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은 체제 공포정치 환멸, 이외에도 슬픈 탈북 이유 존재
⊙ “우선 아내의 암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北의 열악한 의료체계로는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 “北에 인질로 둔 아들 하나는 구원하지 못했다”(외교관 출신 고위 탈북자)
⊙ 일부 권력층 자녀 외에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파행적으로 운영… 천재들도 국제적인 고립으로 국제 경쟁력 상실
⊙ 올해 탈북자 수 김정은 체제 이후 최저지만 여전히 북한에선 체제 불만 노래 유행
⊙ ‘가리라 백두산’(김정은 우상화곡)을 ‘가리라 남조선’으로 고쳐 불러
⊙ “우선 아내의 암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北의 열악한 의료체계로는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 “北에 인질로 둔 아들 하나는 구원하지 못했다”(외교관 출신 고위 탈북자)
⊙ 일부 권력층 자녀 외에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파행적으로 운영… 천재들도 국제적인 고립으로 국제 경쟁력 상실
⊙ 올해 탈북자 수 김정은 체제 이후 최저지만 여전히 북한에선 체제 불만 노래 유행
⊙ ‘가리라 백두산’(김정은 우상화곡)을 ‘가리라 남조선’으로 고쳐 불러
박근혜 정권 때 북한 엘리트층의 탈북이 급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김정은 체제의 공포정치에 대한 환멸, 다른 하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탈북 권유였다. 김정은의 갑질은 할아버지 김일성, 아버지 김정일보다 심했다. 회의 때 졸았다고 인민무력상을 죽이고, 자세가 불량하다며 부총리를 총살했다. 고모부를 역도로 몰아 기관총으로 죽였고, 해외를 떠돌던 이복형을 독살하기도 했다.
김정은 시대를 ‘꾸역꾸역’ 버티던 엘리트층의 마지막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 시기, 박 전 대통령은 “북한 주민 여러분이 희망과 삶을 찾도록 길을 열어놓을 것이다.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탈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인권유린 가해자”(에드 로이스 미 하원 외교위원장)라는 평가를 받는 김정은 체제에서 도저히 살지 못한다는 판단을 한 게 엘리트층 탈북의 결정적 이유다. 지난달 《월간조선》이 입수해 공개한 국정원 내부문건에는 이 이유 외에도 이들이 탈북할 수밖에 없었던 자세한 사연이 담겼다.
문건에는 그들의 신상이 상세히 게재돼 있지만, 신변보호를 위해 밝히지 않는다. 직책 등을 모두 생략하고 고위 탈북자 A씨, B씨, C씨로 표현하겠다는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엘리트층 탈북 러시 기사를 작성하면서 신뢰성을 위해 그들의 직책을 밝혔는데, 다수에게 “기사 때문에 북에 있는 친척, 친지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됐다”는 항의를 받았다.
‘탈북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손잡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상황에 그간 무사했던 친지, 친척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자, 그들은 “그건 북한을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고 입을 모았다.
김정은 때문에 탈북 결심, 아내 병 완치 위해 굳혀
탈북자 A씨는 아내의 병이 탈북 결심을 굳히는 데 한몫했다. 그의 부인은 유방암을 앓다가 수술을 받았는데, 북한에서는 항암치료를 잘 받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한국에 입국한 A씨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조부의 고향이 경북이라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우선 아내의 암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6년 11월 WHO 산하 ‘인유두종바이러스와 암 정보센터’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북한 여성 유방암 발병률은 인구 10만명당 45.7명이었다. 김정일의 셋째 부인이자, 김정은의 모친인 고용희도 2004년 프랑스에서 유방암으로 52세에 쓸쓸하게 숨졌다.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도 유방암 투병 중(2016년까지 생존 확인)이다.
그래서일까. 김정은은 북한의 대표적 여성종합병원인 평양산원 내 유선종양연구소(유방암 치료시설)에 외국에서 수입한 첨단 의료시설과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의료진을 배치했다. 2012년 11월 28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다목적 엑스레이와 CT(컴퓨터단층촬영) 장비 등을 구비했고, 의료진도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의대 등에서 일하던 관록 있고 전도유망한 의사, 연구사들로 구성됐다”고 했다.
하지만 유선종양연구소는 북한의 유방암 치료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특권층만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병원은 특권층 전용과 일반 병원으로 나뉘고, 일반 병원도 간부과와 일반과로 구분될 정도로 차별화돼 있다는 게 통일교육원이 발간한 《2017 북한 이해》의 지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이 과거 유방암을 100% 완치시킬 수 있는 주사약을 개발했다는 거짓 선전을 한 것이다. 2002년 3월 5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북한 의학과학원 방사선의학연구소가 개발한 이 주사약은 1, 2기 유방암 환자 등 50여 명을 대상으로 4년에 걸쳐 임상시험을 실시한 결과 100%의 완치율을 기록했다.
이 주사약은 투약된 곳에서 반경 4cm 내에서만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약물이 암(癌) 조직에만 머물러 있고 면역억제 작용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인체에 해가 없으며 치료 후 면역 부활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중앙통신은 전했다.
이 주사약은 수술보다 고통이나 부담이 거의 없는 것이 장점이라고 중앙통신은 소개했다. 이런 신비의 주사약이 실제 존재했다면 자신의 건강은 끔찍이도 챙기는 고용희, 김경희 등 북한 로열패밀리가 유방암 때문에 죽거나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유방암은 2기 이내에 발견되면 5년 생존율이 90%가 넘을 정도로 예후가 좋다. 하지만 재발률 역시 높다. 2016년 발표된 한국유방암학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유방암 재발률은 6~20%이다. 중앙대병원 유방 외과 김민균 교수는 “유방암 재발은 대부분 5년 이내 발생하지만, 10년 후에 재발할 가능성도 25%에 달해 유방암의 경우 5년이 지나도 완치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자식의 구루병 치료를 위해
탈북자 B씨는 처가가 북한 내 소위 잘나가는 집안이었다. 부인이 탈북을 반대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럼에도 B씨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아들의 구루병 때문이었다. B씨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 해외 근무 연장을 요청했지만, 북한 당국은 일축했다.
구루병은 다리와 등이 휘는 질환이다. 발병 원인에 따라 그 증상이 조금씩 다르다. 구루병의 원인으로는 비타민D 결핍, 저체중 조산, 인산 부족 등이 있다. 가장 흔한 구루병의 원인은 비타민D 결핍이며, 이 경우 다리가 ‘O’자 형으로 휘거나 치아에 손상이 생기고, 성장이 늦어지기도 한다. 칼슘과 인의 대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비타민D가 부족해지면 골격이 약해지고 점차 뼈가 휘게 되는 것이다. B씨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귀순을 결행했다”고 했다.
탈북자 A씨와 B씨는 기본적으로 북한 의료체계와 의료진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의료계에 따르면 일부 북한 의료진은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지만, 북한의 보건의료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통일보건의료학회에 따르면 2012년 기준 북한 산모 사망률은 인구 10만명당 76명으로 남한의 7배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1985년부터 2014년까지 30년간 구축한 북한 영아·아동 사망률 데이터 분석 결과, 북한 영아 사망률은 남한의 8.8배, 아동 사망률은 남한의 9.3배 높았으며 주원인이 조산(22%), 선천성 이상(13%), 감염성 질환(30%)으로 나타났다.
장마당에서 약을 사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
1990년대 중반부터 겪은 고난의 행군과 계속되는 경제침체, 국제사회의 제재 등으로 의료기관 시설은 노후화됐고, 의약품 보급도 부족하다. 북한 내 의사들의 생활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의료인에 대한 보상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 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북한 의료진은 환자로부터 치료와 처방에 대한 대가를 암암리에 받아 왔다. 비공식적 진료·치료 행위가 확대되면서 무상치료제 의미는 퇴색됐다는 얘기다. 북한은 무상치료를 내세워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표방해 왔다.
장비를 이용한 객관적 검사가 불가능하다 보니 환자의 호소가 질환의 진단과 심각성 판단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한다. 한 탈북자는 “환자로선 증상의 심각성을 호소해야 치료와 약물을 우선으로 받을 수 있어 과장해 증상을 호소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증언했다.
의료기관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약을 ‘장마당(시장)’에서 구입해야 한다는 전언이다. 장마당에서는 항생제, 감기약, 아스피린, 코르니목사돌, 기생충 약, UN약, 북한제조약품, 러시아·중국에서 밀수해 온 약 등을 판매하고 있다.
약의 가격은 장마당에 물품이 많으면 싸고, 없으면 비싸지는 식이다. 1차 의료체계인 동·리 지역의 진료소 역시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주민들이 장마당 등 비공식적 의료전달체계를 통해 진료와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
북한 정보에 밝은 소식통의 말이다.
“북한은 약을 대부분 장마당에서 구매한다. 그러다 보니 병과 무관하거나 병에 해가 되는 약임에도 ‘다른 사람이 사용했는데 건강해졌다’는 등 이상하게 소문이 나 이 이야기를 믿고 복용하는 사례가 많다. 요즘은 피부병에 약효가 좋다는 애기똥풀이 많이 팔리고 있다.”
서울대 통일의학센터는 “2000년대부터 번성한 장마당을 중심으로 의약품이 거래되고 있고, 북한의 공적인 보건의료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했다.
북한이탈주민을 진료해 온 이혜원 서울의료원 공공의료팀 과장은 “북한의 보건의료체계는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며 “2차 의료기관 격에 해당하는 북한 인민병원에서도 사실상 첨단 진단·의료 장비가 많지 않아 촉진·문진이 환자 진료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 고려의학(한의학)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고위 탈북 인사는 “김정은 전용 의료시설을 제외하면 실정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라며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이나 북송 미전향장기수 이인모 등이 해외 치료를 받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아들 하나는 북한에 인질로 남겨 구원하지 못했다”
탈북자 C씨, D씨는 북한 당국이 가족을 인질로 잡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북한은 해외에서 근무하는 외교관이나 외화벌이 무역일꾼의 경우 선발할 때부터 충성심과 가족 성분 등을 철저히 따지고, 해외 부임 때는 가족 일부를 북한에 인질로 남겨놓는다. 2013년 4월 북한 김정은은 외교관, 해외상사 주재원 등에게 “동반 자녀 중 1명만 현지에 남겨두고 전원 북한으로 귀국시켜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교관과 상사 주재원 등은 “김정은이 큰 실수를 하는 것”이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냈다. 소환 자녀를 둔 북한 대사관 직원들은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는 것이 정말 김정은의 방침인가. 자녀가 귀국하는 날 눈물바다가 펼쳐질 것이 뻔하다. 이런 조처를 하도록 만든 놈은 나쁜 놈”이라고 토로한다고 복수의 대북소식통이 전했다.
북한 무역회사의 한 간부는 “뇌물을 주면서 애들 2명을 겨우 데리고 나왔는데 무조건 소환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며 하소연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소식통은 “소환 대상 자녀 간에 서로 잔류하기 위해 다투는가 하면, 부모들은 북한으로 보내야 할 자녀 선택을 놓고 고심하는 등 가정불화도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관 출신 탈북자의 이야기다.
“원래 북한에서는 해외에서 일할 경우 가족 중 한 명을 남겨둡니다. 인질이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아들 둘 중의 한 명은 인질이었고 아들 한 명만 데리고 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리고 나가 있는 아들은 구원됐지만, 북한에 있는 아들은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2007년 김정일도 ‘해외파견원의 4세 이상 자녀 전원 소환’을 지시했으나, 해당자들의 반발과 내부 혼란 등의 부작용 때문에 지시를 번복했었다.
북한의 폐쇄적인 사회구조, 천재들이 날개 펴는 데 한계
영재 교육기관인 평양 제1중학교 출신인 E씨는 2016년 7월 17일 수학올림피아드가 열렸던 홍콩 과학 기술 대학교(Hong Kong University of Technology and Technology) 기숙사에서 공항까지 무작정 택시를 타고 빠져나갔다. 북한 당국의 감시 때문에 스마트폰과 여권은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공항에 가면 일단 한국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공항에서 한국 항공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발견한 E씨는 그들에게 접근해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E씨의 말을 들은 한국 항공사 직원은 한국영사관에 연락했고, 영사관 측은 E씨에게 혼자 택시를 타고 홍콩 한국총영사관으로 올 것을 권했다. 외교관은 탈북 과정에 개입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탈북을 준비한 덕분에 E씨는 홍콩섬 애드미럴티의 홍콩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찾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한다. E씨는 영사관에서 2개월을 보냈다. 9월 24일 한국에 들어온 E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의 안위를 우려, “기자회견을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E씨의 부친은 수학에 재능을 보이는 아들을 위해 교사인 자신의 신분상의 불이익을 각오한 채 E씨의 탈북을 독려했다. E씨가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참가를 위한 출북(出北) 전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하자, 본인 뜻대로 하라며 미화 200달러를 손에 쥐여준 것이다.
그는 귀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2013년부터 매년 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했으나 4회 연속 은메달만 획득, 해외유학(금메달 획득 시 가능)이 불가해 귀순을 결심했다. 부모님과 대한민국에 보답하고 싶다.”
수학 영재인 E씨는 북한 교육체계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 학업으로 완전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도 교육에 관심이 많다. 도(道)마다 1개씩 운영하던 영재학교를 대폭 늘린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영재학교’에는 출신 성분이 좋지 않으면 입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영재학교’에 입학하면 평양에 있는 명문대학에 입학하기가 쉽고, 입대가 면제돼 경쟁이 치열하다. 북한의 군 복무는 10년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재학교’의 학비는 일반 고등중학교보다 훨씬 비싸다. 성적이 우수해도 입학을 포기하거나 입학해도 일반 고등중학교로 다시 옮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일부 권력층 자녀 외 나머지 학생 교육은 파행
‘영재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성적을 받는 것도 ‘흙수저’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 북한 당국은 개인 과외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장마당을 중심으로 북한에 시장경제가 스며들면서 특별한 배경 없이도 부(富)를 축적한 신흥 부유층 등 소수 특권층의 자녀는 고액 과외를 받는다. 과외비는 대개 달러로 흥정한다고 한다.
그나마 ‘흙수저’가 성공할 길은 E씨처럼 탁월한 수학 실력을 발휘,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출전해 1등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수학 교육은 한계가 있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선전만을 위해 대회 준비만 시키는 것이다.
한국 대표단을 이끌어 온 송용진 인하대 수학과 교수(대한수학회 부회장)는 이같이 밝혔다.
“북한 청소년들은 수학 공부를 전투적으로 합니다. 대학 진학을 미루고 2년 동안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만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는 북한이지만 정작 ‘프로’의 세계인 국제 수학계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진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북한은 어려운 경제 여건 때문에 순수 수학을 연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기술 분야에 필요한 응용 수학을 연구한다.
북한의 폐쇄적인 사회구조도 수학 천재들이 날개를 펴는 데 한계가 있다. 북한 수학자들의 실력 격차가 국제적인 고립에서 기인했다는 이야기다. 학문 연구에서는 국제적인 교류와 최신 지식 습득이 중요한 만큼 폐쇄적인 사회구조가 걸림돌이 됐다는 것이다.
E씨가 “2013년부터 매년 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했으나 4회 연속 은메달만 획득, 해외유학(금메달 획득 시 가능)이 불가해 귀순을 결심했다”고 밝힌 것도 이런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여명 학교의 우기섭 전 교장은 북한의 교육실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북한의 교육은 정상이 아니다. 중·고등 과정을 마친 아이들이 구구단을 겨우 외우는 정도다. 일부 권력층 자녀 외에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과 얘기해 보면 학교에 선생님이 안 보인다고 한다. 학생, 교사 할 것 없이 당 관련 행사, 군사 노동 등에 동원되다 보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
우 전 교장은 2004년 이 학교 설립 발기인이었고 초대 교장을 맡았다.
올해 국내 입국 탈북자 수 김정은 체제 이후 최저 기록
북한 내 엘리트층의 탈북 러시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통과(2016년 12월 9일) 직전 끊겼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엘리트층이 탈북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실제 탈북한 엘리트층이 없거나, 있어도 공개하지 않을 것인데 ‘전자(前者)’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한다는 지적을 받는 정부가 들어섰는데, 목숨 걸고 탈북할 엘리트층은 없을 것이다.
일반 탈북자 수도 급격히 감소했다. 한때 연간 3000명 선에 달하던 탈북 국내 입국자 수가 올해 김정은 체제 이후 최저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박병석(朴炳錫)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통일부에서 제출받아 30일 공개한 자료를 보면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다음해인 2012년부터 탈북자가 줄어 올해 8월 말 기준으로 전년 같은 달(779명) 대비 9.7%가 줄어든 703명이 입국했다.
지난해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 수는 총 1127명(남 188명, 여 939명)이었다. 아직 올해 하반기 탈북자 수를 포함한 총 탈북자 수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지난해 8월 당시 탈북자는 779명으로 올해 동월 기준 703명보다 76명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통일부는 탈북자 감소 추세 원인으로 국경지역의 통제 강화, 중국 당국의 강제북송과 탈북을 도와주는 브로커 비용이 전년 대비 약 40% 상승한 점을 들었다. 일각에서는 김정은 체제가 안정됐고, 남북 평화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에 엘리트층 탈북이 전무(全無)하고, 일반 탈북자도 감소한 것이란 장밋빛 청사진도 제시한다.
북한이 좋아졌다고?… 체제 불만 노래 유행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3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3대 ‘세습 독재자’가 ‘노련한 외교’ 솜씨로 일약 한반도 ‘평화의 사도’로 둔갑한 것이다. 독재자의 본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일까. 북한 내부에서는 여전히 ‘김가 우상화 및 체제선전 가요’를 개사해 부르면서 체제 불만을 표출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북한 보위성(옛 국가안전보위부·우리의 국정원에 해당하는 기구) 관계자는 “평양에서 여성 1명이 ‘가리라 백두산’(김정은 우상화곡)을 ‘가리라 남조선’으로 고쳐 부르다 처벌받았다”고 전했다. 북한 해외 상사원은 “‘그리움은 끝이 없네’(김정일 우상화곡)의 가사 중 ‘불타던 천만심장’을 ‘메마른 천만심장’으로 부르는 북한 주민이 많다”고 했다.
한 고위 탈북자는 “회령시 장마당에서 ‘우리 당이 고마워’를 ‘노동당이 너무해’로 비꼰 낙서가 발견, 동네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고 했다. 전직 정보당국 고위 관계자는 “북한 학생들이 ‘내가 지켜 선 조국’의 ‘금잔디를 밟으며 첫걸음 떼고’를 ‘금잔디 밟자니 신발이 없어’로 바꿔 부르다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북한 주민들이 김정일, 김정은 우상화곡을 개사해 부르는 것은 2016년 중순부터 쭉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 김정은은 감시 카메라를 증설하는 등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 강화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정보당국 관계자의 이야기다.
“각 시, 도, 군 소재 각급 기관청사에 CCTV가 설치됐다. 인민들의 감시, 통제를 강화하여 사회 내부 변화와 동요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다.”⊙
김정은 시대를 ‘꾸역꾸역’ 버티던 엘리트층의 마지막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 시기, 박 전 대통령은 “북한 주민 여러분이 희망과 삶을 찾도록 길을 열어놓을 것이다.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탈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인권유린 가해자”(에드 로이스 미 하원 외교위원장)라는 평가를 받는 김정은 체제에서 도저히 살지 못한다는 판단을 한 게 엘리트층 탈북의 결정적 이유다. 지난달 《월간조선》이 입수해 공개한 국정원 내부문건에는 이 이유 외에도 이들이 탈북할 수밖에 없었던 자세한 사연이 담겼다.
문건에는 그들의 신상이 상세히 게재돼 있지만, 신변보호를 위해 밝히지 않는다. 직책 등을 모두 생략하고 고위 탈북자 A씨, B씨, C씨로 표현하겠다는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엘리트층 탈북 러시 기사를 작성하면서 신뢰성을 위해 그들의 직책을 밝혔는데, 다수에게 “기사 때문에 북에 있는 친척, 친지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됐다”는 항의를 받았다.
‘탈북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손잡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상황에 그간 무사했던 친지, 친척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자, 그들은 “그건 북한을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고 입을 모았다.
김정은 때문에 탈북 결심, 아내 병 완치 위해 굳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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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A씨는 아내의 병이 탈북 결심을 굳히는 데 한몫했다. 그의 부인은 유방암을 앓다가 수술을 받았는데, 북한에서는 항암치료를 잘 받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사진은 북한의 대표적 여성종합병원인 평양산원 내 유선 종양연구소. |
한국에 입국한 A씨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조부의 고향이 경북이라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우선 아내의 암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6년 11월 WHO 산하 ‘인유두종바이러스와 암 정보센터’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북한 여성 유방암 발병률은 인구 10만명당 45.7명이었다. 김정일의 셋째 부인이자, 김정은의 모친인 고용희도 2004년 프랑스에서 유방암으로 52세에 쓸쓸하게 숨졌다.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도 유방암 투병 중(2016년까지 생존 확인)이다.
그래서일까. 김정은은 북한의 대표적 여성종합병원인 평양산원 내 유선종양연구소(유방암 치료시설)에 외국에서 수입한 첨단 의료시설과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의료진을 배치했다. 2012년 11월 28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다목적 엑스레이와 CT(컴퓨터단층촬영) 장비 등을 구비했고, 의료진도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의대 등에서 일하던 관록 있고 전도유망한 의사, 연구사들로 구성됐다”고 했다.
하지만 유선종양연구소는 북한의 유방암 치료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특권층만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병원은 특권층 전용과 일반 병원으로 나뉘고, 일반 병원도 간부과와 일반과로 구분될 정도로 차별화돼 있다는 게 통일교육원이 발간한 《2017 북한 이해》의 지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이 과거 유방암을 100% 완치시킬 수 있는 주사약을 개발했다는 거짓 선전을 한 것이다. 2002년 3월 5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북한 의학과학원 방사선의학연구소가 개발한 이 주사약은 1, 2기 유방암 환자 등 50여 명을 대상으로 4년에 걸쳐 임상시험을 실시한 결과 100%의 완치율을 기록했다.
이 주사약은 투약된 곳에서 반경 4cm 내에서만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약물이 암(癌) 조직에만 머물러 있고 면역억제 작용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인체에 해가 없으며 치료 후 면역 부활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중앙통신은 전했다.
이 주사약은 수술보다 고통이나 부담이 거의 없는 것이 장점이라고 중앙통신은 소개했다. 이런 신비의 주사약이 실제 존재했다면 자신의 건강은 끔찍이도 챙기는 고용희, 김경희 등 북한 로열패밀리가 유방암 때문에 죽거나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유방암은 2기 이내에 발견되면 5년 생존율이 90%가 넘을 정도로 예후가 좋다. 하지만 재발률 역시 높다. 2016년 발표된 한국유방암학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유방암 재발률은 6~20%이다. 중앙대병원 유방 외과 김민균 교수는 “유방암 재발은 대부분 5년 이내 발생하지만, 10년 후에 재발할 가능성도 25%에 달해 유방암의 경우 5년이 지나도 완치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자식의 구루병 치료를 위해
탈북자 B씨는 처가가 북한 내 소위 잘나가는 집안이었다. 부인이 탈북을 반대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럼에도 B씨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아들의 구루병 때문이었다. B씨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 해외 근무 연장을 요청했지만, 북한 당국은 일축했다.
구루병은 다리와 등이 휘는 질환이다. 발병 원인에 따라 그 증상이 조금씩 다르다. 구루병의 원인으로는 비타민D 결핍, 저체중 조산, 인산 부족 등이 있다. 가장 흔한 구루병의 원인은 비타민D 결핍이며, 이 경우 다리가 ‘O’자 형으로 휘거나 치아에 손상이 생기고, 성장이 늦어지기도 한다. 칼슘과 인의 대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비타민D가 부족해지면 골격이 약해지고 점차 뼈가 휘게 되는 것이다. B씨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귀순을 결행했다”고 했다.
탈북자 A씨와 B씨는 기본적으로 북한 의료체계와 의료진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의료계에 따르면 일부 북한 의료진은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지만, 북한의 보건의료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통일보건의료학회에 따르면 2012년 기준 북한 산모 사망률은 인구 10만명당 76명으로 남한의 7배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1985년부터 2014년까지 30년간 구축한 북한 영아·아동 사망률 데이터 분석 결과, 북한 영아 사망률은 남한의 8.8배, 아동 사망률은 남한의 9.3배 높았으며 주원인이 조산(22%), 선천성 이상(13%), 감염성 질환(30%)으로 나타났다.
장마당에서 약을 사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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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의료기관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장마당(시장)’에서 약을 구입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마당에서는 항생제, 감기약, 아스피린, 코르니목사돌, 기생충 약, UN약, 북한제조약품, 러시아·중국에서 밀수해 온 약 등을 판매하고 있다. |
그러다 보니 북한 의료진은 환자로부터 치료와 처방에 대한 대가를 암암리에 받아 왔다. 비공식적 진료·치료 행위가 확대되면서 무상치료제 의미는 퇴색됐다는 얘기다. 북한은 무상치료를 내세워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표방해 왔다.
장비를 이용한 객관적 검사가 불가능하다 보니 환자의 호소가 질환의 진단과 심각성 판단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한다. 한 탈북자는 “환자로선 증상의 심각성을 호소해야 치료와 약물을 우선으로 받을 수 있어 과장해 증상을 호소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증언했다.
의료기관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약을 ‘장마당(시장)’에서 구입해야 한다는 전언이다. 장마당에서는 항생제, 감기약, 아스피린, 코르니목사돌, 기생충 약, UN약, 북한제조약품, 러시아·중국에서 밀수해 온 약 등을 판매하고 있다.
약의 가격은 장마당에 물품이 많으면 싸고, 없으면 비싸지는 식이다. 1차 의료체계인 동·리 지역의 진료소 역시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주민들이 장마당 등 비공식적 의료전달체계를 통해 진료와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
북한 정보에 밝은 소식통의 말이다.
“북한은 약을 대부분 장마당에서 구매한다. 그러다 보니 병과 무관하거나 병에 해가 되는 약임에도 ‘다른 사람이 사용했는데 건강해졌다’는 등 이상하게 소문이 나 이 이야기를 믿고 복용하는 사례가 많다. 요즘은 피부병에 약효가 좋다는 애기똥풀이 많이 팔리고 있다.”
서울대 통일의학센터는 “2000년대부터 번성한 장마당을 중심으로 의약품이 거래되고 있고, 북한의 공적인 보건의료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했다.
북한이탈주민을 진료해 온 이혜원 서울의료원 공공의료팀 과장은 “북한의 보건의료체계는 우리와 상당히 다르다”며 “2차 의료기관 격에 해당하는 북한 인민병원에서도 사실상 첨단 진단·의료 장비가 많지 않아 촉진·문진이 환자 진료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 고려의학(한의학)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고위 탈북 인사는 “김정은 전용 의료시설을 제외하면 실정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라며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이나 북송 미전향장기수 이인모 등이 해외 치료를 받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탈북자 C씨, D씨는 북한 당국이 가족을 인질로 잡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북한은 해외에서 근무하는 외교관이나 외화벌이 무역일꾼의 경우 선발할 때부터 충성심과 가족 성분 등을 철저히 따지고, 해외 부임 때는 가족 일부를 북한에 인질로 남겨놓는다. 2013년 4월 북한 김정은은 외교관, 해외상사 주재원 등에게 “동반 자녀 중 1명만 현지에 남겨두고 전원 북한으로 귀국시켜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교관과 상사 주재원 등은 “김정은이 큰 실수를 하는 것”이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냈다. 소환 자녀를 둔 북한 대사관 직원들은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는 것이 정말 김정은의 방침인가. 자녀가 귀국하는 날 눈물바다가 펼쳐질 것이 뻔하다. 이런 조처를 하도록 만든 놈은 나쁜 놈”이라고 토로한다고 복수의 대북소식통이 전했다.
북한 무역회사의 한 간부는 “뇌물을 주면서 애들 2명을 겨우 데리고 나왔는데 무조건 소환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며 하소연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소식통은 “소환 대상 자녀 간에 서로 잔류하기 위해 다투는가 하면, 부모들은 북한으로 보내야 할 자녀 선택을 놓고 고심하는 등 가정불화도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관 출신 탈북자의 이야기다.
“원래 북한에서는 해외에서 일할 경우 가족 중 한 명을 남겨둡니다. 인질이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아들 둘 중의 한 명은 인질이었고 아들 한 명만 데리고 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리고 나가 있는 아들은 구원됐지만, 북한에 있는 아들은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2007년 김정일도 ‘해외파견원의 4세 이상 자녀 전원 소환’을 지시했으나, 해당자들의 반발과 내부 혼란 등의 부작용 때문에 지시를 번복했었다.
북한의 폐쇄적인 사회구조, 천재들이 날개 펴는 데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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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수학 천재가 탈북한 것은 북한의 폐쇄적인 사회구조에서는 날개를 펴는 데 한계가 있음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
E씨의 말을 들은 한국 항공사 직원은 한국영사관에 연락했고, 영사관 측은 E씨에게 혼자 택시를 타고 홍콩 한국총영사관으로 올 것을 권했다. 외교관은 탈북 과정에 개입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탈북을 준비한 덕분에 E씨는 홍콩섬 애드미럴티의 홍콩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찾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한다. E씨는 영사관에서 2개월을 보냈다. 9월 24일 한국에 들어온 E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의 안위를 우려, “기자회견을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E씨의 부친은 수학에 재능을 보이는 아들을 위해 교사인 자신의 신분상의 불이익을 각오한 채 E씨의 탈북을 독려했다. E씨가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참가를 위한 출북(出北) 전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하자, 본인 뜻대로 하라며 미화 200달러를 손에 쥐여준 것이다.
그는 귀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2013년부터 매년 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했으나 4회 연속 은메달만 획득, 해외유학(금메달 획득 시 가능)이 불가해 귀순을 결심했다. 부모님과 대한민국에 보답하고 싶다.”
수학 영재인 E씨는 북한 교육체계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 학업으로 완전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도 교육에 관심이 많다. 도(道)마다 1개씩 운영하던 영재학교를 대폭 늘린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영재학교’에는 출신 성분이 좋지 않으면 입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영재학교’에 입학하면 평양에 있는 명문대학에 입학하기가 쉽고, 입대가 면제돼 경쟁이 치열하다. 북한의 군 복무는 10년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재학교’의 학비는 일반 고등중학교보다 훨씬 비싸다. 성적이 우수해도 입학을 포기하거나 입학해도 일반 고등중학교로 다시 옮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영재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성적을 받는 것도 ‘흙수저’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 북한 당국은 개인 과외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장마당을 중심으로 북한에 시장경제가 스며들면서 특별한 배경 없이도 부(富)를 축적한 신흥 부유층 등 소수 특권층의 자녀는 고액 과외를 받는다. 과외비는 대개 달러로 흥정한다고 한다.
그나마 ‘흙수저’가 성공할 길은 E씨처럼 탁월한 수학 실력을 발휘,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출전해 1등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수학 교육은 한계가 있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선전만을 위해 대회 준비만 시키는 것이다.
한국 대표단을 이끌어 온 송용진 인하대 수학과 교수(대한수학회 부회장)는 이같이 밝혔다.
“북한 청소년들은 수학 공부를 전투적으로 합니다. 대학 진학을 미루고 2년 동안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만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는 북한이지만 정작 ‘프로’의 세계인 국제 수학계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진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북한은 어려운 경제 여건 때문에 순수 수학을 연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기술 분야에 필요한 응용 수학을 연구한다.
북한의 폐쇄적인 사회구조도 수학 천재들이 날개를 펴는 데 한계가 있다. 북한 수학자들의 실력 격차가 국제적인 고립에서 기인했다는 이야기다. 학문 연구에서는 국제적인 교류와 최신 지식 습득이 중요한 만큼 폐쇄적인 사회구조가 걸림돌이 됐다는 것이다.
E씨가 “2013년부터 매년 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했으나 4회 연속 은메달만 획득, 해외유학(금메달 획득 시 가능)이 불가해 귀순을 결심했다”고 밝힌 것도 이런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여명 학교의 우기섭 전 교장은 북한의 교육실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북한의 교육은 정상이 아니다. 중·고등 과정을 마친 아이들이 구구단을 겨우 외우는 정도다. 일부 권력층 자녀 외에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과 얘기해 보면 학교에 선생님이 안 보인다고 한다. 학생, 교사 할 것 없이 당 관련 행사, 군사 노동 등에 동원되다 보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
우 전 교장은 2004년 이 학교 설립 발기인이었고 초대 교장을 맡았다.
올해 국내 입국 탈북자 수 김정은 체제 이후 최저 기록
북한 내 엘리트층의 탈북 러시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통과(2016년 12월 9일) 직전 끊겼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엘리트층이 탈북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실제 탈북한 엘리트층이 없거나, 있어도 공개하지 않을 것인데 ‘전자(前者)’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한다는 지적을 받는 정부가 들어섰는데, 목숨 걸고 탈북할 엘리트층은 없을 것이다.
일반 탈북자 수도 급격히 감소했다. 한때 연간 3000명 선에 달하던 탈북 국내 입국자 수가 올해 김정은 체제 이후 최저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박병석(朴炳錫)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통일부에서 제출받아 30일 공개한 자료를 보면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다음해인 2012년부터 탈북자가 줄어 올해 8월 말 기준으로 전년 같은 달(779명) 대비 9.7%가 줄어든 703명이 입국했다.
지난해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 수는 총 1127명(남 188명, 여 939명)이었다. 아직 올해 하반기 탈북자 수를 포함한 총 탈북자 수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지난해 8월 당시 탈북자는 779명으로 올해 동월 기준 703명보다 76명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통일부는 탈북자 감소 추세 원인으로 국경지역의 통제 강화, 중국 당국의 강제북송과 탈북을 도와주는 브로커 비용이 전년 대비 약 40% 상승한 점을 들었다. 일각에서는 김정은 체제가 안정됐고, 남북 평화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에 엘리트층 탈북이 전무(全無)하고, 일반 탈북자도 감소한 것이란 장밋빛 청사진도 제시한다.
북한이 좋아졌다고?… 체제 불만 노래 유행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3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3대 ‘세습 독재자’가 ‘노련한 외교’ 솜씨로 일약 한반도 ‘평화의 사도’로 둔갑한 것이다. 독재자의 본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일까. 북한 내부에서는 여전히 ‘김가 우상화 및 체제선전 가요’를 개사해 부르면서 체제 불만을 표출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북한 보위성(옛 국가안전보위부·우리의 국정원에 해당하는 기구) 관계자는 “평양에서 여성 1명이 ‘가리라 백두산’(김정은 우상화곡)을 ‘가리라 남조선’으로 고쳐 부르다 처벌받았다”고 전했다. 북한 해외 상사원은 “‘그리움은 끝이 없네’(김정일 우상화곡)의 가사 중 ‘불타던 천만심장’을 ‘메마른 천만심장’으로 부르는 북한 주민이 많다”고 했다.
한 고위 탈북자는 “회령시 장마당에서 ‘우리 당이 고마워’를 ‘노동당이 너무해’로 비꼰 낙서가 발견, 동네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고 했다. 전직 정보당국 고위 관계자는 “북한 학생들이 ‘내가 지켜 선 조국’의 ‘금잔디를 밟으며 첫걸음 떼고’를 ‘금잔디 밟자니 신발이 없어’로 바꿔 부르다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북한 주민들이 김정일, 김정은 우상화곡을 개사해 부르는 것은 2016년 중순부터 쭉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 김정은은 감시 카메라를 증설하는 등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 강화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정보당국 관계자의 이야기다.
“각 시, 도, 군 소재 각급 기관청사에 CCTV가 설치됐다. 인민들의 감시, 통제를 강화하여 사회 내부 변화와 동요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