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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출신 《월간조선》 정광성 기자의 체험기5

“남한으로 가면 안기부에 끌려가 피도 뽑고 팔려간대요”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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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순간 천애고아가 돼 버린 소년
⊙ 중국에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 남한으로 오기까지 겪어야 했던 아픔들
북한 주민들이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인터넷 캡처
  북한은 1990년대 후반 극복하기 힘든 경제난에 빠졌다. 일명 ‘고난의 행군’이다. 이는 북한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북한 주민들의 생각, 경제활동 등이다. 고난의 행군 이전 북한 주민들은 국가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아 살아갔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배급이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었다. 1997년부터는 이것조차 없어졌다. 북한의 경제난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공산권의 붕괴다. 80년대 후반 동구권 붕괴로 인해 북한은 큰 타격을 받았다. 구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 국가의 원조(援助)와 차관(借款)이 북한 경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또, 북한 핵개발로 인한 미국의 대북제재와 자연재해가 겹쳤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북한 전역의 공장들이 멈추기 시작했다. 배급은 이미 중단된 상태였다. 평생 배급 하나로 살아가던 북한 주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당시 장마당(시장)도 없었다. 식량난을 해결할 방법을 찾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지금의 장마당을 형성했다. 장마당의 시초는 물물교환(物物交換)이었다. 그러다 장마당이 점차 확대되면서 화폐(貨幣)가 활성화됐다. 이전까지 화폐는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표로 해결됐다. 배급표로 배급을 받았고, 전표로 상점에서 물건들을 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표들은 국가에서 일한 대가로 지급됐다.
 
 
  다른 도시로의 ‘달리기 장사’
 
북한 주민들이 써비차(돈을 주고 타는 차)를 타고 장사를 가던 중 안전원의 검열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인터넷 캡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나의 부친(父親)도 일을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했다. 부친은 동업자와 함께 회령시(會寧市)에서 옥수수를 싣고 식량이 귀한 공업도시로 간다. 그곳에서 옥수수를 비싼 값에 팔고 옷 등 다양한 공업품을 구입해 돌아온다. 다른 지역에서 사 온 물건들을 장마당에 되파는 식으로 장사를 했다. 북한에서는 이런 식의 장사를 ‘달리기 장사’라고 불렀다. 부친은 1997년을 시작으로 4년 가까이 장사를 했다. 그 덕에 우리 집은 풍족하진 않았지만 부족함 없이 살 수는 있었다.
 
  점차 달리기 꾼들이 늘어나자 북한 당국은 통제를 시작했다. 단속은 안전원(남한의 경찰)들이 했다. 이들은 달리기 꾼들의 물건을 빼앗아 국고로 환수 하거나 뒤로 빼돌렸다. 당시 안전원들은 빼돌린 물건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거나 뇌물로 바치기도 했다. 한번은 장사를 떠났던 부친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안전원들에게 장사 물품 모두를 빼앗긴 것이다. 이로 인해 부친은 장사 밑천을 다 날렸다. 이후 부친은 장사를 접고 일을 시작했다. 부친은 회령의 제약공장에서 운전사로 일했다. 북한에서는 운전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 최소 굶지는 않는다.
 
  남한에는 차도 많고 운전면허 취득도 어렵지 않다. 반면 북한에서는 운전면허 취득을 위해 전문학교를 가야만 된다. 그곳에서 운전과 수리 기술까지 다 배워야 면허증을 받을 수 있다. 부친은 군에 가지 못했다. 《월간조선》 10월호 ‘북한출신 정광성 기자의 체험기2’에서 언급했지만 우리는 ‘반동’ 집안이었다. 북한 정권은 ‘반동’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부친의 군 입대를 막았다. 당시 북한 사회 분위기는 남자라면 무조건 군 복무를 마쳐야 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게 됐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부친은 집안 출신 문제로 군대를 가지 못해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부친은 이후 자동차 전문학교에 입학해 기술을 배웠다.
 
 
  ‘고난의 행군’이 가져온 가족 해체
 
  부친은 2년간 일을 하다 다시 장사를 준비했다. 2004년 10월 부친은 평안북도 쪽으로 장사를 떠났다. 부친은 떠나기 전 나에게 가족을 당부했다. 당시 조금 이상한 느낌은 받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넘겼다. 보통 한번 장사를 떠나면 늦어도 한 달이면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부친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지만 3개월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이후 부친의 소재를 알 만한 곳에 전화도 해 보고 사람들을 통해 수소문해 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1990년대 후반을 시작으로 2000년대 중반은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였다. 식량을 구할 수 있다면 소매치기, 문 차기(주택 도둑), 살인도 서슴없이 벌였다. 시장에서 소매치기는 항상 있는 일이다. 문 차기는 다반사였다. 돈을 위한 살인사건도 종종 일어났다. 함경남도 단천시에서 이런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단천시는 함경북도 청진과 함경남도 함흥의 중간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서로 물건을 교환하는 경우가 많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사건 사고들이 많았다. 이런 곳에서 사고를 당하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1년이 지나도 부친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가족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어머니는 신발 장사를 하셨다. 청진에서 도매가격으로 신발을 사다 회령 장마당에 팔았다. 거리는 차로 5~6시간 정도의 거리다. 하지만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최대 10시간 소요될 때도 있다. 나는 부친에 대한 기억 때문에 어머니가 하는 장사를 만류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장사를 하지 않으면 우리 가족의 생계는 힘들어진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장사를 계속했다. 보통 청진에 나가시면 3~4일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그럴 때면 나와 동생은 집에 남아 생활을 이어 가야 했다.
 
 
  장사를 떠난 어머니와 동생의 실종
 
북한 장마당에서 물품들을 올려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인터넷 캡처
  어머니는 그렇게 1년 가까이 장사를 하셨다. 2006년 1월 어느 날 평소와 달리 어머니는 동생과 함께 장사를 가야 한다고 했다. 짐이 많다는 이유였다. 남자인 내가 가면 여동생이 혼자 집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장사를 떠났다. 처음에는 좋았다.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몇날 며칠을 놀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철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4일이 됐다. 어머니가 올 시간이 지났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7일이 지났다.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걱정은 되지만 조금 늦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0일이 지났다. 나는 청진에 어머니가 자주 머무는 집에 전화를 했다.
 
  나: 여보세요
 
  주인집 아주머니: 여보세요, 누구세요?
 
  나: 저 회령에 김지현(가명)씨 아들인데요. 우리 어머니 거기 있나요?
 
  주인집 아주머니: 어 그래, 어머니 안 왔는데.
 
  나: 네? 안 왔다고요? 청진 가면 아주머니 집에 가잖아요.
 
  주인집 아주머니: 그래 여기(청진) 오면 우리 집에 왔는데 이번엔 오지 않았다.
 
  나: 그럼 어디 다른 데 갈 수 있는 데 있을까요?
 
  주인집 아주머니: 글쎄, 그건 모르겠다.
 
  나: 혹시 어머니 오시면 제게서 전화 왔었다고 얘기해 주세요.
 
  주인집 아주머니: 그래, 알았다.
 
  전화를 끊고 나는 겁이 났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왔다. ‘돌아오겠지. 어머니는 돌아올 거야’라고 생각했다. 이후 15일이 지났다. 그때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장사를 떠나면서 얼마간의 식량과 돈을 주고 갔다. 그것마저 얼마 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한 끼 정도는 굶었다.
 
  남한에 와서 한 끼 정도는 먹기 싫어서 굶는다. 하지만 당시에는 먹고 싶었지만 식량을 아끼기 위해서 굶었다. 20일이 지나서는 두 끼를 굶어야 했다. 물로 배를 채우는 날이 많았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굶는 것이 너무 힘들어 주변에서 식량을 빌려서 끼니를 해결했다. 1달이 지나서는 빌려 먹는 것도 어려워졌다. 당시 주변에 모두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한참을 고민 끝에 어머니를 찾으러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수중(手中)에 돈이 하나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집을 파는 것. 17살 소년의 생각이라고 하기엔 너무 터무니없었다. 이것 외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북한에선 공식적으로 집을 사고팔 수 없다. 하지만 경제난 이후 몰래 뒷거래로 부동산 매매가 이뤄졌다. 나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삼촌에게 부탁해 집을 팔았다. 단돈 1만5000원. 우리가 볼 때 1만5000원이라는 돈은 책 한 권 값이다. 하지만 당시 북한에선 꽤 큰돈이었다.
 
 
 
2년 만에 들은 아버지 목소리

 
  집 판 돈 1만5000원을 들고 어머니를 찾아 나서기 전 시골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상황을 말씀드리고 떠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께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나의 계획에 대해 반대하셨다. 어린 나이에 홀로 길을 떠난다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할아버지 댁에서 조금 더 어머니를 기다리기로 했다. 보름 정도 지났을까 평소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삼촌이 나를 찾아왔다. 그 삼촌은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본인 집으로 가자고 했다. 오랜만에 학교 친구들도 만날 겸 삼촌을 따라나섰다. 그분의 집에 도착한 것은 점심시간 때였다. 아지미(북한에선 아주머니를 이렇게 부른다)가 차려준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삼촌이 조금 이상한 행동을 했다. 밖의 대문과 출입문을 모두 잠그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삼촌은 옷장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당시 북한에서 휴대전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중국과 연락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아버지가 계실 때 들은 얘기로는 그 삼촌이 중국과 장사를 한다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있는데 저렇게 막 핸드폰을 사용해도 되는 걸까? 만약 내가 보위부(국정원 격)에 가서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새 삼촌은 번호를 입력하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삼촌: 여보세요. 내요(나요). 지금 같이 있소.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통화를 하던 삼촌이 나를 부르더니 전화를 받아 보라는 것이었다. 정말 당황했다. 저 전화의 상대방은 분명 중국 사람일 텐데 왜 나에게 주지? 나는 중국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삼촌은 다시 한 번 손짓으로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삼촌의 다급한 손짓에 나도 모르게 전화를 받아 들었다.
 
  나: 여보세요.
 
  상대방: 여보세요, 광성이니?
 
  상대방은 4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뒤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나와 전화를 하고 있는 상대는 2년 전 장사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중국에서 나를 찾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기쁨과 행복함이 밀려 왔다. 그리고 그동안 가족 중에 나 하나 남았다는 서러운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계속 울었다. 펑펑 울었다. 아버지는 이제 괜찮다며 울지 말라고 했다.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했다.
 
  그렇게 아버지와 통화를 마치고 행복한 마음으로 시골로 갔다. 아버지는 조만간 다시 연락을 할 테니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아버지와 통화한 이후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그리고 언제 다시 연락이 올까 기다려졌다. 다시 보름이 지났을까 그 삼촌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시내에 다녀오겠다는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그것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집을 나서 12년째. 이젠 두 분 모두 고인이 되셨다. 미리 알았으면 큰절이라도 드리고 왔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던 두 분이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중국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한 탈출
 
영화 ‘크로싱’ 중에서 아버지 용수(차인표)가 아내의 약을 구하러 중국행을 결심하고 아들 준이(신명철)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크로싱 스틸컷
  삼촌을 따라 그의 집에 도착했다. 삼촌은 자연스럽게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에게 거는 것이었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휴대전화를 나에게 넘겼다. 아버지와 인사말을 나눴다. 아버지는 갑자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광성아, 이제 곧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오늘부터 다른 데 가지 말고 그 집에 있으면서 삼촌과 함께 움직여라.”
 
  그 집에서 이틀간 머물렀다. 2006년 3월 17일 두만강을 건넜다. 당시까지 강에는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있었다. 강을 건너니 중국 쪽에 차가 미리 나와 있었다. 삼촌과 나는 그 차를 타고 중국 시내로 들어갔다. 가는 도중 나는 도착하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마음에 겁도 나지 않았다. 원래는 위험한 길이다. 가던 중 중국 공안이 차를 세워 단속하면 영락없이 북송된다. 수많은 사람이 탈북을 해 시내로 들어가는 차에서 잡히기도 한다.
 
  3시간쯤 달려 옌지(延吉) 시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른 차로 갈아탔다. 그 차는 낯선 집 앞에 멈췄다. 우리는 안내자를 따라 그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실망했다. 아버지가 그곳에 계실 줄 알았다. 20분 정도 지나 집 주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아버지였다. 나는 조금 실망한 목소리로 “아버지, 어디 있습니까? 언제 만납니까?”라고 물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한국에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 있으니 그 같이 있는 아저씨 말만 들으면 된다고 했다. 나와 함께 왔던 삼촌은 다음 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고, 나는 브로커의 손에 이끌려 다른 브로커에게 보내졌다.
 
  이후 옌지를 떠나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며 3일을 이동해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 도착했다. 이동 과정에 대해선 《월간조선》 9월호 ‘북한출신 정광성 기자의 체험기1’에서 소상히 다뤘다.
 
 
 
북한에서 떠도는 남한에 대한 流言蜚語

 
  중국을 모르는 내가 봐도 내륙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런데 거기에도 아버지는 없었다. 쿤밍 브로커의 집까지 도착하니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아버지에게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그때서야 중국이 아닌 남한에 있다고 말했다. 깜짝 놀랐다. 순간 나도 모르게 거기 왜 있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이유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한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많이 퍼뜨린다. 먼저 미국에 대한 것이다. 미국은 남한을 점령해 갖은 행패를 부리며 남한의 주민들을 노예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만약 북한 사람이 남한으로 가면 안기부가 끌고가서 피와 내장을 따 꺼내 시장에다 판다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 내부에선 남한에 대한 유언비어들이 만연하다.
 
  남한에 와서 보니 북한에서 떠도는 잘못된 정보들 중에 하나 맞는 것이 있었다. ‘동물병원’에 관한 것이다. 북한에서도 동물을 아끼긴 하지만 남한처럼 애완용으로 키우는 집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동물에 대한 애정은 남한보다는 높지 않다. 북한 정권이 남한에 대해 비방할 때 쓰는 것이기도 하다. ‘남조선에선 사람보다 개가 더 대접받는 사회다.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 나가는데 한쪽에서는 개가 조금만 아프면 병원으로 달려가 치료를 해 준다’는 식으로, 사람이 개보다 못한 세상이라고 비난한다. 우리들은 그걸 보면서 말도 안 된다고 비웃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동물병원이 어디 있냐고, 이것은 확실히 잘못된 정보라고 친구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북한 정권의 선전과는 전혀 다른 동물병원이 존재했다.
 
  아버지는 그 얘기를 하면서 “너도 지금 남한으로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떠난 길이 남한으로 탈출이었다. 내가 남한으로 갈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겁이 나기도 했다. 남한에 가면 안기부로 끌려가 피도 뽑히고 죽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버지에게 이런 얘기를 하니 엄청 웃으셨다. 그러시면서 절대로 그런 곳이 아니고 그것은 북한 정권의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겁이 난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그곳에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됐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남한행을 택했다. 이곳에서 12년간을 살아가면서 남한에 온 것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만약 내가 그곳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 자리에는 내가 없을 것이다. 이곳까지 오기까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려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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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atcha    (2019-01-11) 찬성 : 5   반대 : 1
공평하게 다 같이 못살자는 적와대 빨갱이는 당장 탄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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