 전학 왔다고 하지만 알아듣지 못할 사투리를 쓰고,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그랬다. 친구들은 인기 걸그룹에 빠져 다들 만나면 걸그룹 얘기였다. 나는 걸그룹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유행에 뒤처질 수밖에 없고, 대화에도 끼지 못했다. 조금씩 친구들 사이에서 멀어졌다. 일명 ‘왕따’가 됐다.
 
 
  “나는 남한에 왜 왔을까?”
 
  처음엔 편했다. 공연히 친구들과 불편한 대화를 안 해도 됐다. 친구들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이후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나는 지금도 함경도 어감이 조금 남아 있지만 고등학교 때는 더 심했다. 아마 친구들은 처음 들어보는 사투리였을 것이다. 신기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 말투를 따라 하면서 놀렸다.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나서 친구들과 다툰 적도 많았다. 항상 문제의 원인이 친구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게 있었다. 좀 더 일찍 북한에서 왔다고 솔직히 말했으면 친구들의 놀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갔다. 그러다 보니 자꾸 나쁜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북에 있었더라면 경제적으론 어려워도 두 살 어린 친구들에게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는 왜 나를 데려왔을까’. 복수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자살’을 결심했다. 내 한 몸 이 세상에서 사라져 남아 있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15층 건물이었다. 15층 계단에 앉아 지난 내 삶을 되돌아보았다. 19년의 짧은 삶, 길지 않은 삶이지만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작은 할아버지로 인해 가족 전체가 반동 집안이 돼서 탄광으로 쫓겨 내려갔다. 반동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아홉 살 어린 나이에 꿈을 포기해야 했다.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아버지는 장사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2년 뒤 어머니와 동생도 장사하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낯선 사람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고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상갓집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탈북을 했다. 탈북 과정에서 나만 몰랐던 어머니와 동생과의 예정된 만남, 이후 남한에 입국한 것이 내 인생의 전부다. 돌이켜 보면 제대로 행복한 삶을 산 기억이 없었다. 너무 억울해 혼자 펑펑 울었다. 북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구들도 생각났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계획을 실행하려고 난간에 올라섰다. 밑을 내려다보니 너무나 아찔했다. 한 발만 앞으로 나가면 19세 한 소년의 인생이 마감된다. 하지만 나는 나가지 못했다. 삶이 힘들어 복수하기로 결심했지만 아직 어려서인지 무서운 마음이 더 컸다. 나는 내려와 그 자리에 앉아 한참을 또 울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결심을 했다. ‘천천히 가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꼭 성공하겠다’고. 이런 마음가짐을 지금도 항상 되뇌며 살고 있다.
 
  몇 개월 지나 2학년에 올라갔다. 반 친구들도 절반 이상이 바뀌고 담임선생님도 바뀌었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선생님은 “친구들에게 북한에서 온 사실을 알리는 것이 어떻겠냐”며 “며칠 시간을 줄 테니 생각해 봐라”고 했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 선생님에게 “모든 것을 말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선생님은 내게 “오늘은 야자(야간자율학습)하지 말고 먼저 집에 가라”고 했다. 그날 야자시간 선생님은 반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소상히 말했다. 다음 날 아침 등교하니 교실에 난리가 났다. 친구들은 북한에서 온 사람을 처음 본 것이다. 친구들은 북한에 대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정말 황당한 질문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친절히 내가 아는 것을 모두 답해줬다.
 
  한낱 보잘것없는 왕따 학생에서 갑자기 친구들의 관심을 받는 인기 있는 학생으로 하루아침에 변했다. 그 후로 주위에 친구들이 생겼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친구들에게 거리낌 없이 물어봤고, 친구들도 흔쾌히 알려줬다. 그렇게 조금씩 학교생활에 적응해 남한 사회에 녹아 들어갔다. 물론 지금도 모르는 것은 많다. 그러나 당당하게 물어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마치며…

 
  지난주는 설이었다. 남한에서 맞는 열두 번째 설이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떠난 고향에 12년째 가보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가끔 물어본다. ‘그렇게 고생하고도 북한에 다시 가고 싶어?’ 가고 싶다. 북한이 좋아서가 아니다. 김정은이 좋아서는 절대 아니다. 그 체제가 좋아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고향이기 때문에 가고 싶다. 누구나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 있다. 고향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고향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자주 찾곤 한다.
 
  나무는 뿌리에서 자란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아예 자라지 못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어디서 태어나 어디서 왔는지 모르면 성장할 수 없다. 물론 나도 한때는 북한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지금도 북한 정권과 김정은 일가는 증오와 부끄럼의 대상이지만 고향은 아니다. 고향을 떠나온 지 13년째다. 그립고 보고 싶은 이들은 하나 둘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난다.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한 채 그들을 떠나 보낸다. 이제는 그리움으로 그들을 추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남한에 온 것을 고등학교 1학년 이후 후회한 적은 없다. 아마 탈북 당시 남한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곳에서 아무런 꿈과 희망도 없이 살았을 것이다.
 
  현재 한반도 북쪽엔 꿈도 희망도 없이 김정은 정권에 속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인권’이라는 단어도 모른 채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다.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나라를 잘못 만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이 지난해 6월 1차 정상회담에 이어 오는 2월 27일과 28일 베트남에서 2차 정상회담을 한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통해 북한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지난해 9월호부터 연재한 ‘체험기’를 3월호로 마감 짓는다. 아무리 북한 출신 기자라고 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먼저 기회를 주신 《월간조선》 편집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이 ‘체험기’가 처음 나가고 나서 주위의 많은 분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들 덕분에 용기 내어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특히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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