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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대회 평양 방문기

태극기 배지 착용, 사진 촬영에 아무 제지 없어

글 : 임헌조  범시민사회단체연합 공동대표 겸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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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이 親美로 돌아섰지 않았습네까? 우리를 고통에 빠트리거나 억압하지 않는다면 親美든 反美든 그게 중요하겠습네까?”(안내원)
⊙ 집체극 ‘빛나는 조국’에서도 反美구호 사라지고, 트로트 메들리 들어가
⊙ 호텔 밖으로 나가 주민들과 접촉하는 것은 여전히 통제
‌⊙ 단고깃집 간판 본 후 北 안내원에게 ‘동물권’ 얘기해 주자, 다음날 “근데, ‘동물권’은 너무하는 거 아닙네까?”

林憲祖
1966년 출생. 인하大 섬유공학과 졸업,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석사 / 뉴라이트전국연합 사무처장, 선진통일연합 공동대표 역임. 現 범시민사회단체연합 공동대표 겸 사무총장, 사단법인 민생경제정책연구소 이사
평양에서 참관한 집체극 ‘빛나는 조국’의 한 장면. 평화·번영·통일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사진=임헌조
  그리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10년 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아테네는 슬럼화되고 있었다. 2000년 전 화려했던 그리스문명이 포퓰리즘으로 망한 후, 오늘날 또다시 포퓰리즘으로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착잡한 마음을 안고 귀국한 직후 정부 당국자의 전화를 받았다. 평양에 가보지 않겠느냐는 전화였다.
 
  “평양이요?”
 
  “네, 이번에 민족통일대회가 평양에서 열리는데 보수 시민단체도 참여하면 좋을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잠시 망설였지만, 가기로 결정했다. 보수 성향의 한국교총 하윤수 회장 및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엄기호 목사와 이영훈 목사도 간다고 했다. 방북(訪北)을 결정한 이후 머릿속을 내내 맴도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과연,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 들어가서 보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남북 간, 미북 간 정상(頂上)회담이 연이어 성사되면서 한반도 정세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놓은 적이 없다. 그것이 평양 방문에 동의한 주요한 동기였다. 물론 제한적 방북일정과 쇼윈도 같을 평양시의 일면을 보고 섣부른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북한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다시 싸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공군수송기를 타고 북한으로
 
방북단 일행은 어쩌면 대북침투훈련에 이용했을지도 모르는 공군수송기를 타고 북한을 다녀왔다.
  10월 4일 목요일 오전 6시10분, 경복궁 동편 주차장에 방문자들이 모였다. 방문증과 안내서 및 이름표를 받았다. 쌀쌀한 날씨가 옷깃을 여미게 했다. 저마다 어울려 상기된 얼굴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구는 5년 만에, 누구는 10년 만에 방북하는 것이라며 자못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 낯익었다. 방송에서 봤거나 과거 악연(?)이 있던 인물들이었다. 뉴라이트 및 보수우파 운동 과정에서 논평과 성명서 등을 통해 치고받던 좌파 인사들이 다수 있었다. 보수 인사들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불참을 선언, ‘민족통일대회’지만 반쪽 행사가 된 것이다.
 
  총 160명이 방문단을 구성했다. 급하게 일정이 확정되면서 공군수송기 3대가 배치되었다. ‘공군수송기라….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 공군기가 평양을 향해 날아간 적이 있었던가?’
 
  “낙하산을 하나씩 배급해야 하는 거 아냐?”라는 농담 섞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특수부대원들이 낙하산을 메고 적진(敵陣)을 향해 날아가는 훈련을 했을지도 모를 수송기였다. 전쟁 영화에서나 봤던 공군수송기의 내부는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전쟁물자와 군인을 싣던 공군기가 민간인을 태우고 휴전선을 넘고 있다니, 하나의 메타포(metaphor)였다. 이것이 긍정의 사인(sign)인지, 아니면 불안의 전조(前兆)인지 누가 알 것인가. 이 상징적 은유는 평양 방문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한 시간을 날아 우리는 평양공항에 내렸다.
 
 
  사진 촬영 제지 없어
 
민족통일대회 행사장 앞에서. 왼쪽부터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윤순철 경실련 사무총장, 필자.
  평양은 맑았다. 옅게 깔린 구름과 청명한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오랜만에 온 사람들이나 처음 방문한 사람들이나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네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북한 측 인사가 공군기에서 내리는 방문 인사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넸다. 제복 차림의 북한 군인들과 공항 직원들이 우리를 안내했다. 평양공항은 여느 공항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 지방 공항 규모였지만, 제3터미널까지 있었고 깨끗했다. 활주로에는 북한 여객기가 여러 대 있었다. 타(他)국적기는 보이지 않았다. 터미널도 한산했다.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버스에 나눠 탔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2박 3일 동안 우리가 묵을 고려호텔이었다. 쌍둥이 건물이 다리로 연결된 고층 호텔이었다. 한국의 지방 호텔 수준이었다. 2인 1실로 방 배정을 했다.
 
  나와 함께 방을 쓰게 된 분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강영식 사무총장이었다. 강 사무총장은 남북교류가 한창일 때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
 
  처음 방문한 나로서는 그의 경험이 주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강 사무총장에 의하면 예전에 북한은 태극기 배지를 일부 대표단 이외에는 달지 못하게 했으며, 사진 촬영도 굉장히 제한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달랐다. 우리 방문단은 사전에 통일부에서 나눠준 태극기 배지를 왼편 가슴에 달았지만,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사진 촬영에도 제지나 제한이 없었다.
 
 
  사라진 反美구호
 
차창 밖으로 보이는 평양 려명거리의 모습. 평양 거리에서 反美구호는 보이지 않았다.
  평양 거리는 사회주의 체제답게 선전·선동 구호로 넘쳐났다. ‘당을 옹호하자’ ‘만리마 운동을 벌이자’ ‘수령에게 충성을 다하자’는 선전문구들이 차창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반미(反美)구호는 발견할 수 없었다. 사라진 것이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도 놀라는 기색이었다.
 
  민족통일대회 행사 중 발언들과 집체극(集體劇) ‘빛나는 조국’ 및 기타 환영 공연에서도 반미 언동은 단 한 구절, 한마디도 없었다. 버스를 같이 타고 일정을 함께한 북한 측 인사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거리에도 공연 내용에도 반미구호가 없다.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답변이 거북하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양해를 구하면서 말을 이었다. “베트남은…”이라고 말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베트남이 반미에서 친미(親美)로 변한 것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방북 전에 통일부에서 받은 사전(事前) 교육에서 불필요한 논쟁이나 자극적인 언사는 피하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우(杞憂)였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베트남이 친미로 돌아섰지 않았습네까? 우리를 고통에 빠트리거나 억압하지 않는다면 친미든 반미든 그게 중요하겠습네까?”
 
  국제문제 전문가나 북한 전문가들로부터 ‘북한이 친미로 돌아서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걸 직접 확인하기는 처음이었다. 방북단 일원인 좌파 인사 중 한 명은 “북한이 실용주의 노선으로 회귀했다”고 평했다. “어느 나라건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최우선일 수밖에 없고, 이념보다는 경제와 실용을 택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이 체제 보장 및 실질적 위협의 제거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반미보다는 친미로 선회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관측도 가능하다.
 
  ‘되돌릴 수 없는 완전한 북핵 폐기’가 추진되면 미북 간에 대사급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얼마 전 김정은이 얘기한 것처럼 주한미군은 철수하는 것이 아니고 평화유지군으로 한반도에 주둔하게 될까? 그것이 정말 북한의 진심일까? 갖가지 의문이 떠올라 머리를 어지럽혔다.
 
  나는 일행 중 몇몇에게 “북한이 반미에서 친미로 돌아서면, 남한에서 활동하는 좌파 운동권들도 반미노선을 접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뜻밖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듯했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이미 남한의 좌파 진영 내에서는 고민이 시작됐다. 한반도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은, 그 방향과 세기에 따라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양극단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극좌(極左)는 반미구호를 전면에서 외치며 활동하다가 끈 떨어진 연처럼 북한의 변화에 황당해할 것이다. 극우(極右)는 북한을 군사적으로 쳐야 마땅한 미국의 태도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 징조는 나타나고 있다. 연일 미국을 칭송하던 어느 우파 논객은 미북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미국’ 대신 ‘양키’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다.
 
 
  외출이나 주민과의 접촉은 여전히 통제
 
평양 과학기술전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 과거에 비해 통제가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주민들과의 자유로운 접촉은 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방북했던 남한 좌파 인사들의 언행을 통해 북한과 평양을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 북한을 왕래했었기 때문에 변화의 바람에 민감했다. 사라진 반미구호에 대해 여러 차례 얘기가 나왔다. 조심스레 “북한은 친미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었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반미노선을 고집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카메라 셔터를 수시로 눌러대도 촬영을 제지하지 않는 북한의 태도 변화에 대해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누구는 “예전에는 평양을 떠날 때 일일이 카메라를 체크하여 사진들을 삭제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900여 장의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했고 가져왔다.
 
  그러나 활동의 자유까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호텔 밖으로 자유롭게 나가 다닐 수 없었다. 북한 주민과 자연스럽게 만나거나 대화 나누는 것을 통제한 것이다. 모두들 호텔 밖 5분 거리에 있는 평양역에 가고 싶어 했다. 그동안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예전과 비교해 많이 부드러워지고 변화를 체감한다”고 했지만, 어쩌면 여러 차례 온 사람과 처음 온 내가 느끼는 게 큰 차이가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을 던졌다.
 
  “다음에 올 때는 자연스럽게 평양역에 갈 수 있을까요?”
 
  그들은 “글쎄요. 그러길 바라죠”라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돌아오는 날 오전 식물원에 갔다. 일정에 있던 행사였다. 식물원을 돌아보는 일정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식수(植樹)한 나무 앞에서 추모식을 갖기 위한 것이었다. 노무현재단 관계자가 “나무를 중심으로 모여달라”고 요청했지만, 일부는 멀찍이 떨어져 그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편에서는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노무현재단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행사였을지 모르지만, 나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속은 듯한 기분이었다.
 
 
  집체극 ‘빛나는 조국’
 
집체극 ‘빛나는 조국’의 한 장면. 교육·복지·과학기술 발전, 남북평화 등을 담은 구호들도 있었지만, 군사적인 구호들도 여전히 있었다.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초연했던 집체극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서 다들 관심이 높았다. 능라도 경기장엔 이미 평양 시민들이 가득했다. 수만 명이 넘는 관중이 우리를 반겼다.
 
  나는 내심 긴장했다. 그 이유는 한 가지 기억 때문이었다. 2005년쯤으로 기억한다. 학생운동·노동운동을 하다가 전향해서 뉴라이트운동을 하던 시기였다. 하루는 운동권 후배 몇이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북한에 다녀왔고 아리랑 집체극을 봤다고 했다. 공연 도중 반미구호를 외치던 얘기, ‘눈물 뿌리며 격하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를 하던 후배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선배, 선배는 뉴라이트로 전향했기 때문에 통일이 되면 숙청될 수밖에 없어요.”
 
  그는 “북한 중심으로 통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선배만큼은 우리가 탄원하여 숙청에서 제외될 수 있도록 선처를 요구할게요. 앞으로 제대로 사세요.”
 
  말문이 막혔다. ‘하나의 집체극이 이 정도로 커다란 영향력이 있구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대로 살기 위해 전향했다”고 말했지만,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당시 당황했던 경험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던 것이다. 어깨를 돌리면서 긴장을 풀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평가하기로 했다. 사전에 너무나 많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대단한 규모와 일사불란한 집단체조 및 카드섹션에 입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특별한 감동은 없었다.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한 계몽극이라는 느낌이었다.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고 과학기술 혁신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왔다’ ‘이제 모두가 하나 되어 번영의 통일조국을 건설하자’는 주제였다.
 
  공연 마지막 부분에 특별코너를 넣어 남한의 전통가요(트로트)를 메들리로 부르는 장면은 독특했다. 이것은 예전에는 없던 부분이라고 했다. 부모님 세대의 향수(鄕愁)를 자극하는 구성진 노랫가락에 중국 조총련에서 온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번 민족통일대회에는 일본과 중국 및 캐나다 등에서도 조총련 회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아마도 이들을 위한 구성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평화·번영·통일
 
‘빛나는 조국’ 공연이 끝난 후 집체극을 관람한 평양 시민들은 방북단에게 인사를 보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카드섹션은 ‘평화’ ‘번영’ ‘통일’ 세 단어였다. 나는 이 글자들의 배치에 주목했다. 북한은 이 단어의 순서대로 로드맵을 정한 것은 아닐까. 통일 후 번영이 아니라 일정하게 경제발전을 달성하여 번영을 이룬 후 통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읽혔다. “자존심이 센 북한이 격차가 큰 현재 상황에서 당장 통일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일행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남한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들이 봇물 터지듯 남쪽으로 밀려들어 올 것이라고 걱정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 통일의 과정은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멀리 질서정연하게 관람하는 평양 시민들이 보였다. 함께 방북한 주변 인사들을 봤다. 차분해 보였다. 공연 관람 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를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집체극의 스케일과 일사불란한 연출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다. 반미구호가 사라지고 계몽적 내용이었기 때문에 남한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감흥이 덜 했던 것 아닐까.
 
  거리의 구호들과 선전물들은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수십 년간 접하며 익숙해진 구호가 만성화되면 보다 효과적인 장치가 필요했을 터이고, 아마도 집체극을 통한 자극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공연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연습하는 사람들이나 완성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적 통일과 결의를 다지는 ‘내부용’으로서의 역할이 더 클 거라는 생각을 했다.
 
  공연이 끝난 후, 북측 인사가 다가왔다.
 
  “어땠습니까? 감동하셨습네까?”
 
  그러면서 조심스레 불평을 늘어놓았다.
 
  “제 옆자리에 남측 방문단 청년이 있었는데 공연 도중 잠을 자더라고요. 어찌 잠을 잘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갑네다.”
 
  순간 나도 당황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생각해 봤다. 이번 방북단에 청년, 대학생 몇이 동행했는데, 아마도 그들 중 하나일 것이다. 누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여 공연을 보았으나, 그 젊은이한테는 공연장의 음악과 폭죽소리가 따분한 자장가로 들렸던 것이다. 이해할 수 있었다. 요즘 남한 젊은이들에게 소위 운동권식 계몽극은 철 지난 유행일 것이다. 이미 대학가에 학생운동권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겐 도무지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내용이지 않았을까.
 
  젊은 세대들을 모아 통일을 주제로 토론을 해보면 사실상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큰둥한 반응까지 보인다. 아무튼 이번 해프닝은 세대 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경험 중 하나였다.
 
 
  단고깃집에서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민족통일대회. 북한측 인사들과 160명의 국내 정당·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평양 도심 한복판을 지날 때 단고기식당 간판이 눈에 띄었다. 개고깃집이다.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다. 북측 인사에게 “자주 먹느냐”고 물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맛도 맛이지만, 영양 만점”이라면서 “한 번 먹어봐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이제 서울에서는 개고깃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남한에서는 심지어 진보 단체들까지 인권뿐만 아니라 ‘동물권(動物權)’까지 주장하여 더 난감해졌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동물권’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오전 행사를 위해 버스에 탔다. 어제 대화를 나눴던 북측 인사가 옆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동물권’은 너무하는 거 아닙네까?”
 
  아침부터 생뚱맞았다. 어쩌면 밤새 ‘동물권’이라는 말이 그의 머리를 괴롭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동감”이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심지어 개헌운동 과정에서 대표적인 진보 단체들이 동물권을 기본권에 넣을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만약 통일이 되어 통일헌법을 만들 경우, 동물권과 관련해서는 북한과 보수 진영이 하나가 되어 반대해야겠다”고 익살을 부렸더니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동물원에서
 
평양 중앙동물원 입구. 중앙동물원과 자연박물관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마지막 날, 태풍 때문에 돌아오는 일정이 늦춰졌다. 급하게 새로운 일정이 만들어졌다. 중앙동물원을 관람하게 되었다. 2박 3일 동안 철저하게 연출된 공간에서 평양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동안 남측 방문단은 평양 일반 시민들과 스치며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 아마도 사전에 통제를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자연박물관과 동물원에 들어가니 구경 온 평양 시민들과 학생들로 넘쳐났다. 갑작스런 일정에 평양 시민들의 통제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뭔가 화면 뒤의 진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상상과는 달랐다.
 
  일단 시설이 너무 좋았다. 여느 선진국의 자연사박물관이나 동물원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날씨가 좋을 경우 평균 하루에 4000명이 방문한다고 했다. 동물원 정문 앞 커다란 주차장엔 여러 대의 버스가 정차하여 사람들을 싣거나 내리고 있었다.
 
  여느 동물원이 그렇듯이, 학생들이 신기한 듯 돌아다니며 전시물과 동물들을 구경했다. 선생님을 따라 줄 맞추어 가는 유치원생들이 곁을 지나갔다.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도 보였다.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마치 어린이대공원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앞서 언급한 평양역도 조만간 자연스레 다닐 수 있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향에 대하여
 
평양공항은 우리나라 지방 공항 수준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친해진 북측 인사는 내가 뉴라이트로 전향한 것이 신기한 듯 관심을 가졌다.
 
  “한 번 자리 잡힌 사상이 변한다는 게 가능한 일입네까?”
 
  아마도 공식적으로 전향하여 활동한 뉴라이트 인사로서는 내가 처음 방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주체사상을 공부해 봤느냐”고 묻기에 내 경험을 얘기해 주었다.
 
  1986년 직선제 개헌투쟁 과정에서 투옥되어 1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당시 주사(主思·주체사상)에 정통한 정치범 중 한 명이 여러 날 동안 장시간에 걸쳐 교육을 했었다. 다들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지막 날에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교육이 먹혀들자 신이 난 그 정치범은 자신의 경험을 한 가지 덧붙였다. “하루는 몸살을 깊게 앓아 헛것이 보인다며 신음하던 아내의 이마에 주체사상을 갖다 대고 ‘귀신아 물러가라!’ 했더니 병이 사라졌다”고.
 
  그러자 “에이 미친놈아!” 하면서 다들 돌아섰다.
 
  이 얘기를 해주자 북측 인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황당해했다. 그렇다. 그 시절, 주사든 마르크스주의든 제대로 된 운동권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전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기하게 되면 사상논쟁으로 빠질 것 같아 더 깊게 나아갈 수는 없었다. 다행인 건, 그들이 내가 뉴라이트나 보수라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친절했다는 점이다. 그는 공항까지 배웅하며 “다음에 올 때는 다른 뉴라이트, 보수 인사들과 함께 오라”고 했다.
 
  어두워진 평양공항에서 대한민국 공군기를 타고 서울로 향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북한은 변하고 있는가?’ ‘보수우파는 항상 의심만 하면서 한반도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뒤쫓아만 갈 것인가?’
 
  합리적인 의심이야 당연히 필요하지만, 역사의 주인공은 의심하는 자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자가 아니던가. 나는 획기적으로 상황이 바뀌고 북한의 제재가 풀리면 많은 보수 인사와 우파 활동가들이 남북 간 민간교류에 앞장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이 가까워 오면서 노란 불빛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어느 때보다 정겨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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